2021년 3월 6일 토요일

1950년대 한국 공군 증강과 제트기로의 전환

 계속 일에 치이면서 살다 보니 블로그에 글을 못 올린지 한참 됐습니다. 작년 12월쯤이면 시간 여유가 생길 것 같았는데 그렇지도 않네요^^ 가끔 안부를 묻는 분들도 계시니 생존 신고(?) 겸해서 제가 2019년 공군본부 행사에서 발표했던 글의 일부분을 고쳐서 올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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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은 공군력의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지만 공군력의 중요성을 보여준 전쟁이기도 합니다. 한국 정부와 공군본부는 전쟁의 경험을 바탕으로 공군 양적 증강과 현대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했습니다. 북한 공군은 한국전쟁 기간 중 MiG-15 전투기를 보유하여 공군기를 제트기로 전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대응하려면 한국 공군도 제트기가 필요했죠. 1952년부터 1954년 한미합의의사록 체결 시 까지 한국 정부는 공군 현대화를 위해 미국 정부에 대규모의 군사 원조를 요구합니다. 이 시기 한국 정부와 한국 공군의 군사원조 요구는 한국전쟁을 통해 축적한 공군 운용 경험과 기획능력에 기반했습니다.

공군본부는 한국전쟁 중인 1952년 공군력 증강 3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미국 정부에 이를 승인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미국 국방부는 한국 공군의 3개년 계획에 반대했습니다. 19521022일 로벳(Robert A. Lovett) 국방부장관은 애치슨(Dean Acheson) 국무부장관에게 보낸 서신에서 한국 정부가 요청한 공군력 증강 3개년 계획을 반대하는 입장을 명확히 합니다. 그는 한국 공군본부의 계획이 비현실적이고, 공군력 증강에 필요한 인력을 수급하기도 어렵다고 평가했습니다. 로벳 장관은 휴전협정이 체결된 이후 한국 공군의 규모를 현 수준에서 유지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한국 공군이 제시한 3개년 계획을 거부하는 대신 미 제5공군예하 6146항공기지부대를 미공군고문단으로 개편하는 방안을 제시했습니다.1)

미국 정부 당국자들의 부정적인 반응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는 공군력 증강을 위한 노력을 계속했습니다. 손원일(孫元一) 국방부장관은 1953107일과 21일에 미국방부에 다시 군사원조를 요청 합니다. 손원일 장관이 제시한 공군 증강 계획도 기본적으로 1952년에 수립된 공군력 증강 3개년 계획을 바탕으로 했습니다. 손원일 장관은 한국 공군의 규모를 5개 전투비행단, 2개 폭격비행단, 1개 정찰비행단, 1개 수송비행대대로 증강하고 동시에 제트기를 도입하고자 했습니다.2) 손원일 국방부장관은 195416일 미합참의장 래드포드(Arthur W. Radford) 해군 대장에게 보낸 서한에서 북한의 공군력과 해군력이 한국군을 능가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북한군에 대한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한국 공군과 해군에 대한 원조를 늘려줄 것을 요청했습니다.3) 이승만 대통령도 1954726일부터 813일까지 미국을 방문하여 경제 및 군사원조 문제를 논의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육군 뿐 아니라 해군과 공군에 대한 대대적인 군사원조를 요구했습니다. 19548월 군사원조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한 이형근(李亨根) 합동참모총장과 정일권(丁一權) 육군참모총장은 북한 공군이 255대의 제트전투기와 40대의 Il-28 폭격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4)

하지만 미국 정부는 한국 정부의 공군력 증강 요구에 부정적인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이미 20개 사단에 달하는 한국 육군을 지원하는데 방대한 예산이 소요되고 있기 때문이죠. 여기에 제트전투기를 추가로 원조할 경우 늘어나는 유지비용을 미국 정부가 부담해야 했습니다. 대한 군사원조 규모를 평가하기 위해 1954년 방한한 밴 플리트 사절단은 한국 공군의 규모를 1개 전투비행단으로 제한한다는 가정 하에 항공기 유지비용을 다음과 같이 산정했습니다. 10전투비행단에서 F-51F-86을 함께 운용할 경우 1957년 회계연도에 F-51 전투기 48대를 운용하는데 연간 1,036,800달러가 소요될 것으로 평가했습니다. 같은 기간 F-86 35대를 운용하는데 소요되는 비용은 연간 1,764,000달러가 될 것으로 평가했습니다. F-86 전투기 1대를 1년간 운용하는데 소요되는 비용은 50,400달러로 F-51 전투기 1대를 1년간 운용하는데 소요되는 21,600달러에 비해 2배 이상 많았기 때문이죠.5)

미국 정부와 군부 내에서는 한국 공군의 규모에 대해 이견이 있었으나 한국 정부가 요구한 것 보다는 작은 규모를 선호했습니다. 1954331일 미 합동참모본부는 한국공군의 전투부대 규모를 1개 비행단(3개 대대)으로 유지하고, 한국 공군의 전력 부족을 미국 공군으로 보완하면 된다는 결론을 냈습니다. 또한 한국 공군 병력을 9,000명으로 삭감하도록 지침을 내립니다. 그러나 한국 공군에 제트 전투기를 원조할 필요성은 인정했습니다.6)

미국 합동참모본부와 달리 현지의 미군 당국은 합참의 지침이 부족하다고 판단했습니다. 한국 정부의 군사원조 요구를 접수한 주한미군사고문단과 극동공군사령부는 1954212일 다음과 같은 내용을 미 합동참모본부에 보고했습니다. 극동공군사령부는 한국 공군의 규모를 6개 전투비행대대(2개 비행단), 1개 혼성비행전대, 1개 항공전술통제대대, 1개 전술통제전대, 1개 통신전대로 증강할 것을 건의했습니다. 또한 군사원조예산의 제약을 고려해 한국 공군에 제트기를 지원하는 것은 1956년 회계연도로 연기할 것을 건의 했습니다.7)

미국 극동공군 사령부는 1954611일 약간 수정된 방안을 제시합니다. 미국 극동공군사령부가 제시한 방안은 1956회계연도 1분기와 3분기에 먼저 50대의 F-86을 지원해 2개 전투비행대대를 제트기로 개편한 뒤 1957~1958회계연도에 추가로 4개 전투비행대대 분량의 F-86을 제공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또한 전천후 요격능력을 갖춘 F-94B 1개 대대(25)1956회계연도 3분기에 원조하여 한국 공군을 총 7개 대대의 제트전투기 대대로 증강하도록 제안했습니다. 원조할 비행기는 극동공군사령부 예하 부대가 보유한 중고 기체를 양도하는 것으로 했습니다. 또한 전투기부대의 증강에 맞춰 한국 공군의 총병력을 1958회계연도 4분기 까지 장교 1,973, 부사관 및 사병 17,989명 등 총 19,962명으로 증강하도록 제안했습니다.8) (John E. Hull) 미 극동군사령관은 극동공군사령부의 건의서를 참고하여 1954720일 미 국방부장관에게 보낸 비망록에서 한국 공군을 제트전투기 2개 비행단(6개 비행대대)을 포함한 10개 대대로 증강하고 병력을 20,000명으로 증강하는 방안을 건의합니다.9)

대한군사원조의 적정 수준을 평가하기 위해 미국 정부가 파견한 밴 플리트(James A. Van Fleet) 예비역 대장은 한국 공군을 점진적으로 증강하는 방안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미 합동참모본부가 결정한 한국 해군과 공군의 규모는 적절한 수준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또한 한국 공군의 전력은 제한적인 수준으로 유지하고 실질적인 공격력은 미국 공군에 의존하도록 하는 방안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밴 플리트도 한국공군이 제트기로 전환하는 것을 서둘러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1956년 회계연도까지 한국 공군에 제트 전투기를 원조할 수 있도록 예산안을 편성해야 한다고 건의합니다. 또한 한국 공군이 1개 제트전투기 비행단을 성공적으로 운용한다면 1개 비행단을 추가로 편성하도록 원조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습니다.10) 밴 플리트는 한국 공군의 F-51 비행단을 제트전투기 비행단으로 전환하는데는 최소 1년의 충실한 훈련이 필요하다고 평가했습니다.11)

1953년부터 1954년 까지 한미 양국간에 논의된 한국 공군의 적정 규모는 다음과 같습니다.


한국측 요구

극동군 사령부 추천안

미 합참의 목표

밴 플리트 사절단 추천안

전천후 전투기 대대

1

1

3

3

주간 전투기 대대

6

6

전투폭격기 대대

6

전술 정찰 대대

4

1

0

1

경폭격기 대대

2

0

0

수송기 대대

2

1

1

1

항공관제 대대

1

1

0

1

총 계

22

10

4

6

[출처: “Report of Ambassador James A. Van Fleet: Korea”(1954. 7. 23), RG218 Entry UD50 Box13, II-9]


한미합의의사록체결을 앞둔 시점에서 미국 정부의 일부 인사들은 대한군사원조에 소극적이었습니다. 그 원인 중 하나는 당시 이승만 정부의 대외정책에 있었습니다. 이승만 정부는 대외적으로는 북진 통일을 주장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일본에 대해서도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죠. 덜레스 미국 국무부장관은 1954726일 백악관에서 열린 회의에서 한국 정부가 요구하는 제트전투기와 해군함정을 지원하는 방안에 부정적인 입장을 드러냈습니다. 그는 한국 공군에 제트전투기를 지원할 경우 대북 무력 도발에 사용할 위험이 있으며, 한국 해군에 호위구축함(Destroyer Escort)을 제공한다면 이승만 라인에서 일본 어선을 몰아내는데 쓸 것이라고 우려했습니다. 그는 한국 공군에 제트전투기를 원조하는데 반대했습니다. 또한 한국 정부가 일본 정부와 어업 문제에 대해 합의하기 전에는 추가 군사원조를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기까지 합니다. 덜레스 장관의 의견에 반대한 것은 미국 군부였습니다. 미국 합참의장 래드포드 제독은 한국 공군이 한국전쟁 기간 중 탁월한 공훈을 세웠기 때문에 제트전투기를 지원 받을 자격이 있다고 한국의 입장을 옹호합니다.12)

최종적으로 19541117일 한미 양국 정부간에 체결된 경제 및 군사원조에 관한 한미간 합의의사록(이하 한미합의의사록)에서는 1955년 회계연도 예산으로 지원할 한국 공군의 규모를 1개 전투비행단(3개 비행대대), 총병력 16,500명으로 결정합니다. 또한 미국 정부는 1955년 회계연도에 T-33 훈련기 10, F-86F 전투기 30대 등 제트기를 원조하고 추가로 1956년 회계연도에 55대의 F-86F를 제공하기로 했습니다.13) 이로서 한국 공군은 제트전투기를 도입하여 북한 공군에 대응할 능력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한미합의의사록체결과 함께 한국 공군의 제트기 도입 계획에 가속도가 붙습니다. 19541129일에는 오산에서 한미군사회담 공군분과위원회가 열렸습니다. 이 회의에서 미국 대표단은 한미합의의사록에 따라 1개 제트비행단을 창설하고 C-46 수송기를 제공하기로 합니다.14) 한미합의의사록체결 이후 한국 공군의 대미 군사원조 요구는 한미합의의사록에 규정된 범위 내로 제한되었습니다. 1955225일 한국공군본부가 작성한 1956회계연도 공군운영계획안은 이 점을 잘 보여줍니다. 이 계획안의 골자는 195571일부터 시작되는 1956회계연도의 목표를 공군병력 16,500명의 한도 내에서 F-86F 전투기 도입 등 제한적인 현대화를 추진하는 것 이었습니다. 한미합의의사록은 한국 공군의 병력 상한을 16,500명으로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군의 독자적인 작전 능력에 제약을 주었습니다. 공군은 병력 부족으로 인해 장거리 통신망, 방공, 군 의료 등을 육군의 자산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한국 공군은 제한된 병력을 비행부대 유지, 이를 직접적으로 지원할 지상시설 유지에 집중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15)

제트전투기를 운용할 인원에 대한 교육은 한미합의의사록이 정식으로 체결되기 전 부터 실시됐습니다. 일부 조종사는 미국 본토에서 F-86 운용교육을 받았으나 대부분은 한국에서 미 공군의 지원을 받아 교육을 실시했습니다. 미국 파견 교육을 받은 조종사는 1954년에 2, 1955년에 30, 1956년에 40, 1957년에 25명이었습니다. 한국 내에서의 제트기 전환 교육은 1954129일 오산에서 시작됐습니다. 국내 교육을 통해 1957년 말 까지 100명의 조종사가 제트기 교육을 수료했습니다. 정비사 교육은 195484일 대구 K-2 기지에서 시작됐습니다. 최초의 교육 대상은 49명이었습니다. 이어 19551월에 88, 동년 11월에 96, 19571월에 342명을 대상으로 정비 교육이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1957년 까지 199명의 정비사가 해외파견교육을 받았습니다.16)

인력 양성과 함께 1955827일에는 제10전투비행단이 F-86F 전투기 14대와 T-33 훈련기 9대를 미공군으로부터 인수했습니다. 1956년에는 F-86F 68대가 추가로 인도되어 같은 해 41일 제10전투비행단이 제트기로 기종 전환을 완료했습니다.17) 전투기의 제트화와 함께 지원 전력도 강화되었습니다. 1955429C-46D 수송기 6, 같은 해 10월 동형 수송기 11대가 도입되어 제5혼성비행단 예하 제5공수전대로 발족했습니다.18)

195881일에는 김포기지에서 제11전투비행단이 창설됐습니다. 초대 단장은 공군본부 작전국장으로 있던 장지량(張志良) 대령이었습니다. 11전투비행단은 F-86F 기종을 장비하고 전술공군작전을 수행하는 것을 주 임무였습니다. 11전투비행단은 예하에 제111, 112 전투비행대대, 11정비보급전대, 11기지전대, 11의무전대 등의 부대를 두었습니다.19) 11전투비행단은 1958125일 제10전투비행단과 제1훈련비행단에서 T-33 훈련기를 각각 1대씩 인수해 조종사 교육을 시작했고 같은해 1230일에는 최초로 F-86F전투기를 수령했습니다. 1959228일에는 제111전투비행대대가 F-86F 25대를 완편하여 편성을 완료했습니다. 112전투비행대대는 같은 해 730일 편성을 완료했습니다.20)


주석

1) 로벳이 애치슨에게 보낸 서신(1952. 10. 22), RG330 Entry17 Box11.

2) “Memorandum by the Joint Chief of Staff to the Secretary of Defense(Wilson)”(1954. 3. 31), FRUS 1952~1954, Vol.15 Korea part.2, 1783.

3) JCS1776/424 Appendix, Korea Sec.144”, RG218 Entry UD19 Box27 Korea 1954~1956, 2

4) “General Lee, Chairman, Korean Chiefs of Staff; and General Chung Il Kwon, Chief of Staff, Korean Army visit with Admiral Radford”(1954. 8. 23), RG218 Entry UD50 Box13 Admiral Radford, 1.

5) Report of Ambassador James A. Van Fleet Korea”(1954. 7. 23), RG218 Entry UD50 Box13 Admiral Radford, TAB D.

6) “Letter from CINCFE on the Development of ROK Armed Forces”(1954. 7. 9), RG218 Entry UD50 Box13 Admiral Radford, 1.; “Memorandum for the Chief of Staff, U.S. Army”(1955. 2. 12), RG319 Entry A1 2B Box25, 1~2.

7) “Memorandum by the Joint Chief of Staff to the Secretary of Defense(Wilson)”(1954. 3. 31), FRUS 1952~1954, Vol.15 Korea part.2, 1783.

8) “Proposed ROK AF Organization prepared by Headquarters Far East Air Forces”(1954. 6. 11), 1-8.

9) “Memorandum for the Secretary of Defense”(1954. 7. 20), RG218 Entry UD50 Box13 Admiral Radford, 1.; FRUS 1952-1954 Vol.XV Korea Part II, 1854.

10) Report of Ambassador James A. Van Fleet Korea”(1954. 7. 23), RG218 Entry UD50 Box13 Admiral Radford, I-2~I-3.

11) Report of Ambassador James A. Van Fleet Korea”(1954. 7. 23), RG218 Entry UD50 Box13 Admiral Radford, II-15.

12) FRUS 1952-1954 Vol.XV Korea Part II, 1854. 이날 회의에서 래드포드 제독은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Koreans had earned consideration for some additional air strength by the excellent work their air force had done.”

13) “Memorandum for the Chief of Staff, U.S. Army”(1955. 2. 12), RG319 Entry A1 2B Box25, 3.

14) 공군사 제2, 76.

15) Headquarters, ROK Air Force, “ROK Air Force Plan for FY1956”(1955. 2. 25), RG341 Entry355 Box882, A1-C1.

16) 공군사 제2, 76~77.

17) 공군사 제2, 77.

18) 공군사 제2, 78.

19) 공군사 제3, 98.

20) 공군사 제3, 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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