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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8월 4일 일요일

한국전쟁 시기 미군의 보급에 대한 밴 플리트의 평


한국전쟁 당시 미8군 사령관을 역임한 밴 플리트의 인터뷰 녹취록을 조금씩 읽는 중 입니다. 오늘은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보급에 대한 밴 플리트의 평을 소개해 보지요. 꽤 재미있습니다. 특히 보급에 대한 밴 플리트의 관점을 잘 보여주는 부분 같군요.

윌리엄스 중령 : 장군님. 우리 미군에 대해서는... 우리 미군이 한국전쟁, 아니 전쟁을 치를 때 마다 지나치게 많은 장비를 갖추고 보급을 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밴 플리트 : 아니오. 전혀. 전투에 임하는 군인은 불가피한 경우라면 기본적인 필수품 조차 없는 상황에서 싸울 수 있어야 하지. 하지만 우리 군인들에게 더 잘 해줄 수 있다면 최고로 해 줘야 하는 법이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하지. 우리는 미국 본토, 유럽, 그리고 한국의 산악지대 등 어디에서건 가장 훌륭한 급식을 했소. 아군은 매일 보급을 받았고 아이스크림 같은 특식도 자주 받았소. 통조림 아이스크림을 사용하는 아이스크림 만드는 기계를 모든 사단이 가지고 있었소. 통조림 아이스크림은 걸쭉한 액체나 분말 형태였는데 물을 섞어서 얼리기만 하면 아이스크림을 만들 수 있었소. 그리고 차량 종점이나 철도 종점, 보급소에서 보급품을 추진하기 위해서 한국인으로 구성된 보급부대를 두었소. 한국인 보급부대는 지게(A frame)를 갖추고 있었는데 지게로 무거운 물품을 운반할 수 있었소. 한국인 보급부대는 식량, 탄약, 그밖의 보급품을 등에 짊어지고 전투부대에 전달했소. 그래서 아군이 보급을 잘 받을 수 있었던 것이오. 한국군은 별도의 급식을 받았는데 정말 부실하기 짝이 없었소. 한국인들은 그렇게 먹는 것에 익숙했지만. 급식은 대부분 밥이었고 일주일에 한 두번 정도 생선이나 고기를 먹는 수준이었고. 밥에 간장(soybean sauce)과 김치를 곁들여 먹는 것이었소. 김치는 절인 배추인데 자우어크라우트Sauerkraut 같은 음식이오. 김치는 밥을 먹을 때 맛도 내고 비타민도 보충해 주는 음식이었소. 한국군인은 하루에 11센트로 급식을 할 수 있었는데 우리 미군은, 내가 생각하기에 하루에 급식비로 5달러는 소요됐던것 같소. 요리를 할 줄 아는 취사병들은 꽤 맛있는 급식을 했소. 하지만 몇몇 실력없는 취사병들은 근사한 스테이크도 망쳐버리곤 했지. 급식을 제대로 준비하는건 정말 문제였소. 이 문제를 돕기 위해 많은 강사와 감독관이 파견됐소. 그 중에서도 특히 조지 머디키언George Mardikian씨가 기억에 남는구려. 머디키언씨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오마르 카얌Omar Khayyam이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식당을 운영하는 사람이었소. 그는 1차대전이 끝난 뒤 유럽에서 후버 전 대통령과 함께 식량구호활동을 한 바 있소. 그리고 미국을 매우 사랑하는 사람이었지. 머디키언씨는 아르메니아 출신으로 요리 전문가가 되었소. 그는 한국을 방문했을 때 모든 취사장을 시찰한 뒤 급양담당 부사관들과 취사병, 그 외의 취사관련 인원들을 가르쳤소. 머디키언씨는 육군부의 지시로 한국을 방문한 것이었소. 그래. 우리 군의 급식은 최고였지.
“Interview with General James A. Van Fleet by Lieutenant Colonel Bruce Williams, Tape 4”(1973. 3. 3), Senior Officers Debriefing Program, US Army Military History Institute, pp.47~48.

모든 군대가 병사들을 잘 먹이려 하지만 실제로 그게 가능한 군대는 흔치 않지요. 후방에서 물자를 준비하고 이것을 전방으로 추진해서 배급하는 과정이 딱딱 맞아떨어져야만 가능한 일이니 말입니다.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전방의 군인들은 그야말로 개고생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미국은 풍부한 생산력과 이것을 전장으로 수송할 수 있는 수단, 그리고 뛰어난 행정 조직 등 필요한 것을 제대로 갖춘 유일한 나라가 아닐까 싶습니다.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고기를 수송하기 위해 냉동선을 선구적으로 운영하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잠수함 까지 아이스크림 제조 기계를 갖출 정도로 보급에 신경을 쓴 것을 보면 그저 부럽다는 생각 말고는 드는게 없을 정도입니다. 밴 플리트가 이 인터뷰에서 미군의 급식이 최고라고 자부한 것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듯 싶군요.


2012년 6월 18일 월요일

독일 기갑사단의 보급부대 운용 - 북아프리카의 제15기갑사단 사례

국내에도 번역본이 출간된 『보급전의 역사』덕분에 군사사에 관심을 가진 많은분들이 2차대전기 군수보급문제에 대해 이해를 넓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보급문제를 주로 거시적인 작전단위에서 분석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보급부대의 편성같은 세부적인 문제도 다루지만 어디까지나 본문의 맥락을 끊지 않는 범위내에서 제한을 하고 있지요.

그러고보면 2차대전기 독일군의 사단급의 전술단위에서 보급문제를 다루는 독립적인 글을 찿는 것은 더 어려운 일 같습니다. 제가 읽어본 글 중에서는 스톨피R. H. S. StolfiGerman Panzers on the Offensive의 127쪽에서 131쪽까지 독일 제15기갑사단의 보급부대 운용을 짤막하게 다룬 절이 그에 해당하는 것 같습니다. 분량은 많지 않지만 아프리카 전선의 사단급 보급부대 편성과 운용을 잘 설명해 놓아 이해하기가 쉽고 유용합니다. 그 내용을 정리해 보지요.

제15기갑사단의 보급부대는 제33보급대대Panzer-Divisions-Nachschubführer 33였습니다. 이 부대는 대대급 부대로 북아프리카로 출동할 당시 총 12개의 보급대Kolonne와 사단의 예비전차를 수송하는 40톤급 제33보충전차수송대Panzer-Ersatzteil-Kolonne 33, 그리고 3개 정비중대Kraftwagen-Werkstatt-Kompanie로 편성되었습니다.  그리고 북아프리카에서 새로 2개 보급대가 추가되어 제33보급대대는 총 14개 보급대를 예하에 두게 됩니다. 각 보급대는 30톤의 수송능력을 갖추고 있었는데 제8~제11 수송대는 연료운반, 제13~제14 수송대는 물을 운반했습니다. 일반적으로 1개 보급대는 10대의 트럭으로 편성되었는데 독일군이 차량표준화가 되어 있지 않아서 각 보급대의 수송능력에 맞춰 차량이 배치되는 경우도 흔했던 모양입니다. 한편 사단 군수참모부도 보급품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보급대대와 함께 움직였습니다. 또한 무전기를 탑재한 3대의 통신트럭과 차량화된 8문의 20mm 대공포와 37mm 대전차포가  배치되어 기관총 14정에 불과한 보급대대의 빈약한 방어능력을 보충했습니다. 이 외에도 자체적인 방어능력을 갖추기 위한 시도가 계속되는데 1942년 2월에는 아프리카 기갑군이 각 수송대의 수송용 차량은 2명이 탑승하여 한명이 자체 방어를 담당하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보급부대를 호위하는 것은 꽤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영국군의 정찰부대나 영국군에 고용된 현지인들의 습격은 물론 공습이 다반사였습니다. 게다가 유동적인 전선 상황 때문에 영국군의 전차부대와 마주치는 최악의 경우도 일어났으니 말입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1941년 기준으로 37mm 대전차포 정도면 영국군의 장갑차는 물론 부실한 순항전차들도 제한적으로 상대할 수 있었다는 점 이었습니다. 심지어 20mm 대공포의 철갑탄으로 영국군 순항전차의 측면을 노려 격파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는군요. 그리고 뒤에는 박격포를 장비한 차량화보병 1개 소대가 추가되었고 경우에 따라 노획한 영국군의 중장비를 배속시키기도 했습니다.

롬멜의 1942년 하계공세에서 가잘라 방어선을 둘러싼 전투가 유동적으로 전개됨에 따라 독일군 보급부대는 다양한 위협에 스스로 대처해야만 했습니다. 보급대는 후방에 위치한 기갑군 물자집적소에서 최전방의 사단집적소로 끊임없이 물자를 실어날라야 했습니다. 그런데 독일군은  가잘라 방어선을 조기에 분쇄할 수 없었기 때문에 보급로가 비르 하케임Bir Hacheim을 끼고 우회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영국군은 이 길게 늘어진 보급로를 수시로 타격했으니 독일군으로서는 환장할 일이었겠지요. 저자인 스톨피는 이러한 상황이 마치 해전의 유동성과 같았다고 평가하는데 저도 괜찮은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2011년 12월 13일 화요일

미서전쟁 당시 미국이 군 수송용으로 구매한 민간선박들

약간의 사족 입니다.

미서전쟁 당시 미국이 군 수송용으로 구매한 민간 수송선박들의 내역을 올려볼까 합니다. 원래 어제 올린 글에서 같이 다루려다가 약간 길어 질 것 같아서 제외했는데 왠지 조금 허전해서 올려봅니다. 어제 이야기에서 인용한 자료 중 하나인 United States Army Logistics 1775~1992. Vol.2에 인용된 “미서전쟁 중 군수국의 업무에 대한 닷지 위원회의 평가(The Dodge Commission Assesses the Work of the Quartermaster Department in the War with Spain)”라는 자료에는 미서전쟁 기간 중 미국이 구매한 민간 선박의 내역이 표로 정리가 되어 있습니다. 민간선박을 급하게 조달하여 그 규모가 중구난방인데 2차대전 당시 두 대양을 누빈 거대한 수송선단과 비교하면 참 소박하기 그지없는 수준입니다.

바로 앞의 글에서 언급한 것 대서양 방면에 투입된 선박 중 미국 정부가 직접 구매한 것은 총 14척으로 세부 내역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1. 대서양 방면에 투입된 선박
선박명
배수량(톤)
구매비용($)
수송능력(장교)
수송능력(사병)
수송능력(마필)
Panaman, No.1
2,085
41,000
10
400
×
Port Victor, No.2
2,792
175,000
25
400
×
Rita, No.3
2,194
125,000
15
700
×
Mohawk, No.20
5,658
660,000
80
1,000
1,000
Mobile, No.21
5,780
660,000
80
1,000
1,000
Massachusetts, No.22
5,673
660,000
80
1,000
1,000
Manitoba, No.23
5,673
660,000
80
1,000
1,000
Minnewaska, No.24
5,796
660,000
100
1,200
1,000
Mississippi, No.25
3,732
350,000
40
800
800
Michigan, No.26
3,722
350,000
40
800
800
Roumanian, No.27
4,126
240,000
45
1,100
50
Obdam, No.30
3,656
250,000
50
1,300
100
Berlin, No.31
5,641
400,000
75
2,000
×
Chester, No.32
4,770
200,000
×
×
×
총계
61,298
5,431,000
720
12,700
6,750
(표 출처:  “The Dodge Commission Assesses the Work of the Quartermaster Department in the War with Spain”,United States Army Logistics 1775~1992. Vol.2, (CMH, US Army, 1997), p.339)
 
미국이 구매해 대서양 방면에 투입한 선박 중 8척은 냉장시설을 갖추고 있어서 부대에 신선한 육류를 제공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중 7척은 냉장시설의 규모가 1천톤에 달했다고 하는군요. 장거리 보급에 있어 냉장시설이 상당한 기여를 한 전쟁이라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태평양 방면에 투입된 선박 중 미국 정부가 구매한 것은 모두 2척이었습니다.


2. 태평양 방면에 투입된 선박
선박명
배수량(톤)
구매비용($)
수송능력(병력)
Scandia
4,253
200,000
1,500
Arizona
5,000
600,000
1,700
(표 출처:  “The Dodge Commission Assesses the Work of the Quartermaster Department in the War with Spain”,United States Army Logistics 1775~1992. Vol.2, (CMH, US Army, 1997), p.340)

2011년 5월 5일 목요일

7년전쟁기 프로이센군 포병의 화력과 기동력 문제에 대한 잡담

오전에 민방위 교육 보충을 다녀온 뒤 책을 읽었습니다. 전에 읽다가 못 읽은 것들을 중심으로 읽었는데 중간에 읽다가 말아 흐름이 끊어지니 잘 안읽히더군요.

오늘 읽은 글 중에서는 쇼왈터(Dennis Showalter)의 “Weapons and Ideas in the Prussian Army from Frederick the Great to Moltke the Elder”가 가장 재미있었습니다. 특히 모든 군대의 문제인 화력과 기동력의 균형에 대한 이야기가 괜찮았습니다. 쇼왈터는 7년 전쟁 시기 프로이센군의 포병의 문제를 재미있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7년 전쟁 초기 프로이센 육군 야전포병의 화포 중 가장 강력한 것은 12파운드포(12-pfünder Geschütz)였습니다. 이것은 야전 기동력을 위해 화력을 다소 희생한 것 이었는데 그 결과 화력은 물론 기동력도 어정쩡한 물건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각 보병연대에 소속된 대대포병의 3파운드 포 또한 기동력을 강조한 물건이었는데 그 결과 화력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 사정거리도 형편없고 탄도도 불량한 졸작이 되었다고 합니다. 당연히 3파운드 포는 일선 보병들의 외면을 받아서 실전에서 보병들이 3파운드 포의 지원을 거부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고 합니다.

결국 12파운드 포의 경우는 요새에 설치된 12파운드포를 야전용 포가에 얹은 것으로 대체되었고 보병대대의 3파운드 포는 조금 더 나은 6파운드포로 교체되었습니다. 그리고 7년 전쟁 후기로 가면서 화력에 대한 의존, 특히 중포병에 대한 의존이 높아졌기 때문에 포병의 규모가 늘어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되면서 프리드리히 2세가 중요시한 야전 기동력이 감소했다는 것 입니다. 18세기의 비포장 도로는 기상 상태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고약한 날씨라도 만나게 된다면 많은 포병을 동반한 프로이센군의 기동력은 떨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포병화력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질 수록 이에 대한 보급도 늘어났는데 많은 화약과 포탄이 함께 이동하면서 포병의 대열은 더 길어졌습니다. 그렇다고 기동성을 위해 포병을 축소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요.

프리드리히 2세는 7년전쟁의 경험으로 새로운 야포를 개발하는 등 포병의 발전에 신경을 쏟았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말이라는 견인수단에 의존하는 한 기동력과 화력의 딜레마에서 벗어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1차대전 이전 까지도 독일군에게 있어 기동력과 화력의 절충점을 찾는 것은 어려운 문제였으니 말입니다.


잡담 하나. 오늘 쇼왈터의 글을 읽으면서 생각을 해 봤는데 보불전쟁 이후 독일군 포병의 발전에 대한 글을 다시 한번 고쳐서 써보는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전에 썼던 글은 좀 두서가 없어서^^;;;;

2011년 1월 8일 토요일

The American Way of War!?

알맹이 없는 잡담 하나 더.

바로 앞의 ‘창군초기 한국군의 사격군기 문제’라는 글에서는 한국군의 사격 군기 결에 대한 미국 군사고문단의 비판을 다뤘습니다. 뭐, 사격군기 결여는 사실 지휘관들도 경험이 부족하고 사병들도 훈련이 부족한 군대라면 어쩔 수 없는 현상이긴 합니다만 외국인들의 신랄한 비난은 약간 씁슬하긴 하지요.

한편, 20세기 중반에 한국인이 사격군기가 결여되어 있다고 까대던 미국인들도 100년 전에는 유럽 사람들에게서 마찬가지로 까이고 있었습니다. 남북전쟁이 벌이지자 영국, 프랑스, 프로이센 등 유럽의 열강들은 연방과 남부연합 양측에 관전무관들을 파견해 전술과 군사기술을 관찰했습니다. 뭐, 많은 분들이 잘 알고 계시겠지만 이 시기 유럽인들은 미국의 아마추어들이 벌이는 전쟁을 다소 낮춰보고 있었다지요.

영국 육군의 플레처(Henry Charles Fletcher) 중령은 연방군의 전투 방식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고 합니다.

“경험이 부족하고 훈련이 덜 된 부대가 그렇듯이 병사들은 총을 많이 쏘지만 몸을 일으켜 세우려 하지 않으며...  이 때문에 먼 거리에서 너무나 많은 화약을 낭비하고 있고... (적에게) 별다른 피해를 입히지 못하고 있다.”1)

이런 견해는 다른 나라의 관전 장교들에게서도 나타납니다. 프로이센 육군의 샤이베르트(Justus Scheibert) 대위도 플레처 중령과 마찬가지로 연방군이 전투시 원거리에서 부터 총을 쏴대며 화약을 낭비하는 경향이 강했다고 비판했습니다.2) 19세기 영국의 유명한 군사이론가였던 헨더슨(G. F. R. Henderson)은 아예 연방군과 남부연합군 양쪽 모두 탄약을 막대하게 낭비했다고 노골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지요.3)

물론 탄약을 낭비하는 것은 별로 좋지 않은 일이겠습니다만 남북전쟁 당시의 미군, 즉 연방군은 한 가지 점에서는 100년 뒤의 한국군이나 남베트남군 보다 나았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로 1860년대의 미국도 막대한 공업력을 가진 공업국가였다는 점 입니다.



1) Jay Luvaas, The Military Legacy of the Civil War : The European Inheritance(University Press of Kansas, 1988), p.16
2) Jay Luvaas, ibid., p.63
3) Robert H. Scales Jr, Firepower in Limited War(Presidio, 1995), p.3

2010년 11월 8일 월요일

남북전쟁 초기 미육군의 급식규정

일이 잘 안돼서 United States Army Logistics : An Anthology 1권을 끄적거리고 있는데 남북전쟁 당시 미육군의 급식규정에 대한 구절이 눈에 들어옵니다. 제가 먹는걸 좋아해서 이 책을 처음 샀을 때 따로 표시해둔 부분인데 다시 봐도 흥미롭습니다.

1861년 미육군의 급식규정은 다음과 같았다는군요.(병사 1인/1일)

1.     20온스의 소금에 절인 쇠고기 또는 보통 쇠고기 또는 12온스의 보통 돼지고기 또는 베이컨
2.     18온스의 밀가루 또는 20온스의 옥수수
3.     1.6온스의 쌀 또는 0.64온스의 콩 또는 1.5온스의 말린 감자
4.     1.6온스의 커피콩 또는 0.24온스의 차
5.     2.4온스의 설탕
6.     0.54온스의 소금
7.     0.32(Gill = 1/4파인트, 0.118리터)의 식초

여기에 대해 같은 책의 본문은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습니다.

United States troops were generally well-fed.

. 저도 여기에 동의합니다.(다른 분들 께서는?^^)

개인적으로 재미있는 점은 급식규정에 쌀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 입니다. 전체 급식에서 차지하는비중을 보면 별로 많은 양은 아닌데 어쨌든 감자와 비슷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862년에는 급식량을 1861년 규정보다 조금 더 늘렸다고 합니다. 미육군은 더 잘 먹게 됐다는 이야기.

일이 손에 안 잡혀서 두서없이 주절거려 봤는데 이번주에 할 일을 끝내는 대로 슐리펜계획에 대한 논쟁을 더 쓸 생각입니다. 본편 외에 번외편도 하나 준비 중인데 빨리 올려야죠. 사실 처음 슐리펜계획에 대한 논쟁을 계획했을 때 보다 소개할 논문과 서적이 조금 더 늘어났습니다. 번외편을 쓸 때 같이 소개하도록 하지요. 제가 게으른데다 연재도 한달에 한 두 편 쓰는 수준이라 진도가 지지부진 합니다. 겨울에 여유가 생기는대로 연재 속도를 좀 높여야 겠습니다. 제 글을 쓰는 것도 아니고 남의 글을 소개하는 수준인데 참 느리죠;;;;;

2010년 2월 20일 토요일

북버지니아군의 보급 문제

요즘 읽고 있는 책 중에 Edward Hagerman의 The American Civil War and the origins of modern warfare가 있습니다. 책 제목에서 짐작하실 수 있으시겠지만 미국 남북전쟁에서 소모전, 참호전과 같은 근대적 전쟁의 요소가 등장했고 남북 양측의 군대가 모두 새롭게 변화한 전쟁 상황에 맞춰 지휘구조와 전략 전술 등을 재정립해 나갔다는 내용입니다.

시간 날 때 마다 조금씩 읽고 있어서 이제야 게티즈버그 전역을 다룬 부분을 읽고 있습니다. 이부분이 아주 재미있는데 저자는 리가 지휘하는 북버지니아 야전군(Army of Northern Virginia)이 챈슬러빌(Chancellorsville)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 북진하는 과정에서 겪은 심각한 보급문제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기본적인 보급품의 부족 뿐 아니라 철도, 마차와 같은 수송수단 자체의 부족이 북버지니아군의 공세의 발목을 잡는 치명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지적입니다.

저자는 북버지니아군의 보급문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보급에 필요한 마필의 부족입니다. 말의 부족이 심각하다 보니 1863년 봄에 대규모 편제 개편을 통해 보급부대를 축소하는 방향으로 나갔지만 그런 조치를 취하고도 편제를 채우지 못했다고 합니다. 해상봉쇄 때문에 말을 수입할 수 없어 캘리포니아와 텍사스, 또는 멕시코를 통해 마필을 수입해야 했는데 이곳에서 조달하는 말은 질이 좋지 못했으며 결정적으로 전투에서 소모하는 말이 더 많았다고 하니 말 다했지요;;;; 말의 부족으로 정찰과 보급로 경비를 담당할 기병도 부족했으니 포병이나 기타 지원부대의 상황은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지요. 다음으로는 남부연합의 고질적 약점인 철도 문제를 꼽고 있습니다. 1863년 봄이 되면 철도의 연장은 커녕 기존 철도의 유지도 어려운 지경이었다고 하니 말이 충분했다 하더라도 고민이 많았을 것 입니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작전 지역에서 대규모 야전군의 보급에 필요한 물자를 징발할 대도시가 드물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나폴레옹이 모스크바로 향한 진격에서 겪었던 것과 비슷한 문제라고 할 수 있겠는데 보급에 필요한 대도시가 드문 만큼 보다 더 넓은 지역에서 징발을 실시해야 하고 이 경우 마필 부족은 그야말로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저자는 이런 문제때문에 리가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패배한 뒤에는 철도에서 가까운 곳에서 전투를 수행하려는 경향을 보일 수 밖에 없었다고 설명합니다. 극도로 제한적인 보급능력이 작전행동의 자유까지 제약하게 된 셈입니다. 물론 이 배경에는 남부연합의 총체적인 전쟁수행 역량이 그야말로 안습이었다는 문제가 있겠습니다만.

2009년 11월 23일 월요일

대영제국의 '확실한' 몰락

구글리더를 확인하던 중 황당한 소식을 하나 접했습니다.

Just five bullets for each soldier

이 기사에 따르면 토니 블레어 내각 당시 대중여론을 의식해서 이라크전쟁 참전을 비밀리에 준비하는 바람에 보급 등 전투지원 준비가 부실하게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이때문에 일부 부대는 병사당 다섯발의 실탄만 지급한 상태로 전투에 나가야 했고 일부 부대는 방탄조끼 등 개인 방호장비도 부족한 상태에 처해있었다는 것 입니다. 여기에 군용 무전기는 열에 약해 쉽게 고장나는 형편없는 물건이 많았다고 하는군요;;;;

이 외에도 기사를 읽다 보면 영국군의 비참한 실상이 잘 나타납니다. 정말 안구에 습기가 차는군요.

100년전의 영국 장군들은 이런날이 오리라고는 결코 상상하지 못했을 것 입니다.

2008년 12월 4일 목요일

소련군과 신발

sonnet님께서 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소련군의 의무지원 문제를 다룬 글을 써 주셔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저도 sonnet님이 인용하신 책들을 읽다가 소련의 부실한 전투지원 능력에 대해 경악했는데 특히 병사들의 개인 군장류의 문제점이 심각했다는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은 신발 문제였습니다.

특히 군화가 문제였다. 합성소재로 만든 군화는 암석이 많은 거친 지형에서 1개월 정도만 신어도 닳아 떨어졌다. 군화의 바닥 부분은 너무 미끄러웠고 군화의 끈을 묶는 부분은 모래나 작은 돌이 신발 안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막아주지 못 했다. 더욱이 소련제 군화는 너무 무거운데다 발목 부상이나 삐는 것을 방지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런 문제 때문에 병사들은 체코제 등산화(아프가니스탄 군에 지급되는)나 육상용 신발(track shoes), 스니커즈, 운동화(gym shoes) 같은 것을 선호했다.

The Russian General Staff(translated & edited by Lester W. Grau & Michael A. Gress), The Soviet-Afghan War : How superpower fought and lost,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2, p.289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미국과 자웅을 겨루는 초강대국이 제대로 된 신발 하나 보급할 능력이 없다는 것은 충격이었습니다. 신발 외에도 부족한 피복과 개인 장구류의 문제가 자주 언급되고 있었는데 러시아인들 스스로가 문제를 이 정도로 인정하고 있었으니 전선의 실상은 더 고약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아니더라도 소련군이 신발과 피복 보급에서 문제가 많았다는 것은 여기 저기서 이야기 되고 있습니다. 위에서 예로 들은 것은 1980년대 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의 이야기 인데 1960년대에는 문제가 조금 더 좋지 않았던 것 같더군요. 서방으로 망명한 뒤 1980년대에 소련군에 대한 이런 저런 찌라시(???)를 유포했던 빅토르 수보로프는 자신이 초급 장교로 있던 1960년대의 소련군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러시아 군인에게는 가죽군화가 지급된다.

소련군에서는 ‘신병(Ersatz)’이 들어오면 보급품을 지급 한다. 이후 소련 병사가 가죽군화를 신는 것은 짧은 기간 뿐이며 천으로 만든 군화 같은 것을 지급받는다. 오직 주요 도시에 주둔하는 근위연대나 근위사단(Hof-Regimentern und Divisionen) 정도만 싸구려 가죽군화를 지급받았을 뿐이다. 외국인들은 소련군인이 멋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물론 동독, 폴란드, 헝가리 등에 주둔하는 소련 점령군은 가죽 군화를 지급받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소련은 ‘초강대국’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 ‘초강대국’은 모든 병사들에게 가죽군화를 보급할 능력이 없었으며 소련에 주둔한 소련 병사들은 천으로 만든 군화를 신고 행군해야 했다.

Viktor Suworow, Der Tag M, Klett-Cotta, 1995, s.11

이보다 20년 전인 대조국전쟁 시기에는 소련군의 신발 사정이 더욱 좋지 않아서 자본주의자들로부터 신발을 받아가며 싸웠다지요.;;;;;

이런걸 보면 냉전기에 수백만의 군대를 유지하면서 다른 나라는 꿈도 못 꿀 보급과 전투지원을 할 수 있었던 미국이 정말 무서운 나라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2007년 11월 16일 금요일

1939년 폴란드 침공과 소련의 동원 문제

오늘의 이야기는 독일육군의 흑역사 - 1938년 오스트리아 병합시의 사례에 이은 속편입니다. 이번의 주인공은 천하의 대인배 스탈린 동지의 지도를 받는 붉은군대입니다.
사실 전편의 독일군은 총통의 갑작스러운 명령으로 만슈타인이 불과 몇 시간 만에 뚝딱 만든 계획으로 움직이다 보니 엉망이 되었는데 1939년 폴란드 침공 당시의 소련군은 오래전부터 계획이 세워지고 준비도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엉망이었다는 점에서 더 안습이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과거 소련의 공식적인 문헌들은 1939년 폴란드 침공에 대해 대략 다음과 같은 식으로 서술하고 있었다는군요.

소련군대에 폴란드 국경을 넘어 서부 벨로루시와 서부 우크라이나의 근로인민들을 폴란드 의 압제와 파시스트의 노예화로부터 해방하고 보호하라는 명령이 내려지자 마자 벨로루시 전선군과 우크라이나 전선군의 모든 병사와 지휘관들은 그들에게 부여된 영광된 인민해방의 임무를 달성하겠노라고 맹세했다. 전선군 군사평의회의 명령서는 소련 병사들은 서부 벨로루시와 서부 우크라이나로 «정복자가 아니라 우크라이나와 벨로루시의 형제들을 지주와 자본가들의 모든 압제와 착취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진격하는 것이라고 언명했다. 소련 병사들은 특히 인민들을 위협자들로부터 보호하고 민족에 상관없이 인민들의 재산을 보호하며 폴란드군과 폴란드 정부 관료들이라도 소련군에게 저항하지 않을 경우 정중하게 다루도록 명령받았다. 또한 공세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도시와 마을에 대한 포격 및 폭격은 금지되었으며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루마니아, 헝가리의 국경을 침범하지 않도록 주의하도록 했다.
소련군대는 부여받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군작전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것과는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소련군은 해방 전역을 수행하기 때문에 엄격한 군기와 조직력을 유지해야 했으며 또한 적을 효과적으로 상대하기 위해 철저한 준비태세를 갖추어야 했다. 이 작전은 단지 벨로루시와 우크라이나 서부의 근로인민들을 해방시키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독일 파시스트들의 노예화와 빈곤화, 그리고 완전한 물리적 폭력으로부터 보호하고 수백년 동안 그들의 원래 조국과 민족으로 다시 통합되기를 갈망해온 인민들의 염원을 민주적으로 해결해야 했다.

「Excerpts on Soviet 1938-40 operations from The History of Wafare, Military Art, and Military Science, a 1977 textbook of the Military Academy of the General Staff of the USSR Armed Forces」,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Vol.6 No.1, March 1997, pp.110-111

그런데 실제로 이 임무는 그다지 영광적인 것은 아니었던 것 같고 특히 그 준비 과정은 영광과는 지구에서 안드로메다 까지의 거리 만큼이나 멀었던 것 같습니다.

영광과는 거리가 아주 먼 이 이야기는 대충 이렇게 시작됩니다.

독일과 불가침 조약을 맺은 스탈린은 폴란드의 뒤통수를 치기 위해 즉시 침공준비를 시작합니다. 9월 3일에는 키예프 특별군관구, 벨로루시 특별군관구, 하리코프 군관구, 오룔 군관고, 칼리닌 군관구, 레닌그라드 군관구, 모스크바 군관구에 다음과 같은 지시가 하달됩니다. 1) 전역까지 1년 남은 병사들은 1개월간 복무 연장 2) 각급 부대 지휘관 및 정치장교들의 휴가 취소 3) 모든 부대는 전투 태세를 갖추고 무기, 장비 및 물자를 점검할 것. 그리고 9월 6일에는 22호 동원계획에 따라 위에서 언급한 군관구의 예비역들은 전역 12년차 까지 소집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다음날 보로실로프는 동원 부대들에게 집결지들을 지정하고 이에 따라 폴란드와 인접한 벨로루시 특별군관구와 키예프 특별군관구는 소속 부대들에 대한 재배치를 시작했습니다. 다들 잘 아시다시피 이무렵 독일군대는 폴란드군의 저항을 차근 차근 분쇄하면서 바르샤바로 쇄도하고 있었지요.

마침내 9월 11일에는 벨로루시 특별군관구가 벨로루시 전선군으로, 우크라이나 특별군관구가 우크라이나 전선군으로 개칭되어 침공준비에 박차가 가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작전에 동원된 붉은군대의 전력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벨로루시 전선군 : М. П. 코발레프 2급 야전군지휘관
- 제 3군 : В. И. 쿠즈네초프 군단지휘관
- 제 11군 : Н. П. 메드베데프 사단지휘관
- 제 10군 : И. Г. 자하르킨 군단지휘관
- 제 4군 : В. И. 추이코프 사단지휘관
- 볼딘 기병-기계화집단(Конно-механизированная Группа) : В. И. 볼딘 군단지휘관. 제 3, 6기병군단, 제 15전차군단
- 제 23 독립소총병군단
- 제 22 항공연대

우크라이나 전선군 : С. К. 티모셴코 1급 야전군지휘관
- 제 5군 : И. Г. 소베트니코프 사단지휘관 : 제 8, 27소총병군단, 제 14, 36전차여단
- 제 6군 : Ф. И. 골리코프 군단지휘관 : 제 13, 17, 49, 36소총병군단, 제 2기병군단, 제 24, 10, 38전차여단
- 제 12군 : И. В. 튤레네프 2급 야전군지휘관 : 제 6, 37소총병군단, 제 23, 26전차여단
- 제 13군 : 제 35소총병군단
- 기병-기계화집단 : 제 4, 5기병군단, 제 25전차군단
- 제 15 독립소총병군단
- 제 13 항공여단

이렇게 출동할 부대가 정해지고 집결지도 지정되었으니 해당 부대들이 기동을 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이미 소련은 1938년부터 22호 동원계획에 따른 준비를 해 왔다는 것을 위에서 언급했지요.

그런데 황당하게도 1년 동안 준비를 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준비가 첫 단계부터 엉망으로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동원령이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병력 동원이 느리게 이뤄져서 우크라이나 전선군의 경우 이 작전을 위해 신규 편성하는 야전군들은 9월 17일이 돼서야 “대충” 동원을 완료할 수 있었고 폴란드 침공이 개시되었을 때는 계획과는 달리 이미 편성이 완료된 부대들만 진격을 해야 했습니다. 최종적으로 동원이 완료된 것은 9월 27일의 일이었는데 이 때는 상황이 거의 종료됐을 무렵이죠;;;
우크라이나 전선군의 핵심 기동전력인 제 25전차군단은 동원 3일차 까지 편제의 30%도 채우지 못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병력 뿐 아니라 장비 동원도 문제였습니다. 사람이야 억지로 머릿수를 채울수는 있을텐데 없는 물건은 땅에서 솟는게 아니니까요. 예를 들어 제 36전차여단의 경우 완전편제시 트랙터 127대가 있어야 했는데 실제로 동원된 것은 42대에 불과했으며 ZIS-6 트럭은 187대가 필요했는데 실제로는 15대에 불과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제 25전차군단은 편제상 각종 차량 1,142대가 있어야 했는데 9월 11일 까지 451대를 확보하는 데 그쳤습니다. 제 13소총병군단은 편제상 2,500대의 트럭이 있어야 했는데 실제로 9월 7일까지 확보한 것은 1200대에 그쳤고 게다가 이 중에서 20%는 예비부품이나 타이어가 없어 사용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여기에 이 사단은 1,400통의 연료를 확보하고 있어야 했는데 실제로는 160통만 가지고 있었으니 차량이 있어도 모두 굴리기는 어려웠습니다. 벨로루시 전선군의 제 6전차여단은 장갑차가 단 1대도 없었습니다.
차량 같은 것은 대형 장비니 그렇다 치더라도 동원된 예비군에 지급할 개인 장비까지 부족했습니다. 제 27소총군단은 철모 16,379개가 모자랐으며 제 15소총군단은 군화 2,000족이 없었고 제 36소총군단은 허리띠 2,000개가 부족했습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동원된 부대들을 폴란드 국경까지 이동시킬 수단이 마땅치 않았다는 것 입니다.
철도 수송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는데 유감스럽게도 소련의 철도는 이탈리아의 철도와 비슷하게 돌아갔던 모양입니다. 예를 들어 제 96소총병사단의 선발대인 41소총병연대는 두 시간 늦게 열차에 탑승했는데 제 44소총병사단의 경우 포병연대와 직할대는 침공이 개시될 때 까지 기차를 타지 못했다고 합니다. 기차 시간이 늦는 것은 그렇다 치고 집결지에서 기차역으로 이동하는 것도 문제였습니다.
특히 전차부대의 경우는 심각했다고 합니다. 침공에 투입된 부대들 중에는 T-26을 장비한부대가 많았는데 T-26은 기계적 신뢰성이 낮아 기차역으로 행군하는 동안 자주 도로에 주저앉아 버렸다지요. 간신히 기차역에 도착한 몇몇 부대는 전차들의 엔진 및 동력계통의 수명이 행군도중(!!!!) 초과되어 기차를 탈 수 없었다는 어이없는 사태도 발생했습니다. 머리가 세개 달린 T-28을 장비한 제 10전차여단은 12일에 기차에 탑승해 이동해야 했으나 실제로는 제때 화차가 준비되지 못 해서 16일에야 장비 적재를 완료할 수 있었습니다. 이 부대가 국경에 전개를 완료한 것은 19일 이었고 결국 폴란드 침공이 시작됐을 때는 일부 부대는 아직 화차에서 내리지도 못 한 상태였다고 합니다.

철도는 물론이고 도로 이동도 엉망이었습니다. 이런 대규모 부대의 기동을 위해서는 사전에 도로를 잘 배분해 놔야 하는데 그걸 제대로 하지 못 해 한 도로에 여러 부대가 뒤섞이는 문제가 곳곳에서 발생했습니다.

한편, 소련군대가 사전에 준비된 동원조차 완료하지 못해 쩔쩔매는 동안 독일군은 폴란드를휩쓸고는 독소불가침조약에서 합의된 소련 영역까지 넘어오고 있었습니다. 결국 소련은 동원이 완료되지 못한 상태에서 당장 준비된 병력만 가지고 침공을 시작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국경을 넘은 부대들도 상당수는 편성이 완료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 360독립통신대대의 경우 침공 당시 편제의 60%에 불과했고 제 362독립무전대대는 편제의 82% 수준이었습니다.

결국 1939년 9월 17일 오전 5시 40분, 폴란드 침공은 동원이 대충 완료된 상황에서 시작됐고 선발대가 국경을 넘는 동안 원래 침공에 같이 투입될 나머지 부대들은 계속 편성 중 이었습니다.
제 60소총병사단은 침공이 시작되었을 때 편제의 67%까지만 동원이 된 상태였습니다. 특히 특수병과의 동원률은 매우 낮았습니다. 제 81소총병사단의 경우 기술병과는 45%, 행정 및 보급병과는 69%, 의무병과는 47%, 수의병과는 79%만 동원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사단을 수송할 자동차 대대의 정비중대는 편제의 20%만 채운 상태였습니다. 제 99소총병사단은 침공 직전인 16일 까지도 포병연대가 편성되지 않아 보병만 달랑 있는 상태였다고 합니다.

한편, 먼저 나간 침공부대들은 폴란드군의 저항이 신통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병력 및 장비 부족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습니다. 특히 비전투 부대는 편제율이 낮았는데 이것은 작전 수행에 악영향을 끼쳤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선군의 경우 제빵부대들의 편제미달이 심각해 사단당 하루 12톤의 빵만 배급되고 있었습니다.(실제 배급 소요량은 17톤) 대부분의 침공 부대들은 배고픔에 시달리며 진격했고 폴란드군의 식료품을 탈취하지 못한 부대들은 작전이 종료될 때 까지 배를 곯았다고 전해집니다.

폴란드 침공에서 드러난 소련군의 문제라면 크게 두 개를 들 수 있을 것 입니다. 첫째, 사전에 계획과 준비가 꾸준히 있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동원은 엉망이었다는 점. 둘째, 자국 영토 내에서 이동하는 것 조차 엉망이었다는 점. 이런 문제점은 핀란드 전에서도 거듭되었고 결국 1941년의 대재앙의 기원이 되고 말지요.

2007년 10월 30일 화요일

독일육군의 흑역사 - 1938년 오스트리아 병합시의 사례

1938~1939년 시기에 실시된 육군의 대규모 기동은 어느 나라나 엉망이었던 것 같습니다. 소련이 폴란드 침공을 앞두고 실시한 동원에서 벌인 삽질은 특히 전설의 경지에 다다른 것 이지요. 그런데 그럭저럭 정예로 간주되는 독일군도 평시의 기동에서 삽질을 한 사례가 있으니 그것은 그 유명한 오스트리아 합병 당시의 기동입니다.

뭐, 사실 3월 10일 이전까지 독일육군은 제대로 된 오스트리아 진주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 일이 제대로 풀리는게 더 이상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건 총통의 명령을 받은 당시 육군참모총장 베크(Ludwig Beck)는 다시 자신의 똘마니(?)인 작전의 천재 만슈타인에게 총통의 명령을 하달합니다. 그러나 역시 천재는 천재인지 이 황당한 명령을 받은 만슈타인은 3월 10일 오후에 동원 및 기동계획을 거의 완성하는 재주를 부립니다. 그리고 베크는 만슈타인의 계획에 따라 이날 늦게 보크(Fedor von Bock)를 오스트리아로 진격할 제8군 사령관에 임명합니다.

이렇게 해서 보크가 지휘할 제 8군은 예하에 다음과 같은 병력을 배속 받았습니다.

제7군단 : 제7보병사단, 제27보병사단, 제25기갑연대 1대대, 제1산악사단
제13군단 : 제10보병사단, 제17보병사단
제16차량화군단 : 제2기갑사단, SS-VT
군직할 : 헤르만괴링연대, 제97향토사단(Landwehr-division)

그리고 제8군은 이틀 뒤인 12일에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게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이 시기의 독일군은 팽창기에 있는지라 인력, 특히 장교와 부사관이 부족했습니다. 이 때문에 오스트리아로 진격할 부대들을 편성하는 것이 상당한 문제였습니다.
먼제 제8군의 예하 부대들을 통제할 통신부대인 제507통신연대는 히틀러가 동원령을 내린 지 6일 뒤에야 편성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또 제16차량화군단의 직할 의무부대는 동원 5일차에야 집결지에 도착할 수 있었으며 소집명령을 받고 집결지에 도착한 예비역들은 소속부대를 찾지 못해 우왕좌왕하고 있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제97향토사단의 한 연대의 경우 동원 1일차에 부대에 제대로 도착한 장교는 단 한명 뿐이었다고 합니다. 동원계획 이라는게 만슈타인이 반나절 만에 뚝딱 완성한 것이었으니 혼란이 없었다면 거짓말 이었겠지요. 오스트리아로 진주할 부대들을 편성하고 있던 제13군관구(Wehrkreis)의 경우 60먹은 노인들에게 소집영장을 발부하는 황당한 착오도 범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제빵병들이 포병부대로 배치되거나 보병사단의 수색대에 배치된 병사가 말을 탈 줄 모르는 등 동원소집은 시작부터 엉망이었습니다. 제1산악사단의 경우 4개 대대는 전혀 투입할 수 없는 상태였으며 이 사단의 사단장은 최소한 14일은 걸려야 동원된 예비역들을 쓸만하게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인력 뿐 아니라 장비 상태도 엉망이었습니다. 제2기갑사단이 동원명령을 받고 사단 소속의 전차들을 점검했을 때 무려 30% 이상이 가동불능 이거나 수리를 요하는 상태였습니다. 여기에 제8군 전체를 통틀어 2,800대의 차량이 부족했습니다. 주력인 육군의 상태가 개판이었기 때문에 당시만 해도 2선급으로 취급받던 SS-VT나 헤르만괴링연대는 구할 수 있는 운송수단을 닥치는대로 긁어 모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문제는 여기서 그치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엉망진창으로 동원이 계속되고 있던 3월 12일 오전 08시, 그런대로 동원이 완료된 부대들이 국경을 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행군은 개판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로 진입하는 몇 안되는 도로에 여러 사단 소속의 부대들이 뒤죽박죽으로 굴러들어가니 행군은 시작부터 엉망이었습니다. 제10보병사단과 제2기갑사단은 사단 예하 지원부대 없이 전투부대만 먼저 출발했고 제7보병사단은 행군 도중 사단 전체가 대대 단위로 분해되어 버렸습니다. 심한 경우 같은 사단 소속의 부대들이 10km 이상 씩 떨어져 버려 행군 도중 사단들이 뒤섞이는 사례가 다반사였습니다.

그렇지만 독일군의 고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제2기갑사단은 국경의 집결지까지 이동할 연료는 있었는데 그 이후의 연료는 준비하지 않은 상태로 국경을 넘었습니다. 제8군 사령부는 4일 뒤에야 제2기갑사단에 충분한 연료를 보급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사단이 보유한 전차 중 39대가 빈으로 진격하는 도중 고장나서 길바닥에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보병사단들은 황급히 징발한 늙은 말들이 보급품 수레나 야포를 견인하지 못해 골탕을 먹었습니다. 많은 군사사가들이 지적하듯 만약 오스트리아군이 조금이라도 저항을 했다면 독일군은 심각한 곤란에 직면했을 것 입니다.

행군이 엉망으로 꼬여버렸기 때문에 헌병도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이 됐습니다. 독일군 내에서는 이 난감한 상황을 교통의 무질서(Verkehrsanarchie)라고 불렀다지요. 3월 14일이 되면 이 혼란은 극에 달합니다. 제10보병사단의 경우 각 보병연대간의 간격이 60km(!!!!)에 달했고 포병이나 기타 직할대는 마지막 보병연대의 훨씬 후방에서 따라오는 지경이었습니다. 제10보병사단은 하루 평균 43km를 행군했지만 이 속도는 사단이 전투부대로서 대형을 유지했을 때나 의미가 있는 것 이었습니다. 이 사단의 직할대들은 160km 후방에서 도로 정체에 시달리며 어떻게든 전진하려 했지만 이미 혼란한 상황을 통제할 능력을 잃은 사단사령부는 뒤에 처진 사단직할대는 거의 신경을 쓰지 못했습니다. 이 참상을 목도한 제13군단 사령부가 제10사단의 직할대들을 철도로 수송해 볼까 했지만 철도는 제27보병사단을 수송하는 것 때문에 만원이었습니다. 결국 제10보병사단의 직할대들은 오스트리아 병합이 끝날 때 까지 본대와 합류하지 못 했다고 합니다.(;;;;;)
제7보병사단은 하루당 최저 15km의 속도로 전진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단 전체가 분해되어 선두의 대대는 제10보병사단의 사이에 끼어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참다 못한 사단장은 군사령부에게 하루 동안 행군을 정지하고 부대를 수습하겠다고 요청했습니다.
예비역들을 대규모로 보충받은 제1산악사단은 나이먹은 예비역들이 행군도중 줄줄이 뻗어나가는 통에 행군이 엉망으로 변했습니다. 제100산악연대의 경우 오스트리아로 진입한 첫날에만 40%에 달하는 예비역들이 행군으로 나가떨어지는 참극(?!?!)을 연출했습니다.

오스트리아 진주는 엉망진창으로 진행됐고 군사적으로는 재앙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이 독일군을 환영했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독일군은 더 난처한 상황에 처했을지도 모릅니다. 빈 주재 이탈리아 무관이 독일군의 행군을 관찰한 뒤 “행군군기가 결여돼 있다”라고 평가한 것은 독일군에게는 망신살이 뻗치는 일 이었을 겁니다.

2007년 3월 11일 일요일

1차 대전과 군수체계의 혁명 - Martin van Creveld

이 글은 캠브리지 대학 출판부에서 출간한 Great War, Total War에 실린 Martin van Creveld의 “World War I and the Revolution in Logistics”에서 64-69쪽을 발췌한 것 입니다. 사실 이 글에서 말하는 내용은 같은 저자의 유명한 저서 “Supplying War”의 4장과 거의 동일한데 후자의 분량이 더 많아서 우리말로 옮기는데 시간이 걸리는 고로 양이 더 적은 이 글을 번역했습니다.

1871년부터 1914년 사이의 기간은 유럽의 역사에서 유례없이 인구적, 경제적 팽창이 이뤄진 시기였다. 불과 44년만에 유럽의 인구는 2억9300만명에서 4억9000만명으로 70%이상 증가했다. 같은 기간 동안 산업, 무역, 그리고 교통수단은 눈부시게 발전해 유럽을 전체적으로 변화시켰다. 1870년에 유럽의 3대 공업국인 영국, 프랑스, 독일의 석탄 및 갈탄 생산량은 1억6000만톤이었는데 이것이 1913년에는 6억1200만톤으로 증가했다. 이와 비슷하게 1870년 세 국가의 선철 생산량은 750만톤이었는데 1913년에는 2900만톤으로 거의 300%의 증가를 이뤄냈다. 이런 산업생산의 증가는 두말할 필요 없이 직업, 주거환경, 그리고 문화에 있어서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비록 산업혁명이 18세기 말에 일어났지만 석탄, 선철, 강철로 대표되는 산업화의 영향이 처음으로 나타난 전쟁은 1870년의 보불전쟁이었다.

공장의 굴뚝들이 계속해서 늘어나면서 유럽 각국의 군사력도 크게 증가했다. 사실 19세기 후반 유럽 각국의 군대규모의 증가는 같은 기간 인구 증가보다 더 큰 것이었다. 사회적 발전과 행정 효율의 증가, 그리고 국민개병제의 도입은 방대한 규모의 육군을 유지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군대를 뒷받침하는 사회-경제 체제는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발전해 있었다.
예를 들어 유럽에서 두번째로 거대한 육군을 가졌던 프랑스는 1870년 당시 전체 인구 3700만명 중 군사훈련을 받은 국민은 50만명으로 그 비율이 1대 74였다. 그러나 1914년에는 전체 인구가 불과 10%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군사훈련을 받은 국민은 400만에 달했다.
마찬가지로 독일제국 역시 1870년부터 1914년까지의 인구증가율이 프랑스 보다 높았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1870년에 전체 인구 대비 군사훈련을 받은 국민의 비중이 44대 1에서 1914년에는 15대 1로 증가했다. 유럽 전체를 놓고 볼 때 1914년 전쟁 발발 직전 가용한 병력 자원은 거의 2000만명에 달했다. 그리고 비유럽 국가 중 가장 중요한 미국의 경우 육군 규모는 보잘 것 없었지만 전시 동원능력은 유럽의 어떤 국가보다 막강했다.

전쟁 수행이 보다 복잡해 지면서 군대에 필요한 보급도 마찬가지로 복잡해 졌으며 병사 일인당 필요한 보급량은 병력 증가 보다 더 급속히 늘어났다.
예를 들어 1870년 당시 독일 육군의 군단 사령부 수송대의 마차 대수는 30대 였으나 1914년에는 두 배로 늘어났다. 1870년 전쟁에서 북독일 연방이 보유한 대포는 1,585문 이었으나 1914년 독일 제국이 보유한 대포는 거의 8,000문에 달했다. 게다가 1914년 당시의 무기는 발사속도가 더 빨라졌으며 1890년대에 등장한 기관총은 대표적인 사례였다. 유압식 제퇴기와 포미장전 방식을 채택한 1914년의 대포는 1866년 당시의 대포에 비해 발사속도가 3-4배 늘어났으며 병사 세명이 조작하는 분당 발사속도 600발의 빅커스 기관총은 1866년 당시 1개 보병대대의 탄약 소모량의 절반을 소모했다. 육군 규모의 증가와 무기 성능의 개선으로 전쟁이 벌어질 당시 각 국 육군이 하루의 전투에 보급해야 하는 물자의 양은 대략 (1870년 전쟁의) 12배 이상 늘어났다.
이렇게 필요한 보급품의 양이 엄청나게 증가했기 때문에 1차대전이 일어날 당시 각 국의 정치인과 군인들이 단기전을 예상한 것도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 정치인들과 군인들은 만약 장기전으로 들어간다면 경제적으로 국가가 붕괴될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Ivan Bloch같은 사람들은 장기전으로 간다면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쨌건 간에 유럽인들은 이런 변화가 미치는 영향을 직접 느낄 수 있게 됐다.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1870-71년 전쟁에서 프로이센군 포병의 탄약 소모량은 포 1문이 5개월 간 평균 199발 이었다. 1914년 당시 유럽 각국 중 가장 전쟁 준비가 잘된 독일은 포 1문 당 탄약 1,000발을 비축한 상태에서 전쟁에 들어갔으며 이정도면 충분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1,000발로 6개월을 버틴다는 예상과는 달리 불과 1개월 반 만에 비축량은 모두 바닥이 나 버렸다.
다른 나라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모든 교전국들이 1914년 말과 1915년 초 까지 이른바 “포탄 위기”를 겪었다. 일부 국가, 특히 러시아는 이때의 타격에서 회복되지 못했으며 다른 국가들의 원조에도 불구하고 항상 포탄 부족에 시달리다가 결국에는 전쟁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독일은 발터 라테나우(Walter Rathenau)가, 그리고 영국은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가 새로운 전쟁 상황에 직면해 행정 체계를 쇄신하고 산업 동원에 박차를 가했다.

1916년이 되자 주요 교전국들은 전쟁 초기의 문제들을 극복하고 마침내 본격적인 총력전 체제로 들어갔다.
약간의 통계를 인용하면 영국의 경우 연간 대포 생산량이 91문에서 4,314문으로 증가했고 탱크 생산은 전무하던 것이 150대로, 항공기는 200대에서 6,100대로, 그리고 기관총은 300정에서 33,500정으로 증가했다. 그리고 다시 1918년에는 대포 8,039문, 전차 1,359대, 항공기 32,000대, 기관총 120,900정으로 증가했다.
그리고 일일 기준으로 전투 사단의 보급품 소요량은 1914년에 55톤에서 1916년에는 거의 세배로 증가했다. 근본적으로 병사들과 견인용 동물에게 필요한 보급량은 변화가 없었다. 즉 대부분의 보급 소요의 증가는 각종 장비의 증가 때문에 발생했다고 볼 수 있으며 장비에 필요한 보급은 사단 보급량의 60-75%를 차지했다. 가장 중요한 보급품은 탄약이었으며 차량의 증가로 휘발유 및 윤활유의 소모도 크게 증가했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교체용 장비(특히 야전 정비가 여의치 않은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와 예비부품 이었다. 여기에 막대한 양의 지뢰, 철조망, 콘크리트, 철판, 널판지 등 참호전에 필요한 물건들의 소요도 엄청났다. 보급품의 종류는 매우 다양했고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모두 공장에서 생산되는 물건이었다. 마침내 군대가 야전에서 주변의 거주지에서 보급을 조달할 수 있는 시대가 끝난 것 이었다.

이렇게 역사상 유례가 없던 거대한 보급 혁명으로 보급의 중요성이 병사들의 식료품과 말 먹이에서 기계 장비로 옮겨 가면서 모든 국가들이 총력전 체제로 전환할 수 있었고 또 그렇게 돼야 했다. 총력전 체제로 전환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보급 소요량이 크게 증가한 데 비해 보급품을 전방으로 추진하는 기술적인 발전은 1870년 이래 매우 더딘 수준이었다는 점에 있다.
19세기 후반 이래 철도의 효율이 증가하고 또 철도망이 더 조밀해 진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어 유럽의 철도 연장은 101,000km에서 322,000km로 늘어났다. 그러나 철도 수송 체계의 비융통성과 취약성은 1914-18년의 전쟁 기간 동안 여지없이 드러나 버렸다. 이전 전쟁에서도 마찬가지 였지만 철도는 보급품을 싣고 내리기 위해 여러 부대 시설이 필요했으며 철도역 같은 시설들은 적의 기습으로부터 보호 받기 위해 전선으로부터 수십 km 떨어져 있어야 했다. 1870년 전쟁과 마찬가지로 1914년에도 철도역과 전방을 이어주는 수단은 말이 끄는 마차였다. 이런 방식으로는 계속해서 증가하는 전방의 보급소요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이 결과 유럽 각국의 군대는 과거와 비교해서 보급 종단점에서 멀리 진격할 수 가 없게 됐다. 구스타프 아돌푸스나 말버러, 나폴레옹, 몰트케(특히 앞의 세 사람은) 같은 지휘관들은 적의 영역으로 깊이 들어가더라도 충분히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1차대전이 발발하고 몇 주 뒤 벨기에와 북부 프랑스의 철도 시설이 파괴되자 슐리펜 계획은 처음부터 차질을 빚게 됐다. 설사 독일군이 마른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더라도 보급 문제 때문에 더 이상의 진격은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뒤에 기관총과 참호의 활용, 또 유선전화를 이용한 지휘 통제 체계의 문제점 때문에 결국에는 작전적 방어가 작전적 공세보다 더 위력을 발휘하게 됐다. 이런 방어 우위 경향으로 모든 교전국들은 한층 더 동원체제에 박차를 가하게 됐다. 이런 점에서, 보급의 특이한 문제, 즉 전방의 소요량과 이를 추진할 기술적 능력의 불균형이 총력전 체제를 가져오게 됐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이런 대규모의 보급 소요가 총력전을 불러왔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공격하는 쪽이건 방어하는 쪽이건 보급 소요는 엄청났고 특히 1916년 이후로는 급격히 증가했다. 영국군은 솜 공세당시 공격 준비사격을 위해 1,200,000발의 포탄을 준비했는데 이것은 무게로 따지면 거의 23,000톤에 달했는데 이것은 나폴레옹이 보로디노 전투에서 사용한 포탄 양의 100배를 넘는 것 이었다. 만약 첫 번째의 대공세가 돈좌될 경우 그 다음의 공격 준비사격은 더 강력해 졌다.
예를 들어 1917년 6월 Messiness 전투에서는 350만발의 포탄이 발사됐으며 50만 톤의 폭약이 사용됐다. 2개월 뒤의 이프르 전투에서는 4,300,000발의 포탄이 발사됐으며 무게로는 107,000톤에 달했다. 이 무렵 미국의 공장들은 월간 5,000~6,000톤의 무연화약을 생산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남북전쟁 전 기간 중 남부군이 사용한 흑색화약과 비슷한 규모였다. 이렇게 엄청난 규모의 물자가 필요했기 때문에 교전국들은 산업을 총 동원했고 더 많은 것을 전쟁에 쏟아 넣었다. 영국의 경우 1914년 국가총생산의 15%였던 전쟁예산이 1918년에는 85%까지 치솟았다.

약간 다른 관점에서 서부전선을 살펴보면 이런 20세기 초 보급의 특이한 문제점들은 모든 작전을 과거의 공성전과 비슷한 유형으로 만들어 버렸다.
각각의 공세를 위해서 막대한 양의 물자가 생산되어 후방에 대규모로 축적된 뒤 전방의 특정한 지점으로 추진되었다. 그리고 공격 개시일이 되고 명령이 떨어지면 엄청난 포탄의 폭풍이 전선을 휩쓸었다. 항상 성공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대규모 포격은 적의 방어선에 상당한 타격을 입힐 수 있었고 특히 1918년 독일의 춘계 공세와 하계 공세 기간이 그런 경우였다.
그리고 공세가 성공하면 다음 공격을 위해서 수많은 병력과 막대한 무기, 통신망, 보급품이 전방으로 추진됐다. 그러나 이런 진격은 결국에는 철도 종단점에서 더 멀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전장지역은 후퇴하는 적에 의해 초토화 되고 또 수많은 포탄구멍으로 엉망이 돼 있었기 때문에 가장 기초적인 수송수단, 즉 말이 끄는 수레나 사람 말고는 사용할 수가 없었고 이런 식의 보급추진은 진격하는 전방 부대를 도저히 따라 잡을 수 없었다. 그리고 솜 전투 처럼 유선 전화에 의존하는 지휘 통신 체계가 붕괴될 경우 초기의 공격이 성공을 거두더라도 후속 부대가 제때 투입되지 못 해 진격이 중지되었다. 보급 문제가 작전과 전략적 문제를 압도하게 되자 양 측의 지휘관들은 결국에는 비슷한 방식을 더 크게 반복하는 것 말고는 도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