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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3월 7일 수요일

데자뷰 - (3)

할리우드 영화 300에 내재된 오리엔탈리즘

영화는 다르되 기사는 어디에선가 많이 본 듯한 기사다. 내용도 익숙한 내용이다. 정말 예전에 썼던 기사에 명사만 고쳐서 내 놓은게 아닐까?

2007년 2월 12일 월요일

이덕일, 텍스트 계의 김성모인가?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서점에 갔다가 또 이덕일씨의 “신작”, 그 위대한 전쟁이라는 물건을 봤습니다. 이건 뭐 김성모 화백도 아니고…. 대중적인 역사서를 표방하면서 책을 붕어빵 찍듯 찍어내는걸 보면 정말 이 양반도 궁극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학자들이 대중과의 소통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좋습니다. 글쓰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자신의 글을 몇 명 안되는 전문연구자들만 읽는 것 보다는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읽고 소통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랄 것 입니다. 하지만 대중과의 소통이 중요하다고 해서 농담 따먹기 수준으로 놀면 안되겠지요.

이덕일씨는 종종 언론을 빌려 폐쇄적인 학계가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것 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몇 명이나 믿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덕일과 비슷한 문제를 하소연 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특히 자신의 전문 분야가 아닌 분야의 글을 쓸 경우 그 방면의 전문가들로부터 사이비 취급을 받게 되지요. 국내에도 번역된 “블랙 아테나”의 저자인 마틴 버날도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전략) 이집트학 전공자들은 잡다한 지식을 통해 어설프게 공부한 비전문가들이 이집트 연구에 뛰어드는 것을 매우 끔찍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매우 많은 수의 이집트학 전공자들은 나를 이런 어설픈 돌팔이로 분류하고 있다. 내가 미국 이집트학 연구센터(ARCE, American Research Center in Egypt)의 연례 세미나에 내 저작에 대한 토론을 위해 갈 때마다 누군가의 빈정거림을 듣게된다. “이야. 황당한 만화 같은 소리로군!”
Black Athena Revisited에 글을 기고한 학자들은 그나마 나의 연구에 대해 진지하게 대응하고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내 연구가 어설픈 돌팔이들, 특히 아프리카 중심주의자들을 선동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Martin Bernal, Black Athena writes back : Martin Bernal responds to his critics, (Duke University Press, 2001), p23

이덕일과 버날은 주류학계로부터 좋지 않은 평가를 받고 있지만 차이점이 하나 있습니다. 버날은 주류학계에서 진지하게 대응하는 연구를 하는 반면 이덕일은 완전히 무시당하는 잡글을 양산하고 있다는 점 입니다. 최소한 버날은 블랙아테나를 집필하기 위해서 해당 언어를 공부하는 열의를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덕일은 그야말로 무책임하게 환단고기 따위나 들먹이고 있지요.

서점에서 아마존 파괴의 직접적인 원흉을 대하고 나니 약간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이덕일 같은 돌팔이를 몰아내기 위해서는 관심을 끊어 버리는 게 상책이라는 생각 뿐 입니다.

2007년 1월 4일 목요일

4일자 중앙일보 기사

오늘자 중앙일보에 아주 흥미로운 기사가 하나 났습니다.

북한 파워 그룹 대해부 <상> 권력 지도가 바뀌었다


권력서열에서 인민군의 약진이 두드러 지고 있다는 내용이군요. 인민군 고위 간부들은 노동당원을 겸하고 있으니 당내 서열도 당연히 높아졌겠지요. 아주 흥미로운 현상입니다.
50-60년대에 군대에 대한 당의 장악력을 철저히 하기 위해서 군 간부들을 두들겼던 것과 비교하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선군정치 타령을 줄기차게 해 대더니만 결국 이런 결과가 나오는군요.

스탈린 동무의 경우 군대의 목소리가 커질 것 같으면 적절한 선에서 손을 봐 주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쓸데없이 목소리를 높였던 투하체프스키가 골로 간 것이나 허파에 바람이 들어가 건방을 떨던 주코프가 좌천된 것이 대표적이죠.

그러나 북한은 90년대 중반 지방당 조직이 붕괴된 이후 군대에 대한 의존이 커지고 있어 군대의 목소리가 계속 커지더라도 이들을 손본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앞으로도 이런 추세가 더 강화될 것 같은 찝찝한 느낌이 드는군요.

두 번째로 재미있는 것은 유학파가 줄어들고 김일성 대학 출신이 우세를 보이는 가운데 만경대 학원 출신이 조금 늘었다는 점입니다. 단순히 보면 국내파로 권력 핵심부를 채우고 있는 것 같은데 이들은 별로 개혁 개방에 관심이 없을 것 같아 보이는군요.

2007년에는 대선도 있는데 과연 저 양반들이 어떤 대남정책을 펼칠지 별로 즐겁지 않은 호기심이 당깁니다.

2006년 12월 27일 수요일

황교주님 우리 동네 오셨네~

저는 상당히 불효자식이다 보니 가끔 가다 시골에 계시는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내려갑니다.

그런데 갈 때 마다 동네 근처에 어떤 건물이 하나 지어지는게 가끔 신경이 쓰이더군요. 그리고 또 동네에 있는 어떤 썰렁한 농장 하나가 분주히 돌아가고 있다는 소식도 간간히 들려 왔습니다.

그런데 지난 20일자 한국일보를 보니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더군요.

황우석씨 연구활동 계속

할 말을 잃었습니다. 교주님이 이런 촌구석에 새로이 둥지를 트시다니! 아아. 이 감격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그러나 할 일이 많다 보니 성지 순례를 며칠 미뤄야 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성지를 한번 순례하고 오는 길 입니다.

새해에도 이곳에 오시는 모든 분께 줄기의 은총이 가득하시기를.

라멘.

2006년 12월 20일 수요일

너무 노골적이다....

Einsatzgruppen의 고학력 깡패들에 대한 글에 대해 sonnet님은 후겐베르크 같은 위험인물의 출현 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

후겐베르크 이야기도 나온김에 보니 중앙일보가 인터넷판의 대문에 걸어 놓은 사설은 그냥 지나치기에는 지나치게 찝찝하다. 이거 너무 노골적이지 않은가? 이것 참.

이정도로 속을 드러내도 괜찮을 정도로 사회가 보수화 된 모양이다. 하긴. 박대통령 찬양이 하루 이틀일도 아니고.. 그래도 언론인이라는 자가 이 무슨 지각없는 글질인가. 이미 대한민국에 박정희 오타쿠가 가득찬 마당에 주류언론의 논설위원까지 합류할 필요는 없다.

2006년 10월 29일 일요일

BBC. 한국을 무시하는 게요?

가끔 BBC 사이트를 들어갈 때 기분을 잡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BBC World Service

아니! 베트남어와 인도네시아어 서비스도 하면서 왜 한국어 서비스는 없단 말입니까! 한국에서 영어교육을 열심히 하니까 4800만 전 국민이 영어를 잘 한다고 생각하시는 겝니까? 아 물론 영어 잘하는 사람 많지만 못하는 사람도 많단 말이오!

아아. 한국어가 베트남어에도 밀리다니.

2006년 10월 26일 목요일

독일군 포로송환 완료 뒤 프라브다에 실린 어떤 기사

독일 연방공화국에서는 모든 선전기관들이 석방된 전쟁범죄자들을 영웅이나 순교자로 포장하는데 동원되고 있다. 귀향자들을 수용하는 프리들란트(Friedland) 수용소는 뻔뻔하게도 과거 히틀러의 앞잡이로 전쟁범죄를 저지른 전범들을 찬양하는 무대가 되고 있다. 이와 함께 소비에트 연방에 대해 비난까지 하고 있다는 소문도 들리고 있다.

프라브다 1955년 10월 21일, G. Knopp, Die Gefangenen s.380 재인용


아데나워의 최대 업적 중 하나로 꼽히는 것이 1955년 미송환된 독일인 포로들, 특히 주로 전범으로 분류된 무장 친위대나 고위 간부들의 송환을 성공 시킨 것이다. 무장친위대 소속의 포로들은 소련측에서 씨를 말려버릴 심산이었기 때문에 송환을 계속 거부하고 있었는데 이걸 성공 시킨 것이다.

이때의 일로 흐루쇼프는 "독일인들이 벌써 부터 거드름을 피우기 시작했다"며 내심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포로를 송환한 뒤에도 이런 식으로 심통을 부리기도 했던 모양이다.

어쨌건 별로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다.

2006년 10월 23일 월요일

조선일보의 하영선 교수 인터뷰

북핵 사태를 맞아 신난 조선일보에서 계속해서 전문가 인터뷰를 내보내고 있다. 오늘의 타자는 하영선 교수인 모양이다.

인터뷰 내용에서 전반적으로 걸린 것은 아무래도 이 분의 분석이 강대국의 입장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그런지 우리의 대응은 강대국의 결정에 수동적일 수 밖에 없다는 내용으로 귀결되는 것 이다. 솔직히 나도 약간은 비슷한 견해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그냥 그런가 보군 하면서 넘어가면 좀 찝찝하지 않은가.

역시 심각한 문제를 판단하기에는 지식이 짧아 이런 식의 부실한 딴지 걸기 밖엔 못 하겠다.

아. 그런데 하영선 교수의 인터뷰에서 이 부분은 꽤 설득력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엔 대북결의는 안보리에서 15대0으로 통과됐다. 국제사회가 ‘북한책임론’을 만장일치로 지지해줬다는 의미다. 여권은 국내정치와 대선을 기준으로 국제정세를 보기 때문에 미국과 북한의 의도를 읽지 못한다. 북핵문제는 ‘동맹의 정치판’으로 읽어야 답이 나온다.


솔직히 여권의 문제 해결 능력에 대해서는 굉장히 회의적이다. 물론 지금 열심히 떠드는 야당들이 정권을 잡는다고 해도 이런 골치아픈 문제를 해결하는게 어렵기는 마찬가지 겠지만.

2006년 9월 25일 월요일

아프가니스탄 여성운동가 피살

sonnet님의 검역소에 있는 아프가니스탄전 관련 뉴스를 보러 갔다가 이런 뉴스도 보게 됐다.

참 이동네에서는 여성운동 하기가 힘들구나. 목숨을 내걸어야 하는 팔자라니.

과연 이 동네는 이슬람이 들어오기 전 불교를 믿을 때에도 여성들을 이렇게 억압했을까?

2006년 9월 18일 월요일

9월 18일자 조선일보의 괴이한 기사...

오늘 어떤 사람에게서 조선일보에 이런 기사가 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대중적인 책 내면 이단아 취급"

글쎄.. 내가 여기에 대해서 뭐라 말할 만큼 아는게 많진 않으나 기사 중에서 이 부분은 매우 수긍하기 힘들었다.

숭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덕일씨는 역사학 분야에서 베스트셀러를 내고 있지만 그의 책은 학계에서 거의 인용되지 않는다. 이씨는 “그런 경직성이 대학의 위기, 인문학의 위기를 가져왔다”고 말했다.


내가 봤을 때 이덕일씨의 책이 인용되지 않는 이유는 대중적이어서가 아니라 깊이가 없고 진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상상력으로 종이를 메우는 건 소설이지 역사가 아니다.

2006년 9월 13일 수요일

이래서 한국일보를 본다

오늘자 한국일보에 아주 멋진 기사가 나왔다.

일부분을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그런데도 중국이 역사를 빼앗고, '민족혼'을 빼앗는다고 온 나라가 소란하다. 처음에 '민족혼'을 위협한다더니, 이제는 '영토 야욕'을 성토한다. 반발의 방향도 혼란스럽다. 중국이 고구려 유적을 홀대해도 난리고, 치장해도 시끄럽다. 언제는 북한이 국경획정 협상에서 득을 봤다더니, 이제는 중국이 성산(聖山)인 백두산을 독차지하려 한다고 법석이다.

그런 와중에 얄궂은 민족주의만 기승을 부린다. 중국의 역사 왜곡을 국수주의적 시각이라고 비난하면서 그 근거로 한국 민족주의를 내세운다. 단언하건대 이런 식으로는 절대로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설 수 없다.

역사 서술의 잣대로 지역을 내세우는 사람들에게 아무리 민족 중심의 역사 서술을 내세워 봐야 얘기가 통하지 않는다. 허깨비를 좇고 있는 중국의 몸짓에 덩달아 춤을 추는 격이다. 그런 허망한 몸짓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가끔 역사를 편의점 간판 정도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아 답답했는데 그런 양반들이 이 글을 한번 읽어 주셨으면 한다.

이래서 한국일보를 본다. 멋지다!

2006년 8월 14일 월요일

귄터 그라스의 인터뷰

귄터 그라스가 Frankfurter Allgemeiner Zeitung을 통해 자신이 전쟁 말기에 무장친위대 대원으로 복무했다는 사실을 밝히자 세상이 조금 시끄러워졌다.

이게 8월 11일자 기사이니 한참 뒷북은 뒷북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귄터 그라스가 무장친위대 대원이었다는 이야기 가지고 시끄러운게 많으니 한번 올려본다.

번역이 엉망이고 문장이 투박해서 읽으시는 분들의 양해를 먼저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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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60년이 지나서야 침묵을 깼는가?

2006년 8월 11일

귄터 그라스가 60년 만에 최초로 자신이 무장 친위대(Waffen SS) 대원이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는 15세에 잠수함 승무원에 지원했었으며 17세에는 노동봉사단으로 “소집(einberufen)” 됐다가 무장친위대 “프룬츠베르크” 사단으로 입대하게 됐다. 그라스는 9월에 출간될 자신의 회고록 “양파 껍질을 벗길 때(Beim Hauten der Zwiebel)”에서 단치히에서 보낸 유년기와 목숨을 잃을 뻔 했던 군인으로 보낸 전쟁 막바지 기간, 그리고 포로 시기와 전쟁 직후의 혼란기에 대해 이야기 할 예정이다.

-회고록의 제목이 “양파 껍질을 벗길 때” 입니다. 여기서 양파란 무엇을 뜻하는 건가요?

이번 회고록을 어떤 식으로 쓸 것인지 결정해야 했는데 이건 매우 어려운 일 이었습니다. 우리의 기억과 자화상은 왜곡될 가능성이 있고 실제로 왜곡되는 경우도 많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니까요. 우리는 과거의 경험에 대해 변명하고, 미화하며, 하나의 일화로 치부하려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진실성에 대한 의문은 모든 문학적 회고록이 안고 있는 문제인데 나는 이런 문제들을 드러내고 밝히는 형식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양파라는 비유를 들었습니다. 마치 양파의 껍질을 벗기기 시작하면 계속해서 껍질이 나오 듯 글을 쓸 때 계속해서 문장이 이어지면 그 의미가 다소 명확하고 읽을 만 해 지지만 결국 생동감은 잃게 됩니다.

-회고록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나는 회고록에 대해 이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회고록을 쓰기에 앞서 시작의 어려움이 아니라 극복해야 할 무엇인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대부분의 회고록들은 독자들이 한 가지 사실이 그랬고 다른 것들은 사실이 아니라고 믿게 하려고 합니다. 나에게 있어 형식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솔직하게 서술하고 싶습니다.

-이번 회고록은 유년기부터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이야기 대신 전쟁이 발발한 열 두 살 되던 때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이 시점부터 이야기를 시작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2차 세계대전은 요점(Drehpunkt)이자 핵심(Angelpunkt) 입니다. 전쟁의 발발로 제 가족도 외부의 문제에 휩쓸리게 됐기 때문에 2차 대전은 제 유년기의 끝을 알리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 삼촌은 폴란드의 우체국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전쟁이 발발하자 연락이 끊어졌고 다시는 사촌들과 만날 수 없게 됐습니다. 나중에 듣기로는 즉결재판으로 처형 됐다고 하더군요.
제 어머니의 외가인 카슈브계(Kaschubish) 친척들은 전쟁 이전만 해도 자주 왕래가 있었는데 갑자기 연락이 끊어졌습니다. 전쟁이 발발하고 나서 처음으로 외할머니가 우리를 찿아 오셨는데 농장에서 어떤 물건을 가져 오셨고 우리집에서 석유를 얻어 가셨죠. 물자가 부족해져서 외할머니가 계신 곳에서는 석유를 구할 수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가족간의 유대는 더 굳어졌습니다. 그러나 제 부모님은 나중에는 현실에 맞춰 그때 그때의 실정에 맞춰 생활해야 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선생님의 기억과 성향을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찾고 있습니다. 회고록을 쓰는데 도움이 된 가족들의 자료는 없습니까?

저는 피난민 꼬마(Flüchtlingskind) – 저는 이제 80대를 바라보는 나이 이지만 아직도 스스로를 이렇게 부릅니다 – 이기 때문에 그런 물건이 없습니다. 제 책에서 보덴제, 아니면 뉘른베르크 출신인 친구들이 여전히 졸업증명서와 그들의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긴 물건들을 가지고 있다고 언급했습니다. 저는 이런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지금 남은 것은 제 어머니가 보관하신 사진 몇 장이 고작 입니다. 또 저는 나에게 유리한 이야기를 할 때에도 좋지 않은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선생님이 전쟁 중 잃어 버린 유년기의 물건 중에는 처음으로 쓴 소설의 원고도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네, 그 소설은 신성로마제국의 제위가 공석이었던 13세기의 대공위시대(Interregnums)를 배경으로 하는 역사소설 이었습니다. 그 소설은 중세의 비밀 재판,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몰락, 죽음과 혼란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었습니다. 그 소설에서 제가 창조한 가공의 인물들은 1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모두 죽습니다. 다시는 등장하지 않지요. 그렇지만 저는 이 소설을 쓰면서 많은 것을 배웠고 그 뒤로 등장인물들을 효율적으로 쓰게 됐습니다. 툴라 포크립케(Tulla Pokriefke)와 오스카 마체라트(Oskar Matzerath)는 처음 등장한 소설에서도 살아 남고 그 뒤에 쓴 소설에도 등장하지요.

-선생님은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쉬라흐(Baldur von Schirachs)의 진술을 듣고 나서야 독일의 대량 학살에 대해 알게 됐다고 여러 차례 언급했습니다. 그렇지만 선생님은 최근 처음으로 무장친위대 대원이었다는 사실을 밝혀 모두를 놀라게 했습니다. 왜 지금 그 사실을 밝히시는 것 입니까?

무장친위대 대원이었다는 사실은 언제나 저를 짓눌렀습니다. 이 시기에 대해 그 동안 침묵했던 이유는 이번에 나올 회고록에 설명해 놓았습니다. 드디어 털어 놓을 때가 된 것이지요...

-무장친위대에 배속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입대를 결심하게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 아니면 친위대로 징집된다는 명령이 따로 있었습니까?

저 자신도 제가 어떻게 친위대로 징집되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소집 명령서를 통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아니면 제가 처음 드레스덴에 도착했을 때 그 사실을 알게 됐을까요? 저는 그 이상은 모르겠습니다.

-노동봉사단에 소속돼 있었을 때 동료들과 무장친위대에 입대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한 적은 없습니까? 그시기에 소년들이 모이면 그런 주제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았습니까?

회고록에도 적어 놨는데 당시 소년들의 공통적인 관심사는 칼을 연마하는 것 이었습니다. 다른 것은 없었습니다. 이것 뿐 이었습니다. 저는 황달에 걸렸었는데 한 2주 정도 병을 앓았습니다. 황달이 나은 뒤에는 다시 칼 가는 것을 했고 낡은 도구들로 약간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어쨌든 이것은 기록했습니다.

-그것을 꼭 기록해야 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어느 누구도 선생님에게 그것을 강요하지는 않았습니다.

내 스스로 원해서 한 것 입니다.

-왜 자원해서 군에 입대하려 했습니까?

나는 그저 거기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답답함으로부터, 가족으로부터. 이런 것들을 끝내고 싶었기 때문에 군에 자원해서 입대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기억에 남는 일 이었습니다. 군에 지원했을 때 저는 15세 였는데 지원 이후의 과정은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같은 나이 또래들이 많이 있었는데 노동 봉사단으로 배치됐고 일년 정도 지난 뒤 갑자기 전출 명령서를 받게 됐습니다. 그리고 아마 드레스덴에 도착해서야 우리가 무장 친위대로 가게 됐다는 것을 알게 됐을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끼셨습니까?

그 당시에 말인가요? 아닙니다. 나중에서야 친위대에 입대한 것에 대해서 죄의식을 가지게 됐습니다. 나는 이후 항상 의문을 가지게 됐습니다. 나는 그 때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깨달을 수 없었는가?

-선생님은 같은 세대 중에서는 처음으로 과거의 과오를 밝히고 독일 역사의 문제에 대해 공개적으로 다뤘습니다. 선생님은 무엇을 위해 비판을 하셨던 것 입니까?

네. 오늘날 독일에는 나치에 저항했다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히틀러가 권력을 잡을 수 있었을까요?
50년 전으로 되돌아 가서 내가 처음 양철북을 구상하게 된 발단을 알려주고 싶군요. 무조건 항복이 아니라 독일이 붕괴된 1945년 이전에 어떤 일이 일어 났었습니까?
독일의 상황은 암흑 그 자체였습니다. 불쌍한 독일인들은 검은 옷을 입은 무리들의 유혹에 빠져들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 이었습니다. 저는 어린시절 이 모든 것을 생생히 체험했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열광과 감격에 휩싸인 채로 말입니다. 그리고 또 저 역시 유혹에 빠진 것 입니다.
저는 양철북과 곧 출간될 제 회고록을 통해 이 열광과 이것의 원인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2006년 6월 16일 금요일

스스로를 진보라 자칭하는 자들의 사고 수준...

내가 특별히 싫어 하는 것 중 하나가 '딱지 붙이기'다.

그럼 딱지 붙이기란 어떤 것인가?

오마이뉴스에 실린 이 기사를 보시라.

이 기사를 쓴 기자는 매우 위험한 발상을 두뇌에 탑재하고 있다.

이 기사 중 몇몇 부분을 발췌해 보자.

"일제가 한국사를 왜곡하기 위해 조선총독부 중추원 산하에 급조한 조선사편수회에서 부역하며 식민사관 총서인 <조선사> 간행에 관여했고..."

조선총독부가 간행한 <조선사>는 그냥 사료집이다. 이 기사를 쓴 기자는 결코 <조선사>를 결코 읽어 보지 못했다는 걸 잘 보여주고 있다.

읽지도 않고 그 내용을 알고 있으니 신기하고 게다가 '식민사학'으로 분류까지 해 놓으니 읽는 사람이 민망하다.

어떤 대상을 비판하려거든 그 대상에 대해 좀 알고 해야 되는것 아닌가?

"이병도(실증사학파의 대부)가 지식인이자 역사가로서의 지조를 내팽개치고 외세의 간교한 권력과 타협하며 알량한 일신의 안위와 가족의 행복(?)을 추구하고 있을 때 또 다른 역사가인 백남운(사회경제사학파의 대부)은 옥고를 치렀고, 신채호(민족사학파의 대부)는 망명을 택했기에 더욱 그렇다."

도데체 '민족사학'이 뭐냐? 그게 실체는 있는거냐? 사학이면 사학이지 민족사학은 도데체 뭐람.
마치 아리아 물리학, 아리아 철학을 외치던 나치들을 연상시킨다. 그럼 신채호가 대부로 있는 민족사학파라는건 도데체 뭐냐? 어떤 사람이 민족사학파냐?

사학계가 무슨 조폭이냐?

"실증사학'이라는 그럴듯한 가면으로 위장한 이병도가 사실은 친일 매국노의 상징인 이완용과 같은 가문(우봉 이씨)이었으며, '가문의 수치'를 은폐하기 위해 원광대 박물관에 소장돼 있던 이완용의 관 뚜껑이라는 역사적 유물을 가져다가 일방적으로 태워버렸다는 엽기적(?) 사실과도 조우하게 된 것이다."

실증사학이라는 그럴듯한 가면이라? 조선일보식 글쓰기를 오마이뉴스에서 보는게 하루 이틀은 아니지만 한 대상에 대한 맹목적인 증오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정말 경멸스럽다.

"이병도가 해방 이후 서울대 사학과(한국사 분야)를 접수한 뒤 주류 역사학계는 이병도 후학들에 의해 장악됐다. 그렇게 '이병도 사관(史觀)'이 득세하는 분위기 속에서 그와 정반대의 길을 걸었던 신채호 같은 인물은 철저히 잊혀진 인물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부분은 정말 사람을 짜증나게 한다.
민족사학이란게 뭔지도 모르겠지만 이 글을 쓴 사람은 실제로 저 바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아는가 궁금하다.

일단 이병도에 식민사학 딱지를 붙이고 들어가는 것 부터 우습지만 한국 사학계가 이병도 사관이 득세하고 있다는건 어떻게 얻은 결론인지 모르겠다.

이 사람이 최소한 1960년대 부터 현재까지 나온 고-중세사 분야의 박사학위 논문 및 단행본을 모두 검토한 뒤 이런 결론을 내렸다면 인정해 주겠지만 그랬을 가능성은 커녕 제대로 된 논문도 몇 편 제대로 안 읽어 봤다고 99% 확신한다.

오마이뉴스가 갈수록 맛이 가는걸 느끼는건 이렇게 증오로 눈먼 멍청이가 쓰는 글을 기사랍시고 올릴때다.

제발 이런 멍청한 글은 올리지 마라. 이러니까 소위 '진보'라는 세력에 정나미가 떨어지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