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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5월 21일 토요일

한국의 ROTC제도 도입에 대한 잡담

한국의 ROTC(Reserve Officers Training Corps)는 그 명칭에서 알 수 있듯 미국의 ROTC제도의 영향을 일정 부분 받은 것 입니다. 하지만 한국의 ROTC 제도가 실시된 배경은 미국과는 조금 다르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미국의 ROTC제도는 미국의 1차대전 참전 1년 전인 1916년 처음 도입되었습니다. 미국은 평화시에 대규모 육군을 보유하지 않던 국가였기 때문에 전쟁이 임박하면서 장교, 특히 초급장교를 대규모로 충원할 제도가 필요했고 그 결과 ROTC가 도입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의 ROTC는 군대의 대규모 증강을 염두에 두고 시행된 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ROTC제도는 1960년 도입되었고 1961년 부터 본격적으로 실시되었습니다.  이 무렵에는 한국군의 증강이 완료되어 오늘날과 비슷한 수준에 있었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듯 한국의 ROTC제도는 대규모의 군대, 특히 대규모의 육군이 만들어진 다음에 여기에 필요한 장교단을 육성하기 위해 도입된 것 입니다. 명칭과 기본적인 성격은 미국의 ROTC와 같지만 제도가 도입되는 과정은 미국과 정반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ROTC가 육군의 대규모 증강을 앞두고 실시된 선행조치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면 한국의 ROTC는 육군이 급속도로 팽창한 뒤 그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실시된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59년에 육군본부 인사국에 있던 손창규(孫昌圭) 대령은 육군대학에서 발간하는 『軍事評論』5호에 육군의 인사문제에 대한 글을 한 편 기고했는데 이 글에는 1년 뒤 도입될 ROTC제도의 성격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대목이 몇 군데 있습니다.

현역병역의무연한을 무한정하고 넘어서 장기복무하게 되는 것을 꺼려하여 대부분의 대학졸업자들이 단기복무를 희망하지 장교복무를 지원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곧 국민의 인력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는데 배치되는 것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동원시에 대량으로 필요한 예비역 초급장교를 확보하는데 있어 대학졸업자는 병(兵)으로 있기 때문에 현역복무연한을 훨씬 넘어서 장기 복무하다가 도태당한 자들을 그 대신으로 유지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예비군의 건전한 발전에도 지장을 초래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라 하겠다. 단기복무제도와 공정한 병역의무의 의의와 가치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이 제도를 발전시킬 상태에 놓여 있지 못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만시지탄의 감을 느끼는 상태로 전환되었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孫昌圭,「오늘의 淨軍과 내일의 淨軍」『軍事評論』5號(1959. 4), 12쪽

**********

단기복무장교제도가 없으면 대학졸업자의 대부분이 장교희망을 안 할 것이다. 이러한 현황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장교가 대학졸업한 병사를 거느려야 되는 결과가 될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단기 현역복무장교제도가 없기 때문에, 즉 장교로 임관되면 전원이 장기복무자의 과정을 밟어야 되므로 경비의 난비(亂費)는 물론 많은 장교의 강제 도태 문제를 불가피하게 만들고만다. 사실인즉 우리는  휴전직후부터 이 제도를 수립했어야만 되었던 것이다. 이들을 양성하는데 소요되는 경비는 예비군의 장교양성비도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단기복무후 비교적 장기간 예비군의 장교로 복무하기 때문이다.

孫昌圭, 위의 글 16쪽

손창규의 글은 당시 한국군이 직면한 문제를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먼저 군대가 대규모로 증강된 만큼 장교단도 폭증했는데 이것은 장교의 진급적체를 사회문제로 만들정도 였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장교단은 많은수가 직업군인을 희망하고 들어왔기 때문에 이들을 정리하는 것도 문제였습니다. 설사 장교단을 한번 정리한다 하더라도 장교 충원방식의 방식이 바뀌지 않는다면 이런 문제는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미국에서는 한국군, 특히 육군의 감축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었지만 이승만 정부는 병력 감축에 미온적이었습니다.(그리고 여기서 약간의 병력만 감축된 뒤 60만의 대군이 오늘날 까지도 유지되고 있지요.) 결국 장교인사문제가 심각한 상황이 되어서야 이를 개선하기 위한 방안이 고려되기 시작했던 것 입니다.

그런데 당시의 장교 처우는 매우 좋지 않았고 언론에서 “싸구려군대”라고 자조할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군대가 필요로 하는 고등교육을 받은 인력은 군대에 장기복무하는 것을 기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이런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서 장교 충원방식의 변화가 필요했고 ROTC 제도는 이점을 개선해 줄 수 있는 대안으로 꼽혔습니다. 1950년대 말 부터 1960년대 초에 걸쳐 장교단의 교체가 실시되고 ROTC와 같은 개선된 제도가 도입됨으로서 1950년대 말의 심각한 장교 인사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었습니다.

ROTC 라는 미국의 제도가 한국의 실정에 맞게 변용되는 과정은 꽤 흥미롭습니다. 제가 인용한 이 짤막한 글에서는 그 과정의 단편적인 면을 보여줄 뿐이지요.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평시에도 대규모 육군이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안보적 환경입니다. 사실 한국군을 논하는데 있어 이걸 빼면 전혀 이야기가 전개될 수 없지요.

2010년 8월 26일 목요일

그럴싸한 변명

어떤 논문을 읽다가 웃기는 구절이 있어서...

패배한 이탈리아 군대의 장군들은 놀라울 정도로 패배의 원인을 자신들의 부하들에게 돌리는 경향이 있었다. 라 마르모라(Alfonso Ferrero La Màrmora)도 1866년(쿠스토자 전투에서 패배한 뒤)에 패배의 책임을 부하들에게 돌렸다. 바라티에리(Oreste Baratieri)도 아도와 전투에서 참패한 뒤 이탈리아인 부대를 탓했다. 그리고 카도르나(Luigi Cadorna)는 1917년 카포레토 전투에서 패배한 뒤 이렇게 변명했다.

“나는 쿠스토자와 아두와에서 패배했었던 군대를 지휘했을 뿐이다.”

John Gooch, “Italian Military Competence”, Journal of Strategic Studies, 5-2(1982), pp.262-263

비겁한 변명이지만 나름 그럴싸하게 들리는군요.

그럴싸한 변명

어떤 논문을 읽다가 웃기는 구절이 있어서...

패배한 이탈리아 군대의 장군들은 놀라울 정도로 패배의 원인을 자신들의 부하들에게 돌리는 경향이 있었다. 라 마르모라(Alfonso Ferrero La Màrmora)도 1866년(쿠스토자 전투에서 패배한 뒤)에 패배의 책임을 부하들에게 돌렸다. 바라티에리(Oreste Baratieri)도 아도와 전투에서 참패한 뒤 이탈리아인 부대를 탓했다. 그리고 카도르나(Luigi Cadorna)는 1917년 카포레토 전투에서 패배한 뒤 이렇게 변명했다.

“나는 쿠스토자와 아두와에서 패배했었던 군대를 지휘했을 뿐이다.”

John Gooch, “Italian Military Competence”, Journal of Strategic Studies, 5-2(1982), pp.262-263

비겁한 변명이지만 나름 그럴싸하게 들리는군요.

2010년 7월 22일 목요일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군인들

한국전쟁은 여러모로 괴상한 전쟁이었습니다. 특히 한국에게는. 근대화된 전쟁을 치를 능력은 커녕 제대로 된 군대조차 조직할 능력이 없었던 한국에게 전쟁은 대재앙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전쟁이 터졌으니 망하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싸워야지요.

가장 큰 문제는 갑자기 늘어난 군대를 먹이는 일이었습니다. 이 시절 한국의 처지는 그야말로 딱해서 군인들을 먹이는 것 조차 똑바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한국전쟁 이전에도 군인들을 배불리 먹일 능력이 없었으니 전쟁이 터지고 군대가 늘어난 상황에서는 안봐도 뻔한 상황이 연출 될 수 밖에요. 1948년 9월 26일의 미군사고문단 기록을 보면 이범석 국방부장관이 국회에 사병의 급식 개선을 위해 추가 예산 편성을 요청하면서 병사 한 명의 일일 칼로리 섭취량이 육군의 기준치인 3,162칼로리에 못 미치는 2,322칼로리에 불과하다는 발언을 했다고 합니다.1) 한국전쟁 당시 미육군의 일일 칼로리 섭취량은 4200~4500칼로리 정도였으니 창군 초기의 한국군의 급양  수준은 미군의 절반 수준을 약간 웃도는 정도였습니다.2) 사실 식단의 질로 따지면 더 형편 없었겠지요. 예전에 썼던 ‘한국군 5사단의 일일 식량 지급’ 이 라는 글에서  한번 다루었지만 전쟁 초기 한국군 전투부대의 일일 칼로리 섭취량은 대략 3100칼로리 수준이었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식단을 보면 영양소의 대부분을 밥에 의존하는 형편이지요. 보급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훈련소 같은 곳에서는 3600칼로리 수준이었던것 같습니다.3)

먹는게 형편없으니 군대가 제대로 돌아가긴 어려웠을 겁니다. 전쟁 당시 한국군의 비전투 장비손실 중 상당수가 춥고 배고픈 병사들이 장비를 팔아 먹을것이나 땔감을 구입했기 때문이라고 하니 말입니다. 미군사고문단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많은 한국군 병사들이 음식이나 땔감을 구하기 위해 소총까지 팔아 치웠으며 자신의 소총을 팔아버린 뒤에는 다른 사람의 소총을 훔쳐 채워넣는 사고가 꽤 많았다고 합니다.4) 가난한 한국군 병사들이 배를 곯는 동안 돈 많은  미군들은 전투식량이 맛이 없어 내다버리고 있었다죠.  백선엽의 회고록에는 포로수용소를 가 보니 포로들이 한국군 보다 더 잘 먹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는 일화까지 있을 정도죠.5) 1953년 5월 12일에 의무병과 선임고문관이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군병원에 입원한 한국군 병사 중 7.6%가 영양실조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영양부족으로 인한 질병인 결핵환자도 포함하면 이 수치는 조금 더 높아집니다. 여기에 11.9%의 결핵환자까지 합하면 거의 20%에 육박하는 수준입니다.6) 게다가 이 외에도 많은 질병이 영양실조가 주된 원인으로 추정되고 있었으니 꽤 심각한 상태였습니다. 이것도 그나마 보급체계가 정비되고 미국의 원조가 꽤 들어온 1953년 5월의 상황이니 1950~1951년 경에는 더 심각했을 것 입니다.

병사들에게 밥도 제대로 못주는 형편이었으니 봉급도 제대로 챙겨주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한국군의 비참한 상황은 미국도 우려하는 문제였습니다. 전쟁 통이라 군인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챙겨줘야 할 판인데 줄게 없을 정도로 엉망이니;;;; 아주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한국군의 비참한 실정 때문에 미국측에서 한국군이 각종 부대사업으로 돈을 벌어들이는 것을 묵인해 줄 정도였지요.

1953년 기준으로 한국군의 급여체계는 다음과 같았습니다.7)

1953년도 기준 한국군의 급여
계급
급여(원화)
실질급여
급여(달러환산)
대장
90,000
85,400
14.23
중장
72,000
68,000
11.35
소장
66,000
62,500
10.41
준장
60,000
56,800
9.46
대령
56,100
53,400
8.90
중령
51,300
48,835
8.14
소령
46,500
44,275
7.38
대위
38,100
36,457
6.07
중위
35,700
34,126
5.68
소위
33,300
31,801
5.30
준위
32,300
30,937
5.15
일등상사
26,100
25,012
4.17
이등상사
24,300
23,171
3.86
일등중사
7,200
7,200
1.20
이등중사
6,000
6,000
1.00
하사
4,500
4,500
0.75
일병
3,600
3,600
0.60
이병
3,000
3,000
0.50

대한민국 육군 대장의 급여가 14달러 밖에 안되는 것도 안습입니디만 이것은 그나마 공정환율인 1달러당 6,000원으로 계산한 것 입니다. 1953년 초 암시장 환율은 1달러당 21,000~25,000원이었으니 이 환율을 적용하면 한국군 대장의 한달 급여가 3달러를 조금 넘는 수준이 되는 것 이었습니다. 육군 이등병은 한달 50센트에 목숨을 걸어야 하니 정말 비참하지요.

글자 그대로 외부의 원조가 없으면 당장 붕괴되어도 이상할 게 없는 수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상태로 전쟁을 위한 대규모 동원을 해야 했으니 국가는 물론이고 동원되는 국민으로서도 난감할 수 밖에요. 국민방위군 같은 대규모 동원계획이 참사로 끝난데는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와 무능이 한 몫 했지만  기본적으로 한국 자체가 그러한 대규모 동원을 할 역량을 결여하고 있었다는 점도 중요하게 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1) ‘Supplemental Budget - FY 1948/1949’(1948. 9. 29), RG 338, PMAG 1948-49/KMAG 1948-53 Box 1
2) ‘Ration for the Armed Force, Korea’ Current ROKA-KMAG Problems(1953. 2. 8), RG 338, KMAG, Box 61 Plan for the Organization of a ROK Field Type Army
3) ‘Ration for the Armed Force, Korea’ Current ROKA-KMAG Problems(1953. 2. 8), RG 338, KMAG, Box 61 Plan for the Organization of a ROK Field Type Army
4) ‘Individual Rifles for ROK Army Soldiers’ Current ROKA-KMAG Problems(1953. 2. 22), RG 338, KMAG, Box 61 Plan for the Organization of a ROK Field Type Army. 이 보고서에 따르면 장비가 부족했던 국립경찰이 병사들의 소총을 강제로 빼앗은 사례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5) 백선엽, 『군과 나』(서울, 시대정신, 2009) 299~300쪽
6) ‘Alleged Undernourishment of ROK Army Patients’(1953. 5. 12), RG 338, KMAG, Box 61 Plan for the Organization of a ROK Field Type Army
7) ’Pay of ROK Army’ Current ROKA-KMAG Problems(1953. 2. 22), RG 338, KMAG, Box 61 Plan for the Organization of a ROK Field Type Army

2010년 4월 4일 일요일

미육군의 인사적체와 주방위군, 그리고 대공황

미국은 1차대전에 승리한 뒤 육군을 대규모로 감축합니다. 미육군은 1차대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전후에도 육군 병력을 50만명 정도로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지만 정치권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베르사이유 조약으로 독일이 사실상 전쟁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대규모 육군의 필요성이 사라졌다고 본 것 입니다. 물론 일본이라는 유력한 가상 적국이 있었지만 일본과의 전쟁은 주로 해군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평시에도 대규모 육군을 유지하는 것은 불필요하다는 견해가 많았다고 합니다. 1920년 6월 4일에 제정된 국방법(National Defense Act)은 육군 병력 상한선을 장교 17,726명으로 포함한 28만명으로 규정했습니다. 하지만 국방법에서 명시한 병력 상한선은 어디까지나 평화시 유지할 수 있는 육군의 최대 규모를 명시한 것이었을 뿐 육군의 규모는 예산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결정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국방법이 제정될 당시 미육군 병력은 약 20만명이었는데 1921년 1월에는 의회가 이것을 175,000명으로 줄이도록 했고 다시 같은해 6월에는 150,000명으로, 그리고 1922년에는 다시 장교 12,000명과 부사관 및 사병 125,000명으로 줄여 버립니다.1) 한편, 정규군을 보조할 주방위군의 병력 상한선은 435,800명 이었는데 이것 또한 실제로는 180,000명 수준에서 유지되었습니다.2)

미 육군은 이렇게 평화시의 병력이 큰 규모로 축소되면서 심각한 인사적체 문제에 시달리게 됐습니다. 군대의 규모가 줄어들었으니 자리를 늘리는 것이 어려웠고 이것은 장교는 물론이요, 사병들이 부사관으로 진급하는 것 까지 매우 어려워 졌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군대라는 것이 피라미드식의 구조를 가진 조직이니 말입니다. 1923년의 통계를 보면 미육군의 소위는 1,184명, 중위는 2,783명 이었는데 대령은 509명이었습니다.3) 하지만 그나마 장교는 나았던 것이 사병들의 경우 진급을 위한 경쟁이 더 치열했습니다(;;;;)  1926년의 통계를 보면 미육군의 부사관 이하 계층의 구성비에서 사병(이등병~일병)이 차지하는 비중이 74.1%였는데 상병에서 하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22.7%, 중사에서 상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3.1%에 불과했습니다. 육군항공대의 경우는 사정이 눈꼽만큼 나아서 사병이 71.5%, 상병에서 하사가 23.0%, 중사에서 상사가 4.6%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4) 소위가 대령으로 진급할 가능성 보다 이등병이 상사로 진급할 가능성이 더 낮았던 셈입니다. 아무래도 직업군인으로 구성되는 군대인 만큼 사병들도 진급에 민감할 수 밖에 없었는데 1차대전 직후의 미육군은 그 점에서 문제가 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병의 진급문제가 당시에는 꽤 심각했는지 이와 관련해서 꽤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5)

한 보병중대의 중대원들이 이등병에서 일등병으로의 진급공고를 읽기 위해 부대 게시판 앞에 모여들었다. 병사 한 명이 불쾌하다는 듯이 투덜거렸다.

" 이놈의 군대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호건은 일등병이 됐는데 이녀석은 겨우 '6년' 복무했단 말이야. 다른 좋은 데로 옮겨야 겠어."

이당시 미육군에서는 상사까지 올라가는 데 보통 24년이 걸렸다고 하는데  육군항공대는 조금 더 사정이 좋아서 16년 정도 걸렸다고 합니다. 게다가 1차대전 직후의 호황으로 일자리가 넘쳐났기 때문에 미육군은 급여 면에서도 민간보다 못했습니다.6) 진급도 잘 안되고 박봉이니 군대가 인기있는 직장일 수가 없었겠지요. 실제로 미육군의 재입대율은 대공황 직전인 1928년 0.47로 신병 두 명이 입대할 때 복무기간을 마친 병사가 제대하지 않고 군대에 남는 것이 한 명도 채 못되었다는 것 입니다.7)

하지만 대공황은 이 모든 것을 바꿔 놓았습니다. 비록 진급이 안 되는 것은 대공황 전이나 그 후나 별 다를바가 없었으나 군대는 불황기에 안정적으로 의존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직장이었습니다. 미육군 장교들은 심각한 진급적체에도 불구하고 군대에 계속 남는 방향을 택했습니다.8) 사병들의 경우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대공황 전에는 1도 넘지 못하던 사병의 재입대율이 높아져 1931년에는 1.24, 1932년에는 2.99가 되었고 특히 육군항공대의 경우 1931년에는 1.69, 1932년에는 3.35가 되었습니다.9) 주방위군도 마찬가지여서 대공황이 밀어닥치자 주방위군 자원자가 폭증했다고 합니다. 1932년에서 1933년 사이에 주방위군의 훈련 참석율은 평균 90% 이상을 상회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훈련에 참석할 경우 훈련수당이 지급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미 의회가 국방비를 삭감한 덕분에 1934년에는 매주 훈련 수당을 지급하던 것을 1년에 36주만 훈련 수당을 지급하는 것으로 바꾸게 되었다고 합니다.10)

어쨌거나 끔찍한 인사적체와 대공황을 견뎌낸 군인들에게는 새로운 기회가 생기게 됩니다. 2차대전이 발발하면서 미군이 급속도로 증가하자 그때까지 군대에 남아있던 소수의 장교들은 특별히 무능하지 않은한 군 내에서 한자리씩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1) Richard W. Stewart ed., American Military History Vol.II : The United States Army In A Global Era, 1917~2003(Washington, U.S.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 2005) , pp.53~59
2) Michael D. Doubler, Civilian in Peace, Soldier in War : The Army National Guard, 1636~2000(Lawrence,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3), p.188
3) Richard G. Davis, Carl A. Spaatz and the Air War in Europe(Washington, Center for Air Force History, 1993), p.11
4) Mark R. Grandstaff, Foundation of the Force : Air Force Enlisted Personnel Policy : 1907~1956(Washington, Air Force History and Museums Program, 1997), p.21
5) Victor Vogel, Soldiers of the Old Army(College Station, Texas A&M University Press, 1990), p.3
6) Grandstaff, ibid., p.23
7) Grandstaff, ibid., p.31
8) Davis, ibid., p.12
9) Grandstaff, ibid., p.31
10) Doubler, ibid., p.191

2010년 2월 25일 목요일

식민통치의 폐해;;;;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 지휘관들의 능력 부족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이런 문제는 계급이 높아질 수록 더 심해졌는데 한국군 장교단이 한국전쟁 이전 부터 급속하게 증가해 충분한 훈련을 받지 못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어쩔 수 없는 일 이기도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런 저런 말이 많은데 게중에는 꽤 재미있는 의견이 하나 있습니다. 미 군사고문단장은 한국군 장교단의 자질 부족의 원인을 식민통치의 악영향에서 찾았습니다.

한국군은 지휘능력을 갖춘 인재가 부족하다. 주된 원인은 지휘관이 될 만한 잠재력을 가진 인력이 부족한 데 있다. 여러해 동안 한반도에서는 외국인들이 지도층을 구성했다. 한국인들 스스로가 지도층의 위치로 올라가는 것은 심하게 억제되었다.

The Korean Army does not have adequate leadership. The major factor to be considered here is the lack of potential leaders. Korea has had its position of leadershp filled by foreign elements for many years. Develpoment of indigenous leadership was forcefully discourged.

주한미군사고문단장이 미 제8군 부참모장에게(1951. 5. 25), James A. Van Fleet Papers, Box 86, Republic Korea Army

꽤 일리있는 말 같습니다. 식민지 시기에 일본에서 정규 육군사관학교 교육을 받은 조선인은 겨우 세자리 숫자를 넘기는 수준이었고 태평양 전쟁 말기에 대량으로 양산된 조선인 장교단도 기껏해야 위관급이었으니 말입니다. 조선인 중에서는 가장 군사적인 지식이 풍부했을 홍사익은 전범으로 처형당했으니;;;; 그 밖에 김석원 같이 제법 높은 지위로 올라간 장교들도 있었지만 실전 경험은 야전에서 대대를 지휘한 정도가 고작이죠.

어쩌면 국가를 이끌어 나갈 인재를 키우지 못했다는것이야 말로 식민통치의 가장 지독한 유산이 아닐까 싶습니다.

2010년 1월 30일 토요일

어떤 포로의 편지

1943년 4월 5일, 포로수용소에 있던 프리드리히 파울루스는 모스크바 주재 일본 대사관에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 이것을 도쿄에 있는 독일 대사관 무관 크레치머(Alfred Kretschmer) 소장에서 전달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친애하는 크레치머!

자네도 잘 알고 있다시피 나는 제6군과 함께 포로가 되어 있네. 나는 지금 겨우 내 한몸을 챙기는 것 밖에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네. 그래서 자네에게 이런 호사스러운 부탁을 하는 것이 정말 미안하기 그지 없구만. 다음과 같은 물건들을 보내줄 수 있겠나?

1. 긴 팔 스웨터 한벌, 될 수 있다면 색은 짙은 회색이면 좋겠네. 내 키는 자네도 대략 알고 있을 걸세.(파울루스의 키는 187cm)
2. 긴 양말(Wadenstrümpfe) 한 짝, 치수는 11½, 색은 짙은 회색이면 좋겠네.
3. 양말 세 짝, 치수는 11½, 색은 자네가 편한 대로 해 주게.
4. 비단 셔츠 두 벌, 목 둘레는 38, 카라 치수는 39, 소매는 긴 것으로 해 주게. 그리고 가능하다면 셔츠와 같은 색(특히 어두운 녹색)의 넥타이도 하나 부탁하네.
5. 멜빵 하나.
6. 종이 한 통과 연필 두 자루.

그리고 이것도 보내줄 수 있겠나?

7. 초콜렛과 쿠키(Kekse).
8. 잼(Marmelade) 한통.
9. 커피와 차.
10. 담배와 시거.
11. 향수(Eau de Cologne)
12. 화장품.

그리고 자네도 예전부터 알고 있었을 것 같은데, 나는 몇 년 전 부터 위와 장에 문제가 있었네. 위에 적은 목록 중 7번과 8번에 적은 기호품이 병을 치료하는데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게는 도움이 된다네.
참으로 염치없는 부탁이네만 7번에서 12번까지의 물품은 매달 한 번씩 보내줄 수 있겠는가?
그리고 가능하다면 100루블 정도 송금해 주었으면 좋겠네.
지출되는 비용은 나중에 정산할 때 까지 당분간 자네가 부담해 줄 수 있겠나?

Leonid Reschin, Feldmarschall Friedrich Paulus im Kreuzverhör 1943~1953, Bechtermünz Verlag, 2000, ss.47~48

어찌보면 당연하겠지만 파울루스가 보낸 편지는 독일 대사관 쪽에서 거부했던 것 같습니다.

파울루스의 편지는 이래저래 재미있는데 특히 포로가 된 고급장교를 우대하는 유럽 전쟁문화의 흔적이 느껴집니다. 근대 유럽에서 포로가 된 고급장교는 사병들과는 달리 꽤 근사한 대접을 받으며 유유자적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하지요. 제가 예전에 썼던 「보불전쟁 당시 프랑스군 포로의 대우문제」라는 글에서도 이야기 했는데 근대 유럽에서 포로가 된 장교처럼 팔자좋은 인생도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파울루스가 병사들 걱정을 전혀 안 한 것은 아니겠지만 병사들이 영양실조와 강제노역에 시달리는 마당에 초콜렛 타령을 하고 있는것이 좋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본인도 그 점은 잘 느끼고 있었겠지요.

2009년 11월 17일 화요일

1990년, 붕괴 직전 소련군의 일화

우울한 이야기를 시작한 김에 생각나는 이야기를 하나만 더 하죠.

1990년 6월 '병사의 어머니들' 이라는 운동단체가 과거 4~5년간 15,000명의 병사가 사망했다고 발표한 이후 부터 병사의 사망에 대한 통계가 다른 출처를 통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1990년 8월, 인민대표회의의 우즈베키스탄 대표 한 명은 "최근" 타쉬켄트 한 지역에서면 190명의 신병이 사망했으며 이미 1989년에는 우즈베키스탄 출신의 신병 430명이 사망했다는 폭로를 했다.

이 대표의 요청에 따라 국방부는 우즈베키스탄 출신의 병사들을 노린 살인범죄가 자행되고 있을 가능성에 대해 조사했으며 국방부 대변인은 (1990년) 11월에 발표하기를 1989년 (1월 부터 ) 9월까지 사망한 우즈베키스탄 출신 병사는 167명이며 같은 기간 동안 러시아 출신은 123명, 우크라이나 출신은 25명, 카자흐스탄 출신은 15명, 벨라루스 출신은 13명, 그루지야 출신은 7명, 아제르바이잔 출신은 7명, 그리고 이 밖의 다른 공화국 출신 병사 일부가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국방부 대변인은 이러한 증거는 우즈베키스탄 출신들만 차별적으로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우즈베키스탄 출신 사망자가 얼마 되지 않는다고 발표한 것에 대해 다른 민족(공화국)들이 그다지 수긍하지 않았으며 우즈베키스탄에서 처음에 제기한 의심을 더 확신하게 했음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병사의 사망에 대한 통계자료가 일관성을 가진 경우는 거의 없으나 발표된 통계를 보면 사망자의 숫자는 1990년 이후 급증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야조프 원수는 12월에 있었던 한 비공개 회의에서 1990년 한 해에만 500명의 징집병이 자살했으며 같은 기간 동안 69명의 장교와 32명의 부사관이 살해당했다는 발언을 했다. 이 회의에서 중앙정치국장 니콜라이 쉴랴가 대령은 1990년 (1월부터) 11월까지 2,000명의 병사가 사망했다고 말했다.(이렇게 사망자가 많은 이유는 이 수치에 타지키스탄과 카프카즈의 전투에서 발생한 사망자가 포함되었기 때문으로 추즉된다.)

Odom, William E. The Collapse of the Soviet Military, Yale University Press, 1998, p.293

붕괴될 무렵의 소련군대나 옐친 시절의 러시아군대 이야기를 읽어보면 한국군의 병영생활이 아무리 열악하다 해도 따라잡긴 힘들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옐친이 집권하던 시절에는 군대내의 가혹행위를 촬영한 영상이 유포되어 문제가 되기도 했지요. 이 무렵의 소련군 이야기는 술자리 안주거리로 적당한데 반복해서 이야기 하다보면 살짝 오싹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2009년 11월 16일 월요일

1973년, 붕괴 직전 캄보디아 정부군의 일화

저는 초등학교를 다닐 때 부터 베트남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붕괴와 공산화 과정에 대한 이야기에 마음을 사로잡혔습니다. 당시의 반공교육을 위한 책자들은 캄보디아의 학살로 대표되는 이 지역의 비극을 생생하게 묘사했고 정체모를 공포감과 함께 상상력을 자극했지요. 나이를 조금 더 먹은 뒤 군사사 서적을 조금씩 읽어가면서 어린시절 호기심의 대상이었던 역사적 사건들에 대해 조금은 진지하게 접근하게 됐습니다만 솔직히 말하면 요즘도 제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당시의 혼란상을 보여주는 단편적인 사건들입니다. 뭐랄까요, 이런 이야기들을 읽으면 여전히 머릿속 한 구석에 짜릿함(?!?!)이 느껴진다고 해야할까... 그렇습니다;;;;

오늘도 일을 하다가 딴청을 피우던 중 베트남 전쟁과 관련된 책을 한권 집어들고 예전에 표시해둔 부분을 읽었습니다. 그 부분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캄보디아 정부가 계속해서 패배하자 가장 우수하다고 평가받던 부대도 전혀 믿을 것이 못 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미국의 군사원조관계자들은 캄보디아 정부군의 7사단에 각별히 주의를 기울였다. 그러나 (1973년) 4월 초 이 사단의 예하 부대는 타케오(Takeo)성의 성도 부근에서 매복공격을 받자 공황상태에 빠져 105mm 유탄포 8문 중 5문과 트럭 40대 분의 포탄을 적군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집단적인 기강해이"로 인한 사고는 더 늘어났는데 이러한 사고의 원인은 주로 정부가 병사들에게 제때 월급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5월 중순, 수백명의 병사들이 프놈펜(Phnom Penh) 북서쪽의 방어진지를 이탈해 봉급 지불을 요구하면서 수도의 중심지로 행진했다. 이 병사들은 총사령부를 향해 대로를 따라 가면서 허공에 소총을 난사해 행인들을 혼비백산하게 했다. 이 병사들은 봉급을 전혀 지불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3일 동안 급식을 전혀 받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크게 놀란 참모장교들은 즉시 병사들에게 올림픽 경기장에서 급여를 지급하겠다고 약속했다. 동정심이 많은 대령 한명이 자신의 돈으로 몇 자루의 빵을 사서 지프에 싣고 올림픽 경기장으로 왔다. 이 광경을 목격한 한 사람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지프에서 빵 자루를 내리자 마자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빵을 집어들고는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캄보디아군 중위 한 명이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새 정부가 들어선다고요?"

새 정부란 미국의 요구에 의해 얼마전에 조직된 '최고 정치 위원회'를 뜻하는 것 이었다.

"나는 그들이 지금 당장 여길 와 봤으면 합니다."

캄보디아군 장교단은 더할나위 없이 무능했으며 여기에 부패하기 짝이 없었다. 크메르 정부가 미국 정부와의 공식적인 합의에 따라 "병사들의 급여에 사용할 자금을 불법적인 방법으로 전용하는 것을 효과적으로 억제하고 방지하는것에 최대한 노력하겠다고" 발표한 지 2년이 지난 뒤에 대략 4만명에서 8만명의 '유령'이 군대의 급여 명부에 올라와 있었다. 이런 유령 병사들은 한달에 최고 2백만 달러를 받았는데 이 돈은 부패한 장교들의 호주머니로 들어갔다. 미국 국방부의 한 장군은 1973년 5월 상원의 비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서투른 변명을 해야 했다.

"캄보디아 정부군 사령부는 부패를 척결하기 위한 첫 단계의 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의원님께서 주장하신 것과 같은 부패행위, 급여 명부에 없는 사람을 집어 넣는 행위, 전투에서의 무능력함 같은 것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Issacs, Arnold R. Without Honor : Defeat in Vietnam and Cambodia,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83, pp.218~219

이왕 군사사에 관심을 가질 바에는 좀 멋진(???) 이야기들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좋을 텐데 하필이면 이런 암울하고 한심한 이야기가 더 솔깃하더군요. 이 책에 표시해 놓은 다른 부분들도 이와 비슷한 한심한(!!!) 이야기들이 대부분입니다.

아마도 이런 혼란을 통해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이 흥미롭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2009년 6월 26일 금요일

작은 국가의 한계

땜빵 포스팅 한 개 더 추가입니다;;;;

배군님이 칼 12세(Karl XII)와 북방전쟁에 대한 글을 써 주셔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마침 예전에 읽었던 Robert I. Frost의 The Northern Wars의 내용이 생각난 김에 이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간단한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개인적으로 칼 12세는 군사적으로 유능하지만 운은 따라주지 않은 인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필 그가 즉위했을 무렵은 스웨덴이 사회 경제적으로 한계에 부딪힌 데다 발트해의 정세도 급변하고 있었지요. 덴마크-작센-러시아 연합군은 전쟁이 그리 길게 끌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큰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스웨덴은 30년 전쟁에서 군사력을 과시하며 발트해의 강국으로 떠올랐지만 강국으로 남기에는 근본적으로 제약이 많았습니다. 무엇보다 인구 자체가 적었습니다. 1620년대에 스웨덴의 인구는 핀란드를 합쳐도 125만 명 정도였으니 폴란드, 러시아, 그리고 독일의 여러 국가들과 비교하면 절대적인 열세였습니다. 병사는 돈을 벌어 용병으로 채우면 된다지만 장교는 문제가 달랐지요. 스웨덴 왕실은 장교의 경우는 가능한 스웨덴 귀족으로 채우고자 했지만 인구가 적으니 한계는 명확했습니다. 17세기 초 스웨덴의 귀족인구는 아무리 높게 잡아도 3,000명 이내였고 이 중 장교가 될 수 있는 성인 남성은 500-600명 정도였습니다.

스웨덴의 남성들은 15세에서 60세 까지 군역의 의무를 져야 했습니다. 왕실 소유지의 농민(Kronobönder)과 자유농(Skattebönder)의 경우 남성 10명 당 1명이 군역을 지고 나머지가 세금으로 비용을 대는 형식이었는데 기본적으로 인구 자체가 적다 보니 경제에 큰 부담을 주는 구조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인구의 부족 때문에 30년 전쟁 당시 스웨덴군은 현찰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 외국인 용병에 크게 의존해야 했습니다.

스웨덴이 경제적으로 튼튼하다면 별 문제가 없었겠지만 30년 전쟁 이후 북방의 강자 노릇을 하느라 무리를 한 덕에 17세기 중반에는 재정적자가 심각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1681년에는 정부 부채가 5천만 릭스달러(Riksdaler)에 달했습니다. 왕실의 연간 수입이 4백만 릭스달러도 채 되지 않았다고 하지요. 재정적자는 30년 전쟁 이후 스웨덴 왕실을 꾸준히 괴롭혀 온 문제였습니다. 스웨덴은 빈약한 국내 경제 때문에 사실상 ‘약탈’로 전쟁 비용을 충당하는 경향이 강했는데 30년 전쟁이 종결된 뒤에는 전쟁으로 인한 수입도 짭잘하지가 못 했습니다. 재정난에 시달린 칼 10세(Karl X)는 1660년에 정규군을 9만3천명에서 4만6천명으로 감축하는 조치를 취하기 까지 합니다. 재정 지출을 억제한 덕에 1690년에는 정부 부채가 1천만 릭스달러까지 떨어지긴 했습니다만 스웨덴의 근본적인 경제적 취약성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듯 칼 10세는 재정난으로 군대를 절반 가까이 감축했습니다. 하지만 전쟁으로 팽창한 스웨덴의 영역을 방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칼 10세는 스웨덴의 해외 영토인 폼메른(Pommern)에 평시 수비대로 배치해야 할 병력이 8,000명은 필요하다고 말했다고 하는데 스웨덴군의 총병력과 비교해 보면 얼마나 큰 병력인지 알 수 있습니다.

얼마 되지 않는 인구로 군 병력과 경제 생산을 담당해야 했기 때문에 군역의 의무를 부과하는 비율은 일정하게 유지되지 못 했습니다. 30년 전쟁 중인 1635년에는 귀족 소유지의 농민(Frälsebönder)은 30명 당 1명, 왕실 소유지 농민과 자유농은 15명 당 1명이 징집되는 것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이때는 용병으로 병력을 충당하는 것이 비교적 원활했던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30년 전쟁이 끝나고 점차 재정 적자가 악화되면서 다시 국내의 인적자원에 대한 의존이 높아졌습니다. 1653년에는 귀족 소유지 농민은 8명 당 1명, 왕실 소유지 농민과 자유농은 16명 당 1명이 징집되는 것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왕실 소유지 농민과 자유농의 징집 비중이 낮아진 것으로 보이지만 내막을 들여다 보면 암담했습니다. 스웨덴 왕실이 재정 수입을 늘리기위해 왕실 소유지를 귀족에게 대량으로 매각한 때문에 귀족 소유지의 비중이 전체 토지의 66%까지 높아진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왕실 소유지의 농민과 자유농이 줄어들었으니 어쩔 수 없는 귀결이었습니다.

칼 11세(Karl XI)가 1697년 사망했을 때 스웨덴군은 스웨덴 기병 1만1천명, 스웨덴 보병 3만명, 그리고 용병 2만5천명으로 이루어 졌습니다. 그리고 칼 12세는 이 군대로 장기전을 치르며 여러 차례의 승리를 이끌어 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스웨덴의 적들은 더 많은 인적자원을 가지고 장기전을 감당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패권 경쟁에서 소국이 가지는 한계는 명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리 훈련이 잘 된 군대와 지휘관이 있더라도 숫적인 열세를 감당하는데는 한계 있을 수 밖에 없지요. 한국사에 비교해 보자면 고구려가 장기전 끝에 당에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었던 것과 비슷할 것 입니다.

2009년 6월 8일 월요일

미국의 아프가니스탄군 교육 문제

뉴욕타임즈에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정규군 증강 문제에 대한 재미있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Erratic Afghan Security Units Pose Challenge to U.S. Goals

사실 이 기사는 미국이 1945년 이래로 꾸준히 겪어왔던 이야기들의 재탕입니다. 미국은 대한민국을 시작으로 여러 나라에서 군대를 조직하고 교육시켜왔습니다. 한국과 같이 성공적이었던 경우도 있었던 반면 베트남과 같은 끔찍한 실패도 있었지요. 이라크의 경우는 아직까지는 성공적으로 보이지만 아프가니스탄은 갈 길이 멀어 보입니다.

미국 고문관들이 지적하는 문제는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여서 전혀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의 낮은 교육수준, 유능한 현지인 장교의 부족 문제 등등. 아프가니스탄군에 대한 교육은 같은 이슬람권이었던 이라크의 경험이 반영되고 있지만 사정은 더 나빠 보입니다.

이라크는 중동국가 치고는 양호한 교육수준을 가지고 있었고 후세인 체제하에서 그런대로 안정적으로 돌아가는 국가와 군대체제를 가지고 있었지요. 미국이 이라크 전쟁 초기에 저지른 삽질만 아니었다면 보다 이른 시기에 안정화 될 수 있는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프가니스탄은 이라크보다 사정이 더 열악한 곳 입니다. 소련의 침공 이후 계속된 전쟁으로 국가가 제대로 돌아간 일이 없으니 말입니다.

어쩌면 미국의 역대 군사고문단 활동 중 아프가니스탄이야 말로 최대의 도전이 아닐까 싶습니다.

※ 그러나 저러나 뉴욕타임즈가 인터넷 기사를 유료화 해 버린다면 정말 재앙일 것 입니다.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더 이상 공짜로 읽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2009년 6월 7일 일요일

救職의 決斷!

통계는 어떤 문제에 대해 긴 글 보다 더 명확한 설명을 해 준다는 점에서 매력적입니다.

아래의 표는 1961년의 육군 장교 전역 통계입니다.


이 통계 또한 재미있는 사실을 한 가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추가

윤민혁님이 댓글에 문제를 제기해 주셔서 표를 하나 더 올립니다. 1962년도의 육군 장교 전역에 대한 자료는 제게 없어서 1960년의 통계만 올립니다. 1960년 또한 4ㆍ19로 인한 정권교체라는 커다란 정치적 사건이 있었던 해 입니다. 1960년의 통계 또한 재미있는 점을 보여줍니다.


이 표에서 괄호로 표시한 숫자는 감군 계획에 따라 1960년도에 감축할 장교의 숫자입니다. 재미있게도 4ㆍ19이후 원래 예정에 없던 장군 전역이 늘어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영관급과 위관급에서도 원래 계획 보다 더 많은 숫자의 장교가 전역하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2009년 6월 3일 수요일

퍼레이드용 군대

1949년 8월 19일, 미군사고문단 단장인 로버츠(William L. Roberts) 준장은 육군부 계획작전국(Plans and Operations Division)의 볼테(Charles L. Bolte) 소장에게 한국의 상황에 대한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 편지에는 광복절 기념식에 대한 로버츠 준장의 짤막한 감상이 실려 있는데 꽤 의미심장합니다.

(광복절도) 다른 “중대한” 날들과 마찬가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육군의 열병식은 굉장했습니다. 한국군은 마치 베테랑 군인들 처럼 보였습니다. 장비, 군복, 차량 모두 흠 잡을 데가 없었습니다. 만약 한국군이 열병식을 하는 것 만큼만 싸울 수 있다면 우리가 여기 있을 필요도 없을 겁니다.

As is usual on these “critical” days, nothing happened.* The Army parade was a knock-out. They looked like veterans – equipment, uniforms, vehicles all spotless. If they can only fight as well as they parade, we are “in”.

로버츠 준장이 볼테 소장에게(1949. 8. 19), RG 338, KMAG, Box 8, Brig General W. L. Roberts(Personaal Correspondence, Memorandum) 1949

*북한의 도발이 없었다는 내용.

미국인들은 한국군 장교들이 겉치레를 중시하고 위세를 부리는데 신경 쓰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미국 고문관들의 불평 중 하루 종일 훈련은 하지 않고 대대 전체를 동원해 사열준비만 하는 경우도 있는걸 보면 한국 장군들은 사열식 페티쉬가 있었는지도 모를 일 이죠.

박정희가 사단 급 병력을 동원해 사열식을 하는 등 요란한 전역행사를 했던 걸 보면 정말 한국 장군들은 폼 잡는걸 너무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2009년 5월 24일 일요일

대박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종결된 직후, 내무인민위원장 베리야는 스탈린에게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보냈습니다.

소비에트연방 내무인민위원회의 전쟁포로국에는 전쟁 발발 이후부터 2월 3일 현재까지 관할 수용소와 전선의 임시수용소에 19만6515명의 포로가 등록되어 있습니다.

포로수용소 내 : 86,894명
전선임시수용소 내 : 78,951명
보건인민위원회 소속 병원 내 : 11,995명
수용소, 전선임시수용소로 이송 중 : 8,477명
수용소, 이송 중 탈진 또는 질병의 결과로 사망한 자 : 10,198명

이 밖에 각 전선군 및 야전군사령부의 집계중인 보고에 따르면 1만6천명의 포로가 내무인민위원회 관할의 전선임시수용소로 이송 중 입니다.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포로 중 16,059명의 포로는 노동에 투입하고 있습니다.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포로는 다음과 같습니다.

장교 2,448명
부사관 18,243명
사병 66,203명

장교 : 장군 4명, 대령 23명, 중령 31명, 소령 68명, 대위 330명, 중위 141명, 소위 625명, 사관후보생 1,078명, 상선단 장교 6명, 기타 간부 141명

이 밖에 돈 전선군 사령부의 보고에 따르면 전선군 관할지역의 포로 중 장교가 2,500명이고 이 중 장군이 24명 입니다.

Leonid Reschin, Feldmarschall Friedrich Paulus im Kreuzveröhr 1943-1953, Bechtermünze Verlag, 1996/2000, s.38

스탈린그라드 전투 한 번으로 포로로 잡은 독일군 장교의 숫자가 전쟁이 시작된 뒤 1년 반 동안 잡은 독일군 장교의 숫자보다 많습니다. 게다가 장군은 여섯배!

그야말로 대박 입니다. 보고서를 읽는 스탈린 동지도 꽤나 흐뭇하셨을 듯.

2009년 5월 10일 일요일

제정 러시아의 병역과 유태인 문제

Reforming the Tsar’s Army를 조금씩 읽는 중 입니다.

중간에 Mark von Hagen이 쓴 19세기말~20세기 초 제정 러시아 군대의 민족문제에 대한 글이 한 편 있는데 유태인과 관련된 부분이 꽤 재미있습니다. 해당 부분을 발췌해 봅니다.

유태인은 군 복무에 있어 다른 민족들과 여러 면에서 유사하면서도 더 많은 제약을 받았다. 일반적인 징병에 있어서도 다른 민족 집단이 누리던 보다 자유주의적인 병역 면제의 대상이 되지 못 했다. 러시아는 제국 내의 유태인 집단에 별도의 징병 할당 인원을 배정했다. 만약 유태인의 징병 인원이 할당 인원에 미치지 못할 경우 “무조건 면제”로 분류될 젊은이들이 병역의 책임을 짊어 져야 했다. 이 정책은 많은 수의 유태인들이 종종 징병을 회피하려 한다는 이유로 옹호되었다. 개종하지 않은 유태인은 장교가 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군사 의학 대학’에 입학할 수 도 없었다. 러시아 군인들은 유태인이 전사로서 형편없다고 믿었다. 유태인들이 군 입대를 꺼려했다는 점 때문에 이러한 편견은 더욱 강화되었다. 1911년에 전쟁성은 두마에 유태인에게 군 복무 의무를 부과하는 대신 방위세를 내도록 하자는 법안을 제출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Mark von Hagen, ‘The Limit of Reform : The Multiethnic Imperial Army Confronts Nationalism, 1874~1917’, Reforming the Tsar’s Army : Military Innovation in Imperial Russia from Peter the Great to the Revolu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4, p.46

유태인이 겁쟁이라는 인식은 유럽 국가들에 꽤 널리 퍼진 편견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러시아군 장군들이 중동전쟁을 봤다면 생각이 달라졌겠지요.

2009년 1월 24일 토요일

적백내전기 볼셰비키 정부의 징병제 실시와 그 문제점

군사사, 또는 소련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신 분들이라면 대부분 잘 아시겠지만 소련을 세운 볼셰비키들은 군사력의 정치적 의미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었으며 군대를 조직하는데 자신들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반영합니다.

볼셰비키들은 붉은군대의 창설 초기 계급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노동자’ 계층의 지원을 통해 군대를 확장한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상당수의 볼셰비키들은 계급으로서의 농민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농민을 군대에 받아들일 생각이 애초에 없었습니다. 실제로 적백내전 초기 단계에서는 농민들이 볼셰비키를 지지하는데 소극적인 경향을 보였다고 하지요. 그러나 러시아 전역에서 혁명에 반대하는 세력이 들고 일어났기 때문에 순수하게 자원한 노동자만으로 이루어진 군대로 대응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전쟁이 격화되는 마당에 한 줌 밖에 되지 않는 노동자만을 대상으로 군대를 증강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으니까요. 게다가 막상 모병을 실시해 보니 노동자들은 총을 잡는데 큰 관심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1918년 2월에 모스크바에서 모병을 실시했을 때 30만명의 노동자가 자원할 것으로 기대했으나 실제로 지원한 것은 2만 명에 불과했으며 게다가 이 중 70%는 원래 군인이었습니다. 군인 출신이 아닌 자원자들도 도시 실업자나 범죄자가 상당수여서 혁명군대라고 하기에는 뭔가 민망한 상태였습니다.[Figes, 1990, p.175]

1918년 5월과 6월에 겪은 여러 차례의 군사적 패배는 대규모 병력 동원의 필요성을 증대시켰습니다. 볼셰비키 정부는 급박한 전황에 대처하기 위해 1918년 4월 8일에 실질적으로 국민개병제를 실시하기로 결정합니다. 이에 따라 5월부터 대규모의 병력 동원이 시작 되었습니다. 물론 아직까지 형식적으로는 지원병 모집이었지만 징병 연령대의 남성들에게 입대를 강요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5월 29일, 트로츠키는 공식적으로 징병을 선포합니다.[Ziemke, 2004, pp.42~43] 그러나 볼셰비키 정부는 여전히 도시 노동자들을 동원하려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실제로 1918년 6월에서 8월 사이에 있었던 총 15회의 모병 캠페인 중 11회는 노동자만을 대상으로 이뤄졌다고 합니다.[von Hagen, 1999, p.36] 이러한 대규모의 병력 동원으로 1918년 여름과 가을 사이에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에서만 20만명의 노동자가 군대로 편입되었습니다. 농민 또한 동원 대상에 포함되었지만 초기에는 농민의 참가가 매우 저조했습니다. 볼셰비키 정부는 1893~1897년 출생의 농민 275,000명을 동원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실제로는 1918년 6월과 7월의 동원을 통해 4만명을 충원하는데 불과했습니다. 물론 1918년 8월 이후 80만명이 넘는 농민을 동원하는 성과를 거두긴 했습니다만 초기의 저조한 성과는 충분히 실망스러운 것 이었습니다.[Figes, 1990, p.177]

게다가 1918년 8월 6일 카잔이 함락되자 볼셰비키 정부의 위기감은 극에 달했습니다. 이제극렬 좌파조차도 승리를 위해서는 그들이 혐오하는 중앙 통제적인 지휘체계와 대규모 군대가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했습니다. 레닌은 1918년 10월 3일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VTsIK, Всероссийский Центральный Исполнительный Комитет)에서 당장 3백만의 군대를 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Figes, 1990, p.181] 이런 대규모 군대를 편성하는 방법은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농민을 대상으로 대규모 ‘징병’을 실시하는 것 이었습니다. 이미 트로츠키는 짜르 통치하의 장교와 부사관들을 ‘군사전문가’로서 혁명 군대에 대거 편입시킨 경험이 있었습니다. 혁명의 승리가 절실한 마당에 농민을 징집하는 실용노선을 택한다 한 들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1919년 3월 18일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제8차 전당대회는 농민 문제에 대한 일대 전환점이었습니다. 이 대회에서 볼셰비키들은 혁명이 완수된 이후에도 중농 계급은 오랜 기간 존속할 것이기 때문에 혁명 승리를 위해 계급으로서의 중농층과 연합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즉 ‘빈농 및 중농과 연합하여 부농을 치자’는 논리 였습니다.[von Hagen, 1999, p.60] 8차 전당대회 이후 농민에 대한 대규모의 징집이 추진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따라 1919년부터 붉은군대는 폭증하기 시작했습니다. 1919년 1월 약 80만명 수준이던 붉은군대는 불과 1년 뒤인 1920년 1월에는 3백만명으로 증가했습니다. 징병이 절정에 달한 1919년 3월에는 한 달 동안 345,000명이 징집되었습니다.[Figes, 1990, p.183] 부하린은 붉은군대에 농민이 대거 유입됨으로서 프롤레타리아들이 농민화 되어 혁명의 전위로서의 의식을 사라지게 만든다고 툴툴댔습니다.[Lincoln, 1999, p.374] 또한 군대 내의 당원들도 붉은군대의 계급적 순수성이 더럽혀 지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했지만 어쩌겠습니까. 전쟁 중인데…

그러나 이러한 대규모 징병은 겉으로는 꽤 인상적인 것이었지만 실제 내용면에서는 문제가 많았습니다. 무엇보다 숙련된 장교와 부사관이 부족해 징집한 훈련병들을 신속히 훈련시켜 전선으로 투입할 수 가 없었습니다. 내전 기간 중 붉은군대가 최대 규모에 달했던 1920년 10월의 경우 총 550만명의 병력 중 225만명이 훈련병이었습니다. 그리고 1차대전이 끝난 직후에 바로 내전이 발발했기 때문에 징병에 대한 거부감이 강했던 것도 문제였습니다. 특히 1차대전에 참전한 경험이 있는 남성들은 군대에 징집되는 것을 회피했습니다.
게다가 기본적인 장비의 부족으로 실제 전투 병력은 더 적었습니다. 1920년 10월 기준으로 총 병력 550만명 중 전투 병력은 70만 명이고 이 중 제대로 무장을 갖춘 숫자는 50만명 내외로 추정됩니다.[Figes, 1990, p.184] 붉은군대의 장비 부족 문제는 특히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러시아는 이미 1차대전 당시에도 군수물자 부족으로 고생했습니다만 모든 것이 혼란에 빠진 내전 상황에서는 문제가 더 심각했습니다. 볼셰비키 정부가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군대를 마구 잡이로 증강시켰기 때문에 보급 문제는 급격히 악화되었습니다. 붉은군대의 병사 1인당 식량 지급량은 1919년 2월 기준으로 하루 400그람의 빵이었으나 실제로 일선 부대는 이 수준의 급식을 받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일부 부대는 식량 보급이 되지 않아 병사들이 굶어죽는 경우도 발생했다고 합니다. 사람이 먹을 식량도 보급이 안되는 마당이었으니 군마에게 먹일 사료의 보급도 딱히 나을 게 없었습니다. 물론 전선에서의 혹사나 질병으로 인한 손실도 많았으나 상당수의 군마는 사료가 없어 죽었습니다. 질병으로 인한 폐사도 사료의 부족이 원인인 경우가 많았다고 하지요.[Figes, 1990, pp.191~192] 식량 사정이 이 지경이었으니 다른 보급품의 상태가 더 좋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일선 부대들의 경우 군복을 지급받지 못한 병사가 60~90% 사이를 오가는 것은 기본이었고 아예 군복 자체를 받지 못한 부대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것은 겨울에 특히 심각한 문제였는데 동복을 지급받지 못하면 바로 얼어 죽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군대가 갑자기 팽창한 1919~1920년의 겨울에는 동복 부족으로 인해 수많은 병사들이 얼어 죽었습니다. 군화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가죽 신발보다는 현지에서 쉽게 조달할 수 있는 천으로 만든 신발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각 부대들은 전선 근처에서 직접 물자를 조달했는데 이것은 사실상 수백년 전의 약탈 보급으로 되돌아 간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부족한 식량, 피복, 위생 도구는 바로 질병을 불러왔고 적백내전 기간 중 붉은군대 사망자의 대부분은 전사가 아닌 질병 및 부상의 악화로 인한 사망이었습니다. 내전 기간 동안 붉은군대의 전사자는 259,213명이었는데 질병과 부상 후유증으로 인한 사망자는 616,605명이었습니다.[Krivosheev, 1997, p.35] 대부분의 부대들은 부대원의 10~15% 정도가 항상 질병으로 앓아 누워 있었고 심지어는 환자가 전 병력의 80%인 부대가 전선에서 작전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티푸스, 콜레라, 천연두, 독감, 성병이 만연했고 많은 희생자를 가져왔습니다.[Figes, 1990, pp.193] 붉은 군대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병원균 군락이 되다 보니 피부병 같은 것은 질병 축에도 못 낄 정도였다지요.

상황이 이 모양이다 보니 군기의 문란이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특히 병사들이 작전 중에도 술을 마셔대는 것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이미 트로츠키는 1918년 11월 일선 지휘관들에게 군기 확립을 위해 사병에 대한 즉결처분권을 부여한 바 있었습니다.[von Hagen, 1999, p.65] 음주 문제가 대두되면서 즉결처분의 대상이 근무 중 술을 마시는 병사로 확대되었습니다. 물론 병사들의 사정을 잘 아는 지휘관들은 명령을 받아도 이것을 이행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그런 짓을 했다가는 뒤통수에 총을 맞을 거라는 것을 잘 알았겠지요. 실제로 분노한 병사들이 장교나 공산당원을 살해하는 경우가 빈번했습니다. 그리고 간혹 부대내의 유태인을 쏴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는군요.(;;;;)
탈영은 군기문란이 가져온 가장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전선에서의 탈영은 물론 징집과정에서의 탈주도 빈번했다고 합니다. 징병되어 전선으로 향하는 도중 탈영하는 경우가 많았고 때로는 징집병들이 집단으로 도망가기도 했다는 군요. 1919년에는 징병 도중 도망치는 경우가 전체 탈영병의 18~20%였다고 합니다.[von Hagen, 1999, p.69] 게다가 혼란기이다 보니 징집 대상에 대한 체계적인 기록과 관리가 되지 않아서 한 번 탈영한 병사가 다른 부대에 들어가 있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합니다. 내전기의 국민당 군대나 베트남 전쟁 당시 남베트남군대를 연상시키는 이야기 입니다.(;;;;) 탈영으로 인한 병력 손실은 꽤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1920년 2월과 4월 사이에 붉은군대는 294,000명의 병력을 잃었는데 이 중 전사자와 부상자는 2만명에 불과했습니다. 실제로 탈영병의 규모는 엄청났는데 1919년 6월부터 1920년 6월의 1년간 탈영한 병사의 숫자는 2,638,000명이었다고 합니다. 수백만명을 징집하면 수백만명이 탈영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중 탈영 뒤 자수한 1,531,000명을 제외하더라도 1년에 백만이 넘는 탈영병이 발생했다는 것은 정말 심각한 문제였습니다.[Figes, 1990, pp.198~328]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실제 전투 부대에서는 탈영율이 낮았다는 것 입니다. 전투부대의 탈영병은 전체 탈영병의 5~7% 수준이었다고 하는군요.[von Hagen, 1999, p.69] 그러나 위에서 살펴봤듯 붉은군대의 총 병력 중 전투 병력이 얼마 되지 않으니 딱히 좋다고 하기도 그렇습니다. 특히 강제적으로 징병된 병사들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예를 들어 23사단 202포병여단의 경우 자원한 노동자가 주축을 이뤘던 시기에는 큰 문제없이 싸웠으나 1919년 8월에 손실보충을 위해 농민 징집병들을 배치받은 뒤로는 문제가 심각해 졌습니다. 이후의 전투에서 200명 정도의 농민 징집병들이 여단 정치위원을 사살한 뒤 도망가 버려 결국에는 이 여단이 해체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Figes, 1990, pp.203] 심지어 연대단위로 반란을 일으킨 뒤 도망가는 경우도 발생했습니다.[Lincoln, 1999, p.252] 전선의 상황에 분노한 트로츠키는 탈영병들을 모두 총살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역시 일선의 상황을 잘 아는 지휘관이나 모병 담당자들은 본보기로 몇 명을 처형하는 정도로 그쳤습니다.[von Hagen, 1999, p.72] 어차피 상당수의 탈영병들은 알아서 돌아올 테고 또 아무리 총살을 해 봤자 병사들을 탈영하게 만드는 군대의 문제점은 바뀌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적백내전기 볼셰비키 정부의 병력 동원은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정부가 유지할 수 있는 능력 이상으로 군대가 늘어났기 때문에 일선 부대들은 만성적인 보급 부족에 시달렸으며 수백만의 군대를 만들었지만 정작 전투 병력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보급의 부족으로 인해 발생한 막대한 비전투손실은 근대국가의 군대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징병제를 통해 증강된 붉은군대는 결국 볼셰비키를 승리로 이끄는 원동력이 됩니다. 아마 좌파 볼셰비키들의 주장대로 혁명적 순수성을 위해 노동자 지원병만으로 내전을 치렀다면 현대사는 조금 다르게 돌아갔을 가능성이 높을 것 입니다.


참고문헌
John Erickson, The Soviet High Command : A Military-Political History 1918~1941(Third Edition), Frank Cass, 1962/2001
Orlando Figes, ‘The Red Army and Mass Mobilization during The Russian Civil War 1918~1920’, Past and Present 129, 1990
Mark von Hagen, Soldiers in the Proletarian Dictatorship : The Red Army and the Soviet Socialist State, 1917~1930, Cornell University Press, 1999
G. F. Krivosheev(ed), Soviet Casualities and Combat Losses in the Twentieth Century, Greenhill, 1993/1997
W. Bruce Lincoln, Red Victory : A History of the Russian Civil War 1918~1921, Da Capo, 1989/1999
Roger R. Reese, Red Commanders : A Social History of the Soviet Army Officer Corps 1918~1941,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5
Earl F. Ziemke, The Red Army 1918~1941: From Vanguard of World Revolution to US Ally, Frank Cass, 2004

※ 잡담 1. 그러고 보면 러시아/소련군은 항상 신발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것 같습니다.

※ 2. '역사학도'님이 용어의 사용, 개념 문제에 대해서 지적을 하셨습니다. 표현에 있어서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는 본문의 일부를 수정했습니다.

2008년 12월 26일 금요일

스탈린그라드 전투 중 촬영된 유명한 사진 한 장


2차대전에 관심을 가진 분이라면 이 사진을 한 번 정도 보신 기억이 있을 것 입니다.

이 사진은 스탈린그라드 전투 중 촬영된 사진으로 이 전투를 상징하는 유명한 사진 들 중 한 장입니다. 이 유명한 사진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매우 궁금했는데 제이슨 마크(Jason D. Mark)의 'Island of Fire : The Battle for the Barrikady Gun Factory in Stalingrad'에 이 사진의 주인공에 대한 내용이 있더군요.

제이슨 마크에 따르면 이 사진의 주인공은 프리드리히 빙클러(Friedrich Konrad Winkler) 대위로 이 사진이 촬영된 1942년 10월 16일에는 중위 계급으로 305보병사단 577보병연대 6중대를 지휘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빙클러 대위는 1909년 8월 22일 보름스(Worms)에서 태어났으며 1939년 전쟁 발발 당시에는 5보병사단 56보병연대에 복무하고 있었습니다. 빙클러는 1941년 11월 1일 부로 중위로 진급했습니다. 그리고 305보병사단으로 전출된 것은 1942년 중순이라고 하는데 577보병연대 본부중대장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1942년 12월 1일에는 대위로 진급했습니다.

빙클러 대위는 6군이 항복할 때 까지 살아남았지만 결국에는 1943년 2월 8일에서 10일 사이에 베케토브카(Бекетовка)의 수용소에서 사망했다고 하는군요.

전작인 Death of the Leaping Horseman도 그렇고 제이슨 마크의 투철한 노가다 정신은 정말 본받을 만 합니다. 이런 노가다 정신이 없었다면 마크의 저작도 많은 스탈린그라드 전투 관련 저작들 처럼 특징없고 밋밋한 책이 됐겠지요.

2008년 12월 22일 월요일

모병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독일연방군

슈피겔 인터넷판에 독일연방군의 모병문제 악화에 대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한 해군 모병관의 지원병 모집을 위한 필사적인(?) 노력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Wer hat Angst vor Afghanistan?

이 기사에 따르면 독일 국방부장관에 따르면 2008년 상반기 장교 지원자는 2007년의 같은 기간과 비교해 16퍼센트 감소했으며 부사관과 사병은 11% 부족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관후보생 중 10%는 중간에 스스로 그만둘 정도라고 하는군요.;;;; 독일 국방부는 이런 심각한 상황에 대해 TV나 극장 광고를 늘리는 정도라고 합니다.

그리고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의 플뢴(Plön)의 한 직업학교를 찾아간 해군 모병관 크뢰거(Torsten Kröger) 중위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크뢰거 중위는 설명회에 참석한 학생들에게 연방군이 제공하는 좋은 급여, 세금 혜택, 낮은 세율, 개인의 자질 개발, 좋은 전망 등을 설명하며 지원을 유도합니다. 기사를 쓴 기자는 연방군의 모병 홍보가 마치 DAX(Deutscher Aktien IndeX) 상장 기업 같다고 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크뢰거 중위는 군에 입대하면 좋은 점으로 해외 파병의 기회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곳은 아프가니스탄;;;;

독일연방군에서는 현재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된 병사들에게 특별수당으로 하루에 92유로3센트씩을 지급하고 있으며 여기에는 세금이 붙지 않는다군요. 한 달이면 파병수당만 2,760유로9센트이니 원화로는 500만원에 가깝습니다.(덜덜덜)

어쨌건 직장으로서의 군대는 그다지 매력이 없어서 해마다 지원자가 줄어드는 형편입니다. 기사의 마지막 부분에서 크뢰거 중위는 예전 만큼 지원자가 많지 않다고 푸념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몇 달 전에도 독일공군의 조종사 부족사태에 대한 독일언론의 기사를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 병력부족에 대한 이야기가 이렇게 자주 나오는 걸 보면 독일연방군이 어느 정도 고생하는지 알 것 같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자유주의적 성향이 강한 편이만 모병제로의 전환에 대해서는 다소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습니다. 미국이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전환한 뒤 인건비 상승과 병력 보충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으며 독일도 90년대 이후 모병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같은 문제를 겪고 있습니다. 강대국들이 골머리를 앓는 모습을 보니 한국이 모병제로 전환할 경우 국방에 필요한 최소 규모의 군대를 유지할 수 있을지 회의감이 듭니다.


※ 작년 초 모병제에 대해 몇가지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한국의 모병제 논의에 대한 짧은 생각

2008년 8월 10일 일요일

소련-러시아 장교단의 붕괴와 그 후유증 : 1987~

올림픽이 조용히 치러지나 했더니 러시아가 그루지아를 공격해서 꽤 시끄러워 졌습니다. 때마침 라피에사쥬님이 이번 사태에 대해 잘 정리된 글을 올려주셔서 흥미롭게 잘 읽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사태와 관련해서 밀리터리 매니아(???) 들이 인터넷 게시판들에 올려놓은 의견을 보면 실제 이상으로 현재 러시아의 행동이나 능력을 과장되게 인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아직도 러시아가 군사적으로 미국과 맞먹는 강대국이라고 인식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진짜’ 충격이었습니다. 러시아의 군사력은 1990년대 초반 소련의 해제와 뒤이은 군대의 구조적 붕괴의 충격에서 겨우 회복되는 단계에 있을 뿐입니다. 국경을 인접한 작은 나라와 군사분쟁을 벌이는 것을 가지고 소련의 부활이니 푸짜르가 어쩌고 하는 이야기들을 보면 어이가 없을 지경입니다.

러시아의 군사력이 미국과 비교했을 때 얼마나 취약한 상황에 처해있는 가는 조금 부지런히 관련 자료들을 구해보면 쉽게 알 수 있는 것 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러시아군 장교단의 현실이 이 점을 가장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러시아의 장교단은 구소련 시절과 비교하면 형편없는 규모로 줄어들었고 이것을 다시 소련 시절의 규모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정말 엄청난 과업이라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러시아 장교단이 처한 현실을 다루기 위해서는 먼저 고르바초프 말기의 소련 장교단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소련에서 장교라는 직업은 1970년대 까지는 매우 선호되고 있었지만 1980년대로 들어가면서 조금씩 기피되는 직업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 1980년대 중반의 시점에서 장교라는 직업이 경제적으로 큰 매력이 없었다는 점이 큰 문제였습니다. 장교의 낮은 생활수준은 소련이 건국된 이후 붕괴될 때 까지 여전했기 때문에 중견 간부급 이상의 부패문제는 근절할 수 없는 문제일 정도였습니다.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1980년대로 들어가면 도시 중산층들이 장교에 지원하는 비율은 계속 낮아졌고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오려 한 것은 교육수준이 상대적으로 낮은 농촌출신들이었습니다. 물론 군사기술의 발전으로 장교가 되기는 더 어려워 졌기 때문에 농촌출신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결국 1980년대로 들어가면 장교의 정원을 채우는 것이 매우 어려워 집니다. 예를 들면 모스크바 군관구는 1987년에 새로 임관하는 장교가 정원에서 19% 부족했는데 1988년에는 무려 43%가 부족할 정도였습니다. Roger Reese가 지적하듯 1980년대의 장교단은 군인으로서의 자부심 보다는 안정적인 급여 등 현실적인 이유에서 장교를 택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마나 장교라는 직종의 매력이었던 안정성이 사라지자 소련 장교단은 순식간에 붕괴하기 시작합니다. 이미 1988년부터 위관급 장교들이 대량으로 전역을 신청하고 있었고 이것은 그대로 소련이 붕괴할 때 까지 지속됩니다. 소련 장교단의 열악한 생활 수준은 고르바초프의 방어 중심의 군사정책으로 동유럽에서 철수한 병력이 본토로 들어오면서 더 심각해 집니다. 대표적인 것이 주택 부족문제였는데 1990년 2월 경에는 집이 없는 장교가 128,100명에 달할 지경이었습니다. 또 장교의 급여수준도 매우 형편없었습니다. 1990년 소위의 월급은 270 루블이었는데 당시 자녀 없는 부부의 최저 한달 생계비는 290루블이었습니다. 게다가 개혁개방 정책으로 서방, 특히 미국 장교들이 어떻게 생활하는지에 대한 정보가 장교단 사이에 퍼지면서 소련 장교단의 사기는 급강하해 버립니다. 이런 형편이었기 때문에 소련이 붕괴되기 전에 국가를 지켜야 할 장교단이 먼저 붕괴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소련의 붕괴는 이미 시작된 소련-러시아 군대의 붕괴를 가속화 시켰는데 특히 장교단에 가해진 타격은 엄청났습니다. 이미 소련이 붕괴되기 전부터 열악한 생활수준 때문에 장교단은 급속히 감소하고 있었는데 소련의 붕괴로 그나마 보장되던 안정성 조차 사라지자 장교단의 해체는 제동을 걸 수 없을 정도로 진행됩니다.
가장 큰 원인은 역시 경제적 곤란이었습니다. 이미 군대가 형편없이 쪼그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정부는 경제난으로 그나마 남아있는 장교들 조차 제대로 대우해 줄 수 없었습니다. 1994년에도 집없는 장교가 12만명에 달했는데 이것은 훨씬 많은 장교가 있었던 1990년과 비슷한 수준이었습니다. 상황이 이 지경이었으니 장교를 지망하는 사람은 급격히 감소합니다. 1989년의 경우 장교를 지원하는 경쟁률이 1:1.9였는데 1993년에는 1:1.35가 됩니다. 여기에 장교를 지원하는 지원자의 자질도 1980년대 이래로 꾸준히 하락하고 있었으니 통계에 가려진 내용은 더욱 더 참담했습니다. 1992년 러시아 국방부가 병력 감축을 위해 36,000명을 조기전역 시키겠다고 발표하자 59,163명이 전역을 신청했고 1993년에 다시 19,674명을 전역시키려 했을 때는 무려 60,033명이 전역해 버립니다. 1992년부터 1994년 사이 러시아 국방부는 71,000명의 장교를 감축하려 했는데 실제로는 155,000명이 자발적으로 전역해 버렸고 게다가 그 절반이 30세 미만의 청년 장교들이었습니다. 러시아 군의 미래를 짊어질 중핵이 무너져 버린 것 입니다. 게다가 이 시기는 암울했던 옐친 행정부가 경제난 때문에 군사비를 계속해서 삭감하고 있었으니 달력이 넘어갈수록 장교 부족은 심각해 졌습니다. 1995년에는 사관학교 생도의 50%가 임관 전에 자퇴할 정도였고 이것은 초급장교의 부족을 가져왔습니다. 같은해에 장교 부족은 정원의 25%였는데 위관급의 경우는 정원에서 50%가 미달이었습니다. 이 해의 군축에서 위관급 장교는 2,500명을 전역시킬 예정이었는데 실제 전역한 인원은 11,000명이었습니다. 젊은 장교들은 늦기전에 사회에서 기회를 잡기 위해 주저않고 군대를 떠났습니다. 1998년 유가 폭락으로 인한 경제난은 정부의 월급에 의존하는 장교들에게 최악의 고난이었습니다. 같은 해 기준으로 소위의 월급은 354루블, 중령은 2,135루블이었는데 당시 러시아에서 빈곤층으로 분류되는 3인 가족 가구의 평균 소득은 2,600 루블이었습니다. 즉 중령 조차도 빈곤층 수준의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 입니다. 이것은 장교들의 대규모 자살을 불러왔는데 1998년 러시아 전체 자살자의 60%가 장교였다는 통계는 이 시기 러시아 장교단이 얼마나 열악한 상황에 처해 있었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국내에도 번역된 『How to Make War』의 1995년판에서 저자인 James F. Dunnigan은 당시 러시아 군대가 처한 문제점을 수습하는데 수년은 걸릴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이것은 아직까지 진행 중이란 점에서 꽤 잘 맞은 예언 같습니다.

1998년은 지금까지 러시아 장교단이 겪었던 최악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장교단은 계속해서 축소되었고 새로 보충되는 인력의 질적 수준도 80년대에 비해 크게 낮아졌습니다. 게다가 남아있는 장교의 80%도 미래에 대해 비관하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최악이라 할 만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넘기면서 상황은 조금씩 개선되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큰 원인은 푸틴 집권 이후 군인의 생활수준 개선을 위한 직접적인 조치, 예를 들어 급여 인상 등이 적극적으로 시행된 것이 주효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교단의 생활수준은 민간인에 비해 여전히 낮았으며 푸틴 집권 초기인 2001년의 경우 여전히 92,000명의 장교가 관사를 지급받지 못했으며 이 중 45,000명은 아예 거주할 집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러시아의 경제가 유가 회복에 힘입어 조금씩 개선되고 있었지만 경제에 대한 불안감은 여전했기 때문에 장교단은 특히 더 큰 불안감을 느꼈습니다. 예를 들어 2004년에 장교 급여가 인상되지 않는다는 소문이 퍼지자 위관급 장교의 대량 전역사태가 다시 벌어졌던 것이 대표적입니다. 장교단의 불안감을 잠재우기 위해서 2005년 러시아 의회는 소위의 월급을 7,485 루블로 인상하겠다는 발표를 했는데 같은 해 3인 가족의 최저 생계비는 7,594 루블이었습니다. 장교의 열악한 생활수준을 개선하기 위해서 2006년에 푸틴 대통령은 3년에 걸쳐 장교의 급여를 67% 인상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았고 현재 이 공약은 고유가를 바탕으로 착실히 이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2008년 현재까지도 러시아 장교단의 생활수준은 민간사회에 비해 조금 뒤떨어졌다는 것이 일반적인 의견이며 체첸과 같은 위험지역 근무를 지원하는 장교가 많은 것도 추가수당을 받아 조금이라도 생계를 개선하기 위한 것 입니다.
푸틴 행정부가 옐친 시기의 군사적 붕괴상태를 다소 나마 개선시킨 것은 사실인데 어떻게 보면 러시아의 장교단 자체가 붕괴될 대로 붕괴되어 최저점에 도달했기 때문에 개선된 것으로 보일 뿐이지 소련군이 전성기에 달했던 시절의 장교단 수준에는 발끝조차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현재 상태의 러시아로서는 지금 있는 장교단의 생활수준을 유지, 또는 향상시키면서 장교단을 확충할 수단이 뾰족하지 않다는 것 입니다. 장교단의 확충 없이 군사력을 증강하기는 어렵습니다. 러시아가 현재 규모의 군대를 유지하면서 준비태세와 숙련도를 높이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겠지만 다시 병력을 증강시켜 미국과 맞설만한 수준으로 만드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현재의 러시아 군 병력이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그 중 장교는 얼마인지는 웹에서 검색해도 충분히 나오는 것들이니 더 부연설명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러시아의 군사력 증강이 어떻게 될 것인지는 장기적으로 지켜봐야 할 문제이지 국내 언론 기사에 가끔씩 보도되는 자극적인 몇 줄의 기사만 가지고 호들갑 떠는 것은 좀 그렇습니다.


참고문헌
James F. Dunnigan/김병관 역, 『현대전의 실체』, 현실적 지성, 1995
Dale R. Herspring, 『The Kremlin and the High Command : Presidential Impact on the Russian Military from Gorbachev to Putin』,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6
William E. Odom, 『The Collapse of the Soviet Military』, Yale University Press, 1998
Roger. R. Reese, 『Red Commanders : A Social History of the Soviet Army Officer Corps, 1918~1991』,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5
Brian D. Taylor, 『Politics and the Russian Army : Civil-Military Relations, 1689~2000』,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Anne C Aldis, Roger N McDermott(ed), 『Russian Military Reform, 1992-2002』, Routledge, 2003

2008년 7월 27일 일요일

1차대전 이후 미 육군 장교단의 인사적체 문제

1차대전이 종결된 뒤 미국은 고립주의 노선을 취하며 국제연맹에도 참여하지 않습니다. 이런 대외정책의 기조에 따라 군 병력도 급격히 감축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육군의 감축 규모가 해군 보다 더 컸습니다. 미국 전쟁부는 최소 현역 병력을 장교 17,717명과 사병 280,000 수준으로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이었지만 의회에서 국방예산을 감축했기 때문에 결국에는 이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수준으로 감군을 해야 했습니다. 이에 따라 1923년 까지 미 육군은 장교 14,021명과 사병 119,222명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이렇게 제한된 인원만 군대에 남다 보니 진급 적체현상은 굉장히 심했고 장교단의 노화 현상이 두드러 졌다고 합니다. 아이젠하워의 경우 소령에서 중령으로 진급하는데 16년이 걸릴 정도였다고 하지요. 어찌나 진급적체 현상이 심했는지 1930년의 경우 육군항공대 소속의 중위 계급의 장교 494명 중 400명이 1차대전에 참전한 경험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1931년의 통계를 보면 육군의 현역 중위 중 50세 이상이 46명이었는데 이 중 최고령자는 61세였고 현역 대위 중에서는 274명이 50세 이상에 최고령자는 62세였다고 합니다. 이때 최연소 대위가 32세였으니 진급적체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 수 있으실 겁니다. 초급 간부들이 이 정도였으니 위로 올라가면 더 심각했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같은 해에 대령은 470명이었는데 이 중 109명이 60을 넘겼고 이 중 8명은 64세였습니다.

이런 난감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조사를 보면 현역 장교의 90%는 군대에 남길 희망했다고 합니다.

왜냐?

사회에 나가면 대공황이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