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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9일 토요일

맥아더 기념관 - 2


맥아더 기념관 - 1


지난번에 올리다가 인터넷 접속이 잘 안돼서 그만뒀던 맥아더 기념관 사진을 계속 올립니다. 돌아오니 인터넷 속도와 안정성이 높아서 좋군요.

시간이 모자라서 급하게 사진을 찍다 보니 초점이 안맞은게 많습니다. 많이 아쉽군요.

기념관 한 쪽에는 태평양전쟁에서 맥아더를 보좌했던 인물들에 대한 설명과 초상화가 있었습니다. 제8군 사령관을 지냈던 아이첼버거의 초상화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제8군 사령관 로버트 아이첼버거
맥아더의 참모장 리처드 서덜랜드
말 많은 정보참모 윌로비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에는 필리핀에 상륙하는 맥아더와 참모진을 묘사한 그림이 걸려있었습니다. 사진으로 유명한 그 장면이죠.



다음으로는 필리핀 전역과 일본의 항복을 다룬 전시실이 있습니다.


전시물은 대체로 평이합니다. 저는 필리핀에서 활약한 전함 캘리포니아와 호위항공모함 갬비어 베이의 모형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캘리포니아의 모형은 좀 투박합니다.


왠지 비싸보이는 전함(.....) 캘리포니아

갬비어 베이의 모형은 상대적으로 멀쩡합니다...

그리고 필리핀의 레지스탕스 운동에 관한 설명문이 이어집니다.



다음으로는 일본 침공작전인 "다운폴" 작전에 관한 설명문이 나오고...



일본의 항복이 이어집니다.


일본의 항복선언문
그 유명한 미주리 갑판의 기념판을 재현해 놓았습니다.

일본의 항복 이후에는 맥아더의 영광이 절정에 달했던 일본 점령기에 대한 전시물이 있습니다. 일본 점령과 맥아더가 추진한 일본 개혁에 관한 내용들이지요.




그리고 마카사 쇼군에게 올라온 진상품들이...






한국전쟁에 관한 전시는 상대적으로 평이합니다.





맥아더의 해임을 비판한 Carey Orr의 만평. 트루먼은 난쟁이로 묘사되고 있지요.

마지막으로는 맥아더의 해임과 그 이후의 활동에 관한 전시가 이루어져 있습니다.

왼쪽 아래의 레코드판은 맥아더가 의회에서 했던 유명한 연설을 녹음한 것 이라네요.
역시나 유명한 맥아더의 원수모와 담뱃대, 그리고 선글라스 입니다.
맥아더가 받은 주요 훈장. 아랫줄 오른쪽에서 네번째에는 한국에서 받은 무공훈장도 있습니다.

시간이 모자라서 구경을 날림으로 한게 아쉬운데 제가 이곳을 방문하고 얼마 있지 않아 신관이 개관을 했습니다. 다음번에 이곳을 방문하면 신관을 구경하게 되겠지요.

맥아더 기념관은 Norfolk라는 큰 도시에 있다 보니 주변에 돌아볼 곳이 많았습니다. 근처에 버지니아 비치도 있어서 그냥 놀러가기에도 적절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기념도서관과 박물관이 별도로 분리되어 있는 구조가 아이젠하워 기념관과 비슷하다는 느낌도 들었는데 말그대로 작은 시골마을에 있는 아이젠하워 기념관과는 천지차이였습니다.

2012년 11월 5일 월요일

맥아더 기념관 - 1

지난달 초에는 버지니아주 노퍽(Norfolk)에 있는 맥아더 아카이브와 기념관을 다녀왔습니다.  이곳은 인터넷이 느려서 사진을 많이 올리면 브라우저가 상당히 버벅거리더군요. 그래서 내용은 별로 없지만 좀 나눠서 올립니다.



맥아더 아카이브의 소장 자료를 개략적으로 조사하러 갔는데 예상대로 특별히 NARA와 차별되는 자료는 없더군요. 대신 그곳에 간 김에 바로 옆에 있는 기념관도 함께 구경을 했습니다.

맥아더 기념관 구관. 바로 옆에 신관이 들어섰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을 묘사한 꽤 유명한 부조

그런데 마침 제가 방문했을때는 맥아더 기념관 신관이 개관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정확히 제가 방문하고 일주일 뒤에 개관했다고 하더군요.

맥아더 기념관 신관
곧 신관이 개관할 예정이었지만 구관도 아직 볼만한 전시물이 조금은 남아 있더군요. 일단 구관에 들어서면 먼저 맥아더와 그의 부인이 안치된 두개의 관이 관람객을 맞이 합니다. 주변은 맥아더가 참가한 전역과 그가 지휘했던 부대들의 부대기로 장식되어 있었는데 꽤 인상적인 배치였습니다.

상당히 인상적인 배치였습니다

맥아더와 부인의 관

전시관의 전시물은 비교적 평이한 편이었습니다. 맥아더의 이력과 당시 국제정세를 간략히 설명해주는 전시판과 관련된 전시물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주로 복식, 군장, 소화기 등이 주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특별한 설명은 필요가 없을 듯 싶으니 사진만 올리겠습니다.

맥아더의 초기 군경력을 보여주는 전시판

1903년 경의 미육사 생도 제복
1차대전 시기를 다룬 전시실
맥아더의 초기 군생활을 다룬 전시실 다음에는 1차대전기 맥아더의 활동을 다룬 전시실이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 처럼 군장, 소화기류 중심으로 전시가 되어 있는데 그래도 눈에 확 들어오는 전시물이 하나 있더군요. 1차대전 당시 서부전선의 참호를 1:1로 재현한 디오라마였습니다.

은근히 그럴싸 합니다.
상당히 괴로워 보입니다(?)
대부분의 전시물은 이런 군장류 입니다
가장 위에 있는 훈장이 맥아더가 1차대전 당시 수여받은 공로기장이랍니다
1차대전과 2차대전 사이의 전간기를 다룬 전시물은 대부분 설명문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내용은 상당히 알찬 편이지만 책에서도 알수 있는 내용들이라서 사진은 생략.

태평양전쟁 초기를 다룬 전시실도 특별히 다를 것은 없지만 재미있는 전시물이 아예 없지는 않았습니다. 맥아더가 코레히도르 시절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권총이 그 중 하나입니다.

맥아더가 코레히도르에 포위되어 있을 당시 소지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권총이랍니다
맥아더가 코레히도를 탈출할때 탑승한 PT-41의 모형



2012년 6월 29일 금요일

포츠담선언과 일본의 항복에 대한 몇가지 가정

저는 역사에 if를 대입하는 것을 꺼립니다. 재미있는 일이긴 한데 진지하게 하지 못하면 그냥 무의미한 말장난에 불과하니 말입니다. 좀 의미있는 if를 제시하려면 상당한 공부가 필요하지요. 그래서 저는 재미있기는 합니다만 if를 최대한 피합니다.

하세가와 츠요시의 Racing the Enermy : Stalin, Truman, and the surrender of Japan은 포츠담선언 직전 부터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수락하기 까지의 과정을 추적하는 흥미로운 저작입니다. 본문의 내용도 상당히 재미있게 서술되어 있지만 가장 흥미로운 점은 결론부분에 제시한 여러가지의 if 시나리오입니다. 포츠담선언의 내용과 형식에서 소련의 대일참전과 원자폭탄 투하 등 여러가지의 변수들을 고려한 if 시나리오들을 검토하고 있는데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재미있는 것은 포츠담선언에 대한 if 시나리오 입니다. 저자는 포츠담선언에 관해서는 세가지의 가능성을 검토해보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미국이 포츠담선언문에 일본의 천황제 존속을 명시했을 경우이고 두 번째는 미국이 포츠담선언문에 무조건 항복을 명시하되 소련이 서명국으로 참여하도록 하는 경우이며 마지막 세 번째는 미국이 포츠담선언문에 천황제 존속을 명시하면서 소련이 서명국으로 참여하도록 하는 경우입니다. 저자는 이 세가지 경우에 대해 다음과 같은 분석을 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미국이 포츠담선언문에 천황제 존속을 명시했을 경우입니다. 실제로 이것은 미국 상당수의 미국 외교관들과 군인들의 지지를 받은 안이기도 합니다. 저자는 이 경우에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를 제시합니다. 먼저 미국이 천황제 존속을 명시하더라도 일본 국내의 주전파들이 항복을 받아들이는 것은 가능성이 매우 낮았을 것이라고 봅니다. 다만 천황제 존속이라는 조건 때문에 히로시마에 첫번째 원자폭탄이 투하되었을 경우 주전파가 급속히 힘을 잃고 일본이 항복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었을 것으로 파악합니다.
그 러나 이 시나리오는 미국의 대중여론은 물론 정책 결정권자인 트루먼이 무조건항복을 원했기 때문에 실현이 불가능하다고 지적합니다. 특히 트루먼이 진주만 기습으로 인한 확실한 ‘복수’를 위해 무조건 항복을 선호했으며 결정적으로 원자폭탄을 실전에 사용하기를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두 번째는 미국이 포츠담선언문에 무조건 항복을 명시하되 소련이 서명국으로 참여하도록 하는 경우입니다. 이 경우에는 일본이 소련을 통해 미국과 교섭하려는 희망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되지만 그래도 주전파로 인해서 원자폭탄이 투하될 때 까지 싸움을 계속할 것 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천황제의 존치문제 때문에 원자폭탄이 투하되더라도 주전파가 논의를 주도할 가능성이 높으며 결국에는 실제 역사와 마찬가지로 소련의 참전은 불가피 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세 번째는 미국이 포츠담선언문에 천황제 존속을 명시하는 한편 소련도 서명국으로 참여하도록 하는 경우입니다. 포츠담선언에 관한 if 시나리오 중 가장 재미있는 시나리오 입니다. 이 경우는 천황제를 유지하는게 가능한데다가 소련의 참전도 확실해 지기 때문에 주전파가 설자리가 없어진다는 변수가 있습니다. 저자는 주전파에서 육해군을 유지하는 것 같은 세부적인 조건을 제시할 수도 있겠지만 영향력은 미미하리라 봅니다. 물론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될 때 까지도 주전파를 압도하지 못할 가능성은 있으나 이 경우에는 일본의 항복이 앞당겨질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것은 트루먼과 번즈가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추구하고 있었으며 스탈린 또한 동아시아에서 이권을 획득하기 위해 참전을 갈망하고 있었기 때문에 실현가능성이 가장 낮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저자는 이렇게 세가지 가능성을 제시하고 그것들이 왜 실제로는 실현되기 어려웠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if 시나리오를 제시하면서 이것을 통해 실제 역사가 왜 그러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 밖에 없었는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죠. 꽤 흥미로운 서술 방식입니다.

2012년 5월 7일 월요일

2차대전 중 미국의 화학전 검토에 대한 잡상

John Ellis van Courtland Moon이 1989년에 Journal of Strategic Studies에 기고했던 “Project SPHINX: The Question of the Use of Gas in the Planned Invasion of Japan”라는 논문을 읽다보니 앞부분에 꽤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왜 미국이 1945년 이전에는 일본을 상대로 화학무기 사용을 적극적으로 검토하지 못했는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1943년의 타라와 전투에서 미군이 상당한 인명손실을 입은 뒤 미국내에서 일본을 상대로 화학무기를 사용해야 한다는 여론이 조금씩 힘을 받기 시작한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갤럽의 조사에 따르면 1944년 9월에 일본을 상대로 화학무기를 사용하는데 찬성하는 여론은 23% 남짓이었는데 1945년 6월에는 40%까지 늘어났다고 하지요. 타라와 전투 이후 일본군이 각 지역에서 보여준 극단적인 저항은 미국인들에게 상당한 문화적 충격을 주었던 모양입니다. 일본군의 저항으로 인명손실이 높아지면서 대중과 언론은 물론 미육군 내에서도 요새화된 섬에서 저항하는 일본군을 상대로 화학무기가 효과적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특히 미육군 화학전국Chemical Warfare Service의 국장 포터William N. Porter 소장은 일본을 상대로 화학무기를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강력하게 펼친 인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포터 소장의 제안은 육군참모본부 작전국에서 검토만 되었을 뿐 1945년 이전에는 그 이상의 단계로 나가질 못했습니다.

문은 그 이유를 몇가지 제시하고 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루즈벨트 대통령이 화학무기 사용에 부정적이었다는 점 입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미국이 먼저 화학무기를 사용하는 것에 반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제시하는 이유가 재미있습니다. 미국은 일본군을 상대로 화학무기를 사용할 경우 유럽전선에서 독일이 화학전을 전개할 가능성을 우려했다는 것 입니다. 일본군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강력한 화학전 능력을 갖춘 독일이 화학무기를 뿌려댄다면 제법 골치가 아팠을 것 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루즈벨트 대통령이 사망한 것과 함께 독일의 항복도 미국이 1945년 부터 본격적으로 일본을 상대로 한 화학전을 진지하게 검토한 이유라는 것 입니다.

이점을 보면 냉전기에 핵무기 사용을 둘러싼 논의가 연상됩니다. 특히 독일의 화학전 능력이 상대적으로 화학전에 대한 보복수단이 마땅치 않은 일본에 대한 억지력으로 작용했다는 설명은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마치 핵무장을 한 강대국이 하위 동맹에 대한 핵억지력을 제공하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고 할까요.

2012년 1월 11일 수요일

과대광고, 혹은 어떤 결전병기(???) - 2


과대광고, 혹은 어떤 결전병기(???) - 1



과대광고, 혹은 어떤 결전병기(???)에 대한 잡담 하나.

항공전력은 하늘의 전장을 지배했다.(Airpower dominated its own element.)

항공전력은 바다의 전장을 지배했다.(Airpower dominated naval warfare.)

항공전력은 지상의 전장을 지배했다.(Airpower dominated ground warfare.)

항공전력은 강력하고 독립적인 군수능력을 소유했다.(Airpower possessed powerful and independent logistical capabilities.)

항공전력은 목표로 한 지역에서 공중을 장악하여 효과적인 지역 차단을 할 수 있었다.(Airpower established effective area interdiction by occupation of the air space over an objective area.)

항공전력은 지상전을 치르지 않고도 적국이 항복을 하도록 강요할 수 있었다.(Airpower was capable of forcing the capitulation of an enemy nation without surface invasion.)

Military Analysis Division, The United States Strategic Bombing Survey : Air Campaigns of the Pacific War, (USGPO, 1947),  p.69
위의 인용문은 미군이 2차대전 종전 직후 일본에 대한 전략 폭격 성과를 조사한 뒤 발간한 보고서에서 발췌한 것 입니다. 인용문에서는 Airpower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만 사실 그것은 전략폭격기를 지칭하는 것 이지요. 미국에서는 전쟁 직후 군사력 감축으로 인한 효율적인 안보정책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2차대전 당시 미국 육군항공대가 전략폭격을 통해 거둔 성과는 미국의 정치권은 물론 대중여론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저렴한 비용으로 큰 피해 없이 국가안보에 기여하고 미래의 전쟁에 승리할 수 있다는 전망은 정말 달콤한 유혹이지요. 이것은 독립된 공군을 창설해야 한다는 육군항공대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미국 공군이 창설되었을 때 전략폭격기 부대는 그 중핵이 됩니다. 이렇게 항공력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여론이 강해지면서 결과적으로 제독의 반란이라는 초유의 사태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얼마 안가 일어난 한국전쟁은 이런 낙관적인 전망에 찬물을 끼얹게 되지요.

2011년 9월 19일 월요일

전통의 재발견

전통이란 때마다 재발견되고 재해석 되는 것이라지요.

제군, 우리들이 대동아전쟁의 진두에 섬은 물론 일본국민의 충의성忠義性에 투철하기 위해서지만 다시 우리 조선사람의 입장으로서 본다면 또 하나의 간절한 기대가 여기 숨어있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들이 잃어버린 '마음의 고향'을 발견하는 것이요, 잠자는 혼을 깨우쳐 우리들 본연의 자태로 돌아가는 길이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나약안일에 더럽힌 남루를 벗어던지고 '의'에 살고 '의'에 죽고 '용'에 일어서고 '용'에 넘어짐을 제일의로 한 우리들의 그전 모습을 찾아내는 길이다. 가마쿠라무사들과 함께 세계역사상에 무사도의 쌍벽이라고 일컬어 온 바 고구려 무사, 신라 무사의 무용성武勇性을 찾아내어 그 씩씩한 전통을 우리들의 생활원리로 하고 우리들의 정신적 부활을 꾀하는 것이 오랫동안 우리들에게 요망되어 오던 바 그 절호한 기회가 대동아의 전장에 그 특별지원병으로서의 용맹한 출진에 의하여 발견되는 것을 나는 통감하는 바이다.

崔南善, 「나가자 靑年學徒야 : 젊은 피와 情熱을 聖戰에 바치라」, 『每日新報』(1943. 11. 20), 정운현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 (없어지지않는이야기, 1997), 228쪽에서 재인용

생각해 보면 나치들도 노르웨이에서는 바이킹을, 벨기에에서는 중세 플랑드르 기사들을 팔면서 지원병을 모집했으니 일본군 모집에 고구려 무사를 팔아먹는 것도 나름 그럴싸 합니다?

2011년 8월 30일 화요일

전쟁 말기 일본육군의 차량 부족에 대한 잡담

아래의 글에서 일본군의 궁색한 대전차 전투 사례를 하나 다루긴 했습니다만 2차대전기 일본 육군의 장비상태를 보면 이게 미국과 전쟁을 벌이는 열강이 맞나 싶을 정도입니다. 물론 태평양 전쟁이 해전 위주였고 일본해군이라면 세계 일류급 해군이긴 합니다만 육군과 육해군 항공대의 질적 수준은 삼류라 해도 과언이 아닌 수준이니 말입니다. 게다가 질적수준은 물론이고 양적 수준도 형편없지요.

태평양 전쟁 종전 직후 미군이 일본군을 무장 해제한 기록을 보면 본토결전을 위해 일본 육군이 준비한 전력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장기간의 소모전을 겪은 이후라 하더라도 1944년 말 부터 본토결전 준비를 한 것 치고는 준비가 영 부실한게 눈에 띄입니다. 조금 극단적인 사례일 수 있는데 규슈에 배치된 제16방면군 예하 40군의 경우 군 전체에 트럭 186대, 기타 차량 64대, 장갑차 46대 등 총 296대의 차량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장갑차를 제외한다면 250대의 차량이 있는 셈이지요.1) 일본 제40군은 1945년 1월 8일 편성에 들어갔고 여기에 총 4개 사단과 1개 혼성여단이 배속되어 있었습니다. 제303, 206, 146, 77사단과 독립혼성 125여단이지요. 그냥 단순하게 계산해서 제40군에 배속된 각종 지원부대를 제외하면 총 15연대(303사단 3개연대, 206사단 3개연대, 146사단 4개연대, 77사단 3개연대, 제125여단은 5개대대 편성이니 대략 2개연대로 계산)에 차량 250대, 1개 연대에 차량 16~17대 정도가 돌아가는 셈입니다;;;; 여기에 군 직할대를 포함시켜서 나눈다면 그 숫자가 더 줄어들겠지요. 사실상 미군이 직접 공격해 왔다면 신속한 기동은 포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제40군은 303, 206, 146사단과 독립혼성125여단 등 총 3개사단과 1개 여단을 해안 방어에 투입하고 있었습니다.2) 제40군의 유일한 예비대로는 77사단만이 남는 셈인데 뭐 신속한 기동이 어려우니 미군이 상륙해 왔을 경우 어떻게 되었을지는 상상만으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다른 곳과 비교해 본다면 어떨까요? 제 개인적으로 일본군의 본토 결전준비와 비교할 만한 대상으로는 독일군의 북부 프랑스 방어준비가 적합할 듯 싶습니다. 동부전선에서 장기간의 소모전을 거친 뒤 방어를 위해 수개월간 전력을 급히 축적한 사례이니 비교대상으로 적절하지 않을까 싶군요. 먼저, 위에서 언급한 일본군 보병사단들과 비슷하게 차량화 우선순위에서 뒤떨어지는 제6강하엽병연대의 경우 연합군의 상륙 직전 70대의 트럭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3) 장비 상태가 나쁜 축에 속했던 272보병사단의 경우는 오토바이를 제외하고 105대의 자동차, 136대의 트럭, 71대의 견인용 트랙터를 보유하고 있었고 비교적 양호한 수준으로 볼 수 있는 353보병사단은 오토바이를 제외하고 573대의 차량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4) 매우 거친 비교이긴 합니다만 일본군에 비교하면 차량화 수준이 상당히 양호한 편입니다.

물론 1945년 봄 본토방어를 위해 준비한 독일군과 비교하는게 타당하다고 보시는 분들도 계실 것 입니다. 1945년 봄을 기준으로 할 경우에는 독일군 보병사단도 상당히 엉망입니다. 약간의 예를들면 제167국민척탄병 사단은 1945년 3월 중순 편제의 13%의 차량만 갖추고 있었고 제326국민척탄병 사단의 경우는 아예 말과 마차만 갖추고 있었습니다.5) 하지만 그 당시의 독일군은 껍데기만 남긴 했어도 어느 정도의 기동부대들을 유지하고는 있었지요. 그 점에서 1945년 봄의 독일육군 조차도 일본 육군 보다는 조금 나은 수준이라고 볼 수 있을 것 입니다. 사실 국민돌격대에 판쩌파우스트라도 쥐어준 것을 보면 아무래도 독일이 일본 보다는 좀 낫지 않습니까.




1) John Ray Skates, The Invasion of Japan : Alternative to the Bomb, (University of South Carolina Press), p.190
2) John Ray Skates, ibid., p.120
3) Hans-Martin Stimpel, Die deutsche Fallschirmtruppe 1942~1945 : Einsätze auf Kriegsschauplätzen im Osten und Westen, (Mittler&Sohn, 2001), p.156
4) Niklas Zetterling, Normandy 1944 : German Military Organization, Combat Power and Organizational Effectiveness, (J.J.Fedorowicz, 2000) p.252, 282
5) John Zimmermann, Pflicht zum Untergang :  Die deutsche Kriegführung im Westen des Reiches 1944/45, (Schöningh, 2009), p.229

2011년 8월 27일 토요일

읽는이를 답답하게 하는 일본 육군의 대전차전 사례 하나

2차대전 당시 일본군 보병의 빈약한 대전차전 능력은 아주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래서 유럽전선이었다면 전차들이 보병의 손쉬운 사냥감이 되었을 상황이라도 일본군은 별 볼일 없는 성과만 거뒀던 것 같습니다. 아래의 사례는 레이터 전투 당시의 일화입니다. 보시면 아시기겠지만 보병이 제대로 된 대전차 화기를 갖췄다면 그야말로 전차가 큰 피해를 봤을 상황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전차를 공격한 쪽이 일본군이었다는 것이죠;;;;

제763전차대대는 96보병사단에 배속되었다. 이 대대는 상륙 당일 산 호세San Jose인근에 상륙했다. 763전차대대는 보병을 지원하면서 내륙으로 수천 야드를 진격했지만 해안가 뒤로 펼쳐진 습지대에 가로 막혀 옴싹달싹 못하게 되었다. 보병들만 계속해서 전진했다.

10월 22일, C중대와 D중대의 3소대는 무르고 질척거리는 지형에 가로막혀 다시 해안으로 되돌아가 가야 했다. 이들은 해안에 도착하자 (북서쪽으로 4마일 떨어진) 피카스Pikas로 가는 길을 찾은 뒤 그곳에서 어려움에 처해 있는 383보병연대를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찰스 파이페Charles G. Fyfe중위가 지휘하는 C중대의 1개 소대에 래퍼티David M. Rafferty가 지휘하는 D중대의 경전차 소대가 배속되어 이 임무를 맡게 됐다. 보병들은 이 전차 부대들이 지나가야 할 지역을 거쳐서 진격했지만 일본군을 정글에서 완전히 소탕하지는 못한 상태였다. 전차들이 지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의 오른쪽 측면의 카트몬Catmon산에는 우회하고 넘어간 일본군의 대규모 거점이 아직 남아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차를 보호할 보병이 전혀 배속되지 않았다.

피카스로 가는 길은 상태가 나쁜데다 구불구불했고 교량은 통과 가능한 하중이 낮았다. 대열을 선도하는 중형전차가 교량을 망가트렸기 때문에 후속하던 경전차들은 전차가 건널 수 있는 얕은 여울목을 찾아야 했다. 이 때문에 경전차 소대는 다소 뒤쳐지게 되었다.

보병이 배속되지 않았기 때문에 경전차와 중형전차 모두 지나가는 길에 있는 여울, 커브길, 오르막길 마다 주의를 하며 지나갈 필요가 있었다. 경전차들이 막 한 고비를 넘기려 했을 때 도로 왼편의 덤불 속에서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들렸으며 갑자기 막대기에 달린 폭약을 가진 일본군 한명이 덤불속에서 튀어 나와 선두 전차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 일본군 병사는 후속하던 전차의 사격에 의해 중간에 쓰러졌다. 길을 따라 수백 야드 더 전진하자 도로의 오른편에 있는 무성한 덩쿨속에서 또 다른 일본 병사가 튀어나왔다. 이번에는 선두 전차가 당해서 오른쪽 궤도가 파괴되었다. 전차장 래퍼티 중위는 자신의 전차를 수리하는 동안 소대의 다른 전차들에게 자신의 전차를 둘러싸고 경계를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전차들이 경계 대형을 취한지 얼마 되지 않아 적군이 공격해 왔다. 군도를 휘두르는 장교가 이끄는 약 30명의 일본군이 덤불 속에서 튀어나왔다. 일본군들은 고함을 지르고 사격을 퍼부으면서 전차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일본군 장교는 뭔가를 잘못 알고 있었는지 자신만만하여 마지막 전차로 달려들었고 차체의 기관총을 군도로 힘껏 내리쳐 반쪽을 내려고 했다. 그 장교는 곧바로 다른 전차의 기관총에 벌집이 되었다. 짧지만 요란한 교전이 끝나자 일본군은 후퇴했지만 계속해서 가까운 거리에서 경전차 소대를 소화기로 공격했다.

그때 중형전차 소대는 상당히 앞서가고 있었다. 래퍼티 중위는 파이페 중위에게 무전을 날려 그의 소대가 어려움에 처했다고 알렸다. 일본군의 사격 때문에 노출된 상태에서 이동하는 것이 어려웠고 경전차는 공간이 좁아서 기동불능이 된 전차의 승무원들 까지 태울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전차를 포기할 수가 없었다. 파이페 중위는 경전차 소대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으나 전차 한대 만을 좁은 길을 따라 돌려보낼 수 있었다. 이 전차는 불운에 처한 경전차 소대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래퍼티 중위와 그의 부하들은 자신들의 전차의 탈출용 해치로 빠져나와 도랑을 따라 기어서 구출하러 온 중형 전차의 탈출용 해치로 들어갔다. 그리고 경전차 소대는 후퇴를 하려 했다.

일본군의 강력한 사격 때문에 이 기동은 매우 어려웠다. 다른 전차 한대가 막대기 폭약에 맞았다. 이동하는 것 보다는 정지해 있는 것이 덜 위험한 것으로 보였다. 파이페 중위에게 교신이 취해졌고 파이페 중위는 다시 중대장에게 알렸다. 그리고 경전차 소대는 그 위치에 남아 일본군이 모습을 드러내면 사격을 산발적으로 가했다.

마침내 C중대에서 다른 중형전차 소대가 도착했다. 일본군은 격퇴되었고 부대 전체가 중대 지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루가 꼬박 지나갔다. 조금도 진격을 할 수 없었다. 전차 한대를 상실했다. 전차들은 383보병연대에 도착하지 못했다.

Committee 16, Officers Advanced Course  The Armored School, Armor in Leyte : Sixth Army Operations, 17 Oct-26 Dec 44, (1949). pp.94~97

전차에게 불리한 정글에서, 게다가 좁은 도로를 중심으로 지원하는 보병조차 없이 고립된 경전차 1개 소대를 격파하지 못한 것 입니다. 일본군의 대전차 전력이 얼마나 빈약했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같은 시기의 독일군 이었다면 763전차대대 D중대의 경전차 소대는 물론이고 구원하러 달려온 C중대의 중형전차 소대도 상당한 손실을 각오해야 했을 것 입니다. 실제로 독소전 초기 다소 빈약한 대전차 화력을 갖췄던 독일 보병들이 위에서 제시한 사례와 같은 지형에서 T-34나 KV 등의 강력한 전차를 상대로 보여준 실력을 보면 일본군은 장비만이 문제였던 것은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전차의 성능이 보잘것 없었던 1935년의 이탈리아-이디오피아 전쟁만 하더라도 보병들이 변변한 대전차 화기 없이 경전차를 때려잡을 수 있었습니다만 불과 10년도 되지 않아 전차는 기술적으로 무서운 발전을 이뤘지요. 사실 셔먼은 그렇다 하더라도 1944년 기준으로 별볼일 없는 성능이었던 스튜어트 경전차들 조차 격파하기 어려운 상대였다니 일본 육군은 장비면에서 정말 답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2010년 11월 20일 토요일

중국 전선의 패튼?

웨드마이어(Albert C. Wedemeyer)의 회고록에는 독일이 항복한 이후 패튼을 중국 전선으로 차출하려 한 이야기가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사실 광대한 중국 전선은 패튼 같은 인물에게는 꽤 잘 맞는 전장이었을지도 모르겠군요.

독일이 6월(원문의 오류)에 무조건 항복을 한 뒤에는 일본에 전력을 기울일 수 있도록 인력과 물자를 돌릴 수 있었으며 나는 마셜 장군으로부터 내가 패튼, 심슨(William Hood Simpson), 그리고 트러스콧(Lucian Truscott) 장군 등을 잘 통솔할 수 있다면 이들을 중국 전선에 파견할 수 있다는 통보를 받았다. 나는 훌륭한 전투 경험을 갖춘 간부들을 보내주겠다는 제안을 즉시 받아들였다. 이런 능력을 갖춘 인물들은 중국 전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이었다. 장 총통도 진심으로 찬성했다. 한편, 패튼 장군은 나보다 상급자였기 때문에 나는 마샬 장군에게 현재 직위를 그만 두고 전구 사령관을 패튼 장군에게 넘길 것과 어떤 역할이건 간에 그의 지휘 하에서 계속 복무하겠다고 했다. 마샬 장군은 내가 전구 사령관을 계속 맡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럴 경우 내가 4성 장군으로 진급해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장 총통과 헐리(Patrick J. Hurley) 대사는 내가 4성 장군급의 직위를 이어 받았으며 유럽 전선에 있는 몇몇 대장 계급의 장군들보다 더 큰 책임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대통령에게 나를 진급시켜줄 것을 요청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나는 두 사람에게 나는 매우 빨리 진급해 왔으며 다른 전구의 사령관들과 비교했을 때 근무 연한이나 경험 면에서 부족하며 현재의 계급으로도 중국군의 대장은 물론 원수들을 잘 상대해 왔다고 대답했다.

나는 잠정적으로 패튼에게 중국 북부를 담당하게 해서 베이징, 톈진, 그리고 친황다오(秦皇島) 등의 중요한 목표를 향해 동진하는 임무를 맡기기로 했다. 트러스콧은 중부를 맡아 양쯔강 계곡을 따라 상하이로 동진하는 임무를 맡기기로 했다. 그리고 이미 중국 남부를 잘 알고 있으며 지난 수개월간 능숙하고 공세적인 전투 지휘관으로써 뛰어난 자질을 보여준 매클루어(Robert A. McClure)는 남부를 맡아 광둥-주롱(九龍)-잔쟝(湛江, Fort Bayard) 등의 중요 목표를 향한 작전을 지휘하게 하려 했다. 나는 그 이전에 매클루어를 중장으로 진급 시켜야 한다고 건의한 바 있는데 이것은 그의 능력과 큰 임무에 걸맞는 직위였다. 심슨 중장은 전구 부사령관을 맡아 미군과 중국군 지상부대의 모든 작전을 총괄하도록 할 생각이었다. 인도에서 중국 전구로 차출된 유능한 항공 지휘관 스트레이트마이어 중장은 전구 부사령관이자 전구 연합군 공군 사령관을 맡게 되었다.

1945 년 8월로 넘어갔을 때 광둥을 점령하기 위한 카보네이도(CARBONADO) 계획은 초기 단계에 있었으며 실제로 광둥-주롱을 향한 진격 준비는 일정을 앞당겨 추진되고 있었다. 8월에 보다 공세적으로 동진을 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 부상자를 치료하고 후송하고 보충병을 지속적으로 투입하기 위한 시설을 포함한 전방 군수 지원을 마련하기 위해서 준비를 확실히 하고 싶었다. 즉, 나는 광둥을 향한 마지막 공세를 시작하면 공격 부대가 적절한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강력한 항공지원이나 탄약, 또는 보충병이 부족해서 돈좌되지 않기를 원했다.

Albert C. Wedemeyer, Wedemeyer Reports!(Henry Holts and Company, 1958) pp.331~332

그러나 중국 본토의 반격 작전이 아직 계획 단계이던 8월에 일본이 항복한데다 패튼도 사고를 당해 결국 패튼이 중국 본토에서 활약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호사가라면 꽤 재미있는 가정을 할 수 있겠죠.

재미삼아 썰렁한 가정을 조금 해 보죠.

일단 패튼의 작전 구역이 중국 북부가 된다면 독일에 이어서 다시 한번 그가 혐오했던 소련군과 접촉하게 됐을 겁니다. 역사에 만약은 없습니다만 그렇게 됐다면 패튼과 소련측은 다시 한번 신경전을 벌였겠지요.

그리고 한가지 확실한 것은 중국전선에서 일본군을 상대했다면 패튼이 그렇게 좋아했다던 셔먼이 전차 노릇을 아주 아주 잘 했을 겁니다. 태평양 전선의 셔먼 전차는 유럽 전선 처럼 얻어터지는 야라레메카 신세는 아니었으니 말이죠. 유럽 전선에서 셔먼의 굴욕을 지켜봐야 했던 패튼은 꽤나  흡족해 했겠죠.

2008년 3월 25일 화요일

전쟁은 물량만으로 하는게 아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지 1년을 넘긴 1942년 12월 12일, 전황이 일본에게 불리하게 꼬여가던 이 시점에 식민지 조선의 경성에서는 皇國臣民 함상훈(咸尙勳), 홍익범(洪翼範), 류광렬(柳光烈), 이정섭(李晶燮) 등이 모여 제국의 앞날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이 중에서 류광렬과 이정섭이라는 양반들의 대화가 참 감명 깊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셨거든요.(몇몇 표현은 현대어에 맞게 고쳤습니다.)

류광렬 : 지금 미국의 생산력 확장이라는 것은 금년 1월 6일 대통령이 의회에 보낸 교서에 의하면 천문학적 숫자를 열거하고 있는데 설사 그 숫자에 가깝게 생산이 되고 있다 하더라도 그 생산된 군수품의 전부가 태평양전에 쓰이는게 아니고 세계 각국에 수송되어 영국, 소련, 또는 중경으로 가는 것이 있으니까 실제로 태평양에 오는 것은 그 중의 몇 분의 일 밖에 아니 될 겝니다.

그렇지만 어떻든 그들의 유일의 위안은 생산력에 있다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대동아전(大東亞戰) 전에 처칠이 일본은 강철의 생산이 빈약한데 어떻게 이기겠느냐고 한 것을 보아도 그런 것을 알 수 있지만 전쟁은 무기다소(武器多小)에 좌우되는 것 만은 아닙니다. 군사전문가가 아닌 ‘시로도(素人)’가 돼서 잘 알지 못합니다만 정부나 군 당국자의 말을 들어보아도 그렇고 전번에 한 스즈끼(鈴木)총재의 말에도 전쟁은 天地人을 갖추어야 하나 결국은 사람에 있다 했고 해군 당국자도 적의 생산력을 과대평가해서는 안되나 과소평가해서도 아니 된다는 말을 했고 도고(東鄕)원수도 백발일중(百發一中)의 포 백문을 가지는 것 보다 백발백중(百發百中)의 포 일문을 가지는 것이 났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적이 백발일중의 포 백문을 만드는 동안에 여기서는 백발백중의 포 일문만 하면 그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느 수준을 확보해 가야만 하겠다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미국도 무제한으로 군수품을 확대한다는 것이 아니라 1944년도까지 보아 확장계획이 완성되면 반격해보겠다는 것이지 언제까지나 군기확장만은 못할 겝니다. 한도가 있을 게니까요. 군기확장과 같은 비밀에 속하는 것을 신문에 공개하는 것을 보면 여기에도 다분히 선전의 의미가 있습니다. 결국은 군확(軍擴)이란 것도 그것이 무한량이 아닌 한 년한(年限)이 있을 때 까지 튼튼히 대비만하고 있으면 조금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이 적의 심중과 계획을 잘 토도(討度)하여 여기에 대비할만한 생산력 확충에 주력하여 만전을 기할 것 뿐입니다.

투혼에 불타는 황군의 百發百中의 포 일문

VS

정신박약 양키들의 百發一中의 포들


이정섭 : 적국측의 곤란은 물질보다 인적자원에 있겠는데 제아무리 저희들 말대로 1944년까지 400만 兵을 확충한다 치더라도 남는 것은 병의 기술문제이지요. 가령 비행기를 완전히 조종하려면은 적어도 2년 동안 맹훈련을 받지않고는 쓸만한 것이 못되고 함선도 240만톤이나 만들어 내겠다 장담하지만 완전한 선상생활을 하려면 적어도 20년은 지나야 한답디다. 사관학교를 나와 20년 지나서 함장격이 될 수 있으니 전쟁 나기 전에 얼마나한 인원을 길러뒀는지는 모르지만 도저히 많은 기술자가 없을 줄 알어요. 설혹 기술이 있다쳐도 가장 요긴한 투혼이 아군에게 따르지 못하고 정(신)력이 박약해놔서 아까 류광렬씨 말씀같이 기계력이 충실해 진다 쳐도 일본 반공은 못할 것입니다.

조광 1943년 1월호, '世界政局의 前望', 31-32쪽

과연 이 양반들이 진심으로 이런 말을 한 건지는 의문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황국신민으로서 습득한 정신력(?) 중시의 전통은 한국전쟁을 거쳐 오늘날에도 조금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2007년 12월 5일 수요일

트루먼도 인정한 일본인의 근성

매우 유명한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배군님의 글을 읽고 나니 이 부분이 떠올라서 올려 봅니다. 트루먼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태평양 전쟁 말기 미군이 겪었던 끔찍한 인명손실과 일본군들의 결사적인 항전에 대해서 언급하고 이 때문에 소련의 참전을 필요로 했다고 언급했습니다. 특히 오키나와와 이오지마의 경험은 일선 부대 뿐 아니라 대통령인 트루먼 조차도 경악하게 할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트루먼 회고록의 해당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1941년 12월 7일에 시작된 태평양에서의 전쟁은 매우 고되고 희생이 컸다. 우리는 진주만과 바탄반도의 패전 이후 긴 여정을 거쳤다. 우리의 군대는 남쪽으로는 오스트레일리아와 뉴 칼레도니아와 동부 태평양으로는 하와이 제도로부터 필리핀과 일본 본토를 방어하는 마지막 도서 방어선들을 향해 싸워나갔다. 오키나와와 이오지마의 적은 결사적으로 항전했으며 아군의 인명손실은 극도로 높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해서 일본 본토를 직접 공격할 수 있는 기지를 얻게 되었다. 우리는 일본 본토에 가까워 질수록 적의 저항은 더욱 단호하고 필사적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본 본토와 조선, 만주, 그리고 중국의 화북지방에는 아직도 4백만에 달하는 일본군이 남아 있었다. 또한 일본은 본토의 최종방어를 위해 향토방위대를 편성하고 있었다.
합동참모본부는 일본 본토를 침공할 경우 발생할 손실에 대해서 매우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었다.
태평양의 아군은 일본 본토에 다가갈수록 더 많은 손실을 치르고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를 전쟁에 끌어들이는 것이 시급해졌다. 러시아가 전쟁에 개입한다면 미국인 수십만명의 생명을 구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Harry Truman, Memoirs - Year of Decisions(Doubleday&Company 1955), p.414

2007년 3월 8일 목요일

대인배의 꿈을 키웁시다

아래의 이야기는 매우 유명한 일화이지요.

(전략) 그러나 7월 2일에 시작된 협상은 거의 시작하자 마자 난항에 부딛혔다. 스탈린이 소련의 국가안보에 있어서 외몽골의 중요성을 강조했기 때문이었다. 스탈린은 15년 혹은 20년 내에 일본이 다시 국력을 회복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소련의 안보에 심각한 위협이 될 것이므로 외몽골을 소련의 영향력 안에 둬야 한다는 것 이었다. 스탈린은 송자문(宋子文)에게 말을 계속했다.

“만약 우리가 일본과 전쟁을 시작한다면 인민들이 뭐라 하겠습니까? 우리는 이제 막 4년에 걸친 전쟁을 끝냈는데 왜 또 전쟁을 시작하냐고 할 것 입니다. 그리고 일본은 우리를 공격하지 않았는데 왜 소련이 먼저 전쟁을 시작하냐고 하겠지요. 그러니 우리 인민들에게 전쟁을 벌이는 이유가 소련의 안보를 더 굳건히 하기 위해서라고 하는 것 말고 더 좋은 구실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송자문은 외몽골 문제에 대해서는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으려 했다. 외몽골은 중국의 고유한 영토이기 때문에 외몽골을 독립시키는 것은 중국의 자존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것 이라는 것 이었다.

그러나 장개석은 스탈린이 국민당 정부에 대한 지지를 공개적으로 표명하자 만약 소련이 만주에서도 국민당의 우위를 보장하고 여기에 덧붙여 중국 공산당에 대한 지원도 중단할 경우 외몽골을 소련에 넘기기로 결정했다. 7월 9일, 송자문은 이에 따라 스탈린에게 새로운 제안을 했다. 송자문은 중국이 외몽골을 포기하는 대가로 소련이 중국 공산당에 대한 지원을 중단할 경우 국민당 정부는 소련에게 뤼순과 다롄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주겠다고 제의했다. 또 만주 철도는 중국이 소유권을 가지되 운영은 중국과 소련이 공동으로 하자는 제안을 내 놓았다. 스탈린은 이 제안을 받자 즉시 중국 공산당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만주 문제에 있어서는 이견이 있었다. 스탈린은 뤼순은 소련이 소유권을 가져야 하며 또 만주 철도 역시 소련이 소유권을 가져야 한다는 것 이었다. 왜냐하면 “만주 철도를 건설한 것은 러시아 였기” 때문이었다.

스탈린은 빨리 국민당 정부와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뤼순과 만주 철도 문제에 있어서는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으려 했다. 7월 11일 회담에서 스탈린은 “내가 베를린으로 출발하기 전에 빨리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고 했으나 결국 양측의 이견을 좁히지는 못했다. 7월 12일 회담에서도 양측은 평행선을 달렸고 결국 스탈린이 먼저 포기했다. 협상은 일시 중단됐으며 스탈린은 중국측과 포츠담 회담 이후 회담을 재개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이것은 앞으로 스탈린이 겪게 될 여러 문제 중 하나에 불과했다.

Tsuyoshi Hasegawa, Racing the enemy : Stalin, Truman, and surrender of Japan, Harvard University Press, 2005, p129

한때는 우리의 마오 주석도 대인배들의 거스름 돈 이었다고 합니다. 자. 우리도 대인배의 꿈을 키웁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