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 25일 토요일
이상한 논문을 한 편 읽었습니다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이번호(40-1)에 실린 매튜 팔머(Matthew S. Palmer)의 The Grand Delusion: The Creation and Perseverance of the September Campaign Mythos를 읽었는데, 이 글은 여러모로 놀라운 글이었습니다. 이글의 핵심은 폴란드군이 기술적, 교리적으로 매우 뛰어난 군대였으며 독일 국방군을 전술적으로 압도했다는 것 입니다. 1990년대 후반 이후 1차사료에 기반한 탁월한 2차대전 연구들이 등장하면서 독일군에 대한 여러가지 신화가 깨지고 보다 객관적인 역사인식이 확산됐습니다. 폴란드 침공 당시 독일군이 전술적으로 미숙한 면이 많았으며 몇몇 전투에서 큰 손실을 냈다는 점은 널리 인정되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팔머의 글은 연구 방법의 측면에서 심각한 문제점을 보여주고 있으며 내용도 황당한 것이 많습니다. 예를들어 팔머는 폴란드전에 독일 기갑부대의 전차 완전손실이 850대에 달하며 총 손실은 폴란드측이 주장하는 1,400대라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독일 기갑부대가 폴란드전에서 입은 전차 완전손실이 850대라는 주장은 프리츠 한(Fritz Hahn)의 Waffen und Geheimwaffen des Deutschen Heeres 1933–1945를 근거로 한 것인데, 이 책은 나온지도 꽤 됐고 학술서적이 아닌 대중용 개설서에 불과합니다. 결정적으로 이 책의 내용은 1차사료를 활용한 다른 저작들과 상충되는 것이 더러 있습니다. 독일 1차사료를 활용한 토마스 젠츠(Thomas Jentz)의 Panzertruppen, 104쪽에 따르면 9월 1일 부터 25일까지 독일 기갑부대가 폴란드전에서 입은 전차 완전손실은 236대이며, 총손실은 566대입니다. 폴란드군이 고작 3주동안 독일 전차를 1,400대 이상 격파할 전투력이 있었다면 독일군은 바르샤바 근처도 가지 못했을 겁니다. 2개월에 걸친 프랑스전 당시 독일군의 전차 완전손실이 839대였는데, 폴란드군이 그 보다 짧은 기간에 프랑스와 영국군이 격파한 것 보다 더 많은 독일 전차를 격파할 수 있었다면 전쟁에 진 이유는 뭘까요?
이 글에서 문헌자료를 다루는 방식은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폴란드 망명정부가 선전을 위해 만든 책자는 신뢰하면서도 독일측 1차 사료는 조작됐거나 착각이라고 비판하고, 핵심적인 주장의 근거로 오래전에 나온 2차 사료를 제기하는 등 연구의 수준이 떨어진다는 느낌을 많이 줍니다. 팔머의 주장 처럼 독일측 기록이 모두 착오, 날조라면 재미있는 것이 다른 모든 기록들도 함께 조작돼야 한다는 것 입니다. 예를들어 팔머의 주장대로 폴란드전에서 독일군이 850대의 전차를 잃었다면 이듬해인 서부전역에 동원할 수 있는 전차는 3,000대도 채 못 되어야 하지만, 실제로 서부전역 당시 독일군의 전차 총 보유대수는 3,465대입니다.
폴란드전당시 독일군 전차 총 보유대수(A): 3,472
팔머의 주장에 따른 폴란드전 당시 독일군 전차 총 손실대수(B1): 850
폴란드전 이후~서부전역 직전까지의 독일군 전차 총 손실(C): 439*
폴란드전 이후~서부전역 직전까지의 독일군 전차 총 생산(D): 685
A-B1-C+D=2,868
*C는 대부분 1호전차인데, 기계적 수명이 다 되어 폐기했거나 다른 용도로 개조해 전차 목록에서 제외된 것으로 추정됨.
팔머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독일군의 전차 생산기록이 오류거나 야전군의 전차보유 기록이 오류거나 둘중의 하나입니다. 하지만 독일측 기록대로 폴란드전 당시 독일군의 전차 총 손실이 236대라면 큰 모순이 없습니다.
폴란드전당시 독일군 전차 총 보유대수(A): 3,472
독일 1차사료에 따른 폴란드전 당시 독일군 전차 총 손실(B2): 236
폴란드전 이후~서부전역 직전까지의 독일군 전차 총 손실(C): 439
폴란드전 이후~서부전역 직전까지의 독일군 전차 총 생산(D): 685
A-B2-C+D=3,482
※실제 기록과 17대 정도의 차이가 있는데 이정도 오류는 오차범위 내라고 판단됩니다.
간단히 살펴봤음에도 불구하고 팔머의 글은 심각한 문제가 산적해 있습니다.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같은 저명한 학술지에 이 정도 수준의 글이 실렸다는게 충격입니다.
2013년 7월 24일 수요일
2차대전기 미영 연합군의 전차 손실에 대한 통계 : Survey of Allied Tank Casualities in World War II - (2)-1
통계로 때우는 땜빵 포스팅 하나 나갑니다.
이번에 올리는 내용은 2차대전기 미영 연합군의 전차 손실에 대한 통계 : Survey of Allied Tank Casualities in World War II - (2)에서 빼먹고 넘어간 통계입니다. 내용은 1944년 8월 28일부터 9월 7일까지 프랑스 전선에서 영국군이 추격전을 펼칠 때 발생한 전차 손실에 대한 것 입니다. 전투가 격렬하게 전개되는 상황이 아닌 추격전 상황하에서 발생한 손실에 대한 내용이어서 흥미가 반감되지만 기계적 요인이 손실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연합군의 전차 손실에 관한 전체적인 경향은 위에 링크한 지난 글들을 참고하십시오.
이 통계에 실려있는 6개의 부대 중 크롬웰을 장비한 영국군 제7기갑사단을 제외한 나머지 부대는 셔먼을 주력으로 장비하고 있었습니다.(폴란드 제1기갑사단은 셔먼과 크롬웰의 혼성편제이지만 셔먼이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1)
표. 프랑스전선에서 영국군 기갑부대의 전차 손실(1944. 8. 28~9. 7)
기계고장
(대수)
|
기계고장
(%)
|
전투손실
(대수)
|
총 손실
(대수)
| |
영국 근위기갑사단
|
59
|
92.2
|
5
|
64
|
영국 제8기갑여단
|
57
|
74.0
|
20
|
77
|
영국 제11기갑사단
|
44
|
88.0
|
6
|
50
|
영국 제7기갑사단
|
38
|
76.0
|
12
|
50
|
폴란드 제1기갑사단
|
50
|
62.5
|
30
|
80
|
캐나다 제4기갑사단
|
57
|
91.9
|
5
|
62
|
총 계
|
305
|
-
|
78
|
383
|
일일평균손실
|
5.4
|
79.4
|
1.4
|
6.8
|
100마일당 평균손실
|
16
|
79.6
|
4.1
|
20.1
|
[출처 : Technical Memorandum ORO-T-117, Survey of Allied Tank Casualities in World War II(1951. 3. 31), table 3, p.12]
이 통계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100마일당 평균손실을 계산한 내용입니다. 100마일은 160km가 되니 10km를 달릴때 마다 셔먼이나 크롬웰 한대가 고장으로 낙오되었다는 이야기이죠.
다음으로 흥미로운 것은 영국 제7기갑사단의 손실에 관한 내용입니다. 크롬웰을 장비한 영국 제7기갑사단은 셔먼을 장비한 부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손실율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7기갑사단장 버니Gerald L. Verney 소장이 벨기에 방면으로 추격전을 펼치는 동안 크롬웰은 기계적 고장으로 인한 손실이 사실상 거의 없었다고 보고한 것과는 조금 상충되는 내용입니다.2) 제7기갑사단이 노르망디 전선에 투입될 당시 다른 영국군 기갑사단들과 마찬가지로 343대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으니 전투손실을 고려하면 8월 말에는 그보다 적은 숫자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을 것이 확실합니다. 10일 동안 38대를 기계적 고장으로 잃었다는 것은 그리 작은 손실이 아니지요. 크롬웰은 영국이 제2차 대전중에 생산한 전차 중에서는 기계적 신뢰성이 가장 뛰어난 차종으로 꼽히기에 더욱 궁금합니다. ORO-T-117에 좀 더 상세한 내역이 없는게 아쉽군요.
이 보고서에는 추격전 기간 중에 기계고장으로 인한 손실이 상대적으로 높아지는 원인으로 유동적인 전장 상황으로 인해 정비부대가 차량을 회수해 정비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점을 들고 있습니다.3) 이 점은 퇴각하는 독일군의 경우도 마찬가지 였지만 그래도 후방에 남는 전차는 어떻게든 아군이 확보할 수 있으니 완전손실은 아니지요.
주
1) Brian A. Reid, No Holding Back : Opertaion Totalize, Normandy, August 1944, (Robin Brass Studio, 2005), p.443에 실린 내용을 보면 폴란드 제1기갑사단은 1944년 8월 7일에 129대의 셔먼V(M4A4), 25대의 셔먼VC(파이어플라이), 33대의 스튜어트, 59대의 크롬웰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하는군요.
2) John Buckley, British Armour in the Normandy Campaign 1944, (Frank Cass, 2004), p.112.
3) Technical Memorandum ORO-T-117, Survey of Allied Tank Casualities in World War II(1951. 3. 31), p.12.2010년 9월 21일 화요일
그놈이 그놈!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당시 미국측 자문단장이었던 토마스 도드(Thomas Joseph Dodd)가 1946년 7월 1일 아내 그레이스에게 보낸 편지 중 한구절.
내 사랑 그레이스,
지난 토요일에 재판은 한시까지 진행되었고 우리는 마지막 피고를 마무리 했어. 우리는 모두 우리가 중요한 단계를 넘어섰다고 생각하고 있지. 그런데 다시 문제가 생겼어. 예전에 러시아쪽에서 독일이 스몰렌스크 인근의 카틴 숲에서 항복한 폴란드군 장교 1만1천명을 학살했으므로 기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던거 기억하지? 물론 독일쪽에서는 러시아에서 학살을 저질렀다고 주장해왔지. 이제 우리는 양쪽 모두로 부터 세 사람씩의 증언을 들어야 해. 이게 얼마나 걸릴지는 주님만이 아시겠지. 나는 그냥 동전던지기로 정해버리면 좋겠어. 독일과 소련 모두 범죄를 저지를 동기가 충분하니까. 그리고 어떻든 양쪽은 1939년에 힘을 합쳐서 폴란드를 유린했으니 책임을 나눠 가져야 해. 단지 단 하나의 사실, 한가지 “작은” 사실만은 이론의 여지가 없겠지. 1만1천명의 폴란드군 장교가 잔혹하게 집단으로 살해됐다는 점 말이야. 그리고 독일이나 러시아 둘 중의 하나가 범인이라는 건 확실하겠지. 내 생각에 세상은 독일과 소련이 논쟁을 벌이는 것엔 관심이 없을 것 같아. 하물며 역사의 관심도 받지 못하겠지.
(후략)
Christopher J. Dodd, Letters from Nuremberg : My father’s narrative of a quest for justice(Crown Publishing, 2007), p.333
2010년 8월 20일 금요일
이게 다 셔먼 때문이다
어제 패튼과 셔먼 이야기가 나온 김에...
패튼은 별종이라 치고 셔먼을 대표로 하는 미영 연합군의 전차들이 한심하다는 것은 많은 장군들이 공감하고 있었습니다. 지난번에 소개한 브래들리의 경험담도 그렇고 전후 회고록을 쓴 연합군측 장군들은 한두마디라도 이 문제를 언급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전쟁 중 영국군 30군단을 지휘한 호럭스(Brian Horrocks)의 회고록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더군요. 아래 인용문이 포함된 장은 호럭스가 아닌 다른 사람이 집필했는데 호럭스의 검토를 거쳤으니 호럭스도 비슷한 생각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한줄요약 - 셔먼은 숫자가 많아도 신통찮다;;;;
패튼은 별종이라 치고 셔먼을 대표로 하는 미영 연합군의 전차들이 한심하다는 것은 많은 장군들이 공감하고 있었습니다. 지난번에 소개한 브래들리의 경험담도 그렇고 전후 회고록을 쓴 연합군측 장군들은 한두마디라도 이 문제를 언급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전쟁 중 영국군 30군단을 지휘한 호럭스(Brian Horrocks)의 회고록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더군요. 아래 인용문이 포함된 장은 호럭스가 아닌 다른 사람이 집필했는데 호럭스의 검토를 거쳤으니 호럭스도 비슷한 생각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폴란드 기갑사단장 마첵(Stanisław Maczek) 장군은 작전에 차질을 초래한 다양한 원인들을 지적했는데 이것들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었다. 마첵 장군은 기갑부대가 좁은 회랑으로 쇄도해 들어가면서 융통성 없는 정면 공격만을 할 수 밖에 없었으며 이것은 가장 위험한 과정이라고 강조했다. 마첵 장군은 이 핵심적인 지구에서 독일군의 방어 체계는 계속해서 강화되었으며 애초에 예상했던 것 보다 훨씬 종심이 깊었다고 지적했다. 나는 작전 지역 전체에 걸쳐 ‘매우 세심한 노력을 기울여 완벽하게 구축된 독일군의 참호를 찾아낼 수 있었으며 이중 많은 수가 길가에 위치해 있었으며 또한 통나무로 보강되었다’고 적었다. 폭격은 이곳과 다른 대부분의 독일군 거점에 대해 효과가 미미했다. 독일군의 진지들은 상대적으로 장애물이 적은 이 일대에 널려있는 숲, 과수원, 생울타리(보카쥬), 그리고 석조 건물들 사이에 잘 은폐되어 있었으며 독일군의 전차병과 대전차포 사수들에게 양호한 사격진지가 되었다.
마첵 장군은 연합군에게는 가벼운 크롬웰과 셔먼 전차 밖에 없다는 것이 약점이라고 지목했다.(두 전차는 각각 27톤과 30톤이었다) 이 전차들은 보다 무거운 독일군의 판터나 티거(이것들은 각각 45톤과 54~68톤 이었다) 를 격파하기 위해서는 500미터 이내로 접근해야 했는데 그 반면 티거에 탑재되었거나 야포로 쓰인 88mm는 2킬로미터 밖에서 연합군 전차들을 해치울 수 있었다. 판터의 주포와 무장도 크롬웰과 셔먼 보다 월등히 우월했으며 4호전차 정도가 비슷한 성능이었다. 그래서 연합군 전차는 독일군의 전차를 숫적으로 압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론상 우세하다는 기동성 조차 형편없는 성능 때문에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다. 토 탈라이즈(Totalize) 작전 중 폴란드군은 65대의 전차를 잃었으며 캐나다군은 그보다 더 많은 전차를 잃었다. 시몬즈(Guy Simonds, 캐나다군 2군단장) 장군은 토탈라이즈 작전이 실패한 원인이 두 기갑사단(캐나다 4기갑, 폴란드 1기갑)의 전투 경험 부족에 있다고 탓했지만, 영국에 망명해 폴란드 1기갑사단을 편성하고 훈련시키기 전에 폴란드에서 실전을 경험한 바 있는 49세의 마첵 장군은 두 기갑사단이 그들의 여건에 비해 너무나 과도한 임무를 수행해야 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Sir Brian Horrocks, Corps Commander, (Charles Scribner’s Sons, 1977), p.43
한줄요약 - 셔먼은 숫자가 많아도 신통찮다;;;;
2007년 4월 23일 월요일
폴란드군의 하노버 점령 통치 계획 - 1971년 들소작전 계획 중
전선군 사령부는 하노버 수비대의 항복에 따라 제 5군 사령부에 도시 기능의 회복을 위한 지원을 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우리 폴란드군은 제 5군 사령부의 계획에 따라서 다음의 인력을 배속받는다.
1. 국가인민군(Nationale Volksarmee, 동독군) 헌병 1개 중대
2. 사회질서 유지를 위한 군 방첩부대 1개 중대
3. 독일민주공화국(Deutsche Demokratische Republik, 동독) 사회주의통일당(SED) 당원 (20명)
4. 독일민주공화국의 방송 언론인 (8명)
5. 타자 및 통신 담당 (12명)
6. 특별 선전대 (장교 및 부사관 24명)
이상의 인력은 오늘 오후 6시를 기해 제 5군 사령부의 통제를 받는다. 다음날부터 독일민주공화국의 행정 요원이 하노버에 투입될 예정이다. 독일민주공화국의 행정요원이 하노버에 도착하는 것은 사전에 통보될 것이다.
제 5군 사령부의 임무는 다음과 같다.
a. 하노버 주둔군 사령부를 설치하고 제 6전차사단의 선임장교를 주둔군 사령관으로 둔다.
b. 위에서 언급한 인력과 필요한 장비는 하노버 주둔군 사령부의 통제하에 둔다. 국가인민군의 지원을 받아 새로 정규 경찰을 편성한다.
c. 인민들에게 최대한 신속하고 효율적인 언론 보도를 한다.
d. 항복한 적군을 수용할 포로수용소를 건설한다.
e. 병기고 및 물류시설을 철저히 보호하기 위한 수단을 강구한다.
f. 상수도, 발전시설, 난방시설을 정상화 한다.
g. 식량 및 필수품 배급을 위한 조직을 만든다.
h. 독일연방공화국의 독일공산당(DKP)과 사회민주당(SPD)으로 합작 지방 정부를 만든다.
i. 파괴된 공장을 복구해 최대한 빨리 생산을 재개 할 수 있도록 한다.
(중 략)
하노버 시의 민간인과 포로에게 공급할 식량 비축량 및 의약품 재고량을 확인한 뒤 1971년 4월 29일 오전 11시까지 전선군 참모부에 보고할 것.
실롱스크 군관구 정치국 문서 152448/74/42
Vojtech Mastby and Malcome Byrne, A cardboard castle? : an inside history of the Warsaw Pact 1955-1991, CEU Press, 2005, pp.380-381
1971년 4월 21일부터 4월 28일까지 실시된 들소작전에 포함된 시나리오라고 합니다. 폴란드군이 하노버를 점령한 후 취해야 할 행동 이라는군요. 이 시기의 바르샤바 조약군은 전반적으로 낙관적인 가정을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점령지역에 새로운 정부 수립까지 생각했던 것을 보면. 그리고 합작 대상으로는 서독에서 진보적이라고 할 만한 사회민주당과 독일공산당이 언급 돼 있고 우익 정당은 언급이 없습니다. 독일공산당은 서독에서 불법화 된 이래 아주 세력이 죽었고 이 시점에서는 이렇다 할 세력이 없었습니다.
이걸 읽다 보니 60~70년대 북한애들은 서울을 확보한 뒤 어떤 조치를 취할 생각이었는지 궁금해 집니다. 남쪽에는 합작할 만한 진보적 정당이 없었으니 합작의 형태는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뭐, 그것은 통일이 되면 알 수 있겠지요. 통일이 될 때 까지 살아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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