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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6월 30일 수요일

일본의 군사혁명

어쩌다 서점에 간 김에 책을 조금 샀는데 그 중의 한 권이 『일본의 군사혁명』 입니다. 올해 2월에 발행되었으니 제법 신간에 속하는 군요.

꽤 흥미있는 주제를 다루고 있어서 주저하지 않고 샀는데 사실 제가 일본사, 특히 20세기 이전의 일본사나 그 연구경향에 대해서는 완전히 깡통인지라 이 책에 대해서 뭐라고 평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저자인 구보타 마사시(久保田正志)는 일단 책에 소개된 약력에서 도쿄대에서 법학을 연구했고 현재 일본에서 성새사적(城塞史跡) 협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인물이라고 되어 있고 또 저자 후기에는 1984년 이래 군사사 연구를 계속해 오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일본에서 어떤 평가를 받는 연구자인지 궁금합니다.

책 자체는 아주 재미있게 읽힙니다. 아직 앞부분과 결론 부분만 살펴 본 정도이지만 일본사에 문외한인 입장에서 꽤 흥미로운 서술이 많군요. 일단 저자가 '군사혁명(Military Revolution)'이라는 개념으로 일본의 전쟁양상 변화를 설명하려 하고 있어서 같은시기 유럽과 비교해서 서술하고 있는데 덕분에 이해가 잘 가는 편입니다. 앞부분을 조금 읽다가 꽤 재미가 있어서 결론을 먼저 읽어보게 됐는데 저자는 이시기 일본의 전쟁양상이 가진 특징을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습니다.

1. 일본 또한 동시기 유럽과 마찬가지로 14세기 이후 창을 사용하는 보병중심의 전술로 움직였다. 그러나 유럽과 달리 모든 창병이 밀집대형을 취하지는 않았는데 주된 이유는 일본의 기병은 유럽의 기병보다 덜 위력적이기 때문이었다.

2. 기병의 위협이 적었기 때문에 총포가 도입된 뒤에도 유럽과는 다른 발전양상을 보였다. 즉 유럽과 달리 탄막사격 대신 저격을 중심으로 하는 발전이 이루어졌다. 또한 유럽에서는 총병의 등장과 상비군의 발생이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데 일본은 그렇지 않다.

3. 일본 말의 열등한 체격은 대포를 사람이 견인하는 소형포 위주로 발전하게 했으며 이때문에 축성 양식도 총포사용을 중심으로 발달했으며 이 때문에 유럽 처럼 성곽의 높이가 낮아지지 않았다.

4. 총포의 도입은 유럽과 마찬가지로 사상률을 높였다. 그러나 일본의 독특한 군사문화가 유럽과 다른 방향으로 나가게 했다. 일본의 군사문화는 수급 획득을 중시했다. 총포의 도입으로 인한 사상률 증가는 수급 획득의 기회를 늘렸으며 군사문화의 특성으로 적의 지휘관, 사령부에 대한 공격 지향이 강했다. 이것은 전역을 조기에 종결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유럽과 달리 전쟁이 장기전으로 가지 않게 되는데 영향을 끼쳤다.

5. 유럽은 군사혁명의 과정으로 들어가면서 병농일치를 통한 병력 확대가 이루어졌는데 일본에서는 전란이 조기에 종결되면서 잉여 병력이 늘어나면서 병농분리와 상비군화가 진행되었다.

6. 죠프리 파커 등은 일본에서는 군사혁명이 '중단' 되었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는데 이것은 일본사의 특성을 무시한 것이다. 유럽의 군사혁명은 전쟁의 장기화의 결과였으나 일본은 통일을 이루면서 유럽과 같은 군사혁명의 과정을 밟을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즉 군사혁명이 중단된 것이 아니라 필요한 범위 내에서 군사혁명을 완료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유럽군사사와의 비교분석이 꽤 흥미롭다고 생각되었습니다. 나중에 渤海之狼님 같이 일본전통군사사를 공부하시는 분들을 뵐 때 한번 고견을 들어봤으면 합니다.

일단 국내에도 일본 전통군사사에 대한 책이 나왔다는 사실이 꽤 반갑습니다.

2009년 12월 9일 수요일

Weapons and Warfare in Renaissance Europe

번동아제님이 쓰신 군기시(軍器寺)터 발굴에 대한 글을 읽던 중 '건물지 11호'에서 조선시대의 화약이 출토되었다는 내용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번동아제님이 지적하신 것 처럼 이를 통해 조선시대 화약의 화학적 성분을 분석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발견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내용을 읽고 나니 예전에 읽었던 Bert S. Hall의 Weapons and Warfare in Renaissance Europe이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이 책은 중세말기~르네상스 시기의 군사적 발전을 '기술적' 관점에서 분석한 책인데 3장 전체를 할애해 15세기의 화약에 대한 분석을 하고 있어서 읽을 당시 아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이 책에 대한 생각이 난 김에 이 책에 대해서 조금 소개를 해 보려 합니다.

이 책은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출간한 기술사연구(Johns Hopkins Studies in the History of Technology)의 열 다섯번째 저작입니다. 몇 년전 2차대전에서 근대유럽전쟁 전반으로 관심사가 옮겨가면서 근대전쟁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르네상스 시기의 전쟁에 대해 쓸만한 서적이 없을까 찾아보던 중 접하게 되었습니다.

저자 Bert S. Hall은 중세말~르네상스 시기의 군사기술이 전쟁의 양상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왔는가를 중점적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사실 여기까지라면 유사한 주제를 다룬 기존의 연구들과 어떠한 차이점이 있느냐는 질문이 들어올 법 합니다. 네. 그래서 Hall은 화약 무기에 대한 기술적 분석과 전술의 변화를 분석하는데 그치지 않고 화약 무기의 생산을 뒷받침한 사회경제적 배경에 대한 분석까지 시도하고 있습니다. 예를들어 저자는 14세기에 공성병기로서 화약무기의 사용이 확산된 데 대해 대포의 위력뿐 아니라 1380년대를 기점으로 급락하기 시작한 화약의 가격이 큰 영향을 끼쳤다고 지적합니다. 또한 15세기 후반과 16세기 초반에 걸쳐 화승총으로 대표되는 개인용 소화기가 급속히 발달하게 된 데에도 단순히 화약의 개선과 기술적인 요인만이 작용한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저자는 화승총의 개발과 확산이 독일과 이탈리아에 의해 주도된 데 주목하여 이 지역의 분열된 정치체제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봅니다. 즉 영국, 프랑스와 달리 작은 국가들로 분열되어 있었던 독일과 이탈리아의 통치자들은 공세적인 전쟁을 치르기 보다는 자신들의 영역을 방어하는 전쟁을 치르는 경우가 더 많았으며 이때문에 방어 전투에 적합한 개인용 소화기가 급속히 발달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 입니다.(이러한 주장은 초기 화승총의 운용이 야전에서도 창병과 참호의 지원을 받아 방어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이렇게 단순히 군사기술적 측면에만 집중하지 않고 보다 광범위한 사회경제적 맥락에서 전쟁의 변화를 고찰함으로써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있습니다. 단순히 기술적인 측면에만 집중한 설명으로는 해결하기 곤란한 의문들에 대한 답을 제시해 준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할 수 있을 것 입니다.

또한 기술적 측면에 대한 분석도 충실합니다. 15세기 화약 생산을 분석한 3장과 초기 화약무기의 탄도적 특성을 분석한 5장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5장의 경우 20세기에 실시된 15~16세기 화약무기에 대한 실험 등 초기 화약무기의 기술적 특성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들을 분석하여 기술적 한계가 어떻게 화약무기를 활용한 전술을 형성했는지 고찰하고 있습니다. 특히 재미있는 것은 1988년 부터 1989년 사이에 오스트리아에서 실시된 실험인데 이 실험의 결과에 상당한 분량을 할애해 분석하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듭니다. 저자는 활강식 총신과 탄두의 형태로 인한 낮은 명중율과 원거리에서의 위력 부족으로 초기의 소화기는 근거리에서 대규모 일제사격을 퍼붓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며 이런 전술에서는 명중율 보다 발사속도가 중요해 질 수 밖에 없었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총신에 강선을 파는 방식으로 명중율을 높이는 방법이 있음에도 널리 확산되지 못한 이유는 장전속도가 느려져 대규모 보병전투에는 약점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이런 구성은 꽤 마음에 듭니다. 이렇게 한 시기의 전술적 변화에서 다른 시기의 전술적 변화에 대한 설명으로 넘어가면서 중간에 변화의 요인이었던 기술적 문제에 대해 별도의 장을 활용해 집중적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다음에 이어지는 장을 이해하는데 훨씬 편리하다는 생각입니다. 기술적 변화와 전술적 변화를 함께 서술하는 것 보다 명료한 구성이라고 할까요.

그리고 가장 마음에 드는 점은 예로 들고 있는 역사적 사례가 매우 풍부하다는 점 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영미권 학계에서 이 시기의 전쟁을 기술 할 때 영국과 프랑스의 사례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경향이 어느정도 있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독일, 이탈리아, 보헤미아, 스페인 등 기술적, 군사적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다른 지역의 사례도 풍부하게 인용하고 있습니다.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후스전쟁과 이베리아 반도 재정복전쟁 말기의 화약무기 운용에 대한 부분입니다. 후스전쟁에 대한 군사적 분석은 꽤 드문편이라 읽으면서 반갑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근대군사사에 관심을 가진 분들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저작이라고 생각합니다.

2008년 10월 5일 일요일

Kenneth Chase가 주장하는 중국의 화기 개발이 낙후된 원인

번동아제님의 글, 「조선 후기 군대의 기본 전투대형인 층진의 개념도」에 달린 댓글을 읽다보니 흥미로운 구절이 하나 눈에 들어왔습니다.

다만 에도시대 일본의 병학이 1700년대까지 여전히 시대불명의 망상세계를 헤메고 있었고, 청나라 또한 화약병기 시대에 걸맞는 진형을 제대로 개발 못해 헤매던데 비하면 그나마 조선은 유럽의 선형 전술과 비슷한 대형을 내놓고 고민하고 있었다는 점에선 부분적이나마 긍정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 번동아제

중국이 조선 보다도 화약무기를 활용한 진형의 개발에서 뒤떨어졌다는 점은 정말 의외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중국은 명-청 교체기 이후로는 화약무기의 활용에서 유럽에게 완전히 추월당하고 말았지요. 중국이 화약무기를 개발한 원조임에도 불구하고 17세기 이후로는 유럽을 따라잡지 못하게 된 이유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는데 제가 가장 재미있다고 생각한 가설은 Kenneth Chase의 주장입니다. Kenneth Chase에 대해서는 이글루에 있을 때 한번 간단히 소개한 적이 있는데 이글루를 닫으면서 해당 글을 날려버렸으니 다시 한번 언급해 볼까 합니다.

Kenneth Chase는 화약무기의 초기 발전단계에서 발전에 영향을 끼치는 요소를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기병의 위협이고 두 번째는 보병의 위협입니다. 전자의 위협이 클 경우 초기 단계의 화기로 무장한 보병은 적 기병의 기동성을 상쇄할 만한 수단이 없으므로 전투에 불리할 수 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기병의 위협이 심각한 곳에서는 기병에 대한 대항수단으로 기병을 선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경우 화기의 개발은 우선순위에서 밀리게 됩니다. 보병의 위협이 크다면 조건은 반대가 되겠지요.

Chase는 이상의 조건에 따라 화기의 발달유형을 다음의 네 가지로 구분합니다.
먼저 기병과 보병의 위협을 모두 받는 경우는 화약무기의 발전이 중간 정도로 일어납니다. 보병위주의 서유럽과 기병위주의 유목민들을 동시에 상대한 오스만 투르크와 동유럽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다음으로 기병의 위협은 크지만 보병의 위협은 적은 경우가 있습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경우가 바로 중국으로 이런 경우 화약무기의 발전은 느리게 진행됩니다.
세 번째는 기병의 위협은 적고 보병의 위협이 큰 경우 입니다. 서유럽이 여기에 해당되며 이 경우에는 화기의 발전이 급속히 진행됩니다.
마지막은 양쪽 모두의 위협이 없는, 전쟁의 위협이 적은 경우인데 이 경우는 이렇다 할 발전이 없습니다. 바로 도쿠가와 막부 시기의 일본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이런 전제 하에서 Chase는 명청교체기 중국의 화약무기 사용에 대한 장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중국이 (화약무기 개발에서) 뒤쳐지게 된 시점이 명 말기인지 또는 청 초기인지는 단언하기가 어렵다. 유럽은 1400년대 후반에 최초의 실용적 화기인 머스켓을 개발 함으로서 처음으로 중국을 앞서는 단초를 마련했지만 중국인들에게 머스켓은 그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대안이 아니었다. 명 왕조의 멸망과 청 왕조가 건립된 시기에 있었던 사건들은 중국의 국방에 있어서 유용한 수단은 명 초기와 마찬가지로 기병이었음을 보여준다. 초기의 청 왕조는 (화기의 사용에서) 상대적으로 유럽에 비해 뒤쳐졌지만 유럽의 위협이 닥치기 까지는 아직 2세기나 더 남아 있었다.
화기, 특히 1300~1400년대의 조잡한 수준의 화기는 단독으로 명 왕조가 처한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는 수단이 아니었다. 화기가 기병과 싸우는데 있어서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점은 중국에서 화기의 발달이 별로 이뤄지지 못한 이유를 잘 설명해 준다.

Kenneth Chase, Firearms : A Global History to 1700,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p.171

Chase는 일본이 중국에게 유럽이 오스만 투르크에게 했던 역할을 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르지만 일본은 서유럽에 비해 전쟁수행능력이 부족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임진왜란은 일본의 제한된 정복전쟁 수행능력을 잘 보여줬으며 결국 일본은 이 전쟁의 실패 이후 조용히 고립노선을 걷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중국을 위협하는 존재는 기병을 운용하는 만주족 만이 남게 되어 화약무기 개발에 대한 필요성이 줄어들 수 밖에 없었다는 결론입니다.

2006년 7월 22일 토요일

화력과 충격력 : 16-17세기 서유럽의 기병

에스파냐 사람들이 북이탈리아의 여러 전쟁에서 프랑스군에 피박을 먹인 이후 강력한 화력을 가지게 된 보병은 서유럽 전장의 주역으로 떠오르게 된다.
그리고 이미 15세기부터 슬금 슬금 한물 가기 시작한 기병은 이제 완전히 전쟁터에서 보조적인 역할로 물러나게 됐다.
그렇지만 기병은 보병이 결코 가질 수 없는 한가지 강점을 가지고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기동력’이었다.

이 때문에 서유럽에서는 기병의 활용도를 높이기 위해 다양한 방책이 강구 됐는데 갑옷의 두께를 늘려 방어력을 향상시켜 전통적인 기병의 역할을 계속하는 것이 그 중 하나였고 나머지 하나는 기병의 기동성에 “화력”을 결합시키는 것 이었다.

기병의 화력 증대는 초보적인 형태의 용기병이라고 할 수 있는 ‘기마 화승총병’과 “Reiter”로 통칭하는 독일의 경기병으로 나타났다.
두 가지 모두 1540년대를 전후하여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두 가지 모두 화기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가능했다. 기마 화승총병의 경우 이미 14세기부터 영국의 기마 궁수, 유럽 본토의 기마 석궁수가 성공적으로 운용됐기 때문에 특별히 혁신적일 것은 없었다.
그러나 독일의 튀링엔 지역에서 처음 등장한 “Reiter”는 확실히 기병전술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지고 왔다.

바로 기마전투에서도 화기를 사용할 수 있었던 것 이다.

16세기 초반 독일에서는 바퀴식 격발장치가 발명됐고 이것은 바로 “Pistole”의 등장을 가져왔다. 바퀴식 격발장치가 처음 문헌에 언급된 것은 1505년이라고 하니 실제로 등장한 것은 15세기 말 일 가능성도 있다.
바퀴식 격발장치는 화기의 소형화를 가져와서 이미 1510년대에는 “범죄”에 악용되기 시작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1517년에 칙령을 내려 “제국 영내”에서 민간인이 바퀴식 격발장치를 사용하는 화기의 사용을 금지할 것을 명하기도 했고 이와 유사한 사례는 1540년대 까지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은 어떤 동물인가.

이렇게 좋은 물건이 당연히 범죄에만 사용될 리는 없고 독일의 기병을 중심으로 급속히 사용이 확산 됐다.
15세기 중반에 독일 기병들이 주로 사용하던 화기는 faustrohre라고 불리는 길이 50cm 정도의 물건이었는데 당시 기준으로는 획기적인 물건이었던 모양이다.
이 물건은 사람을 제대로 맞출 만한 명중률이 나오는 유효 사거리는 기껏해야 5m에 불과했지만 기본적으로 Reiter 1개 중대(Schwadron)가 400명 정도로 구성됐기 때문에 명중률의 부족은 머리 숫자로 때우는게 가능했다.
1540년대에 이르면 피스톨은 기병의 주요 장비로 자리 매김했고 슈말칼덴 전쟁 당시 황제군과 반란군 모두 기병대의 상당수가 피스톨을 장비했던 것으로 보인다.

슈말칼덴 전쟁 당시 황제군 진영에서 옵저버로 활동했던 베네치아인 Mocenigo는 당시의 Reiter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황제군의 기병대는 반란군의 기병대를 두려워 한다. 반란군의 기병은 숫자도 많고 그들이 타는 말도 품종이 좋은데다가 세 자루의 바퀴격발식 총을 휴대하기 때문이다. 한 자루는 안장에, 한 자루는 안장 뒤에, 나머지 한 자루는 장화 안에 넣고 다닌다.”

1557년의 생-캉탱 전투에서 기병창을 주 무장으로 한 프랑스 기병들이 신성로마제국군의 Reiter 들에게 엄청난 피박을 보면서 유럽각국도 앞다퉈 Reiter와 같은 병종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이때의 영향으로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에 각각 reitre, raitri라는 단어가 생기게 됐다고 한다.
프랑스군은 생-캉탱 전투의 피박 이후 Reiter를 대폭 증강시켜 1558년에는 8,000명을 확보했다고 한다.(불과 1년 전에는 1,000명 미만이었다.)

이렇게 16세기 중반에 이르자 서유럽의 많은 군사이론가들은 기병 전술도 화력을 극대화 하는 쪽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일부 군사이론가들, 특히 프랑스의 De la Noue로 대표되는 보수적인 이론가들은 근접전에서는 창기병이 Reiter를 압도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프랑스의 종교전쟁을 제외하면 보수적인 이론가들의 주장이 입증된 경우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서유럽 군대는 기병 편제를 충격력보다는 화력에 중점을 두는 방향으로 개편했고 전술적으로도 충격은 화력의 우위를 뒤집지 못 했다.

이것이 구체화 된 것이 네덜란드 독립전쟁이었다.

네덜란드는 1597년에 11개 창기병 중대 중 7개를 피스톨을 주 무장으로한 Cuirassier로, 4개를 기마 화승총병으로 개편했고 그해에 벌어진 튀른하우트(Turnhout) 전투에서 기병창을 주무장으로한 에스파냐 기병대를 크게 격파한다.
튀른하우트 전투 결과 신성로마제국도 네덜란드를 모방해 그때 까지 남아있던 창기병을 거의 대부분 Cuirassier로 개편하게 됐다.
16세기 중반부터 적극적으로 군제를 개혁하던 스웨덴은 1611년에 독일의 “기마 화승총병”의 영향을 받아 최초의 “용기병” 부대를 편성했고 네덜란드와 마찬가지로 소규모의 기병을 피스톨을 주 무장으로 하는 체제로 개편했다. 스웨덴의 기병전술의 특징은 기존의 Reiter 부대와는 달리 적과 근접해서 사격을 하도록 해 화력의 효율적인 운용을 꾀했다는 점 이다.
Dodge 같은 군사사가들이 지적했듯 스웨덴의 기병은 소규모고 제국군의 기병 보다 종합적인 무장은 뒤떨어졌지만 효율적인 화력 운용으로 전장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이렇게 17세기 초-중반으로 접어 들면서 전통적인 중기병은 거의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됐고 기병은 더 이상 특수한 계층의 상징이 아니게 됐다. 화기는 기병을 전장의 주역에서 밀어냄과 동시에 그 계급적 특수성도 없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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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낀 책들.

Thomas Arnold, The Renaissance at War
Hans Delbruck, Geschicte der Kriegskust im Rahmen der politischen Geschichte
Theodore Dodge, Gustavus Adolphus
Bert S. Hale, Weapons and Warfare in Renaissance Europe
B. Hughes, Firepoewr, Weapon Effectiveness on the Battlefield, 1630-1850
V. Vuksic , Cavalry

2006년 6월 25일 일요일

롱보우인가 화승총인가 : 16세기 어떤 영국인들의 이야기

어떤 특정한 기술이 개발됐을 때 반발하거나 거부감을 가지는 집단은 신기술 보다는 기존의 기술로 더 재미를 보거나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집단이다.

그러면 이제 별 알맹이 없는 본론으로…

이런 것은 전쟁질의 역사를 보더라도 잘 나타나는데 대표적인 것이 16세기 영국의 군인들이 제기한 화약무기와 롱보우(Long Bow)의 효용성에 대한 논의였다.

중세 유럽의 화약무기는 성능과 신뢰도 모두가 신통치 않은 물건이었으나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싹수를 보이고 있었다. 플랑드르인들은 1382년의 베버하우드벨트(Beverhoudsveld) 전투에서 300문의 각종 화약무기를 집중 운용해 6000명에 불과한 병력으로 3만에 달하는 프랑스군을 격파하는 대박을 터트리기도 했다.
프랑스인들도 돌대가리는 아닌지라 화약무기를 도입하는데 많은 자금과 시간을 투자했고 백년전쟁 후기에는 유럽 최고수준에 도달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 됐다.

반면 영국은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프랑스에 비해 화약무기 경쟁에서 뒤쳐지고 있었다.
영국인들은 이미 15세기 프랑스와의 백년전쟁에서 화약무기를 대규모로 사용한 프랑스 군대에 죽을 쑨 경험이 있었다.

1428년의 오를레앙(Orléans) 포위공격에서 영국군은 프랑스군의 대포에 지휘관인 샐리스버리(Thomas Montagu Salisbury)가 전사한 일이 있었고 프랑스 군은 1449년에서 1450년 사이에 60여 차례의 공성전을 시도해 모두 승리를 기록하는 성과를 거뒀다.
1453년 7월 17일의 Castillon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약 300문의 대포(주로 컬버린)를 투입했고 이와 함께 약 700명의 핸드캐논 사수를 투입해 영국군을 크게 격파했다.

특히 화약무기 중에서도 화승총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핸드캐논의 보급은 유럽본토에서는 가히 놀라운 수준이었는데 1411년 부르군디 공작은 자신의 군대가 핸드캐논 4000정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할 정도였다.
물론 핸드캐논은 당시의 총신 제작 기술이 불량해 종종 쏘는 사람을 잡는 경우도 있었지만 확실한 파괴력과 간편한(?) 조작방법으로 빠르게 보급됐다.
1430년 뉘른베르크 시의 기록에 따르면 시 민병대가 보유한 발사 무기 중 핸드캐논 (Handbüchse)은 501정으로 석궁(607자루)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유럽 본토에서 이렇게 화약무기 도입에 열을 올리는 동안에도 영국은 뭔가 한 걸음 뒤쳐진 상황이었는데 몇가지 이유 중 하나는 롱보우에 있었다.
이미 영국인들은 백년전쟁 기간 내내 롱보우의 파괴력과 연사력을 활용해 여러 차례 재미를 보고 있었고 비록 백년전쟁 말기에 화기에 호되게 당하긴 했어도 야전(野戰)에서는 롱보우의 위력이 더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심지어 백년전쟁이 끝나고 한참 지난 16세기 말 까지도 영국인들은 화약무기와 롱보우의 군사적 가치에 대해 열띤 논의를 하고 있었다.

용병으로 이름을 날린 존 스미티(John Smythe)라는 귀족은 1590년에 발행한 짧은 소책자에서 롱보우가 군사적으로 화약무기보다 더 유용하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로 롱보우는 숙달된 사수가 사용할 경우 화승총에 비해 여섯배 이상 빠른 발사속도를 자랑하고 화약무기가 과열과 총신파열로 파괴될 위험이 있는데 비해 롱보우는 그럴 위험이 없다는 것을 들었다.

반면 역시 용병대장이었던 험프리 바윅(Humfrey Barwick)은 스미티의 주장에 반대했다.
바윅은 발사속도의 경우 기병을 상대할 때는 별 가치가 없다고 주장했다.
기병이 전력으로 돌격해 올 경우 롱보우와 화승총 모두 한번의 일제사격 뒤에는 돌격하는 기병과 육박전을 벌여야 한다는 것 이었다.
또 궁수가 활을 잘 쏘려면 최상의 몸 상태를 유지해야 하지만 화약무기는 방아쇠 당길 힘만 있으면 쏠 수 있다는 점도 장점으로 꼽았다.
바윅은 마지막으로 화약무기의 파괴력은 롱보우에 비해 위력적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무엇보다 당시 유럽은 기병과 보병 모두 두꺼운 흉갑을 장비했기 때문에 롱보우로는 관통하기 어렵다는 것 이었다.
이미 백년전쟁 후반기부터 금속기술의 발달로 롱보우로는 갑주를 입은 적을 무력화 시킬 수 없었다.

어쨌든 영국 군대는 백년전쟁 이후 화약무기 장비에서 유럽의 대륙국가들에 뒤쳐졌는데 다행히도 대규모 전쟁을 치루진 않아 크게 문제가 되진 않았던 모양이다.

한가지 재미있는 이야기.

16세기 말 까지도 영국 뱃사람(대개는 해적)들은 롱보우나 석궁을 들고 돌아다녔는데 서부아프리카에서 노예사냥을 하러 갔다가 화승총을 쏴대는 현지인들에게 피박을 봤다는 기록이 많다.
총을 쏘는 흑인이 활을 쏘는 백인을 때려잡는 모습이라니. 여러분은 이 모습이 상상이 가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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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면서 베낀 책 들

Kenneth Chase, Firearms : a Global History to 1700
A. Curry, M. Hughes,Arms and Fortifications in the Hundred Years War
B. S. Hall, Weapon and Warfare in Renaissance Europe
J. R. Hale, War and Society in Renaissance Europ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