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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2월 12일 월요일

미서전쟁과 미국의 전시동원

미서전쟁은 짧은 기간 동안 전개되었고 규모도 유럽의 기준에서 본다면 그리 큰 전쟁이라고는 할 수 없었습니다. 바로 몇 년 뒤 벌어진 러일전쟁이 1차대전을 예고하는 듯한  산업화된 근대전쟁의 양상을 뚜렷이 보여준 것과 대비가 됩니다. 대규모 함대결전, 그리고 기동전과 근대적 요새에 대한 포위전까지 그야말로 다양한 전쟁 양상이 나타난 러일전쟁에 비하면 미서전쟁은 소박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서전쟁은 군사사에 관심을 가진 입장에서 상당히 흥미로운 점을 몇가지 보여줍니다. 이미 산업적으로 대국으로 성장해 있던 미국이었지만 상대적으로 전쟁 준비는 부족한 편이었습니다. 이 상태로 태평양과 대서양이라는 두개의 대양에서 동시에 전쟁을 수행한다는 것은 엄청난 과업이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미국의 전쟁 준비는 이런 준비부족을 극복하는 과정이 흥미롭습니다. 물론 국력이 받쳐 주기 때문에 부실한 전쟁 준비가 어떻게든 극복이 되는 것이긴 합니다만.

이 글에서는 기본적인 병력, 수송, 장비 및 보급 문제만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행정과 인사문제까지 들어가면 정리하는 것도 좀 더 어렵고 글이 더 길어질 것 같아서 말입니다.

전시동원이라고 하면 일단 첫번째로 병력 동원이 머리에 떠오릅니다. 사람이 있어야 싸우죠. 미국이 스페인에 선전포고를 할 당시 미육군은 겨우 28,000명 밖에 되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미국과 스페인의 관계는 이미 1897년 초 부터 악화되고 있었지만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매킨리William McKinley가 본격적으로 전시동원을 고려하기로 한 것은 선전포고가 이루어지기 한달 전에 불과했습니다.1) 전쟁준비를 하기에는 너무 늦은 것이었습니다. 다행인 점이라면 상대가 스페인이었다는 것 정도였습니다.
육군이 3만명도 되지 않는 상황인데다 선전포고가 전쟁 준비도 갖추기 전에 일어났기 때문에 미국은 각 주의 “주방위군”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시기 미국의 “주방위군”은 오늘날과 같은  “주방위군”으로 체계가 잡히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미국의 병력동원은 엉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실제로 당시의 미국은 물론이고 현재의 역사가들도 미서전쟁 당시 미국의 민병대 동원은 실패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매킨리 대통령은 초기에 원정을 위해 125,000명의 동원을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동원규모가 수정되어 연방정부는 182,687명의 병력을 동원하기로 하고 각 주지사들에게 민병대의 동원할 것을 통보했습니다.2) 대규모의 대외원정이 연방군이 아닌 주의 민병대를 주축으로 실행해야 했던 것 입니다.
주 방위군은 사실상 미군의 주력을 담당할 수 밖에 없었는데 정규 육군이 3만명도 채 안되었던 반면 각 주의 민병대는 1897년 기준으로 총 114,000명이었습니다. 실질적인 전투력은 둘째 치고라도 일단 숫자는 어느 정도 채우고 있었던 셈입니다. 여기에는 기병 4,800명과 포병 5,900명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편제는 제각각이어서 사단급 편제를 갖춘 주는 5개 밖에 되지 않았고 그외에 25개의 여단이 있었습니다.3) 나머지 주방위군 부대들은 연대 이상의 편제가 없었으니 일단 사단 부터 만든 뒤 훈련을 시켜야 쓸 수 있는 상황이었던 것 입니다.
각 주의 병력동원은 상당히 엉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일단 이 당시는 오늘날과 같은 주방위군 체제가 잡혀 있지 않았고 여전히 각 주 민병대의 자율성이 강했습니다. 이 때의 경험으로 미서전쟁 이후 주방위군 개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는 했습니다만 이 시점에서는 아직 미래의 일이지요. 몇가지 사례를 들어보지요. 미네소타 주에서는 존스 팜Jones Palm이라는 사람이 친구들과 사설 군사조직을 만든 뒤 주지사와 연방정부 민병대국에 정식 주방위군으로 인정해 줄 것을 요구했다가 거부를 당하고 그냥 기존의 주방위군 연대에 입대했습니다. 반면 캔자스 주에서는 주지사 존 리디John Leedy가 기존의 주방위군을 불신하여 새로 지원병을 모집하여 연방정부로 부터 할당받은 4개 연대를 편성했습니다.4) 평시 주방위군의 훈련과 감독을 성실히 했던 주들은 부대편성과 병력 동원이 순조롭게 이루어졌습니다. 매사추세츠, 펜실베니아, 오하이오, 위스콘신 등이 그런 모범적인 사례였습니다. 반면 플로리다, 미주리, 루이지애나, 텍사스와 같은 주들은 상대적으로 주방위군 편성과 동원에서 혼란을 겪었습니다. 평시 훈련과 관리를 소홀히한 주들은 주방위군 대원들의 상당수가 연방군의 체력 검정도 통과 못하는 굴욕을 겪을 정도였다고 전해집니다.5)
게다가 아직 주방위군을 전시에 해외파병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법적, 행정적인 철차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주방위군 대원 중 일부는 소집에 응하지 않았지만 법적으로 문제될 것이 없었습니다. 어쨌든 병력 동원은 그럭저럭 이루어 졌으며 약 20만명의 주방위군이 미서전쟁 기간 중 동원되었습니다.
실제로 주방위군은 전쟁 기간 중 미군의 중추를 이루었습니다. 비록 유럽의 기준과 비교하면 서투르고 부족한 면이 많았지만 스페인과의 전쟁에 대한 미국인들의 자발적인 참여 열기는 상당했던 것 같습니다. 각 사회단체는 물론이고 갑부들 중에서는 자비를 부담하여 1개 연대를 무장시키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오하이오주의 한 공무원은 오하이오에서만 10만명의 자원병은 모집할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했을 정도라니 굉장하지요.6) 스페인과의 전쟁을 앞두고 하원의원 헐A. T. Hull이 입안한 이른바 “헐 법안Hull-Bill”은 정규군 만을 원정에 투입하고 주방위군은 국내 방위에만 투입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는데 의회는 물론 각 주의 주지사와 주방위군 단체들의 반발로 폐기되고 주방위군은 대외 원정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7)

미국이 전쟁경험의 부족 때문에 준비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은 그 외에도 여러 부문에서 나타납니다. 국내 자원의 동원에서 그런 점이 잘 드러나는데 막대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용은 다소 부족한 점이 엿보입니다.
철도이동에 관한 규정들은 선전포고가 있고 거의 2주가 지난 5월 8일이 되어서아 육군 군수국장의 명령에 의해 만들어지게 됩니다. 이전까지 군부대의 철도를 이용한 이동은 아무런 규정도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 지고 있었습니다. 육군 군수국은 민간철도회사와의 계약을 통해 철도를 활용했는데 철도부대를 운용하던 독일과는 달리 대규모 군병력의 철도 이동 경험이 없었던 미군은 상당히 어려움을 겪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군수국이 필요한 시기에 민간 철도회사의 차량을 투입하지 못해 부대이동에 지장을 초래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미숙한 운용은 침공군의 주요 집결지였던 플로리다 탬파Tampa에는 1천여대의 열차편이 몰려 극심한 정체를 이루었으며 심한 경우에는 탬파행 열차가 직선거리로 대략 700km 떨어진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컬럼비아에 묶여서 움직이지도 못하는 일이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8) 그야말로 대륙적인 규모의 교통정체였습니다.

컬럼비아에서 탬파까지는 직선거리만 해도 어마어마하지요;;;;대륙 규모의 교통정체란;;;

철도와 달리 해상교통은 훨씬 준비가 잘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군수국은 3월 24일 전쟁을 대비해 선박 확보를 준비하기 시작했고 4월 1일부터 8월 31일 까지 대서양 방면의 작전을 위해서 44척의 선박을 임대했고 추가로 14척을 구입했으며 태평양 방면의 작전에는 17척을 임대하고 2척을 구입했습니다. 이와 별도로 병원선으로 사용하기 위해 존 잉글리스John Englis라는 기선이 구입되어 개조된 뒤 릴리프Relief로 개칭되었습니다.9)
그 다음으로 중요한, 특히 작전 단위의 이동에서 중요한 이동수단은 말과 노새와 같은 축력이었습니다. 당시 편제상 미육군의 기병중대는 말 126마리, 보병중대는 12마리, 경포병 포대는 126마리의 말을 필요로 하고 있었습니다.10) 그렇기 때문에 수송용 동물의 조달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미국의 방대한 생산력 덕분에 마필의 조달은 쉽게 이루어졌습니다. 미국은 미서전쟁 기간 중 기병용 말 10,000마리, 포병용 말 2,500마리, 견인용 노새 17,000마리, 등짐용 노새 2,600마리를 조달했습니다. 반면 견인용 수레는 약간 조달에 어려움을 겪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노새 6마리가 끄는 미육군의 표준형 수레는 민간시장에서 생산하지 않는 것이라 결국 육군의 기준에는 미달하는 민수용인 4마리가 끄는 수레를 3,600대 구입해야 했다고 합니다.11) 미육군의 표준형 노새 6마리 수레는 4천파운드의 수송량을 가졌는데 민수용인 노새 4마리 수레는 3천파운드 이하로 적재하도록 권장되었다고 합니다.12)

장비와 물자의 조달은 매킨리 대통령이 병력동원을 결심한 3월 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미육군은 위에서 언급한 헐 법안에 따라 주방위군은 본토 방위에 투입하고 원정군은 정규군을 중심으로 한 7만5천명에서 많아봐야 10만명 정도면 충분하다는 계획하에 물자 조달을 시작했기 때문에 헐 법안이 통과되지 못하고, 또한 전쟁의 규모가 커져 수십만명의 주방위군을 무장시켜 원정군에 합류시켜야 하는 상황이 되자 적절한 대처를 할 수 없었습니다.13) 당장 쿠바 침공 부터 미육군이 당초 예상한 규모를 훨씬 넘어서는 병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주방위군 및 지원병을 동원해야 했으며 이것은 장비와 물자조달의 어려움을 가중시키게 됩니다. 극단적인 예를 하나 들면 켄터키 주방위군 소속의 한 연대는 집결지로 지정된 치카마우가에 도착했을때 위스키는 잔뜩 챙겨왔지만 소총은 단 한정도 없었다고 합니다. 이 외에도 1개사단의 절반에 해당되는 2개연대가 무장이라곤 전혀 되어 있지 않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이니 당장 연방군이 가진 물자를 모조리 털어서 지원병들을 장비시켜야 했고 이것은 정부가 계약한 업체들이 쉽게 공급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14) 군수국Quartermaster Department과 병기국Ordnance Department은 4월 20일이 넘어서야 본격적으로 군수물자를 발주하였습니다. 병기국은 4월 30일까지 5만3천정의 크랙-요르겐슨Krag-Jörgensen소총과 1만5천정의 카빈을 구할 수 있었는데 20만에 육박하는 주방위군이 소집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면 이게 턱없이 모자란 수준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15) 이런 상황에서 급하게 장비를 조달하다 보니 문제가 속출했습니다. 병기국이 윈체스터사에 1만정의 소총을 먼저 주문했다가 이것들이 육군이 요구한 성능기준에 미달해 20만달러를 허공에 날린 일도 있었습니다.16) 스프링필드 조병창은 근로자를 6백명에서 10시간 2교대 1,800명으로 늘렸고 소총 생산은 3월 중순 하루 120정에서 8월 중순에는 하루 363정으로 늘어납니다.17)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총은 부족했기 때문에 주방위군과 지원병으로 구성된 부대는 초기에 흑색화약을 사용하는 구식 스프링필드 소총을 장비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전쟁 발발 당시 26만정 가까운 재고가 있었다고 하는군요.18)
다 른 모든 병과와 마찬가지로 포병도 준비가 매우 부실했습니다. 1896년 당시 미육군은 야전포병의 표준장비인 3.2인치 야포를 150문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1898년 전쟁이 발발하자 14개의 정규군 포병 포대는 포대당 6문의 편제를 갖출 수 있었으나 지원병으로 새로 편성된 포대는 포대당 4문의 편제를 갖춰야 했습니다.19)
또한 무연화약의 생산도 문제였습니다. 이것 또한 평시 상비군의 규모가 적었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였습니다. 민간기업들은 민수용으로 주로 흑색화약을 생산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이 닥치고서 군대의 발주에 의해 황급히 시설을 전환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전시동원이 시작될 당시 민간 기업중 무연화약 생산능력을 갖춘 곳은 세곳 뿐이었습니다. 이때문에 무연화약의 배분은 해군의 함포와 육군의 크랙-요르겐슨 소총 탄환에 최우선적으로 할당되었고 해안포와 야전포병에는 임시변통으로 흑색화약이 보급되었습니다. 야전포병에 대한 무연화약 구입은 5월이 되어서야 시작되었고 전쟁 내내 무연화약 보급은 부족했습니다.20)
그 밖의 군장류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부족한 재고량을 민간기업의 생산능력으로 보충하려 했으나 위에서 언급한 무연화약과 마찬가지로 민간기업들은 생산해 본 경험이 없는 군수물자를 생산하는데 어려움을 겪었고 실제 생산된 것들도 조악한 품질이 많았던 모양입니다.21) 탄입대 같은 것은 지금 우리의 기준으로 본다면 꽤 단순한 물건인데 이런 것 조차도 당시 미육군의 품질 기준을 통과하는데 꽤 어려움을 겪었던 모양이더군요.

미서전쟁 기간 중 미국의 전시동원을 보면 아무리 방대한 산업능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것이 바로 군수물자 생산능력으로 전환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차대전 당시 미국은 방대한 동원력을 보여주었지만 거기에는 미서전쟁과 1차대전을 거치면서 축적된 경험과 전간기 동원을 위한 많은 연구가 바탕에 깔려있었습니다. 남북전쟁 이후 30년이 지난뒤 갑자기 전쟁에 뛰어든 미서전쟁기의 미국은 그와는 동떨어진 존재였습니다. 군대를 어떻게 유지하고 조직해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개념도 부족했고 민간부문의 경제력을 효율적으로 동원하는 능력도 부족했습니다. 위에서 열거한 몇가지 극단적인 사례처럼 경험부족으로 인한 심각한 비효율이 발생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저런 시행착오를 극복하면서 전쟁에 승리할 수 있었고 이런 경험이 조금씩 쌓여가면서 마침내 2차대전 시기에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방대한 전시동원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1) Jerry Cooper, The Rise of the National Guard : The Evolution of the American Militia, 1865-1920, (University of Nebraska Press, 1997), p.97
2) Michael D. Doubler, Civilian in Peace, Soldier in War : The Army National Guard, 1636-2000,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3), p.129
3) Graham A. Cosmas, An Army for Empire : The United States Army in the Spanish-American War, (Texas A&M University Press, 1998), pp.6~7
4) Jerry Cooper, Ibid., pp.99~100
5) Jerry Cooper, Ibid., pp.102~103
6) Graham A. Cosmas, Ibid., p.86
7) Jerry Cooper, Ibid., pp.97~98; Graham A. Cosmas, Ibid.,  pp.82~89
8) “The Dodge Commission Assesses the Work of the Quartermaster Department in the War with Spain”, United States Army Logistics 1775~1992. Vol.2, (CMH, US Army, 1997), p.336
9) “The Dodge Commission Assesses the Work of the Quartermaster Department in the War with Spain”, United States Army Logistics 1775~1992. Vol.2, (CMH, US Army, 1997), pp.337~338
10) “Official Allowances for Supplies, Equipment, and Transprot, 1898”,  United States Army Logistics 1775~1992. Vol.2, (CMH, US Army, 1997), p.346
11) Graham A. Cosmas, Ibid.,  p.151
12) “Official Allowances for Supplies, Equipment, and Transprot, 1898”,  United States Army Logistics 1775~1992. Vol.2, (CMH, US Army, 1997), p.346
13) Graham A. Cosmas, Ibid.,  pp.82~84
14) Graham A. Cosmas, Ibid.,  p.124
15) Graham A. Cosmas, Ibid.,  p.148
16) Graham A. Cosmas, Ibid.,  p.137
17) Graham A. Cosmas, Ibid.,  p.149
18) Graham A. Cosmas, Ibid.,  p.154
19) Janice E. McKenny, The Organizational History of Field Artillery, 1775~2003, (CMH, US Army, 2007), pp.85~88;  Graham A. Cosmas, Ibid.,  p.152
20) Graham A. Cosmas, Ibid.,  pp.152~153
21) Graham A. Cosmas, Ibid.,  pp.156~157

2009년 12월 9일 수요일

Weapons and Warfare in Renaissance Europe

번동아제님이 쓰신 군기시(軍器寺)터 발굴에 대한 글을 읽던 중 '건물지 11호'에서 조선시대의 화약이 출토되었다는 내용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번동아제님이 지적하신 것 처럼 이를 통해 조선시대 화약의 화학적 성분을 분석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발견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내용을 읽고 나니 예전에 읽었던 Bert S. Hall의 Weapons and Warfare in Renaissance Europe이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이 책은 중세말기~르네상스 시기의 군사적 발전을 '기술적' 관점에서 분석한 책인데 3장 전체를 할애해 15세기의 화약에 대한 분석을 하고 있어서 읽을 당시 아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이 책에 대한 생각이 난 김에 이 책에 대해서 조금 소개를 해 보려 합니다.

이 책은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출간한 기술사연구(Johns Hopkins Studies in the History of Technology)의 열 다섯번째 저작입니다. 몇 년전 2차대전에서 근대유럽전쟁 전반으로 관심사가 옮겨가면서 근대전쟁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르네상스 시기의 전쟁에 대해 쓸만한 서적이 없을까 찾아보던 중 접하게 되었습니다.

저자 Bert S. Hall은 중세말~르네상스 시기의 군사기술이 전쟁의 양상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왔는가를 중점적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사실 여기까지라면 유사한 주제를 다룬 기존의 연구들과 어떠한 차이점이 있느냐는 질문이 들어올 법 합니다. 네. 그래서 Hall은 화약 무기에 대한 기술적 분석과 전술의 변화를 분석하는데 그치지 않고 화약 무기의 생산을 뒷받침한 사회경제적 배경에 대한 분석까지 시도하고 있습니다. 예를들어 저자는 14세기에 공성병기로서 화약무기의 사용이 확산된 데 대해 대포의 위력뿐 아니라 1380년대를 기점으로 급락하기 시작한 화약의 가격이 큰 영향을 끼쳤다고 지적합니다. 또한 15세기 후반과 16세기 초반에 걸쳐 화승총으로 대표되는 개인용 소화기가 급속히 발달하게 된 데에도 단순히 화약의 개선과 기술적인 요인만이 작용한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저자는 화승총의 개발과 확산이 독일과 이탈리아에 의해 주도된 데 주목하여 이 지역의 분열된 정치체제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봅니다. 즉 영국, 프랑스와 달리 작은 국가들로 분열되어 있었던 독일과 이탈리아의 통치자들은 공세적인 전쟁을 치르기 보다는 자신들의 영역을 방어하는 전쟁을 치르는 경우가 더 많았으며 이때문에 방어 전투에 적합한 개인용 소화기가 급속히 발달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 입니다.(이러한 주장은 초기 화승총의 운용이 야전에서도 창병과 참호의 지원을 받아 방어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이렇게 단순히 군사기술적 측면에만 집중하지 않고 보다 광범위한 사회경제적 맥락에서 전쟁의 변화를 고찰함으로써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있습니다. 단순히 기술적인 측면에만 집중한 설명으로는 해결하기 곤란한 의문들에 대한 답을 제시해 준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할 수 있을 것 입니다.

또한 기술적 측면에 대한 분석도 충실합니다. 15세기 화약 생산을 분석한 3장과 초기 화약무기의 탄도적 특성을 분석한 5장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5장의 경우 20세기에 실시된 15~16세기 화약무기에 대한 실험 등 초기 화약무기의 기술적 특성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들을 분석하여 기술적 한계가 어떻게 화약무기를 활용한 전술을 형성했는지 고찰하고 있습니다. 특히 재미있는 것은 1988년 부터 1989년 사이에 오스트리아에서 실시된 실험인데 이 실험의 결과에 상당한 분량을 할애해 분석하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듭니다. 저자는 활강식 총신과 탄두의 형태로 인한 낮은 명중율과 원거리에서의 위력 부족으로 초기의 소화기는 근거리에서 대규모 일제사격을 퍼붓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며 이런 전술에서는 명중율 보다 발사속도가 중요해 질 수 밖에 없었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총신에 강선을 파는 방식으로 명중율을 높이는 방법이 있음에도 널리 확산되지 못한 이유는 장전속도가 느려져 대규모 보병전투에는 약점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이런 구성은 꽤 마음에 듭니다. 이렇게 한 시기의 전술적 변화에서 다른 시기의 전술적 변화에 대한 설명으로 넘어가면서 중간에 변화의 요인이었던 기술적 문제에 대해 별도의 장을 활용해 집중적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다음에 이어지는 장을 이해하는데 훨씬 편리하다는 생각입니다. 기술적 변화와 전술적 변화를 함께 서술하는 것 보다 명료한 구성이라고 할까요.

그리고 가장 마음에 드는 점은 예로 들고 있는 역사적 사례가 매우 풍부하다는 점 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영미권 학계에서 이 시기의 전쟁을 기술 할 때 영국과 프랑스의 사례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경향이 어느정도 있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독일, 이탈리아, 보헤미아, 스페인 등 기술적, 군사적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다른 지역의 사례도 풍부하게 인용하고 있습니다.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후스전쟁과 이베리아 반도 재정복전쟁 말기의 화약무기 운용에 대한 부분입니다. 후스전쟁에 대한 군사적 분석은 꽤 드문편이라 읽으면서 반갑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근대군사사에 관심을 가진 분들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저작이라고 생각합니다.

2008년 12월 2일 화요일

전쟁이 변화시킨 독일의 작은 마을 - Kirchmöser

Frontline and Factory : Comparative Perspectives on the Chemical Industry at War : 1914~1924를 읽는 중인데 1차대전 중 화학공업(주로 화약)에 대한 재미있는 글들이 많습니다. 뒤에 간단한 소개글을 써 볼 생각입니다. 이 책은 개별주제에 대한 소논문을 모아놓은 책인데 그 중 독일의 한 작은 마을의 공업화에 대한 글이 상당히 좋습니다. Sebastian Kinder의 Transforming a village into an industrial town : The royal Prussian powder plant in Kirchmöser라는 글인데 이 글의 내용을 요약해 볼 까 합니다.

1차대전이 발발할 당시 독일에는 민간 화학기업들이 운영하는 화약공장외에 국영 화약 공장이 다섯 곳 있었다고 합니다. 슈판다우(Spandau), 하나우(Hanau)의 프로이센 왕립화약공장, 그나슈비츠(Gnaschwitz)의 작센왕립화약공장, 다하우(;;;;)와 잉골슈타트(Ingolstadt)의 바이에른왕립화약공장 이었습니다. 그러나 국영화약공장들은 군대의 평화시 화약소요량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에 불과했고 민간이업들의 생산능력도 막대한 화약소모량 때문에 충분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이 격화되면서 새로운 화약공장의 설립이 필요해졌습니다. 전쟁 발발전 독일 군부는 한달에 200톤의 화약을 생산하면 전시 소요를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산업동원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전쟁이 터져서 1914년 가을에는 화약 생산량을 월 1천톤까지 끌어올렸지만 전선의 요구량은 충족시키지 못 했습니다.

독일정부는 1914년 9월에 새로운 국영화약공장을 설립하고 다하우, 잉골슈타트, 그나슈비츠의 설비를 증설한다는 결정을 내립니다. 이 새로운 공장은 결국 키르히뫼저(Kirchmöser)에 건설되는데 이 공장은 1차대전 중 새로 건설된 유일한 국영화약공장이었다고 하는군요. 나머지는 민간기업의 설비 증설로 충당했다고 합니다.
화약공장을 증설할 때 요구된 조건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 최소 350급 선박이 항행할 수 있는 수로에 위치할 것
- 4분의 1은 숲으로 되어 있는 350헥타르 면적의 야산, 혹은 그 근처에 위치할 것. 폭발사고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야산지역에 건설되어야 하며 숲은 적의 첩보활동으로 부터의 은닉에 필요함
- 주요 철도노선에서 4km이내에 위치할 것

이러한 필수조건 외에 요구된 부가 사항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 일일 8000~10000입방미터의 식수를 공급할 수 있을 것
- 폭발사고시 민간인 피해를 최소화 하기 위해서 건물로부터 250미터 이내에 주거지가 없어야 할 것
- 공장 주변에 600에서 800명의 노동자와 그 부양가족을 수용하고 공장 내 기숙사에 50에서 60명의 노동자를 수용할 수 있을 것
- 건설회사와 기타 공업기반을 갖추고 있을 것
- 석탄광산
- 가능하면 지가를 낮추기 위해 국유지일 것

이렇게 해서 1914년 11월 10일에 뫼저(Möser)라는 마을이 적합한 건설지로 추천됩니다. 전쟁 당시 약 300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던 이 마을은 하벨(Havel) 강을 끼고 있어 실레지엔과 루르 공업지대로의 접근성이 용이했고 동시에 함부르크(Hamburg)와 슈테틴(Stettin) 등으로의 접근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또 베를린-하노버 철도가 지나가는 지역에 위치해 철도 교통도 좋은 위치였습니다. 기본적인 요구조건은 대부분 충족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일한 문제는 건설 예정지역이 대부분 사유지였다는 것인데 이것은 총 1,154,480 마르크의 비용을 들여 국가가 매입했습니다.
빌헬름 2세의 최종승인은 1914년 11월 29일에 내려졌지만 실제 건설은 뫼저 마을이 선정된지 이틀 뒤인 11월 12일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너무 작은 마을이다 보니 충분한 건설 노동력을 확보할 수가 없었고 1915년 1월부터 3월까지는 겨울이다 보니 건설이 지연되고 있었습니다.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노동력이었는데 주변 지역에서 3,000여명의 건설도동자가 모집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들 중 상당수가 농부여서 농번기에는 노동력이 다시 유출되는 문제가 있었다고 하는군요. 결국 1915년 3월에는 전쟁포로를 동원하자는제안도 나왔으나 최종적으로는 점령한 폴란드에서 모집한 노동자를 투입하는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1915년 1월 말까지 건설작업을 위해 베를린-하노버 철도선과 뫼저 마을을 연결하는 철도가 완성되었고 2월부터 건설작업이 시작되어 1915년 5월 7일 부터는 내부 설비 공사 단계에 들어갑니다. 1915년 7월 1일에는 건물 공사가 완료되어 생산라인 구축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화약의 시험생산은 아직 공장단지가 완공되지 않은 1915년 5월 12일부터 시작되었으며 1918년 중순에는 공단 전체가 완성되었습니다.
그 결과 전쟁 발발 당시 300명의 주민이 거주하던 뫼저 마을은 1918년까지 6,000~7,000명의 공장노동자와 3,000명의 건설노동자가 거주하는 중소규모 도시로 발전합니다. 노동자들의 편의를 위해 대규모의 주택단지도 건설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전시에 급히 건설한 공단이다 보니 숙련노동자는 확보할 수 없었고 TNT 같이 상대적으로 복잡한 제품은 생산할 수 없었다고 하는군요.

그런데.



공단이 완공되고 몇 달 지나지 않아 전쟁이 끝나버렸습니다.



키르히뫼저의 인구는 1918년 말에는 1,000명 수준으로 감소했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 공장의 생산설비들은 프랑스, 벨기에, 세르비아에게 넘겨집니다. 그러나 바이마르 공화국정부는 전쟁 중 새로 만들어진 공업도시가 그냥 사라지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키르히뫼저의 공단은 1920년에 철도청(Reichsbahn)에 넘겨져 기관차 공장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이 공장은 독일에서 처음으로 포드-테일러식의 대량생산 공정을 적용해 기관차 정비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바이마르 공화국과 제3제국 시기에 키르히뫼저는 중요한 철도공업지구로 탈바꿈합니다. 1939년에 키르히뫼저의 인구는 5,000명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최종적으로 이 도시가 몰락한 것은 2차대전 이후 동독으로 편입된 이후 였습니다. 동독 시기에도 키르히뫼저는 철도청의 정비공장이 있었지만 2차대전 이전의 수준은 회복하지 못했다고 하는군요.

2008년 10월 5일 일요일

Kenneth Chase가 주장하는 중국의 화기 개발이 낙후된 원인

번동아제님의 글, 「조선 후기 군대의 기본 전투대형인 층진의 개념도」에 달린 댓글을 읽다보니 흥미로운 구절이 하나 눈에 들어왔습니다.

다만 에도시대 일본의 병학이 1700년대까지 여전히 시대불명의 망상세계를 헤메고 있었고, 청나라 또한 화약병기 시대에 걸맞는 진형을 제대로 개발 못해 헤매던데 비하면 그나마 조선은 유럽의 선형 전술과 비슷한 대형을 내놓고 고민하고 있었다는 점에선 부분적이나마 긍정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 번동아제

중국이 조선 보다도 화약무기를 활용한 진형의 개발에서 뒤떨어졌다는 점은 정말 의외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중국은 명-청 교체기 이후로는 화약무기의 활용에서 유럽에게 완전히 추월당하고 말았지요. 중국이 화약무기를 개발한 원조임에도 불구하고 17세기 이후로는 유럽을 따라잡지 못하게 된 이유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는데 제가 가장 재미있다고 생각한 가설은 Kenneth Chase의 주장입니다. Kenneth Chase에 대해서는 이글루에 있을 때 한번 간단히 소개한 적이 있는데 이글루를 닫으면서 해당 글을 날려버렸으니 다시 한번 언급해 볼까 합니다.

Kenneth Chase는 화약무기의 초기 발전단계에서 발전에 영향을 끼치는 요소를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기병의 위협이고 두 번째는 보병의 위협입니다. 전자의 위협이 클 경우 초기 단계의 화기로 무장한 보병은 적 기병의 기동성을 상쇄할 만한 수단이 없으므로 전투에 불리할 수 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기병의 위협이 심각한 곳에서는 기병에 대한 대항수단으로 기병을 선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경우 화기의 개발은 우선순위에서 밀리게 됩니다. 보병의 위협이 크다면 조건은 반대가 되겠지요.

Chase는 이상의 조건에 따라 화기의 발달유형을 다음의 네 가지로 구분합니다.
먼저 기병과 보병의 위협을 모두 받는 경우는 화약무기의 발전이 중간 정도로 일어납니다. 보병위주의 서유럽과 기병위주의 유목민들을 동시에 상대한 오스만 투르크와 동유럽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다음으로 기병의 위협은 크지만 보병의 위협은 적은 경우가 있습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경우가 바로 중국으로 이런 경우 화약무기의 발전은 느리게 진행됩니다.
세 번째는 기병의 위협은 적고 보병의 위협이 큰 경우 입니다. 서유럽이 여기에 해당되며 이 경우에는 화기의 발전이 급속히 진행됩니다.
마지막은 양쪽 모두의 위협이 없는, 전쟁의 위협이 적은 경우인데 이 경우는 이렇다 할 발전이 없습니다. 바로 도쿠가와 막부 시기의 일본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이런 전제 하에서 Chase는 명청교체기 중국의 화약무기 사용에 대한 장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중국이 (화약무기 개발에서) 뒤쳐지게 된 시점이 명 말기인지 또는 청 초기인지는 단언하기가 어렵다. 유럽은 1400년대 후반에 최초의 실용적 화기인 머스켓을 개발 함으로서 처음으로 중국을 앞서는 단초를 마련했지만 중국인들에게 머스켓은 그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대안이 아니었다. 명 왕조의 멸망과 청 왕조가 건립된 시기에 있었던 사건들은 중국의 국방에 있어서 유용한 수단은 명 초기와 마찬가지로 기병이었음을 보여준다. 초기의 청 왕조는 (화기의 사용에서) 상대적으로 유럽에 비해 뒤쳐졌지만 유럽의 위협이 닥치기 까지는 아직 2세기나 더 남아 있었다.
화기, 특히 1300~1400년대의 조잡한 수준의 화기는 단독으로 명 왕조가 처한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는 수단이 아니었다. 화기가 기병과 싸우는데 있어서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점은 중국에서 화기의 발달이 별로 이뤄지지 못한 이유를 잘 설명해 준다.

Kenneth Chase, Firearms : A Global History to 1700,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p.171

Chase는 일본이 중국에게 유럽이 오스만 투르크에게 했던 역할을 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르지만 일본은 서유럽에 비해 전쟁수행능력이 부족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임진왜란은 일본의 제한된 정복전쟁 수행능력을 잘 보여줬으며 결국 일본은 이 전쟁의 실패 이후 조용히 고립노선을 걷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중국을 위협하는 존재는 기병을 운용하는 만주족 만이 남게 되어 화약무기 개발에 대한 필요성이 줄어들 수 밖에 없었다는 결론입니다.

2008년 5월 5일 월요일

16-17세기 스페인의 군사비 지출에 대한 잡담

지난 3월에 ‘국가에 의한 무장력의 독점 - 미국의 방식’이란 글을 쓰면서 글의 마지막 부분에 르네상스 시기에 살았던 이탈리아인 트리불치오(Gian Giacomo Trivulzio)의 명언(?) 한마디를 인용했었습니다.

“(전쟁에는) 다음의 세가지가 필수적이다. 돈, 더 많은 돈, 그리고 더 더욱 많은 돈 이다.”

트리불치오가 지적한 것 처럼 전쟁에서 돈 문제는 백만번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중요한문제입니다. 르네상스 이후 유럽의 여러 국왕들은 늘어나는 전쟁 비용으로 골머리를 앓아야 했고 종종 돈이 없어 피박을 보기도 했습니다. 폴 케네디는 강대국의 흥망에서 몰락한 강대국의 첫 번째 사례로 스페인을 들고 있는데 그가 지적하는 스페인의 몰락 요인 중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재정적 측면입니다.

합스부르크체제의 실질적인 약점을 드러나게 한 것은 치솟는 전비였다. 1500년에서 1630년 사이에 식량가격은 3배, 제품가격은 5배로 오른 전반적 인플레이션은 정부재정에 큰 타격을 주었다. 여기에 육해군이 2배, 4배로 늘어남에 따라 더욱 악화되었다. 결국 합스부르크는 계속해서 부채의 변제에 안간힘을 다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1520년대 알제리, 프랑스 그리고 독일 프로티스턴트와 맞서 여러 차례 전쟁을 치른 카를 5세는 자신의 경상수입이나 특별수입으로는 도저히 지출을 감당할 수 없게 되고 자신의 수입은 이미 몇 년 앞서 은행가에 담보되어 있었다. 오직 인도에서 오는 재화에 대한 결사적인 몰수 조치와 스페인에 있는 모든 금의 압수를 통해서만 프로티스턴트 군주에 대한 전쟁을 지원할 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1552년의 메츠(Metz) 전투에 소요된 전비만 해도 250만 두카도로서 당시 황제가 아메리카에서 얻던 경상수입의 거의 10배에 해당하였다. 어절 수 없이 그는 계속해서 새로운 대부자금을 물색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때마다 조건이 점점 불리해져 갔음은 당연하였다. 왕가의 신용이 무너지면서 은행의 금리는 천정부지로 치솟아 경상수입의 대부분이 몽땅 지난 부채에 대한 이자지불에만 충당되었다. 카를 5세가 퇴위하면서 펠리페 2세에게 상속한 스페인의 공식 부채는 약 2,000만 두카도였다.

폴 케네디/이일수, 전남석, 황건 공역, 강대국의 흥망, 한국경제신문사, 1987, 67쪽

스페인의 군사비 지출은 같은 시기의 다른 국가들과 비교해도 엄청난 규모였습니다. 단순히 비용뿐 만 아니라 국가 재정에서 차지하는 비중으로다 스페인은 단연 최고였습니다. 예를 들어 16세기 유럽국가들은 국가총생산의 2% 정도를 군사비에 사용한 반면 스페인은 4~5% 수준으로 추정됩니다.

카를 5세는 사방에서 전쟁을 벌여댄 탓에 유럽 최고의 채무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1520년부터 1532년 사이 카를 5세의 연 평균 채무액은 41만3,000 두카도였는데 이것은 1552~56년 사이에는 192만9,000두카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심각한 상황은 그의 뒤를 이은 펠리페 2세 때도 딱히 나아지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펠리페 2세는 카를 5세로부터 물려받은 부실한 재정 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꽤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펠리페 2세는 돈이 나올 만한 곳은 모조리 쥐어 짜냈고 아메리카로 부터의 수입은 카를 5세 치세기에 연 평균 20~30만 두카도 수준에서 200만 두카도로 늘어났습니다. 하지만 수입이 늘면 뭘 하겠습니까. 지출은 더 늘어나는데.;;;;; 먼저 펠리페 2세가 심혈을 기울인 영국원정은 군사적 재앙일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치명적인 재앙이었습니다. 펠리페 2세가 아르마다의 건설에 투자한 비용은 엄청났는데 배를 건조하는 비용만으로 4백만 두카도가 날아갔다고 합니다. 여기에 네덜란드와 이탈리아에 주둔한 육군에 소요되는 비용도 엄청난 것이어서 1574년 한 해에만 570만 두카도가 해외 주둔군을 유지하는데 소비되었습니다. 펠리페 2세 시기의 연 평균 군사비는 무려 840만 두카도 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쨌건 스페인은 강대국이라 펠리페 2세 이후로도 계속해서 군사비에 엄청난 투자를 해댔습니다. 스페인의 군사비 지출을 연구한 톰슨(I. A. A. Thompson)에 의하면 16세기 초부터 17세기 중엽까지 스페인의 국가 예산 지출은 무려 20배가 넘게 증가했는데 이것은 같은 시기 물가 상승률의 네 배에 해당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중 상당수는 군사비가 차지하고 있었다지요. 톰슨의 연구에 따르면 스페인은 1621년부터 1640년 까지 4억 두카도의 예산을 사용했는데 이 중 47%가 군사비였다고 합니다. 이 시기 스페인은 30년 전쟁에 참전해 가뜩이나 시원찮은 재정에 압박을 가했습니다. 이 무렵 스페인의 연 평균 군사비 지출은 1700만 두카도 였습니다.

스페인의 군사비 지출이 증가한 원인은 방대한 지배영역과 이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 커져버린 군대에 있었습니다.
먼저 지배영역이 늘어나면서 그 만큼 성곽 건설과 개량, 유지에 들어가는 비용이 늘어났습니다. 오랑의 경우 펠리페 2세의 재위 시기에 30년에 걸쳐 축성에 300만 두카도가 사용되었고 1590년에는 영국의 대서양 연안지역을 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 100만 두카도가 성곽의 건설과 유지 보수에 소비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보통 성곽 하나를 개량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은 7만~15만 두카도 정도였다고 합니다.
다음으로는 늘어난 영역을 방어하기 위해 병력이 증가한 것이 결정적이었습니다. 15세기 후반에 기껏해야 2만 정도이던 육군은 세기가 바뀌기 전에 6만으로 불어났고 불과 100년 뒤인 1590년에는 네덜란드 주둔군만 85,000~86,000명에 달했습니다. 물론 15~17세기 동안 유지비용이 비싼 기병의 비중이 줄어든 것도 사실이지만 그 대신 보병이 엄청나게 불어났기 때문에 기병의 감소로 인한 경제적 효과는 전혀 없었습니다. 수만의 대군에게 월급을 지급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 이었고 월급이 체불될 경우에는 난감한 결과가 따라왔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라면 네덜란드 주둔군 병사들이 월급 체불에 항의해 안트베르펜을 약탈한 것이 있지요. 펠리페 2세는 대륙에서 비싼 돈을 들여 이단들을 응징하는 동안 지중해에서도 역시 비싼돈을 들여 이교도들을 응징하고 있었습니다. 1570년대에 지중해의 갤리선 함대를 유지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은 한해에 67만 두카도 정도였다고 합니다. 17세기로 접어들어 스페인의 해양 전략의 중심이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이동하자 갤리선 함대에 들어가는 비용은 점차 줄어들었지만 대신 대서양에서 함대를 유지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이 늘어났습니다. 대서양 함대의 유지 비용은 한해에 보통 50만 두카도에서 많은 경우 100만 두카도 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육군 병력의 증가로 화약무기를 획득하는데 많은 비용이 소모되었습니다. 화약 무기 자체는 기존의 냉병기 종류와 비교하면 비싸지는 않았지만 대신 대량으로 장비하는 특성상 전체적인 비용은 오히려 늘어났습니다. 스페인은 1588년 단 한 해에만 대포와 화약을 구매하는데 622,758 두카도를 사용했습니다. 이 중 30만 두카도 가량이 대포를 구매하는데 쓰여졌다고 합니다. 단, 일단 대포를 구입해 놓으면 포탄이나 심지, 화약 등의 소모품의 가격이 쌌던 탓에 유지비는 상대적으로 부담이 적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어쨌건 화약무기의 도입은 스페인에 있어 경제적인 부담이었습니다. 스페인은 군사강국이었지만 경제와 산업기반은 난감할 정도로 형편없었기 때문입니다. 스페인 국왕의 주 수입원은 아메리카의 은이었고 병기창은 스페인령 네덜란드와 이탈리아 였다죠. 스페인의 연간 병기 생산량은 1590년대 초반에 아퀘부스 2만정, 머스킷 3천정 수준이었는데 군 병력은 십만 단위이니 전쟁을 하려면 군대에 필요한 총의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밖에서 가져온 돈을 총 사느라 다시 밖으로 내 보내는 구조이고 이 상태에서 전쟁질을 해대니 국왕의 지갑이 항상 텅 비어있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 이었습니다.

참고서적
피에르 빌라르/김현일 옮김, 『금과 화폐의 역사 1450-1920』, 까치, 2000
존 H. 엘리엇/김원중 옮김, 『스페인 제국사 1469-1716』, 까치, 2000
폴 케네디/이일수, 전남석, 황건 공역, 『강대국의 흥망』, 한국경제신문사, 1987
J. R. Hale, 『War and Society in Renaissance Europe 1450-1620』,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85
I. A. A. Thompson, 「“Money, Money, and Yet More Money!” – Finance, the Fiscal-State, and the Military Revolution : Spain 1500-1600」, 『The Military Revolution Debate』, Westview,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