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March 29, 2008

'영광의 탈출'이 될 뻔한 어떤 사건

Peter Schmoll의 Die Messerschmitt Werke im Zweiten Weltkrieg, 134~135쪽에는 전쟁말기에 있었던 흥미로운 이야기 하나가 실려있습니다.

1944년 2월 중순, 레겐스부르크(Regensburg)의 남동쪽 오버트라우블링(Obertraubling)에 있는 메서슈미트사의 시험비행장에서 특이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소련군 포로 두명이 독일공군에 인도되기 위해 시험비행을 기다리던 Bf-109 한 대를 탈취해 탈출하려 한 것입니다. 이 사건을 목격한 독일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날은 날씨가 좋지 않아 오전의 시험비행이 취소되었습니다. 할일이 없어진(?) 시험비행사들이 아침 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가고 있을 때 갑자기 한대의 Bf-109가 활주로로 진입해 이륙을 시도했습니다. 이것을 목격한 메서슈미트사의 시험 비행사인 그로스(Ludwig Groß)는 시험비행이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제지할 사이도 없이 비행기는 이륙해 버렸습니다. 하지만 이 전투기는 제때 고도를 높이지 못해서 비행장의 담에 랜딩기어가 걸리면서 추락했습니다. 당장 주변에 있던 경비병들이 달려가 비행기에 타고 있던 소련군 포로 두 명을 체포했고 이 두 명의 포로는 군사재판에서 독일국방군의 자산에 손실을 입힌 혐의로 총살형을 언도 받았고 2월 14일에 처형되었다고 합니다.

탈출을 시도하다가 실패해 목숨을 잃은 두 명의 소련군 포로는 바실리 야레쉬(Васи́лий Яреш)소위와 드미트리 우테비코프(Дмитрий Утевиков) 소위라고 합니다. 이 두 사람은 포로가 된 뒤 메서슈미트 공장에서 강제노동을 하고 있었는데 이 두명 중 한명이 조종사여서 독일 비행기를 훔쳐 탈출하자는 계획을 세웠던 것입니다. 불행히도 이들의 활극은 비극으로 끝났고 이 두 포로는 총살된 지 이틀 뒤인 2월 16일에 근처의 묘지에 매장되었다고 합니다. 성공했다면 하나의 멋진 이야기로 남았을 법한 이 사건은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우울한 사실이지만 모두가 영화처럼 살 수 있는 건 아니지요.

Wednesday, March 26, 2008

함부르크, 킬, 플렌스부르크

일요일에 드레스덴을 얼렁뚱땅 구경한 뒤 베를린으로 돌아와 다시 한번 친구의 집으로 쳐들어갔습니다.(이 어린양은 낯짝이 두껍거든요.)
편히 푸욱~ 쉰 뒤 아침에 길을 나섰습니다. 일요일에도 비가 올것 같은 날씨였는데 월요일 부터 비가 주룩 주룩 내리더군요.

베를린 안녕~

함부르크에 가는 이유는 두 가지 였습니다. 첫 번째는 킬로 가는 기차를 갈아타기 위해서, 그리고 두 번째는 책을 사기 위해서 였습니다. 함부르크에는 군사서적을 취급하는 서점이 몇 곳 있지요. 물론 시간과 돈이 부족해 다 갈 수 는 없었습니다만.

함부르크 중앙역

중앙역에서 Holstenstrasse로 가는 S 반으로 갈아탔습니다.



이날 찾아간 서점은 예전에 페리스코프 게시판에 간단히 소개한 적이 있지요.

바로 여기!

5년만에 뵌 주인장 아주머니는 귀여운 아들이 하나 생기셨습니다. 오호. 그러나 5년전 문을 열면 우렁차게 울리던 사이렌은 고장이 난건지 잘 안울리더군요.

언제나 그렇듯 문제는 항상 돈 보다 책이 많다는 것

비가 내려서 그런지 거리는 썰렁~ 했습니다.


책을 몇 권 산 뒤 함부르크 중앙역으로 되돌아가 킬로 가는 기차를 탔습니다.


의외로 킬 까지 가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더군요.

킬 중앙역

킬 중앙역은 좀 평범하게 생겨서 별다른 인상이 없었습니다.


중앙역은 물론이요 시가지도 평범했습니다.


그렇다면 킬에는 뭐하러 왔느냐?

항구 보러 왔습니다!

그러나 킬은 좀 썰렁한 항구더군요. 시끌벅적한 함부르크와는 분위기가 반대였습니다.



물론 그냥 항구를 보러 온 건 아니었습니다. 킬 하면 독일해군을 대표하는 곳이니 독일해군 기지 구경을 해야지요!

해군기지로 가는 길에 자그마한 수족관이 하나 있었습니다. 공사중이라 어수선 하더군요.



그리고 다시 썰렁한 부두를 따라 계속 걸었습니다. 비와 함께 맞는 북해의 겨울 바람은 정말 좋더군요!(진짜로요)


보통 도시에 비둘기가 있다면 항구 도시에는 갈매기가 있다!

계속 걷다 보니 기념비 하나가 나타났습니다.


무엇인가 살펴보니 1차대전 당시 전사한 독일 해군 병사들을 기리는 기념비더군요.


그리고 기념비에 뭔가 덤으로 붙어있는게 있었으니...


2차대전 당시 독일해군 돌격대대 병사들을 기리는 표식이었습니다. 어쩌다 1차대전 기념비에 더부살이를 하게 된건지.

그리고 계속 걸어 해군기지에 도착했습니다. 물론 관광객이 멋대로 들어갈 수는 없지만...


밖에서 배를 구경할 수는 있었습니다.



아. 그러나 100년 전 쯤에는 최고의 오타쿠 빌헬름 2세의 위풍당당한 전함들이 위용을 뽐냈을 이곳에는 밋밋하니 멋이라곤 없는 군함들이 들어앉아 있었습니다.

군항을 대충 구경한 뒤 다음 목표로 걷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목표는 킬 운하였습니다. 킬의 거의 유일한 관광명소(?) 라더군요.

조금 더 걸어 운하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야밤이라 사진을 찍어봐야 시커먼 바닷물 밖엔 안보이고 또 기념사진을 찍으려 해도 지나가는 사람이 없으니....(하긴, 버스 종점에다 저녁이고 비까지 내리니 사람이 있을리가 없겠지요.)

돌아오는 길에 헌 책방 몇 곳을 발견했습니다. 한 블럭안에 옹기종기 모여있더군요.

은은한 전등 아래 놓인 책들이 정말 보기 좋습니다.

처음 들어간 이 책방의 쥔장은 우아하게 생긴 여자분이었고 주로 소설류를 많이 취급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책장 한 구석으로 사회과학 분야를 취급하고 있었고 10유로 이하의 쓸만한 책들이 가득 있더군요.

헌 책을 몇 권 산 뒤 킬 중앙역으로 돌아왔습니다. 플렌스부르크행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역 구내서점에서 시간을 때웠는데 독일의 많은 역 구내서점이 그렇듯 군사서적을 여러권 취급하고 있었습니다.


서점에서 책을 구경하다가 다시 플렌스부르크행 기차를 탔습니다. 플렌스부르크 같은 독일 끄트머리의 촌동네는 뭘 하러 가느냐?
2차대전에 관심있는 분이라면 다 아시겠지만 플렌스부르크는 제 3제국이 실질적으로 최후를 맞은 동네입니다. 되니츠 제독의 임시정부가 피난한 곳이지요. 늘 제 3제국이 최후를 맞은 플렌스부르크라는 동네는 어떤 동네인가 궁금해 하던 차였으니 킬 까지 온 김에 덤으로 구경하기로 한 것이지요.

그런데 도착해 보니 정말 촌동네였습니다.

플렌스부르크역

역에서 내려 시내를 돌아다녀 봤는데 정말 아무도 없더군요. 하긴. 야밤에 비까지 내리는데 특별한 일도 없이 싸돌아다니는 사람이 있을리가 있나요...

썰렁~

작은 여관이라도 잡고 다음날 아침에 답사를 해 볼까 생각도 했는데 아무래도 여행 일정에 차질이 생길 것 같아 포기했습니다. 언젠가 다시 올 기회가 있겠지요.

다시 플렌스부르크 역으로 돌아왔습니다.

썰렁한 역 안

킬로 돌아가는 썰렁한 기차 안

킬로 돌아가는 기차는 정말 썰렁했습니다. 어쩌다 한 두명 타는 정도여서 너무나 조용하더군요.


킬 역에 도착해서 다시 함부르크로 가는 막차를 기다렸습니다. 역시 킬 역도 썰렁~ 했습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함부르크로 돌아가는 막차도 썰렁~ 했습니다. 조용하니 잠자기에 딱 좋더군요. 너무 편안하고 아늑해서 이대로 아침까지 달렸으면 싶었습니다.

끝까지 썰렁~

Tuesday, March 25, 2008

전쟁은 물량만으로 하는게 아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지 1년을 넘긴 1942년 12월 12일, 전황이 일본에게 불리하게 꼬여가던 이 시점에 식민지 조선의 경성에서는 皇國臣民 함상훈(咸尙勳), 홍익범(洪翼範), 류광렬(柳光烈), 이정섭(李晶燮) 등이 모여 제국의 앞날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이 중에서 류광렬과 이정섭이라는 양반들의 대화가 참 감명 깊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셨거든요.(몇몇 표현은 현대어에 맞게 고쳤습니다.)

류광렬 : 지금 미국의 생산력 확장이라는 것은 금년 1월 6일 대통령이 의회에 보낸 교서에 의하면 천문학적 숫자를 열거하고 있는데 설사 그 숫자에 가깝게 생산이 되고 있다 하더라도 그 생산된 군수품의 전부가 태평양전에 쓰이는게 아니고 세계 각국에 수송되어 영국, 소련, 또는 중경으로 가는 것이 있으니까 실제로 태평양에 오는 것은 그 중의 몇 분의 일 밖에 아니 될 겝니다.

그렇지만 어떻든 그들의 유일의 위안은 생산력에 있다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대동아전(大東亞戰) 전에 처칠이 일본은 강철의 생산이 빈약한데 어떻게 이기겠느냐고 한 것을 보아도 그런 것을 알 수 있지만 전쟁은 무기다소(武器多小)에 좌우되는 것 만은 아닙니다. 군사전문가가 아닌 ‘시로도(素人)’가 돼서 잘 알지 못합니다만 정부나 군 당국자의 말을 들어보아도 그렇고 전번에 한 스즈끼(鈴木)총재의 말에도 전쟁은 天地人을 갖추어야 하나 결국은 사람에 있다 했고 해군 당국자도 적의 생산력을 과대평가해서는 안되나 과소평가해서도 아니 된다는 말을 했고 도고(東鄕)원수도 백발일중(百發一中)의 포 백문을 가지는 것 보다 백발백중(百發百中)의 포 일문을 가지는 것이 났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적이 백발일중의 포 백문을 만드는 동안에 여기서는 백발백중의 포 일문만 하면 그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느 수준을 확보해 가야만 하겠다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미국도 무제한으로 군수품을 확대한다는 것이 아니라 1944년도까지 보아 확장계획이 완성되면 반격해보겠다는 것이지 언제까지나 군기확장만은 못할 겝니다. 한도가 있을 게니까요. 군기확장과 같은 비밀에 속하는 것을 신문에 공개하는 것을 보면 여기에도 다분히 선전의 의미가 있습니다. 결국은 군확(軍擴)이란 것도 그것이 무한량이 아닌 한 년한(年限)이 있을 때 까지 튼튼히 대비만하고 있으면 조금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이 적의 심중과 계획을 잘 토도(討度)하여 여기에 대비할만한 생산력 확충에 주력하여 만전을 기할 것 뿐입니다.

투혼에 불타는 황군의 百發百中의 포 일문

VS

정신박약 양키들의 百發一中의 포들


이정섭 : 적국측의 곤란은 물질보다 인적자원에 있겠는데 제아무리 저희들 말대로 1944년까지 400만 兵을 확충한다 치더라도 남는 것은 병의 기술문제이지요. 가령 비행기를 완전히 조종하려면은 적어도 2년 동안 맹훈련을 받지않고는 쓸만한 것이 못되고 함선도 240만톤이나 만들어 내겠다 장담하지만 완전한 선상생활을 하려면 적어도 20년은 지나야 한답디다. 사관학교를 나와 20년 지나서 함장격이 될 수 있으니 전쟁 나기 전에 얼마나한 인원을 길러뒀는지는 모르지만 도저히 많은 기술자가 없을 줄 알어요. 설혹 기술이 있다쳐도 가장 요긴한 투혼이 아군에게 따르지 못하고 정(신)력이 박약해놔서 아까 류광렬씨 말씀같이 기계력이 충실해 진다 쳐도 일본 반공은 못할 것입니다.

조광 1943년 1월호, '世界政局의 前望', 31-32쪽

과연 이 양반들이 진심으로 이런 말을 한 건지는 의문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황국신민으로서 습득한 정신력(?) 중시의 전통은 한국전쟁을 거쳐 오늘날에도 조금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Monday, March 24, 2008

드레스덴

베를린에서 하루를 묵은 뒤 다음날인 일요일은 드레스덴으로 향했습니다. 드레스덴 가는 IC에서 치즈와 빵으로 간단하게 아침을 때웠습니다. 드레스덴은 예전에 프라하에 놀러갈 때 시간이 없어 잠깐 들러 점심만 먹었던 곳 입니다. 물론 이번 여행에서도 시간이 별로 없어 구시가지 일부만 날림으로 구경해 아주 아쉬웠습니다.

이게 볼품없어 보여도 예상외로 맛있었습니다

창밖 경치를 감상하며 잡생각을 하다 보니 금방 드레스덴역에 도착했습니다.


어차피 드레스덴 중앙역에서 구시가지까지는 거리가 얼마 안되기 때문에 걸어갔습니다. 가는 길에 드레스덴 시청이 있더군요.


시청 앞에는 사회주의의 흔적이 하나 남아 있었습니다.


시청에서 조금 더 가니 테아터플라츠(Theaterplatz)가 나옵니다.

작센의 국왕 요한의 동상

젬퍼오페라하우스(Semperoper)

오페라까지 볼 시간은 없어서 바로 쯔빙어 궁으로 들어갔습니다. 쯔빙어 궁에는 아주 좋은 볼거리가 두개 있지요.

하나는 미술관이고

다른 하나는 무기 박물관 입니다.

일단 미술관 부터 구경하기로 했습니다. 미술관은 그림이 많아 사진촬영이 허가되지 않았기 때문에 찍은게 없습니다. 대신 원체 소장하고 있는 작품이 많아 시간을 여기서 엄청나게 잡아먹었습니다. 돈내고 들어간 것이다 보니 전시된 그림을 모두 구경하지 않고는 못 배기겠더군요.



기껏 찍은 거라곤 이런 사진 정도입니다. 이곳을 구경했다는 생색내기용이죠. 중간에 지난 2002년 대홍수로 손상된 그림들을 복구하는 과정을 전시해 놓은 것도 있었는데 꽤 재미있었습니다. 물론 경비원이 옆에서 감시하고 있어 사진은 못 찍었습니다.


잠깐 창 밖을 내다봤습니다. 겨울이라 썰렁해 보이더군요.

사진은 못건지고 시간만 잡아먹은 미술관 다음으로는 무기박물관을 구경했습니다. 미술관에서 끊은 표로 이곳도 함께 구경할 수 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무기박물관은 돈을 내면 사진촬영이 허가가 됐습니다.

아. 역시! 돈이 아깝지 않았습니다. 전시실을 가득메운 15~17세기의 화려한 갑옷들!








이 갑옷은 유일하게 바보같아 보였습니다


그리고 도검, 총기류 등 다양한 무기들도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다양한 수발총이 전시되어 있어 좋더군요. 문제는 쓸만한 사진을 제대로 못 건졌다는 것 입니다.


오스만 투르크군의 개인화기와 군장류

그러나 역시 기사의 갑옷은 말갑옷과 한 세트여야 뽀대가 나지요.


개인적으로 가장 멋졌던 전시물입니다

무기박물관을 구경한 뒤 궁의 안뜰을 구경하고 나왔습니다.


다시 테아터플라츠로 돌아나와서 시내 구경을 시작했습니다.

Hofkirche

드레스덴 투어버스. 이게 너무 타고 싶었으나 돈이 없어서...


중간에 왠 발굴현장이 하나 있더군요. 규모가 제법 큰 발굴현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성모교회(Frauenkirche) 까지 도착하니 슬슬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습니다. 아우. 한시간만 더 일찍 일어날것을!


성모교회는 1945년 공습의 흔적이 아주 잘 남아있었습니다. 복원한 부분과 공습에서 남은 부분이 뚜렷이 구분되지요.
1945년의 대공습으로 파괴된 성모교회의 잔해

유럽을 피바다로 몰아넣으신 루터선생...

겨울이라 해가 떨어지기 시작하니 바로 어둠이 깔렸습니다. 당장 다음날은 함부르크로 떠날 계획이라 어쩔수 없이 이 멋진 도시를 떠야 했습니다.


중앙역에 도착하니 밤이 됐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베를린행 기차가 연착되어 잠시 역에서 머무르며 군것질을 할 수 있었습니다.

Sunday, March 23, 2008

엑셀의 재미있는 한자변환...

밖에는 비가 오는데 맡은 일은 진도도 잘 안나가고 이래 저래 답답한 주말입니다. 물론, 일의 진도는 느려도 돈은 꼬박 꼬박 받아먹고 있습니다.;;;;;;

그런데 작업을 하다 보니 조금 재미있는 걸 발견했습니다. 엑셀에서 러일전쟁과 청일전쟁을 일본식으로 일러전쟁, 일청전쟁으로 입력해도 한자 변환이 자동으로 日露戰爭, 日淸戰爭으로 되더군요.;;;;; 저는 이렇게 된다는걸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의외로 엑셀에서 한글을 한자로 자동변환하는 기능이 좋네요.

다른 재미있는 자동변환은 또 뭐가 없을까 찾아보는 중입니다.

Friday, March 21, 2008

미국인들의 센스!

최근 제 블로그에서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에 대해서 사과드립니다. 특히 저 때문에 욕보신 배군님과 바보이반님, 스카이호크님께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블로그 분위기를 반전시켜 볼 겸 얼마전 입수한 자료 하나를 소개할까 합니다.


미육군 제24보병사단 정보참모부 보고서 1950년 12월분 입니다.

정말 멋진 센스가 아닙니까!

만약 대한민국 육군에서 보고서를 저런 식으로 작성 했다간 사단장에게 욕먹고 진급에 장애가 생기지 않을까 싶습니다. 역시 미리견은 대인배의 나라입니다.

Thursday, March 20, 2008

crete님께

제 블로그에 오시는지는 모르겠으나 제 블로그에서 생긴일이다 보니 한마디 안 할 수가 없습니다.

먼저 저의 영양가 없고 시시껄렁한 블로그에 관심을 가져주신것에 대해서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게다가 댓글을 보아하니 머나먼 이국땅에서 접속해 주신것 같아 더 고맙기 그지없습니다. 여기에 crete님의 개인 사이트에 친절하게 초대까지 해 주시니 더더욱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저의 며칠 전 글 "세계에 우뚝선 개그강국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 달린 댓글을 보니 좀 난감한 느낌이 들어서 한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crete님께서 바보이반님과 배군님의 댓글에 기분이 상하신 것 같은데 거기다 다시 달아놓으신 댓글이 좀 난감하더군요.

바보이반님과 B군님께/ 세월이 더 흘러 우리나라에도 좀 더 건강한 언론이 주류가 되는 때가 온다면, 두분의 현재 현실 인식이 얼마나 터무니 없는 근거에 바탕을 뒀다는 걸 깨닫을 때가 올지도 모르겠죠. 주인장의 글에 나온 북한 인민의 인식이 바로 두 분의 인식과 정확히 일치한답니다. 왜곡된 정보에 세뇌당한 이가 현실을 바로 보기는 너무나 힘든 노릇이니까요.

crete님께서 얼마나 대단한 분이신지는 모르겠으나 여기는 서프라이즈가 아닙니다. 방문객들께 훈계조의 발언은 삼가해 주십시오.

제가 서프라이즈를 혐오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자칭 논객들의 저열한 수준보다도 그들이 가진 찌질한 '선민의식'입니다. 마치 자신이 엄청난 진리를 깨달은 냥 훈계조의 망발을 날려대는게 너무 짜증이나기 때문에 서프라이즈를 혐오합니다.

그런데 제 블로그에서 서프라이즈식의 훈계조 댓글을 보니 혈압이 마구 마구 급상승합니다. 참 무례한 질문이오나 crete님께서는 바보이반님이나 배군님에 대해 얼마나 잘 아시길래 두분의 현실인식이 터무니 없다는 발언을 서슴없이 하시는지요? 관심법이라도 터득하셨습니까?

Wednesday, March 19, 2008

찝찝한 중국의 민족주의

티벳 문제가 시끄러워 지면서 중국의 민족주의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얼마전에 읽은 책에도 중국의 민족주의와 관련된 흥미로운 사례가 하나 있더군요.


나는 중국에서 민족주의가 떠오르고 있음을 몇 가지 점에서 입증할 수 있다. 내가 집필한 지리학 교과서는 전 세계에 팔렸으며 중국어로도 번역되었다. 미국 및 해외에 있는 학생과 일반 독자들에게서 책에 대한 비판적인 코멘트가 꾸준히 들어오는데, 미국 대학에 다니고 있는 중국 학생들도 자기 나라와 출신 지역을 기술한 방식에 대해 의견을 많이 보내오곤 한다. 중국 독자들은 특히 내 책에 실린 지도에 대해 불쾌해 하는 경향이 있다. 이 지도에는 대만이 중국의 한 지방으로 분명히 표시되어 있지 않으며, 인도와 카자흐스탄의 일부가 중국의 영토로 되어 있지도 않고, 한 성난 기자가 편지에서 써 보냈듯이, 러시아의 태평양 연안 남동부를 ‘도둑맞은 땅’으로 표기하지도, 분쟁 중인 태평양의 섬들을 중국에 귀속시키지도 않았기 대문이다. 그런 사고방식은 중국 못지않게 대만에서도 강한 것 같다. 나는 티베트(시짱) 지역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 세심하게 기술했지만, 대만 쪽에서 격렬한 불만이 터져 나왔다.

청나라 때 확립된 경계선은 변경할 수 없는 중국 국경입니다. 당신은 우리의 역사적 유산을 판단할 권한이 없습니다.”

하름 데 블레이, 유나영 번역, 분노의 지리학 – 공간으로 읽는 21세기 세계사(Why Geography Matters), 천지인, 2007, 204~205쪽

주변에 이런 덜 떨어진 이웃이 있다는 것은 참 찝찝한 일 입니다.

싼게 비지떡...

오전에 책이 한 권 도착했습니다.


싸게 샀다고 좋아했는데...


펴 보니 이렇더군요.

뭐, 그래도 읽는데 지장은 없고 또 아주 싸게 산 책이라서 반품할 생각은 없습니다. 약간 찝찝하긴 하지만요.

재미있는 통계 - 1946 ~ 1947년 미 제3군의 성병 발병율

아래의 통계는 John Willoughby, 'The Sexual Behavior of American GIs during the Early Years of the Occupation of Germany', The Journal of Military History Vol. 62, No. 1, 162쪽에서 발췌한 독일 주둔 미 제3군의 1000명당 성병 발병율입니다. 꽤 흥미로운 점이 하나 보입니다.


이 표에서 재미있는 점은 백인과 흑인간에 성병 발병율의 차이가 굉장히 크다는 것 입니다. 백인의 발병율은 1.5% 전후인데 비해 흑인은 때에 따라 거의 10%에 육박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차이를 가져온 원인이 무엇인지 궁금하더군요. 본문에는 백인과 흑인의 발병율 차이에 대해 설명이 없어서 더욱 그렇습니다.

Thursday, March 13, 2008

세계에 우뚝선 개그강국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기 직전 북조선의 사회과학잡지(?) 력사과학에 이런 글이 실렸답니다.

아프리카 나라들의 새 사회 건설에 시종일관 깊은 관심을 돌려오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는 이 나라들의 농업발전을 위하여 끊임없는 방조를 주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는 쁠럭 불가담 나라들과 발전도상나라들, 특히 아프리카 나라들이 튼튼한 농업생산토대를 마련하고 식량을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하는데 중점을 두고 이 나라들과의 협조를 강화할 것 입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아프리카 나라들이 식량을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튼튼한 농업생산토대를 마련하는데 기여하는 것을 우리 당과 공화국정부의 중요한 대외경제협조방침의 하나로 제시하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는 아프리카나라들의 농업발전을 위한 협조를 여러가지 형식과 방법으로 강화하도록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무엇보다도 아프리카 나라들이 사회주의 농촌문제에 관한 테제의 빛발아래 농업발전에서 이룩한 우리 나라의 성과와 경험을 따라 배울 수 있게 하시였다.

(중략 – 위대한 수령님이 어쩌고 저쩌고, 지도자 동지가 이러쿵 저러쿵)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의 크나큰 배려와 깊은 관심속에 1980년대 중엽까지만 하여도 우리 당과 공화국정부는 남남협조의 정신에서 아프리카 나라들을 비롯한 22개의 발전도상 나라들에 30여개의 공장을 건설하여주고 20여개 나라들에 관개공사를 하여 주었으며 50여개 나라에 5,000여명의 기술자, 전문가들을 파견하여 새 사회건설을 성의 껏 도와주었다.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의 현명한 령도밑에 아프리카 나라들의 튼튼한 농업생산 토대를 마련해 주기 위한 우리 당과 공화국 정부의 성심성의로 되는 적극적인 협조는 아프리카 나라들에서 식량문제를 자체로 해결하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으며 남남협조를 확대발전시켜나가는데서 선구자적 모범으로 되고 있다.

림춘성,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현명한 령도밑에 진행된 아프리카 나라들의 농업발전을 위한 협조」,『력사과학』1995년 제1호(153호), 13~16쪽

이 논문이 쓰여진 1995년은 이미 북한의 농업이 파탄에 이르러 쌀 수요량 중 200만톤이 부족한 실정이었고 대규모 수해까지 겹쳐 최악의 상황을 맞았습니다. 결국 같은 해 8월에는 공개적으로 전세계에 식량 원조를 요청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1999년까지 고난의 행군과 함께 수백만의 아사자를 냈다고 하지요.

인민들이 굶어죽어가는 마당에 아프리카에 농업원조를 해 줬다고 거들먹 대고 있으니 이쯤 되면 이 글이 한 편의 블랙코미디로 읽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Wednesday, March 12, 2008

국공내전 후기 중국인민해방군의 전투서열

얼마전 페리스코프에 올라온 집결호와 관련된 글을 읽고 나니 갑자기 관심의 저편으로 멀리 사라졌던 국공내전에 대한 생각이 다시 났습니다. 그래서 책장 구석에 박혀있던 中国人民寄放军 历史上的 70个军이란 책을 꺼내 훑어 봤습니다.

이 책에는 국공내전후기인 1949년 2월의 중국인민해방군의 전투서열이 실려 있습니다. 군사사에 관심을 가진 분 치고 전투서열에 관심없는 분은 없을 것 입니다. 전쟁이란 좀 조직화된 패싸움이니 그 조직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전쟁을 이해하기가 조금 어렵지요. 그러나 국공내전 같이 규모가 큰 전쟁은 사단급 제대만 해도 세기 귀찮을 정도로 많습니다. 아마 당시의 중국인들도 부대가 너무 많으니 부대 이름 붙이는 걸 귀찮아 하지 않았을까 싶더군요.

그런데. 1949년 2월의 전투서열을 보니 중화의 위대함에 새삼 감탄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중국군의 경우 군단급 제대인 1개 군(军) 예하에 사단급 제대인 3개 사(师)가 배속되는데 1949년 2월 인민해방군의 전투서열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고 합니다.

1군 : 1사, 2사, 3사
2군 : 4사, 5사, 6사
3군 : 7사, 8사, 9사
4군 : 10사, 11사, 12사
5군 : 13사, 14사, 15사
6군 : 16사, 17사 18사
7군 : 19사, 20사, 21사
8군 : 22사, 23사, 24사
9군 : 25사, 26사, 27사
10군 : 28사, 29사, 30사

(중 략)

67군 : 199사, 200사, 201사, 독립53사
68군 : 202사, 203사, 204사, 독립25사
69군 : 205사, 206사, 207사
70군 : 209사, 210사

이거 너무나 간단하지 않습니까! 물론 가끔 독립사단을 배속받는 군이나 변경 군구의 2개 사단으로 편성된 독립군 등 변칙적인 편제가 있긴 합니다만.

Saturday, March 8, 2008

김민석의 말발은 여전하군요.

통합민주당의 공천에 대해 '혁명'이다 라는 식으로 많은 언론들이 빨아주고 있는데 솔직히 이건 고육지책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같습니다. 저런 방식이 수도권에서 얼마나 더 많은 표를 얻을 수 있을지 의문이군요. 기존의 '부패한(???)' 정치인을 쳐내고 정치 신인을 대거 수혈하는게 위험하다는 것은 이미 열린우리당의 실패로 드러나지 않았습니까? 어차피 불리한 선거인데 쓸데없이 도박을 거는 것 보다는 안정을 취하는게 민주당으로서는 더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이 와중에 좀 튀는 사람이 하나 눈에 들어옵니다. 김민석 최고위원이 공천 탈락에 대한 타당한 이유가 없다고 반발하고 나선 것 입니다. 대부분의 공천탈락자들이 겉으로는 승복하는 척 하면서 뒷구멍으로 뭔가 꾸미는 기미를 보이는데 김민석은 비난을 받아가면서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오호. 의외로 대인배적 기질이 있었군요. 언론에 보도된 내용을 보니 논리적으로도 타당한 구석이 많습니다. 말발은 여전하군요.

개인적으로 김민석은 다양한 헛소리를 늘어놓고 있어서 그다지 선호하는 정치인은 아닙니다만 이번 사태를 놓고 보니 그나마 통합민주당에서 쓸만한 인간은 김민석 하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김민석이 세계중심국가니 아시아중심국가니 하는 노무현 스러운 헛소리만 하지 않더라도 좀 더 좋게 볼 수 있을텐데 말입니다.

통합민주당은 이 풋사과 대인배를 구제해주는게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민주당 내의 다른 소인배들이나 어설픈 정치신인 보다는 그나마 김민석이 좀 더 쓸만하지 않나 싶습니다. 최소한 요즘 공천을 놓고 보이는 당당한 태도는 조금 점수를 줄 만 하군요.

Thursday, March 6, 2008

[妄想文學館] 장관전(長官傳)

[妄想文學館] 장관전(長官傳)

장관(長官)이란, 벼슬아치 중 높은 자를 일컫는 말이다.

서울시에 한 장관이 살았다. 이 장관은 대통령과 코드가 잘 맞아 매양 대통령이 청와대로 불러 만찬을 함께 했다. 그런데 이 장관은 정권이 바뀌니 자리를 부지할 수 없었다.

신임 대통령이 장관 명단을 열람하고 크게 노여워 하여

"어떤 놈의 장관이 정권이 바뀌었는데도 아직 사표를 안 냈단 말이냐?"

하고, 곧 명해서 그 장관의 사표를 수리하도록 했다. 청와대 비서실은 쓸만한 장관 적임자가 없어서 당장 사표를 수리할 수가 없었다. 장관 역시 밤낮 울기만 하고 해결할 방도를 찾지 못했다.

때마침 강남에 살고 있는 부자 하나가 이 소문을 듣자 곧 가족끼리 비밀 회의를 열었다. 그는 말했다.

"이젠 저 장관이 마침 정권이 바뀌어 사표를 내야 할 모양이라니 그 형편이 실로 그 장관의 자리를 더 지닐 수 없을 것이야. 이 기회에 내 그것을 가지는 게 어떨까."

하고 부자는 곧 청와대 비서실에 전화를 걸어 장관이 되기를 청하였다. 청와대 비서실은 크게 기뻐하여 즉시 새 대통령에게 아뢰었다.

대통령은 금방 장관후보자가 생긴 것을 놀랍게 생각했다. 대통령은 몸소 찾아가서 전임 장관을 위로하고 또 사표를 쓰게 된 사정을 물어보려고 했다. 그런데 뜻밖에 장관이 사무실을 정리하고 짐을싸면서 대통령을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대통령이 깜짝 놀라

"귀하는 어찌 이렇게 금방 짐을 싸서 나가시는가요?"

하고 말했다. 장관은 더욱 황공하여 허리를 90도로 꺾고 아뢴다.

"황송하오이다. 소인이 감히 욕됨을 자청하는 것이 아니오라, 이미 사표를 내고 수리가 되었지요. 강남의 부자 사람이 장관 이올습니다. 소인이 이제 다시 어떻게 전의 장관을 참칭(僭稱)해서 장관행세를 하겠습니까?"

대통령은 감탄해서 말했다.

"군자로구나 부자여! 장관이로구나 부자여! 부자이면서도 일을 하려 하니 부지런한 일이요, 남의 어려움을 도와 주니 어진 일이요, 비천한 것을 싫어하고 존귀한 것을 사모하니 지혜로운 일이다. 이야말로 진짜 장관이로구나! 그러나 전임장관 사표만 수리하고 임명장을 주지 않으면 송사(訟事)의 꼬투리가 될 수 있다. 내가 너와 약속을 해서 국회의원으로 인준을 받고 임명장을 만들어 미덥게 하되 본인이 마땅히 거기에 서명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먼저 공직자윤리법시행령에 대해 일러주었다.

”공직자윤리법시행령

[일부개정 2003.2.4 대통령령 제17899호]

제1조 (목적) 이 영은 공직자윤리법(이하 "법"이라 한다)에서 위임된 사항과 그 시행에 관하여 필요한 사항을 규정함을 목적으로 한다.

(후략)"

이에 비서실이 탁탁 도장을 찍어 그 소리가 엄고 소리와 마주치매 북두성이 종으로, 삼성(參星)이 횡으로 찍혀졌다. 뒤를 이어 비서실장이 한 번 읽었다.

부자는 한참 멍하니 있다가 말했다.

"장관이라는 게 이뿐입니까? 나는 장관이 신선 같다고 들었는데 정말 이렇다면 너무 재미가 없는걸요. 원하옵건대 무어 이익이 있도록 문서를 바꾸어 주옵소서."

그래서 문서를 다시 작성했다.

“건국 초기에 여러 벼슬아치를 만들었으니 그 중에 장관은 가장 높은 자리 중 하나다. 장관이 되면 땅투기를 해도 자연을 사랑하는 것이 되고 남편에게 선물로 오피스텔을 받으면 로맨틱한 것이 되며 4천만원짜리 골프장 회원권을 사면 검소한 것이 되고 자녀들에게 외국 국적을 취득시키면 글로벌한 것이 되고 남의 논문 표절도 당연한 것이 된다.”

부자는 증서를 중지시키고 혀를 내두르며

"그만 두시오, 그만 두어. 맹랑하구먼. 나를 장차 미친놈으로 만들 작정인가."

하고 머리를 흔들며 가 버렸다.

부자는 다시 장관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Tuesday, March 4, 2008

베를린

뉘른베르크 다음 목적지는 베를린이었습니다. 베를린은 지난 2003년에 석달 정도 삐대며 즐겁게 지냈던 곳이니 만큼 이번 여행에 잠깐이나마 들러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베를린에 도착해서 방을 잡자 마자 그대로 잠이 들어 버렸습니다. 다행히 눈을 뜨니 비교적 이른 시간에 일어났더군요. 샤워를 마치고 창 밖을 바라보니 운하가 보입니다.

각하의 로망...

전날 하룻 밤을 보낸 호텔입니다. 아침에 주는 커피가 꽤 맛있었습니다.


S-Bahn을 타러 가는길에 꽤 재미있는걸 발견했습니다. 아주 틀린건 아닌데 좀 묘한 한글 문구가 적혀있더군요.


베를린에 들른 이유 중 하나는 마침 이날이 토요일이어서 벼룩시장이 열린다는 것 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페르가몬 박물관 옆의 좌판은 쓸만한 책을 건질 수 있는 곳이죠.

반가워! 베를린 성당.

이날은 비가 많이 내렸지만 역시나 부지런한 독일인들은 아침부터 좌판을 깔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페르가몬 박물관 옆의 노점상 중에는 군사서적만 취급하는 양반이 한 분 있습니다. 바로 이 분 입니다.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부지런히 좌판을 펴고 계시더군요. 5년만에 존안(?)을 뵈니 무척이나 반가웠습니다.

이 분의 존함이요? 명함을 받았는데 잃어 버렸습니다.;;;;

이 양반의 특징은 어디에선가 신통하게도 책을 잘 구해온다는 것 입니다. 꽤 재미있는 책들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위의 사진에서 왼쪽 구석에 있는 책은 Werner Haupt의 제 8기갑사단사 인데 이 양반은 이걸 115 유로에 팔고 있습니다. 이 책은 2003년에 이 양반을 처음 만났을 때 부터 좌판에 있던 놈인데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안 팔리고 남아있었습니다. 가격은 그때 그 가격 115유로를 유지하고 있더군요. 아마 한 1~2년 뒤에 가도 안팔리고 남아있을 것 같은 느낌입니다.


그리고 몽케의 베를린전투 회고록이 다시 출간된걸 이날 알게 됐습니다.

좌판에서 책을 산 뒤에는 페르가몬 박물관으로 향했습니다.

놀랍게도 이 어린양은 2003년에 베를린에 석달이나 있으면서 페르가몬 박물관을 비롯한 박물관의 섬(Museumsinsel) 일대의 박물관들을 한번도 방문하지 않았습니다. 석달 내내 다음 주 쯤 가야지 가야지 하다가 그냥 귀국을 하게 됐지요.;;;;;

페르가몬 박물관은 공사중이었습니다. 허헛 참. 2003년에도 공사중이었는데....

갈 때 마다 공사중;;;;

페르가몬 박물관의 상징인 페르가몬 제단. 설명이 필요 없지요.


제 마음에 가장 멋졌던 것은 이쉬타르의 문 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진을 모조리 말아먹었습니다.;;;;;


그리고 이건 모두 수업시간에 지겹도록 많이 보셨겠지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리고 특별전시로 이슬람 미술에 대한 전시가 있었는데 정말 여기서 찍은 사진은 모두 망쳤습니다. 정말 좋은 카메라가 하나 있어야 겠습니다.!


페르가몬 박물관 관람을 마친 다음에는 바로 그 옆에 있는 구박물관(Altes Museum)으로 직행했습니다. 바깥에는 비가 쏟아 지고 있으니 박물관 말고는 갈 곳이 없었거든요.;;;;

야옹!

페리클레스 선생

시민들이여! 마누라를 숨겨라! 대머리 난봉꾼이 나가신다!

이거 아그리파라는군요

구박물관에는 다양한 형식의 그리스 투구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역시 이런 것에는 많은 관심이 가더군요.




이집트 관련 유물 중에도 흥미로운게 많았습니다. 그 중에서 무덤의 주인과 함께 묻힌 부부의 조각상은 묘한 느낌을 주더군요.


댁들은 정말 열심히 사랑하셨나 보오!

구박물관의 관람을 마치니 벌써 오후 5시가 넘어있었습니다. 이 시간으로는 다른 박물관을 볼 수는 없고 또 비까지 계속 내리니 좀 난감하더군요. 일단은 베를린 중앙역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잠시 간식을.... 두툼한 치즈가 최고였습니다.

간식을 먹고 잠시 다음 일정을 점검한 뒤 베를린에서 음악 공부를 하고 있는 친구의 집으로 쳐들어 갔습니다. 숙박료를 아껴 볼 겸... 흐흐흐...

문명의 충돌

줄루전쟁 당시의 이야기 입니다.

(전쟁에서) 포로를 잡지 않는 집단들은 대개 왜 그렇게 하는 지에 대해 명확한 관념이 없다. 많은 경우 포로를 잡지 않는 것은 이들에게 그냥 관습이어서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기에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1879년의 줄루전쟁 당시 한 영국군 장교는 생포한 줄루족 포로들에게 줄루족들은 항상 영국군 포로를 학살했는데 자신이 줄루족 포로를 살려줘야 할 이유가 있는지 물었다. 이 질문에 한 줄루족 포로가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은 우리를 살려줘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당신들의 포로를 죽이는 것은 그게 우리 검둥이들의 관습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신 흰둥이들의 관습은 그게 아니잖습니까?

영국군 장교는 이 포로의 대답을 듣고 줄루족 포로들을 살려줬다.








그러나









다른 대부분의 영국군은 줄루족을 상대로는 (포로대우에 있어) 호혜적인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게 되자 포로를 잡지 않았다.

Lawrence H. Keeley, War Before Civilization : The Myth of the peaceful savage, Oxford University Press, 1996, pp.84

이 어린양은 영국인들의 융통성에 감탄을 금치 못하는 바 입니다.

Sunday, March 2, 2008

농경문화권의 신화에 나타난 양치기와 농부의 지위

슈타인호프님의 글과 거기에 딸린 댓글을 읽고 나니 농경문화에서 농부와 양치기가 차지하는 위치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가 하나 생각났습니다. 바로 인류역사상 가장 오래된 주말연속극(?)인 인안나와 두무지의 결혼 이야기입니다.

우투(Utu)가 말하길 -

나의 동생아. 양치기와 결혼하거라.
왜 너는 (그와 결혼하기를) 꺼리는 것이냐?
두무지가 (만드는) 크림은 좋다, 두무지가 (짜는) 우유는 좋다.
두무지가 만지면 모든 것이 밝게 빛난다.
인안나(Inanna)야, 두무지와 결혼하거라.

풍요의 마노(瑪瑙) 목걸이로 장식한 이나나야
왜 너는 (그와 결혼하기를) 꺼리는 것이냐?
두무지는 그의 풍족한 크림을 너와 함께 나눌 것이다.
왕들의 보호자인 인안나야
왜 너는 (그와 결혼하기를) 꺼리는 것이냐?


인안나가 말하길 -

양치기! 나는 양치기와 결혼하기 싫어요!
양치기의 옷은 조잡해요, 양치기의 양털은 거칠어요.
나는 농부와 결혼하겠어요.
농부는 내 옷을 만들 아마를 키우니까요.
농부는 내 식탁에 오를 보리를 키우니까요.

Diane Wolkstein and Samuel Noah Kramer, Innana : Queen of Heaven and Earth, Harper and Row, 1983, pp.32-33

※ 참고로, 이 어린양은 예쁜 양치기와 결혼하는게 희망입니다.

[妄想大百科事典] 순복음교회(Full Gospel Church)

妄想大百科事典 - 순복음교회(Full Gospel Church)

대한민국 종교업 기독교 부문 시장 점유율 1위를 자랑하는 초대형 종교 체인점. 대한민국의 주요 서비스업 중 유일하게 국제적 경쟁력을 갖춘 종교업 중에서도 점유율 1위를 달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 받고 있다. 현재 순복음교회 가입자는 75만명 이상으로 추산되며 그 규모에서 부동의 세계 1위를 자랑한다. 창업주인 조용기 회장이 지난 2008년 2월 3일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명예회장으로 옮기면서 다시 한번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순복음교회의 성공 요인은 사원들의 발로 뛰는 영업력 외에도 조용기 명예회장의 탁월한 경영능력에 있다. 순복음교회는 지난 1958년 5월 18일 은평구(당시 서대문구)에서 작은 좌판으로 출발하여 창립 60년 만에 세계 제일의 종교업 체인으로 거듭났다. 조용기 회장은 1961년 서대문 로터리에 1호점을 개업한 후 불과 1년도 되지 않아 500명의 가입자를 확보했다. 이후 순복음교회는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 마침내 1973년에 여의도로 본점을 옮기고 이후 여의도 순복음교회로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미국 본토로 진출해 대 성공을 거둔 문선명 회장의 통일그룹에 비견할 바는 아니며 조용기 명예회장은 한국의 다른 교회업 종사자들과 함께 통일그룹에 대한 공격에 앞장선 바 있다. 또한 다른 교회업과 함께 세금탈루 혐의로 도덕성이 도마위에 올라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이다.

순복음교회는 해외시장 개척에 일찍부터 적극적이었다. 순복음교회는 1976년에는 미주 지사를 시작으로 해외 진출을 시작한 이래 독일, 일본 등에 진출, 급격한 성장세를 보였다. 냉전이 종식된 이후 종교업에 제약이 있었던 구 사회주의권 국가에도 진출하여 좋은 반응을 얻었다. 순복음교회는 지난 1991년 러시아에 성공적으로 진출함으로서 그 동안 해외 교민을 상대로 제한적인 영업을 했던 다른 교회들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현재 순복음 교회는 세계 각국에 31개의 지점을 내고 활발한 영업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조용기 회장의 은퇴로 경영 전반에 대한 불안감이 잠시 있었으나 후임 회장으로 임명된 이영훈 회장 체제가 정상궤도에 오르면서 다시 높은 신용등급을 회복했다.

국가에 의한 무장력의 독점 - 미국의 방식

르네상스 이후 유럽의 지방 영주들이 중앙 정부와의 경쟁에서 도태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중 하나로 꼽히는 것이 바로 ‘화약무기’입니다. J. Hale이 War and Society in Renaissance Europe에서 지적한 대로 화약무기의 도입은 막대한 재정 소모를 불러왔고 이것을 견디지 못하는 체제는 근대의 가혹한 경쟁에서 도태될 수 밖에 없었지요. 결국 근대 국가가 폭력을 독점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돈’이었던 셈 입니다.

사족이 길었습니다.;;;;

미국은 유럽의 근대국가와 달리 건국 이전부터 민병대라는 다소 괴이한 무장조직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민병대는 미국이 독립국가가 된 이후에도 헌법에 의거해 계속해서 존재했습니다. 즉 미국은 중앙정부가 무장력을 독점하지 못한 괴이한 근대국가였던 셈 입니다. 유사시가 아니면 국가가 통제할 수 없고 또 유사시에도 그 통제가 완전하지 못한 무장력이 합법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 입니다.(1908년의 민병대법 Militia Act 개정 이전까지 민병대, 즉 주 방위군의 해외파병은 불법이었습니다.) 게다가 그 숫자에서 연방 정규군을 압도하고 있었다는 더 난감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1895년에 미국의 주방위군 병력은 총 115,699명이었는데 이건 당시 연방 정규군의 네 배에 달하는 규모였습니다.

그렇지만 민병대, 즉 주 방위군은 결국 1903년의 민병대법(Militia Act)과 1908년의 민병대법을 통해 연방정부의 강력한 통제하에 들어가게 됩니다. 어떻게? 천하의 미리견이라고 별 다를게 있겠습니까? 바로 ‘돈’ 입니다.

19세기 미국의 군인들은 유럽식의 징병제를 미국이 지향해야 할 이상적인 군사제도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현역 장교들은 유럽, 특히 독일의 징병제에 큰 매력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들이 보기에 민병대는 자원의 낭비에 불과했습니다.(프로이센의 징병제에 대한 미국의 시각 참조) 현역장교들은 1890년대부터 열심히 민병대 해체, 또는 축소와 강력한 연방 예비군 창설을 주장하고 있었고 각 주정부와 민병대 당국자들은 연방 정부의 간섭에 공개적으로 불평을 늘어놓고 있었습니다. 미국 전쟁부(Department of War)는 1880년부터 모든 주의 민병대 훈련에 연방군 장교의 참석과 검열을 의무화 했는데 이것은 주방위군 간부들의 반발을 사고 있었습니다. 많은 주 들이 전쟁부의 요구대로 연방군 편제를 따르기를 거부하고 독자적인 편제로 연대를 편성했습니다.

그렇지만 1890년대 이후로는 주방위군 간부들도 기존의 민병대 체제로는 미래의 전쟁에 대비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기관총과 신형 대포가 등장하고 있었는데 이런 신무기들은 점차 민병대나 주 정부 차원에서는 대량으로 장비하기가 어려워 졌던 것 입니다. 또한 미서전쟁에서 드러났듯 미국은 더 이상 고립된 지역강국이 아니라 세계패권국으로 나가고 있었고 주방위군이 변화를 거부한다면 미래의 전쟁에는 더 이상 쓸모가 없다는 것이 자명해졌습니다.

결국 주방위군은 자신의 역할을 연방군이 지향하는 연방 정부의 예비군과 헌법이 보장한 자유로운 인민의 민병대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야 했습니다. 다행히 미국 연방정부는 군대와 달리 예산상의 제약 문제로 대규모 연방군을 유지하는 것 보다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주방위군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쪽을 선호했습니다.(1890년대에 연방 정규군의 병사 1명을 1년간 유지하는데 1,000달러가 든 반면 주방위군은 1인당 24달러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연방정부와 주정부는 주방위군의 역할에 대해 절충점을 찾게 됩니다. 즉 주방위군을 현대화하는 대신 연방정부의 통제를 강화하는 것 이었습니다.

그 결과 제정된 1903년의 민병대법은 주방위군에 대한 연방정부의 통제 강화를 법적으로 보장하게 됩니다. 새로 개정된 민병대법은 과거의 민병대법이 18세 이상 45세의 모든 남성을 대상으로 한 것을 고쳐 민병대를 상설민병대(Organized Militia, 주방위군)과 18세 이상 45세의 모든 남성을 포괄하는 예비민병대(Reserve Militia)로 나누었습니다. 이 중 상설민병대인 주방위군은 연방정부의 예비군으로 기능하는 대신 연방정부로부터 장비와 예산, 각종 훈련에 대한 지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상설민병대에 대한 장비 및 물자, 예산 지원을 보장한 것은 바로 1903년 민병대법의 수정조항 1661조 였습니다. 단, 1903년의 민병대법은 대통령에 의한 민병대 동원 기간을 9개월로 한정하고 여전히 민병대의 동원을 국내로 한정하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법은 이전까지 연방정부의 지원을 무기에만 한정하던 것에서 지원대상을 수송수단, 기타 장비와 여름 훈련기간 동안 주방위군 대원의 월급을 지급하는 것 까지 확대시켜 연방정부의 영향력을 강화했습니다. 즉 돈으로 코를 꿴 셈입니다. 1903년의 민병대법에 의해 주방위군 대원은 대통령의 소집에 무조건적으로 응해야 했으며 또 연방군 군법의 적용을 받게 되었습니다.

민병대법 통과 이후 연방정부의 지원은 폭증해서 1903년~1910년의 기간 동안 한해 평균 430만 달러에 달했으며 1911~1915년 사이에는 한해 평균 500만 달러가 되었습니다. 1803년부터 1899년까지 연방 정부가 민병대에 지원한 예산이 모두 합쳐 2200만 달러에 불과했으니 물가의 상승을 감안하더라도 1903년 민병대법이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왔는지는 짐작할 수 있을 것 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이었던 것은 수정조항 1661조에 따른 예산 지원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연방군’ 장교였습니다. 연방군의 검열관은 민병대법에 의해 주방위군의 훈련을 참관, 감독하고 예산 지원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습니다. 이제는 주방위군이 연방의 간섭을 운운하며 저항할 수 있는 여지가 없어진 것 입니다.

1908년에는 전쟁부 장관 라이트(Luke E. Wright)에 의해 오늘날의 주방위군국(Bureau of National Guard)의 전신인 민병대과(Division of Militia Affairs)가 창설되었고 초대 국장으로는 해안포병단(Coprs of Coastal Atillery)의 위버(Erasmus M. Weaver) 중령이 임명됩니다. 민병대과는 주방위군에 대한 전쟁부의 통제를 더욱 더 강화하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특히 민병대과는 주방위군의 예산과 조직, 편성, 훈련 뿐 아니라 유사시 동원까지 총괄하는 막강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민병대과는 1910년에는 장성급 직위로 격상되고 참모총장 직할 부서가 됩니다.

한편, 1908년의 민병대법 개정은 주방위군 대원의 동원 기간을 9개월에서 대통령의 직권에 따라 자유롭게 조정할 수 있도록 했으며 추가로 대통령의 명에 따라 해외파병도 가능하도록 개정했습니다. 이로서 미국 헌법에 기초한 자율적 민병대는 사실상 사라지게 됩니다.

결국 국가에 의한 무장력 독점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이었고 미국도 그 점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습니다. 시기와 방식은 다소 달랐지만 지방의 무장력이 중앙과의 경쟁에서 굴복한 결정적인 원인이 돈이라는 점은 미국이나 유럽이나 마찬가지였던 셈 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프랑스로 망명해 루이 12세에게 이탈리아 원정을 부추긴 밀라노 사람 트리불치오(Gian Giacomo Trivulzio)가 남긴 명언이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전쟁에는) 다음의 세가지가 필수적이다. 돈, 더 많은 돈, 그리고 더 더욱 많은 돈 이다.”

참고서적

Jerry Cooper, The Rise of the National Guard : The Evolution of the American Militia 1865-1920, University Press of Nevraska, 1997
Michael D. Doubler, Civilian in Peace, Soldier in War - The Army National Guard : 1636-2000,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3

Saturday, March 1, 2008

뉘른베르크

바드 퇼츠를 답사한 뒤에는 바로 뮌헨에서 저녁 기차를 타고 뉘른베르크로 출발했습니다. ICE를 타니 잠깐 눈 붙일 시간도 없더군요. 그러나 뉘른베르크에 도착하니 뭔가 좀 심심한 느낌이 들어서 다시 근처에 있는 Bamberg로 갔습니다. 그런데 Bamberg에 도착하니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군요. 야밤에 겨울비를 맞기는 뭐 해서 시내를 조금 둘러 보다가 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플랫폼에서 뉘른베르크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독일에서는 올해 겨울이 따뜻해서 난리라지만 겨울은 겨울인지라 춥더군요.. 덜덜덜... 그리고 덤으로 배도 고파서 플랫폼에 있는 자판기에서 과자 하나를 샀습니다.


그런데 좀 짜더군요. 맥주 안주로는 쓸만합니다.

한참을 기다려 뉘른베르크에 도착했는데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이러다가 하루를 통째로 말아먹는건 아닐까 걱정이 되더군요.


다행히도 오전 9시 정도 되니 비가 그치기 시작했습니다.


모두 잘 아시겠지만 뉘른베르크는 레니 리펜슈탈이 제작한 1934년 전당대회의 기록영화로 유명한 도시입니다. 그덕에 뮌헨과 더불어 나치의 소굴이라는 이미지가 강한 도시가 되었지요.
뉘른베르크 여행은 Deutsch님의 블로그에 소개된 The Third Reich in Ruins가 아주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구시가지의 경우 관광명소가 아니면 유럽의 건물에 익숙하지 않은 저 같은 사람에게는 모두 비슷 비슷해 보이는데 이 사이트에는 제 3제국 시절의 사진과 현재의 모습을 비교해 놓아 매우 유용했습니다.

뉘른베르크 중앙역 바로 옆에는 1935년에 지은 우체국 건물이 있습니다. 여전히 우체국으로 쓰이더군요.


구 시가지로 들어가서 뉘른베르크 시 광장, Hauptmarkt 쪽으로 가다 보니 꽤 재미있는 동상이 하나 있었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몇 안되는 독일 화가 중 한 명인 뒤러(Albrecht Dürer)의 동상입니다. 생각해 보니 뉘른베르크는 뒤러의 고향이더군요.;;;


그런데 아직 오전이라 광장으로 가봐야 썰렁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방향을 바꿨습니다. 잠깐 성벽 구경이나 할 참으로 Weisser Turm쪽으로 걸었습니다.


그런데 Weisser Turm은 왜 이런 이름을 가지게 된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얀색이 아니라서....

잠깐 구시가지 밖으로 나가 성벽 구경을 했습니다. 뉘른베르크 구시가지는 전쟁 중에 많은 부분이 파괴되어 복구한 곳이 많다고 하는데 성벽 중에서 복구된 구간과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 구간은 어떤지 궁금하더군요.



다시 구시가지로 돌아와서 광장으로 향했습니다. 독일을 대표하는 중세 후기의 건축물 중 하나인 로렌츠 교회가 있던데 막상 구경을 하니 별다른 감흥이 없었습니다.


시 광장으로 가는 길에는 두 개의 유명한 다리가 있는데 하나는 Museumsbrücke고 하나는 Fleischbrücke입니다. Fleischbrücke는 1934년 전당대회 당시 히틀러가 지나간 다리라고 하더군요.



아래 사진은 Museumsbrücke쪽에서 바라본 Fleischbrücke입니다.


Museumsbrücke를 건너니 좀 괴이한 미술품이 하나 있더군요.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시간을 끌다가 11시를 조금 넘겨서 뉘른베르크 시 광장에 도착했는데 아직 장사를 시작한 좌판이 몇 개 없더군요. 독일식 만만디인가 봅니다.


광장의 전체적인 느낌은 좋았습니다. 근처에 Frauenkirche도 있어서 그림이 좋더군요. 좀 아쉬운 점이라면 구 시가지에서는 쓸만한 서점을 찾지 못 했다는 점 정도... 광장을 돌아다니며 이것 저것 주워먹으며 놀았습니다. 리펜슈탈의 영화에서 봤을때는 광장이 매우 넓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막상 돌아다녀보니 그다지 넓지는 않았습니다. 역시나 영상이 주는 힘이 컸나 봅니다.


Fraunenkriche

아래는 뉘른베르크 시 광장의 명물인 Schöner Brunnen입니다. 화려하긴 한데 울타리를 쳐 놓아 좀 아쉽습니다.


Schöner Brunnen을 지나가는 히총통. Triumph des willens 중에서


광장을 둘러본 뒤에는 바로 시청을 지나 뉘른베르크 성으로 갔습니다. 시청은 전후에 복구하면서 원형과는 다른 모양으로 만들었다기에 조금 구경만 하고 말았습니다.

뉘른베르크 성은 낮은 언덕위에 있어서 가볍게 산책하기 좋은 곳 이었습니다. 하지만 뭐랄까... 특별한 느낌은 없더군요. 아래의 사진은 모두 뉘른베르크 성에서 찍은 사진 입니다.







성에서 뉘른베르크 시가지의 경치를 감상한 다음에는 Deutscher Hof 호텔로 향했습니다. 이 호텔은 히틀러가 뉘른베르크에 올 때 자주 묵던 곳이라고 하지요. 리펜슈탈의 영화에도 이 호텔이 나옵니다.



도이처 호프 호텔로 듭시는 히총통. Triumph des willens 중에서


이 호텔에는 히틀러를 위해 특별히 발코니도 만들었다는데 전쟁 이후에는 없애 버렸습니다. 만약 그 발코니까지 남아 있었다면 아주 재미있는 관광명소가 됐을 것 같은데 조금 아쉽습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이 열렸던 곳으로 가 봤습니다.



그런데 교통비를 좀 아껴보자고 걸어간게 치명적인 실수였습니다. 이 건물을 구경하고 나니 바로 날씨가 나빠져서 비가 오더군요.;;;;;
그 덕분에 Ehrenhalle와 Zeppelinfeld를 구경하지 못하게 됐습니다. 뭐, 나중에 독일에 가면 구경하는 수 밖에 없겠더군요.;;;;;

그러나 달러 약세와 유로 강세가 계속되고 있으니 언제쯤 독일에 다시 갈 지는 모르겠습니다. 누가 제발 유로 좀 폭락시켜 주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