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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1월 14일 일요일

한국전쟁 직전 한국군 및 경찰의 장비현황

원래 주말에는 슐리펜계획에 대한 글을 쓰려고 했는데 요 며칠간 다른일이 있어서 쓰지 못했습니다. 이럴때는 역시 땜빵용으로 뭔가 내용이 있는 표를 하나 올리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재미삼아 한국전쟁 직전 한국군의 장비현황을 정리하고 있는데 이번 것은 한국군 및 경찰의 전반적인 장비현황을 보여주는 자료입니다.

아래의 표는 주한미군사고문단이 1950년 6월 15일 작성한 두번째 반기보고서입니다. 이 보고서는 한국전쟁 직전 한국군의 현황을 잘보여주는 자료인데 특히 전쟁 직전 병력과 장비현황을 파악하는데 있어 유용합니다. 유감스럽게도 부대별로 분류된 것이 아니지만 전체적인 현황은 알 수 있습니다.

표를 누르면 커집니다

아무래도 연말이 다가오다 보니 당분간은 이런 땜빵용 포스팅이 주를 이룰 것 같습니다.

2009년 9월 18일 금요일

손님 접대?

10월항쟁의 여파로 경상북도가 어수선하던 1946년 10월 14일, 경찰 고문관으로 있던 태프트(John L. Taft) 중위는 고령군으로 파견된 서울 경찰대의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서 고령면 경찰서를 방문했습니다. 태프트 중위는 서울 경찰대가 '폭도'들을 소탕하기 위해 부근의 해인사로 출동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해인사로 향하게 됩니다. 그런데 해인사에 도착한 태프트 중위는 기묘한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1. 1946년 10월 14일 1500경에 서명자(본인)는 고령면에 도착해 고령면 경찰서에서 서울에서 파견되어 1946년 10월 6일부터 고령에 주둔해 있던 45명의 경찰관들이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점검을 했다. 경찰서장은 본인에게 서울에서 파견된 경찰들은 모두 50명의 폭도를 체포하기 위해서 폭도들이 숨어있다는 제보가 온 해인사(1129-1403)로 출발했다고 말했다. 서명자(본인)가 1630경 해인사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서는 경찰들과 대한독립촉성전국노동총동맹(大韓獨立促成全國勞動總同盟) 지도자라는 지역 유지들이 기생(customary female entertainer)들을 불러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이들은 주변에 폭도가 있다는 이야기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Report on Koryong Gun(1946. 10. 18)', RG 338, Records of United States Army Force in Korea, Lt.Gen John R. Hodge official file, 1944-48, Entry No. 11070, Box 68, 000.1 Binder 1. etc.

이 어처구니 없는 광경을 목격한 태프트 중위는 즉시 다음날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이 사태의 전말을 조사했습니다. 태프트 중위가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a. 1946년 10월 9일을 즈음하여 고령면 경찰서장이 해당 지역 관리들과 만나 서울에서 파견된 경찰들을 대접하고 ‘위문(comfort)’해야 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이때 보리 세 가마가 경찰에 넘겨졌다.

b. 다음날인 10월 10일, 서울에서 파견된 경찰 지휘관은 지역 관리들에게 또 다른 요구를 했다. 면의 유지 60명이 소집되었으며 이 회의에서 서울 경찰들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50,000원이 필요하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회의에서 즉시 30,000원이 모금 되었으며 추가로 17,000원이 금융조합을 통해 대출되었다. 고령면에 10,000원 (모금)이 할당되었으며 (고령)군의 다른 면들에는 각각 5,000원이 할당되었다.

c. 1946년 10월 12일, 서울에서 파견된 경찰 지휘관은 면장을 만나 고령면이나 고령군 차원에서 자신의 부하들을 위해 기생 40명 정도를 불러 잔치를 열어줄 것을 요구했다. 이 잔치는 1946년 10월 14일에 열리기로 되었으며 소요 비용은 15,000원 이었다.

'Report on Koryong Gun(1946. 10. 18)', RG 338, Records of United States Army Force in Korea, Lt.Gen John R. Hodge official file, 1944-48, Entry No. 11070, Box 68, 000.1 Binder 1. etc.

가뜩이나 국립경찰에 대한 평판이 나쁘던 차에 이런 황당한 일이 벌어졌으니 미군정으로써는 그냥 넘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 직후 경상북도 경찰청은 고령 경찰서장을 해임합니다. 그리고 미군정에서는 다시 진상 조사를 위해 대구의 99군정단(Military Government Group)에 특별조사를 명령합니다. 99군정단은 1946년 12월 10일, 리치먼드 소령(Fred C. Richmond)을 고령군에 파견했습니다.

조사단은 특별 조사를 통해 고령 경찰서장에게 전반적인 책임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조사단이 면담한 증인들은 경찰이 '어떠한 압력도 가하지 않았으며' 단지 고령 경찰서장이 나서서 서울 경찰들을 대접하기 위해 모금할 것을 요청했다고 증언했습니다.

그런데 조사단이 면담한 경상북도 경찰청장은 다음과 같은 묘한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고령 경찰서장이 직위에서 해임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서울 파견대를 위한 기부를 받기 위해 행동한 것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는 무능하고 비협조적이기 때문에 해임되었습니다.

'Report of Special Investigation(1946. 12. 26)', RG 338, Records of United States Army Force in Korea, Lt.Gen John R. Hodge official file, 1944-48, Entry No. 11070, Box 68, 000.1 Binder 1. etc.

공식적인 조사는 서울에서 파견된 경찰 지휘관들에게 책임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2009년 8월 28일 금요일

공산당(;;;;)의 난행(;;;;)

꽤 유명한 이야기죠. 반공물에서 많이 다루어진 여수 경찰서 여경 살해에 대한 어떤 '반공서적'의 묘사입니다.

폭동지휘자는 다시 경찰서 안으로 들어갔다.

또 여자 경찰관은 어떻게 죽였을까?

여수경찰서 보안과 민원담당 정현자(鄭玄子) 순경은 경찰서에 잡혀 온 후 반도들에게 옷을 갈기 갈기 찢겼다.

"하. 고놈의 계집 젖퉁이 좋은데, 죽이기는 아까워...."

반도들은 정순경의 목에 쇠사슬을 매어가지고 역시 시내를 일주하였다. 1시간 후 다시 경찰서로 돌아왔다.

"너 똑똑히 말해. 고서장 하고는 과거 어떠한 관계였어, 엉!"

정순경은 말이 없었다.

"남조선 경찰은 남자녀석들만 지독한 줄 알았더니 계집은 더 독하구먼...."

"시간없다. 처치해 버려!"

이 말이 떠러지자 마자 여경에게 2발의 총탄을 퍼부었다. 여인이 나체로 넘어진 것을 보자 반도들은 욕심이 생기는 모양이다.

"너무 일찍 죽였어."

반도 중 어느 한 녀석이 뒤에서 안타깝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宋孝淳, 『붉은 大虐殺』, 甲子文化社, 1979, 123-124쪽

네. 묘사가 참 저질이죠;;;; 나름대로 경의를 표하고 싶은 상상력입니다. 저자께서 요즘 활동하신다면 인터넷 야설로 이름 좀 날리셨을 듯.

그리고 백두진(白斗鎭)은 국회의장씩이나 한 양반이면서 이런 덜떨어진 책에 추천사를 써 줬습니다. 사실 책 자체의 내용 보다 이 양반의 추천사가 더 한심합니다.

14연대 반란 당시 여경을 나체로 살해했다는 소문은 반란 당시 부터 돌았는데 이 이야기를 포함해서 여순사건 당시 돌았던 괴소문들에 대해서는 별도로 포스팅을 하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갑자문화사는 반공서적을 많이 찍은 출판사인데 이 출판사의 또 다른 걸작(?)으로는 '북괴 여자 암살공작조의 정체'를 파헤친 『모란꽃 소대』가 있습니다. 이건 소재도 그렇거니와 더 한심합니다. 땜빵 포스팅에 적합한 책이라고나 할까요.

2009년 5월 11일 월요일

경찰의 소총에 대한 잡담

지난번에 슈타인호프님이 쓰셨던 ‘한국 군경의 총기 교체(1946~1951), 그리고 최후의 빨치산이 가졌던 총’에 엮어서 씁니다. 지난 번에는 한국전쟁 직전 육군의 소총 부족 문제에 대해 썼는데 이번에는 국립경찰의 총기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보죠.

먼저 아래의 표를 보시겠습니다.


출처에 나와 있는 것 처럼 이 표는 1949년 말 미군사고문단이 작성한 반기보고서(Semi-annual Report)의 부록에 실려있는 도표를 참고로 한 것 입니다. 표를 보면 좀 이상한 것을 느끼실 겁니다. 네, 제주도와 철도경찰의 무장 현황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제가 참고한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사본에는 이상하게도 제주도 이하가 잘려 있어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다시 표의 내용으로 돌아가지요.

빨치산 활동이 활발했던 경상북도의 경우 대량의 38식 소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슈타인호프님의 글에도 나와 있듯 빨치산이 38식 소총을 많이 보유했던 이유 중 하나는 후방에서 빨치산 토벌에 동원된 경찰이 대량의 38식을 보유했던데 있습니다. 전북과 전남의 경우도 경북 보다는 적지만 역시 대량의 38식 소총을 보유하고 있지요.

하지만 의외인 것은 경찰이 보유한 소총 중 가장 많은 숫자를 차지하는 것이 미제 카빈이라는 점 입니다. 빨치산을 다룬 회고록이나 소설 등을 읽다 보면 일본제 소총에 대한 언급이 많아서 후방의 경찰이 사용한 총기는 일제가 많았을 것 같은데 실제 통계를 보면 카빈이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빨치산 토벌에 가장 많이 동원되는 경상도와 전라도의 일제 소총 보유량이 많고 후방이라고 할 수 있는 서울 경찰은 미제 카빈의 보유량이 압도적이라는 점도 역시 의외입니다.

이 밖에 경기도 경찰과 강원도 경찰의 경우 경상도와 전라도 경찰은 전혀 보유하고 있지 않은 50구경 중기관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경기도는 7정, 강원도는 4정을 보유하고 있군요. 다음으로 특이한 점은 전라남도 경찰이 가장 많은 기관단총을 가지고 있다는 점 입니다. 서울과 경기도 보다도 더 많은 기관단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2007년 11월 11일 일요일

한국의 차베스 빠돌이들이 바라는건 이런걸까?

Police shot in rally against Chavez

아주 없는 사실을 지어내지는 않았겠지요. 이 기사에서 다음 구절이 특히 인상 깊습니다.

On Wednesday, hooded Chavez supporters shot at least two anti-Chavez students at a university in a clash that erupted after thousands marched through the capital calling for the vote to be postponed, witnesses and hospital officials said.

차베스가 기를 쓰고 전인민의 무장화를 추진하는 이유가 이것이었을지도 모르겠군요.

요즘도 몇몇 대학에는 신자유주의의 대안으로 차베스를 배우자는 뻘짓을 하던데 이 친구들이 제발 보수적인 언론들에도 신경을 썼으면 합니다. 귀가 너무 한쪽으로만 솔깃하면 좋지 않지요.

2006년 12월 19일 화요일

폴란드 침공에 참가한 Einsatzgruppe 주요 지휘관들

독일의 Einsatzgruppen은 소련에서 깽판친 것이 꽤 유명하지만 처음 이들의 깽판에 피박을 본 곳은 폴란드 였습니다.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할 때는 Einsatzgruppe I 부터 z.b.V 까지 6개 Gruppe가 투입됐다고 합니다. Alexander B. Rossino의 Hitler strikes Poland에는 폴란드전에 참가한 Einsatzgruppen 지휘관들의 약력을 잘 정리해 놨는데 이게 꽤 흥미롭더군요. Rossino가 정리한 주요 지휘관들의 약력은 다음과 같습니다.

Einsatzgruppe I : SS-Brigadeführer Bruno Streckenbach

이 양반은 1902년 2월 7일 생으로 부친은 함부르크의 세관 공무원이었다고 합니다. 1919년 김나지움에 입학했지만 공부가 별로 재미 없었는지 자퇴하고 Freikorps에 자원해 함부르크의 사회주의자들을 열심히 때려잡았습니다. 모범적인 반공청년이었군요. Streckenbach가 소속된 Freikorps는 곧 정규군으로 흡수가 됐는데 군에서 제대한 뒤 이런 저런 자영업을 하다가 1930년 나치당에 가입했습니다. 1년 남짓 돌격대에 있다가 1931년 친위대로 옮겼고 1933년에는 SD에 들어갔습니다. 여기서 또다시 반공의 투사가 되어 이름을 날렸다고 하는 군요. 1939년에 Brigadeführer로 진급했습니다.

Einsatzkommando 1/I : SS-Sturmbahnführer Dr Ludwig Hahn

이 양반은 1908년 1월 23일 생으로 부친은 농부였습니다. 1930년 나치당에 가입해 1년 정도 돌격대원을 하다가 1931년 이 짓을 그만두고 대학에 진학했습니다. 1933년에는 다시 친위대에 가입했고 1935년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같은해 6월 SD로 전속됐고 1937년에는 바이마르의 게슈타포 지휘관이 됩니다.

Einsatzkommando 2/I : SS- Sturmbahnführer Dr Bruno Müller

이 양반은 1905년 9월 13일 생으로 알자스 태생입니다. 부모가 골수 독일 민족주의자 인지라 1차대전이 끝나고 프랑스가 알자스를 다시 점령하자 독일로 이주합니다. 1925년에 착실하게 김나지움을 마친 뒤 취직을 했는데 자리가 잡힐만 하니 대공황.... 결국 이 양반 대학에 진학합니다. 올덴부그크 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 취득. 1932년 친위대에 입대한 뒤 역시 SD로 전출됩니다.

Einsatzkommando 3/I : SS- Sturmbahnführer Dr Alfred Hasselberg

1908년 8월 30일생. 전형적인 독일 중산층 가정 출신으로 김나지움을 졸업한 뒤 군에 지원하지만 경쟁률이 높아 탈락. 1927년 대학에 진학해서 1935년 5월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박사과정 진학 이전에 지방법원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다는군요. 1935년 돌격대에 가입했다가 몇 달 뒤 다시 친위대에 자원합니다. 1936년 잠시 베를린의 게슈타포 본부에서 근무하다가 1937년부터 폼메른의 슈나이데뮐(Schneidemühl) 게슈타포 책임자로 근무합니다.

Einsatzkommando 4/I : SS- Obersturmbahnführer Dr Karl Brunner

1900년 7월 26일 생. 1917년 육군에 자원해 2급 철십자훈장을 수여 받았습니다. 1919년 제대한 뒤 다시 고등학교에 복학해서 학업을 하려는 찰나... 우익 학생들과 Freikorps에 가입해 빨갱이 사냥을 시작합니다. 역시 반공청년이로군요. 1923년까지 이렇게 자유의 투사를 하다가 대학에 진학합니다. 1927년에 학위를 취득한 뒤 1933년까지는 비교적 조용하게 보낸것으로 돼 있군요. 1933년 돌격대에 가입했다가 다시 1934년 SS로 옮겼고 여기서 SD 차출돼 1937년에는 뮌헨의 게슈타포 책임자가 됩니다. 1938년 Obersturmbahnführer로 진급했습니다.


Einsatzgruppe II : SS- Obersturmbahnführer Dr Emanuel Schaefer

1900년 4월 20일 생으로 실레지엔이 고향입니다. 부친이 작은 호텔을 운영해서 집안은 비교적 넉넉했던 모양입니다. 재수없게 전쟁 막판인 1918년에 징집됐지만 여기서 다시 인생역전으로 전투 한번 안하고 동원해제가 돼서 귀향합니다. 그런데 인생만사 새옹지마라 집에 돌아와보니 고향은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이 국경을 넘어들어와 깽판을 치는지라 살벌해 졌습니다. 결국 이 양반도 우익 민병대에 가입해 폴란드인들과 싸우게 됩니다.
1926년 브레슬라우 대학에서 법학 석사를 받은 뒤 경찰에 취직합니다. 1933년 나치당에 가입하는데 이미 학위도 있는데다가 경찰 경력이 만만찮아 게슈타포에서 승승장구 합니다. 1936년 SD로 전출됐습니다.

Einsatzkommando 1/ II : SS- Sturmbahnführer Otto Sens

1898년 4월 14일 데사우(Dessau)에서 태어났습니다. 전쟁 중에는 해군에서 복무했으며 제대 뒤 Freikorps에서 활동했습니다. 1919년부터 실레지엔에서 폴란드인들과 피박터지게 싸웁니다. 1931년 SS에 입대했고 1934년에 SD로 전출됩니다.

Einsatzkommando 2/ II : SS- Sturmbahnführer Karl-Heinz Rux

1907년 9월 3일 서 프로이센 브롬버그 태생. 1936년 SS에 입대했는데 1938년에 무려 세번 진급해 순식간에 Sturmbahnführer가 됐습니다.

Einsatzgruppe III : SS- Obersturmbahnführer Dr Hans Fischer

1906년 8월 21일생. 1926년 예나 대학에 입학해서 1933년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1932년 친위대에 입대했으며 에어푸르트와 뮌스터의 게슈타포 책임자를 지냈습니다. 1938년 Obersturmbahnführer로 진급합니다.

Einsatzkommando 1/ III : SS-Hauptsturmführer Dr Wilhelm Scharpwinkel

1904년 7월 4일 반네-아이켈(Wanne-Eickel)에서 태어났습니다. 1933년 돌격대에 가입했습니다. 특이하게도 보험 조사원 경력이 있습니다. 3년간 했군요. 역시 게슈타포에서 능력을 인정받았습니다.

Einsatzkommando 2/ III : SS-Hauptsturmführer Dr Fritz Liphardt

1905년 5월 3일 슈테틴에서 판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924년 육군에 입대했으나 1926년 장교로 진급하지 못하고 전역됩니다. 결국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려 했는데 10학기가 넘도록 졸업을 못 했다는군요. 머리는 약간 별로였나 봅니다. 1933년 돌격대에 가입했다가 1936년 친위대로 옮깁니다. 차를 갈아타는게 늦은거로 봐서는 확실히 두뇌회전이 별로인 모양입니다. 어쨌건 박사학위는 취득했는데 언제인지는 안나오는군요. 1938년 베를린의 SD 본부로 전출됐다가 여기서 전쟁을 맞습니다.


Einsatzgruppe IV : SS-Brigadeführer Dr Lothar Beutel

이 아저씨는 1902년 5월 2일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습니다. 나이가 어려서 전쟁에는 참전하지 못했지만 싹수가 노랬는지 17세부터 우익 단체에서 활동했습니다. 1921년 군에 입대해서 1923년에 제대했습니다. 대학 전공이 재미있는게 미학, 그리고 약학이라고 합니다. 박사학위를 약학으로 받은 유일한 Einsatzgruppe 지휘관입니다. 1931년 돌격대에 입대했으나 바로 그해 친위대로 옮깁니다. 1932년 SD로 전출됐고 1939년 4월 Brigadeführer로 진급합니다.

Einsatzkommando 1/IV : SS- Sturmbahnführer Helmut Bischoff

1908년 3월 1일 생으로 아버지는 정육점을 했던 것으로 돼 있습니다. 1930년 돌격대에 입대한 뒤 1935년 친위대로 옮겼고 1936년에는 SD로 전출됐습니다.

Einsatzkommando 2/IV : SS- Sturmbahnführer Dr Walter Hammer

1907sus 6월 30일 하겐 출생. 부친은 판사로 전형적인 중산층 집안 출신입니다. 1931년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1933년 주법원에서 근무하던 중 돌격대에 가입합니다. 1935년에는 게슈타포로 옮겼고 2년간 베를린 본부에서 근무한 뒤 1937년 에어푸르트의 게슈타포 책임자로 임명됩니다.


Einsatzgruppe V : SS-Standarteführer Ernst Paul Damzog

1882년 10월 30일 생으로 폴란드전에 참가한 Einsatzgruppe 지휘관 중 최고령자입니다. 1912년 경찰에 들어갔으며 1915년에는 육군에 입대해 헌병이 됩니다. 1933년 SS에 지원한 뒤 장기간의 경찰 경력을 인정받아 1934년 SD로 전출됩니다.

Einsatzkommando 1/V : SS- Sturmbahnführer Dr Heinz Graefe

1908년 7월 15일 생으로 아버지는 1914년 전사했습니다. 1928년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진학해 법학을 전공했습니다. 1932년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작센의 법률사무소에 취직했습니다. 1937년 박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1933년에 돌격대에 들어갔다가 같은해 말 친위대로 옮겼고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는 베를린에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Einsatzkommando 2/V : SS- Sturmbahnführer Dr Robert Schefe

1909년 8월 23일 생으로 폴란드전에 참가한 주요 Einsatzgruppe 지휘관 중 최연소 였습니다. 1934년 친위대에 입대해 1935년 SD로 전출됐습니다. 이 사람의 경력이 흥미로운 점은 친위대에 들어 온 뒤 법학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는 점 입니다. 1936년 법학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베를린의 게슈타포 본부에서 근무했습니다.

Einsatzgruppe z.b.V : SS-Obergruppenführer Udo von Woyrsch

주요 지휘관 중 유일한 귀족 출신으로 1895년 7월 24일 생입니다. 1차 대전당시 기병장교로 참전했으며 전후 Freikorps에 가입해 활동했습니다 1930년 친위대에 입대했는데 장교에다가 귀족출신이어서 그런지 진급이 빨랐습니다. 히믈러는 실레지아의 친위대를 책임지게 하기 위해서 직접 von Woyrsch를 직접 관리했던 모양입니다. 지역 친위대를 관리하다가 1936년 베를린으로 전출돼 히믈러의 참모진에 들어갑니다. 1938년에는 히믈러의 배려로 경찰 간부 교육과정을 이수합니다.

이 살인 전문가들을 보시면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중산층 이상에 고등 교육을 이수한 사회 엘리트층이라는 점 입니다. 이런 걸 보면 배운자들이 무서워 집니다.
하여간 이렇게 깡패집단인 친위대에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이 많이 가담한 것을 1920년대 후반 독일 지식인 사회의 급속한 보수화가 원인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습니다.

뭐, 상황이 다르긴 하지만 대한민국도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 그런지 지식인계층의 보수화가 눈에 보이는 듯 합니다. 이제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히총통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