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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2월 7일 월요일

형님 노릇

1965년 7월 22일, 백악관에서는 베트남전에 대한 개입 확대를 둘러싼 회의가 열렸습니다. 이미 베트남은 계륵 같은 꼴이 되어 있었고 정치인들의 골머리를 썩게 하고 있었습니다. 존슨 대통령은 이 회의에서 합리적인 군사적 대안을 찾고자 했는데 군에서는 강경한 대응을 제안합니다.

이 회의록에는 강대국의 딜레마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 하나 있습니다.

존슨 : 맥나마라 장관에게 이러한(베트남에 대한) 문제들과 이에 대한 방책을 상의하기 위해 여러분을 소집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각 군 참모총장들에게서 가능한 방안에 대해 들어본 뒤  군사적인 관점에서 방안을 추천해 줬으면 합니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방안은 이렇습니다.  첫 번째는 베트남을 포기하는 것인데 손실은 가장 적을 겁니다. 두 번째는 현재의 병력을 유지하면서 서서히 패배하는 겁니다. 세 번째는 100,000명을 추가 파병하는 것인데 이 정도로는 병력이 부족할 수도 있고 내년에 추가 파병을 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세 번째 방안의 문제점은 사태가 더 격화되고 사상자가 늘어나며 승리할 수 없는 장기전이 될 위험이 있다는 것 입니다. 먼저 여러분이 현재 상황에 대해 어떻게 보고 있는지 이야기 한 뒤 우리가 어떤 방안을 취해야 할 지 말 해 보십시오.

맥도날드(David. L. McDonald) 해군참모총장 : 해병대를 파병하면 상황이 호전될 것 입니다. 저는 우리가 빠져나올 수 없을 정도로 개입해야 한다는 맥나마라 장관의 견해에 동의합니다. 만약 우리가 현재 방식대로 계속한다면 적에게 느리지만 확실한 승리를 안겨줄 뿐 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더 많은 병력을 투입한다면 상황을 역전시키고 우리가 앞으로 뭘 필요로 하는지 알 수 있게 해 줄 겁니다. 저는 우리가 진작부터 이렇게 하길 바랬습니다.

존슨 : 하지만 제독도 100,000명으로 충분할 것 인지는 모르지 않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그리고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데 제독은 왜 우리가 (개입을) 멈춰서는 안되고 이 방안을 택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 것입니까?

맥도날드 : 조만간 적을 협상 무대로 끌어낼 수 있을 겁니다.

존슨 : 하지만 우리가 100,000명을 증파하더라도 적이 비슷한 규모의 병력을 투입하지는 않을 텐데 그렇게 되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맥도날드 : 폭격을 강화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되겠지요...

존슨 : 우리가 이 방안을 취해야 합니까?

맥도날드 : 예. 각하. 제가 대안을 고려해 보면 그렇습니다. 지금 당장 철군하거나 병력을 증파해야 합니다.

존슨 : 그게 전부입니까?

맥도날드 : 예, 저는 우리 동맹국들이 미국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존슨 : 현재 우리를 실질적으로 도와줄 수 있는 동맹국은 많지 않습니다.

맥도날드 : 태국을 예로 들 수 있겠군요. 만약 우리가 베트남에서 빠져나온다면 전 세계가 미국의 공약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겐 달리 선택할 길이 없습니다.

Larry Berman, Planning a Tragedy : The Americanization of the War in Vietnam(W.W.Norton, 1982), pp.112~113
맥도날드 제독의 말 처럼 강대국이 되면 설사 계륵이라 하더라도 그냥 뱉고 나올수가 없게 됩니다. 언제나 형님 노릇은 고달프지요.

2009년 1월 19일 월요일

한국전쟁 기간 중 북한지역에서 발생한 미군에 의한 민간인 살해

예전에 신천학살에 대한 북한의 공식적인 역사서술이 가지고 있는 허구성에 대해서 글을 한 편 쓴 일이 있습니다. 원래 다른 용도로 쓴 글을 블로그에 올리기 위해서 양을 크게 줄였기 때문에 황해도의 우익단체 봉기나 북한측의 주장에 대해서 상세히 쓰지 못한 것이 조금 아쉽군요. 나중에 신천학살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하게 글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신천학살에 대한 약간의 이야기

그리고 역시 그 글에 넣지 못한 이야기가 하나 더 있는데 북한 점령기간 중 미군에 의해 자행된 구체적인 민간인 살해에 대한 내용입니다. 물론 북한의 억지 주장처럼 미군이 수 만명의 대량학살을 자행한 것은 아니지만 민간인에 대한 소규모의 공격은 분명히 존재했으며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는 문제입니다.
북한은 1951년부터 본격적으로 UN을 통해 미군의 전쟁 범죄를 비난하고 국제 사회의 여론을 유리하게 돌리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물론 북한의 이런 선전 중에는 신천학살과 같이 터무니 없는 것도 있지만 소규모의 민간인 살해는 미국 측 기록을 통해서도 입증되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미 육군 제187공수연대전투단과 미 해병대 제1해병사단, 미육군 10군단 헌병대의 민간인 살해 사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사례는 1950년 11월 평양 인근에서 187공수연대전투단 D중대 소속의 모리슨(Aubrey L. Morrison) 이병과 손더스(Arnold A. Saunders) 일병의 주도로 일어난 민간인 살해사건에 대한 개요입니다.

(전략)

2. 개요 : (CID 보고서 51-O-78-A의 색인 A를 참고). 1950년 11월 3일 오전 178공수연대 전투단 소속의 모리슨 이병과 7명의 사병은 북한 평양 근교의 주둔지를 출발해 한 마을에 도착했으며 이곳에서 북한군 군복을 입고 있는 민간인을 발견했다. 모리슨은 그 사람이 북한인민군의 탈영병이라고 진술했다. 그는 무장을 하고 있지 않았다. 손더스 일병이 그에게 45구경 권총 두 발을 발사했으며 모리슨 이병은 총검으로 찔렀다. 그 민간인은 이때 입은 상처로 사망했다.

같은 날 오후 모리슨과 7명의 사병(이 중 두 명은 오전의 수색조에도 속해있었다)과 함께 다시 공산군을 찾는다는 구실로 주변 마을들을 돌아 보았다. 이 과정에서 모리슨은 여섯 명의 한국 민간인을 총으로 쏜 뒤 총검으로 찔렀다. 다른 사병 두 명도 각각 한국 민간인 두명을 쐈으며 그 뒤 모리슨이 총에 맞은 민간인들을 찔렀다. 이들은 수색은 사전 허가를 받지 않았다. 모두 남성인 민간인 아홉명이 살해되었다.

2. Facts : (See Tab “A”, CID Report 51-O-78-A). On the morning of 3 Nov 50 a Pvt Aubrey L. Morrison and seven other EM of the 178th Abn RCT left their area near Pyongyang, North Korea, and proceeded to a Village where they found a civilian who had among his effects a North Korean uniform. The EM were told that the civilian was a deserter from NKPA. He was not armed. Pfc Saunders shot the civilian twice a caliber .45 postol and Morrison bayoneted him. The civilian died from such wounds.

On the afternoon of the same day Morrison and seven EM(two of whom had been present in the morning group) again went to other outlying villages, assertedly in search of communists. During this trip Morrison shot and then bayoneted six Korean Civilians. Two other EM each shot Korean civilians and Morrison proceeded to bayonet them also. None of the soldiers were on authorized patrol. Nine civilians, all men, were killed.

‘Request for confinement and mental evaluation’, 29 Jan 51, RG 338, Eighth U. S. Army, Box 740, Security-Classified General Correspondence

다음은 미 해병대와 미 10군단 헌병대의 사례입니다.

(전략)

2. 1950년 11월 3일, 미 해병대를 태우고 원산을 출발한 기차가 덕원(德源)에 정차했을 때 해병대원 중 일부가 전화선 작업을 하던 철도 신호원들을 아무 이유 없이 총으로 쐈다고 한다. 철도원 한 명이 허벅지에 총을 맞아 현재 치료 중이다.

3. 1950년 11월 10일, 10군단 헌병대의 차량과 사병(이 기차에 장교는 타고 있지 않았다)을 태우고 10시 30분에 원산을 출발한 기차에서 탑승한 헌병대원들에 의해 다음과 같이 타당한 이유도 없고 불필요한 사건이 발생했다고 한다.

a. 13시 25분 경, 용훈 근처의 야산에서 지게를 지고 산을 오르던 한국인이 한 명이 총을 맞았고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b. 용훈 근교에서 14세 정도의 한국 소년 한 명이 기차에 손을 흔들다가 총을 맞았다. 그는 양 손을 모두 치켜들고 있었는데 사망한 것으로 추정 될 때 까지 사격이 계속되었으며 이 사건은 13시 30분경에 일어났다.

c. 16시경 야산에 서서 기차가 지나가는 것을 구경하던 한국 남성이 사격을 받았으며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d. 밭에서 일하던 7명의 한국 여성과 어린이, 그리고 노인이 사격을 받았다. 모두가 그 자리에 쓰러졌으며 그대로 있었다. 이 총격의 결과는 알 수 없다. 장소는 알 수 없으며 사건 발생 시각은 16시 05분경이다.

e. 의류를 짊어 지고 가던 한 한국 남성이 사격을 받았고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장소는 알 수 없으며 사건 발생 시각은 16시 30분 경이다.

4. 한국군 수송장교와 영어로 말하고 쓰고 읽는 것을 유창하게 하는 그의 부관이 중간에 기차를 세우고 미군들에게 민간인에게 총을 쏘는 것을 멈추고 그러기 싫거든 민간인들을 쏘지 말고 차라리 자신들을 쏘라고 항의했다. 그러나 미군들은 한국군이 상관할 일이 아니며 만약 그들이 공산당이거나 또는 공산당에 동조하는 것이라면 북쪽으로 가버리던지 아니면 ‘자신들의 전우를 죽인 자들과’ 똑같이 당해 보라고 대답했다. 기차에 타고 있던 다른 한국군 장교들은 아무것도 도울 수가 없었으며 부끄러움과 불쾌감 때문에 고개를 숙였다고 한다. 이 기차에는 부사관 한 명이 인솔자로 동승하고 있었으나 사병들의 행동을 막기 위해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2. On 3 Nov 50 a train out of Wonsan bearing US Marines stopped at Dukwon and some of the marines, without any provocation being noted, allegedly began firing weapons at railroad signal men who were working on the telephone lines. One worker was hit in a thigh and is presently hospitalized.

3. On 10 Nov 50 a train out of Wonsan, leaving there at 1030 hours, and bearing vehicles and enlisted men(no officer accompanying them) of X Corps Military Police unit had the following incidents allegedly performed by members of this group, all of which apparently were unprovoked and uncalled for :

a. A Korean man walking up a mountain side near Yonghoon, carrying an “A” frame, was shot and apparently killed, at about 1325 hours.

b. A Korean boy, age about 14 years, near Yonghoon, waving his hand at the train, was fired upon. He raised both hands above his head, firing continued till he was apparently killed, at about 1330 hours.

c. A Korean man standing on a small hill watching the train pass was fired upon and apparently killed, location not given, at about 1600 hours.

d. Sev(en) Korean women, children a(nd) old men working in a field were fired upon. All fell flat and remained that way. Effect of fire not known. Location not given, at about 1605 hours.

e. A Korean man carrying a bundle of clothing on his back was fired upon and apparently killed, location not given, at about 1630 hours.

4. The KA Transportation Officer and his aide, who is a well educated person fluent in speaking, reading and writing the English language, stopped the train at one point and remonstrated with the men, asking them to cease these sort of action, or to shoot them instead of these people. The reply was, in effect, that it was none of their(the Korean’s) business and that if they were, or liked, Commies they should go north or get the same thing thing they (the MP’s) were giving people “who had killed their buddies”. Other Korean officers on the train were helpless to do anything and hid their faces in shame and disgust. The Military Police on this train were apparently in charge of a non-commisioned officer, who did nothing to stop their activities.

‘Malicious Use of Weapons’, 15 Nov 1950, RG 338, KMAG Box 39, AG 333.5 G-1

먼저 첫 번째 문서에 나타난 살해 사례는 수색 작전 도중에 발생한 사례라는 점에서 비정규전 상황에서 발생하는 다른 사례들과 유사점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런 유형의 민간인 살해는 17~19세기 유럽에서 게릴라전에 직면한 유럽군대에서도 일어 났었고 2차대전 당시의 게릴라전 상황에서도 수없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문서에서 나타난 10군단 헌병대의 경우는 여성과 어린이에 대한 공격이라는 점에서 정도가 더 심각합니다. 특히 앞의 문건에 기록된 사건은 전투 작전(비록 허가는 받지 않았다 하더라도) 중 전투 지역에서 벌어진 일인 반면 두 번째 문서에 나타난 민간인 공격은 전투상황이 아닌 상태에서 명백히 민간인 인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상황에서 벌어졌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듯 10군단 헌병대의 사례에서는 인종적 멸시감이 주된 동인이라는 점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가지 특기할 만한 것은 ‘북한인’에 대한 ‘적’으로서의 적대감입니다. 민간인 살해에 항의하는 한국군 장교에게 북한인들을 ‘전우를 죽인 자들’이라는 표현으로 지칭한 것은 북진 이후 알려진 미군 포로 학살사건의 영향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전쟁 중 적국의 민간인에 대해서 적대감을 표출하는 하는 경우 또한 기존의 전쟁에서 많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한국전쟁의 경우에는 적대감에 인종적 멸시가 함께 작용했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예전에 신천학살에 대한 글을 쓰자 이것이 인터넷 게시판의 좌우투쟁(!)에 인용된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도 상당히 보수적이라 북한의 주장에 휘둘리는 자칭 진보들을 볼 때 마다 한심하다는 생각을 하긴 합니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편’의 손이 항상 깨끗한 것은 아니지요. 인터넷에서 우연히 그 논쟁을 구경한 뒤 제 블로그가 지나치게 우편향(?) 되어가는 것은 아닌가 싶어서 균형(?)을 잡아볼 생각으로 이 글을 쓰게 됐습니다.

한국전쟁에 대해서 아직까지도 감정에만 사로잡힌 논쟁들이 오가는 것을 보면 전쟁이라는 사건에 대한 우리 사회의 성찰은 아직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아직까지 북한이라는 찝찝한 국가가 남아있다는 점이 원인으로 작용할 수 도 있겠지만 어쨌든 휴전 이후 60년이 다 되어 가는 시점에서도 편을 갈라 소모적인 감정싸움만 벌인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지요.

2007년 11월 25일 일요일

지름신 앞에 장사없다 - 레이건 행정부 시기 국방예산 증액에 따른 문제점

에. 오늘도 날림 번역으로 때우게 됐습니다.;;;;

요상하게도 대한민국의 우국충정에 넘치는 많은 분들께서는 신무기만 잔뜩 들여오면 군사력이 알아서 강해지고 나라가 강해진다는 순진한(?)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생각은 승하하신 미리견 황제 레이건 폐하께서도 가지고 계시던 것인데 잘 아시다시피 미군은 레이건 폐하의 이런 관심에 힘입어 1980년대에 신무기를 잔뜩 사들였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게 좋기만 했을까요?

합참은 국방예산의 증액에 대해 복합적인 반응을 보였다. 와인버거는 군대가 요구하는 만큼의 예산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건의했다. 콜린 파월은 이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이것은 마치 2월의 크리스마스와 같았고 네트를 치우고 테니스를 치는 것 같았다. 합참은 즉시 필요한 리스트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요구한 내역은 국방예산을 대략 9% 정도 증가시켰다."
역사상 처음으로 합참은 국회나 행정부의 반대를 받지 않고 예산을 늘려달라고 요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군은 베트남전 직후의 반군정서 때문에 교체하거나 개량할 수 없어서 노후화된 장비를 대규모로 교차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군은 마구잡이로 '질러대기' 시작했다. 레이건 행정부의 첫 2년 동안 군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런 축복에도 불구하고 군의 일각에서는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예를 들어 존스 장군은 이런 대규모 증강이 일시적인 것에 그치고 말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비록 적은 금액이라도 장기적이고 꾸준한 예산 증액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존스 장군은 와인버거에 의해 예산이 통제 불능으로 폭증하는 것에 반대해 '실질적인' 국방예산 증가를 주장했다.
신형 장비, 그리고 특히 값비싼 장비를 대규모로 사들인 레이건 행정부 초기의 군사력 증강은 사실 명확한 개념이 없는 상태로 진행되었으며 미국의 전체적인 군사력 구조나 전쟁 준비상태에 끼칠 영향에 대해서는 별다른 고려도 없었다.

결국 존스 장군의 우려는 얼마가지 않아 현실로 구체화 되었다. 1983년 회계연도에 국방예산은 물가상승률 보다 25% 이상 증가했다. 그리고 불과 5년만에 국방부의 예산은 두배로 폭증했다. 그러나 예산의 대부분이 신무기를 구매하는데 소비되었기 때문에 군대는 갈수록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1984년에는 "레이건 행정부가 6320억 달러를 군사력 증강에 쏟아부었지만 전투에 즉각 투입할 수 있는 준비가 된 육군 부대는 1980년의 25% 수준으로 감소했다." 이런 문제는 육군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유럽전구 부사령관인 로슨(Richard L. Lawson) 장군은 1985년 의회에서 “대대급 야전기동과 비행훈련시간, 군함의 기동훈련은 불충분한 수준으로 감소했습니다. (중략) 일부 탄약, 특히 공대공미사일과 해군의 탄약, 특수 탄약의 재고량은 규정량 이하로 감소했으며 이 때문에 전쟁 수행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라고 밝혔다.

1985년에 이르자 국방부가 안게된 예산 문제가 매우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누구라도 알 게 되었다. 존스 장군과 합참의 여러 관계자들이 경고했던 것들이 현실화 된 것이었다. 합참과 군부의 요구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였던 넌(Sam Nunn) 상원의원은 와인버거에 대해 분노를 터뜨렸다. 그는 "우리는 국방부가 예산 문제를 현실적으로 대응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의회가 기존에 승인한 신무기 도입계획에 소요될 1500억에서 2000억 달러에 달하는 예산을 충원하기에는 자금이 부족하며 신무기를 도입하기에는 예산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게다가 의회와 대립하는 와인버거의 행태는 국방력 강화에 대해 국회와 대중들이 공감대를 가지고 있던 레이건 행정부 초기에는 그럭 저럭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시간이 점차 흐르면서 국회의원들은 타협을 거부하는 와인버거에 대해 역겨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결국 레이건이나 와인버거가 아니라 의회가 나서서 국방부의 예산을 억제하기 시작했다.

1984년에 접어들면서 조치가 취해지기 시작했다. 미국 정부의 재정은 군사력 유지와 이미발주되었지만 아직 지불은 되지 않는 신무기 도입을 동시에 추진할 여유가 없었다. 심지어 공화당 소속의 상원의원들 마저도 우려를 나타낼 지경이었다. 공화당측은 '레이건 행정부의 첫 1년에 국방부가 얻어낸 연간 9%의 국방예산 증가율보다 훨씬 낮은 3~4% 수준의 예산 증액을 이끌어 내는 것도' 엄청난 행운이 따라야 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와인버거는 국방예산을 늘리는데 있어서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가 7년간 장관직을 수행하고 퇴임했을 때 그는 '1982년 회계연도에 1807억 달러였던 국방예산을 1987년 회계연도에는 2740억 달러로'늘렸다. 와인버거는 아슬아슬한 시기에 퇴임을 한 덕분에 그가 마구잡이로 "질러댄" 결과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있었다.

예산 문제를 손보는 것은 1987년에 새로 국방부장관이 된 프랭크 칼루치(Frank Carlucci)의 임무가 되었다. 칼루치는 의회가 국방예산에 심각한 우려를 나타낸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고 자신은 와인버거와 같은 대립적인 태도는 버려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와인버거와 달리 신무기의 생산과 도입 시기를 늦추면서 예산을 절감하려 했고 국방예산 증가율을 낮추려 했다. 실제로, 칼루치가 1988년 2월 상원에 출두했을 때 그는 국방예산 증가율을 2%로 낮췄다고 의원들에게 설명했다. 와인버거가 3320억 달러의 예산을 요구한데 반해 칼루치는 2990억 달러를 받아들였다. 결과적으로 상원은 3000억 달러의 예산을 승인했다.

레이건 행정부의 군비증강 노력이 끝나갈 무렵, 국방부는 대통령이 약간 도움이 된 정도라고 생각했다. 합참은 MX 미사일, B-1 폭격기, 트라이던트 미사일, 그리고 새 항공모함을 도입할 수 있게 된 것에 만족했다. 1985년 10월 1일, 베시(John W. Vessey Jr.) 장군을 대신해서 합참의장에 취임한 크로우(William Crowe Jr.) 제독은 레이건 행정부 초기에 무분별하게 집행된 예산으로 인한 문제를 고스란히 떠안았으며 비록 행정부 초기 예산의 일부가 적절하게 사용되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군은 예산 사용에 있어 현명해야 했다고 비판했다.

"레이건 행정부 초기 후하게 책정된 국방예산은 국방부 내에서 활발한 논의를 불러일으켰다. 이때는 그야말로 ‘젖과 꿀이 흐르던’ 시기였다. 국방부가 현명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 보다 더 많은 예산이 떨어졌다. 문제는 이것이었다; 과연 우리가 5년 뒤에는 이 정도의 예산을 받을 수 없을지언정 예산이 있을 때 일단은 현명하지 않다고 생각되더라도 써야 하는가? 그리고는 결정이 이뤄졌다. - 그래. 지르자! 예산이 들어오는 동안은 수중에 있는 모든 돈을 써 버리자! 그래서 국방부는 예산을 써 버렸고 예산이 모두 현명하게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결국 국방부는 5년이 지난 뒤 더 이상은 많은 예산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고 돈이 있을 때 쓰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은 판단이었다. 그렇지만 지금 그 당시의 판단에 대해 비판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했듯 체계적인 군생활을 거친 군인들은 예산이 증액되던 초기에 이미 레이건 행정부가 군대를 심각한 문제에 처하게 할 것이라는 것을 파악했다. 한 해병대 장군은 다음과 같이 문제점을 지적했다.

"해병항공대 사령관 핏맨(Charles H. Pitman) 중장은 '만약 누군가 내일’ 해병대가 앞으로 3~5년간 극복해야 할 것에 대해 묻는다면 '일단 나를 혼자 내버려 두면 내부개혁을 한 뒤 좀더 나은 계획을 제안하겠다'고 말했다. '만약 그러지 못하겠다면, 나는 모든 것에 대해 싸울 것이다. 만약 해병대가 현재의 3-5년 예산안에 따라 움직여야 할 경우 사업 입찰에 참여한 회사들은 그들의 직원들을 내 눈 앞에서 꺼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 목표를 세우고 결정을 내린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군예산의 문제는 레이건이 집권했을 때 보다 레이건이 퇴임했을 때 더 악화되었다. 국방부의 한 전문가의 의견을 인용하자면 "우리는 1970년대와 같은 구제불능의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이미 시작된 것 이죠. 육군은 레이건이 집권했을 때 보다 더 축소되었고 해군은 군함들을 퇴역시켜야 했으며 공군은 비행단 규모를 감축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더 나빴던 것은 군대의 전투수행태세가 악화된 것 이었다. 사실상 이제는 국방예산이 현재 보유한 장비들을 운용하는 데도 벅찰 지경이 되었다. 국방예산에 관한한 레이건이 남긴 유산은 복합적인 성격을 가졌다.

Dale R. Herspring, The Pentagon and the Presidency : Civil-Military Relations fron FDR to George W. Bush,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5), pp.275~2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