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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13일 화요일

만헤이 전투에 대한 뻘글


근자에 먹고사는 문제로 업데이트가 전혀안되고 있어 민망하군요. 블로그에 밀덕썰 푸는게 소소한 삶의 재미 중 하나인데 말입니다.

예전에 어디에 투고하려고 썼던 뻘글 한 편 투척합니다. 만헤이 전투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원래 연재하려 했던 곳의 특성상 자료출처나 주석은 없습니다. 뭐, 전부 다 제 블로그에서 오래전에 했던 이야기이니 이곳을 꾸준히 들르신 분들이라면 지겨우시겠군요.


**********

바르크만의 기묘한 모험


독일군의 야심찬 아르덴느 공세가 미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좌절되어 가고 있던 1944 12 24, N15도로가 지나가는 교통 요충지인 만헤이(Manhay)가 독일 무장친위대 제2기갑사단 다스 라이히(Das Reich)’에 점령됐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편찬된 미육군의 공간사에서는 이날 밤 독일군이 노획한 셔먼 전차를 앞세우고 미군으로 위장해 만헤이를 점령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독일측 참전자들의 증언이 공개되면서 만헤이 전투는 미육군의 설명과는 다르게 전개됐음이 밝혀졌다. 이날 만헤이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아르덴느 전투가 시작될 무렵 다스 라이히사단은 제6기갑군의 예비대로 대기하고 있었다. 1944 12 19, B집단군 사령관 발터 모델 원수는 예비대로 대기하고 있던 다스 라이히사단을 투입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 무렵 독일군을 괴롭히던 고질적인 연료부족 때문에 다스 라이히사단은 투입 명령을 받고도 이동을 할 수 없었다. ‘다스 라이히사단에 대한 연료보급은 12 22일 오전이 지나서야 마무리 되었다. 보급을 마친 다스 라이히사단은 N15 도로를 따라 북상하다가 바하끄 쁘헤듀흐(Baraque Fraiture)에서 미 82공수사단 325글라이더 보병연대 2대대와 여기에 배속된 미 3기갑사단 32전차연대 3대대 소속의 1개 전차소대의 저항에 부딛혔다. ‘다스 라이히전차연대 7중대의 4호전차와 미 32전차연대 3대대의 셔먼 전차간에 전차전이 벌어졌다. 독일측은 4대의 4호전차를 잃었고 미군은 11대의 셔먼전차와 다수의 차량을 상실하고 바하끄 쁘헤듀흐에서 퇴각했다. 그러나 23일부터 24일까지 미육군항공대의 대대적인 공습으로 만헤이를 목표로 한 독일군의 진격은 저지되었다. 일부 독일 전차병들은 끊임없는 공습으로 공황상태에 빠져 전차를 버리고 도망치기까지 했다. 여기에 바하끄 쁘헤듀흐를 탈환하기 위해 미 3기갑사단과 82공수사단이 병력을 증원하면서 독일군은 더욱 곤경에 빠졌다.

결국 독일군은 미군의 공습을 피해 야습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다스 라이히전차연대장 루돌프엔셀링(Rudolf Enseling) SS중령은 만헤이 방면에 대한 야습에 예비대로 대기하고 있던 1대대 4중대를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4중대는 경험이 풍부한 장교였던 오르트빈 폴(Ortwin Pohl) SS대위가 지휘하고 있었다. 폴 대위는 우수한 지휘관이자 전차 에이스였다. 그는 노르망디 전선에서 12대의 미군 전차를 격파한 바 있었다. 그리고 그의 부관이 바로 유명한 전차에이스 에른스트 바르크만(Ernst Barkmann) SS상사였다. 바르크만 상사는 노르망디 전투에서 큰 활약을 했으며 특히 쿠탕스 가도의 전투로 명성을 떨쳤다. 1소대는 아르덴느 공세 직전 임관한 크노케(Heinrich Knocke) SS소위가, 2소대는 비스만(Alfred Wissmann) SS소위가, 3소대는 경험이 풍부한 부사관인 프란츠 프라우셔(Franz Frauscher) SS원사가 지휘하고 있었다. 각 소대는 모두 5대의 판터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중대본부는 폴 대위의 402호차와 바르크만 상사의 401호차 2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또한 4중대를 지원하기 위해 만프레트 하게샤이머(Manfred Hargesheimer) SS중위가 지휘하는 2중대 소속의 판터 6대가 4중대에 배속됐다. 그리고 전차를 지원하기 위해 제3SS기갑척탄병연대 16중대(공병중대)가 배속됐다.

1638분에 4중대의 전차들은 오데뉴(Odeigne)에 집결해 해가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공격의 선봉에 서는 것은 베테랑인 프라우셔 원사가 지휘하는 3소대였다. 3소대의 뒤에는 중대본부가 따랐고 그 뒤에는 2소대, 그리고 최후위에는 경험이 부족한 1소대가 배치됐다.
한편 4중대의 정면에는 미 3기갑사단의 올린 브루스터(Olin F. Brewster) 중령이 지휘하는 TF브루스터가 배치되어 있었다. TF브루스터는 3기갑사단 32전차연대 소속의 3개 전차소대, 36기계화보병연대 I중대 병력 일부, 82공수사단 509강하연대 병력 일부, 그리고 75보병사단 290보병연대 C중대 등 잡다한 부대로 급조된 전투단이었다.

오후 10, 예정대로 공격이 개시됐다. 만헤이 방면으로 북상하던 4중대는 곧 TF브루스터 소속의 전차들과 격돌했다. 짧지만 격렬한 전투가 전개됐고 프라우셔 원사의 판터가 피격됐다. 미군은 셔먼 전차 두대를 잃고 북쪽으로 후퇴했다. 4중대는 잠시 진격을 멈추고 재정비에 들어갔으며 프라우셔 원사는 지휘를 위해 전차를 바꿔탔다.

그런데 혼란의 와중에 상황 전달을 받지 못한 바르크만 상사는 중대가 잠시 진격을 멈췄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단독으로 북상했다. 바르크만 상사는 자신이 낙오됐다고 생각한 나머지 아군을 만날 때 까지 계속 북쪽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군이 아니라 만헤이를 방어하고 있던 미 7기갑사단 A전투단 40전차대대 소속의 셔먼 전차였다. 셔먼 전차장 마티어스(Mathias) 하사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바르크만의 판터를 아군의 셔먼 전차로 착각했다. 남쪽에는 아군이 배치되어 있었으니 당연한 것 이었다. 바르크만 상사는 마티어스 하사의 셔먼 전차를 프라우셔의 판터라고 착각해 그 옆에 정지하고 말을 걸었다. 마티어스 하사는 갑자기 독일어가 들리자 당황해서 포탑 안으로 들어가 해치를 잠궈버렸다. 바르크만도 상대의 반응에 당황했다. 옆에 있는 전차를 다시 살펴보니 후미등이 미군의 붉은 색이 아닌가! 판터의 후미등은 녹색이었다. 당황한 바르크만은 인터폰에 소리를 질렀다.

포수! 옆에 있는 전차는 적 전차다! 쏴라!(Richtschütze! Panzer neben uns ist ein Feindpanzer! Abchießen!)“

사수인 호르스트 포겐도르프(Horst Poggendorf) SS병장도 당황해서 소리를 질렀다.

쏠 수가 없습니다! 포탑을 돌릴 수 없어요!(Abschießen geht nicht! Turmschwenkwerk klemmt!)“

두 대의 전차가 너무 가까이 붙어있다 보니 판터의 포신이 걸려서 포탑을 회전 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이때 판터 조종수인 그룬드마이어(Grundmeyer) SS상병이 순발력을 발휘했다. 포탑을 돌릴 수 있도록 판터를 재빨리 후진 시킨 것 이었다. 포겐도르프 병장도 때를 놓치지 않고 셔먼을 격파했다. 놀랍게도 마티어스 하사를 비롯한 셔먼의 승무원들은 살아남았는데 근거리에서 발사된 판터의 포탄이 셔먼의 후부까지 관통해 버리는 바람에 내부에는 피해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티어스 하사는 부상을을 입은 포수를 구출해 탈출했다.

이제 바르크만은 자신이 적진 한가운데에 고립됐음을 깨달았다. 그런데 그는 이 상황에서 그대로 전진하는 것을 택했다. 마티어스 하사의 셔먼을 격파하고 이동하던 바르크만의 앞에 제814대전차대대 B중대 소속의 M10 구축전차 두 대가 나타났다. 이들도 바르크만의 판터를 아군의 셔먼으로 오인해 사격을 가하지 않았다. 포겐도르프는 신속하게 사격을 가해 두 대의 M10을 격파했다. 바르크만은 미군 전차가 계속해서 나타나자 속도를 줄이고 천천히 이동하기로 했다. 다시 전진하던 바르크만의 앞에 제40전차대대 C중대 소속의 셔먼 아홉대가 나타났다. 바르크만은 천연덕스럽게 계속 이동했고 미군들은 바르크만의 전차를 아군 전차로 생각해 한 발의 사격도 가하지 않았다. 바르크만은 그곳을 벗어나 만헤이 교차로에 도착했다. 바르크만은 원래 그랑므닐 방면으로 가려고 했으나 셔먼 전차 세대가 그랑므닐 방향에서 오는 것을 보고는 충돌을 피하기 위해 그대로 만헤이로 돌입하기로 했다. 만헤이는 철수를 준비하는 미군 차량으로 북적이고 있었다. 미군은 철수 준비로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바르크만의 판터가 만헤이에 돌입했을 때도 한동안은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정체를 들키지 않을 수는 없었다. 미군들은 갑자기 만헤이 한 복판에 독일 전차가 나타난 것을 깨닫고 혼란에 빠졌다. 바르크만은 앞에서 다가오던 지프를 그대로 깔아뭉갠 뒤 전속력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미군 운전병들도 질주하는 판터를 피해 차량을 모느라 우왕좌왕했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미군 전차들이 바르크만의 셔먼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한대의 M5 스튜어트가 판터의 앞을 막았으나 바르크만의 판터는 그대로 스튜어트를 들이받고 전진했다. 그리고 포탑을 6시 방향으로 회전시켜 추격해 오는 미군 전차들을 차례대로 격파하기 시작했다. 바르크만의 판터는 만헤이를 벗어나 마을 외곽의 숲으로 달아났다. 바르크만은 혼란에 빠진 미군이 추격을 멈춘 것을 확인한 뒤 숲 속에 숨기로 했다. 판터의 엔진이 이상을 일으켜 더 이상 이동하는 것이 위험했다.

바르크만이 만헤이에서 좌충우돌 하는 동안 전열을 가다듬은 4중대는 다시 전진하기 시작했다. 이때 미 40전차대대 C중대 소속의 셔먼 한 대가 4중대의 판터들을 향해 사격을 퍼부었다. 프라우셔는 즉시 조명탄을 발사한 뒤 이 셔먼을 격파했다. C중대의 나머지 셔먼 전차들도 순식간에 격파됐다. 미군 전차병들은 대부분 전차 밖에 나와 휴식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완전한 기습이었다. C중대를 전멸시킨 4중대는 만헤이로 돌입했다. 그러나 바르크만이 이미 한바탕 난리를 피운 뒤라 미군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또 다시 프라우셔의 판터가 셔먼의 근거리 사격에 피격됐다. 프라우셔의 뒤를 따르던 판터가 즉시 반격을 가해 셔먼을 격파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프라우셔와 승무원들은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프라우셔는 다시 전차를 갈아타고 지휘를 해야 했다.

4중대는 만헤이를 점령한 뒤 다시 방향을 돌려 그랑므닐 쪽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628대전차대대 소속의 M10 구축전차들이 포격을 가해 3소대의 베테랑 전차장인 오스카 피셔의 판터가 격파되고 피셔도 전사했다. 피셔의 판터는 도로를 막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군은 공격 기동을 하기가 어려웠다. 그랑므닐을 둘러싸고 포격전이 전개되는 와중에 4중대장 폴 대위가 부상을 입고 후송됐다. 폴 대위의 중대장 차량은 크노케 소위의 포수가 인계했다. 중대장 차량은 만헤이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피셔의 판터를 우회하는 와중에 판터 네 대가 미군의 대전차 지뢰를 밟고 기동불능이 됐다. 4중대의 공격이 난관에 부딛혔다. 4중대는 미군의 방어를 물리치고 그랑므닐 서쪽의 에흐제(Erezze)에 도착해 다시 재정비에 들어갔다. 폴 대위가 후송됐기 때문에 4중대에 배속되어 있던 하게샤이머 중위가 지휘권을 인계받았다. 그런데 하게샤이머 중위도 낙오된 미군의 총격에 어깨에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다. 결국 4중대의 간부들은 다시 그랑므닐로 후퇴해 방어태세를 갖추기로 결정했다.

12 24일 밤의 전투로 7기갑사단 A전투단은 21대의 전차를 잃었고, 40전차대대 A중대장 앨런(Malcolm O. Allen) 대위가 포로가 되고 D중대장 휴즈(Walter J. Hughes) 대위가 전사하는 등 420여명의 인명 손실을 입었다.

한편, 숲속에 숨어있던 바르크만은 상황이 정리된 것으로 보이자 다시 만헤이로 돌아왔다. 만헤이에는 중대장의 판터가 대기하고 있었다. 바르크만은 중대장차의 임시 전차장과 상의를 한 뒤 건물 사이에 전차를 숨기고 방어 태세를 취하기로 했다. 12 25일 오전, 미군은 만헤이를 탈환하기 위해 7기갑사단 31전차대대 B중대를 투입했다. B중대 소속의 셔먼 다섯대는 만헤이를 향해 전진하다가 바르크만을 비롯한 4중대 본부 판터 두대의 포격으로 전멸했다. 잠시 뒤 올프(Emerson Wolfe) 대위가 지휘하는 본대의 셔먼 10대가 도착했으나 앞서 투입된 선발대가 전멸한 것을 보고는 공격을 머뭇거렸다. 만헤이 탈환을 지휘하기 위해 도착한 7기갑사단 B전투단장 브루스 클라크(Bruce Clark) 준장은 올프 대위에게 즉시 공격하라고 명령했으나 올프 대위는 판터가 매복하고 있는 상황에서 엄폐물 없는 개활지로 돌격하는 것은 불리하다고 설명했다. 클라크 준장은 올프 대위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해 공격 명령을 취소했다. 한편 그랑므닐 방면을 방어하고 있던 4중대의 주력은 TF맥조지(McGeorge) 소속의 셔먼 전차 17대와 교전해 15대를 격파하는 피해를 입혔다.


미군은 만헤이와 그랑므닐을 직접 공격하는 대신 12 25일부터 27일까지 8개 포병대대를 동원해 포격을 퍼부었다. 여기에 미육군항공대가 가세해 만헤이-그랑므닐의 독일군은 옴싹달싹 할 수 없었다. 크노케 소위의 411호차가 미군의 포격으로 격파됐다. 4중대는 포격이 뜸해진 25일 밤에 만헤이를 버리고 남쪽으로 철수했다. 바르크만의 대담한 모험으로 독일군은 만헤이를 비교적 쉽게 점령할 수 있었으나 전쟁을 운으로만 치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바르크만의 모험은 제2차 세계대전의 특이한 일화로만 남았다.

2016년 9월 21일 수요일

Ballistic Research Laboratories Memorandum Report 798에 실린 벌지전투 당시 미 3, 4기갑사단의 전투 데이터



며칠전에 올린 스티븐 잘로가의 저작에 관한 글을 보충하는 차원에서 표 두 개를 올립니다. Ballistic Research Laboratories Memorandum Report 798에서 분석에 활용한 벌지전투 시기의 교전데이터 입니다. 지난번 글들에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이 보고서는 오직 미군의 전투 보고서만을 바탕으로 만들어져서 교차검증이라곤 전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문제는 아래에서 조금 더 이야기 하지요.


BRL798에 실린 벌지전투 당시 미 3기갑사단의 교전 기록은 사례 32부터 54까지 입니다. 제가 참고한 Merriam press에서 발행한 판본에는 34, 36, 38, 45, 50등 총 5건의 사례가 누락돼 있습니다. 추후 원본을 확인할 기회가 있으면 누락된 부분을 보충하겠습니다. 아래의 표는 해당 교전사례를 일련번호 순으로 정리한 것 입니다. 미군이 교전상대를 판터로 파악한 사례는 노란색으로 표시합니다.


표1. BRL798에 사용된 벌지전투 당시 미 3기갑사단의 교전 데이터

미군 장비 숫자
미군 장비 손실
독일군 장비 숫자
독일군 장비 손실
공격 진영
격파거리
(야드)
미군 장비 형식
독일군 장비 형식
32a
6
2
4
0
독일
2000
M4
TD
판터
32b
5
5
4
0
?
1400
M4
판터
33
?
4
2
0
미국
300
M4
대전차포
35
3
2
1
1
독일
600
M4
판터
37
3
2
2
2
독일
75~400
M4
M5
바주카
판터
39
7
4
2
1
미국
650
M4
M5
대전차포
지뢰
40
16
2
2
0
미국
650
M5
대전차포
(88)
41
14
0
3
3
미국
40?
M5
바주카
4호×1
대전차포×1
42
14
4
1
0
미국
1000
M4
M5
?
43
12
6
7
0
미국
300~1800
M4
M5
전차
대전차포
박격포
44
10
10
7
0
미국
300~1200
M4
M5
판터
대전차포
46
?
0
?
2
미국
500
M4
M5
TD
바주카
자주포×1
4호×1
47
11
2
3
0
미국
800
M4×7
TD×4
대전차포
48
11
3
3+
0
미국
1300~2500
M4×7
TD×4
대전차포
49
?
3
?
0
미국
1500~1700
?
대전차포
51
16
2
2
2
미국
400
M4
M5
자주포(88)
52
8
1
2
2
독일
200
M4
TD
판터
지뢰
53a
6
4
?
0
미국
1000
M4
대전차포
53b
9
9
3
0
미국
200
M5
판터
53c
1
1
3
0
미국
200
M4
판터
53d
1
1
?
0
미국
1200
M4
대전차포
53e
4
3
?
0
미국
1700~2000
M4
판터
54
32
9
3
1
미국
1200
M4
대전차포
[표 출처: “Ballistic Research Laboratories Memorandum Report 798”(1954. 6), Appendix; Data on World War II tank Engagements: Involving the U.S. Third and Fourth Armored Divisions, (Merriam press, 2012), pp.33~37.]
※ 37번 사례에서 격파된 미군 차종은 M4 1대, M5 1대로 모두 75야드 거리에서 판터에게 격파됐다. 격파된 판터 중 1대는 바주카포에 의해 75야드 거리에서 격파됐으며, 다른 한대는 400야드 거리에서 M4에게 격파됐다.
※ 43번 사례에서 두 대는 300야드에서, 두 대는 1000야드에서, 두 대는 1800야드에서 격파됐다.




다음은 벌지전투 당시 미 4기갑사단의 전투 데이터입니다. 전반적으로 3기갑사단 보다 양호한 전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만 좀 수상한 사례가 섞여 있습니다. 4기갑사단의 교전 사례는 89~98까지입니다.

표2. BRL798에 사용된 벌지전투 당시 미 4기갑사단의 교전 데이터

미군 장비 숫자
미군 장비 손실
독일군 장비 숫자
독일군 장비 손실
공격 진영
격파거리
(야드)
미군 장비 형식
독일군 장비 형식
89
10
1
?
1
미국
200
M4
M5
판터
90
5
4
2
0
미국
200
M5
자주포
91
16
4
21
0
미국
200
M4
판터
92
15
4
3
3
미국
400미만
M4
판터×2
자주포×1
바주카포
93
5
1
0
0
미국
?
M4
?
94
14
3
1
1
미국
1400
M4
대전차포
95
5
1
1
0
미국
1500
M4
대전차포
96
30
3
1
1
미국
900
M4
자주포
97
4
0
1
1
미국
1300
M4
판터
98a
6
0
5
5
독일
1000
M4
판터
98b
6
0
6
6
독일
100
M4
판터
[표 출처: “Ballistic Research Laboratories Memorandum Report 798”(1954. 6), Appendix; Data on World War II tank Engagements: Involving the U.S. Third and Fourth Armored Divisions, (Merriam press, 2012), pp.33~37.]
※ 91번 사례에서 원래 손실은 11대이나 이 중 7대는 뒤에 회수했기 때문에 손실을 4대로 계산한 것임. 실제 독일군 장비는 판터가 아니라 1개 중대의 돌격포였음.
※ 92번 사례의 비고란에는 최소 5대 이상의 셔먼이 격파됐다고 적혀있음.(1소대 3대, 2소대 1대, 3소대 숫자 미상)
※ 96번 사례에서는 P-47의 공습도 있었기 때문에 독일군 자주포의 격파 원인을 명확히 알 수 없음.


91, 92번 사례와 같이 이 보고서에는 미군 손실을 축소해서 집계한 흔적이 있습니다. 보고서 작성자가 왜 그런 방식을 택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게다가 91번 사례(Chaumont전투)는 독일군의 전력을 과대평가하고 있습니다. 전후 독일군 포로 심문과 노획 문서를 바탕으로 편찬된 미육군 공간사에서는 Chaumont 방어에 투입된 독일군이 제5공수사단 14공수연대의 1개 중대와 11돌격포여단에서 파견된 돌격포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미군의 손실은 보병 65명 사상, 셔먼 11대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주)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잘로가가 독일군의 손실 집계 방식을 비판할 때 '완전 손실만 집계해 실제 손실보다 축소되어 있다'는 주장을 한다는 것 입니다. 어째서 잘로가는 미국 기록에 그런 사례가 있을때는 같은 비판을 하지 않는 것인지 궁금해 집니다.  


주) Hugh M. Cole, THE ARDENNES:  BATTLE OF THE BULGE, (1965, Center of Military History) pp.528~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