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베르사이유조약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베르사이유조약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10년 4월 4일 일요일

미육군의 인사적체와 주방위군, 그리고 대공황

미국은 1차대전에 승리한 뒤 육군을 대규모로 감축합니다. 미육군은 1차대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전후에도 육군 병력을 50만명 정도로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지만 정치권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베르사이유 조약으로 독일이 사실상 전쟁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대규모 육군의 필요성이 사라졌다고 본 것 입니다. 물론 일본이라는 유력한 가상 적국이 있었지만 일본과의 전쟁은 주로 해군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평시에도 대규모 육군을 유지하는 것은 불필요하다는 견해가 많았다고 합니다. 1920년 6월 4일에 제정된 국방법(National Defense Act)은 육군 병력 상한선을 장교 17,726명으로 포함한 28만명으로 규정했습니다. 하지만 국방법에서 명시한 병력 상한선은 어디까지나 평화시 유지할 수 있는 육군의 최대 규모를 명시한 것이었을 뿐 육군의 규모는 예산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결정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국방법이 제정될 당시 미육군 병력은 약 20만명이었는데 1921년 1월에는 의회가 이것을 175,000명으로 줄이도록 했고 다시 같은해 6월에는 150,000명으로, 그리고 1922년에는 다시 장교 12,000명과 부사관 및 사병 125,000명으로 줄여 버립니다.1) 한편, 정규군을 보조할 주방위군의 병력 상한선은 435,800명 이었는데 이것 또한 실제로는 180,000명 수준에서 유지되었습니다.2)

미 육군은 이렇게 평화시의 병력이 큰 규모로 축소되면서 심각한 인사적체 문제에 시달리게 됐습니다. 군대의 규모가 줄어들었으니 자리를 늘리는 것이 어려웠고 이것은 장교는 물론이요, 사병들이 부사관으로 진급하는 것 까지 매우 어려워 졌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군대라는 것이 피라미드식의 구조를 가진 조직이니 말입니다. 1923년의 통계를 보면 미육군의 소위는 1,184명, 중위는 2,783명 이었는데 대령은 509명이었습니다.3) 하지만 그나마 장교는 나았던 것이 사병들의 경우 진급을 위한 경쟁이 더 치열했습니다(;;;;)  1926년의 통계를 보면 미육군의 부사관 이하 계층의 구성비에서 사병(이등병~일병)이 차지하는 비중이 74.1%였는데 상병에서 하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22.7%, 중사에서 상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3.1%에 불과했습니다. 육군항공대의 경우는 사정이 눈꼽만큼 나아서 사병이 71.5%, 상병에서 하사가 23.0%, 중사에서 상사가 4.6%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4) 소위가 대령으로 진급할 가능성 보다 이등병이 상사로 진급할 가능성이 더 낮았던 셈입니다. 아무래도 직업군인으로 구성되는 군대인 만큼 사병들도 진급에 민감할 수 밖에 없었는데 1차대전 직후의 미육군은 그 점에서 문제가 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병의 진급문제가 당시에는 꽤 심각했는지 이와 관련해서 꽤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5)

한 보병중대의 중대원들이 이등병에서 일등병으로의 진급공고를 읽기 위해 부대 게시판 앞에 모여들었다. 병사 한 명이 불쾌하다는 듯이 투덜거렸다.

" 이놈의 군대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호건은 일등병이 됐는데 이녀석은 겨우 '6년' 복무했단 말이야. 다른 좋은 데로 옮겨야 겠어."

이당시 미육군에서는 상사까지 올라가는 데 보통 24년이 걸렸다고 하는데  육군항공대는 조금 더 사정이 좋아서 16년 정도 걸렸다고 합니다. 게다가 1차대전 직후의 호황으로 일자리가 넘쳐났기 때문에 미육군은 급여 면에서도 민간보다 못했습니다.6) 진급도 잘 안되고 박봉이니 군대가 인기있는 직장일 수가 없었겠지요. 실제로 미육군의 재입대율은 대공황 직전인 1928년 0.47로 신병 두 명이 입대할 때 복무기간을 마친 병사가 제대하지 않고 군대에 남는 것이 한 명도 채 못되었다는 것 입니다.7)

하지만 대공황은 이 모든 것을 바꿔 놓았습니다. 비록 진급이 안 되는 것은 대공황 전이나 그 후나 별 다를바가 없었으나 군대는 불황기에 안정적으로 의존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직장이었습니다. 미육군 장교들은 심각한 진급적체에도 불구하고 군대에 계속 남는 방향을 택했습니다.8) 사병들의 경우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대공황 전에는 1도 넘지 못하던 사병의 재입대율이 높아져 1931년에는 1.24, 1932년에는 2.99가 되었고 특히 육군항공대의 경우 1931년에는 1.69, 1932년에는 3.35가 되었습니다.9) 주방위군도 마찬가지여서 대공황이 밀어닥치자 주방위군 자원자가 폭증했다고 합니다. 1932년에서 1933년 사이에 주방위군의 훈련 참석율은 평균 90% 이상을 상회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훈련에 참석할 경우 훈련수당이 지급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미 의회가 국방비를 삭감한 덕분에 1934년에는 매주 훈련 수당을 지급하던 것을 1년에 36주만 훈련 수당을 지급하는 것으로 바꾸게 되었다고 합니다.10)

어쨌거나 끔찍한 인사적체와 대공황을 견뎌낸 군인들에게는 새로운 기회가 생기게 됩니다. 2차대전이 발발하면서 미군이 급속도로 증가하자 그때까지 군대에 남아있던 소수의 장교들은 특별히 무능하지 않은한 군 내에서 한자리씩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1) Richard W. Stewart ed., American Military History Vol.II : The United States Army In A Global Era, 1917~2003(Washington, U.S.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 2005) , pp.53~59
2) Michael D. Doubler, Civilian in Peace, Soldier in War : The Army National Guard, 1636~2000(Lawrence,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3), p.188
3) Richard G. Davis, Carl A. Spaatz and the Air War in Europe(Washington, Center for Air Force History, 1993), p.11
4) Mark R. Grandstaff, Foundation of the Force : Air Force Enlisted Personnel Policy : 1907~1956(Washington, Air Force History and Museums Program, 1997), p.21
5) Victor Vogel, Soldiers of the Old Army(College Station, Texas A&M University Press, 1990), p.3
6) Grandstaff, ibid., p.23
7) Grandstaff, ibid., p.31
8) Davis, ibid., p.12
9) Grandstaff, ibid., p.31
10) Doubler, ibid., p.191

2008년 11월 7일 금요일

China and the Great War : China’s pursuit of a new national identity and internationalization

국내에 나온 중국 근현대사 개설서들은 대개 신해혁명을 다룬 다음 1차대전에 대한 설명은 간략히 하고 바로 베르사이유 조약과 5∙4운동에 대한 서술로 넘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제가 국내에 출간된 중국 근현대사 개설서를 모두 읽어 보진 않았습니다만 제가 읽어본 개설서들은 그런 경향이 있더군요. 1차대전 같이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일에 중국이 손가락만 빨고 있지는 않았을 텐데 아무리 개설서라 하더라도 별다른 언급이 없는게 좀 의아했었습니다. 그런데 뒤에 중국사에 대한 영어권의 연구를 찾아 보다 보니 정말 중국과 1차대전의 관계에 대한 단행본이 손가락으로 꼽을 수준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일본어권의 연구는 아직 제대로 찾아보지 않았지만 그래도 일본과 함께 해외 중국학 연구의 양대 산맥인 영어권의 연구가 저 정도 라는건 정말 예상 밖이었습니다.

이번에 읽은 쉬궈치(Xu Guoqi, 徐国琦)의 China and the Great War : China’s pursuit of a new national identity and internationalization(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5)는 바로 영어권의 중국사 연구에서 ‘공백’이라고 할 만한 1차대전기 중국의 대외정책을 다루고 있습니다. 물론 중국의 1차대전 참전이나 중국 노동자들의 유럽 파송 같은 건에 대해서는 단편적으로 접한 이야기가 있지만 이것을 1차대전이라는 하나의 틀에 넣어 잘 정리해 놓은 글은 처음 접했습니다. 1970년대에 미국에서 중국의 1차대전 참전에 대한 연구서가 한 권 나온 일이 있긴 하다는데 이것은 중국 쪽 자료를 별로 이용하지 않고 주로 영국과 미국, 일본의 외교문서를 토대로 연구했다고 하더군요. 개인적으로 이 책을 매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내용이 재미있어서 간단히 소개해 볼까 합니다.

저자인 쉬궈치가 1차대전에 대해서 주목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20세기 초 근대적 국민국가 건설이라는 과제를 안게 된 중국의 지식층은 국내적으로는 근대적 ‘민족주의(nationalism)’에 기반을 두고 대외적으로는 ‘국제주의(internationalism)’을 추구하는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었습니다. 민족주의와 국제주의의 병립은 다소 모순되게 느껴지는데 20세기 초의 중국 지식인들은 그것의 병립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군요. 그리고 중국의 지식인들은 1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이 전쟁을 통해 중국이 평등한 조건에서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편입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전쟁 초기부터 유럽의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고 이 과정에서 외적으로는 국력에 의해 지배되는 냉혹한 국제질서를 체험하고 이렇게 해서 강화된 민족주의는 5∙4운동을 통해 극적으로 표출됩니다. 그런데 기존의 연구자들은 5∙4운동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기울였지만 1차대전 중 근대적 민족주의가 함양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다는 것이 수궈치의 지적입니다. 그리고 1차대전에서 중국의 역할 자체가 제대로 언급되지 않고 있다는 점도 지적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존 키건이나 니알 퍼거슨 등이 쓴 유명한 개설서들은 1차대전 중 중국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고 비판합니다.

책의 제목이 잘 보여주듯 이 책에서는 1차대전 중 중국 지식인들이 평소 가지고 있던 근대적 민족주의에 기반하면서 대외적으로 국제주의적 노선을 취하는 국가를 건설하려 한 노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먼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근대적 민족주의가 싹트는 과정을 먼저 살펴보고 있습니다. 청 왕조가 멸망하기 직전까지도 중국은 아직 세계체제(World System)하에서의 국민국가(nation state)라는 체제를 제대로 완성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19세기 말에 가서야 중국 지식인들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추상적이고 문화적인 ‘중화’라는 개념 대신 ‘시민’에 기반한 근대국가를 구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시민’의 사상적기반으로서 ‘민족주의’가 대두되었습니다. 저자는 1911년의 신해혁명은 중국 최초의 근대적 공화국과 함께 근대적 민족국가를 추구하는 운동이었다고 평가합니다. 혁명을 계기로 언론의 자유를 타고 수많은 근대적 언론매체들이 등장한 것은 대중(public)의 증가와 동시에 이루어 졌습니다. 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새로운 근대적 ‘대중’은 중국의 국가적 운명과 주권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했습니다. 이 당시 중국의 지식인들은 이런 대중의 민족주의적 애국심이 국제주의와 양립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저자는 이것을 민족주의적 국제주의라고 부르는데 좀 오묘한 느낌이 드는 용어입니다. 중국 지식인들이 새로운 중국 민족국가를 국제사회에 편입시키는 문제로 골몰하고 있을 때 드디어 (중국인들이 보기엔) 그 기회가 왔습니다.

1차대전이 발발한 것 입니다.

저자는 중국정부가 1차대전 초기부터 전쟁에 참전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이 전쟁에 교전국의 일원으로 당당히 참전한다면 새로운 중국 국가는 평등한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편입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량치차오(양계초, 梁啟超)와 같은 지식인들과 독일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군인들은 전쟁 초기 독일의 승리를 점치기도 했으나 전쟁이 장기화 될 조짐을 보이자 생각을 바꾸게 됩니다. 원세개의 측근이고 참정원(參政院) 참정으로 있던 량스이(梁士詒)는 전쟁이 발발하자 원세개에게 참전을 부추겼고 원세개는 주중공사 존 조던(John Jordan)에게 영국이 칭타오를 공격할 경우 중국군 50,000명을 지원한다는 제안을 합니다. 영국 측에서는 이 제안을 거절했지만 중국은 1915년 말까지 계속해서 영국에게 참전의사를 밝힙니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일본을 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고 만약 중국이 연합군으로 참전한다면 일본의 참전을 이끌어내기가 어려워진다는 점을 우려했습니다.
참전제안을 거부당하자 중국 정부는 우회적으로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에 노동자 파견을 제안합니다. 이공대병(以工代兵) 이라는 정책은 역시 량스이의 발상이었다고 하는데 량스이는 1915년 영국측에 30만명의 노무자(이 중 10만명은 전선에 투입될 무장 노무자)를 지원하겠다는 제안을 했습니다. 영국에서는 이 제안을 거부했지만 서부전선의 소모전으로 병력이 부족해지자 생각을 바꾸게 됩니다. 먼저 1915년 3월 프랑스가 중국에 노무자 지원을 요청해왔고 영국은 1916년 8월에 노무자 지원을 요청합니다. 이렇게 해서 중국 노무자들이 서부전선으로 파견됩니다만 전쟁이 끝난 뒤 이들의 공헌은 철저히 무시당합니다. 당시 영국 외무상이었던 밸푸어(Arthur Balfour)는 중국의 전쟁 기여도에 대해서 “1실링의 돈도, 단 한 명의 목숨도 바치지 않았다”라는 혹평을 하기도 했다는 군요.
물론 중국도 뒤에 공식으로 전쟁에 참전하긴 합니다만 애당초 중국군 파병을 위해 재정지원을 하기로 한 미국이 공약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영국과 프랑스로 부터의 군사지원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결국 중국은 선전포고만 하고 전투는 참여하지 못 하게 됩니다. 저자는 영국과 프랑스는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해 중국에 대한 지원에 소극적이었다고 비판합니다. 중국이 군사적으로 연합군에 기여한 것은 적백내전이 발발하자 극동지역의 러시아군에 대한 무장해제에 참여한 정도였습니다.

한편, 이 와중에 원세개가 다시 제정을 부활하려다 정권 자체가 무너져 버려 군벌할거 시대가 도래하고 대외적으로는 베르사이유 조약에서 중국의 주장이 모두 무시당하면서 낭만적인 국제주의를 추구하던 중화민국 초기의 외교정책은 붕괴에 이르게 됩니다. 근대적 국민국가를 건설해 국제체제에 편입되려는 첫 번째 시도는 이렇게 해서 무산되게 됩니다. 신해혁명 이후 한껏 고양된 민족주의적인 중국 지식인들은 1차대전과 베르사이유 조약에서 연합국이 보인 태도를 통해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질서의 본질을 깨닫고 이후 공산주의 등 다른 대안을 모색하게 됩니다. 그러나 저자는 중국 지식인들이 냉전 초기까지도 국제주의적 이상을 버리지 않았다는 점을 함께 지적합니다.

전체적으로 매우 재미있는 책 이었는데 저자의 일부 논지는 동의하기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저자는 중국의 노무자 파견의 규모를 강조하면서 중국의 전쟁 기여도에 대한 재평가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 개인적으로는 비록 식민지 이긴 했지만 역시 수많은 노동자와 전투 병력을 파견한 베트남의 전쟁 기여도가 차라리 중국 보다 높다는 생각이 듭니다. 결정적으로 중국은 전투 병력을 파병하려는 의지만 있었을 뿐 능력은 없었고 실제로는 파병조차 하지 못했으니 기존 역사가들의 중국의 전쟁 기여도에 대한 평가도 불공정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더군요.

저자의 일부 논지에는 공감하지 못하지만 전체적으로 매우 재미있는 책이었습니다. 특히 쉬궈치는 근대국가 건설문제를 국제전쟁과 연결해 설명하고 있는데 저는 이런 시각을 매우 선호하는 입장입니다. 도서관에 반납할 일자가 다가와서 허겁지겁 읽느라 제대로 이해를 못하고 넘어간 부분도 많은데 뒤에 다시 시간을 내서 숙독해볼 생각입니다. 사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면 한권 구입하고 싶다는 생각도 드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