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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23일 월요일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31-3호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31-3호를 훑어봤습니다. 지난호는 제2차대전 관련 논문이 전무해 아주 실망스러웠는데 이번호는 재미있는 글이 두 편이나 있습니다.

Alan Donohue의 "Adolf Hitler and German Military Intelligence on the Eastern Front"는 독일 국방군의 정보실패가 1942년 전역에 끼친 영향을 고찰하는 논문입니다. 독일군은 이미 1941년 부터 소련과 소련군에 대한 정보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고, 이런 문제점이 계속되면서 1942년 전역 전 과정에 영향을 끼쳤다는 내용입니다. 특히 소련의 공업생산력과 인적자원을 과소평가한 것이 히틀러로 하여금 1942년 하계공세를 결심하게 한 중요한 요인이었다고 지적합니다. 소련의 공업력과 인적자원이 한계에 달했다는 잘못된 상황판단에 근거해 남부전선에서 결정적인 타격을 한차례 더 가하는 것으로 전략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오판을 하게 됐다는 겁니다. 블라우 작전이 시작되면서 독일군이 파악하지 못한 소련군의 새로운 부대가 잇따라 투입됐음에도 소련의 동원 역량을 끝까지 과소평가한 실책이 1942년 전역의 참패로 이어졌다는 지적은 타당합니다. 필자는 독일군이 전략 단위는 물론 작전 단위 정보에서도 실패했다고 평가합니다.

David Stahel의 에세이 "The Battle for Wikipedia: The New Age of ‘Lost Victories’?"는 위키피디아의 친독일 성향 필자들의 악영향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접근성이 높은 위키피디아에 친독일적인 성향을 가진 필자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하면서 제2차세계대전과 관련해 역사적으로 부정확한 내용을 쓰는 사례가 있다고 비판합니다. 필자는 위키피디아가 특히 청소년층에 큰 영향력을 끼치는 점을 지적하면서 우려를 표명하고 있습니다. 아주 흥미롭고 시사점이 있는 글 입니다.

2018년 3월 25일 일요일

인터넷 트롤의 성공적인 낚시질

독일 연방군사사연구소에서 대중을 대상으로 발행하는 군사사 계간지 Militärgeschichte 2017년 4호에서 황당한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수년전 한국 인터넷에서 스티븐 앰브로스의 책에 실린 노르망디의 조선인 포로에 대한 글이 유행했을때 여기에 편승해 나타난 '양경종'에 대한 낚시글이 사실인 것인양 인용된 것 입니다. 독일어권에서 가장 권위있는 군사사연구기관이 이런 실수를 하다니 믿어지지 않습니다. 충격적이군요. 그런데 '양경종'에 대한 영문 위키피디아 항목까지 개설되어 있다는걸 방금전 알게 됐습니다. 인터넷 세계에서 가짜 정보가 만들어져 유통되는 파급력이 크다는걸 실감했습니다. 일단 MGFA에 이 문제에 대한 메일을 보냈으니 어찌 될지 기다려 보지요.





2007년 8월 8일 수요일

아뉘(Hannut) 전투에서 독일군이 입은 손실

제가 중국에 있는 동안 페리스코프 포럼에 deSaxe란 분이 질문 하나를 하셨습니다. 당연히 이분이 질문하신 페리스코프 포럼에 답글을 다는게 예의 인데 이상하게도 로그인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분에게는 로그인이 되는 대로 답변을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분이 소개해 주신 위키피디아의 글이 상당히 흥미롭기 때문에 따로 여기에 글을 조금 적어둘까 합니다.

deSaxe란 분은 제가 예전에 썼던 아뉘 전투에 대한 글, "독일과 프랑스의 군단급 기갑전투 : 독일 16차량화군단과 프랑스 기병군단의 교전사례"가 위키의 내용과는 다르다고 질문을 하셨습니다. 이분이 인용한 위키피디아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When Erich Hoepner's XVI Panzer Corps, consisting of 3rd and 4th Panzer Divisions was over the bridges launched in the direction of the Gembloux Gap, this seemed to confirm the expectations of the French Supreme Command that here would be the German Schwerpunkt. The two French Cavalry armoured divisions, the 2nd DLM and 3rd DLMs (Division Légère Mécanique, "Mechanised Light Division") were ordered forward to meet the German armour and cover the entrenchment of 1st Army. The resulting Battle of Hannut on 12 May-13 May was, with about 1,500 AFVs participating, the largest tank battle until that date. The French lost about a hundred tanks, the Germans lost over 160 but managed on the second day to breach the screen of French tanks, which on 14 May were successfully withdrawn after having gained enough time for the 1st Army to dig in.

이 글에서는 독일군이 160대의 전차를 잃었다(lost)고 적고 있습니다. lost란 단어는 풍기는 뉘앙스가 "완전손실"에 가깝지요.

그런데 독일군의 "손실"이 160대 라는 것은 제가 썼던 글에도 있습니다.

프랑스측은 독일군의 손실이 더 크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실제 독일군의 전차 손실 중 완전 손실은 20대 가량에 불과했고 전체 피해는 5월 14일 기준으로 수리가능 한 피해와 고장을 합쳐 160대 정도였습니다.

즉 독일군의 손실이 160대 라는 것은 수리가능한 피해까지 합산한 것 입니다.

아뉘전투와 장블뢰전투가 사실상 끝난 5월 16일까지 독일군의 두 기갑사단의 전차 완전손실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제 3기갑사단 : 1호전차 10대, 2호전차 6대, 3호전차 2대, 4호전차 1대, 지휘전차 1대
제 4기갑사단 : 1호전차 15대, 2호전차 5대, 3호전차 4대, 4호전차 5대

두개의 전투를 치르고 난 뒤인 16일 까지 두 기갑사단을 합쳐서 49대의 전차를 잃은 것 입니다. 게다가 피해의 상당수가 5월 15일의 전투에서 발생한 것 이기때문에 12~13일의 아뉘전투에서 입은 피해는 당연히 더 적을 수 밖에 없습니다.

전투 피해를 집계할 때 언제나 혼동되는 것 이지만 완전손실과 수리가능한 손실을 혼동할 경우에는 뭔가 이상한 결론이 도출 될 수가 있습니다. 이점에서 위키에서 사용한 "lost over 160"은 약간 무리가 있는 표현이 아닐까 생각이 드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