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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8월 12일 화요일

보불전쟁 당시 프랑스군 포로의 대우문제

보불전쟁 당시 북독일연방의 프랑스군 포로 대우에 대한 꽤 재미있는 글을 하나 읽었습니다. 문제의 글은 『On the Road to Total War : The American Civil War and the German Wars of Unification, 1861~1871』에 실린 Mafred Botzenhart의 「French Prisoner of War in Germany, 1870~71」라는 글인데 분량은 좀 짧더군요.

가장 흥미로운 점은 프랑스군 포로의 사망률이 상당히 낮다는 것 입니다. 1871년 2월까지 북독일연방내의 포로수용소로 이송 된 285,124명의 프랑스군 포로 중 사망자는 7,230명으로 전체 포로 중 2.3%에 불과한 규모라고 합니다. 같은 책에 실린 Reid Mitchell의 글을 보면 남북전쟁 당시 북군 포로 195,000명과 남군포로 215,000명 중 포로수용소에서 사망한 포로의 숫자는 각각 30,000명과 26,000명으로 나타나는데 이것과 비교해 보면 보불전쟁 당시 프랑스 포로의 사망률은 매우 낮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포로들의 상태는 매우 비참해서 독일까지 이송된 대부분의 포로들은 낮은 건강상태에 전투로 인한 정신적 충격, 포로가 됐다는 스트레스 등이 겹쳐져 아주 엉망이었다고는 합니다만 그런 것 치고는 사망률이 꽤 낮습니다. 전체 포로의 숫자는 384,000명이고 독일로 이송되지 않은 나머지는 프랑스 현지의 수용소에 수감되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하겠지만 전체 포로를 상대로 조사하더라도 전체적인 경향은 큰 차이가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을텐데 가장 먼저 프랑스군 포로들이 상대적으로 짧은 포로생활을 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인 것 같습니다. 남북전쟁 당시의 포로들은 몇 년씩 포로생활을 했지만 보불전쟁 당시의 프랑스 포로들은 길어야 몇 달 정도의 수용소 생활을 한 뒤 석방되었지요.

그리고 포로에 대한 대우도 남북전쟁 당시의 미국보다는 북독일연방쪽이 더 좋았던 것 같습니다. 제대로 지켜졌는지는 의문스럽지만 1870년 7월30일 프로이센 전쟁성이 제정한 규정에 따르면 프랑스군 포로는 해당 계급의 북독일연방 군인에 상응하는 생활 수준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고 합니다. 저자인 Botzenhart는 프랑스군 포로의 탈출 시도가 상대적으로 적었던 이유를 비록 포로에 대한 처우가 뭐 같긴 하지만 참지 못 할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으로 보고 있습니다. 실제로 같은 글에 인용된 사례를 보면 독일 측은 적십자의 구호품이나 현금 전달에 대해 최대한 협조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물론 일선의 포로수용소장들은 업무가 늘어나는 것에 짜증을 내긴 했지만 어쨌건 국제법은 착실히 준수했다고 합니다. 1870년 겨울에 프랑스 본토와 포로수용소간의 우편 시스템이 자리 잡힌 이후 프랑스에서 오는 우편물의 폭증으로 포로수용소의 우체국들은 상당 기간 동안 업무 폭증으로 고생을 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잉골슈타트(Ingolstadt)의 한 포로수용소에는 하루 평균 600통의 편지가 왔는데 이것은 포로수용소 우체국의 하루 검열능력을 넘어서는 수준이었다고 하는군요. 그리고 프랑스군 장교포로의 처우는 더욱 좋았던 것으로 나타납니다. 장교포로들은 호텔이나 지역 유지의 자택에 거주했으며 구호품으로 포도주까지 받아 먹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고급 장교들의 경우는 친구들과 함께 지내기 위해서 포로 수용소를 옮겨달라고 신청하는 경우도 있었고 게다가 이런 신청은 잘 받아들여졌다고 하는군요.

보불전쟁은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 극도의 증오심을 불러일으킨 전쟁이었는데 막상 포로들에 대한 처우, 특히 사회 지도층이라 할 만한 고급장교들에 대한 처우가 점잖은 편이었다는 것은 꽤 흥미롭습니다.

2008년 2월 20일 수요일

친위대 사관학교 중국음식점이 되다 - 다하우 수용소와 바드 퇼츠 친위대 사관학교

여행 둘째 날은 다하우(Dachau), 그리고 바드 퇼츠(Bad Tölz)를 가기로 정했습니다. 그 때문에 원래 갈 계획이었던 잉골슈타트(Ingolstadt)의 바이에른 육군 박물관(Bayerisches Armeemuseum)은 다음 기회로 미뤘습니다. 그래도 좀 아쉬워서 잉골슈타트를 잠깐 가 봤습니다.

잉골슈타트 역 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야간이라 바이에른 육군 박물관은 못 찾았습니다. 비도 조금 내리고 있어서 길 찾기가 어렵더군요.

잉골슈타트 역은 매우 작지만 따뜻한데다 구내서점도 괜찮았습니다. 이곳 구내서점은 무려 오전 5시 30분에 여는데다 쓸만한 책이 더러 있더군요.

잉골슈타트 역의 대합실에는 도시의 발전 과정을 축약해서 보여주는 벽화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사진이 흔들린게 유감입니다. 빨리 좋은 카메라를 하나 장만해야 겠습니다.


잉골슈타트 역에서 책을 한 권 산 뒤 커피 한잔을 마시고 다하우 수용소로 향했습니다. 뮌헨 근처에서 가장 유명한 나치 시대의 유적이니 만큼 구경을 하고 가야 겠더군요.


정문 안 쪽에는 다하우 수용소를 해방시킨 미육군 제 20기갑사단의 공적을 기리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습니다.


다하우 수용소는 유명한 사적지인지라 단체 관람객이 매우 많았습니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한가한 분위기더군요.




다하우 수용소에서 희생된 유명인사 중 한 명인 Vojtech Preissig의 데드 마스크 입니다.


전쟁 당시 다하우 수용소의 축소모형입니다.


이 곳은 다하우 수용소의 화장터 입니다. 괴이하게도 수용소의 다른 건물들에 비해 훨씬 평온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다하우 수용소 관람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은 걸어서 갔습니다. 다하우 기차역까지 대략 40분 정도 걸리는 거리인데 중간에 제 3제국 시절 친위대가 연병장으로 쓰던 곳의 터가 있더군요.


그리고 조금 더 가니 케네디 광장이라는 곳도 있더군요.


그리고 다하우 역에 도착했습니다. 걸어다니면서 게으름을 피운 탓에 뮌헨으로 가는 기차를 놓쳤습니다.;;;;;


바드 퇼츠로 가려면 뮌헨으로 돌아가서 다시 기차를 한 번 더 갈아타야 합니다. 사진 오른쪽 끝에 있는 기차가 바드 퇼츠로 가는 녀석입니다.


바드 퇼츠 역입니다. 다른건 다 좋은데 유별나게 플랫폼이 지저분한 역이었습니다. 쓰레기가 정말 많이 떨어져 있더군요.;;;;


바드 퇼츠의 시내는 꽤 예쁘장하게 꾸며져 있었습니다. 정말 장난감 집 같더군요.






그런데 생각해 보니 바드 퇼츠에 온 목적은 예쁜 집들을 구경하는게 아니고 친위대 사관학교(SS-Junkerschule)를 답사하러 온 것 이었습니다.;;;;; 이런 정신상태하고는.

그런데 관광상품 파는 곳에 가서 물어보니 그런 곳이 있다는게 금시초문이라는 것 이었습니다. 뭐, 젊은 아가씨들이니 그런 우중충한 역사에 대해 모르는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관광상품 파는 곳 옆에 있는 바드 퇼츠 박물관으로 갔습니다.


박물관 매표소의 직원에게 물어보니 친절하게도 공짜 지도와 함께 위치를 잘 알려 줬습니다. 그런데 박물관에 들어오니 박물관 구경도 하고 싶어지더군요. 바드 퇼츠 박물관은 전형적인 민속박물관이었습니다. 생활사에 관심 있는 분들에게 추천하고 싶군요. 그런데 이 박물관의 마루 바닥은 너무 삐걱 거려서 걸어다니기가 두려울 정도였습니다.



박물관 관람을 마친 뒤 바로 친위대 사관학교 터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이날은 뭐가 씌였는지 지도를 잘못 보고 얼마 안되는 거리를 한참 돌아갔습니다.

친위대 사관학교는 바드 퇼츠 주민들을 위한 스포츠 센터와 상가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스포츠 센터에는 태권도장도 있더군요.



우수 인종 중의 엘리트들을 교육시키던 장소에서 열등인종의 무술을 가르치고 있다니 이거야 말로 나치들대한 최고의 조롱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태권도장 간판을 바라보며 한참 즐거웠습니다.

친위대 사관학교의 정문입니다. 처음 만들어 질 당시에는 아치가 있는 구조였다는데 전쟁이 끝난 뒤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건물 내로 들어가 보니 태권도장은 약과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연병장 터에는 아예 중국음식점이 들어섰더군요. 지옥에 있을(?) 히믈러가 약이 오를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