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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 21일 목요일

어머니는 강하다!!!


자식들이 어머니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습니다. 이것은 소련방 원수 주코프도 마찬가지였지만 이 양반의 어머니는 좀 비범한 면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나의 어머니 우스티냐 아르템예브나Устинья Артемьевна는 체르나야 그랴즈Черная Грязь 옆 동네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셨다. 부모님이 결혼하셨을 때 어머니는 35세였고 아버지는 50세였다. 두 분 모두 재혼이었다. 두 분 모두 처음 결혼하고 얼마 안되어 첫 배우자를 잃으셨다. 

어머니는 신체적으로 매우 강인한 분이셨다. 어머니는 200파운드*는 되는 곡식 자루를 가뿐히 짊어지고 옮기실 수 있었다. 어머니께서 이렇게 힘이 셌던건 할아버지를 닮아서라고 했다. 내 외할아버지 아르템은 말의 배를 등으로 받치고는 허리의 힘으로 말을 들어올릴 수 있었고, 말의 꼬리를 잡고 한번 힘만 줘서 말을 주저 앉힐 수도 있었다고 한다. 

Georgy Zhukov, Marshal of Victory: The Autobiography of General Georgy Zhukov (Pen and Sword, 2013) Kindle Locations 857-862

*200러시아 푼트는 대략 81kg 정도고 200영국 파운드는 90kg 입니다.


러시아의 어머니는 강합니다!

2015년 11월 20일 금요일

[번역글] 쿠르스크 전투가 1943년 5월 말에서 6월 초에 시작됐다면 독일군이 승리할 수 있었을까?

불법 날림 번역 한편 나갑니다. 이 글은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27-4 (2014)에 실린 발레리 자물린의 ‘Could Germany Have Won the Battle of Kursk if It Had Started in Late May or the Beginning of June 1943?’을 번역한 것 입니다. 이 글의 요지는 제2차세계대전 후에 독일 장성들과 이들을 지지하는 서방 학자들이 쿠르스크 전투의 패인을 거듭된 작전 연기로 인해 소련군이 충분히 대비할 시간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 것을 반박하는 것 입니다. 꽤 합리적인 주장이라고 생각되어 번역을 해봤습니다.




쿠르스크 전투가 1943년 5월 말에서 6월 초에 시작됐다면 독일군이 승리할 수 있었을까? 


발레리 자물린 

쿠르스크 전투가 1943년 5월 말이나 6월 초에 벌어졌다면 독일이 승리할 수 있었을까? 이것은 그저 단순한 의문이 아니다. 독일군이 쿠르스크 전투에서 패배한 중요한 원인이 1943년 5월 부터 6월까지 공세를 여러차례 연기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특히 서구 역사학계에서 지속적으로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치타델레 작전이 처음 연기된 것은 1943년 4월 20일이었는데 이때는 충분히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발터 모델 상급대장의 제9군이 아직 공세 준비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었다.(심지어 제9군은 공세를 위해 병력을 충분히 집결시킬 시간 조차 없었다.) 이때는 모두가 공세를 연기하는 데 찬성했다. 하지만 히틀러가 5월 4일에 열린 쿠르스크 공세에 관한 회의에서 공세를 다시 연기할 뜻을 밝히고 이것을 5월 6일에 공식적으로 명령함으로서 공격일이 6월 12일로 다시 연기되자 독일 국방군 수뇌부 내에서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다. 히틀러가 5월에 쿠르스크 공세를 연기하기로 한 이유는 그가 43년 하계공세의 비장의 카드라고 생각한 티거 전차와 판터 전차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작전을 연기하는 것은 계속됐다. 독일의 군수산업계는 1943년 5월은 물론 6월의 첫 10일 동안에도 티거와 판터의 생산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히틀러는 또다시 공세를 6월 21일로 연기했다가 다음에는 7월 3일로 연기했다. 히틀러는 6월 25일이 되어서야 치타델레 작전의 개시 일자를 7월 5일로 확정했다. 바로 이날이 제2차 세계대전 최대의 전투가 벌어진 날로 역사에 기록된 것이다. 

독일군 장성들은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부터 공세를 거듭해서 연기한 것 때문에 작전이 실패했다는 시각을 견지했다. 예를 들어 육군 원수였던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는 1951년에 독일군이 쿠르스크 전투를 4주나 늦게 시작했으며 ‘독일군 지휘관들은 전투가 시작되기 이전 부터 공세가 너무 늦어졌다고 생각했다’고 주장했다.1) 1943년 7월 쿠르스크 돌출부 남쪽의 벨고로드 방면에서 보로네지 전선군의 방어선에 대한 공세를 펼친 남부집단군 사령관이었던 육군 원수 에리히 폰 만슈타인은 1955년 독일에서 출간한 회고록에서 클라이스트와 비슷한 주장을 펼쳤다. 그는 치타델레 작전이 최소한 1943년 5월 말에서 6월 초에 실시되었다면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2)  이러한 주장은 주로  6월 초 까지 소련군은 겨울 전역에서 큰 피해를 입은 부대들을 운용하고 있었고 전력도 크게 감소한 상태였지만 6월에 공세를 지연시킴으로서 소련군 수뇌부가 소모된 일선 부대들의 전력을 보충할 시간을 벌게 됐다고 설명한다.
학계에서는 미국의 스티븐 뉴튼Steven NewtonKursk:The German View라는 저작에서 쿠르스크 돌출부 북쪽에서 중부전선군을 공격한 발터 모델 상급대장의 제9군의 자료에 근거해 이 주장을 학술적으로 가다듬었다.3)  하지만 이 책에 인용된 통계들, 특히 소련군의 각 부대별 전력에 대한 수치들이 모두 다 정확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가 내린 결론에 대해 의구심을 가질 수 밖에 없게 한다. 이 글에서는 최근 러시아 연방군 문서보관소에서 공개된 쿠르스크 전투 시기 붉은 군대의 기밀 해제된 자료들을 통해 이 문제를 심도깊게 다뤄보기로 한다. 

소련군이 쿠르스크 돌출부에서 승리를 거둔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세가지가 가장 중요하다. 첫 번째 이유는 쿠르스크 돌출부 방어에 투입된 부대들의 준비태세가 매우 높았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최고사령부가 대규모의 예비대를 투입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세 번째는 1943년 4월 부터 6월에 걸쳐 방대한 규모의 방어선이 구축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서구 역사학계에서는 첫 번째 이유만 주목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1943년 4월에서 5월에 걸쳐 중부전선군과 보로네지전선군, 그리고 1943년 7월 오룔과 벨고로드 방면에서 공격해온 독일국방군의 주공을 직접 맞아 싸운 각 야전군의 전력 보충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자. 

1943년 5월 쿠르스크 일대에 배치된 소련군의 준비태세가 높지 못했을 것이라는 독일군 장성들과 이들의 의견을 지지하는 서구 역사학자들의 주장은 소련군 최고사령부의 하계전역 계획과, 작전이 잠시 중단된 봄 기간에 쿠르스크 일대에 구축된 방어선의 규모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가 부족한 상태에서 나온 것이다. 1943년 4월 12일 크렘린에서 스탈린, 소련군 부사령관 주코프 소연방 원수, 총참모장 바실레프스키 소연방 원수, 부참모장 안토노프 상장의 참석하에 열린 회의에서는 봄의 라스푸티차가 끝나고 땅이 마르는 즉시(대략 5월 경) 독일 국방군이 쿠르스크 돌출부를 섬멸하기 위한 공세를 펼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따라 전략적인 방어 태세를 취하기 위한 결정이 내려졌다. 이 결정에 따라 5월까지 쿠르스크 돌출부를 방어하고 있는 중부전선군과 보로네지전선군의 병력을 최대한 보충하도록 하고, 해당 전선군의 군사위원회는 방어작전 계획을 수립하는데 총참모부와 긴밀히 협조하도록 했다. 중부전선군과 보로네지전선군 사령부는 각각 4월 25일과 28일에 방어준비계획을 완성했다고 보고했다. 최고사령부는 두 전선군사령부에서 제출한 쿠르스크 돌출부 방어 계획을 승인하고4) 5월 10일까지 예하 부대들이 적의 공격을 격퇴할 수 있도록 준비를 마치라고 명령했다. 또한 독일군이 공격해 올 것으로 예상되는 날자를 각 사령부에 통보했는데 그 날자는 적어도 1943년 6월 1일 이내일 것이라고 보았다.5)
1943년 4월 12일에 결정된 사안들이 5월 10일까지 완료된 덕분에 소련측은 기본적으로 독일군이 쿠르스크 지구에 투입할 수 있는 병력을 상대로 언제든지 성공적인 방어전을 전개할 수 있는 상태에 있었다. 6월초에는 중부전선군과 보로네지전선군의 전력이 이미 다음달 쿠르스크 전투가 시작됐을때 확보하고 있던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후술할 통계수치들은 최고사령부의 명령이 정확하게 이행되었음을 보여준다.
예를들어 1943년 3월 30일 로코소프스키 상장6)이 지휘하는 중부전선군에는 총 304,464명의 장교와 사병이 배속되어 있었는데 5월 5일까지 여기에 61,167명이 증가해 총 365,641명이 되었다.7) 이것은 쿠르스크 전투가 개시됐을 당시 중부전선군 병력의 78퍼센트에 해당하는 수준이었다. 같은시기에 독일 제9군의 주공을 상대한 푸호프Николай Павлович Пухов 중장이 지휘하는 제13군의 병력은 42,552명에서 114,456명으로 증가했고 이것은 7월 5일 기준 병력의 85퍼센트에 달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병력이 증가한 주된 이유는 제13군에 3개 사단이 증원된데 기인하지만 원래 소속되어 있던 사단의 병력도 18퍼센트로 대폭 증가했다.(평균 6,378명에서 7,527명으로) 소련 제13군이 하계 전역을 준비하던 기간 중에서  가장 많은 보충병력을 받은 시기가 바로 1943년 4월이었다. 5월 29일까지 제13군에 추가로 14,701명이 증원되어 총 병력은 129,157명에 달했고 이것은 7월 5일 기준 병력의 97퍼센트에 달하는 것 이었다. 한편 중부전선군의 총 병력은 5월 말 451,179명에 이르렀는데 이것은 치타델레 작전이 시작되던 날 확보하고 있던 병력의 97퍼센트에 달하는 것 이었다.8)
바투틴 원수가 지휘하는 보로네지전선군의 병력 보충 또한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보로네지 전선군의 병력은 4월 5일에 208,391명이었는데 5월 5일까지 143,068명이 증원되어 총 351,459명 또는 7월 5일까지 확보하기로 계획한 기준 병력의 84퍼센트에 달했다.9) 4월 5일에서 5월 5일까지 독일군의 주공 축선으로 예상되는 지점에 배치된 치스차코프Иван Михайлович  Чистяков 중장이 지휘하는 제6근위군에 30,262명의 보충병력이 배치되었고 총 병력은 장교와 사병 72,836명에 달했다.(예하 소총병 사단의 평균 전력은 5,982명에서 7,666명으로  28퍼센트가 증가했다.) 그리고 독일군의 조공이 가해질 것으로 예상되는 지역에 배치된 슈밀로프Михаил Степанович Шумилов 중장의 제7근위군은 9,047명의 보충병력을 받아 총 병력이 67,231명으로 증가했다. 제7근위군 예하의 소총병 사단의 평균 병력은 5,965명에서 7,600명으로 27퍼센트 증가했다. 보로네지 전선군의 총 병력은 5월 30일 기준으로 409,975명으로 증가했다.(7월 5일 당시 병력의 98퍼센트)  그리고 제6근위군과 제7근위군의 병력은 6월 5일 기준으로 각각 장교 및 사병 79,937명(7월 5일 기준 병력의 약 100%)과 71,332명(7월 5일 기준 병력의 약 93퍼센트)으로 증가했다.
포병 전력의 증강도 비슷한 추이를 보였다. 중부전선군과 여기에 배속된 제13군의 야포와 박격포 숫자는 5월 6일에 이미 1943년 7월 5일 보유량의 80퍼센트에 달했다.(로켓포는 제외한 수치이다.) 5월 29일 중부전선군은 4,544문의 야포 및 대전차포와 7,161문의 박격포를 보유했는데 이것은 각각 7월 5일 보유량의 87퍼센트와 89퍼센트에 달하는 수치였다. 제13군의 좌익을 방어하며 독일군의 강력한 공세를 받아낸 제70군은 야포 796문(7월 5일 보유량의 93퍼센트)과 박격포 1,280문(7월 5일 보유량의 98퍼센트)을 보유하고 있었다. 

중부전선군과 보로네지전선군의 기갑전력 보충은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중부전선군은 5월 3일 기준으로 674대의 전차와 38대의 자주포를 보유하고 있었는데10) 이것은 7월 5일 보유량의 40퍼센트 수준이었다.  그리고 그 예하의 제13군은 137대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는데11) 이것은 쿠르스크 전투가 개시됐을 당시 보유량의 64퍼센트 수준이었다. 반면 같은 시기 보로네지 전선군의 기갑전력은 상대적으로 양호한 수준이었다.
그 원인은 1943년 겨울과 봄 전역에 투입된 보로네지전선군과 남서전선군의 기동부대들이 심각한 손실을 입었던데 있다. 일부 전차군단은 총 전력이 완편 상태의 전차대대 수준에 불과한 경우도 있었다. 이때문에 최고사령부는 3월말에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렸다. 보로네지전선군과 남서전선군 소속의 기동부대들을 최우선적으로 증강하라.12)  4월 내내 공장에서 새로 생산된 기갑차량들은 보로네지전선군과 남서전선군에 최우선적으로 보급되었다. 이 덕분에 보로네지전선군의 기갑전력은 꾸준히 증강되었다. 예를 들면 1943년 4월 1일 부터 4월 15일까지의 불과 2주 남짓한 시기에 보로네지전선군 소속의 전차군단과 전차여단들은 219대의 신품 전차와 자주포, 그리고 6,432명의 병력을 보충 받았다.13)  그 결과 4월 9일에 276대의 가동가능한 전차와 자주포를 보유하고 있던 보로네지 전선군은 4월 21일에 540대를 보유하게 되었다. 새로 생산된 기갑차량에 더해 전선군 소속의 야전정비부대들도 파손된 차량을 열심히 수리했다. 여기에 더해서 최고사령부는 4월 28일자로 카투코프Михаил Ефимович Катуков 중장의 제1전차군을 보로네지전선군에 배속시켰다. 북서전선군에 배속되어 있던 제1전차군은 3월에 쿠르스크 지구로 이동해 온 상태였다. 제1전차군과 더불어 다른 독립 전차군단과 전차여단들도 보로네지전선군에 배속되었다.  카투코프의 제1전차군은 5월 5일에 거의 완편상태에 도달하여 481대의 전차와 자주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후 7월 5일까지 보충용으로 보급받은 기갑차량은 61대에 불과했다.14)
그래서 5월 초에는 중부전선군이 보로네지전선군 보다 기갑전력에서 열세에 있었다. 5월 15일 기준으로 보로네지전선군은 가동가능한 전차와 자주포 1,380대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쿠르스크 전투가 시작됐을 당시 보유하고 있던 수량의 76퍼센트에 해당했다. 하지만 중부전선군의 기갑차량 보유량은 그 절반에 불과했다. 그러나 5월 말로 접어들면서 상황이 변했다. 6월 5일에 중부전선군은 제13군 소속의 기갑차량 171대(7월 5일 보유량의 80퍼센트)를 포함해 총 1,216대(7월 5일 보유량의 72퍼센트)의 전차와 자주포를 보유했다.15) 

서방의 저명한 군사학자 데이빗 글랜츠와 조나단 하우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전략적 차원에서 공자가 방자에 대해 최소한 3배에서 2배의 숫적 우세를 달성하는 것이 이상적이라는 것은 여러 군사이론에서 말하는 공리일 뿐만 아니라 소련이 전훈을 분석하여 얻은 결론이기도 하다.”16) 히틀러는 치타델레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기갑부대를 특히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독일 중부집단군과 남부집단군의 기갑전력 규모에 대하여 논해 보자. 예를들어 1943년 5월 4일에 독일 제9군이 배속된 독일 중부집단군은 총 442대의 전차(3호전차와 4호전차, 티거는 없었다.)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이 중 71퍼센트인 314대가 가동가능한 상태였다. 같은 날 남부집단군은 1,087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이중 67퍼센트인 728대가 가동가능한 상태였다.17) 그러므로 이미 1943년 5월 시점에서 이 중요한 기갑전력에서 쿠르스크 돌출부 북쪽의 소련군은 독일군에 대해 1.5대 1의 우위를 가지고 있었고 돌출부 남쪽의 소련군은 1.3대 1의 우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독일군에게 불리한 상황은 쿠르스크 전투가 시작될 때 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니 처음부터 치타델레 작전에 부정적이어서 이 작전을 ‘멍청한 짓’이라고 했던 제6기갑사단장 휘너스도르프 장군의 주장에 동의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는 전체 작전이 ‘부대 지휘의 기초적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필자는 뉴튼이 모델의 근본적인 실수라고 주장한 것들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이 주장에 대해 숙고해 보고자 한다. 뉴튼은 1943년 5월 초 모델이 히틀러에게 상황을 보고하면서 독일 제9군과 소련 중부전선군의 기갑전력 비율을 잘못된 정보에 기반해 평가했다고 지적했다. 뉴튼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독일측의 정보평가는 소련 중부전선군이 1943년 4월말에서 5월초 사이에 전차와 자주포를 1,500여대 보유하고 있다고 보았으나 실제로는 1,000여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 정보평가는 모델이 공세를 연기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만든 치명적인  오류였다. 모델은 800대의 기갑차량을 가지고 1,500여대를 가진 적을 상대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공세에 필수적인 기갑전력, 특히 판터와 티거를 증원해 달라고 요청할 충분한 당위성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그가 실제로는 소련군이 자신 보다 200여대 정도 많은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는 사실만 알았다면 공세에 훨씬 더 적극적이었을 것이다. 제9군은 공세를 늦춘 결과 기갑전력이 25퍼센트 증가했지만 소련군은 거의 두배나 늘어났다.” 

가장 먼저, 뉴튼이 제시한 수치와 양군의 전력비는 완전히 틀린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5월 초에 독일 제9군이 보유한 전차는 800여대가 아니었다. 중부집단군 전체를 통털어도 그 절반에 불과했으며 소련 중부전선군은 이에 대해 거의 1.5배나 되는 기갑차량을 보유하고 있었다. 소련 중부전선군은 674대, 독일 중부집단군은 442대 였다. 두 번째로, 유명한 1943년 5월 4일 뮌헨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했던 만슈타인과 구데리안의 회고록에 따르면 이 회의에서 모델이 보낸 서한을 회람하고 공세를 5월에서 6월로 연기한다는 결정이 내려지기는 했지만 제9군에 기갑전력을 증원하는 문제는 회의의 주요 안건이 아니었다. 애초 부터 독일 제9군은 그리 많은 기갑차량을 보유하고 있지 못했다. 기갑전력은 남부집단군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모델의 제9군에 기갑전력을 대규모로 증원하겠다고 약속하지도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모델은 이미 4월 초 부터 소련군의 방어선을 뚫기 위해 만슈타인과는 다른 방법을 택하기로 결정했다. 바로 포병 및 자주포의 지원을 받는 보병과 전투공병이었다. 이와 같은 결정은 쿠르스크 전투가 개시될 때 까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모델은 제4기갑군 사령관 헤르만 호트와 마찬가지로 소련군의 방어선이 강화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불편한 의구심을 가지게 됐다. 제1파 공격부대가 소련군의 주 방어선과 제2방어선을 돌파해 기갑부대가 작전 공간에 돌입하도록 할 수 있을 것인가? 독일 제9군은  이미 5월 무렵에 방어선에서 가장 강력한 부분을 돌파한 뒤 소련군의 방어선 종심 깊숙히 공세를 확대하는데 투입할 최소한의 기갑전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델은 소련 중부전선군의 방어선을 확실히 돌파하기 위해서 보병의 진로를 열고, 야전 축성을 격파하고, 역습에 나설 소련 기갑부대를 분쇄할 수 있는 강력한 화력과 방어력을 갖춘 중전차를 제1파 공격부대에 배속하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1943년 4월 초 독일 육군본부는 그달 말 까지 제9군에 티거 전차를 배치해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5월 3일 까지도 티거 전차는 단 한대도 없었다. 즉 모델은 소련군의 기갑전력이 독일 제9군 보다 1.5배 우세해서 더 많은 기갑전력을 요구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티거, 판터, 페르디난트와 같은 중장갑과 강력한 화력을 가진 기갑차량을 요구한 것 이었다.그리고 필자는 미국에 소장된 독일 노획문서에서 모델이 방어선을 돌파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심각하게 정원에 미달하는 상태였던 보병사단의 보병 전력을 보충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내용을 찾았다.18)  보병사단의 병력 보충 상황이 그리 좋지 않았고 이것을 해결할 방법도 마땅치 않았기 때문에 독일 육군총사령부는 4월 20일에 처음으로 쿠르스크 공세 개시일을 연기했다.19) 그래서 모델 상급대장은 소련군의 방어진지 구축 상황을 보여주는 항공사진을 첨부한 보고서를 히틀러에게 보내 공세 자체를 취소하던가, 아니면 보병사단에 병력을 보충하고 중전차를 보급하는 작전적 결정을 내리도록 하려고 했다.그러므로 모델이 소련 중부전선군의 실제 기갑전력 규모를 정확히 파악했다면 5월에 쿠르스크 공세를 개시할 준비가 되어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은 동의할 수 가 없다. 모델은 치타델레 작전을 반대하고 있었다. 모델은 치타델레 작전이 성공할 가능성이 낮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설명하기 위해 히틀러에게 직언할 용기가 있었던 극소수의 사람 중 한명이었다.  

그리고 1943년 5월 상순에 소련 중부전선군과 보로네지전선군이 아무런 문제 없이 전투력을 보충했다고 서술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앞서 언급한 각 사령부의 보고서들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병력과 장비가 전선에 도착했다 하더라도 곧바로 작전 부대에 배치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각 전선군이 받았다고 되어 있는 무기와 장비 중 상당수는 여전히 보급창에 집적되어 있거나 열차편으로 하역될 기차역을 향하는 중이었다. 예를들면, 바투틴은 1943년 5월 11일 최고사령부에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보냈다. 

“보로네지전선군 예하 부대들은 방어 임무를 수행할 준비를 갖췄다. 제38, 40, 6근위군, 7근위군 예하의 소총병사단들은 극소수를 제외하면 대부분 8,000명 혹은 그 이상의 병력을 가지고 있다. 제69군 예하 소총병사단들의 병력은 6~7,000명 수준이다. 제35근위소총병군단20) 소속 사단들은 완편상태이다. 장비의 대부분은 수일 내로 철도편을 통해 도착할 예정이다. 그러므로 1943년 5월 14일 밤 까지는 대부분의 무기 보급이 완료될 것이다. 이 밖에 무기를 수송하는 열차 9대가 아직 이동 중에 있어 일선부대에 도착하는 것은 5월 18일에서 20일 사이로 예상된다. 이들 열차편이 도착하게 되면 각 부대는 박격포, 대전차소총, PPSh 기관단총, 연대포는 편제의 100퍼센트, 소총은 편제의 74퍼센트, 경기관총은 편제의 57퍼센트, 중기관총은 편제의 65퍼센트, 45mm 대전차포는 편제의 71퍼센트, 76mm 사단포는 편제의 80퍼센트, 122mm 곡사포는 편제의 70퍼센트를 갖추게 될 것이다.제69군 예하 사단들은 1943년 5월 20일 까지 최소한 병력 8,000명 수준으로 증강될 것이다. 전차 부대들은 대부분 완편 수준으로 증강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5월 중순에는 보로네지전선군의 모든 부대가 높은 수준의 전투준비태세를 갖추게 되었고, 보로네지전선군 사령부는 그들의 전투력을 높게 평가했다.(아무런 근거 없이 자신감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보로네지전선군은 최고사령부에 쿠르스크 지구에서 선제 공격을 취하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바실레프스키 원수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독일군이 공세를 개시할 것이라는 첫번째 날자(5월 8일)가 지나가자 보로네지전선군 군사평의회는 초조함을 느꼈고 적군이 공세를 취소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최고사령부에 선제공격을 개시할 지 여부를 결정해 줄 것을 요청했다. 스탈린은 보로네지전선군 군사평의회의 요구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주코프와 안토노프, 그리고 나는 스탈린이 선제공격 명령을 내리지 말도록 설득하는데 애를 먹었다.”21) 

하지만 보로네지전선군 사령부는 예하 부대들이 아직 전투준비를 마치지 못했다는 점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최고사령부가 먼저 지시를 내리지도 않았는데 바실레프스키의 증언 처럼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줬을지는 의심스럽다. 오히려 선제공격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필자는 1943년 6월 초 소련군의 전투준비태세에 대한 물음에 결론을 내리면서 이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소련군 최고사령부는 4월 12일 전략적 방어를 취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적군의 예상 공격 축선을 특정한 뒤 1개월의 기간 동안 쿠르스크 돌출부를 방어하는 부대들, 특히 주공 축선에서 작전하게 될 야전군들에 장비와 보충 병력을 보냈다. 5월 10일까지 중부전선군과 보로네지전선군은 계획대로 병력과 야포의 숫자라는 두가지 중요한 지표에서 7월 5일 기준의 80퍼센트를 초과했다.(기갑전력 측면에서는 각각 40퍼센트와 75퍼센트였다.) 6월 5일에는 중부전선군과 보로네지전선군의 총 병력이 7월 5일 기준의 98퍼센트를 넘어섰고, 야포는 거의 90퍼센트, 전차와 자주포의 숫자는 72퍼센트에서 76퍼센트에 달했다. 그러므로 두 전선군은 5월 중순에는 기본적으로 독일군의 쿠르스크 공세에 대처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예를 들면 독일 중부집단군은 같은 시기에 치테델레 작전 이전까지 보급받기로 되어 있었던 최소한의 기갑차량도 다 받지 못한 상태였다. 중부집단군 예하의 보병사단과 기갑사단들은 아직 병력과 장비를 편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어서 하계 공세에서 맡은 임무를 수행할 능력이 없었다. 하지만 소련측은 이미 5월에는 당시 독일군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으로 공격해 오더라도 격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러므로 독일 중부집단군과 남부집단군의 정면을 방어하고 있던 소련군이 5월 말 까지도 전투준비태세를 갖추지 못했다는 만슈타인의 주장은 당시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것 이었다.22)  

치타델레 작전을 좌절시킨데는 쿠르스크 지구에 배치된 아군의 준비 태세 뿐만 아니라 교모하고 종심 깊게 구축된 방어선도 큰 기여를 했다. 비록 독일 장군들과 서방의 학자들은 독일군의 패배를 초래한 결정적인 요인을 꼽을 때 거의 대부분 이것을 무시해 왔지만, 필자는 이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해서 이것을 간략하게나마 설명하고자 한다. 1943년 5월에서 6월 사이 로코소프스키와 바투틴의 주요 업무를 상세하게 분석하면 이들이 방어선을 더욱 강화하고 병사들이 방어시설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법을 훈련시키는데 노력을 기울였음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여기에는 매우 객관적인 이유가 있었다. 예를 들어 5월 초순 총참모부 검열단이 실시한 검열 결과에 따르면 보로네지전선군 방어 지구 주방어지대의 제1방어선과 제2방어선은 대부분의 방어 진지 공사가 완료된 상태였다. 그런데 제2방어지대와 제3방어지대에서는 구축 방식과 형태에서 치명적이지는 않지만 중요한 결함이 발견됐다.(조명지뢰를 방어선 중간에 매설했다던가, 참호를 너무 얕게 팠다던가, 위장이 형편없었다던가와 같은) 이러한 문제점들은 6월 초 까지 대부분 개선되었다. 예를들어 제6근위군은  5월 5일까지 90,000개의 대전차지뢰 중 17퍼센트, 64,000개의 대인지뢰 중 16퍼센트 만을 매설했다.(7월 5일 까지는 모두 매설됐다.) 제7근위군 지구도 비록 인접 부대에 비하면 사정이 나았지만 5월 16일까지도 지뢰 매설이 크게 진척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때까지 대전차지뢰 65,000개 중 22.4퍼센트, 대인지뢰 84,000개 중 16.9퍼센트가 매설되었다.23) 그러나 6월 5일에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제6근위군은 대전차지뢰는 계획량의 50퍼센트, 대인지뢰는 계획량의 62퍼센트까지 매설했다. 제7근위군은 대전차지뢰 46.2퍼센트, 대인지뢰 35.7퍼센트를 매설했다.그러나 5월까지 지뢰 매설이 지지부진했다고 해서 중부전선군과 보로네지전선군 방어선의 전차가 기동가능한 지역이 독일군의 기갑차량들에게 활작 열려있는 것은 아니었다. 5월 5일에는 주방어지대 전방과 방어지대 내의 지뢰매설 계획이 수립됐다. 그러나 각 방어지대 사이와 제2, 3방어지대 내의 지뢰매설 계획이 남아있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첫 번째는 봄의 진흙탕으로 물자수송과 공병의 작업에 어려움이 있었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폭약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4월 말 부터 폭약류의 보급이 지체되기 시작했고 각 전선군 사령부는 자체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물자, 특히 독일제 포탄과 지뢰 같은 노획 물자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노획 물자를 사용하면서 이곳 저곳에서 주관적인 요인 외에도 많은 어려움이 발생했다. 1943년 6월 18일 붉은군대 공병감 보로브예프 중장은 명령49호를 하달했는데 이 명령서의 서두는 다음과 같다.

“5월 23일에 보로네지전선군이 관리하고 있던 보로네지 지구의 대전차지뢰 임시야적장에서 폭발이 있었다. 보로네지전선군은 이곳에 2,700개의 대전차지뢰를 모아두고 있었다. … 독일제 T-35 대전차지뢰들은 뇌관이 없는 상태로 수송됐으며 기폭장약이 들어있는 상태로 낱개 단위로 야적장에 쌓여 있었다. 폭발의 원인은 쌓여있던 지뢰들을 옮기는 과정에서 부주의하게 취급했기 때문이다. 노무자들은 사전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독일제 지뢰의 폭발 방식과 취급 방법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참모진은 운반 작업을 조율하거나 감독하지도 않았다. 이 폭발로 지뢰 2,700개와 트럭 2대가 파괴되고 군인 7명과 야적장 부근에 있던 민간인 노무자 15~20명이 사망했다. 대전차지뢰 야적장은 교통량이 많은 주요 보급로에 인접해 있었다.”24) 

이런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여름으로 접어들면서 두 전선군의 방어선 구축은 거의 70퍼센트 가량의 완공율을 보였다.  

이런 점들을 감안하면 1943년 6월 1일 이후로는 독일측이 치타델레 작전을 계속 연기했더라도 5월 초와 마찬가지로 붉은군대에게는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쿠르스크 돌출부의 양쪽에 집결한 독일군은 소련 중부전선군과 보로네지전선군에 대해 군사이론에서 성공적인 작전의 필수 요소로 꼽는 숫적 우세를 달성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비슷한 수의 병력, 기갑차량, 야포를 확보할 수 조차 없었다. 뿐만 아니라 이미 1943년 5월이 되면 중부전선군과 보로네지전선군 후방의 스텝군관구에는 상당한 규모의 최고사령부 예비대가 집결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독일군은 1943년 5월이건 6월이건 간에 무슨 수를 쓰더라도 쿠르스크에서 승리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전후 독일군 장성들과 이들의 지지자들이 치타델레 작전을 여름이 시작될 무렵 개시했다면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한 것은 그저 불리한 상황에서 허세를 부리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문헌자료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에 따르면 에리히 폰 만슈타인의 회고록을 비롯한 서방측의 문헌에서 나타나는 이와 같은 관점의 주장들은 근거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는 만슈타인 본인도 독일군 수뇌부가 쿠르스크에 배치된 소련군의 전투력을 오판했다고 인정했다. 그리고 그는 전후에 소련의 정치-군사 지도자들이 쿠르스크 전투를 비롯한 1943년 하계전역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행한 일들에 대해 높게 평가했다. 만슈타인은 회고록에서 독일군 수뇌부는 소련측이 전시동원과 군수산업에서 그토록 뛰어난 조직 역량을 보여줄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다고 기록했다. 그는 붉은군대야 말로 머리 하나를 자르면 새로 두개의 머리가 생기는 ‘히드라’ 그 자체라고 평했다.25)


주석

1) V. Khristoforov, V. Makarov, and B. Khavkin, ‘Fel’dmarshal fon Kliest na Liubianke’ [Field Marshal von Kleist in the Lubianka Prison], Rodina 6 (2010) p. 94.  
2) E. Manstein, Uteriannye pobedy [Lost Victories] (Rusich, Smolensk, 2003), p. 543 
3) S. Newton, Kurskaia bitva nemetskii vgliad [Kursk: The German View] (Iauza, EKSMO, Moscow, 2006), pp. 463–476. 
4) 러시아에서는 공식적으로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5) TsAMO RF, F.16-A, Op.321, D.138. 
6) 로코소프스키는 1943년 4월 28일에 원수 칭호를 받았다.  
7) TsAMO RF, F.62, Op.1720, D.14,L.23. 
8) TsAMO RF, F.16-A, Op.321, D.138. 
9) TsAMO RF, F.203, Op.2843, D.425, L.425. 
10) TsAMO RF, F.62, Op.321, D. 16, L. 86obr. 
11) TsAMO RF, F.62, Op.321, D.16, L.86. 
12) 최고사령부 지령: 제23전차군단과 제2전차군단, 제1근위기계화군단을 재편성하라는 1943년 3월 30일 46090호, 제2근위전차군단과 제5근위전차군단을 재편성하라는 1943년 3월 30일자 46091호, 제3근위전차군단을 제편성하라는 1943년 3월 31일자 46092호, 제1근위’돈’전차군단, 제12전차군단, 제15전차군단, 제18전차군단을 재편성하라는 1943년 3월 31일자 46093호.  
13) V. N. Zamulin, Kurskii izlom: Reshaiushchaia bitva Velikoi Otechestvennoi [쿠르스크의 전환점: 대조국전쟁의 결정적 전투 (Iauza, Eksmo, Moscow, 2008), pp. 101–102.  
14) TsAMO RF, F.203, Op.2843, D.426: ‘Boevoi sostav 6 gv., 7 gv., 40, 38 A, 1 TA za 5 maia i 5 iulia 1943’ [1943년 5월 5일과 7월 5일 제6근위군, 제7근위군, 제40군, 제38군, 제1전차군의 전력]. 
15) TsAMO RF, F.62, Op.321, D.16, L.127, 127 obr. 
16) D. Glantz and D. House, Kurskaia bitva: Reshaiushchii povorotnyi punkt Vtoroi mirovoi voiny [쿠르스크 전투: 제2차세계대전의 결정적 전환점] (Astrel’, Moscow, 2006), p. 80. 이 책은 글랜츠와 하우스가 쓴 The Battle of Kursk (University Press of Kansas, Lawrence, KS, 1999) 러시아어 번역본이다. 
17) 군사사연구소(IVI) 부속문서고 , F.191, Op.233, D.108. 1943년 5월 3일 부터 1944년 6월 1일 까지 기갑총감 구데리안이 히틀러에게 한 보고, 제1편, 소연방 총참모부 군사사국, 1947, pp. 6–7. 
18) NARA, T.312. R.317.F.7886042, 7886046. 
19) NARA, T.312. R.317. F.7886050. 
20) 전선군사령부의 예비대였다. 
21) A. M. Vasilevsky, Delo vsei zhizni, Kn. 2 [Cause of an Entire Life, Book 2] (Politizdat, Moscow, 1988), p. 24. 
22) E. Manstein, Poteriannye pobedy, p. 543. 
23) TsAMO RF, F.38A, Op.9022, D.5, L.21. 
24) TsAMO RF, F.69A, Op.10751, L.11, Ll.37, 38. 
25) Manstein, Poteriannye pobedy [Lost Victories] (Rusich, Smolensk, 2003), p. 546.


2013년 7월 8일 월요일

[번역글] 프로호롭카 : 신화의 기원과 전개과정

날림번역글 하나 나갑니다.


오늘 소개할 글은 러시아의 유명한 군사사가 발레리 자물린이 작년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25-4호에 기고한 “프로호롭카 : 신화의 기원과 전개과정Prokhorovka: The Origins and Evolution of a Myth”이라는 글 입니다. 쿠르스크 전투에서 가장 유명한 프로호롭카 전투에 대한 과장된 신화가 어떻게 해서 만들어지고 널리 퍼져나갔는가를 추적한 꽤 흥미로운 글 입니다. 냉전시기 소련 역사서술의 문제점을 잘 보여주는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냉전시기 독소전쟁에 대한 인식이 지나치게 독일 편향적이라는 비판이 많았지만 냉전기 소련의 역사서술도 만만치 않게 문제가 많았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또한 2차대전 중 소련 야전부대의 정보 수집과 처리 과정의 문제에 대해서도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프로호롭카 : 신화의 기원과 전개과정



발레리 자물린(쿠르스크 주립대학)


1943년 쿠르스크 일대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대조국전쟁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제 이 잊을 수 없는 날들이 있은지 70여년이 되어가지만 러시아는 물론 다른 나라에서도 쿠르스크 전투에 대해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있다. 쿠르스크 전투는 전쟁의 전환점이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신화를 만들어냈다. 그러한 신화 중 가장 오랫동안 계속된 것은 바로 ‘프로호롭카에서 일어난 역사상 최대의 전차전’일 것이다.


러시아 연구자들이 2000년 이래로 프로호롭카역 일대에서 전개된 전투에 대해 수많은 중요한 연구를 발표하여 이 전투의 규모와 중요성에 대하여 명확하고 정확하게 규명해냈음에도 불구하고 프로호롭카 전투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전투였다는 이야기가 계속해서 유포되고 있다. 이 ‘신화’를 유포시킨 원동력은 소련과 러시아의 정부 기관이 편찬한 수많은 문헌들이다. 이러한 관찬 서적에서 제5근위전차군 소속의 4개 군단과 무장친위대 소속의 2개 기갑척탄병사단이 격돌한 이 전투는 ‘대조국전쟁의 결정적인 전투’라고 불리웠다.1)  동시에 이러한 책의 저자들은 그들의 “저작은 근거가 빈약하지 않으며.... 앞서 출간된 저작들이 밝혀낸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다”고 주장했다.2)


사실 프로호롭카의 전설은 1943년 여름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수십년간에 걸쳐 만들어졌다. 최근 러시아연방 국방문서보관소의 문서들이 기밀해제되고 나서야 이 신화의 형성을 추적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신화에서 전투의 규모는 가장 중요한 것이다. 소련 시기 역사서술에서는 1943년 7월 12일 양군을 합쳐 총 1,200대에서 1,500대에 달하는 전차와 자주포가 정면으로 격돌했다는 시각이 주를 이루었다. 대부분의 역사상의 신화들이 그렇듯 프로호롭카의 신화를 만들어낸 사람들은 바로 이 전투에 참전한 사람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제5전차군 사령관 로트미스트로프Павел Алексеевич Ротмистров 중장과 그의 참모진이 지대한 역할을 했다.


프로호롭카에서 제5전차군(제5전차군은 두 지역에서 작전을 했다)과 격돌한 독일 기갑부대의 전력에 관한 첫번째 공식 문헌은 보로네지 전선군 정보참모부의 보고서로서 1943년 7월 12일에 작성된 것이다. 이날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정보장교들과 전방의 정찰대는 정보 보고서에 들어갈 정보들을 꼼꼼하게 수집했다. 이 보고서에서는 “적군은 프렐레스트노예Прелестное-얌키Ямки  방면에는 아돌프히틀러 전차사단, 다스 라이히 전차사단, 토텐코프 전차사단3)의 전차 250여대의 지원을 받는 3개의 차량화보병연대를 투입했으며,  크리브초보Кривцово-카자츠예Казачье 방면에는 100대의 전차의 지원을 받는 2개의 차량화보병연대를 투입하여 제69군을 포위 섬멸하기 위해 프로호롭카 방면으로 총공격에 나섰다”고 기록했다.4)


전투가 급박하게 전개된데다 상대적으로 좁은 지역에 엄청난 전력이 집결했다는 점을 감안해서 이 보고서에 실린 숫자를 (프로호롭카 남서쪽의 )프렐레스트노예-얌키 방면에서 작전을 펼친 3개의 무장친위대사단(모두 제2SS 기갑군단 소속이었다.)과 (기차역 남쪽의) 크리브초보-카자츠예 방면에서 공격해온 제3기갑군단이 실제로 보유한 전차 숫자와 비교하면 보로네지 전선군의 정보장교들은 매우 훌륭한 분석을 했다고 볼 수 있다. 7월 11일 오후 7시 45분 경 제2SS기갑군단은 가동가능한 전차와 돌격포 273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제3기갑군단은 100대를 보유하고 있었다.5)  하지만 필자가 연방국방문서보관소에서 찾아낸 자료를 근거로 했을때 제2SS기갑군단 지휘부는 아돌프 히틀러사단의 모든 기갑차량(77대)와 다스라이히 사단의 모든 기갑차량(95대)을 제5근위전차군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투입한 반면 토텐코프 기갑척탄병사단이 보유한 기갑차량 122대 중에서는 오직 34대만 투입했다. 토텐코프 사단은 나머지 기갑전력을 제5근위전차군의 인접 부대를 상대하기 위해 투입했다.


1943년 7월 24일, 쿠르스크 전투가 종결된 뒤 보로네지 전선군 군사평의회 위원이었던 흐루쇼프 중장은 직접 작성한 ‘1943년 7월 12일 쿠르스크주 프로호롭카 지구에서 전개된 전차전에 대하여’라는 보고서에 전선군 정보참모부가 추산한 통계를 첨부했는데 이 보고서는 스탈린에게 직접 제출된 것이다.6) 즉 흐루쇼프가 스탈린에게 제출하는 보고서에 전선군 정보참모부가 추산한 통계를 넣은 것은 이 통계를 신뢰한다는 뜻이었다.


전투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제5근위전차군은 7월 12일에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프로호롭카역 남서쪽에서 전개된 전투에 다음과 같은 전력을 투입했다. 제18전차군단(전차 149대), 제29전차군단(전차 199대 및 자주포 20대), 제2전차군단(전차 52대), 그리고 제2근위전차군단의 전력 대부분(전차 94대). 로트미스트로프는 독일 제3기갑군단을 저지하기 위해 전개된 남쪽의 전투에는 제5근위전차군의 선견대인 제2근위전차군단과 제5근위기계화군단(합쳐서 총 148대의 전차와 10대의 자주포)을 투입했다.7) 즉 프로호롭카 남서쪽의 그 유명한 전차전이 전개된 이곳에서, 7월 12일에 소련군의 전차와 자주포 514대가 독일군의 전차와 돌격포 206대를 상대했으며 남쪽에서는 소련군의 기갑차량 158대가 독일군의 기갑차량 100대와 격돌한 것이다. 즉 7월 12일에 양군이 보유하고 있었던 1,200대의 기갑차량 중 실제로 전투에서 격돌한 것은 978대였다는 것이다.(프로호롭카 남서쪽에서 720대, 프로호롭카역 남쪽에서 258대)


하지만 역사서에 실리게 된 것은 제5근위전차군 사령부에서 로트미스트로프가 추정한 추정치와 잘못된 정보를 바탕으로 작성한 통계였다. 제5근위전차군 사령관 로트미스트로프가 서명한 “1943년 7월 7일에서 24일까지 제5근위전차군의 전투 작전 개요”라는 보고서는 프로호롭카 남서쪽의 전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전차전은 전례없는 규모로 전개되어 양쪽을 합쳐 1,500대 이상의 전차와 다양한 종류의 수많은 야포와 박격포, 항공기가  전선의 협소한 지역에 투입되었다.”8) 이 보고서에 따르면 독일군은 프로호롭카 방면의 공격에 남서쪽에서는 7개 기갑사단과 4개 보병사단을, 남쪽에서는 2개 기갑사단과 1개 차량화사단을 투입하였으며 기갑차량은 1,000대에 달했다. 그리고 대략 700~800대의 전차를 보유한 6개 기갑사단으로 추정되는 전력이 제5근위전차군과 직접 교전했다는 것이다.9)


이 보고서에서 프로호롭카 지구의 전투에 독일군이 투입한 것으로 추정한 사단의 내역은 황당하기 그지없다. “프로호롭카 방면의 공격에 투입된” 독일군에 제48기갑군단의 모든 예하부대를 포함시켰는데 정작 이 부대는 오보얀Обоянь과 오보얀 서쪽으로 공격중이었으며 프로호롭카 근처로는 간 적도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제5근위전차군을 상대로 투입된 집단”에는 제16차량화보병사단과 제17기갑사단, 무장친위대 비킹 사단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 부대들은 예비대로 있었으며 치타델레 작전에는 투입된 적도 없었다.(제5근위전차군 사령부는 이 3개 사단이 프로호롭카를 남쪽에서 공격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야전군 참모부의 정보업무에 대해서는 항상 많은 비판이 있었고 특히 1943년 동계 전역에서 두드러졌다. 1943년 4월 19일 스탈린이 모든 단위의 제대에 정찰 및 정보 조직을 강화하고 효율성을 높이라는 특별명령에 서명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1943년 여름 전역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보로네지 전선군은 전선군 사령부의 정보참모처를 포함한 각급제대의 정보업무에 대해 많은 비판을 했다. 주된 문제점은 정보장교들의 자질이 부족했으며 정보를 분석하는데 문제가 많았으며 적의 병력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강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전선군 단위의 정보 부서는 야전군 단위의 정보 부서와 비교했을때 훨씬 효율적이었다.


제5근위전차군도 예외는 아니었다. 예를 한가지 들어보겠다. 7월 12일 밤에 제5근위전차군 사령부가 작성한 정보보고서는 “적의 제9기갑사단과 제17기갑사단, 그리고 새로 증원된 제6기갑사단은 남부지구(필자 주 : 프로호롭카 남부)에 400~600대의 전차를 투입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10) 이 수치는 7월 14일 오후 3시 35분 보로네지 전선군 사령부에 보고한 내용에도 실려있다.11) 하지만 실제로 프로호롭카 남쪽 축선에서 공격해 오던 켐프 분견군은 7월 14일 06시 기준으로 제503중전차대대를 제외하고 82대의 기갑차량을 보유하고 있었을 뿐이다. 제503중전차대대의 가동가능한 티거는 6대에서 10대 사이였다.12) 게다가 가동가능한 전차 40대를 보유해 가장 양호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던 제7기갑사단은 프로호롭카 방면으로 공격하지도 않았다. 제7기갑사단은 프로호롭카역 남쪽에서 코로차 Короча방향으로 공격하고 있었다. 반면 남쪽에서 프로호롭카 방면으로 공격하던 제19기갑사단이 보유하고 있었던 가동가능한 기갑차량은 28대에 불과했다. 보로네지 전선군 사령관 바투틴은 7월 13일 오후 로트미스트로프와 회의를 하면서 의심을 드러냈다. “정말 동지가 보고한 것 처럼 적군이 이렇게 많은 수의 전차를 동원할 수 있는 것이오?”13) 로트미스트로프도 숫자가 과장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전선군 사령관 바투틴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다른 사람의 탓을 하기 시작했다. 로트미스트로프는 이렇게 대답했다. “본인은 남부방면의 적 전차가 300대에서 400대를 넘지는 못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적 기갑집단의 규모에 대해 보고를 한 것은 항공 정찰을 한 부대입니다. 그래서 적의 기갑전력을 과대평가하게 된 것 입니다.”14)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장교들은 필자에게 특정 축선의 적 기갑전력을 추정하기 위해서 두가지의 기초적인 방법을 사용했다고 증언해 주었다. 먼저 확인된 독일군 기갑사단의 숫자에 독일군 편제표의 전차 숫자(200대)를 곱해서 총 전력을 추정한 뒤 전투에 투입된 기갑사단은 전투를 하루 치를 때 마다 10~15대씩 전차 숫자를 줄여나가는 방식을 사용했다. 하지만 1943년 여름에는 독일군 기갑사단의 편제가 3개 전차대대(200대)에서 2개 전차대대(166대)로 줄어들었다. 두 번째 방법으로, 지상군 사령부는 적 기갑전력의 추정치를 얻기 위해 항공정찰을 사용했다. 항공정찰 결과가 나오면 이것을 사령부에서 추정한 추정치와 비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찰기 조종사들은 실제로 많은 실수를 저질렀다. 지상군 지휘관의 추정치에 맞춰줘야 한다는 압박도 있었지만 독일군 역시 위장과 기만에 능란했다. 예를 들어, 프로호롭카의 전투가 끝난 뒤인 7월 15일 제69군의 공병 정찰부대는 독일군이 기만에 사용한 것들을 발견했다. 독일군은 더미를 이용해서 프로호롭카 남쪽에 가짜 전차부대를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15) 그러므로 로트미스트로프에게 프로호롭카 남쪽에 독일군이 600대의 전차를 투입했다고 보고한 항공정찰부대는 독일군의 기갑전력을 추산하면서 가짜 전차까지 포함시켰던 것이다.


게다가 보로네지 전선군 예하 야전군들의 정보부서는 서로 정보를 교환하지 않았다. 만약 야전군 단위의 정보부서들이 제 역할을 수행했다면 제5근위전차군 사령부는 (위에서 언급한 보고서의 내용 처럼) 독일 제6기갑사단이 난데없이 등장한 것을 믿지 않고 대신 이 사단이 1943년 7월 6일 이래로 제7근위군과 제69군을 상대로 작전을 펼치고 있었으며 7월 14일 오전에는 겨우 14대의 가동가능한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음을 알았을 것이다.16) 다른 한편으로 적군을 과대 평가하는 것은 아군 지휘관들에게 도움이 되었다. 소련군 지휘관들은 전투를 엉망으로 지휘하거나 예하 부대들이 전선을 고수하지 못하는 경우는 물론 사소한 실수 까지도 독일군의 전력이 우세한 것이 원인이라고 주장했으며 특히 기갑전력을 과장했다.


지금까지 언급한 이유 때문에 제5근위전차군의 문서에는 로트미스트로프가 바투틴과의 회의에서 추정했던 것 처럼 프로호롭카 남쪽의 독일군 집단이 보유한 기갑차량을 300대로 추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보로네지 전선군의 정보참모처가 추정한 것에 따르면 이것 조차 세배 이상 과장된 수치였다. 어째서 독일군의 기갑전력을 300대로 추정한 것인지는 명확하게 알 수 없으나 제5근위전차군의 보고서에서 제16차량화보병사단과 제17기갑사단, 무장친위대 비킹 사단을 언급한 것은 이 추정치에 신뢰도를 부여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소련군의 야전군 단위 사령부는 확고하게 정해진 업무 절차를 가지고 있었다. 만약 포로를 잡거나 문서를 노획하지 못할 경우 인접 부대의 정면에 한두개의 적군 사단이 출현했다는 정보는 그냥 추정하여 짐작할 뿐이었다. 제5근위전차군 사령부는 물론 보로네지 전선군 사령부나 다른 어떤 부대도 쿠르스크에서 방어전을 전개하는 동안 독일군이 투입했다고 추정된 위에서 언급한 부대들의 존재를 객관적인 방법을 통해 검증하려 하지 않았다. 보로네지 전선군의 무전 감청 부대는 제16차량화보병사단의 통신소가 전선군의 담당구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을 한번 포착한 일이 있었다. 하지만 이 정보는 확실하게 입증되지 못했다. 사실 제16차량화보병사단의 지휘부가 7월 12일 이후 보로네지 전선군의 담당구역에 사단의 투입을 준비하기 위해 이 지역을 실제로 방문하기는 했었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면서 적군의 계획은 변경되었다. 그래서 위에서 언급한 독일군 3개 사단의 출현은 그저 추정으로 짐작할 뿐이었다. 제5근위전차군 사령부도 이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지만 프로호롭카 전투의 규모를 과장하기 위해서 보고서에는 그대로 포함시켰다. 이 사실은 로트미스트로프가 제5근위전차군이 상대한 부대에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과 제11기갑사단도 있다고 주장한 것과 마찬가지로 로트미스트로프가 의도적으로 신화를 만들려고 한 것이 원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제5근위전차군의 “전투작전 개요”라는 보고서로 돌아가서 이 보고서에서 제5근위전차군이 보유하고 있었던 전차를 몇대라고 기록했는지 살펴보자. 제5근위전차군 사령부는 “700~800대의 기갑차량을 가지고” 독일 기갑부대에 맞섰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이 보고서에서는 “제5근위전차군과 배속받은 전차군단(제2전차군단과 제2근위전차군단)은 793대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고 적고 있다.17)  하지만 예하 부대의 보고서에 있는 내용을 정리해 보면 수치가 조금 달라진다. 가동 가능한 전차만 808대가 있었던 것이다.18)  하지만 보고서 작성자를 비판할 필요는 없다. 이 정도의 오류는 사소한 것이며 수리를 받고 전열에 복귀한 차량의 숫자를 포함하지 못한 것이 원인으로 생각된다.


이에 따라 제5근위전차군 사령부가 ‘포착한’ 800여대의 독일 전차에 이와 거의 동일한 규모의 소련 전차(793대)를 합한 다음, 다시 여기에서 7월 12일 오전 남쪽에서 진격해오는 독일 제3기갑군단을 저지하기 위해 차출된 전차 100대를 제외하면 이 보고서에서 언급한 1,500대라는 수치를 얻을 수 있다. 동시에 중요한 문제를 하나 지적할 필요가 있다. 만약  흐루쇼프가 보고서에 포함시킨,  보로네지 전선군 정보참모처가 집계한 통계를 따른다면 18~20km 떨어진 프로호롭카 일대의 두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거의 1,000대의 전차가 격돌한 것이 된다. 그런데 제5근위전차군 사령부가 집계한 통계에서는 총 1,500대에 달하는 전차가 훗날 프로호롭카의 전차전장으로 불리게 되는 프로호롭카 열차역 남서쪽의, 전차가 기동하기 힘든 골짜기로 분리된 좁은 지역(5×12km)에서 격돌했다고 되어있다.


이렇게 해서 프호로브카 전투에 투입된 기갑차량의 숫자를 다르게 추산하는 두 가지의 이야기가 만들어 진 것이다. 이것을 각각 “전선군의 주장”과 “전차군의 주장”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전선군의 주장”이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서술되었고 비교적 현실에 가까운 반면 “전차군의 주장”이 만들어진 이유는 명확하지가 않다. 어째서 제5전차군 사령부는 전투가 벌어진 뒤 한달에 걸쳐서 전투의 규모를 과장하고 그 좁은 장소에 그토록 황당한 숫자의 전차가 투입되었다고 한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서는 프로호롭카 전투가 벌어지고 난 직후의 상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보로네지 전선군 예하의 부대들은 1943년 7월 12일 반격을 가했지만 명령 받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게다가 ‘충격부대’인 로트미스트로프의 제5근위전차군은 대략 10~11시간의 전투만으로 전투이 투입한 차량의 50%를 잃어버렸다. 1943년 7월 16일 방어전투가 종결될 무렵 제5근위전차군은 실질적으로 모든 전투 임무를 수행할 수 없는 상태였다. 보유하고 있었던 전차와 자주포 중에서 334대가 완전히 격파되어 전장에 널려있었고 200여대는 여전히 수리 중이었다.19) 당중앙위원회 비서인 말렌코프가Гео́ргий Максимилиа́нович Маленко́в 이끄는 조사단이 이 엄청난 피해의 원인을 조사하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파견되었다. 조사단의 조사는 2주간에 걸쳐 진행되었고 그 결과는 스탈린에게 보고되었다. 그리고 제5근위전차군 사령관을 직위해제해서 군법회의에 회부해야 하느냐를 두고 문제가 제기되었다. 7월 말까지 로트미스트로프의 운명은 풍전등화였으나 총참모장 바실레프스키 원수의 노력으로 스탈린의 분노는 가라앉았으며 1943년 8월 말 로트미스트로프는 쿠르스크 전투에서의 공적으로 1급 쿠투조프 훈장을 수여받았다. 이로서 프로호롭카에서 발생한 사건을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 전투는 승리한 것이 되어야 했으며 피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말아야 했던 것이다.


이 문제가 해결되고 나서야 제5근위전차군의 ‘전투작전의 개요’라는 보고서가 쓰여졌다. 이 보고서는 두 개의 판본이 있다. 1943년 8월에 먼저 붉은군대 전차 및 기계화부대 총국Управление командующего бронетанковыми и механизированными войсками 에 제출된 선행보고서가 있다. 그리고 1943년 9월 30일에 최종본이 승인받았다. 여기서 살펴봐야 할 문제는 두 개의 판본이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느냐는 것이다. 선행보고서는 분량이 짧다. 이 보고서는 일정 기간의 전투를 종료한 뒤 작성하는 전형적인 야전군 단위 제대의 보고서이다. 이러한 보고서의 목적은 전투 경험을 공유하고 상급사령부에 부대의 전투 능력을 향상시기키 위한 제안을 하는데 있다. 동시에 이러한 보고서는 해당 사령부가 그들이 지휘하는 부대(그리고 사령부 그 자체)를 상급사령부의 눈에 들도록 만들고 결과가 어쨌든 간에 전투 중에 범한 오류와 실패에 ‘연막을 치는’ 기회를 만들었다.(이미 끝난 전투는 현재 진행되는 전투에는 영향을 끼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제5근위전차군이 작성한 ‘전투작전의 개요’ 또한 마찬가지였지만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았다. 로트미스트로프도 다른 지휘관들과 마찬가지로 전투 보고서를 통해 프로호롭카에서 행한 엄청난 손실을 낸 역습으로 생긴 부정적인 인상을 덮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로트미스트로프는 다른 소련 장군들처럼 수백대의 독일 전차를 격파하고 수많은 독일군을 죽였다는 내용을 강조하는 대신 전투가 엄청난 규모였다고 조작해서 제5근위전차군이 역사상 유례가 없는 규모의 독일 기갑부대를 격파한 것으로 만들었다. 이 보고서에서 전차 1,500대라는 숫자를 두 번이나 강조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첫 번째 언급은 이 글의 윗부분에서 인용했으며 두 번째 언급은 완전히 뜬금없게도 이 보고서의 결론 부분에 실려있다. 이렇게 해서 제5근위전차군의 참모진은 일어났던 전투의 규모를 강조하기 위해 군에서 일반적으로 쓰는 간결한 문체를 사용하는 대신 선전선동을 하는데나 쓸법한 문장과 표현을 사용했다.


“7월 12일 대조국전쟁의 역사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전차전이 전개되었다. 이 전투에는 양군을 합쳐 1,500대의 전차가 투입되었다. 전차군의 예하 부대는 적에게 막대한 인력과 물자의 손실을 입히고 적이 더 진격하지 못하도록 저지했으나 일정 기간 동안 방어전투를 수행할 수 밖에 없었다. ”20)


하지만 (이 점을 제외하면-역자) 이 보고서는 전반적으로 당시의 다른 보고서들과 비슷하며 노골적인 왜곡이나 자화자찬은 없다고 할 수 있다. 이점은 이해할 만하다. 보고서를 작성한 참모장교들에게는 이 보고서를 읽을 사람이 이 보고서에 강조하고자 하는 요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전차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하지만 이것은 지휘부의 실책이 아니었다. 전투는 전무후무한 규모로 전개되었으며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전투가 전무후무한 규모였다는-역자) 개념이 (보고서의-역자) 수많은 자료에 파묻혀서는 안됐던 것이며 이러한 개념은 보고서의 시작 부터 끝까지 이어져야 했다.


그런데 어째서 소련의 역사가들은 “전선군의 주장”이 아니라  “전차군의 주장”을 바탕으로 서술하게 된 것일까? 군대의 기록관리체제는 기록 관리에 필요한 기밀성과 특별한 요구사항을 가지고 신속하게 일을 처리한다. 보로네지 전선군 정보참모처의 보고서와 흐루쇼프의 보고서는 작전문서로서 앞서 예로 든 “증언” 또는 “요약” 보고서와는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즉시 봉인되어 수십년간 군 문서보관소에 보관된다. 정보참모처의 보고서를 포함한 보로네지  전선군 사령부의 기록은 1993년까지 기밀로 분류되어 연방문서보관소에 보관되어 있었으며 흐루쇼프가 스탈린에게 보낸 서한은 2007년에야 공개되었다. 반면 제5근위전차군이 전차 및 기계화부대 총국에 제출한 “전투작전개요”는 이미 1943년 8월에 “대조국전쟁 경험 연구 및 활용부”에서 사용하고 있었다.


이 조직은 1943년에 전쟁 경험을 공유하고 연구하여 전투 수행을 성공적으로 할 수 있도록 적용하고 부대를 운용하기 위하여 야전군급 이상의 사령부에 만들어졌다. 이 조직에는 부대와 고급 사령부의 보고서를 바탕으로 각 병과의 정기간행물이나 총참모부의 전쟁경험 연구 총서, 각급 군사학교의 강의와 세미나 등에 실리는 글을 집필하는데 필요한 분석 자료를 준비하는 것을 담당하는 장교를 둘 것을 명시하고 있었다.


1943년 여름 전역의 전투는 8월 말경 마무리 되었고 전차 및 기계화부대 총국은 기갑부대들의 전투 작전을 분석한 문헌을 간행할 임무가 있었다. 그리하여 1943년 9월 10일 전차 및 기계화부대 총국 예하의 대조국전쟁 경험 연구 및 활용부 부장인 사포지코프Г. Сапожков 대령은 총참모부의 대조국전쟁 경험 연구 및 활용국 국장인 베치늬П. П. Вечный 소장에게 두 편의 글을 제출했다. 그 중 한편의 제목은 “벨고로드 축선에서 제5근위전차군이 7월에 수행한 작전”이었다. 이 글은 제5근위전차군이 주장한 내용을 기반으로 1,500대의 전차가 투입된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얼마 뒤인 10월 31일에 베치늬 소장은 사포지코프 대령이 작성한 글과 (마찬가지로 제5근위전차군이 작성한 “전투작전개요”를 바탕으로) 곤차로프 대령이 작성한 “오늘날의 방어 작전에서의 전차부대”21)라는 글의 초고를 상급 사령부의 간부들을 교육하는 전차 및 기계화부대 군사 대학의 부교장에게 제출해 상급부대가 이 글을 활용하도록 했다.22)


위에서 언급한 글들은 모두 1943년 말에서 1944년 사이에 간행되었다. 비록 총참모부의 전쟁경험연구 총서는 널리 읽히는 글이 아니었고 일반 도서관에 비치되지도 않았지만 고급 사령부의 참모진을 대상으로 정리된 정보는 사실상 거의 모든 고급 간부와 장군들이 읽게 되면서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1,500대의 전차가 투입되었다는 정보는 기밀 정보의 제약을 넘어섰으며 이로써 신화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이 신화는 소련인들을 수십년간 뿌듯하게 해 주었고 장교들을 교육하는 군사학교에서도 널리 읽히게 되었다.


총참모부나 전차 및 기계화부대 총국의 간부들이 제5근위전차군이 만든 정보를 교차 검증해서 이것이 널리 확산되는 것을 막을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럴 수가 없었다. 1943년 8월 초 제5근위전차군 사령부의 참모 장교 중 한명이었던 체르닉 소령이 작성한 1943년 7월 7일에서 24일 까지 제5근위전차군이 수행한 작전에 대한 글 한편이 총참모부에 제출되었다. 이 글 또한 제5근위전차군의 작전을 극찬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고 1943년 7월 12일의 전투에 대해서도 매우 높은 평가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글은 1,500대라는 황당한 숫자의 전차가 투입된 장대한 규모의 전투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았다.23)  체르닉 소령이 작성한 글은 총참모부의 대조국전쟁 경험 연구 및 활용국의 간부들을 포함한 총참모부의 간부들은 모두 열람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포지코프 대령의 전차 및 기계화부대 총국 예하 대조국전쟁 경험 연구 및 활용부도 이 글의 열람을 요청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조국전쟁 경험 연구 및 활용 부서는 야전군과 전선군이 제출한 문건에 실린 통계를 교차 검증할 의무가 없었다. 각 부대가 제출하는 보고서에 있는 정보는 그냥 정확한 것으로 간주해서 글을 집필하는데 그냥 사용되었다. 하지만 일선 부대들과 직접 연결되어 있는 총참모부의 다른 부서들은 보고서를 교차 검증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사포지코프 대령과 베치늬 장군이 담당한 부서에 황당한 허풍을 걸러낼 방법이 없었던 것이 학문적 영역(기갑 및 기계화부대 학교와 같은)과 대중적인 매체를 통해 1,500대라는 전차가 투입됐다는 신화가 퍼져나간 주된 원인이었다.


제5근위전차군 사령부는 1,500대라는 전차의 숫자가 널리 알려지고 여기 저기서 인용될 것을 예측하고 있었을까? 필자는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처음에 이 일은 철저히 실용적인 관점에서 진행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에야 이렇게 만들어낸 이야기가 유용하다는 점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몇년이 지난 뒤 이 전설을 만드는데 일조한 장군들은 이 이야기를 그들이 쓴 책과 글, 그리고 각종 연설을 통해 강력하게 밀고 나가기 시작했다.


이 신화가 대중에게 퍼져나간 과정은 덜 흥미롭다. 여러편의 저작에서 소련의 대중이 프로호롭카 전투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은 1953년에 출간된 마르킨 대령의 “쿠르스크 전투Курская битва”라고 주장하고 있다.24)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대중에게 알려진 쿠르스크 전투와 프로호롭카에서 벌어진 전투에 대해 자세한 내용을 담은 첫번째 책은 총참모부 군사실에서 편찬한 쿠르스크전투Битва под Курск로서 이 충실한 단행본은 1945년에 출간되었다.25)  이 책은  1943년 총참모부에 제출된 자료들을 바탕으로 집필되었다. 그래서 프로호롭카 전투를 1,500대의 전차가 투입된 “전례없는 규모”였다고 평가하고 있다.26)


하지만 이 신화가 훨씬 더 많은 대중에게 퍼지도록 한 것은 마르킨 대령의 연구였다. 총참모부에서 출간한 책은 다시 출간되지 않았지만 마르킨의 책은 대규모로 두 차례나 간행되었다. 게다가 제2쇄가 출간된 1958년은 소련에서 민간 연구자들도 참여한 제2차세계대전 연구가 활발하게 전개되던 시점이었다. 이때 소련 지도부는 처음으로 대조국전쟁에 대한 공간사를 여섯권의 단행본으로 간행할 것을 결정했다. 그리고 마르킨의 저작이 간행될 당시 쿠르스크 전투에 대한 저작은 매우 드물었고 문서보관소는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마르킨의 책에 들어있는 정보는 다른 문헌과 대중매체를 통해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다.


이 당시는 해외에서도 제2차세계대전사와 소련의 연구성과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흐루쇼프 집권기의 소련은 상대적으로 개방적이었기 때문에 소련에서 간행된 저작들이 서방으로 소개되는데 도움이 되었으며 이 중 마르킨의 저작은 이 시점에서 1943년 여름에 전개된 사건을 상세하게 다룬 유일한 저작으로 널리 읽혔다. 서방의 독자들이 7월 12일의 전투에서 1,500대의 전차가 격돌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마르킨의 저작을 통해서였다.


이 전설이 더욱 더 퍼져나가는데 일조한 것은 로트미스트로프였다. 로트미스트로프는 1960년 프로호롭카 전투에서 그의 역할에 대한 회고록을 발표했다. 로트미스트로프의 책에 제5근위전차군의 “전투작전개요”가 주로 활용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로트미스트로프 본인의  명성이 높았던 데다가 그는 (1960년 당시 소련의 지도자였던) 흐루쇼프 중장이 쿠르스크 전투 동안 했던 행동을 크게 칭찬하기 까지 했다. 그래서 로트미스트로프의 책은 얇은 소책자에 불과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로호롭카의 신화가 더 확산될 수 있는 동력을 제공했고 로트미스트로프의 책에서 프로호롭카 전투를 다룬 부분은 다른 저작에 널리 인용되었다. 그러므로 ‘대조국전쟁사история великой отечественной войны’에서 1943년 7월 12일의 전투에 대해 자세히 서술해야 했을 때 편찬책임자가 로트미스트로프의 회고록을 인용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리고 대조국전쟁사의 집필진 중 한명이었던 콜투노프는 필자에게 로트미스트로프의 회고록이 1940년대 말과 1950년대에 간행된 쿠르스크 전투에 대한 총참모부의 자료에 있는 내용을 반영하고 있었으며 1,500대의 전차라는 동일한 수치를 담고 있는 점이 당시 집필진에게 중요하게 받아들여졌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이점은 로트미스트로프의 회고록이 정확하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1964년, 20여년간 소련의 대중 매체를 통해 널리 퍼져나간 제5근위전차군 사령부가 만들어낸 신화는 약간 수정된 형태로 대조국전쟁사 제3권에 수록되었다. 그리하여 제5근위전차군이 만들어낸 이야기는 공인받은 자료로 취급되게 되었다. 대조국전쟁사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수정된 내용은 미미했다. 7월 12일의 전투는 “대조국전쟁의 역사에서 가장 큰 규모”에서 “대조국전쟁에서 가장 처참했던 전차전”이라는 약간 겸손한 간판을 달게되었다. 하지만 1,500대의 전차가 투입되었다는 잘못된 수치는 그대로 실렸다.27)


두번째는 로트미스트로프가 전투에 대한 평가와 규모를 과장하는 등의 미심쩍은 방법으로 스스로를 드높이는 것을 싫어했던 고위 장성들이 1960년대 부터 목소리를 함께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군부는 물론 사회에서도 존경받는 인물 들이었으며 이들의 의견은 무시하기 힘들었다. 예를들어 소연방 원수 주코프는 프로호롭카 전투는 그 규모에도 불구하고 부차적인 것이었으며 로트미스트로프의 노력으로 널리 알려진 것이므로 로트미스트로프는 좀 더 겸손해 질 필요가 있다고 썼다.28)


로트미스트로프는 그의 동료들이 불만을 품고 있다는 점과 이들의 비판이 받아들여지는 점을 알아채고는 1963년 부터 프로호롭카 전투에 투입된 전차의 숫자를 1,500대에서 1,200대로 줄이는 방식으로 비난을 완화해 보려 했다. 로트미스트로프는 군사사저널военно-исторический журнал 편집장과의 면담에서 프로호롭카 남서쪽에서 전개된 전투에 제5근위전차군이 투입했던 전차의 숫자를 800대에서 500대로 줄였다. 하지만 로트미스트로프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독일군이 700대의 전차를 투입했으며 이를 직접 상대한 제5근위전차군의 제1제대는 500대를 조금 넘는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29)  그리하여 프로호롭카 남서쪽에서는 1,500대가 아니라 1,200대의 전차가 격돌한 것이 되었다. 하지만 제5근위전차군이 1943년에 제출한 보고서에는 양측이 1,600대의 전차를 투입했으며 제5근위전차군은 이 중 100대를 좌익인 프로호롭카 남쪽에 투입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나머지 300대의 전차는 어떻게 된 것인가?


로트미스트로프는 이미 널리 퍼진 이야기와 상충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새로운 전설을 만들어냈다. 이에 따르면 “제5근위전차군의 제2제대와 예비대는 양 측면에 가해지는 적의 위협을 소멸하기 위하여 동원되었다.” 즉 로트미스트로프는 300대의 전차를 제5근위전차군의 우익(프로호롭카 역 북쪽의 프숄강 너머)으로 보내버렸다. 실제로 7월 12일에 234대의 전차가 양익에 투입되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사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 번째, 이러한 이동은 제5근위전차군의 “전투작전개요”에 서술되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500대의 전차가 프로호롭카 남서쪽의 전투에서 그대로 격돌했다고 서술하는 점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두 번째, 로트미스트로프가 이 인터뷰에서 한 설명에 동의한다면 300대의 전차가 우익에 투입되어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전투작전개요”에서 7월 12일 저녁 이 지구에 투입된 2개 여단은 92대의 전차만 보유하고 있었다는 서술과 상충된다.30)  그렇다면 나머지 200대는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프로호롭카 전투의 규모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는 자료들은 비밀로 묶여 있었기 때문에 로트미스트로프는 복잡한 상황을 피할 수 있었다. 로트미스트로프는 체면을 구기지 않고도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갔고 다른 사람이 그의 주장에 반박할 걱정도 할 필요가 없었다.


이 때문에 ‘대조국전쟁사’ 3권이 출간된 1964년 이후 복잡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각종 문헌과 매체에서 로트미스트로프가 군사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말한 1,200대라는 수치를 인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공식 역사서인 대조국전쟁사에서는 1,500대의 전차가 격돌했다고 기록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무시하고 넘어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1966년 설립된 군사사연구소의 수뇌부는 프로호롭카의 신화를 ‘업데이트’ 하는 것을 추천했다. 달리 말하면 두개의 수치가 서로 충돌하지 않고 조화를 이루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군사사연구소에서 일하고 있었던 콜투노프가 이 골치아픈 문제를 해결하는 임무를 맡았다.


콜투노프는  군사사연구소장 솔로브예프와 함께 집필해서 1970년에 출간한 쿠르스크 전투에 대한 새로운 책에서 두개의 이야기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고자 했다. 콜투노프는 ‘전투작전개요’에서 명시하고 있는 700대의 전차로 구성된 독일군의 기갑집단을 두 지역으로 나눠서 배치했다. 이것은 남서쪽에서 500대의 전차를 가지고 공격해온 독일 제2SS기갑군단과 200대의 전차를 가지고 남쪽에서 진격해 온 제3기갑군단의 전차를 합한 숫자였다. 또한 콜투노프는 제48기갑군단도 프로호롭카 전투에 투입되었다는 주장은 무시했다. 또한 제5근위전차군의 우익에 수백대의 전차가 투입되었다는 이야기도 제외했다. 이렇게 해서 로트미스트로프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분노를 식힐 수 있었다. 그리고 콜투노프는 제5근위전차군이 보유했던 가동가능한 전차의 숫자(793대)는 고치지 않았다. 대신 700대의 전차가 프로호롭카역 남서쪽의 ‘전차 전장’에 투입되었으며 100대의 전차가 프로호롭카역 남쪽에서 제3기갑군단을 상대했다는 것을 명확히 했다. 콜투노프의 방식은 로트미스트로프가 불만을 가지게 했지만 콜투노프가 책의 마지막 부분에 넣은 구절은 그런 불편한 심기를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그리하여 프로호롭카 남서쪽에서는 양측의  전차와 자주포 1,200대가 격돌했으며 프로호롭카 남쪽에서는 300대가 격돌했다. 그러므로 두 전장에 투입된 숫자를 합하면 총 1,500여대의 기갑차량이 프로호롭카 남서쪽과 남쪽의 전투에서 격돌한 것이다.”31)


소련의 “고위층”은 이 책을 높게 평가했다. 그리고 이 책이 출간되면서 1,500대와 1,200대라는 숫자는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진실로 여겨져 온’ 신화가 완성되고 오늘날 까지도 러시아의 여려 연구와 출판물에 일부 반영되는 ‘수정된’ 이야기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주)
1) 예를들어 N.F. Naidenov, U neznakomogo poselka [At an unknown village], p. 69 (Belgorod:
State Military-Historical Museum ‘Prokhorovskoe pole’, 2006)를 참고하라.
2) Ibid., p. 7.
3) 이 부대들은 기갑사단으로 편제되고 장비되었지만 공식적으로 기갑척탄병, 또는 차량화사단으로 불렸다.
4) TsAMO RF, F.203, Op.2843, D.452, L.95.
5) N. Zetterling and A. Frankson, Kursk 1943: A Statistical Analysis, London, Portland, Frank Gass, 2000, Tables A6.4 – A6.10.
6) 흐루쇼프의 보고서는 Voenno-istoricheskii zhurnal [Vizh], 9 (2007), p. 27.에 실려있다.
7) V.N. Zamulin, Zasekrechennaia Kurskaia bitva [The Classified Kursk battle], Moscow, Iauza -
EKSMO, 2008, p. 770.
8) TsAMO RF, F. 5 gv. TA, Op. 4948, D.19, L.7
9) TsAMO RF, F. 5 gv. TA, Op. 4948, D. 19, L. 5.
10) TsAMO RF, F.203, Op.2843, D.461, L.65.
11) Ibid.
12) Zetterling and Frankson, Kursk 1943, Tables A6.7–A6.9.
13) TsAMO RF, F.203, Op.2843, D.461, L.62
14) Ibid., L.63.
15) TsAMO RF, F.426, Op. 10765, D.13, L.10.
16) Zetterling and Frankson, Kursk 1943, A6.7.
17) TsAMO RF, F.5 gv. TA, Op.4948, D.19, L.6
18) V. Zamulin, Demolishing the Myth. The Tank Battle at Prokhorovka, Kursk 1943: An Operational Narrative, Solihull, UK, Helion & Company, 2011, Table 21.
19) Ibid., Table 28.
20) TsAMO RF, F.5 gv. TA, Op.4948, D.19, L.20.
21) TsAMO RF, F.3416, Op.1, D.16, L.36
22) TsAMO RF, F.3416, Op.1, D.16, L.1.
23) TsAMO RF, F.5 gv. TA, Op. 4948, D.51, L.1-27.
24) I.I. Markin, Kurskaia bitva [Kursk battle], Moscow, Voenizdat, 1953.
25) N.M. Zamiatin, P.S. Boldyrev, F.D. Vorob’ev, N.F. Artem’ev, and I.V. Parot’kin, Bitva pod Kurskom: Kratkii ocherk [The Battle of Kursk: A Concise Study], Moscow, Voenizdat, 1945.
26) Ibid., p. 20.
27) Istoriia Velikoi Otechestvennoi voiny [History of the Great Patriotic War], Volume 3, Moscow,
Voenizdat, 1964, p. 271.
28) G.K. Zhukov, Vospominaniia i razmyshleniia [Recollections and reflections], Vol. 3, Moscow,
Voenizdat, 1964, p. 271.
29) ‘Rasskazyvaiut komandarmy’ [‘Army commanders speak’] Voenno-istoricheskii zhurnal, 7 (1963),
p. 77.
30) TsAMO RF, F.5 gv. TA, Op.4948, D.19, L.9.
31) G.A. Koltunov and B.G. Sokolov, Kurskaia bitva [Kursk battle], Moscow, Voenizdat, 1970, p. 1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