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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20일 금요일

[번역글] 쿠르스크 전투가 1943년 5월 말에서 6월 초에 시작됐다면 독일군이 승리할 수 있었을까?

불법 날림 번역 한편 나갑니다. 이 글은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27-4 (2014)에 실린 발레리 자물린의 ‘Could Germany Have Won the Battle of Kursk if It Had Started in Late May or the Beginning of June 1943?’을 번역한 것 입니다. 이 글의 요지는 제2차세계대전 후에 독일 장성들과 이들을 지지하는 서방 학자들이 쿠르스크 전투의 패인을 거듭된 작전 연기로 인해 소련군이 충분히 대비할 시간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 것을 반박하는 것 입니다. 꽤 합리적인 주장이라고 생각되어 번역을 해봤습니다.




쿠르스크 전투가 1943년 5월 말에서 6월 초에 시작됐다면 독일군이 승리할 수 있었을까? 


발레리 자물린 

쿠르스크 전투가 1943년 5월 말이나 6월 초에 벌어졌다면 독일이 승리할 수 있었을까? 이것은 그저 단순한 의문이 아니다. 독일군이 쿠르스크 전투에서 패배한 중요한 원인이 1943년 5월 부터 6월까지 공세를 여러차례 연기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특히 서구 역사학계에서 지속적으로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치타델레 작전이 처음 연기된 것은 1943년 4월 20일이었는데 이때는 충분히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발터 모델 상급대장의 제9군이 아직 공세 준비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었다.(심지어 제9군은 공세를 위해 병력을 충분히 집결시킬 시간 조차 없었다.) 이때는 모두가 공세를 연기하는 데 찬성했다. 하지만 히틀러가 5월 4일에 열린 쿠르스크 공세에 관한 회의에서 공세를 다시 연기할 뜻을 밝히고 이것을 5월 6일에 공식적으로 명령함으로서 공격일이 6월 12일로 다시 연기되자 독일 국방군 수뇌부 내에서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다. 히틀러가 5월에 쿠르스크 공세를 연기하기로 한 이유는 그가 43년 하계공세의 비장의 카드라고 생각한 티거 전차와 판터 전차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작전을 연기하는 것은 계속됐다. 독일의 군수산업계는 1943년 5월은 물론 6월의 첫 10일 동안에도 티거와 판터의 생산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히틀러는 또다시 공세를 6월 21일로 연기했다가 다음에는 7월 3일로 연기했다. 히틀러는 6월 25일이 되어서야 치타델레 작전의 개시 일자를 7월 5일로 확정했다. 바로 이날이 제2차 세계대전 최대의 전투가 벌어진 날로 역사에 기록된 것이다. 

독일군 장성들은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부터 공세를 거듭해서 연기한 것 때문에 작전이 실패했다는 시각을 견지했다. 예를 들어 육군 원수였던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는 1951년에 독일군이 쿠르스크 전투를 4주나 늦게 시작했으며 ‘독일군 지휘관들은 전투가 시작되기 이전 부터 공세가 너무 늦어졌다고 생각했다’고 주장했다.1) 1943년 7월 쿠르스크 돌출부 남쪽의 벨고로드 방면에서 보로네지 전선군의 방어선에 대한 공세를 펼친 남부집단군 사령관이었던 육군 원수 에리히 폰 만슈타인은 1955년 독일에서 출간한 회고록에서 클라이스트와 비슷한 주장을 펼쳤다. 그는 치타델레 작전이 최소한 1943년 5월 말에서 6월 초에 실시되었다면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2)  이러한 주장은 주로  6월 초 까지 소련군은 겨울 전역에서 큰 피해를 입은 부대들을 운용하고 있었고 전력도 크게 감소한 상태였지만 6월에 공세를 지연시킴으로서 소련군 수뇌부가 소모된 일선 부대들의 전력을 보충할 시간을 벌게 됐다고 설명한다.
학계에서는 미국의 스티븐 뉴튼Steven NewtonKursk:The German View라는 저작에서 쿠르스크 돌출부 북쪽에서 중부전선군을 공격한 발터 모델 상급대장의 제9군의 자료에 근거해 이 주장을 학술적으로 가다듬었다.3)  하지만 이 책에 인용된 통계들, 특히 소련군의 각 부대별 전력에 대한 수치들이 모두 다 정확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가 내린 결론에 대해 의구심을 가질 수 밖에 없게 한다. 이 글에서는 최근 러시아 연방군 문서보관소에서 공개된 쿠르스크 전투 시기 붉은 군대의 기밀 해제된 자료들을 통해 이 문제를 심도깊게 다뤄보기로 한다. 

소련군이 쿠르스크 돌출부에서 승리를 거둔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세가지가 가장 중요하다. 첫 번째 이유는 쿠르스크 돌출부 방어에 투입된 부대들의 준비태세가 매우 높았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최고사령부가 대규모의 예비대를 투입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세 번째는 1943년 4월 부터 6월에 걸쳐 방대한 규모의 방어선이 구축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서구 역사학계에서는 첫 번째 이유만 주목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1943년 4월에서 5월에 걸쳐 중부전선군과 보로네지전선군, 그리고 1943년 7월 오룔과 벨고로드 방면에서 공격해온 독일국방군의 주공을 직접 맞아 싸운 각 야전군의 전력 보충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자. 

1943년 5월 쿠르스크 일대에 배치된 소련군의 준비태세가 높지 못했을 것이라는 독일군 장성들과 이들의 의견을 지지하는 서구 역사학자들의 주장은 소련군 최고사령부의 하계전역 계획과, 작전이 잠시 중단된 봄 기간에 쿠르스크 일대에 구축된 방어선의 규모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가 부족한 상태에서 나온 것이다. 1943년 4월 12일 크렘린에서 스탈린, 소련군 부사령관 주코프 소연방 원수, 총참모장 바실레프스키 소연방 원수, 부참모장 안토노프 상장의 참석하에 열린 회의에서는 봄의 라스푸티차가 끝나고 땅이 마르는 즉시(대략 5월 경) 독일 국방군이 쿠르스크 돌출부를 섬멸하기 위한 공세를 펼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따라 전략적인 방어 태세를 취하기 위한 결정이 내려졌다. 이 결정에 따라 5월까지 쿠르스크 돌출부를 방어하고 있는 중부전선군과 보로네지전선군의 병력을 최대한 보충하도록 하고, 해당 전선군의 군사위원회는 방어작전 계획을 수립하는데 총참모부와 긴밀히 협조하도록 했다. 중부전선군과 보로네지전선군 사령부는 각각 4월 25일과 28일에 방어준비계획을 완성했다고 보고했다. 최고사령부는 두 전선군사령부에서 제출한 쿠르스크 돌출부 방어 계획을 승인하고4) 5월 10일까지 예하 부대들이 적의 공격을 격퇴할 수 있도록 준비를 마치라고 명령했다. 또한 독일군이 공격해 올 것으로 예상되는 날자를 각 사령부에 통보했는데 그 날자는 적어도 1943년 6월 1일 이내일 것이라고 보았다.5)
1943년 4월 12일에 결정된 사안들이 5월 10일까지 완료된 덕분에 소련측은 기본적으로 독일군이 쿠르스크 지구에 투입할 수 있는 병력을 상대로 언제든지 성공적인 방어전을 전개할 수 있는 상태에 있었다. 6월초에는 중부전선군과 보로네지전선군의 전력이 이미 다음달 쿠르스크 전투가 시작됐을때 확보하고 있던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후술할 통계수치들은 최고사령부의 명령이 정확하게 이행되었음을 보여준다.
예를들어 1943년 3월 30일 로코소프스키 상장6)이 지휘하는 중부전선군에는 총 304,464명의 장교와 사병이 배속되어 있었는데 5월 5일까지 여기에 61,167명이 증가해 총 365,641명이 되었다.7) 이것은 쿠르스크 전투가 개시됐을 당시 중부전선군 병력의 78퍼센트에 해당하는 수준이었다. 같은시기에 독일 제9군의 주공을 상대한 푸호프Николай Павлович Пухов 중장이 지휘하는 제13군의 병력은 42,552명에서 114,456명으로 증가했고 이것은 7월 5일 기준 병력의 85퍼센트에 달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병력이 증가한 주된 이유는 제13군에 3개 사단이 증원된데 기인하지만 원래 소속되어 있던 사단의 병력도 18퍼센트로 대폭 증가했다.(평균 6,378명에서 7,527명으로) 소련 제13군이 하계 전역을 준비하던 기간 중에서  가장 많은 보충병력을 받은 시기가 바로 1943년 4월이었다. 5월 29일까지 제13군에 추가로 14,701명이 증원되어 총 병력은 129,157명에 달했고 이것은 7월 5일 기준 병력의 97퍼센트에 달하는 것 이었다. 한편 중부전선군의 총 병력은 5월 말 451,179명에 이르렀는데 이것은 치타델레 작전이 시작되던 날 확보하고 있던 병력의 97퍼센트에 달하는 것 이었다.8)
바투틴 원수가 지휘하는 보로네지전선군의 병력 보충 또한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보로네지 전선군의 병력은 4월 5일에 208,391명이었는데 5월 5일까지 143,068명이 증원되어 총 351,459명 또는 7월 5일까지 확보하기로 계획한 기준 병력의 84퍼센트에 달했다.9) 4월 5일에서 5월 5일까지 독일군의 주공 축선으로 예상되는 지점에 배치된 치스차코프Иван Михайлович  Чистяков 중장이 지휘하는 제6근위군에 30,262명의 보충병력이 배치되었고 총 병력은 장교와 사병 72,836명에 달했다.(예하 소총병 사단의 평균 전력은 5,982명에서 7,666명으로  28퍼센트가 증가했다.) 그리고 독일군의 조공이 가해질 것으로 예상되는 지역에 배치된 슈밀로프Михаил Степанович Шумилов 중장의 제7근위군은 9,047명의 보충병력을 받아 총 병력이 67,231명으로 증가했다. 제7근위군 예하의 소총병 사단의 평균 병력은 5,965명에서 7,600명으로 27퍼센트 증가했다. 보로네지 전선군의 총 병력은 5월 30일 기준으로 409,975명으로 증가했다.(7월 5일 당시 병력의 98퍼센트)  그리고 제6근위군과 제7근위군의 병력은 6월 5일 기준으로 각각 장교 및 사병 79,937명(7월 5일 기준 병력의 약 100%)과 71,332명(7월 5일 기준 병력의 약 93퍼센트)으로 증가했다.
포병 전력의 증강도 비슷한 추이를 보였다. 중부전선군과 여기에 배속된 제13군의 야포와 박격포 숫자는 5월 6일에 이미 1943년 7월 5일 보유량의 80퍼센트에 달했다.(로켓포는 제외한 수치이다.) 5월 29일 중부전선군은 4,544문의 야포 및 대전차포와 7,161문의 박격포를 보유했는데 이것은 각각 7월 5일 보유량의 87퍼센트와 89퍼센트에 달하는 수치였다. 제13군의 좌익을 방어하며 독일군의 강력한 공세를 받아낸 제70군은 야포 796문(7월 5일 보유량의 93퍼센트)과 박격포 1,280문(7월 5일 보유량의 98퍼센트)을 보유하고 있었다. 

중부전선군과 보로네지전선군의 기갑전력 보충은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중부전선군은 5월 3일 기준으로 674대의 전차와 38대의 자주포를 보유하고 있었는데10) 이것은 7월 5일 보유량의 40퍼센트 수준이었다.  그리고 그 예하의 제13군은 137대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는데11) 이것은 쿠르스크 전투가 개시됐을 당시 보유량의 64퍼센트 수준이었다. 반면 같은 시기 보로네지 전선군의 기갑전력은 상대적으로 양호한 수준이었다.
그 원인은 1943년 겨울과 봄 전역에 투입된 보로네지전선군과 남서전선군의 기동부대들이 심각한 손실을 입었던데 있다. 일부 전차군단은 총 전력이 완편 상태의 전차대대 수준에 불과한 경우도 있었다. 이때문에 최고사령부는 3월말에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렸다. 보로네지전선군과 남서전선군 소속의 기동부대들을 최우선적으로 증강하라.12)  4월 내내 공장에서 새로 생산된 기갑차량들은 보로네지전선군과 남서전선군에 최우선적으로 보급되었다. 이 덕분에 보로네지전선군의 기갑전력은 꾸준히 증강되었다. 예를 들면 1943년 4월 1일 부터 4월 15일까지의 불과 2주 남짓한 시기에 보로네지전선군 소속의 전차군단과 전차여단들은 219대의 신품 전차와 자주포, 그리고 6,432명의 병력을 보충 받았다.13)  그 결과 4월 9일에 276대의 가동가능한 전차와 자주포를 보유하고 있던 보로네지 전선군은 4월 21일에 540대를 보유하게 되었다. 새로 생산된 기갑차량에 더해 전선군 소속의 야전정비부대들도 파손된 차량을 열심히 수리했다. 여기에 더해서 최고사령부는 4월 28일자로 카투코프Михаил Ефимович Катуков 중장의 제1전차군을 보로네지전선군에 배속시켰다. 북서전선군에 배속되어 있던 제1전차군은 3월에 쿠르스크 지구로 이동해 온 상태였다. 제1전차군과 더불어 다른 독립 전차군단과 전차여단들도 보로네지전선군에 배속되었다.  카투코프의 제1전차군은 5월 5일에 거의 완편상태에 도달하여 481대의 전차와 자주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후 7월 5일까지 보충용으로 보급받은 기갑차량은 61대에 불과했다.14)
그래서 5월 초에는 중부전선군이 보로네지전선군 보다 기갑전력에서 열세에 있었다. 5월 15일 기준으로 보로네지전선군은 가동가능한 전차와 자주포 1,380대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쿠르스크 전투가 시작됐을 당시 보유하고 있던 수량의 76퍼센트에 해당했다. 하지만 중부전선군의 기갑차량 보유량은 그 절반에 불과했다. 그러나 5월 말로 접어들면서 상황이 변했다. 6월 5일에 중부전선군은 제13군 소속의 기갑차량 171대(7월 5일 보유량의 80퍼센트)를 포함해 총 1,216대(7월 5일 보유량의 72퍼센트)의 전차와 자주포를 보유했다.15) 

서방의 저명한 군사학자 데이빗 글랜츠와 조나단 하우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전략적 차원에서 공자가 방자에 대해 최소한 3배에서 2배의 숫적 우세를 달성하는 것이 이상적이라는 것은 여러 군사이론에서 말하는 공리일 뿐만 아니라 소련이 전훈을 분석하여 얻은 결론이기도 하다.”16) 히틀러는 치타델레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기갑부대를 특히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독일 중부집단군과 남부집단군의 기갑전력 규모에 대하여 논해 보자. 예를들어 1943년 5월 4일에 독일 제9군이 배속된 독일 중부집단군은 총 442대의 전차(3호전차와 4호전차, 티거는 없었다.)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이 중 71퍼센트인 314대가 가동가능한 상태였다. 같은 날 남부집단군은 1,087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이중 67퍼센트인 728대가 가동가능한 상태였다.17) 그러므로 이미 1943년 5월 시점에서 이 중요한 기갑전력에서 쿠르스크 돌출부 북쪽의 소련군은 독일군에 대해 1.5대 1의 우위를 가지고 있었고 돌출부 남쪽의 소련군은 1.3대 1의 우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독일군에게 불리한 상황은 쿠르스크 전투가 시작될 때 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니 처음부터 치타델레 작전에 부정적이어서 이 작전을 ‘멍청한 짓’이라고 했던 제6기갑사단장 휘너스도르프 장군의 주장에 동의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는 전체 작전이 ‘부대 지휘의 기초적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필자는 뉴튼이 모델의 근본적인 실수라고 주장한 것들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이 주장에 대해 숙고해 보고자 한다. 뉴튼은 1943년 5월 초 모델이 히틀러에게 상황을 보고하면서 독일 제9군과 소련 중부전선군의 기갑전력 비율을 잘못된 정보에 기반해 평가했다고 지적했다. 뉴튼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독일측의 정보평가는 소련 중부전선군이 1943년 4월말에서 5월초 사이에 전차와 자주포를 1,500여대 보유하고 있다고 보았으나 실제로는 1,000여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 정보평가는 모델이 공세를 연기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만든 치명적인  오류였다. 모델은 800대의 기갑차량을 가지고 1,500여대를 가진 적을 상대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공세에 필수적인 기갑전력, 특히 판터와 티거를 증원해 달라고 요청할 충분한 당위성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그가 실제로는 소련군이 자신 보다 200여대 정도 많은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는 사실만 알았다면 공세에 훨씬 더 적극적이었을 것이다. 제9군은 공세를 늦춘 결과 기갑전력이 25퍼센트 증가했지만 소련군은 거의 두배나 늘어났다.” 

가장 먼저, 뉴튼이 제시한 수치와 양군의 전력비는 완전히 틀린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5월 초에 독일 제9군이 보유한 전차는 800여대가 아니었다. 중부집단군 전체를 통털어도 그 절반에 불과했으며 소련 중부전선군은 이에 대해 거의 1.5배나 되는 기갑차량을 보유하고 있었다. 소련 중부전선군은 674대, 독일 중부집단군은 442대 였다. 두 번째로, 유명한 1943년 5월 4일 뮌헨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했던 만슈타인과 구데리안의 회고록에 따르면 이 회의에서 모델이 보낸 서한을 회람하고 공세를 5월에서 6월로 연기한다는 결정이 내려지기는 했지만 제9군에 기갑전력을 증원하는 문제는 회의의 주요 안건이 아니었다. 애초 부터 독일 제9군은 그리 많은 기갑차량을 보유하고 있지 못했다. 기갑전력은 남부집단군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모델의 제9군에 기갑전력을 대규모로 증원하겠다고 약속하지도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모델은 이미 4월 초 부터 소련군의 방어선을 뚫기 위해 만슈타인과는 다른 방법을 택하기로 결정했다. 바로 포병 및 자주포의 지원을 받는 보병과 전투공병이었다. 이와 같은 결정은 쿠르스크 전투가 개시될 때 까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모델은 제4기갑군 사령관 헤르만 호트와 마찬가지로 소련군의 방어선이 강화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불편한 의구심을 가지게 됐다. 제1파 공격부대가 소련군의 주 방어선과 제2방어선을 돌파해 기갑부대가 작전 공간에 돌입하도록 할 수 있을 것인가? 독일 제9군은  이미 5월 무렵에 방어선에서 가장 강력한 부분을 돌파한 뒤 소련군의 방어선 종심 깊숙히 공세를 확대하는데 투입할 최소한의 기갑전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델은 소련 중부전선군의 방어선을 확실히 돌파하기 위해서 보병의 진로를 열고, 야전 축성을 격파하고, 역습에 나설 소련 기갑부대를 분쇄할 수 있는 강력한 화력과 방어력을 갖춘 중전차를 제1파 공격부대에 배속하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1943년 4월 초 독일 육군본부는 그달 말 까지 제9군에 티거 전차를 배치해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5월 3일 까지도 티거 전차는 단 한대도 없었다. 즉 모델은 소련군의 기갑전력이 독일 제9군 보다 1.5배 우세해서 더 많은 기갑전력을 요구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티거, 판터, 페르디난트와 같은 중장갑과 강력한 화력을 가진 기갑차량을 요구한 것 이었다.그리고 필자는 미국에 소장된 독일 노획문서에서 모델이 방어선을 돌파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심각하게 정원에 미달하는 상태였던 보병사단의 보병 전력을 보충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내용을 찾았다.18)  보병사단의 병력 보충 상황이 그리 좋지 않았고 이것을 해결할 방법도 마땅치 않았기 때문에 독일 육군총사령부는 4월 20일에 처음으로 쿠르스크 공세 개시일을 연기했다.19) 그래서 모델 상급대장은 소련군의 방어진지 구축 상황을 보여주는 항공사진을 첨부한 보고서를 히틀러에게 보내 공세 자체를 취소하던가, 아니면 보병사단에 병력을 보충하고 중전차를 보급하는 작전적 결정을 내리도록 하려고 했다.그러므로 모델이 소련 중부전선군의 실제 기갑전력 규모를 정확히 파악했다면 5월에 쿠르스크 공세를 개시할 준비가 되어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은 동의할 수 가 없다. 모델은 치타델레 작전을 반대하고 있었다. 모델은 치타델레 작전이 성공할 가능성이 낮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설명하기 위해 히틀러에게 직언할 용기가 있었던 극소수의 사람 중 한명이었다.  

그리고 1943년 5월 상순에 소련 중부전선군과 보로네지전선군이 아무런 문제 없이 전투력을 보충했다고 서술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앞서 언급한 각 사령부의 보고서들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병력과 장비가 전선에 도착했다 하더라도 곧바로 작전 부대에 배치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각 전선군이 받았다고 되어 있는 무기와 장비 중 상당수는 여전히 보급창에 집적되어 있거나 열차편으로 하역될 기차역을 향하는 중이었다. 예를들면, 바투틴은 1943년 5월 11일 최고사령부에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보냈다. 

“보로네지전선군 예하 부대들은 방어 임무를 수행할 준비를 갖췄다. 제38, 40, 6근위군, 7근위군 예하의 소총병사단들은 극소수를 제외하면 대부분 8,000명 혹은 그 이상의 병력을 가지고 있다. 제69군 예하 소총병사단들의 병력은 6~7,000명 수준이다. 제35근위소총병군단20) 소속 사단들은 완편상태이다. 장비의 대부분은 수일 내로 철도편을 통해 도착할 예정이다. 그러므로 1943년 5월 14일 밤 까지는 대부분의 무기 보급이 완료될 것이다. 이 밖에 무기를 수송하는 열차 9대가 아직 이동 중에 있어 일선부대에 도착하는 것은 5월 18일에서 20일 사이로 예상된다. 이들 열차편이 도착하게 되면 각 부대는 박격포, 대전차소총, PPSh 기관단총, 연대포는 편제의 100퍼센트, 소총은 편제의 74퍼센트, 경기관총은 편제의 57퍼센트, 중기관총은 편제의 65퍼센트, 45mm 대전차포는 편제의 71퍼센트, 76mm 사단포는 편제의 80퍼센트, 122mm 곡사포는 편제의 70퍼센트를 갖추게 될 것이다.제69군 예하 사단들은 1943년 5월 20일 까지 최소한 병력 8,000명 수준으로 증강될 것이다. 전차 부대들은 대부분 완편 수준으로 증강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5월 중순에는 보로네지전선군의 모든 부대가 높은 수준의 전투준비태세를 갖추게 되었고, 보로네지전선군 사령부는 그들의 전투력을 높게 평가했다.(아무런 근거 없이 자신감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보로네지전선군은 최고사령부에 쿠르스크 지구에서 선제 공격을 취하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바실레프스키 원수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독일군이 공세를 개시할 것이라는 첫번째 날자(5월 8일)가 지나가자 보로네지전선군 군사평의회는 초조함을 느꼈고 적군이 공세를 취소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최고사령부에 선제공격을 개시할 지 여부를 결정해 줄 것을 요청했다. 스탈린은 보로네지전선군 군사평의회의 요구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주코프와 안토노프, 그리고 나는 스탈린이 선제공격 명령을 내리지 말도록 설득하는데 애를 먹었다.”21) 

하지만 보로네지전선군 사령부는 예하 부대들이 아직 전투준비를 마치지 못했다는 점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최고사령부가 먼저 지시를 내리지도 않았는데 바실레프스키의 증언 처럼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줬을지는 의심스럽다. 오히려 선제공격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필자는 1943년 6월 초 소련군의 전투준비태세에 대한 물음에 결론을 내리면서 이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소련군 최고사령부는 4월 12일 전략적 방어를 취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적군의 예상 공격 축선을 특정한 뒤 1개월의 기간 동안 쿠르스크 돌출부를 방어하는 부대들, 특히 주공 축선에서 작전하게 될 야전군들에 장비와 보충 병력을 보냈다. 5월 10일까지 중부전선군과 보로네지전선군은 계획대로 병력과 야포의 숫자라는 두가지 중요한 지표에서 7월 5일 기준의 80퍼센트를 초과했다.(기갑전력 측면에서는 각각 40퍼센트와 75퍼센트였다.) 6월 5일에는 중부전선군과 보로네지전선군의 총 병력이 7월 5일 기준의 98퍼센트를 넘어섰고, 야포는 거의 90퍼센트, 전차와 자주포의 숫자는 72퍼센트에서 76퍼센트에 달했다. 그러므로 두 전선군은 5월 중순에는 기본적으로 독일군의 쿠르스크 공세에 대처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예를 들면 독일 중부집단군은 같은 시기에 치테델레 작전 이전까지 보급받기로 되어 있었던 최소한의 기갑차량도 다 받지 못한 상태였다. 중부집단군 예하의 보병사단과 기갑사단들은 아직 병력과 장비를 편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어서 하계 공세에서 맡은 임무를 수행할 능력이 없었다. 하지만 소련측은 이미 5월에는 당시 독일군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으로 공격해 오더라도 격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러므로 독일 중부집단군과 남부집단군의 정면을 방어하고 있던 소련군이 5월 말 까지도 전투준비태세를 갖추지 못했다는 만슈타인의 주장은 당시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것 이었다.22)  

치타델레 작전을 좌절시킨데는 쿠르스크 지구에 배치된 아군의 준비 태세 뿐만 아니라 교모하고 종심 깊게 구축된 방어선도 큰 기여를 했다. 비록 독일 장군들과 서방의 학자들은 독일군의 패배를 초래한 결정적인 요인을 꼽을 때 거의 대부분 이것을 무시해 왔지만, 필자는 이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해서 이것을 간략하게나마 설명하고자 한다. 1943년 5월에서 6월 사이 로코소프스키와 바투틴의 주요 업무를 상세하게 분석하면 이들이 방어선을 더욱 강화하고 병사들이 방어시설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법을 훈련시키는데 노력을 기울였음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여기에는 매우 객관적인 이유가 있었다. 예를 들어 5월 초순 총참모부 검열단이 실시한 검열 결과에 따르면 보로네지전선군 방어 지구 주방어지대의 제1방어선과 제2방어선은 대부분의 방어 진지 공사가 완료된 상태였다. 그런데 제2방어지대와 제3방어지대에서는 구축 방식과 형태에서 치명적이지는 않지만 중요한 결함이 발견됐다.(조명지뢰를 방어선 중간에 매설했다던가, 참호를 너무 얕게 팠다던가, 위장이 형편없었다던가와 같은) 이러한 문제점들은 6월 초 까지 대부분 개선되었다. 예를들어 제6근위군은  5월 5일까지 90,000개의 대전차지뢰 중 17퍼센트, 64,000개의 대인지뢰 중 16퍼센트 만을 매설했다.(7월 5일 까지는 모두 매설됐다.) 제7근위군 지구도 비록 인접 부대에 비하면 사정이 나았지만 5월 16일까지도 지뢰 매설이 크게 진척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때까지 대전차지뢰 65,000개 중 22.4퍼센트, 대인지뢰 84,000개 중 16.9퍼센트가 매설되었다.23) 그러나 6월 5일에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제6근위군은 대전차지뢰는 계획량의 50퍼센트, 대인지뢰는 계획량의 62퍼센트까지 매설했다. 제7근위군은 대전차지뢰 46.2퍼센트, 대인지뢰 35.7퍼센트를 매설했다.그러나 5월까지 지뢰 매설이 지지부진했다고 해서 중부전선군과 보로네지전선군 방어선의 전차가 기동가능한 지역이 독일군의 기갑차량들에게 활작 열려있는 것은 아니었다. 5월 5일에는 주방어지대 전방과 방어지대 내의 지뢰매설 계획이 수립됐다. 그러나 각 방어지대 사이와 제2, 3방어지대 내의 지뢰매설 계획이 남아있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첫 번째는 봄의 진흙탕으로 물자수송과 공병의 작업에 어려움이 있었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폭약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4월 말 부터 폭약류의 보급이 지체되기 시작했고 각 전선군 사령부는 자체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물자, 특히 독일제 포탄과 지뢰 같은 노획 물자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노획 물자를 사용하면서 이곳 저곳에서 주관적인 요인 외에도 많은 어려움이 발생했다. 1943년 6월 18일 붉은군대 공병감 보로브예프 중장은 명령49호를 하달했는데 이 명령서의 서두는 다음과 같다.

“5월 23일에 보로네지전선군이 관리하고 있던 보로네지 지구의 대전차지뢰 임시야적장에서 폭발이 있었다. 보로네지전선군은 이곳에 2,700개의 대전차지뢰를 모아두고 있었다. … 독일제 T-35 대전차지뢰들은 뇌관이 없는 상태로 수송됐으며 기폭장약이 들어있는 상태로 낱개 단위로 야적장에 쌓여 있었다. 폭발의 원인은 쌓여있던 지뢰들을 옮기는 과정에서 부주의하게 취급했기 때문이다. 노무자들은 사전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독일제 지뢰의 폭발 방식과 취급 방법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참모진은 운반 작업을 조율하거나 감독하지도 않았다. 이 폭발로 지뢰 2,700개와 트럭 2대가 파괴되고 군인 7명과 야적장 부근에 있던 민간인 노무자 15~20명이 사망했다. 대전차지뢰 야적장은 교통량이 많은 주요 보급로에 인접해 있었다.”24) 

이런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여름으로 접어들면서 두 전선군의 방어선 구축은 거의 70퍼센트 가량의 완공율을 보였다.  

이런 점들을 감안하면 1943년 6월 1일 이후로는 독일측이 치타델레 작전을 계속 연기했더라도 5월 초와 마찬가지로 붉은군대에게는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쿠르스크 돌출부의 양쪽에 집결한 독일군은 소련 중부전선군과 보로네지전선군에 대해 군사이론에서 성공적인 작전의 필수 요소로 꼽는 숫적 우세를 달성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비슷한 수의 병력, 기갑차량, 야포를 확보할 수 조차 없었다. 뿐만 아니라 이미 1943년 5월이 되면 중부전선군과 보로네지전선군 후방의 스텝군관구에는 상당한 규모의 최고사령부 예비대가 집결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독일군은 1943년 5월이건 6월이건 간에 무슨 수를 쓰더라도 쿠르스크에서 승리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전후 독일군 장성들과 이들의 지지자들이 치타델레 작전을 여름이 시작될 무렵 개시했다면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한 것은 그저 불리한 상황에서 허세를 부리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문헌자료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에 따르면 에리히 폰 만슈타인의 회고록을 비롯한 서방측의 문헌에서 나타나는 이와 같은 관점의 주장들은 근거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는 만슈타인 본인도 독일군 수뇌부가 쿠르스크에 배치된 소련군의 전투력을 오판했다고 인정했다. 그리고 그는 전후에 소련의 정치-군사 지도자들이 쿠르스크 전투를 비롯한 1943년 하계전역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행한 일들에 대해 높게 평가했다. 만슈타인은 회고록에서 독일군 수뇌부는 소련측이 전시동원과 군수산업에서 그토록 뛰어난 조직 역량을 보여줄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다고 기록했다. 그는 붉은군대야 말로 머리 하나를 자르면 새로 두개의 머리가 생기는 ‘히드라’ 그 자체라고 평했다.25)


주석

1) V. Khristoforov, V. Makarov, and B. Khavkin, ‘Fel’dmarshal fon Kliest na Liubianke’ [Field Marshal von Kleist in the Lubianka Prison], Rodina 6 (2010) p. 94.  
2) E. Manstein, Uteriannye pobedy [Lost Victories] (Rusich, Smolensk, 2003), p. 543 
3) S. Newton, Kurskaia bitva nemetskii vgliad [Kursk: The German View] (Iauza, EKSMO, Moscow, 2006), pp. 463–476. 
4) 러시아에서는 공식적으로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5) TsAMO RF, F.16-A, Op.321, D.138. 
6) 로코소프스키는 1943년 4월 28일에 원수 칭호를 받았다.  
7) TsAMO RF, F.62, Op.1720, D.14,L.23. 
8) TsAMO RF, F.16-A, Op.321, D.138. 
9) TsAMO RF, F.203, Op.2843, D.425, L.425. 
10) TsAMO RF, F.62, Op.321, D. 16, L. 86obr. 
11) TsAMO RF, F.62, Op.321, D.16, L.86. 
12) 최고사령부 지령: 제23전차군단과 제2전차군단, 제1근위기계화군단을 재편성하라는 1943년 3월 30일 46090호, 제2근위전차군단과 제5근위전차군단을 재편성하라는 1943년 3월 30일자 46091호, 제3근위전차군단을 제편성하라는 1943년 3월 31일자 46092호, 제1근위’돈’전차군단, 제12전차군단, 제15전차군단, 제18전차군단을 재편성하라는 1943년 3월 31일자 46093호.  
13) V. N. Zamulin, Kurskii izlom: Reshaiushchaia bitva Velikoi Otechestvennoi [쿠르스크의 전환점: 대조국전쟁의 결정적 전투 (Iauza, Eksmo, Moscow, 2008), pp. 101–102.  
14) TsAMO RF, F.203, Op.2843, D.426: ‘Boevoi sostav 6 gv., 7 gv., 40, 38 A, 1 TA za 5 maia i 5 iulia 1943’ [1943년 5월 5일과 7월 5일 제6근위군, 제7근위군, 제40군, 제38군, 제1전차군의 전력]. 
15) TsAMO RF, F.62, Op.321, D.16, L.127, 127 obr. 
16) D. Glantz and D. House, Kurskaia bitva: Reshaiushchii povorotnyi punkt Vtoroi mirovoi voiny [쿠르스크 전투: 제2차세계대전의 결정적 전환점] (Astrel’, Moscow, 2006), p. 80. 이 책은 글랜츠와 하우스가 쓴 The Battle of Kursk (University Press of Kansas, Lawrence, KS, 1999) 러시아어 번역본이다. 
17) 군사사연구소(IVI) 부속문서고 , F.191, Op.233, D.108. 1943년 5월 3일 부터 1944년 6월 1일 까지 기갑총감 구데리안이 히틀러에게 한 보고, 제1편, 소연방 총참모부 군사사국, 1947, pp. 6–7. 
18) NARA, T.312. R.317.F.7886042, 7886046. 
19) NARA, T.312. R.317. F.7886050. 
20) 전선군사령부의 예비대였다. 
21) A. M. Vasilevsky, Delo vsei zhizni, Kn. 2 [Cause of an Entire Life, Book 2] (Politizdat, Moscow, 1988), p. 24. 
22) E. Manstein, Poteriannye pobedy, p. 543. 
23) TsAMO RF, F.38A, Op.9022, D.5, L.21. 
24) TsAMO RF, F.69A, Op.10751, L.11, Ll.37, 38. 
25) Manstein, Poteriannye pobedy [Lost Victories] (Rusich, Smolensk, 2003), p. 546.


2014년 9월 29일 월요일

[번역글] 쿠르스크 전투: 새로운 발견들

날림번역 하나 나갑니다. 이 글은 러시아의 유명한 군사사가 발레리 자물린이 2012년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25-3호에 기고한 “The Battle of Kursk: New Findings”이라는 글입니다. 쿠르스크 돌출부 남쪽의 방어를 담당한 보로네지 전선군 사령관 바투틴에 대해 높게 평가하는 글 인데 쿠르스크 전투 당시 소련군 전술제대의 문제점에 대해 지적하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번역했던 같은 필자의 “프로호롭카: 신화의 기원과 전개과정”도 함께 읽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쿠르스크 전투: 새로운 발견들

필자: 발레리 자물린
영문번역: 개리 딕슨Gary Dickson 

쿠르스크 전투의 초기 5일간은 소련에 있어서 가장 힘든 시기였다. 정확히 말해 이 시점 부터 전세가 소련에게 유리하게 바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나 지금이나 러시아 역사학계는 이 시기의 중요성에 상응하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특히 소련군 최고사령부의 실수로 인해 가장 극적이고 격렬한 전투가 전개되었던 보로네지 전선군의 방어선에 전개된 사건에 대해서 그러하다고 할 수 있다. 소련군 최고사령부는 독일군의 주공이 오룔 방면에서 쿠르스크 축선으로 가해 질 것이라고 판단했지만 실제로 독일군의 주공은 보로네지 전선군이 방어하고 있던 벨고로드 방면에서 왔다. 많은 병력이 쿠르스크 돌출부 북쪽을 방어하는데 배치되었기 때문에 보로네지 전선군은 충분한 예비대를 확보할 수 없었다. 예비대의 부족으로 보로네지 전선군은 비극적인 결과를 불러온 전술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수많은 인명 피해와 특히 전차와 같은 장비를 대량으로 상실하여 전투의 결과에 까지 중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연구자들은 비록 일부 타당한 면이 없지는 않으나, 전선군 사령관인 바투틴이 조급하게, 그리고  충분히 검토하지 않고 결정을 내렸다는 비판을 멈추지 않고 있다. 이러한 비판 중 가장 많은 것이 1943년 7월 6에서 8일 사이에 프로호롭카와 오보얀 축선으로 돌파해 온 적을 고립시키기 위해 일련의 반격을 결정한 일이다. 최근 러시아연방 국방부 중앙문서보관소ЦЕНТРАЛЬНЫЙ АРХИВ МИНИСТЕРСТВА ОБОРОНЫ에서는 쿠르스크 전투에 참가한 소련군 부대의 작전통신내용과 전투보고서를 대량으로 공개하였다. 이러한 사료에 힘입어 연구자들은 보로네지 전선군 사령관의 리더쉽을 새로운 방식으로 고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바투틴과 그 예하의 야전군 사령관들이 주고 받은 전문을 읽어본다면 바투틴이 초기의 수일간 작전의 전개 과정과 적군이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를 매우 정확히 예측하고 있었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기간 동안 바투틴과 그의 참모진은 세심하게 계획을 세우고, 정확한 예측을 하고, 상황의 전개에 맞춘 결정을 내렸다. 바투틴 장군은 대규모의 전략 제대를 지휘하는데 필요한 기술에 통달했으며, 적군이 어떻게 움직일지 이해하여 적의 행동을 정확히 예측하였다.  

바투틴은 7월 5일이 끝나갈 무렵에는 독일 남부집단군 사령관의 목표를 파악하여 그가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지 예측하였다. 바투틴은 주로 동부전선의 남부지역의 상황을 파악한 것과 그의 직관력, 전선군의 작전을 매일 분석한 것에 기반하여 평가를 내렸다. 독일 남부집단군의 주공 축선에 배치된 제6근위군과 제1전차군의 방어 구역의 전황, 그리고 가용한 전선군 예비대의 규모는 바투틴의 계획과 결단에 특별한 영향을 끼쳤다. 한편, 보로네지 전선군은 적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예측하기는 했으나 불행히도 적의 움직임을 매번 저지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바투틴에게 돌리는 것은 불공정한 처사이다. 왜냐하면 전투의 결과는 바투틴 뿐만 아니라 다른 요소에 의해서도 지대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독일군을 격퇴하기 위한 계획은 수개월에 걸쳐 수립되었지만 쿠르스크 전투 초기의 이틀간은 계획대로 작전이 전개되지 못했다. 에리히 폰 만슈타인 원수가 지휘하는 남부집단군의 기갑부대들은 치스챠코프 중장이 지휘하는 제6근위군이 수많은 장애물과 야전축성을 구축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구축한 두개의 방어선을 돌파해 버렸다. 보로네지 전선군 사령부는 독일군의 신속한 돌파에 비상이 걸렸다. 독일군은 고작 18시간 만에 제1방어선을 돌파했고 제2방어선은 더 빨리 뚫어버린 것이었다. 전투는 바투틴이 예측한 대로 전개되었지만 바투틴은 자신의 판단력을 확신할 수가 없었고 복잡한 상황을 충분히 파악하지 않은 상태에서 단 한차례의 강력한 반격으로 상황을 회복하고자 했다. 독일군은 주도권을 쥐었고 바투틴은 침착할 수가 없었다. 바투틴은 상황을 호전시키고 적의 의지를 꺾기 위해 필사적으로 대책을 강구했다. 7월 6일 부터 8일까지 몇 개의 반격 계획을 세웠다가 취소했다. 바투틴이 이렇게 침착함을 잃어버린 까닭은 전선의 상황이 심각했다는 점 외에도 바투틴 개인의 성격과 일처리 방식에도 있었다. 그리고 바투틴은 몇몇 야전군 사령관을 포함한 예하 지휘관들의 교육 수준이 낮은데다 현대의 전장에서 대규모 부대를 운용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이들을 믿을 수 가 없었다.1) 

기밀해제된 문서들을 살펴보면 보로네지 전선군은 방어작전 초기 단계에서 반격을 실시할 때 마다 준비가 부실했으며,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서두르는 경향이 있었고, 예하 부대들의 능력, 특히 전차부대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을 보였다. 반격계획 수립은 각 야전군 사령부가 담당했다. 전선군 사령부는 일반명령과 임무만을 하달한 뒤 나머지 계획 수립 과정은 야전군 사령부에 일임하였다. 하지만 야전군 단위의 지휘관과 참모진의 훈련수준은 다양한 병과를 조율해야 하는 높은 수준의 계획을 수립하는데 충분하지가 못했다. 

다양한 병과를 조율하는 것은 전쟁 기간 내내 붉은군대의 심각한 문제점이었다. (제일선의 모든 야전군을 포함한) 야전군 단위에서는 특히 전차를 어떻게 운용해야 하느냐가 중요한 문제였다. 야전군 단위의 장교들은 기갑 전술에 대한 지식이 일천했고, 전차라는 무기의 능력에 대해 잘 몰랐으며, 전차 부대의 훈련 수준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야전군 사령부의 기갑참모진2)은 규모가 작고, 훈련이 부실한데다 책임질 수 있는 권한이 부족했기 때문에 야전군 사령관의 결심에 이렇다 할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야전군 사령부에 배속된 핵심 간부들은 전차부대를 지휘하는데 필요한 경험을 쌓지 못했기 때문에 전차 부대를 운용하는 계획을 마치 보병 부대를 운용하는 것 처럼 수립했다. 야전군 사령부의 참모들은 기갑 작전에 적합한 지형이라던가 항공 지원을 제공하는 것과 같은 중요한 문제를 고려하지 않았으며 독일 전차의 성능적인 우세라던가 아군 전차 부대의 능력 같은 것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 1943년에 소련군의 독립중전차연대(전차 21대)의 화력은 독일군의 전차 중대 정도에 불과했으며, 전차여단의 화력은 독일군의 전차대도 보다 못한 수준이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장교단의 훈련 수준 문제에 더하여 반격에 참여할 야전군간의 조율이 전선군 사령부를 통해 이루어 졌다는 점도 있다. 이같은 방식은 특히 지상군에 항공지원을 제공하거나 공격부대의 전면에 있는 적의 거점을 파괴하는데 시간이 걸리게 했다. 

보로네지 전선군의 기갑참모처3)는 이런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다. 전선군 기갑참모처는 반격 명령을 내릴때 기갑 작전에 대해 전문적인 조언을 하달해야 했다. 하지만 보로네지 전선군 기갑참모인 슈테브뇨프Андрей Дмитриевич Штевнёв  중장은 쿠르스크 전투가 일어나기 겨우 일주일 전에 임명되어 그의 업무에 적응할 시간이 없었다. 이유가 어쨌건 간에 슈테브뇨프와 그의 참모진은 반격시 전차군단과 전차군을 어떻게 운용해야 하는가에 대한 전문적인 조언을 해 주지 못했다. 그대신 이들은 기술적인 조언과 명령 이행 사항만을 담당하고 작전적인 문제는 전선군 작전참모처에 일임하고 전차군단과 야전군의 협동작전 문제는 개별 군단장이 알아서하도록 방기하였다. 기갑참모들은 전투 초기 부터 기갑부대의 작전과 적의 전술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분석한 뒤 그 결과를 직속 상관에게 보고해야 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공개된 문헌들을 살펴보면 보로네지 전선군의 기갑참모처는 나태하고 안일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심지어 바투틴 본인 조차도 기갑 작전에 대한 경험이 부족했다. 이러한 사실은 7월 6일로 예정하고 계획되었다가 그 전날 밤 스탈린에 의해 취소된 제1전차군의 반격을 입안하는 과정에서 잘 나타난다. 그리고 문제는 이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바투틴은 자제력을 잃고 당황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7월 6일 오전에 제40군과 제6근위군을 투입하는 새로운 반격 계획을 입안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바투틴은 소련군이 아직 강력한 전력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방어전을 치르며 소모하기 보다는 두개의 강력한 집단을 편성해 독일 남부집단군의 주력부대인 제4기갑군의 양 측익에 공격을 가해 독일군이 공격을 멈추고 방어로 전환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시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7월 6일 시점에서 이렇게 복잡한 작전을 실시한다는 것은 비현실 적이었다.
대규모의 군사작전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데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제40군은 독일군의 공격에 직접 맞서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반격을 계획하는데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제6근위군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제6근위군 사령부와 예하 부대들은 우세한 적에 맞서 전선을 유지하는데 전력을 쏟고 있었다. 많은 수의 참모장교들과 장성들은 예하부대를 이끌고 직접 방어전투를 지휘하고 있었다. 이들에게 방어전을 수행하는 와중에 반격까지 하라는 것은 부담만 지우고 이들의 주된 임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게 만드는 행위였다. 그러므로 이 시점에서 반격을 계획하는데 소중한 시간을 허비한다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행위였다. 

7월 6일의 전투 경과를 보면 소총병군단의 사령부들, 특히 제6근위군 예하 군단의 사령부들이  맡은 책임을 이행할 능력이 없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실제로 군단사령부들은 단지 야전군사령부와 사단본부 사이에서 명령문과 보고를 전달하는 역할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연락 업무 마저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군단사령부의 고위 간부들은 이렇다 할 결단력이나 의지를 보여주지 못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여러가지 원인이 있지만 그중에서 핵심은 군단사령부들이 예하 부대들과 보조를 맞출 시간이 부족했다는데 있다. 제69군 예하의 소총병군단 군단장들은 7월 2일에야 전선에 도착해 7월 4일 부터 군단을 지휘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제7근위군과 제40군 예하의 소총병군단 사령부의 편성 명령은 독일군이 공세를 개시한 직후에 내려졌다는 것이었다. 이론적으로는 자신의 임무를 잘 파악하고 있는 장교라 할 지라도 역동적이고 격렬한 실제 전투 상황에서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가 허다했다. 군단 사령부의 장교들은 변화하는 상황에 맞춰 대응하고, 예하 부대에 대한 통제를 신속히 회복하고, 상급 부대 및 인접 부대들과 접촉을 유지하고, 심지어 미리 준비된 방어선에서 조차 충분한 방어 태세를 갖추는 임무 등을 하지 못했다. 

1943년 초에 붉은군대가 소총병군단을 대규모로 편성하면서 군단 수준에 걸맞는 참모 업무에 숙달된 고위 장교와 장성이 부족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런 부족 현상은 붉은 군대 전반에 만연해 있었으며 보로네지 전선군도 마찬가지였다. 제40군 참모장 바튜냐Александр Григорьевич батюня 소장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군단사령부의 참모진은 국방인민위원회 예비로 있는 지휘관들로 채워져 있다. 이들 지휘관의 대다수는 실전 경험이 크게 부족하다. 이들은 군사 교육을 받기는 했으나 군단사령부 참모로서의 실제 업무에 대해서는 배우지 못했다. 이들이 실전을 통해 이론적인 지식을 바로 잡는데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전투 초기에 군단사령부는 예하 부대를 너무 졸렬하게 지휘했기 때문에 야전군사령부가 강제로 군단사령부의 임무를 모두 대신해야 했다.4) 

이로인해 방어 작전의 첫 며칠동안은 각 부대들이 필요한 수준의 상호 협력과 효율성을 발휘하기가 힘들었다. 

야전군사령부에서는 군단의 임무 상당수를 직접 맡아서 군단사령부의 부담을 완화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렇게 하자 또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이제는 야전군사령부 참모진의 업무가 과도해지고 통신망에는 과부하가 걸렸다. 그래서 야전군사령부가 명령을 내리는데 걸리는 시간이 길어지고 명령을 이행하는데 까지 걸리는 시간도 늘어났으며 그나마 명령이 충분히 이행되지도 못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전문들은 야전군사령부들이 명령과 지시사항이 이행되고 있는지 바르게 파악할 수 없었음을 보여준다.
또 다른 문제점은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는 직위에 있는 고급 장교들의 결단력이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치스챠코프는 물론 바투틴 까지도 제6근위군의 상황에 대해 계속 우려했다. 7월 7일 보로네지전선군 군사위원회는 제23소총병군단장 바흐로메프Павел Прокопьевич Вахрамеев 소장이 맡은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직위해임하였다. 바흐로메프가 해임된 이유 중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군율을 지키지 않았다는 점과 지나치게 음주를 했다는 것 이었다. 제22근위소총병군단 참모장 나카트긴 대령은 군단사령부의 업무를 효과적으로 조율하려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하급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 8월 25일에 제6근위군 사령관 명의로 내려진 명령 제0125호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제22근위소총병군단이 전투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근위 대령 나가트킨은 참모장으로서의 임무를 전혀 수행하지 못했으며, 예하 사단 본부와의 연락도 취하지 못하여 전방 부대의 배치 상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군단 참모진은 전투에서 군단장을 보좌할 수가 없었다.”5) 

이것은 제6근위군의 지휘를 복잡하게 만든 여러 요인 중 하나였다.  이 중에서 가장 문제였던 것은 7월 6일 무장친위대 기갑군단이 프로호롭카 방면으로 진격하면서 전선의 상황이 복잡해 진 것이었다. 전 지역이 개별적인 부대 단위로 분열되어 통제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 졌다. 제1전차군과 함께 오보얀 축선을 방어하고 있던 몇개의 소총병사단은 치스챠코프가 코체토브카 마을에 주지휘소를 세우고 직접 지휘했다. 리포븨이 도네츠Липовый Донец 강변에서 방어를 하고 있던 몇개 사단은 부사령관 라구틴П. Ф. Лагутин 소장이 사즈노에Сажное 마을에 보조지휘소를 세우고 지휘했다. 이 두 집단은 제1전차군과 제69군의 예하 부대로 인해 단절되어 사실상 독립적으로 작전을 했다. 이같은 상황에서 두 집단을 조율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으니 통신과 보급을 유지하는 문제는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일부 소총병사단, 예를 들어 제51근위소총병사단은 30km에 이르는 전선에 걸쳐 흩어져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제6근위군과 제1전차군이 긴밀하게 협력하여 작전을 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것은 불가능했다. 제6근위군과 제1전차군은 같은 지구에서 작전을 전개하면서 때로는 같은 참호를 쓰면서도 사단과 군단 사이는 물론 두 군사령부 간에도 효과적으로 작전을 조율하지 못하고 개별적으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제6근위군에 파견된 총참모부 소속의 한 장교는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제1전차군은 제6근위군의 전투 구역에서 작전을 전개하고 있다. 하지만 이 두 야전군은 지속적으로 정보를 공유하는 행동을 하지 않고 있다. 그 결과 보병부대와 전차부대의 협동작전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군사령부 작전참모처에 있는 지도에는 제1전차군 예하부대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지 않으며, 이때문에 인접 부대의 측익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고 있고 심지어는 무의미한 손실마저 발생하는 지경이다.”6) 

바투틴은 이러한 문제점을 파악하고 있었지만 이에 대한 평가는 전투가 끝난 뒤에 했다. 바투틴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매우 비판적으로 평가했는데 이것은 제5근위전차군 사령관을 맡았었던 로트미스트로프의 회고록에 실려있다. “우리 사령부, 무엇보다도 나는 반격을 구상하지 말고 적의 우월한 기갑 부대를 격퇴하는 것만을 생각했어야 했습니다…. 러시아 속담에는 이런 말이 있지요. “일곱번 재 본 다음 한번에 잘라라” 하지만 우리의 문제는 판단을 할 만큼 충분한 시간이 없었다는데 있었습니다. 상황이 너무 급박하게 전개되어 정신을 가다듬을 수 조차 없었습니다. 적군은 제2방어선을 위협하고 있었고 멈추지 않고 방어선을 뚫어 버릴 것 처럼 보였습니다.”7) 

대규모의 전역이나 전투에 대해 평가할 때는 인적 요소를 고려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런 극한의 상황에서 바투틴의 입장이 어땠는가를 이해해야 한다. 한쪽에서는 적의 강력한 기갑부대가 보로네지 전선군의 방어선을 두들기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최고사령부는 물론 스탈린이 직접 바투틴에게 그가 전선군 사령관으로서 적을 저지할 수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적을 저지하지 못하고 있다며 질책하고 있었다. 사실 바투틴은 이상적인 장군상과는 거리가 있는 인물이었다. 현명하고 탁월한 식견을 갖추었으며 강철과 같은 의지를 가졌다는 인상은 전쟁이 끝난 뒤 소련의 대중매체에 의해 만들어진 것 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바투틴은 매우 산만한 사람이었다. 바투틴은 언제나 그의 행동이 가져올 결과를 예상하고 움직이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실수를 저지르고 미래에 대해 확신을 하지 못하며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불행히도 전선군 사령관이 실수를 저지르는 것은 다른 장군들이 실수를 저지르는 것과 비교할 수가 없었다. 수만명의 목숨과 운명이 달려있었다. 바투틴이 수년간 참모업무를 통해 얻은 경험은 그의 성격과 지휘 방식에 영향을 끼쳤다. 바투틴은 가끔 그의 참모들이 해야 할 업무 중 상당량을 직접 처리하기도 했으며 일선 부대를 직접 지휘하는 것을 무시하는 일도 있었다. 

“로코소프스키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나는 간혹 바투틴의 업무 방식에 놀라곤 했다. 바투틴은 지시사항이나 명령문의 문구를 직접 수정했으며 직접 전화를 걸거나 전문을 보내 야전군이나 사령부와 대화했다. 참모장은 어디에 뒀단 말인가? 나는 마을 한 구석에서 보골류고프 장군을 찾아내 그에게 어째서 전선군 사령관이 참모 업무를 직접 담당하고 있는 것이냐고 물었다. 보골류고프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대답했다. 바투틴은 모든 업무를 직접 담당한다는 것이었다.”8) 

바투틴은 쿠르스크 전투 당시에도 거의 이렇게 업무를 처리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상황이 달랐고 바투틴을 도와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쿠르스크 전투에서 바투틴은 사실상 그를 보좌할 사람이 없었다. 전선군 군사위원회 위원 흐루쇼프나 부사령관 아파나셴코Иосиф Родионович Афанасенко는 그런 역할을 할 수 없었다. 아파나셴코는 대장 계급을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업무에 숙달되지 않은 상태였다. 참모장 이바노프 중장은 경험이 매우 많았지만 7월 6일에 스탈린의 명령으로 제69군 사령관을 돕기 위해 전출되었다. 물론 총참모부에 있을 당시 바투틴과 가깝게 지냈던 바실레프스키 소련방 원수는 독일군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고 보로네지 전선군에 필요한 예비대를 확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었겠지만 바투틴이 담당하고 있는 방대한 업무까지는 어떻게 해 줄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언급한 모든 문제점들은 중요한 것이긴 했지만 전투 초기의 수일간 보로네지 전선군에 독일군의 공격을 어떻게 막아낼 것인지 결정하는 데에 전선군 사령관의 리더쉽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새로 발굴된 문서들은 7월 6일 바투틴이 남부집단군의 공격부대들을 격퇴하기 위해 반격을 실시하기로 결심한 것은 상황을 합리적으로 판단한 결과가 아니라 감정적으로 과잉반응한 것이었지만 그 다음인 7월 7일과 8일에 계획한 반격 준비는 바투틴에게 강요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바투틴은 보로네지 전선군의 역량이 가진 한계를 절감하고 있었지만 최고사령부의 실수로 인해 다른 선택을 할 여지가 없었다. 한편 중부전선군 사령관 로코소프스키는 바투틴과 같은 행동을 취했다. 로코소프스키는 7월 6일에 제13군과 그 우익에 인접한 제70군의 방어선에 뚫린 돌파구를 최소화 하려고 노력했다. 로코소프스키는 이것이 실패하자 즉시 전술을 바꿨다. 쿠르스크 전투를 다룬 연구에서는 이것을 로코소프스키가 군사적으로 뛰어난 능력을 갖추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인용하고는 한다. 하지만 이런 편향적인 분석은 보로네지전선군과 중부전선군의 전력차를 염두에 두지 않고 있다. 

중부전선군의 상황을 개략적으로 살펴보자. 치타텔레 작전의 첫째날 독일 중부집단군의 돌격집단인 제9군 소속의 기갑군단들은 제13군과 제70군의 제1방어선을 돌파하여 8~12km를 진격하였다. 제13군의 제17근위소총병군단과 제2전차군(16, 19전차군단, 제11근위전차여단)은 상황을 호전시키기 위해 반격을 감행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제16전차군단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으며 예하의 제107전차여단만 하더라도 전차 50대 중 46대를 잃었다. 제16전차군단장 그리고레프Василий Ефимович Григорьев 소장은 공격을 중지하고 전선군 사령부에  보고했다. 전차 지원이 없어져서 본다레프Андрей Леонтьевич бондарев 중장의 제17근위소총병군단은 방어를 취할 수 밖에 없었다. 상황을 분석한 뒤 다음과 같은 명령이 하달되었다. “전차를 전차호에 넣고 보병을 지원하기 위해 화력지원을 하라. 전차부대는 적의 보병과 경전차가 상대일 때 이들이 포격에 와해된 이후 반격을 허용한다.”9) 

로코소프스키가 이 상황에서 올바른 결정을 내렸던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중부전선군이 보로네지 전선군에 비해 야포와 박격포와 같은 필요한 수단이 더 많았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앞서 언급한 것 처럼 총참모부는 독일군의 주공이 중부전선군에 가해질 것이라고 잘못 판단했기 때문에 로코소프스키는 1,000문의 야포와 방사포를 보유한 3개 포병사단으로 편성된 제4포병군단과 같은 강력한 증원을 받은 반면 바투틴은 250대의 전차를 지원받는데 그쳤다. 이것은 불공평한 것이었다. 그결과 쿠르스크 전투가 시작되기 전 보로네지 전선군은 대공포를 제외하고 4,012문의 야포와 4,539문의 박격포(82mm와 120mm)를 보유한 데 비해10) 중부전선군은 5,213문의 야포와 5,512문의 박격포를 보유하고 있었다.11) 총사령부가 잘못 판단한 것이 확실해 졌을 때 쿠르스크 돌출부 남쪽 전선에는 포병군단 대신 포병전력이 부족한 제2, 10전차군단의 2개 기동 군단이 증원됐다. 이 때문에 바투틴과 로코소프스키는 충분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그들이 가진 수단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제13군 사령관은 전차를 동반한 반격을 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은 제17근위소총병군단에 제1근위포병사단, 제378대전차포연대, 제237전차연대를 지원했다. 본다레프 장군은 이같은 강력한 지원에 힘입어 전차를 반격에 투입하지 않고도 방어선을 지킬 수 있었다. 

역사책들을 보면 쿠르스크 전투의 둘째날에 총사령부의 예비대가 보로네지전선군을 지원하기 위해 투입된 반면 중부전선군은 아무런 도움 없이 방어전을 치렀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바투틴은 중부전선군 보다 더 강력한 적의 공격에 맞서 7월 8일 오후까지 3일간에 걸쳐 보로네지전선군의 병력만 가지고 싸웠다. 남서전선군에 있던 제2전차군단이 보로네지전선군에 도착한 것은 7월 8일 오후 2시였으며, 제10전차군단은 7월 9일 오후에야 투입되었다. 제5근위군은 7월 11일 오전에야 전투에 돌입했으며, 제5근위전차군은 하루 늦은 7월 12일 오전에 투입되었다. 

적이 새로운 부대로 공격을 개시한 가장 힘든 시점에 니콜라이 페도로비치 바투틴은 그가 보유한 병력만으로 상황을 통제할 수 있었으며 방어선의 이점을 활용하여 예하 부대의 기동을 훌륭히 해냈다. 바투틴은 제한적인 전력만을 가지고 다른 어떤 상대도 아닌 유럽 최강의 군대를 상대로 싸운 것이었다.


주석 
1) 원문: низкое уровне профессиональной подготовки и оперативного кругозора... 
2) Отдел бронетанковых и механизированных войск (БТ и ТВ) 
3) управление БТ и ТВ фронта  
4) САМО РФ, ф.203, оп.2843, д.520, л.20 
5) САМО РФ, ф.1207, оп.1, д.138, л.150 
6) САМО РФ, ф.355, оп.5113, д.235, л.53 
7) Ротмистров П.А. Стальная гвардиия. М., Воениздат. 1984. С. 204 
8) К. К. Рокоссовский. Солдатский долг. М., Воениздат. 1997. с. 304–306 
9) Г. А. Колтунов, В. Г. Соловьёв. Курская битва. М., Воениздат. 1970. с. 118 
10) Ibid., p.53. 
11) Ibid., p.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