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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7월 11일 월요일

사창리 전투에 대한 미9군단장 호그 소장의 반응

한국군 6사단은 군사사를 공부하는 입장에서 흥미로운 부대입니다. 한국전쟁 초기 춘천 지구 전투에서 북한군에 큰 타격을 입히는 공훈을 세웠고 용문산 지구 전투에서는 중국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기도 했지요. 하지만 6사단은 사창리 전투에서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참패를 겪기도 했습니다. 6사단은 한국군 부대 중에서 우수한 편에 속한다고 평가되었기 때문에 더욱더 그랬습니다.

당시 6사단을 지휘했던 장도영은 회고록에서 사창리 전투를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장도영 회고록의 사창리 전투 관련 서술은 대략 이렇습니다.

사단은 이날 가급적 속히 중간목표선까지 진출하여 일몰전에 방어에 들어가려고 하였다. 그렇게 해야만 지형상 사창리로부터의 포병지원이 가능한데다, 또 제7연대의 예비선을 전진시켜 23일 초월공격으로 화천-금화 도로상의 수개 요점을 점거하려 하였다. 그러나 22일 오후가 되면서부터 갑자기 적의 저항이 심하여지며 반격이 잦아지기 시작하였다. 부득이 일선공격부대들은 진격을 멈추고 각 연대의 진출선에서 수세로 전환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드디어 일몰이 되자 중공군은 새로운 부대로 대거 침공을 개시하여 우리 일선전후에 쇄도하였다. 피아의 공방전은 밤이 되면서 더욱 더 치열해졌다. 자정이 되자 적의 새로운 대부대가 포격을 증가시키며 파상공격을 계속해 왔고, 또 다른 부대들은 전에 없던 기병대와 혼성하여 사단 전구 후방에 침투, 각 지휘소를 교란하기 시작했다.

방어진지에서 이탈하여 공격 전진 중에 적의 대부대의 공격을 받은 사단은 중과부적으로 일선을 전날의 공격출발선까지 철수시킬 수 밖에 없었다. 예비 7연대도 역시 전진하여 일몰전까지 방어에 들어가 사단주력의 철수를 엄호하다가 밤에 사창리 예비진지로 후퇴하였다.

23일 새벽까지 공방전을 계속하는 동안 적의 새로운 대부대는 야음을 이용하여 계속 남하하였으며, 여명시에는 이미 우리 전선 후방 깊숙이 진출하였다. 사단은 부득이 주력을 사창리 방어선으로 철수하고, 예비 7연대는 다시 38선 일대의 진지를 점령케 하여 적의 진격을 저지하려고 하였다.

24일에도 역시 적은 계속하여 우리 일선부대와 교전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부대를 투입하여 우리 후방으로 우회 포위하고 또 다른 부대들로 깊숙이 남하하여 우리 후방 요지들을 점거하는 작전을 반복하였다. 우리 사단은 중공군 제20군 소속 제58, 59, 60사단, 그리고 20사단 등 4개 사단의 집중공격을 받은 것 이었다. 25일에 이르러 우리는 가평북방까지 철수하여 방어선을 확보하고 국부적으로 반격을 감행하여 그날 오후가 되어서야 비로소 적의 진격을 완전히 저지할 수 있었다.1)

장도영의 회고록에서는 사창리 전투의 패배를 다소 축소해서 서술하고 있지만 한국전쟁에 관심을 가진 분들이라면 잘 아시다 시피 사창리 전투는 6사단이 경험한 패배 중 가장 황당한 패배였습니다. 사창리 전투 직후 6사단이 용문산 지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것을 생각한다면 더욱 더 황당하지요. 6사단의 패주는 군단 예비대로 있던 영연방 27여단이 투입되어 겨우 막을 수 있었습니다. 영국군 공간사는 6사단의 패배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4월 22일 오후, 한국군 6사단은 제19연대를 좌익에, 제2연대를 우익에 두고 와이오밍선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본대보다 3마일 정도 앞선 차량화수색대는 적과 접촉하지 못했다. 하지만 미 제9군단의 포병 관측기가 갑작스럽게 대규모의 적이 남진하는 것을 포착하여 적의 접근을 알렸으며 이 소식은 제8군의 전선 전체에 전달되었다.

한국군 6사단장 장도영 준장은 1600경 선두의 두 연대를 정지시키고 두 연대의 전투지경선 사이의 간격을 메워주는 좋은 지역이었던 인접한 산에 방어진지를 구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장도영 준장은 제7연대를 제2연대 뒤에 배치했다. 한국군 6사단은 날이 밝는대로 종심 5마일의 방어선을 형성할 수 있을 것 이었다. 장도영 준장은 지원부대로 6사단 포병대대외에 제16 뉴질랜드 야전포병연대(대대급)와 미군의 4.2인치 박격포 1개 중대를 갖추고 있었다. 이 외에도 미 9군단의 155mm 야포 1개 대대와 105mm 야포 4개 포대가 추가적인 지원을 제공할 수 있었다.

날이 지자 한국군 6사단은 사단 및 군단 지휘소의 지도에 표시된 진지에 포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장도영 준장이나 6사단 사령부의 참모들이 각 연대의 구역을 직접 시찰했다면 상황이 매우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러질 않았다. 방어진지로 재전개 하는 것이 매우 느렸고 사격 진지는 진창이었다. 야간 방어 전투에 필요한 많은 장비들이 산 아래에 있긴 했지만, 초급 장교와 부사관, 사병들은 꾸물거렸고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렇게 된 원인은 훈련이 부족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중국군의 공세가 코앞에 닥쳤다는 위기의식을 느낀 부대가 별로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한국군 장교들 중 상당수가 특별한 기준 없이 선발되었고 훈련도 부족했기 때문에 이런 문제에 대응하기에는 불출분했다.

이같은 상황하에서는 걱정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일몰 후 대략 한시간이 지나자 중국군 제60사의 선두 연대가 공격 준비사격이나 다른 공격 조짐도 보이지 않은채 갑자기 한국군 제2연대의 최전방 대대를 휩쓸고 돌진하기 시작했다. 제2연대가 혼란에 빠졌을 때 중국군의 두 번째 연대가 나타나 (2연대의) 예비대대를 향해 공격을 시작했다. 저항은 약간의 간헐적인 소화기 사격에 그쳤다. 제19연대는 왜 사격을 하는 건지 물어본 뒤에야 제2연대가 곤경에 빠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제2연대의 생존자들과 제19연대 전체가 방어진지를 버리고 도주하기 시작했으며 일부는 무기와 장비도 모조리 버리고 어둠속으로 사라졌고 보다 신중한 이들은 장비와 탄약, 무전기는 챙겨서 후퇴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수많은 장비가 유기되었다. 제7연대는 제2연대의 패잔병들 때문에 비상이 걸려 2200에서 2230사이에 황급히 방어선에 전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바로 제7연대도 패주하기 시작했다.

미군과 뉴질랜드군의 포대는 한국군 6사단 구역에 관측소를 설치하지 못했기 때문에 한국군의 화력지원본부(fire support center)를 통해 목표를 지정받아야 했다. 한국군의 전방포병관측요원들도 도주하는 보병들과 함께 달아났기 때문에 미군과 뉴질랜드군 포병들은 화력지원요청을 받지 못했다. 한국군의 포병 진지들은 총퇴각의 와중에 모두 버려졌다.

2230 경 군사고문관 한 명이 뉴질랜드군의 지휘소에 한국군의 전방에 배치된 2개 연대가 공격을 받아 5km 정도 퇴각했다고 알려왔다. 한시간 반 뒤 한국군 6사단 사령부도 예하 연대와의 연락이 모두 두절되었다고 알렸다. 이 무렵 소규모의 한국군 병사들이 뉴질랜드군의 포진지를 지나쳐 가평천을 따라 난 길을 따라 도망쳤다. 23일 0100 무렵이 되자 이 길은 수많은 패잔병들로 가득 메워졌다.

다행히도 한국군은 적군보다 훨씬 앞서 도망치고 있었다.(Fortunately, they had outpaced their foe.)2)

미육군 공간사인 Ebb and Flow에서는 사창리의 패전을 무미건조하게 사실 위주로 서술하고 있는 반면 영국군 공간사는 살짝 시니컬하게 쓰고 있어 한국사람을 무안하게 하지요;;;;3)  6사단 부사단장 이었던 임부택 대령은 사창리 전투 당시 6일 동안이나 포위되어 있다가 간신히 귀환할 정도로 6사단의 혼란은 심각했습니다.4)  다행히도 중국군은 전과를 확대하지 못하고 반격에 직면해 대참사는 막을 수 있었습니다만 한국군의 정예부대였던 6사단은 체면을 있는대로 다 구기죠.

사창리 전투에서 제6사단과 배속된 부대가 상실한 장비는 다음과 같았다고 합니다.5)


한국군 제6사단과 배속부대의 장비 손실(1951. 4. 22~23)
한국군 제6사단
6사단 배속부대
75mm 야포
6
105mm 야포
8
15
M1 소총
2,353
카빈
852
BAR
85
중기관총
45
경기관총
43
기관단총
72
권총
45
60mm 박격포
37
81mm 박격포
7
4.2인치 박격포
7
3/4톤 트럭
11
11
1/4톤 트럭
22
27
2½톤 트럭
17
22
도요타 트럭
23
닛산 트럭
13


장도영의 회고록에는 호그 소장의 질책에 대해 별다른 언급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참패를 겪었는데 아무 반응이 없었을 리가 없지요. 6사단의 어처구니 없는 패배뒤에 미 제9군단장 호그(William Morris Hoge) 소장은 장도영 준장에 다음과 같은 서한을 보냈습니다.

장도영 장군에게,

이 서한은 귀하가 1951년 4월 25일 귀하의 사단의 상태와 현황을 보고한 서한에 대한 답장이오.

1951년 4월 22일 밤 귀하의 사단이 보인 행위에 대한 나의 실망은 글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요. 22일 저녁 제2연대와 제19연대의 패주와 와해는 납득할 수 없으며 모든 면에서 불명예 스러운 것이오. 내가 가진 정보에 의하면 적군은 귀하의 사단에 비해 병력과 장비 면에서 열세에 있었던 것이 분명한데 제2연대와 제19연대는 이렇다 할 저항도 하지 않고 혼란에 빠져 도주했으며 무기와 장비를 적이 노획하도록 내버려 두었고 우리측의 지원부대들 까지 유린되게 했소. 이 때문에 지원부대들은 심각한 물자와 장비의 손실을 입어야 했소.

제7연대도 나을 것이 없소. 제7연대는 예비대로서 공격을 감행해 제2연대가 잃어버린 진지를 탈환하라는 지시를 받았소. 이 공격을 실시했다면 성공했을 것이 분명하고 다른 부대들의 와해를 막는 한편 진지를 되찾을 수 있었으리라 확신하오. 제7연대는 이 공격을 실시하지 않고 대신 후방으로 달아났고 연대의 일부 병력이 23일 오전 수마일 후방에서 재집결했을 뿐이오.

귀하의 사단으로 인해 양익의 아군 부대들은 적의 돌파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소. 적군이 초기의 성공을 확대했다면 엄청난 참사가 일어났을 것이오. 아군이 적의 돌파를 저지할 수 있었던 원인은 적군이 소수에 불과했고 한국군 6사단의 패배로 인한 이점을 활용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오.

본인의 판단으로는 귀하의 사단이 와해된 근본적인 원인이 모든 계급의 장교와 부사관들이 지휘력과 통제력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오. 하위 제대의 부사관과 장교들이 초기 단계에서 지휘책임을 고수했다면 혼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오. 이러한 혼란은 매우 빨리 퍼지기 때문에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최대한 빨리 진정시켜하는 것이오.

상위 제대의 지휘관들은 전투 초기 단계에 해당 구역에 없었기 때문에 지휘관들이 개입하기도 전에 병사들의 패주가 손을 쓸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상위제대 지휘관들의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오. 사단장과 사단 참모들, 연대장과 그 이하의 지휘관들은 부대의 훈련과 규율 유지에 책임을 지는 것이오. 과거에 이러한 조치들을 충분히 취했고 이러한 긴급 상황에서 공격적인 지휘력을 발휘할수 있었다면 이와 같은 패주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오.

본인이 제9군단의 지휘를 맡은 이래 4월 22일 까지 제6사단은 부여받은 임무를 모범적으로 수행해 왔소. 본인은 귀하와 귀하의 사단을 높게 평가했으며 한미양국의 고위층에게도 칭찬했소. 이러한 확신이 없어진 것이 정말 유감이오. 앞으로 이와 같은 불명예스러운 기억을 지워버릴 수 있을 만큼 전장에서 활약을 해야만 나의 확신이 되살아 날 것이오.

본인은 귀하와 한국군 6사단의 전 장병이 사단의 재건을 위해 최선을 다하여 제8군의 다른 부대들과 전장에서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영광스러운 위치를 차지할 것이라 기대하는 바이오.6)

그리고 호그 소장은 5월 2일에는 제8군 사령관에게 다음과 같은 전문도 보냈습니다.

1951년 4월 22일의 적 공세 이전만 하더라도 한국군 제6사단은 부여받은 임무를 모범적으로 수행해 왔습니다.

현재까지의 정보로는 1951년 4월 22일 공세 당시 적군의 병력이나 장비는 한국군 6사단 보다 열세했습니다. 적의 공격이 시작된지 얼마 되지않아 제2연대와 제19연대는 와해되어 이렇다할 저항도 하지 않은채 혼란에 빠져 패주했으며 무기와 장비를 내버려두고 도망치면서 우리측 지원부대들 마저 유린되게 했습니다. 예비대로 있던 제7연대는 명령대로 공격하지 못했습니다. 제7연대 또한 혼란에 빠져 후방으로 패주했습니다. 4월 23일 오전 한국군 제6사단장은 사단의 병력이 대략 3,000명 정도라고 파악했습니다. (6사단 예하) 연대들이 패주, 와해된 것은 도데체 그 이유를 알 수 없으며 모든 측면에서 불명예스럽습니다. 4월 23일, 재편성된 사단의 잔여 병력은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고 다시 방어진지를 버렸으며 지원부대들을 뒤로 하고 후방으로 도망쳤습니다. 한국군 6사단을 와해시킨 공격은 군단의 예비대로 있던 영연방 제27여단 소속의 약 2개 대대에 의해 저지되었습니다.

한국군 6사단에 소속된 분대에서 연대에 이르는 모든 부대들이 이렇다 할 저항도 없이 혼란에 빠져 와해된 상태로 퇴각한 것이나 무기와 장비를 내팽개쳐 적이 노획하도록 한 사실은 모든 계급의 장교들과 부사관들의 지휘력과 부대 장악력이 부족하다는 점을 보여주었습니다.

의견 : 본인은 한국군 제6사단의 패주는 모든 계급의 장교와 부사관들이 공격적인 지휘력을 결여하고 있는데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며 하위 제대들이 초기 단계에서 지휘책임을 고수했다면 혼란이 시작되지 않았을 것 입니다. 사단 내에 제5열이 침투해 있었다는 증거는 없지만 그랬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소문을 퍼트리는 병사는 순식간에 공황과 혼란으로 번져나갈 수 있는 의심과 공포의 씨앗을 뿌릴 수 있습니다.

제안 : 모든 한국군 장교와 부사관들에게 지휘관은 책임을 가지며 이것은 부하들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고 책임이란 부하들의 훈련, 군기 유지, 그리고 복지라는 기초적인 원칙을 철저히 숙달시켜야 합니다.7)

여기서 호그 소장은 한국군의 고질적인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한국군이 패전할 경우 단골로 지적되는 장교와 부사관의 자질 문제이지요. 다행히도 장도영과 6사단은 얼마 안되어 명예를 회복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아쉬운 것은 사창리 전투의 패배만 없었다면 제6사단은 전설적인 부대로 남을 수 있었다는 점 입니다.



1) 장도영, 『望鄕』(숲속의 꿈, 2001), 215~216쪽
2) Anthony Farrar-Hockley, The British Part in the Korean War Vol.II : An Honourable Discharge(HMSO, 1995), pp.139~140
3) 미육군 공간사의 사창리 전투 서술은 Billy C. Mossman, Ebb and Flow(USGPO, 1990), pp.381~385를 참고하십시오.
4) 林富澤, 『洛東江에서 楚山까지』(그루터기, 1996), 375쪽
5) 6th ROK Division(1951. 4. 28), James A. Van Fleet Papers, Box 86, Republic of Korea Army, Folder 1-2, 4-9, 10
6) From Major General W. M. Hoge to Brigadier General Chang Do Young(1951. 4. 28), James A. Van Fleet Papers, Box 86, Republic of Korea Army, Folder 1-2, 4-9, 10
7) IXCCG76, James A. Van Fleet Papers, Box 86, Republic of Korea Army, Folder 1-2, 4-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