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8월 13일 수요일

이글루스의 대양해군 떡밥

이글루스를 가보니 간만에 밀↗덕↘ 글이 여러건 올라왔습니다. 음. 그런데 그 주제가 대양해군 같은 쉬다 못해 상한 떡밥이라니 정말 유감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대양해군 같은 무의미하고 재미없는 떡밥이 잊을만 하면 다시 튀어나오는 원인이 무엇인지 궁금하군요.

좀 싱싱하고 유쾌한 떡밥으로 이야기 꽃을 피울수 있으면 좋을텐데 말입니다.

2014년 8월 10일 일요일

2차대전기 미영 연합군의 전차 손실에 대한 통계 : Survey of Allied Tank Casualities in World War II - (7)



지루하게 늘어지는 ORO-T-117 요약입니다. 오늘 포스팅은 보고서의 부록C인 “Land Mines Warfare” 부분입니다. 본문에서 간략하게 다룬 지뢰 활용에 대한 연구를 따로 다루고 있는데 부록 중에서 양이 가장 많아 Part 1과 2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포스팅에서는 부록C의 Part 1을 정리하겠습니다.

Part1은 크게 다섯부분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북아프리카전역, 지중해전역, 북서유럽전역, 동남아시아전역, 태평양전역입니다.

먼저 북아프리카 전역은 총 1,718대의 격파된 영국군 전차가 분석 대상입니다. 이중 15%가 지뢰에 의해 격파되었다고 하는데 이것을 다시 연도별로 세분화하면 1941년에는 전체손실의 7%, 1942년에는 전체손실의 17%, 1943년에는 전체손실의 23%가 지뢰에 의해 격파된 것으로 집계됩니다. 추축군이 방어로 돌아설수록 지뢰에 의한 손실이 늘어나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포함되지 않은 복합적인 원인으로 손실 처리된 전차 중 약 2%가 지뢰와 연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미군은 손실 표본 118대 중 16%, 프랑스군은 손실 표본 39대 중 23%를 지뢰에 의해 잃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보고서는 특히 사막지형에서 지뢰의 사용이 매우 유용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1)

지중해 전역에서는 주로 포Po강 이남에서 지뢰에 의한 전차 손실이 높았고 포강 이북에서는 다른 대전차병기에 의한 손실이 높게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탈리아 전선에서 미군 손실 표본 588대 중 23%, 영국군은 손실 표본 728대 중 25%, 캐나다군은 손실 표본 567대 중 16%를 지뢰에 의해 잃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여기에 복합적인 원인 중 지뢰가 포함된 경우, 또는 손실원인이 명확하지는 않지만 지뢰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는 경우를 합산하면 전체 손실의 30%정도가 지뢰에 의한 것이 아닐지 추측하고 있습니다. 이런 경향은 표본의 숫자가 72대로 훨씬 적은 시칠리아 전선과도 비슷합니다. 시칠리아 전선에서 지뢰에 의한 손실은 25%로 추산된다고 합니다. 이탈리아 전선의 경우 상대적으로 전차의 기동이 제한되는 지형이었기 때문에 독일군이 지뢰를 사용하는데 용이했으며 이것이 북서유럽 전역에 비해 지뢰에 의한 손실이 높았던 원인이라고 지적합니다.2)

북서유럽전선에서 지뢰로 인해 격파된 연합군 전차의 비율은 지중해 전역에 비해 낮습니다. 미군은 전체 표본의 18%, 영국군은 전체 표본의 26%, 캐나다군은 전체 표본의 12%를 지뢰에 의해 상실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북서유럽전역에서 지뢰로 인한 손실은 지속적으로 증가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손실된 원인이 불명인 전차중 상당수가 지뢰로 인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3)
북서유럽전선의 손실 사례 중에서 미 제1군의 전차 손실원인을 분석한 자료는 지뢰에 의해 격파된 전차가 어떤 부위를 격파당했는지를 집계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전체 표본 중에서 지뢰에 의해 격파된 전차는 167대인데 격파된 전차들은 지뢰에 의해 435군대의 피격 흔적이 남았다고 합니다. 지뢰에 의한 피격 흔적을 보면 현가장치와 바퀴 부분이 361건으로 전체의 83.2%, 차체가 39건으로 15.8%, 그리고 포탑이 5건으로 전체의 1%입니다. 지뢰에 의해 피격된 전차 중 전소된 것은 전체의 10%이고, 지뢰에 의해 차체 내부까지 관통이 된 경우는 전체의 15%라고 합니다.4)


미 제1야전군의 전차손실 중 지뢰에 의한 손실내역

영국군이 조사한 통계 중에는 영국군 전차를 격파한 지뢰의 종류를 분석한 통계가 있습니다. 1946년 1월에 작성된 보고서 “A Survey of Casualties Amongst Armoured Units in Northwestern Europe”이 원출처라고 하는데 표본이 많지는 않지만 참고는 할만한 통계입니다.

표1. 영국군 전차를 격파한 독일군 지뢰의 종류
지뢰 종류
격파된 전차
전체 표본에서 차지하는 비율(%)
Riegel Mine 43
18
23
Teller Mine
2
3
Riegel Mine 혹은 Teller Mine
4
5
기타 지뢰(목함지뢰 등)
3
4
지뢰 형식 불명
50
65
[표 출처: Technical Memorandum ORO-T-117, Survey of Allied Tank Casualities in World War II(1951. 3. 31), Appendix C, p.57, Table XXVIII]

흥미로운 점은 라인강을 도하한 이후에는 지뢰로 인한 손실이 줄어든다는 점 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두가지 원인을 제시하고 있는데 첫번째는 독일 내에서 싸운다는 점 때문에 독일 민간인의 희생을 우려해서 독일군이 지뢰 사용을 제한했다는 설명이고, 두번째는 라인강 도하 이후 연합군이 신속하게 진격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지뢰를 매설하는 것이 어려웠을 것이라는 설명입니다.5)

동남아시아 전선의 사례는 1945년 2~5월 인도군 제225여단이 미얀마로 일본군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집계된 자료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제225여단이 상실한 전차 중 20%가 지뢰에 의한 것으로 집계되는데 서유럽에서 독일군이 사용한 지뢰 보다는 위력이 낮았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6) 

태평양 전선에서는 지뢰에 의한 손실이 가장 높게 나타납니다. 미육군과 미해병대의 전차 손실 표본 775대 중에서 30%가 지뢰에 의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타로 집계된 손실 중 상당수가 지뢰로 기동 불능이 된 상태에서 보병의 근접 공격에 격파된 것이라고 합니다. 특히 필리핀 전역에서 지뢰로 인한 손실이 높았다고 하는군요. 다만 태평양 전선은 기갑전이 매우 드물었다는 특성을 감안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7)



주석
1) Technical Memorandum ORO-T-117, Survey of Allied Tank Casualities in World War II(1951. 3. 31), Appendix C, p.53.
2) Technical Memorandum ORO-T-117, Survey of Allied Tank Casualities in World War II(1951. 3. 31), Appendix C, pp.53~54.
3) Technical Memorandum ORO-T-117, Survey of Allied Tank Casualities in World War II(1951. 3. 31), Appendix C, p.54.
4) Technical Memorandum ORO-T-117, Survey of Allied Tank Casualities in World War II(1951. 3. 31), Appendix C, p.55.
5) Technical Memorandum ORO-T-117, Survey of Allied Tank Casualities in World War II(1951. 3. 31), Appendix C, p.56.
6) Technical Memorandum ORO-T-117, Survey of Allied Tank Casualities in World War II(1951. 3. 31), Appendix C, p.57.
7) Technical Memorandum ORO-T-117, Survey of Allied Tank Casualities in World War II(1951. 3. 31), Appendix C, pp.57~58.

2014년 8월 6일 수요일

브레스트 요새 전투에 대한 흥미로운 연구

최근에 나온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27권 3호를 훑어보니 제2차세계대전에 대한 글이 많이 실려있어서 즐거웠습니다. 흥미를 끄는 글 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라이프치히 대학의 크리스티안 간처Christian Ganzer가 쓴 “German and Soviet Losses as an Indicator of the Length and Intensity of the Battle for the Brest Fortress (1941)”라는 글이 돋보입니다. 이 글은 간처가 2010년 Osteuropa라는 매체에 기고했던 연구를 보완한 것 인데, 독소전쟁 초기의 유명한 전투인 브레스트 전투의 양상이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를 양군의 인명피해 통계를 가지고 분석하는 흥미로운 방법을 택하고 있습니다.


필자인 간처는 브레스트 요새의 영웅적인 항전을 부각하는 소련의 역사서술에 의문을 표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랬을까? 소련의 역사서술에 따르면 브레스트 요새에 포위된 붉은군대 장병들은 한달이 넘도록 독일군의 포위 공격에 맞서 결사적인 항전을 펼쳤고 독일군에게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고 합니다. 브레스트 요새 공격을 담당한 독일 제45보병사단의 보고서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전사한 독일군은 453명, 부상자는 668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소련 역사가들은 이것이 조작된 것이며 독일군의 전사자는 보고서에 기록된 것의 2~3배에 달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또한 독일군의 보고서에는 7,223명의 포로가 잡힌 것으로 되어 있는데 소련 역사가들은 이것 또한 조작이며 숫자를 과장하거나 브레스트 근처에 거주하던 민간인들을 체포한 것 까지 포함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필자는 이러한 소련측의 서술에 회의적인 시각을 보이고 있습니다. 위에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필자는 전투의 양상을 재구성하기 위해서 독일군의 인명피해와 소련군의 피해 양상을 분석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습니다.


먼저 독일군의 인명손실을 파악하기 위해서 독일군의 공식 기록 외에 린츠에 있는 상(上)오스트리아 민속박물관Oberösterreichisches Landesmuseum에서 소장하고 있는 전후에 작성된 제45보병사단 전사자 명부를 활용하고 있습니다. 이 전사자 명부는 사단 소속 장병들의 개별 전사통지서를 정리하여 작성한 것으로 사망자의 출생일, 성명, 소속부대, 사망한 날자와 전사한 장소, 매장지, 사망원인, 인식표의 군번과 가까운 친인척의 소재지 등이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필자는 제45보병사단의 기록과 당시 지역신문의 사망자 관련 정보를 교차검증하여 이 명부가 신뢰할 만 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사망자의 숫자입니다. 이 명부에는 브레스트 전투에서 475명이 전사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실제로 8명은 전투 이전에 사망했거나 다른 지역에서 사망한 경우라고 합니다. 그리고 전투 첫날인 6월 22일에는 314명이 사망했는데 이중에서 제130보병연대의 사망자 30명은 브레스트 요새가 아닌 브레스트 시가지의 전투에서 사망했으며, 10명 정도는 독일군의 포격에 휘말려 사망했다고 합니다. 즉 브레스트 요새 전투의 첫날에 사망한 독일군은 280명 가량이라고 보는 것 입니다. 전투 이틀차 부터는 사망자 숫자가 격감합니다. 23일에는 35명이 사망했으며 이중 14명은 후송된 야전병원에서 사망했다고 합니다. 24일에는 전투가 격렬하게 전개되어 56명이 사망했습니다. 25일에는 21명이 사망했고, 요새내의 거점 대부분이 제압당한 26일에는 13명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6월 27일에는 브레스트 요새 전투에서 마지막 사망자가 발생합니다. 필자는 사망 일자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사망자 1명을 포함해 총 사망자는 428명이고 이중 86.5%에 해당하는 370명이 전투 초기의 3일간에 사망했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부상자 통계를 내는 것은 전사자 통계 보다 어렵지만 전사자와 비슷한 양상을 보인 것으로 파악합니다. 제45보병사단 의무대장의 보고에 따르면 6월 22일 저녁 기준으로 야전병원에 수용된 부상자가 총 312명, 25일에는 총  610명, 28일에는 714명이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사단장의 보고서와는 차이가 있는 수치인데 필자는 의무대장이 병원에서 사망한 장병의 숫자를 빼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필자는 사단장의 전투보고서에 기록된 부상자 숫자를 기준으로 전체 부상자의 86.2%가 전투 초기 4일동안 발생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한편 소련군의 피해를 정확히 집계하는 것은 어렵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독일측 기록에 따르면 1941년 6월 28일까지 약 2천구 가량의 시신을 브레스트 요새에서 확인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필자는 정확한 전사자 집계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소련군 포로 통계만을 활용하기로 합니다. 포로 통계는 제45보병사단이 상급부대에 보고한 내용을 기준으로 하고 있는데 제45보병사단은 브레스트 요새 공격당시 상급부대가 몇차례 바뀌었습니다. 필자의 조사에 따르면 6월 24일 부터 27일, 그리고 다시 6월 30일부터 7월 2일까지 제45사단을 지휘한 제53군단의 기록에서 포로 통계를 찾아볼 수 있다고 합니다. 이 기록에 따르면 6월 24일 부터 27일까지는 3,062명이 포로로 잡혔고 6월 30일부터 7월 2일까지는 940명이 포로로 잡혔다고 합니다. 필자는 다른 기록들을 활용하여 일자별 포로 통계를 산출했는데 여기에 따르면 6월 22일 부터 7월 1일까지 최소 6,713명, 최대 7,779명의 소련군이 포로로 잡혔을 것이라고 추산합니다. 최저치와 최대치 통계가 큰 차이를 보이는 시기는 6월 22일과 23일인데 전투 초기의 혼란 때문에 정확한 집계가 어렵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브레스트 요새와 브레스트 시가지에서 잡힌 포로를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은 어렵긴 해도 브레스트 요새가 단기간내에 고립됐고 브레스트 시가지에서 전투를 벌인 제130보병연대의 경우 22일 이후로는 이렇다 할 전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6월 22일 브레스트 시가지에서 잡힌 400여명의 포로를 제외한 포로는 브레스트 요새 내에서 잡힌 것으로 보는게 타당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최대한 보수적으로 계산한다 해도 브레스트 요새의 병력 9,000여명 중 대부분은 항복했고 포로의 55.90%는 6월 22일 부터 6월 24일 사이에 투항했다고 봐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필자는 이와같은 결과를 토대로 브레스트 요새 전투를 1개월간에 걸친 처절한 항전으로 설명하는 것이 문제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대부분의 전투는 6월 24일까지 마무리 되었으며 29일에는 사실상 전투가 종결되었다는 것 입니다. 실제로 제45보병사단은 7월 2일에 제130보병연대 2대대와 제45야전보충대대만 브레스트에 남겨두고 동진했으며 남은 2개대대도 3일 뒤인 7월 5일에는 1개 중대 규모 남짓한 다른 후방 부대에 브레스트 요새를 인계하고 떠났다는 점을 볼때 6월 29일에 전투가 종결됐다는 독일측의 주장은 타당한 것 같습니다. 소련측의 주장대로 한달 동안 격렬하게 저항했다면 제45보병사단의 주력이 그렇게 일찍 브레스트를 떠났을 리는 없을 것입니다. 독일측의 기록에 따르면 6월 29일 이후 이렇다 할 교전은 없었고 다만 7월 23일에 한명의 소련군 중위가 독일병사 다섯명에게 부상을 입히고 생포된 것이 유일한 저항이었다고 합니다.
필자는 소련측 생존자들의 회고에서 최후까지 결사적으로 저항하다가 ‘가까이서 터진 포탄의 충격에 의식을 잃고’ 포로가 되었다는 설명이 많은 이유는 독일군에 생포되었다는 점 때문에 배신자로 몰릴 것을 우려해 자기 변명을 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소련측의 서술을 받아들인다면 요새 수비병력의 3분의 2 이상이 포로가 됐고 그중 상당수가 전투 초기의 3일동안 항복한 것을 설명하기가 힘들긴 합니다.

2014년 7월 26일 토요일

[번역글] 노르망디 전투 : 계속되는 논쟁

날림 번역글 하나 나갑니다.

오늘 포스팅 하는 글은 1992년 The Journal of Military History 56권 3호에 실린 꽤 오래된 논문으로 스티븐 파워즈Stephen T. Powers“The Battle of Normandy: The Lingering Controversy”라는 제목의 글 입니다. 20년은 넘은 오래된 글이고 미국쪽 시각을 반영하고 있긴 하지만 영미권에서 노르망디 전역을 둘러싸고 전개된 논쟁을 잘 정리해 놓았고 오늘날까지도 읽히고 있는 주요 저작들의 내용도 잘 정리해 놓은 괜찮은 연구사 정리여서 소개하기로 했습니다. 영미권에서 진행된 논쟁에서 핵심 쟁점이 무었이었는지 잘 보여주는 글 입니다.

몇년 전에 노르망디 전역 당시 연합군 지휘관들의 갈등을 다룬 포스팅을 하나 했었는데 함께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노르망디 전투 : 계속되는 논쟁1)


스티븐 파워즈Stephen T. Powers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역사가들은 1944~45년 서유럽에서 연합군이 수행한 결정적인 전역들에 대해 여러가지의 문제를 제기해왔다. 지상군 총사령관이었던 버나드 몽고메리 원수를 지지하는 진영과 연합군 총사령관이자 몽고메리 원수의 상급자였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원수를 지지하는 진영은 50여년전에 있었던, 연합군이 승승장구 하면서 대서양방벽에서 독일 제국의 심장부까지 진격하면서 벌인 작전에 관한 전략과 전술에 대해 재검토 하면서 종종 국가주의적인 견해를 드러내곤 한다. 논쟁의 주제는 다양하다. 노르망디 침공 이전의 계획 수립을 주도한 것이 누구인가, 넓은 정면 전략Broad Front Strategy과 좁은 정면 전략Narrow Front Strategy 중 어떤 전략이 옳은 것이었는가, 연합군의 진격을 엘베강에서 멈추게 한 결정, 그리고 최근에는 연합군의 독일군 포로의 처우 문제에 대한 주제가 있다. 하지만 최근에는 노르망디 전역의 전투 수행에 관한 주제가 가장 큰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듯 하다. 1980년대 초에 D-Day의 침공과 뒤이은 전투, 넵튠 작전과 오버로드 작전을 전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다루는 역사연구서나 전기류가 십여권이상 출간되었다. 이 연구사 정리는 이러한 문헌에 실린 논의들을 가장 큰 쟁점이 되는 부분을 중심으로 살펴볼 것이다. 

상륙작전과 강하작전으로 이루어진 넵튠 작전은 미육군 제5군단이 담당한 오마하 해변에서 가까스로 참극을 면하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2차대전이 끝난 뒤 일어난 논쟁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은 영국군 제 3보병사단이 남쪽의 넓은 평야 지형으로 나가는 열쇠인 캉Caen을 점령하는데 실패하면서 몽고메리 장군이 심혈을 기울여 짠 핵심 계획이 D-Day 직후 시작된 전투에서 완전히 엉클어졌다는 점이었다. 제22기갑여단이 6월 13일과 14일에 걸쳐 비에흐 보카즈Villers-Bocage일대의 독일군 전선을 돌파하는데 실패하고 이후 전개된 엡솜Epsom작전, 찬우드Charnwood작전, 굿우드Goodwood작전이 미미한 성과만 거두면서 초기의 실패를 바로잡을 수 없었다. 독일군은 약화되기는 했어도 7월 중순까지  캉을 장악하고 있었다. 몽고메리가 지휘하는 제21집단군의 작전은 진전이 없었고 몽고메리가 계속해서 지상군 총사령관을 맡을 가능성은 희박해 졌다.
서쪽에서는 미군도 영국군과 마찬가지로 생울타리 지형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미군은 작전 초기에 로튼 콜린스J. Lawton Collins소장의 제7군단이 코탕탱Cotentin 반도를 신속하게 휩쓸며 북상하여 6월 29일에는 셸부르 항구를 점령하는 등 인상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 이후 미군의 진격은 생울타리 지대에 가로막혀 지지부진해졌다. 오마 브래들리 중장의 미 제1군은 이후 7월동안 조금씩 남진하여 7월 18일에는 생 로St. Lo-페리에Périers 가도를 잇는 선에 진출했다. 20마일을 진격하는 동안 4만명에 달하는 희생이 발생했다. 결국 7월 25일 브래들리와 콜린스가 코브라 작전을 발동하고 3개 사단을 정면 7천야드의 지점에 집중하여 독일군의 주저항선을 돌파하면서 생울타리 지대를 돌파할 수 있었다. 제1군은 계속 남진하면서 7월 30일에는 아브랑쉐Avranches를 점령했다. 새롭게 편성된 패튼 중장의 제3군은 예하의 제8군단의 진격 방향을 돌려 아브랑쉐의 좁은 돌파구를 통해 브리타니 반도로 진격하게 했고 나머지 3개 군단은 계속 동남쪽으로 진격해 르 망Le Mans와 오를레앙Orléans을 점령하도록 했다. 브래들리와 몽고메리는 독일군이 아브랑쉐 방면으로 전개한 반격을 격퇴한 뒤 팔레즈 일대에서 짧은 포위전을 전개했다. 8월 21일 포위전이 종료되었을때 독일군의 2개 야전군은 궤멸되었고 길고 치열했던 노르망디 전투는 연합군의 빛나는 승리로 마무리 되었다. 

미국 측은 몽고메리가 노르망디 전역과 그 직후 프랑스와 저지대 국가에서 전개된 추격전에서 보여준 지휘능력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지만 1945년 봄 독일이 항복한 이후에는 이러한 불만이 크게 누그러 들었다. 연합군 최고사령관 아이젠하워 장군은 1945년에 연합참모본부Combined Chief of Staff에 제출할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독일군이 노르망디 교두보의 동쪽에 병력을 집중하면서 영국군의 돌파가 저지되었고 이 때문에 “영국군과 캐나다군이 동쪽에서 독일군을 붙잡아 두고 있는 동안” 미군이 서쪽에서 돌파할 수 있는 여지가 마련되었다고 밋밋하게 서술하면서 이런 풍조를 만들었다. 

아이젠하워의 참모진이 보고서를 작성할 당시 몽고메리는 노르망디 전투에 대한 서술에서 미국과 영국측이 조율을 거치길 바란다는 전문을 보냈다. 몽고메리는 자신이 동쪽에서 돌파하려는 의도는 절대로 없었으며 영국군이 독일군을 동쪽에 붙들어두는 동안 미군이 전력을 집중시켜 루아르와 센강 방면으로 진격할 수 있도록 하려 한 것이라고 장황하게 설명했다. 몽고메리는 “적이 캉 일대에 강력한 전력을 집중함으로써 이 방면에서 돌파하는 방안은 실현 가능성이 없어졌으며 …. [그때문에] 아군은 전략을 바꿔서 서쪽에서 돌파하게 되었다”는 서술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몽고메리는 “아군이 중간에 전략을 바꾸었다는 생각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아이젠하워는 1946년 5월 23일에 보낸 답신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아군이 [D+90일 까지 진격하도록 한] 목표까지 진출한 작전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감행하기 전 확립한 개념에 기초한 것 이었습니다. 전술적인 측면에서 볼 때 작전은 상륙 직후 부터 원래 추진하려던 계획과는 다르게 틀어졌습니다.” 아이젠하워는 원래 계획이 틀어졌다는 서술이 “연합군은 독일군의 대응에 따라 전술을 변경해야 했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줄 것이라는 점은 인정했지만 “전체적인 작전의 틀에서 보면 원래 수립된 전략이 합리적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처음에 수립한 전술적인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것은 사소한 문제에 불과하며 [...] 이 사실은 침공 계획이 융통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합리적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이젠하워는 자신과 몽고메리의 견해 차이가 별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며 토마스 노스Thomas North준장에게 보고서를 조금 수정해서 양자의 차이가 두드러지 않게 하라고 지시했다.2)  

아이젠하워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지 3년 뒤에 출간한 회고록 Crusade in Europe에서도 몽고메리의 전투 지휘에 대해 특별히 비판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작전 계획에 대해서는 신경을 써서 가장 무난한 표현으로 “노르망디 전역이 진행되는 동안 초기의 계획은 한번도 포기하지 않았다”고 썼다. 하지만 몽고메리의 작전 계획에 대해 언급해야 하는 부분에서는 그가 영국 제2군이 “캉의 남쪽으로 넓게 펼쳐진 개활지대를 [...] 조기에 점령할 것을” 기대하고 있었음을 명확하게 했다. 이 내용이 실린 장은 “상륙교두보의 전투”라는 제목이 붙었는데 이 장에 실린 내용은 아이젠하워를 두고 두고 괴롭히게 되었다. 아이젠하워는 몽고메리와 직접 주고 받은 전문에서 작전 계획의 입안과 실행 과정, 그리고 “구체적인 전역 및 작전계획과 미영 양측이 희망한 작전 결과가 크게 차이 났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최대한 모호하게 서술하겠다고 확언했기 때문이었다. 아이젠하워는 작전 계획에서는 원래 계획을 그대로 밀어 붙이는 것 보다는 융통성을 발휘하는 쪽이 좋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영국군이 캉을 신속하게 점령하는데 실패하자 계획을 변경해서 “롬멜이 캉에 매달리게 만들어 다른 연합군 부대들이 이 기회를 이용할 수 있게 한 것이었다.” 모든 것은 이렇게 진행된 것 이었다. 몽고메리는 “연달아 공세를 감행했지만 [...] 독일군의 방어를 분쇄할 수 없었다.” 그동안 연합군의 우익에서는 브래들리가 전력을 증강해서 코브라 작전을 개시했고 마침내 교착상태를 타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젠하워의 서술을 보면 그가 주공으로 생각한 것은 영국 제21집단군 이었고 우익의 미 제1군은 주공을 보조하는 위치였다. 제21집단군의 주공은 세느강 방면으로 동진하여 중요한 항만인 안트베르펜을 점령하고 독일의 V무기 발사 장소를 소탕하며 궁극적으로는 루르 공업지대를 포위할 것이었다.3) 

4년 뒤에 브래들리도 노르망디 전역에 대한 논의에 참여했다. 브래들리는 “몽고메리의 업적에 대해서는 영국인들 만큼 열광적으로 평가할 수 없으나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있어 몽고메리의 지휘관으로서의 자질과 탁월한 전공을 폄하할 수는 없을 것이다. [...] 그보다 더 관용적이고 신중한 지휘관을 바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몽고메리는 단 한번도 독단적인 계획을 가지고 우리와 충돌하지 않았고, 우리가 기획한 계획에 반대한 적도 없었다.”고 술회했다.4) 브래들리는 몽고메리가 4월 7일 세인트 폴 학원에서 있었던 브리핑에서 공개한 핵심 계획은 명확하다고 생각했다. 몽고메리의 제21집단군이 상륙 당일 캉과 그 남쪽의 개활지를 점령하고 미군이 코탕탱 반도를 봉쇄한 뒤 셰르부르를 점령할 시간을 번 뒤 다시 남쪽으로 진격하여 세느강을 향해 대규모의 우회기동을 실시한다는 것 이었다. 브래들리는 영국군과 캐나다군이 일종의 미끼 역할을 하여 돌파를 할 것 처럼 위협하면서 독일군을 끌어들이는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브래들리는 이렇게 주장했다. “독일군은 [캉에서 파리를 거쳐] 독일 본토로 이어지는 중요한 지역을 방어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해 몽고메리가 캉 일대에서 돌파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지 못하게 해야 했다. 이것이야 말로 정확하게 우리가 의도한 것 이었다. 적이 캉에 있는 몽고메리에게 예비대를 집중한다면 전선의 반대쪽 끝에 배치된 아군은 훨씬 적은 저항을 받으면서 자유롭게 진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5) 1951년의 시점에서 브래들리는 노르망디 전역에 대한 몽고메리의 주장에 대해 근본적으로 아무런 반대도 없었던 것이 확실하다.  

몽고메리는 1945년 10월 Royal United Service Institution에서 한 연설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밝혔다.6)  몽고메리는 여기서 한 연설에서 노르망디 전투는 그가 상륙작전 이전에 작성한 계획에 정확하게 맞춰서 전개되었으며 그 계획은 독일군의 기갑부대를 캉 일대에 붙들어 두는 동안 서쪽에서 미군이 충분한 전력을 집결시켜 셰르부르를 점령한 다음 상륙 교두보에서 돌파해 나간다는 것 이었다. 몽고메리는 1946년에 출간한 회고록 Normandy to the Baltic와 12년 뒤에 출간한 공식 회고록에서도 같은 입장을 고수했다. 몽고메리는 공식 회고록에서 “(아이젠하워는) 본인이 흔쾌히 받아들인 기본 계획을 이해하지 못했다(failed to comprehend the basic plan to which he had himself cheerfully agreed)”고 서술했으며 이때문에 전쟁이 장기화 되어 처칠과 본인의 사이가 악화되었고, 뒤이어 몽고메리가 루즈벨트의 초청을 받아 루즈벨트의 게티즈버그 농장을 방문했을때 루즈벨트 대통령까지 그에게 분노하게 만들었다고 적었다. 몽고메리의 더 큰 실수는, 아이젠하워가 냉정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던 이유를 이해할 생각이 없었다는 점이다.7) 
1952년에 출간되어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고 대중적인 영향력을 끼친 체스터 윌모트Chester Wilmot의  The Struggle for Europe과 십여년 뒤에 나온 엘리스L. F. Ellis 소령이 집필한 영국군의 공간전사 Victory in the West에서는 몽고메리의 주장을 강력하게 지지했다.8) 이후 20여년 동안 수많은 역사가들은 몽고메리에 유리한 이같은 주장을 당연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였다. 몽고메리는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자신이 맡았던 역할에 대해서는 여전히 애매모호하게 서술했다. 하지만 몽고메리는, 그가 자주 쓰는 표현을 빌리자면 언젠가는 “쥐새끼들”도 자신의 생각을 깨닫게 될 것으로 믿었다.9) 

물론, 몽고메리의 주장을 모두가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브래들리의 제12집단군 참모진 출신의 언론인 랄프 잉거솔Ralph Ingersoll은 1946년에 출간되어 논쟁을 불러일으킨 “일급기밀(Top Secret)”이라는 저서에서 몽고메리를 격렬하게 비판했다.(잉거솔은 영국군과 미군 최고 수뇌부를 다같이 비판했다.) 이후의 저작으로는 마틴 블루멘슨Martin Blumenson, 스티븐 앰브로즈, 그리고 포레스트 포그Forrest Pogue가 몽고메리의 주장을 비판했다.10) 하지만 주요 관련 인사들이 사망하면서 노르망디 전역에 대한 논쟁은 제2차 세계대전에 관련된 다른 논의와 마찬가지로 사그라 들었다. 그러나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1944년 6월, 7월, 8월에 있었던 지휘관들의 결단을 재검토하고 의문을 제기하는 저작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81년에 노르망디 전역에 대해서 다루는 세권의 상이한 성격의 저작이 출간되었다. 러셀 웨이글리Russell WeigleyEisenhower's Lieutenants, 데이빗 어빙David IrvingThe War Between the Generals, 그리고 데이빗 벨쳄David BelchemVictory in Normandy였다.11)  웨이글리와 어빙의 저작은 1944~45년 전역을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었지만 노르망디 전역을 매우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었으며, 벨쳄의 저작은 오버로드 작전과 그 뒤에 벌어진 전투만을 다루었다.

데이빗 어빙은 그 무렵 공개되기 시작한 방대한 문서와 일지, 회고록을 동원하여 연합군 최고사령부, 특히 주로 미군 수뇌부 내에서 일어난 갈등과 문제점에 관해 읽기 편하게 서술했다. 어빙의 저작은 종종 선정적인 서술을 하기도 했다. 어빙은 아이젠하워와 패튼의 불륜 문제라던가 미군 병사들의 프랑스 여성 성폭행 같은 이야기를 소개했다. 어빙은 자극적인 소재에 관심을 가졌지만, 그는 처음으로 대중이 알고 싶어했지만 쉽게 이야기 할 수 없었던 몽고메리, 아이젠하워, 브래들리, 패튼의 개인적인 갈등에 관해 훌륭하게 서술해냈다. 그리고 어빙은 이들의 갈등이 노르망디 전역의 진행에 영향을 끼쳤음을 설득력 있게 묘사했다. 어빙은 몽고메리를 “거만하고 자기중심적이며 문제만 일으키는 장군”으로 묘사하긴 했지만 몽고메리가 3월에 입안한 기본 계획에 따라 “모든 것이 계획에 따라 진행되었다” 는 몽고메리의 주장은 인정했다. 영국 제2군이 캉 일대에 독일 기갑사단들을 고착시켜놓은 동안 미군이 셰르부르를 점령한 뒤 서쪽에서 돌파를 시도했다는 이야기였다. 어빙은 몽고메리가 캉을 점령하는데 실패한 것은 전체 계획에서 아주 작은 문제점에 불과했으며 진짜 문제를 일으킨 것은 몽고메리의 적과 언론이었다고 주장했다. 어빙은 몽고메리가 계획이 변경되었다고 주장하는 한편, 영국군과 캐나다군이 원래는 훨씬 더 공세적이고 중요한 임무를 맡았다고 거짓말을 해서 훗날 혼란을 일으킨 점에 대해서는 “부분적으로 책임이 있다”고 지적했다. 어빙은 아이젠하워의 전략적 식견에 대해서는 브룩과 몽고메리의 주장을 받아들여 수많은 브리핑에도 불구하고 아이젠하워가 몽고메리의 전체 계획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이런 서술은 어빙의 반미적인 편견에 부합하는 것 이었다. 그리고 어빙은 몽고메리가 팔레즈에 포위된 독일군을 완전히 봉쇄하지 못한 실수에 대해서는 월터 베델 스미스 중장이 1946년에 한 해명을 인용해서 얼버무리고 넘어갔다. 포위망을 완성하기 위해 취해야 했던 조치는 사실상 모두 취했다는 것 이었다.12) 
전반적으로 어빙의 저작은 조사를 충실히 하여 쓰여졌으며 노르망디 전역에 있어서 영국군과 몽고메리를 옹호하는 한편 반미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이점에서 있어서 어빙의 저작은 웨이글리의 Eisenhower's Lieutenants와 날카롭게 대비된다. 

웨이글리의 저작은 총 730쪽의 분량에 1944~45년 전역을 매우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었다.(전체 분량의 25%를 상륙작전과 노르망디 전역에 할애하고 있다.) 웨이글리는 몽고메리가 “영국에서 가장 유능한 지휘관이기는 했지만” 원래는 기갑부대를 운용하기에 훨씬 유리한 제21집단군의 정면에서 돌파를 시도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웨이글리는 몽고메리가 연합군 최고사령부 참모본부COSSAC, Chief of Staff, Supreme Allied Commander의 작전계획에서 제21집단군의 돌파를 명시하는 내용을 넣지 않으려고 신경을 쓰기는 했지만 가능성 자체를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고 확신했다. 웨이글리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두가지 사료를 인용했다. 첫 번째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종결되고 수개월 뒤에 베델 스미스 장군이 작성한 비망록이었고 두 번째는 제21집단군의 럭키 스트라이카 작전 계획안이었다. 베델 스미스의 비망록에 따르면 그는 영국군이 독일군을 붙들어두는 역할을 담당했다는 몽고메리의 주장은 6월 말까지는 들어보지도 못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동시에 영국 제21집단군 사령부에서는 럭키 스트라이크 작전을 입안하고 있었는데 이 작전안에 따르면 영국 제2군이 동쪽에서 돌파할 것을 명시하고 있었다.13)하지만 웨이글리가 몽고메리를 비판한 점은 캉을 점령하고 이를 활용해 남쪽의 팔레즈 방향으로 열려있는 기갑전에 유리한 지역으로 진출하지 못한 데 있었다. 그는 연합군이 팔레즈에서 포위망을 완성하지 못한데 대한 전체적인 책임까지 몽고메리에게 돌리지는 않았다. 웨이글리는 연합군 지휘관들의 역할을 분석하여, 제15군단의 진격을 아르장탕에서 중지시켜 수많은 독일군이 포위망을 벗어날 수 있게 만든 브래들리가 책임의 상당 부분을 져야 한다고 평가했다.14)

데이빗 벨쳄 소장은 그의 회고록인 All In The Day's March15)를 내고 3년 뒤에 Victory in Normandy를 출간했다. 벨쳄 장군은 노르망디 전역이 진행되는 동안 몽고메리의 참모부에서 작전 기획을 담당했기 때문에 몽고메리의 의중을 파악할 수 있었던 독특한 위치에 있었다. 실제로 몽고메리의 회고록에서 제8군과 제21집단군의 작전에 관한 부분을 집필한 것은 벨쳄이었다. 벨쳄은 1944년 1월 중순 제21집단군 사령부에 부임했기 때문에 몽고메리는 캉에 독일군 기갑부대를 붙들어 두는 것 이상을 하려는 의도가 없었으며 브래들리가 코탕탱 반도를 장악하도록 한 뒤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루아르와 브리타니 방면으로 돌파하도록 하려고 했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다.16) 하지만 벨쳄은 몽고메리가 자신의 전체 계획을 설명하기 위해 같은 해 4월과 5월 세인트 폴 학원에서 개최한 두 차례의 브리핑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D 데이 당일의 목표로 캉을 점령한 뒤 그 남쪽에 펼쳐진 평야지대로 진출할 것을 명시한 것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해명을 하지 못했다.(벨쳄은 이 브리핑에서 미끄럼 방지 양말을 신고 대형 지형도 위에 올라가서 목표 지점을 표시하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벨쳄은 아무런 문헌적 근거도 없이 자신의 권위에 근거하여 5월의 브리핑에서 몽고메리가 캉과 팔레즈 사이의 평야지대를 점령하겠다고 한 이유는 영국 공군에서 몽고메리의 기본 계획에 반대하는 것을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였다고 주장했다.17)  
벨쳄은 이보다 전에 출간한 회고록에서 몽고메리의 계획에 대한 오해를 해소하기 위하여 작전 단계별 목표선 문제에 초점을 맞췄다. 벨쳄은 회고록에서 지도에 날자별로 목표선을 표시하도록 한 생각은 브래들리의 참모진에 있었던 미군 대령 머그리지Muggeridge가 계획입안을 위해 그렇게 해야한다고 주장했다고 회고했다. 벨쳄은 몽고메리가 미국 측의 주장을 말도 안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미국 측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서 그에 동의했다고 주장했다. 벨쳄은 세인트 폴 학원에서 있었던 브리핑에 준비된 대형 지형도에도 목표선이 표시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이렇다 할 해명을 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가 몽고메리 대신 집필한 Normandy to the Baltic에 실린 지도에도 목표선이 표시되어 있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당시에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었다.18) 그리고 벨쳄의 주장에 따르면  굿우드 작전에서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기 때문에 오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고 한다. 벨쳄은 굿우드 작전의 목표는 미군이 코브라 작전을 준비하는 동안 독일군 기갑부대를 영국군의 정면에 붙잡아 두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벨쳄은 이러한 주장을 통해 몽고메리를 지나치게 옹호하고 말았다.19) 4,500대 이상의 항공기와 700문의 야포,  8,000여대의 각종 차량을 투입하고 5,500명의 영국군 사상자를 내면서 그런 제한적인 목표만 염두에 두고 계획을 실행했다는 주장은 말이 되지 않는다.

1982년 노르망디 전역에 대한 격렬한 논쟁이 진행되던 와중에 영국 육군사관학교에 재직 중이던 역사가  존 키건은 (미국, 영국, 캐나다, 독일, 폴란드, 프랑스 등) 여섯개 나라의 군대가 치른 개별 전투들에 부각시키면서 노르망디 상륙과 그 뒤를 이어 전개된 전투를 훌륭하게 서술한 저작, Six Armies in Normandy를 출간했다.키건은 이 책 전반에 걸쳐 독자들에게 여섯개 나라 군대에 대한 배경 지식을 상세하게 서술하면서 이에 맞춰 전체적인 전투의 흐름을 따라갈 수 있도록 잘 연결된 서술을 하고 있다. 하지만 키건은 전투에 대해 서술해 나가면서 몽고메리가 오버로드 작전을 입안하면서 독일 기갑사단들을 영국 제2군 정면에 고착시키면서 미군이 담당하는 전선에서 돌파를 하려 했다는 견해를 취했다. 사실 키건의 서술은 몽고메리에게 유리하게 서술된 영국 공간전사의 서술을 그대로 따라간 것으로서, 키건은 이 논쟁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음을 보여주고 있다.20) 그리고 키건은 전후에 있었던 몽고메리의 장군으로서의 자질에 대한 논쟁에도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공정하게 평가하자면, 키건은 기존의 논쟁을 반복하기 보다는 노르망디 상륙과 뒤이어 전개된 전투를 여기에 참여한 각국 군대의 관점에서 바라본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을 쓰고자 했던 것이다.

1983년에는 세편의 중요한 저작이 출간되어 노르망디 전역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멋진 한해가 되었다. 오마 브래들리가 언론인 클레이 블레어Clay Blair와 함께 작업한 자서전 A General's Life가 브래들리가 사망한 뒤 출간되었다. 브래들리의 회고록 다음에는 카를로 데스테의 Decision in Normandy가 출간됐다. 마지막으로는 나이젤 해밀턴Nigel Hamilton의  몽고메리 전기의 두번째 권인 Master of the Battlefield가 출간되었다.21) 해밀턴과 블레어는 이 논쟁에서 그들이 지지하는 관점을 가지고 책을 쓴 반면, 데스테는 연합군 지휘관들이 내린 중요한 결정을 둘러싼 여러가지 오해들을 정리하려 했다.

해밀턴의 책은 그가 1981년에 낸 Monty: The Making of a General, 1887-1942의 후속작으로 이 책은 몽고메리가 엘 알라메인에서 승리를 거두는 시점에서 끝난다. 두번째 책은 엘 알라메인 전투 직후 부터 몽고메리가 원수로 진급한 1944년 9월 1일까지를 다루고 있다. 1986년에 출간된 세번째 권에서는 몽고메리가 1976년 쓸쓸하게 세상을 떠날때 까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22) 해밀턴은 총 2,630쪽에 달하는 세권의 전기를 쓰면서 몽고메리의 순수한 군사적인 결정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비판을 하지 않았다. 해밀턴은 몽고메리가 완벽했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몽고메리는 마레트Mareth선, 카타니아Catania, 산그로Sangro에서 전술적인 실수를 저질렀다.23) 몽고메리의 군사적 결정 중에서 최악의 것은 아른헴을 통과해 라인강을 건너겠다는 허깨비 같은 목표를 쫒은 것 이었다. 몽고메리는 다른 사람을 괴롭게 만드는 역사상 손꼽을 만한 이기주의자였다. 몽고메리는 가족들과의 관계 마저 엉망진창이었다. 그는 자신의 의심많은 성격으로 인해 고통받았으며 “이로 인한 자기정당화 때문에 거의 피해망상적인 성향이 강해졌다.”24)  
하지만 해밀턴은 몽고메리야 말로 진정한 “전장의 지배자(Master of Battlefield)”라고 생각했다. 맥락상 눈에 띄는 변화는 처음에는 “버나드”라는 이름을 혼용해서 쓰다가 어느 순간 부터 “몬티”라고만 지칭하게 되었다는 것이다.해밀턴의 주장에 따르면 몽고메리는 모로코의 마라케시Marrakesh에 있을때 연합군 최고사령부 참모본부의 유럽 진공 계획안을 읽고나서 부터 프랑스 상륙 작전을 책임지게 되었다고 한다.  몽고메리 단 한사람 만이 통찰력을 가지고 연합군 최고사령부 참모본부 계획안을 현실화 시켰다는 것이다. 그리고 멍청한(muddleheaded) ‘아이크’가 계획을 어긋나게 만들지 않도록 하면서 다가올 전투를 계획하고, 투입될 부대를 준비하고, 계획에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은 부하들에게 신념을 심어주면서 사실상 몽고메리가 혼자서 오버로드 작전을 성공시켰다고 주장했다.25) 몽고메리의 의도는 계획이 수립되던 초기 부터 캉을 점령한 뒤 방어 거점으로 쓰고, 미군은 셰르부르를 점령한 뒤 브리타니 반도의 항구들을 점령하도록 할 계획이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해밀턴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훗날 아이젠하워가 (미군과 영국군의 전략적인 역할에 대해) 완전히 잘못 해석한 것은 놀랄일도 아니다.” 그리고 해밀턴은 아이젠하워의 해군 담당 부관인 버처Harry C. Butcher대령이 “1944년 1월 21일의 일지에 조작된 내용을 넣도록 조장하여” 아이젠하워에게 오버로드 작전의 공훈을 모두 돌리고, 조작된 일지를 근거로 “아이젠하워를 계획의 시작 단계에서 부터 노르망디의 승리를 가져온 공로자라는 전설을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이쯤 되면 해밀턴이 몽고메리의 피해망상에 함께 빠져든 것으로 보일 정도이다.26) 
해밀턴이 몽고메리의 행동을 정당화 하는데 적극적이었다는 점은 영국군이 D-데이 이후 일주일 넘게 내륙으로 진격하지 못한 원인이 두 개의 미군 군단의 전투지경선이었던 카랑탕이 취약했기 때문이라고 노골적으로 암시를 하고 있는데서 알수 있다. 카랑탕의 미군 전선이 취약했기 때문에 몽고메리가 캉을 점령하지 못했다는 주장이 말이 되는가? 물론 카랑탕의 미군 전선이 취약해진 원인이 몽고메리가 미군에게 기꺼이 제공하고자 했던 상륙작전용 특수 차량들을 미군이 받아들이지 않은 결과 오마하 해변에서 끔찍한 피해를 입었던데 있기는 하다.27) 그리고 해밀턴의 이야기에는 악당들이 있다. 아이젠하워를 떠받들면서 응당 몽고메리의 공이 되어야 할 것을 빼앗으려고 음모를 꾸민 한 줌의 집단이. 그러한 악당들 중 한명이 바로 아이젠하워의 해군 담당 부관으로 공식 일지를 담당한 버처 대령이었다. 해밀턴은 “1944년 1월 21일자 일지에 조작된 내용을 삽입해서” 연합군 최고사령부 참모본부의 계획안을 수정하도록 처음 제안한 인물을 아이젠하워로 바꿔치기 한 원흉이 버처 대령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런 악당에는 프레데릭 모건Frederick E. Morgan 장군과 영국 공군의 커닝햄 중장과 테더 중장, 그리고 몽고메리를 비판한 수많은 역사가들도 포함되었으며 이들은 거대한 음모의 동조자였다. 한마디로 말해 해밀턴은 몽고메리의 수많은 장점을 이야기 하는 것 만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몽고메리의 라이벌들을 깎아 내리고자 했다. 그중 가장 큰 목표가 아이젠하워였다. 실제로 적이었건 그저 상상속의 적이었건 간에 몽고메리의 적은 해밀턴의 적이기도 했다. 이 점은 방대한 분량의 중요한 저작에 심각한 결함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군 지휘관 중에서 몽고메리와 해밀턴이 높게 평가한 유일한 인물은 제12집단군 사령관을 지낸  브래들리였다. 브래들리는 언론인 클레이 블레어의 도움을 받아 “회고록”을 집필하기로 하면서 그동한 취해왔던 유화적인 태도를 버렸다. 브래들리는 이미 전쟁 중 그의 부관을 지낸 체스터 한센Chester B.Hansen중령의 도움을 받아 2차대전 회고록인 A Soldier's Story를 출간한 바 있었다. 하지만 그는 두번째 부인인 키티 벌러 브래들리Kitty Buhler Bradley의 격려를 받아서 그의 유년기에서 1953년 퇴역할때 까지의 이야기를 다루는 자서전을 쓰기로 결심했다. 1981년에 브래들리가 사망했을때 클레이 블레어는 아직 제2차세계대전에 대한 부분을 집필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블레어는 브래들리의 소망에 따라 어떻게든 회고록을 완성하기로 결심했다.28)  
브래들리는 1951년에 낸 회고록에서는 미군과 몽고메리의 관계가 매우 좋았으며 몽고메리는 미 제1군의 작전에 간섭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몽고메리에 대한 표현을 완화했다. 브래들리는 몽고메리가 캉을 영국군이 고수하고 있는 동안 미군은 먼저 아브랑쉐 방면으로 남진한 뒤 다시 루아르 강을 거쳐 최종적으로 세느강 까지 진출하는 거대한 우회 기동을 실시하기로 한 오버로드 작전계획에서 벗어난 일이 없다고 주장했다. 몽고메리가 실수를 한 것이 있다면 “비판자들이 말하듯 그가 소심해서가 아니라, 성과를 거두고 성공을 할 때마다 그것을 최대한도로 활용하고자 하지 않은데” 있었다. 그리고 걸핏하면 화를 내는 몽고메리의 성격은 그의 ‘성격 좋은’ 참모장 프랜시스 드 귄갠드Francis ("Freddie") de Guingand 소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는 것 이었다. 브래들리는 몽고메리와의 관계가 악화된 이유가 두 가지라고 생각했다. 하나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수 개월전에 브래들리를 몽고메리와 동등한 지위인 집단군 사령관에 임명하는 명령이 내려졌을때 영국 언론의 관심이 브래들리에게 쏠리는 것을 막지 못한 것 이었고, 다른 하나는 몽고메리가 아이젠하워를 밀어내고 연합군 지상군을 모두 지휘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었다.29) 
브래들리는 두번째 회고록에서는 몽고메리에 대한 비판을 자제하지 않았다. 브래들리는 몽고메리가 캉을 점령하는데 실패하면서 교두보 동쪽에서 돌파하는 것을 매우 어렵게 만들었다고 보았다. 기본 계획에 대한 서술은 첫번째 회고록과 동일했다. 영국군이 좌익을 고수하고 있는 동안 미군은 셰르부르를 점령한 뒤 다시 남진하여 브리타니를 거쳐 르와르 강으로 진출하는 것 이었다. 여기까지는 1951년도에 낸 회고록과 큰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몽고메리가 굿우드 작전이라는 도박판을 벌였다고 보았다. 7월에 실시된 굿우드작전에서 영국군 기갑부대의 대규모 공세는 실패했고 독일군을 캉 동남쪽의 부르게뷔스Bourguébus 능선에서 몰아내지 못했다. 브래들리는 몽고메리가 독일군의 방어선을 분쇄하는데 성공했다면 그 즉시 돌파의 성과를 확대하여 “결정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었을 것(hit them for six)”이라고 생각했다. 그랬다면 몽고메리는 계속해서 지상군 사령관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브래들리는 40년 가까이 지나서 회고하면서 몽고메리와 아이젠하워 두 사람 모두 굿우드 작전이 성공할 경우의 가능성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했다고 지적하면서도 전체적인 전략은 “기본적으로 변함이 없었으며” 몽고메리도 아이젠하워가 오해를 할 여지를 주지는 않았다고 보았다.30) 
그리고 브래들리는 몽고메리가 팔레즈에서 포위망을 형성하는데도 공격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브래들리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나는 왜 그토록 결정적인 순간에 몽고메리가 캐나다군에 역전의 영국군 부대, 특히 기갑부대를 증원하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한참 뒤에 몽고메리가 독일군에 대한 포위망을 완성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했다고 주장한 것에 대해서도 불쾌하게 생각했다.31) 
(몽고메리에 우호적인 서술을 한) 나이젤 해밀턴은 D데이 직후 수일간 카랑탕 일대의 미군 방어에 대해 비판했고 독일군의 반격으로 미군의 두 개 군단의 접촉이 끊어질 것을 우려했다. 하지만 브래들리에 따르면 울트라 암호 해독체계 덕분에 독일군의 역습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브래들리는 이 정보에 따라서 모리스 로즈Maurice Rose 준장의 제2기갑사단에게 카랑탕을 방어하고 있던 제101공수사단을 지원하도록 명령했다. 카랑탕이 돌파당할 우려는 할 필요가 없었다.32) 가끔은 브래들리가 몽고메리에 대해 공정하지 못하게 서술하는 것 처럼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면 이탈리아에서 제작하여 내부에 목재 장식을 한 침대차를 포함한 몽고메리의 요란한 지휘소와 단촐한 브래들리의 지휘소를 비교한 부분이 그렇다.(브래들리의 유일한 사치라면 이동형 개인 화장실을 갖춘 것 정도였다.) 하지만 1981년 시점에서 보면 브래들리는 자신이 마지막 증언을 남긴다는 것을 의식했을 것이다.33)

1983년에 출간된 책 중에서는 카를로 데스테의 Decision in Normandy가 가장 큰 주목을 받았다. 데스테는 D데이 이후 전개된 전투의 수행을 둘러싸고 전개된 논쟁에 직접적으로 참여했다. 데스테는 영국군과 미군이 북프랑스 상륙의 타당성을 두고 전개한 논의나 남프랑스에 대한 동시 상륙(드라군 작전과 앤빌 작전)에 대한 지루한 논의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데스테는 그 대신 몽고메리의 노르망디 전투 계획이 변화해간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데스테는 몽고메리의 계획은 (연합군 최고사령부 참모본부의 계획에 비해) 대담한 것으로서 캉과 그 남쪽에 펼쳐진 평야지대를 점령하고 동시에 미군은 코탕탱 반도를 차단한 뒤 셰르부르를 점령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데스테는 몽고메리의 의도는 세인트 폴 학원에서 했던 브리핑과 그의 참모진이 작성한 명령서로 미루어 볼 때 아주 명확하다고 생각했다. 몽고메리는 동서 양쪽에서 공세를 취하여 주도권을 잡으면서 좌익은 세느강 방면으로, 그리고 우익은 브리타니와 르와르강 방향으로 돌파를 시도한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남아있는 기록을 검토해 보면 미군이 돌파를 해서 우익으로 부터 포위를 시도하는 동안 제21집단군이 캉 정면에서 방어 태세를 유지하려 했던 것으로는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몽고메리의 계획에서 치명적인 문제는 연합군이 전력을 분산하게 되면서 각개 격파를 당하거나 몇몇 중요한 지점에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데스테는 이중에서 후자는 현실화 되었으며 이 때문에 몽고메리가 D데이 당일에 캉을 점령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미군은 7월 말에 생 로 남쪽의 평야지대로 진출하기 까지 생울타리 지대에서 독일군을 상대로 지리한 싸움을 계속해야 했던 것이다. 데스테는 전체적인 계획은 합리적이었고 운이 따랐다면 상륙 초기 부터 연합군에게 전투가 유리하게 전개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캉이 D 데이 당일에 함락되었다면 신속하고 화려한 승리로 이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 전투는 몽고메리가 의도한 대로 전개되지 못했다. 그리고 몽고메리가 그 당시에 대충 얼버무리며 넘어가고, 전후에는 모든 것이 계획대로 전개되었다고 주장하면서 계속해서 역사가들의 논점을 흐리게 만들었다는 것이다.34) 
다음으로 데스테는 미군이 생-로에서 돌파를 시도한 코브라 작전이 브래들리가 단독으로 구상한 것이라고 보았는데 이것은 오늘날 정설이 되었다. D데이 이전의 계획이나 몽고메리의 명령서에서는 미 제1군과 제3군이 아브랑쉐에 좁은 돌파구를 뚫은 뒤 포위기동을 실시한다는 내용을 찾아 볼 수 없다. 그리고 데스테에 따르면 브래들리와 (특히) 몽고메리를 포함한 그 어느 누구도 코브라 작전이 노르망디 전역에 걸친 독일군의 방어선을 붕괴시킬 정도로 성공하리라는 생각을 못했다고 한다.35) 
팔레즈 포위망을 완성하지 못한 책임은 몽고메리와 브래들리 두사람 모두에게 돌리고 있다. 데스테는 캐나다군이 팔레즈로 진격할 때 이를 증원하지 못한 것이 몽고메리의 실책이라고 보았다. 몽고메리는 “단거리 포위망(Short Envelopment)”을 형성하는 것을 그리 선호하지 않았고, 그 대신 그의 기본 계획에 있는 세느강을 끼고 독일군을 포위한다는 이른바 “장거리 포위망(Long Envelopment)”을 그대로 추진하는 쪽을 선호했다는 것이다. 캐나다군의 장군인 리처드 로머Richard Rohmer가 (1981년에 낸 Patton's Gap에서) 몽고메리가 팔레즈 포위망을 고의로 완성하지 않은 것이며 그 이유는 미군이 포위망에 갇힌 독일군을 섬멸하는 공을 세워 주목 받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라는 주장을 했는데 데스테는 이것이 허무맹랑한 주장이라고 단언했다.36) 하지만 데스테는 브래들리가 두번째 회고록에서 미군의 진격 방향을 북쪽으로 돌려 포위망을 완성하는 대신 계속해서 세느강으로 진격하도록 한 것 때문에 독일군이 노르망디에서 벗어나기 전에 섬멸할 수 없었다고 한 것에 동의했다. 브래들리는 8월 14일과 15일에도 여전히 많은 수의 독일군이 포위망 안에 갖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 월튼 워커 소장Walton Walker의 제20군단에게 샹부아에서 포위망을 완성하도록 명령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37)

1984년에는 영국의 언론인이자 War Monthly의 편집장이었던 리처드 램Richard LambMontgomery in Europe, 1943-1945를 출간했는데, 이 책에서는 많은 부분을 할애해서 몽고메리가 오버로드 작전을 입안하고 실행하는 과정에서 담당한 역할을 분석했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램은 몽고메리의 역할이야 말로 노르망디 전투의 전개과정을 이해하는 열쇠라고 보았다. 램은 자신의 결론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당시 주요 인사들의 공식 서한과 개인 서한을 풍부하게 인용하고 있다.램은 당시의 다른 역사가들과는 달리 몽고메리가 캉을 점령하여 그 남쪽의 평야지대로 진출하는데 대해 이중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보았다. 램은 근거를 제시하지 않은채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몽고메리는 상륙하여 교두보를 확보한 뒤에는 영국 제2군의 최대 목표를 캉과 그 남쪽에 있는 비행장을 점령하는 것으로 할 것을 결심했다.” 램은 몽고메리의 의도가 롬멜이 영국군의 교두보를 기갑부대로 공격해 올 경우 방어만 하고 미군이 돌파하도록 하는 것이었다고 보았다. 몽고메리는 캉 남쪽의 비행장을 점령하는 것이 오버로드 작전의 성공에 필수적인 요소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와 드 귄갠드는 “캉 남쪽의 비행장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공군 지휘관들에게 그저 예의상 비행장을 점령하겠다고 했을 뿐이었다. 두 사람은 실제로 캉 남쪽의 비행장을 점령하는 것은 상륙 이후 시일이 소요될 것이라고 생각했다.”38) 
램은 몽고메리가 프랑스에서 겪은 최초의 패배는 제7기갑사단이 캉을 서쪽에서 우회하여 포위하는데 실패한 것이었다. 이때부터 “미군은 몽고메리가 추진력이 부족하다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몽고메리의 문제점 중 하나는 전투 상황에 대해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평가하는 것이었는데 이 점은 램도 인정하고 있다. 몽고메리가 안고 있었던 또 하나의 딜레마는 전투에 투입할 수 있는 영국의 인적자원이 부족했다는 점이었다. 이 어려운 시기에 아이젠하워가 한 역할이라곤 덕담이나 하고 잔소리를 늘어놓는 것이었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램은 아이젠하워가 몽고메리의 기본 계획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았다.39)  
램은 굿우드 작전에 대해 서술하면서 몽고메리는 대규모 기갑부대를 투입해서 돌파하려는 의도가 없었음을 증명하려고 대부분 전후에 씌여진 개인 서한으로 이루어진 방대한 양의 자료를 동원했다. 몽고메리가 돌파를 시도하려는 의도를 내비친 이유는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공군측 인사들을 설득해 전략폭격기 부대를 지원받기 위해 였다는 것이다. 굿우드 작전이 실패하고 뒤어 코브라 작전도 연기되면서 몽고메리는 거의 몰락 직전의 상황에 몰렸다. 아이젠하워가 신중한 태도를 가지고 정치적 요령을 발휘한 덕분에 몽고메리는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아이젠하워는 그 중대한 순간에 몽고메리를 해임함으로써 (대중의-역자) 분노를 일으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40) 
연합군이 팔레즈 포위망을 완성하지 못한데 있어서 몽고메리의 책임은 부분적이라고 본다. 몽고메리는 포위망을 완성하기 위한 어떠한 계획도 세우지 않았고, 남진하고 있던 경험이 부족한 캐나다군과 폴란드군에 증원 병력을 보내지도 않았지만, “실패한 가장 큰 원인은” 몽고메리의 지휘에서 벗어난 “브래들리의 추진력이 부족했기 때문” 이었다. 램은 몽고메리가 노르망디 전투에서 범한 심각한 실책은 아이젠하워와 연합군최고사령부의 핵심 인사들의 신뢰를 잃어버린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 결과 “전쟁이 1945년 까지 길어지게 만든 전략적 착오와 오해가 일어났고, 이것은 유럽의 미래에 재앙적인 결과를 가져왔다.”41)

마지막으로 소개할 저작은 여러 모로 가장 큰 논란을 불러온 책으로, 맥스 헤이스팅스가 최근에 발표한 노르망디 전역을 다루고 있는 Overlord: D-day and the Battle for Normandy다. 헤이스팅스의 저작은 전체적인 맥락을 훌륭하게 서술하고 있고 좋은 지도도 많이 수록 되어 있는 등 장점이 많지만, 본 필자가 보기에는 지나치게 많은 영역을 다루려고 하는 것 같다. (코넬리우스 라이언의 저술 방식과 비슷하게) 노르망디 전역의 전체적인 맥락에 여러 개별 인물의 경험담을 섞고, 여기에 다시 독일군 장병과 독일제 무기의 우수성에 대한 논의까지 전개하고 있다. 그 결과 이 저작은 초점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몽고메리와 몽고메리의 기본 계획에 관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공정한 서술을 하고 있다. 헤이스팅스는 몽고메리를 마치 수도승 처럼 헌신적으로 전쟁을 연구하는 인물로서 그가 아마추어적이라고 생각한 미군의 행태에 대해서는 극도로 비판적이었던 인물로 묘사했다. 몽고메리는 냉혹하고, 타인에 공감할 줄을 몰랐으며, 이기주의적이었고, 타인의 견해에 극도로 배타적이었으며,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지 않는 문제 투성이의 인간이었지만 승리에 대한 절대적인 의지를 품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몽고메리를 다른 영국군 장성들의 위에 서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노르망디 전역에서 몽고메리가 발휘한 가장 큰 미덕은 “자기 절제가 부족한 장군이라면 계급을 불문하고 충격 받고 절망하도록 만들수 있는 상황에서 그가 지휘하는 부대에 침착하고 균형잡힌, 안정적인 분위기를 조성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헤이스팅스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하지만 몽고메리는 아이젠하워, 처칠, 테더, 그리고 그를 굳건하게 지지한 브룩을 사적으로 대할 때 조차 똑같이 행동하는 결례를 범했다.”  몽고메리는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진실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는” 경향을 보였다.42) 몽고메리가 입안한 노르망디 작전 계획은 합리적이었다고 보고 있다. 문제는 실행 과정이었다. 헤이스팅스는 “화력과 항공지원, 그리고 때로는 병력에서도 열세였던 독일군이 [...] 영국군과 미군을 상대로 그토록 격렬하게 저항할 수 있었던 원인을 알기 위해서는 전투에 참여한 몽고메리 휘하의 지휘관들과 예하 부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주장했다.43) 
노르망디에서 몽고메리가 범한 가장 큰 실책은 영국 제2군의 능력으로는 달성할 수 없는 목표를 계속해서 장담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몽고메리는 굿우드 작전의 여파로 해임 직전까지 몰리게 되었다.(헤이스팅스는 브래들리의 회고를 인용하여, 만약 아이젠하워가 몽고메리를 해임하는게 정치적으로 가능하다고 여겼다면 틀림없이 몽고메리를 해임했을 것이라고 보았다.)44) 어찌되었건 간에, 굿우드 작전의 실패로 몽고메리가 지상군 총사령관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가능성은 사라졌다. 비록 몽고메리 자신은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긴 했지만 말이다.나이젤 해밀턴의 주장과는 반대로, 헤이스팅스는 코브라 작전이 전적으로 브래들리의 공이라고 보았다. 7월 중순 무렵의 몽고메리는 미군에게 “부정적인” 영향만 끼쳤다는 것이다. 지상군에 대한 지휘권이 영국군에게서 넘어오고, 몽고메리와 브룩이 애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북서유럽에서 전개되는 전투의 추이는 좋건 나쁘건 간에 미군에 의해 결정되게 되었다. 몽고메리는 팔레즈 포위망을 완성하기 위해 진격하던 캐나다군을 증원하는데 실패함으로써  그에 대한 비판을 잠재워 버릴 수 있었을, 자신의 실수를 만회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잃어버렸다. 하지만 헤이스팅스는 “(캐나다군을 증원 하는 것은) 몽고메리 답지 않은 것이었다”고 지적했다. 그와 같은 과정은 “너무나도 일탈적인 것”이었기 때문이었다.45) 그리고 몽고메리는 자신의 작전을 진행하는데 일탈적인 요소가 있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헤이스팅스는 몽고메리의 계획과 계획의 실행에 대한 몽고메리의 주장이 어떤 가치가 있는지 현실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아이젠하워에 대해서는 객관적인 평가를 하지 못했다. 아이젠하워가 몽고메리의 작전 계획을 이해하지 못했다거나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예리하지 못했다거나 하는 근거 없는 낭설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노르망디 전투의 전략에 대한 오랫동안 지속된, 그리고 때대로 격렬하게 전개된 논쟁을 그저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져가면서 자신들의 명성이 위협받거나 사라져간다고 느끼던 늙은 군인들의 시시콜콜한 말싸움이라고 폄하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미국 측의 입장을 옹호하는 쪽에서는 문제가 몽고메리의 피해망상과 지독한 자부심, 그리고 그의 계획을 포기하거나 변경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그리고 영국측의 입장을 옹호하는 쪽에서는 오늘날 까지도 미군이 전쟁에 아마추어 였으며, 혼란에 빠지지 않으려면 브룩 원수와 몽고메리의 제대로 된 지휘를 받았어야 하며, 미군 수뇌부는 몽고메리의 ‘기본 계획’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 논쟁에는 개인의 자부심이나 국가적 긍지 이상의 요인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잉거솔은 1946년에 낸 책에서 영국이  2차대전 내내 의식적으로, 그리고 계획적으로 미국이 영국의 제국주의적인, 범 지구적인 이해관계를 따르게 하려고 끝까지 발버둥 쳤으며, 1944년 여름의 막바지에 유럽 전역에 대한 주도권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자각하면서 절망하게 되었다고 했는데 이것을  믿지 못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46) 영국이 느꼈던 절망감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처칠은 앤빌 작전과 드라군 작전을 놓고 아이젠하워와 지속적인 논쟁을 벌였다. 브룩은 아이젠하워가 그의 일기 내용을 숨기지 못하는 것에 대한 실망감을 자신의 일기에 기록했다. 그리고 몽고메리는 영국군 보다 전투를 못하는 미군이 전역을 주도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나 몽고메리가 영국군의 명성과 명예를 지키기 위해 사실을 모호하게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역사가들은 계속해서 사실을 밝혀내고 있다. 결국에는 ‘쥐새끼’들이 몽고메리의 생각을 알게 되었다.



주석

1) 이 논문의 초고는 1988년에 있었던 Northern Great Plains History Conference에서 발표한 것이다. 필자는 도널 섹스턴Donal Sexton 교수와 앨프레드 코너비스Alfred Cornebise 교수의 비평에 감사드린다. 
2) Dwight D. Eisenhower, Report by The Supreme Commander to the CombinedChiefs of Staff on the Operations in Europe of the Allied Expeditionary Force, 6June 1944-8 May 1945 (Washington: GPO, 1946), 32. 아이젠하워가 보낸 전문과 몽고메리의 전문에서 인용한 구절은 Louis Galambos et al., eds., The Papers of Dwight David Eisenhower: The Chief of Staff (Baltimor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78), 7: 1068-72 에서 발췌한 것이다. 그리고 Eisenhower to Forrest C. Pogue, 10 March 1947, ibid., 8: 1571-72도 참고하라. 아이젠하워는 2차대전 직후의 시점에서 전쟁 당시 부터 중요하게 생각했던 미국과 영국의 화합을 유지하고자 했다. 이와 관련된 아이젠하워의 발언은 Ralph Ingersoll의 Top Secret와 Harry C. Butcher의 My Three Years with Eisenhower에 실려있는데 해당내용은 ibid., 559, 564, 651-52, 685-86,809, 825, 1070, 1070n를 참고하라. 아이젠하워가 몽고메리를 배려한 것은 사실 억지로 참아가며 한 것이었는데 이 사실은 코넬리우스 라이언이 머나먼 다리(A Bridge Too Far, New York: Simon and Schuster, 1974)를 출간할때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했던 인터뷰의 내용을 공개하면서 드러났다.(해당 내용은 같은 책 76, 76n.) 아이젠하워의 전기를 쓴 스티븐 앰브로즈는 아이젠하워가 일찍부터 “그 자신과 몽고메리 사이에 어떠한 불화도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일생에 걸친 노력을” 시작했다고 썼다. Stephen E. Ambrose, Eisenhower, vol. 1, Soldier, General of the Army, President Elect, 1890-1952 (New York: Simon and Schuster, 1983), 419. 
3) Dwight D. Eisenhower, Crusade in Europe (New York: Doubleday, 1948), 13장과 15장에서 인용, 256, 258, 266-68; 267쪽에서 인용. 
4) Omar N. Bradley, A Soldier's Story (New York: Holt, 1951), 208, 320. 
5) Ibid., 239-40. 
6) Journal of the Royal United Service Institution, November 1945, 431-54, Carlo D'Este, Decision in Normandy(New York: Dutton, 1983), 487에서 재인용. 데스테에 따르면 몽고메리의 이같은 발언으로 월터 베델 스미스 장군이 격노하여 노르망디 전투가 계획대로 진행됐다는 몽고메리의 주장을 반박하는 논평을 준비하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스미스 장군이 작성한 이 문서와 또 한편의 비슷한 문서는 캔자스 애블린에 있는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7) Bernard L. Montgomery, Normandy to the Baltic (Boston: Houghton Mifflin, 1948) 그리고 The Memoirs of Field-Marshal The Viscount Montgomery of Alamein, KG. (Cleveland: World, 1958), Chapter 14 passim. 아이젠하워에 대한 언급은 229쪽에 있다. 
8) Chester A. Wilmot, The Struggle for Europe (New York: Harper, 1952), 336-41; L. F. Ellis, with G. R. G. Allen et al., Victory in the West, vol. 1, The Battle of Normandy, in the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United Kingdom Military Series (London: HMSO, 1962), 328, 351, 352-53, 355-58. 
9) Nigel Hamilton, Monty: The Making of a General(New York: McGraw-Hill, 1981), 606. 
10) Ralph Ingersoll, Top Secret (New York: Harcourt, 1946), 91-95, 100, 156-63; Martin Blumenson, Breakout and Pursuit in United States Army in World War II: The European Theater of Operations (Washington: GPO, 1961), 188-96; Stephen E. Ambrose, The Supreme Commander: The War Years of General Dwight D. Eisenhower (Garden City, N.Y: Doubleday, 1970), 427-41; and Forrest C. Pogue, The Supreme Command in United States Army in World War II: The European Theater of Operations (Washington: GPO, 1954), Chapter X passim. 
11) Russell F. Weigley, Eisenhower's Lieutenants: The Campaign of France and Germany, 1944-1945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1981); David Irving, The War Between the Generals (New York: Congdon and Lattes, 1981); David Belchem, Victory in Normandy (London: Chatto and Windus, 1981). 
12) Irving, War Between the Generals, 169, 184-85, 254-56. 
13) Weigley, Eisenhower's Lieutenants, 37, 49-51, 114-21; Alfred D. Chandler, Jr., et al., eds., The Papers of Dwight David Eisenhower: The War Years (Baltimor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70), 3: 1969에 실려있는 또한 아이젠하워가 1944년 7월 1일 브래들리에게 보낸 서한에 대한 주석도 참고하라. 
14) Weigley, Eisenhower's Lieutenants, 201-9. 
15) David Belchem, All in the Day's March (London: Collins, 1978) 
16) Belchem, Victory in Normandy, 66, 142-45. 
17) Ibid., 52. 
18) Belchem, All in the Day's March, 190. 벨쳄은  Victory in Normandy에서 브래들리의 참모진에 속한 육군항공대 장교들이 목표선을 설정해야 한다는 요구를 했다고 주장했다.(54) 카를로 데스테에 따르면 머그리지라는 대령은 존재하지 않으며 아마도 벨쳄이 브래들리 사령부의 작전참모처에 있던 질맨 머젯Gilman C. Mudgett 대령을 착각한 것이었을 것으로  보았다. D'Este, Decision in Normandy, 92-96. 브래들리는 목표선을 완전히 삭제하라고 했다. Omar N. Bradley and Clay Blair, A General's Life (New York: Simon and Schuster, 1983), 233-34. 
19) Ibid., 358, 360, 470; Belchem, Victory in Normandy, 156-57. 
20) John Keegan, Six Armies in Normandy (New York: Viking, 1982), 58-59, 164, 186, 216-18. 
21) Nigel Hamilton, Master of the Battlefield: Monty's War Years, 1942-1944 (New York: McGraw-Hill, 1983); 데스테의 저서에 대해서는 주석 6번을, 브래들리와 블레어의 저서는 주석 18번을 참고하라. 
22) Nigel Hamilton, Monty: The Making of a General, 1887-1942 (New York: McGraw-Hill, 1981) 그리고 Monty: Final Years of the Field Marshal, 1944-1976 (New York: McGraw-Hill, 1986). 
23) Hamilton, Master of the Battlefield, 137, 183-95, 309-18, 443-55. 
24) Ibid., 136; Hamilton, Monty: The Making of a General, 606. 
25) Ibid., Parts Five and Six passim. 
26) Ibid., 512, 514. This comment comes after Hamilton quotes from the "Minutes of the Supreme Commanders Conference, 21 January 1944, Meeting No.1," although Monty's remarks found in the "Minutes" do not mention Caen. Hamilton also leaves the source of the encouragement to the reader's imagination. 
27) Ibid., 597-98, 623-26, 638-39, 648-49. 
28) Bradley and Blair, A General's Life, 9-12. 
29) Bradley, A Soldier's Story, 208, 352-54. 
30) Bradley and Blair, A General's Life, 264-65, 273-75. 
31) Ibid., 295; 인용문은 299쪽에서. 
32) 주석 29번 참조. Bradley and Blair, A General's Life, 259-60. 
33) Ibid., 258-59, 267, 284. 뒤에 브래들리는 좀 더 안락한 침대차를 가지게 되었고 전용기인 C-47도 받았다.Bradley, A Soldier's Story, 321-22. 
34) 데스테는 6장과 12장에서 이같은 논의를 하고 있다. 또한 66-67쪽, 149쪽도 참고하라. 
35) D'Este, Decision in Normandy, 337-46. 
36) Ibid., 453-56; Richard Rohmer, Patton's Gap (New York: Beaufort, 1981), 225-27. 로머는 노르망디 전투 당시 캐나다 공군에서 정찰 비행을 수행했다. 
37) D'Este, Decision in Normandy, 457; Bradley and Blair, A General's Life, 302. 독일군의 관점에서 본 노르망디 전투는 Samuel W. Mitcham, Jr., Rommel's Last Battle: The Desert Fox and the Normandy Campaign (New York: Stein and Dav, 1983) 152-55를 참고하라. 
38) Richard Lamb, Montgomery in Europe, 1943-45: Success or Failure? (New York: Franklin Watts, 1984), 84. 
39) Ibid., 112-20; quotation from 113. 
40) Ibid., 122-34, 138-42. 
41) Ibid., 167-79; 인용문은 173쪽과 179쪽. 
42) Max Hastings, Overlord: D-Day and the Battlefor Normandy (New York: Simon and Schuster, 1984), 32-33; 인용문은 142-43쪽. 
43) Ibid., 143-44. 
44) Ibid., 238-40. 
45) Ibid., 250, 301. 
46) Ingersoll, Top Secret, 3-37 pass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