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4월 18일 수요일

이탈리아의 파시즘 - 실패한 전시동원체제의 유산

계속해서 날림 번역글로 때우고 있습니다. 제 나름대로 쓸만한 글을 써 볼까 하는데 시간도 잘 안나고 그렇습니다. 당분간 쓸만한 저작들에서 발췌한 날림 번역글이 계속 올라갈 듯 싶습니다.

실패한 전시동원체제의 유산(The legacy of failed mobilization)

1차세계대전과 그 이후 시기를 잇는 가장 큰 요소는 사상 – 즉 우익사상이 전쟁을 통해 형성되고 전후 20년간 이탈리아 국민들의 삶에 스며든 것이었다. 우익사상은 국민동원의 실패에 대한 반동이었고 특히 1920년 이후 시기까지를 포함하면 더욱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사실상 이탈리아의 파시즘은 1차세계대전 기간동안 전무했으며 이탈리아 정부가 전시동원을 통해 만들려 했던 국민적 단합을 우익들 나름의 방식으로 만들려 한 시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전쟁은 (개인에게) 국가의 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지만 (이탈리아는)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방식으로 정체성을 형성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방법은 바로 국가의 통합을 방해하고 분열을 조장하는 요소, 바로 “사회주의”를 파괴하고 박멸하는 것 이었다. 독일과의 유사성은 놀라울 정도였다. 1920년대 독일의 우익 “호교론자”들은 별다른 근거도 없이 1918년 11월에 노동자들이 “등 뒤에 칼을 꽃았기 때문에” 전쟁에 패배했다고 주장했다. 이탈리아에서는 “등 뒤의 칼”에 대한 주장이 이미 전쟁 중인 1916년에 등장했는데 전쟁 초반부터 연달아 터진 참패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내부에 있는 적의 위협”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전쟁 중 충원된 경험 없는 젊은 장교들은 이런 소문을 더 부채질 했다. 이탈리아는 독일과 달리 군사적 전통이 일천한 까닭에 수준 높은 장교집단을 만들지 못했으며 이 때문에 젊은 장교들의 극단주의적 성향을 통제할 수 없었다. 그래서 비록 전쟁에서 승전국이 되긴 했어도 전쟁 때문에 생긴 국가의 분열은 상처로 남았다. 전쟁으로 각인된 야심과 적개심은 파시스트들에게 전쟁에서 얻어야 했지만 얻지 못한 것과 전쟁에서 쳐부숴야 했지만 쳐부수지 못한 것들을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파시즘은 총력 동원체제를 구현하는 방법처럼 비춰졌다. 전후 이탈리아에서 파시즘이 극성을 부린 지역은 전쟁 중에 동원체제가 제대로 작용하지 않은 지역이었다. 새로우며 진정한 동원체제에 대해 자각하는 것은 파시스트들이 꿈꾸는 이상의 핵심적 요소가 되었다. 이탈리아의 파시즘이 만들고자 한 “새로운 파시즘적 인간”은 용맹하고, 명령에 복종하며, 자신을 희생할 각오가 돼 있는 완벽하게 동원된 전사였다. “새로운 파시즘적 인간”은 패배주의자, 탈영병, 병역기피자와는 완전히 대비되는 인간이었다. 사실 “믿음, 복종, 투쟁”은 파시스트들이 도덕적으로 반드시 따르게 하려 했던 것 들이었다. 이 때문에 이탈리아 파시즘은 전쟁을 수행할 때와 같은 군사적 규율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파시스트 행동대는 창설될 당시부터 군사적 전통의 연장선상에 있었으며 자본가들이 구사대로 고용하던 깡패들과 자신들은 다르다고 생각했다. 초창기 파시스트들은 “행동대(squadrismo)”의 폭력행위에서 전우애 같은 안도감과 참호전투 같은 흥분을 전시 보다 “훨씬 안전한” 조건에서 체험했다. 파시스트들은 정권을 장악한 뒤 이런 전통을 유지하기 위해서 민병대(Milizia Volontaria di Sicurezza Nazionale)를 만들었고 이와 유사한 준군사조직이 여성과 청소년을 대상으로 조직됐다. 제복, 경례, 제식훈련, 목총(으로 하는 총검술) 그리고 행군은 이런 조직의 하루 일과였다. 파시즘은 이렇게 전쟁을 흉내내면서 전쟁에서는 결코 할 수 없었던 것들을 해 냈다. 이러한 영속적인 동원체제는 결코 동원해제 될 수가 없었다. 이탈리아의 파시즘은 전쟁으로 인한 절망감이 만들어낸 전쟁에 대한 패러디였다.

그리고 전투에 대한 언급은 갈수록 많아졌다. 파시즘은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가 있으면 이것을 “전투”라고 칭했다. 식량 증산에 대해서는 “밀과의 전투”, 1927년의 화폐 개혁은 “리라와의 전투”라고 불려졌다. 그리고 미래의 전사를 확보하기 위해 출산 전투가 벌어졌다. 이러한 군사적 비유는 사회 전반에 걸쳐 지속적으로 존재했고 계속해서 언급됐다. 이것은 단순한 수사 이상의 문제였다. 파시즘은 그 특성 대문에 평화시에도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그들의 사상에 전쟁의 심리적 긴장을 불어넣으려 했다. 그 이유는 단지 전쟁이 평화시에는 얻을 수 없는 심리적 의무감을 불어넣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끊임없이 전쟁에 대해 환기해야만 파시즘이 가지는 정치적 정당성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파시스트들은 1차세계대전을 통해 애국적이고 국가적인 목표가 있으면 사회에 대한 억압과 전제적인 정부가 정당성을 얻을 수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내부의 적”들은 전쟁에서 사용되는 단호한 수단을 통해 박멸해야 했다. 아니면 최소한 박멸한다고 생각해야 했다. 마찬가지로 정부는 파시즘 체제에 대항하는 세력 또한 지속적인 전시 체제 속에서 박멸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파시즘이 전쟁의 경험을 통해 형성된 “강요된 애국심”은 전쟁시기와 마찬가지로 폭력과 강제, 억압을 정당화 하는데 이용되었다. 이와 함께 거대한 변혁기에 “강요된 애국심”은 사회적 투쟁과 기술적 진보를 혼란에 빠뜨리는 부르주아들을 통제하고 질서에 복종하도록 하는데 이용되었다. 전쟁으로 인해 파괴된 규율, 사회의 위계질서, 가부장적 질서, 애국심 등의 사회적 가치들은 전쟁 그 자체를 재정의 함으로서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도 “총력전” – 제대로 말하면 “총력전”을 펼치는데 실패한 – 의 트라우마는 평화에 대한 관념을 제약했다.

비록 이탈리아 사회는 1차세계대전 이전부터 분열돼 있었지만 파시즘의 출현에 따른 반작용은 전쟁의 경험이 없었다면 나타날 수 없었을 것이다. 1차세계대전 이전에 정치적 반대세력에 대한 억압은 비체계적이고 산발적이었으나 전쟁으로 얻은 경험을 활용해 보다 체계적이고 극도로 조직적으로 발전했으며 이것을 통해 국가총동원의 경험으로 드러난 이탈리아 사회의 분열과 나약함을 극복하려 했다. 1920년대를 거치면서 파시즘에 대한 저항은 약화되었는데 이렇게 된 데에는 두 번째 요소가 큰 역할을 했다. 전쟁을 통해 형성된 국가적, 애국적 이상은 무솔리니의 통치기간 동안 파시즘의 지배 원리로 작용했다. 애국심은 정권의 목표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그 목표가 가진 정당성도 제공했다. 이렇게 해서 파시즘 체제에 대한 저항은 자동적으로 국가와 국가적 목표의 정당성에 대한 반역으로 몰려 국가 반역죄로 처벌받았다. 파시스트들이 1차세계대전의 국가 총동원 경험을 통해 만든 파시즘의 내부 논리는 결국 전체주의로 가는 길을 만들었다. 여러 면에서 전쟁을 위한 “총동원”은 새로운 전체주의적 개념의 어설픈 전주곡이었다. 전쟁 시기에나 일어나야 할 일들이 평화시에도 일어난 것 이었다.

Paul Corner and Giovanna Procacci,『The Italian experience of ‘total’ mobilization 1915~1920』State, society and mobilization in Europe during the First World War,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7, pp.237~2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