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더 본질적인 것은 대중들 개개인이 ‘지도자’와 자신을 동일시 한다는 것이다. 대중들 개개인이 무력해지도록 양육되면 지도자와의 동일시는 더 뚜렷이 나타나며, 보호에 대한 아이와도 같은 욕구는 지도자와 하나가 된다는 감정의 형태로 더욱 위장된다. 이런 동일시 경향이 민족적 나르시시즘, 즉 각 개인들이 ‘민족의 위대함’에서 빌려온 자존심의 심리적 토대이다. 반동적인 소시민계층은 지도자와 권위주의적 국가에게서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이런 동일시에 기반하여 그는 자신이 ‘민족성’과 ‘민족’의 방어자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느낌은 그가 ‘대중들’을 경멸하고 대중들과 개인적으로 맞서는 것을 제지하지 않는데, 이 역시 지도자와의 동일시에 기반한 것이다. 물질적 성적으로 비참한 그의 상황은 자신이 지배인종에 속해 있으며 훌륭한 지도자를 가지고 있다는 고양된 사상으로 완전히 가려지기 때문에,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는 무의미하고 맹목적인 충성속으로 자신이 얼마나 완벽하게 빠져버렸는지를 깨닫지 못하게 된다.
빌헬름 라이히著/유재건譯, 『파시즘의 대중심리』, (그린비, 2006), 108~109쪽
제 블로그에 자주 들리시는 분들이라면 어떤 사건인지 대략 짐작 하시겠지요. 지배자와 민족, 지배인종 이라는 단어를 바꾸면 꽤 응용의 범위가 넓어집니다. 예를들어 지배자를 최근 시끄러웠던 어떤 집단으로, 민족은 민주주의로, 지배인종을 민주시민으로 바꾼다면 우리의 현실에 아주 잘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어쨌든 선거의 계절은 되돌아 오고 있으며 우리가 97년 이후 되풀이 했던 일들이 다시 반복되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저는 2002년에는 냉소를 퍼부었고 2007년에는 침울했었는데 2012년에는 다시 냉소를 퍼부을 것 같은 찝찝한 느낌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