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 18일 일요일

질보다 양?!

'영국'이라는 단어와 '전차'라는 단어는 따로 사용할 때는 뭔가 멋진 느낌을 주지만 함께 사용할 경우에는 희극의 탈을 쓴 비극이 된다지요.

영국 육군은 북서유럽에서 대재앙을 겪는 바람에 장갑차량을 대부분 상실했으며 신형 전차를 개발하는 것 보다는 실용성과 유용성을 갖추었다고 판단되는 전차라면 무엇이든지 생산부터 하는 것에 우선권을 두었다. 영국은 이미 프랑스가 붕괴하기 이전 부터 전차 부족에 시달리고 있어 질보다 양을 중시하고 있었는데 1940년 여름에는 영국 본토와 다른 지역을 방어하는 문제가 최우선과제였으며 이러한 경향이 1941년 부터 1942년까지 전차 생산을 좌우했다.

이런 압력은 설계도 단계의 전차에 생산 결정을 내리고 시험평가도 부족한 전차를 양산하는 정책을 채택하도록 만들었다. 이 방법은 요구사양의 결정에서 선행양산품(pilot) 생산까지의 시간을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으며 시제품을 생산할 필요성을 줄였다. 이러한 정책은 다른 분야에는 적용되지 않았으며 육군은 이 정책을 단지 장갑차량의 생산에만 적용했다. 그 성과는 경우에 따라 달랐다. 실제로 1942년 하원의 보고에서는 '우리는 시제품 생산을 하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곧바로) 생산을 하는 것(we were not avoiding the manufacture of prototypes, we were manufacturing nothing else)'이라는 발언이 있었다.

이렇게 숫자부터 채우자는 정책은 여러가지 문제점을 불러왔으며 그 중 하나로는 막대한 투자를 퍼부은 A13 코베난터(Covenanter) 전차가 있었다. 이 전차는 무작정 생산을 시작했지만 자체적인 결함과 전반적인 신뢰성 부족 때문에 실전에는 투입도 하지 못 했다. 뿐만아니라 "설계도 단계에서 생산명령이 내려진(off the drawing board)" 또 다른 사례 중 하나인 A22처칠은 시간이 지난 뒤에는 연합군의 장비 중 효율적이고 유용한 것이 되었으나 처음 배치될 당시에는 자질구레한 문제와 결함에 시달렸다.

John Buckley, British Armour in the Normandy Campaign 1944, Frank Cass, 2004, p.162~163

그리고 이후의 이야기는 다들 잘 아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