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 23일 수요일

소통 방식의 한 유형

1929년 4월, 코민테른의 미국 위원회는 미국공산당의 분파 투쟁을 해결하기 위한 회의를 열었습니다. 당시 미국공산당의 다수파를 이루고 있던 러브스톤(Jay Lovestone), 기트로우(Benjamin Gitlow), 페퍼(John Pepper), 올퍼(Bertram Wolfe)는 코민테른이 미국공산당의 다수파인 자신들을 지지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1929년 3월 뉴욕을 출발할 때 까지만 하더라도 꽤 자신만만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런데 미국 대표단은 모스크바에 도착한 직후 코민테른 지도부의 맹렬한 공격을 받았습니다. 당시 러브스톤과 기트로우 등은 부하린에 동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스탈린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것 이었습니다. 코민테른 미국위원회의 위원 열두명 중 여덟명이 소련인이었는데 여기에는 스탈린과 몰로토프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탈린이 부하린에게 우호적인 러브스톤을 어떻게 봤을지는 뻔한 일이지요. 결국 미국공산당의 분파투쟁은 모스크바에서 미국공산당의 주류와 코민테른과의 대립으로 발전했습니다. 스탈린은 러브스톤으로 부터 당권을 빼앗으려고 했고 러브스톤은 완강히 저항하지요.

미국공산당원들의 저항은 스탈린의 혈압을 오르게 했습니다. 당시 스탈린은 이런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공식기록에 따르면 스탈린은 완강히 저항하는 여덟명의 미국 공산당원이 굳은 결의와 완고함을 지녔다고 칭찬했지만 "진정한 볼셰비키적 용기란" 코민테른의 의지에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복종하는 것 이라고 충고했던 것으로 되어 있다. 스탈린은 러브스톤, 기트로우, 그리고 엘라 리브 블루어(Ella Reeve Bloor)의 이름을 거명하면서 이들이 무정부주의자, 개인주의자, 그리고 파업방해자(Strike-breakers)처럼 행동하고 있다고 괴롭히면서 미국공산당은 그들의 분파가 몰락하더라도 살아남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올퍼에 따르면 스탈린은 다음과 같이 소리쳤다고 한다.

"당신들은 당신들이 뭐라도 되는지 아는가? 트로츠키는 나에게 대들었소. 그자가 어디에 있소? 지노비예프도 나에게 대들었소. 그자가 어디에 있소? 부하린도 나에게 대들었소. 그자가 어디에 있소? 그리고 당신들은? 당신들이 미국에 돌아가면 당신들의 마누라 말고는 아무도 당신들과 함께 하려 하지 않을 것이오!"

러브스톤은 나중에 스탈린의 발언을 "묘지의 연설(graveyard speech)"이라고 불렀는데 그의 회고에 따르면 스탈린은 미국공산당원들에게 러시아인은 파업방해자들을 어떻게 다루는지 알고 있다고 협박했다고 한다.

"소련의 공동묘지에는 묘자리가 충분하오!"

Theodore Draper, American Communism and Russia : The Formative Periode(Viking Press, 1960), p.422.

스탈린의 이런 소통방식은 미국공산당원들의 정나미를 떨어지게 만들었습니다. 러브스톤은 훗날 반공으로 선회하는데 이때의 경험이 끼친 영향을 무시할 수 없을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