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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6월 20일 목요일

어떤 논평

내무인민위원회가 만들어지자 이즈베스티야에는 이런 논평이 실렸다고 합니다.


연방정부는 소비에트연방 내무인민위원회를 만들어 여기에 OGPU(합동국가정치부)를 통합하는 한편 사법권한은 분리하도록 하였다. 내무인민위원회의 창설은 국내의 적들을 대부분 박멸하고 물리쳤음을 뜻하는 것이다. 또한 아직 끝나지 않은 투쟁은 계속하되 주로 다른 수단을 가지고 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혁명의 합법적인 역할, 즉 법에 기반한 올바른 원칙의 역할이 커진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합법적인 절차의 기준에 따라 사건을 담당하는 사법기구의 역할이 커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내무인민위원회 창설에 대한 이즈베스티야의 1934년 7월 11일자 논평. 당시 편집장은 “부하린” 이었다. 
Oleg V. Khlevniuk, Master of the House : Stalin and His Inner Circle, (Yale University Press, 2009), p.93


소련에서는 내무인민위원회(NKVD)를 만들 당시 이것을 “민주화”의 상징으로 선전했다고 합니다. 아 물론 이후 숙청과정에서 내무인민위원회가 초법적인 권한을 휘둘러 댄 것은 많은 분들이 아실 것 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실은 이즈베스티야의 편집장이 “부하린”이라는게 비극입니다.

2010년 6월 23일 수요일

소통 방식의 한 유형

1929년 4월, 코민테른의 미국 위원회는 미국공산당의 분파 투쟁을 해결하기 위한 회의를 열었습니다. 당시 미국공산당의 다수파를 이루고 있던 러브스톤(Jay Lovestone), 기트로우(Benjamin Gitlow), 페퍼(John Pepper), 올퍼(Bertram Wolfe)는 코민테른이 미국공산당의 다수파인 자신들을 지지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1929년 3월 뉴욕을 출발할 때 까지만 하더라도 꽤 자신만만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런데 미국 대표단은 모스크바에 도착한 직후 코민테른 지도부의 맹렬한 공격을 받았습니다. 당시 러브스톤과 기트로우 등은 부하린에 동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스탈린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것 이었습니다. 코민테른 미국위원회의 위원 열두명 중 여덟명이 소련인이었는데 여기에는 스탈린과 몰로토프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탈린이 부하린에게 우호적인 러브스톤을 어떻게 봤을지는 뻔한 일이지요. 결국 미국공산당의 분파투쟁은 모스크바에서 미국공산당의 주류와 코민테른과의 대립으로 발전했습니다. 스탈린은 러브스톤으로 부터 당권을 빼앗으려고 했고 러브스톤은 완강히 저항하지요.

미국공산당원들의 저항은 스탈린의 혈압을 오르게 했습니다. 당시 스탈린은 이런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공식기록에 따르면 스탈린은 완강히 저항하는 여덟명의 미국 공산당원이 굳은 결의와 완고함을 지녔다고 칭찬했지만 "진정한 볼셰비키적 용기란" 코민테른의 의지에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복종하는 것 이라고 충고했던 것으로 되어 있다. 스탈린은 러브스톤, 기트로우, 그리고 엘라 리브 블루어(Ella Reeve Bloor)의 이름을 거명하면서 이들이 무정부주의자, 개인주의자, 그리고 파업방해자(Strike-breakers)처럼 행동하고 있다고 괴롭히면서 미국공산당은 그들의 분파가 몰락하더라도 살아남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올퍼에 따르면 스탈린은 다음과 같이 소리쳤다고 한다.

"당신들은 당신들이 뭐라도 되는지 아는가? 트로츠키는 나에게 대들었소. 그자가 어디에 있소? 지노비예프도 나에게 대들었소. 그자가 어디에 있소? 부하린도 나에게 대들었소. 그자가 어디에 있소? 그리고 당신들은? 당신들이 미국에 돌아가면 당신들의 마누라 말고는 아무도 당신들과 함께 하려 하지 않을 것이오!"

러브스톤은 나중에 스탈린의 발언을 "묘지의 연설(graveyard speech)"이라고 불렀는데 그의 회고에 따르면 스탈린은 미국공산당원들에게 러시아인은 파업방해자들을 어떻게 다루는지 알고 있다고 협박했다고 한다.

"소련의 공동묘지에는 묘자리가 충분하오!"

Theodore Draper, American Communism and Russia : The Formative Periode(Viking Press, 1960), p.422.

스탈린의 이런 소통방식은 미국공산당원들의 정나미를 떨어지게 만들었습니다. 러브스톤은 훗날 반공으로 선회하는데 이때의 경험이 끼친 영향을 무시할 수 없을 것 입니다.

2010년 2월 11일 목요일

대원수 동지의 편지

스탈린이 다른 인간을 신뢰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는데 간혹 예외도 있었다고 합니다. 몰로토프가 대표적인 사람인데 그래서 그런지 스탈린이 몰로토프에게 보낸 편지들은 꽤 재미있는 내용이 많습니다. 예일대에서 꾸준히 내고 있는 Annals of Communism Series 중에는 바로 스탈린이 몰로토프에게 보낸 편지들을 추려서 단행본으로 낸 것이 한 권 있습니다. 이 책은 1936년까지의 편지들을 수록하고 있는데 재미있는 내용은 주로 1930년 까지의 편지에 많고 1931년 부터 1936년까지의 편지들은 매우 적은 분량만 실려 있습니다.

편집자가 편지들을 잘 선정해서 그런지 재미있는 내용이 많은데 오늘 읽은 것 중에서 하나를 골라 봤습니다.

몰로트슈타인(Молотштейн)*, 잘 지내고 있나?

도데체 거기서 뭘 하고 있길래 아무 소식도 없는겐가? 자네가 있는 곳의 사정은 어떤가? 잘 돌아가고 있나 아니면 그렇지 못한가? 뭔가 좀 써서 보내주게나.

이곳은 잘 돌아가고 있네.

1) 곡물 징발은 꾸준히 진행중이네. 오늘 우리는 비상시를 대비해 곡물 비축량을 1억2천만 푸드(пуд, 1푸드는 약16.38kg)로 높여잡았네.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하리코프와 같은 공업도시에 대한 배급량을 높였다네.
2) 집단농장 운동도 급속히 고조되고 있네. 물론 농업용 기계와 트랙터가 부족해서 달리 방법이 없다보니 보통 농기구를 긁어모아 사용해야 했는데 파종 면적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증가했다네.(어떤 지역은 50퍼센트나 증가했네!) 볼가강 하류 지방에서는 전체 농민 중 60퍼센트가 집단농장에 가입했네.(이미 가입했단 말이지!) 우리 당내의 우파 녀석들은 너무 놀라 눈알이 튀어나오려고 하고 있어.

3) 대외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네. 중국 문제를 처리해야 하네. 우리 극동군의 동지들이 중국인들에게 충분한 경고를 주었을 거야. 얼마전에 장쉐량(張學良)이 차이(蔡)와 시마노프스키 동지가 만나서 합의한 사안에 동의하겠다는 전문을 보냈네. 미국과 영국, 프랑스의 개입에 대해서는 거칠게 대응하지 않고 그냥 거절만 했네. 우리는 이정도만 할 수 있었으니까. 볼셰비키가 뭘 원하는지 그들도 알게 해 줘야지! 중국의 지주들은 우리의 극동군이 가르쳐준 교훈을 잊지 않을 거야. 우리가 내건 조건들이 이행되기 전에는 우리 군대를 철수시키지 않기로 결정했네. 리트비노프가 중앙집행위원회에서 했던 연설을 한 번 읽어보게. 꽤 괞찮은 연설이었어.
4) 아마 자네도 신문을 통해 이번 인사이동에 대해 알고 있을것 같네. 이번 인사이동에서 새롭게 바뀐 것은 톰스키(Михаил Павлович Томский)를 쿠이비셰프(Валериа́н Влади́мирович Ку́йбышев)의 보좌역으로 임명한 것(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쿠이비셰프는 이 조치가 자신에게 이익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네), 그리고 슈바르츠를 석탄협회 회장으로 임명한 걸세.(이 경우에는 더 나은 사람이 없었네)
5) (세명의) 우파들**은 열심히 움직이고 있네만 별다른 진척을 거두지 못하고 있네. 릐코프(Алексе́й Ива́нович Ры́ков)는 야코블레프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머리를 굴렸지만 우리가 미리 손을 써 놓았지.

그래. 이제 때가 되었네.

1929 년 12월 5일

Lars T. Lih, Oleg V. Naumov, and Oleg V. Khlevniuk(ed.), Stalin's Letters to Molotov 1925-1936(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95), pp.183-184

*스탈린이 몰로토프를 부를때 쓴 애칭 중 하나로 몰로토프가 유태인이란 걸 농담삼아 비꼰 것 입니다.
** 세명의 우파는 편지에 언급된 릐코프와 톰스키, 그리고 부하린(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Буха́рин) 입니다.

이 편지에서 역시 후덜덜한 부분은 농업 집단화의 성과를 자찬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이미 수없이 많은 농민들이 희생되었지만 강철의 대원수는 그런 사실에는 눈꼽만큼의 관심도 기울이지 않고 오직 성과를 초과 달성한 것과 그의 정적들을 엿먹인 것에만 기뻐하고 있습니다. 타인에게는 눈꼽만큼도 관심없고 오직 자신의 생각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전형적인 초딩마인드이지요.

그런데 이게 도통 남의 일 같지만 않은게, 높은 자리에 초딩 마인드의 소유자들이 들어앉는 경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흔한 일이라서 말입니다.

2009년 1월 24일 토요일

적백내전기 볼셰비키 정부의 징병제 실시와 그 문제점

군사사, 또는 소련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신 분들이라면 대부분 잘 아시겠지만 소련을 세운 볼셰비키들은 군사력의 정치적 의미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었으며 군대를 조직하는데 자신들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반영합니다.

볼셰비키들은 붉은군대의 창설 초기 계급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노동자’ 계층의 지원을 통해 군대를 확장한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상당수의 볼셰비키들은 계급으로서의 농민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농민을 군대에 받아들일 생각이 애초에 없었습니다. 실제로 적백내전 초기 단계에서는 농민들이 볼셰비키를 지지하는데 소극적인 경향을 보였다고 하지요. 그러나 러시아 전역에서 혁명에 반대하는 세력이 들고 일어났기 때문에 순수하게 자원한 노동자만으로 이루어진 군대로 대응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전쟁이 격화되는 마당에 한 줌 밖에 되지 않는 노동자만을 대상으로 군대를 증강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으니까요. 게다가 막상 모병을 실시해 보니 노동자들은 총을 잡는데 큰 관심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1918년 2월에 모스크바에서 모병을 실시했을 때 30만명의 노동자가 자원할 것으로 기대했으나 실제로 지원한 것은 2만 명에 불과했으며 게다가 이 중 70%는 원래 군인이었습니다. 군인 출신이 아닌 자원자들도 도시 실업자나 범죄자가 상당수여서 혁명군대라고 하기에는 뭔가 민망한 상태였습니다.[Figes, 1990, p.175]

1918년 5월과 6월에 겪은 여러 차례의 군사적 패배는 대규모 병력 동원의 필요성을 증대시켰습니다. 볼셰비키 정부는 급박한 전황에 대처하기 위해 1918년 4월 8일에 실질적으로 국민개병제를 실시하기로 결정합니다. 이에 따라 5월부터 대규모의 병력 동원이 시작 되었습니다. 물론 아직까지 형식적으로는 지원병 모집이었지만 징병 연령대의 남성들에게 입대를 강요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5월 29일, 트로츠키는 공식적으로 징병을 선포합니다.[Ziemke, 2004, pp.42~43] 그러나 볼셰비키 정부는 여전히 도시 노동자들을 동원하려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실제로 1918년 6월에서 8월 사이에 있었던 총 15회의 모병 캠페인 중 11회는 노동자만을 대상으로 이뤄졌다고 합니다.[von Hagen, 1999, p.36] 이러한 대규모의 병력 동원으로 1918년 여름과 가을 사이에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에서만 20만명의 노동자가 군대로 편입되었습니다. 농민 또한 동원 대상에 포함되었지만 초기에는 농민의 참가가 매우 저조했습니다. 볼셰비키 정부는 1893~1897년 출생의 농민 275,000명을 동원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실제로는 1918년 6월과 7월의 동원을 통해 4만명을 충원하는데 불과했습니다. 물론 1918년 8월 이후 80만명이 넘는 농민을 동원하는 성과를 거두긴 했습니다만 초기의 저조한 성과는 충분히 실망스러운 것 이었습니다.[Figes, 1990, p.177]

게다가 1918년 8월 6일 카잔이 함락되자 볼셰비키 정부의 위기감은 극에 달했습니다. 이제극렬 좌파조차도 승리를 위해서는 그들이 혐오하는 중앙 통제적인 지휘체계와 대규모 군대가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했습니다. 레닌은 1918년 10월 3일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VTsIK, Всероссийский Центральный Исполнительный Комитет)에서 당장 3백만의 군대를 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Figes, 1990, p.181] 이런 대규모 군대를 편성하는 방법은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농민을 대상으로 대규모 ‘징병’을 실시하는 것 이었습니다. 이미 트로츠키는 짜르 통치하의 장교와 부사관들을 ‘군사전문가’로서 혁명 군대에 대거 편입시킨 경험이 있었습니다. 혁명의 승리가 절실한 마당에 농민을 징집하는 실용노선을 택한다 한 들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1919년 3월 18일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제8차 전당대회는 농민 문제에 대한 일대 전환점이었습니다. 이 대회에서 볼셰비키들은 혁명이 완수된 이후에도 중농 계급은 오랜 기간 존속할 것이기 때문에 혁명 승리를 위해 계급으로서의 중농층과 연합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즉 ‘빈농 및 중농과 연합하여 부농을 치자’는 논리 였습니다.[von Hagen, 1999, p.60] 8차 전당대회 이후 농민에 대한 대규모의 징집이 추진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따라 1919년부터 붉은군대는 폭증하기 시작했습니다. 1919년 1월 약 80만명 수준이던 붉은군대는 불과 1년 뒤인 1920년 1월에는 3백만명으로 증가했습니다. 징병이 절정에 달한 1919년 3월에는 한 달 동안 345,000명이 징집되었습니다.[Figes, 1990, p.183] 부하린은 붉은군대에 농민이 대거 유입됨으로서 프롤레타리아들이 농민화 되어 혁명의 전위로서의 의식을 사라지게 만든다고 툴툴댔습니다.[Lincoln, 1999, p.374] 또한 군대 내의 당원들도 붉은군대의 계급적 순수성이 더럽혀 지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했지만 어쩌겠습니까. 전쟁 중인데…

그러나 이러한 대규모 징병은 겉으로는 꽤 인상적인 것이었지만 실제 내용면에서는 문제가 많았습니다. 무엇보다 숙련된 장교와 부사관이 부족해 징집한 훈련병들을 신속히 훈련시켜 전선으로 투입할 수 가 없었습니다. 내전 기간 중 붉은군대가 최대 규모에 달했던 1920년 10월의 경우 총 550만명의 병력 중 225만명이 훈련병이었습니다. 그리고 1차대전이 끝난 직후에 바로 내전이 발발했기 때문에 징병에 대한 거부감이 강했던 것도 문제였습니다. 특히 1차대전에 참전한 경험이 있는 남성들은 군대에 징집되는 것을 회피했습니다.
게다가 기본적인 장비의 부족으로 실제 전투 병력은 더 적었습니다. 1920년 10월 기준으로 총 병력 550만명 중 전투 병력은 70만 명이고 이 중 제대로 무장을 갖춘 숫자는 50만명 내외로 추정됩니다.[Figes, 1990, p.184] 붉은군대의 장비 부족 문제는 특히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러시아는 이미 1차대전 당시에도 군수물자 부족으로 고생했습니다만 모든 것이 혼란에 빠진 내전 상황에서는 문제가 더 심각했습니다. 볼셰비키 정부가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군대를 마구 잡이로 증강시켰기 때문에 보급 문제는 급격히 악화되었습니다. 붉은군대의 병사 1인당 식량 지급량은 1919년 2월 기준으로 하루 400그람의 빵이었으나 실제로 일선 부대는 이 수준의 급식을 받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일부 부대는 식량 보급이 되지 않아 병사들이 굶어죽는 경우도 발생했다고 합니다. 사람이 먹을 식량도 보급이 안되는 마당이었으니 군마에게 먹일 사료의 보급도 딱히 나을 게 없었습니다. 물론 전선에서의 혹사나 질병으로 인한 손실도 많았으나 상당수의 군마는 사료가 없어 죽었습니다. 질병으로 인한 폐사도 사료의 부족이 원인인 경우가 많았다고 하지요.[Figes, 1990, pp.191~192] 식량 사정이 이 지경이었으니 다른 보급품의 상태가 더 좋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일선 부대들의 경우 군복을 지급받지 못한 병사가 60~90% 사이를 오가는 것은 기본이었고 아예 군복 자체를 받지 못한 부대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것은 겨울에 특히 심각한 문제였는데 동복을 지급받지 못하면 바로 얼어 죽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군대가 갑자기 팽창한 1919~1920년의 겨울에는 동복 부족으로 인해 수많은 병사들이 얼어 죽었습니다. 군화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가죽 신발보다는 현지에서 쉽게 조달할 수 있는 천으로 만든 신발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각 부대들은 전선 근처에서 직접 물자를 조달했는데 이것은 사실상 수백년 전의 약탈 보급으로 되돌아 간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부족한 식량, 피복, 위생 도구는 바로 질병을 불러왔고 적백내전 기간 중 붉은군대 사망자의 대부분은 전사가 아닌 질병 및 부상의 악화로 인한 사망이었습니다. 내전 기간 동안 붉은군대의 전사자는 259,213명이었는데 질병과 부상 후유증으로 인한 사망자는 616,605명이었습니다.[Krivosheev, 1997, p.35] 대부분의 부대들은 부대원의 10~15% 정도가 항상 질병으로 앓아 누워 있었고 심지어는 환자가 전 병력의 80%인 부대가 전선에서 작전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티푸스, 콜레라, 천연두, 독감, 성병이 만연했고 많은 희생자를 가져왔습니다.[Figes, 1990, pp.193] 붉은 군대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병원균 군락이 되다 보니 피부병 같은 것은 질병 축에도 못 낄 정도였다지요.

상황이 이 모양이다 보니 군기의 문란이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특히 병사들이 작전 중에도 술을 마셔대는 것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이미 트로츠키는 1918년 11월 일선 지휘관들에게 군기 확립을 위해 사병에 대한 즉결처분권을 부여한 바 있었습니다.[von Hagen, 1999, p.65] 음주 문제가 대두되면서 즉결처분의 대상이 근무 중 술을 마시는 병사로 확대되었습니다. 물론 병사들의 사정을 잘 아는 지휘관들은 명령을 받아도 이것을 이행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그런 짓을 했다가는 뒤통수에 총을 맞을 거라는 것을 잘 알았겠지요. 실제로 분노한 병사들이 장교나 공산당원을 살해하는 경우가 빈번했습니다. 그리고 간혹 부대내의 유태인을 쏴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는군요.(;;;;)
탈영은 군기문란이 가져온 가장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전선에서의 탈영은 물론 징집과정에서의 탈주도 빈번했다고 합니다. 징병되어 전선으로 향하는 도중 탈영하는 경우가 많았고 때로는 징집병들이 집단으로 도망가기도 했다는 군요. 1919년에는 징병 도중 도망치는 경우가 전체 탈영병의 18~20%였다고 합니다.[von Hagen, 1999, p.69] 게다가 혼란기이다 보니 징집 대상에 대한 체계적인 기록과 관리가 되지 않아서 한 번 탈영한 병사가 다른 부대에 들어가 있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합니다. 내전기의 국민당 군대나 베트남 전쟁 당시 남베트남군대를 연상시키는 이야기 입니다.(;;;;) 탈영으로 인한 병력 손실은 꽤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1920년 2월과 4월 사이에 붉은군대는 294,000명의 병력을 잃었는데 이 중 전사자와 부상자는 2만명에 불과했습니다. 실제로 탈영병의 규모는 엄청났는데 1919년 6월부터 1920년 6월의 1년간 탈영한 병사의 숫자는 2,638,000명이었다고 합니다. 수백만명을 징집하면 수백만명이 탈영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중 탈영 뒤 자수한 1,531,000명을 제외하더라도 1년에 백만이 넘는 탈영병이 발생했다는 것은 정말 심각한 문제였습니다.[Figes, 1990, pp.198~328]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실제 전투 부대에서는 탈영율이 낮았다는 것 입니다. 전투부대의 탈영병은 전체 탈영병의 5~7% 수준이었다고 하는군요.[von Hagen, 1999, p.69] 그러나 위에서 살펴봤듯 붉은군대의 총 병력 중 전투 병력이 얼마 되지 않으니 딱히 좋다고 하기도 그렇습니다. 특히 강제적으로 징병된 병사들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예를 들어 23사단 202포병여단의 경우 자원한 노동자가 주축을 이뤘던 시기에는 큰 문제없이 싸웠으나 1919년 8월에 손실보충을 위해 농민 징집병들을 배치받은 뒤로는 문제가 심각해 졌습니다. 이후의 전투에서 200명 정도의 농민 징집병들이 여단 정치위원을 사살한 뒤 도망가 버려 결국에는 이 여단이 해체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Figes, 1990, pp.203] 심지어 연대단위로 반란을 일으킨 뒤 도망가는 경우도 발생했습니다.[Lincoln, 1999, p.252] 전선의 상황에 분노한 트로츠키는 탈영병들을 모두 총살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역시 일선의 상황을 잘 아는 지휘관이나 모병 담당자들은 본보기로 몇 명을 처형하는 정도로 그쳤습니다.[von Hagen, 1999, p.72] 어차피 상당수의 탈영병들은 알아서 돌아올 테고 또 아무리 총살을 해 봤자 병사들을 탈영하게 만드는 군대의 문제점은 바뀌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적백내전기 볼셰비키 정부의 병력 동원은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정부가 유지할 수 있는 능력 이상으로 군대가 늘어났기 때문에 일선 부대들은 만성적인 보급 부족에 시달렸으며 수백만의 군대를 만들었지만 정작 전투 병력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보급의 부족으로 인해 발생한 막대한 비전투손실은 근대국가의 군대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징병제를 통해 증강된 붉은군대는 결국 볼셰비키를 승리로 이끄는 원동력이 됩니다. 아마 좌파 볼셰비키들의 주장대로 혁명적 순수성을 위해 노동자 지원병만으로 내전을 치렀다면 현대사는 조금 다르게 돌아갔을 가능성이 높을 것 입니다.


참고문헌
John Erickson, The Soviet High Command : A Military-Political History 1918~1941(Third Edition), Frank Cass, 1962/2001
Orlando Figes, ‘The Red Army and Mass Mobilization during The Russian Civil War 1918~1920’, Past and Present 129, 1990
Mark von Hagen, Soldiers in the Proletarian Dictatorship : The Red Army and the Soviet Socialist State, 1917~1930, Cornell University Press, 1999
G. F. Krivosheev(ed), Soviet Casualities and Combat Losses in the Twentieth Century, Greenhill, 1993/1997
W. Bruce Lincoln, Red Victory : A History of the Russian Civil War 1918~1921, Da Capo, 1989/1999
Roger R. Reese, Red Commanders : A Social History of the Soviet Army Officer Corps 1918~1941,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5
Earl F. Ziemke, The Red Army 1918~1941: From Vanguard of World Revolution to US Ally, Frank Cass, 2004

※ 잡담 1. 그러고 보면 러시아/소련군은 항상 신발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것 같습니다.

※ 2. '역사학도'님이 용어의 사용, 개념 문제에 대해서 지적을 하셨습니다. 표현에 있어서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는 본문의 일부를 수정했습니다.

2007년 8월 26일 일요일

부하린이 감옥에서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

부하린이 스탈린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는 여러모로 흥미로운 글입니다.

자신의 최후가 다가오기 때문인지 편지의 곳곳에서 불안한 심리가 표출되고 있으며 또 성경의 일화를 언급하는 등 공산주의자 답지 않은 모습도 조금씩 보입니다. 특히 감옥에서 환각을 본다는 내용을 읽을 때는 한때 최고의 이론가이던 사람의 몰락에 비참함 마저 느껴집니다. 편지에는 삶을 체념했다고 적고 있는데 읽는 사람에 따라서는 스탈린에게 살려달라고 간청하는 내용으로 보입니다.(제가 보기에도 목숨을 체념했다기 보다는 어떻게든 살아 보려고 애쓰는 것 같아 안스럽습니다.)

스탈린 동지의 허가 없이는 아무도 이 편지를 읽지 못하도록 하시오.

스탈린 동지께

요시프 비사리오노비치(Иосиф Виссарионович),

아마도 이것은 내가 죽기 전에 당신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 같습니다. 지금 나는 죄수의 신분이기 때문에 이 편지를 공문서 형식으로 쓰지 않았습니다. 이 편지는 오로지 당신만을 위한 것 입니다. 이 편지의 존재 여부는 오로지 당신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나는 내 인생의 마지막 단계, 아마도 내 삶의 최종 단계에 도달했을지 모릅니다. 나는 이 편지를 쓰면서, 내가 과연 이것을 써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감옥의) 정적은 나를 오싹하게 만들며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갑니다. 그리고 나 자신의 감정을 도저히 통제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제 내게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너무 늦기 전에, 그리고 내가 아직 글을 쓸 수 있을 때, 내가 눈을 감기 전에, 그리고 아직 나의 두뇌가 기능을 하고 있는 지금 제 죽음을 동지께 미리 알려 드리고자 합니다.
어떠한 오해도 피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이 점들을 밝히고 싶습니다.; a) 나는 내가 고백한 혐의를 부인하지 않을 것 입니다 b) 이와 마찬가지로, 나는 이 편지를 가지고 동지가 내 문제를 어떻게 처리 하실지에 대해 영향을 미치려 하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이 편지를 쓰는 것은 순전히 동지와의 개인적인 문제에 대한 것 입니다. 지금 나는 동지께 이 문제를 반드시 알려드려야 한다는 정신적 압박 때문에 이 편지를 쓰기 전에는 죽을 수가 없습니다.

1) 나는 지금 벗어날 수 없는 벼랑의 끝에 몰려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처지이므로 솔직히 이야기 하겠습니다. 나는 수사과정에서 밝혔듯 어떠한 범죄와도 관련이 없는 무죄입니다.

2)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을 생각해 보더라도 회의에서 이미 밝혔듯 다음과 같은 사실 외에는 더 말씀 드릴 것은 없습니다.

a) 나는 예전에 어떤 사람이 누군가 무슨 소리를 질렀다고 말한 것을 들었습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아마 쿠즈민(Кузьмин)이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나는 쿠즈민이 한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기 때문에 그때 들은 이야기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 합니다.

b) 아이헨발드(Айхенвальд)는 예전에 나와 함께 시내를 걸으면서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회의, 또는 회의 비슷한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한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에 대해 안스럽게 생각해서 아이헨발드와 이야기 한 사실에 대해 숨겼습니다.

c) 나는 1932년도에 내가 당에서 다시 실권을 잡을 것이라고 믿고 나를 따르던 나의 추종자들과의 “표리부동한” 태도에 대해서 유죄를 시인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나의 추종자들을 당에서 유리시켰습니다. 이 점은 내가 말한 그대로 입니다. 나는 이 점에 대해서는 양심에 거리낄 것이 없습니다. 다른 혐의들은 모두 허구이거나 설사 그와 유사한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나 자신은 전혀 알지 못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전체회의에서 이야기 한 것은 모두 진실이며 거짓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지난 수년간 나는 당의 노선을 진심으로, 그리고 충실히 따랐으며 동지를 따르고 존경했습니다.

3) 나는 제게 씌여진 혐의나 “다른 이들의” 자백을 시인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지 않았다면 내가 “무장해제 당했다”는 허위 사실을 밝힐 수 없었을 것 입니다.

4) 이와 관계없는 것과 3번과는 별도로, 나는 우리의 조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 이번 숙청에는 거대하고 엄청난 정치적 바탕이 깔려 있습니다. 이것은 a) 전쟁 이전의 정치적 상황과 관련되어 있으며, b) 민주화로의 이행 과정과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 숙청에는 1) 범죄혐의자 2) 범죄혐의를 받고 있는 사람 3) 잠재적으로 범죄혐의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 또한 이 세 가지의 범주 중 하나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부는 중립적인 입장을 지키고 있으며 일부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고 마지막으로 두 번째 집단과도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는 일부가 있습니다.
어찌됐던 이제 인민들은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하고 상호간의 불신은 지속적으로 높아만 가고 있습니다.(이것은 나의 경험을 통해 판단한 것입니다. 나는 내 명예를 훼손한 라덱()에 대해 분노를 터뜨렸으며 결국 그의 뒤를 따르게 됐습니다…) 이 방식을 통해 지도부는 자체에 대한 권위를 확립했습니다.

아무쪼록 내가 하는 말이 동지를 비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는 바보가 아닙니다. 나는 이번 숙청에 어떤 계획, 어떤 의도, 그리고 어떤 이해관계가 걸려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 자신과 나와 가깝던 사람들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스탈린 동지에게 달려있다는 점을 슬프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는 극심한 고뇌에 시달리고 있으며 심각한 역설적 상황에 처해있습니다.

5) 만약 내가 동지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면 마음의 안정을 찾는데 훨씬 도움이 될 것 입니다. 하긴, 그게 어쨌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만약 동지의 의도가 그런 것이라면 그렇게 되겠지요. 그렇지만 나의 마음은 동지께서 내가 유죄라는 점을 믿고, 또 동지가 진심으로 내가 이런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려 했다고 믿고 있을 것 같아 답답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 일까요? 나 자신이 나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을 당으로부터 축출당하게 만들었다, 즉 나 자신이 이런 행동이 범죄라는 것을 알고도 그대로 했다는 것 입니까? 만약 그것이 모두 사실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정당화 될 수 없을 것 입니다. 지금 나의 머리는 이런 혼란으로 어지럽습니다. 그리고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어떤 외침이 들리는 것 같습니다. 그냥 내 머리를 벽에 들이받아 죽어버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만약 그렇게 한다면 이 때문에 또 다시 다른 사람들에게 죽음의 빌미를 만들겠지요.

도데체 나는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도데체 내가 뭘 하면 좋겠습니까?

6)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적개심을 고취하지 않았고 나 또한 누구에게 원망을 품지 않았습니다. 나는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내 나름대로의 신념이 있습니다. 나는 (당의 노선과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보복에 시달려 왔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동지께서 진심으로 알고 싶을 것 같아 이야기 하는데, 내가 답답한 이유 중 하나는 당신이 과거에 있었던 일 중 하나를 까맣게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1928년 여름으로 기억하는데, 그때 내가 동지의 옆에 앉아 있을 때 동지는 내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동지는 내가 왜 동지를 나의 친구로 생각하는지 아시오? 그건 동지는 음모 같은 것을 꾸미지 않을 사람이기 때문이오. 그렇지 않소?” 그래서 나는 “그렇지요. 나는 음모 따위는 관심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나는 카메네프와 친하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동지께서 믿든 믿지 않든 상관없지만 카메네프와의 관계는 나에게 있어서 마치 유대인들의 원죄의식과도 같았습니다. 아. 이런. 이게 무슨 유치한 생각이란 말입니까! 이게 무슨 바보짓이란 말인지! 결국 카메네프와의 친분 때문에 지금 나의 명예와 목숨을 잃게 되었습니다.
이점에 대해서는 나를 용서해 주십시오. 코바. 나는 이 편지를 쓰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동지께서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는데 지금 나는 이 편지를 쓰면서 나의 처지를 더욱 더 곤란하게 만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나는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당신에게 마지막 작별인사를 해야겠습니다. 내가 당 지도부나 나를 수사한 수사관이건 간에 어느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비록 나는 나의 주변이 모두 암흑천지 같이 보이고 어둠이 감싼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심한 처벌을 받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지의 용서를 구하는 바입니다.

7) 내가 환상에 시달리고 있을 때, 동지를 여러 차례 보았고 한번은 나데즈다 세르게예브나(Надежда Сергеевна Аллилуева, 스탈린의 두 번째 아내)를 보기도 했습니다. 그 환상 속에서 나데즈다 세르게예브나는 나에게 이렇게 말을 하더군요. “도데체 당신들이 당신에게 무슨 짓을 한 건가요,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이오시프에게 말해서 당신을 빼내겠어요.” 이 환상이 너무나 사실 같아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동지께 제발 저를 풀어달라고 간청하는 편지를 썼습니다! 지금 저의 정신은 현실과 망상이 뒤섞여 있습니다. 나데즈다 세르게예브나는 제가 동지에게 어떤 악독한 음모도 꾸미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 입니다. 결국 나의 피폐한 정신이 이런 환상을 만들어 냈겠지요. 나는 동지와 수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아. 이런. 만약 나의 마음을 보여주는 기계가 있다면 동지에게 나의 영혼을 모두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만약 동지께서 내가 스테츠키(Стецки)나 탈(Тал) 같은 사람과 달리 나의 정신과 육체를 모두 동지께 바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동지께서는 나를 용서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게는 아브라함이 (이삭에게서) 칼을 거두도록 했던 것 같은 천사가 없을 것 같습니다. 나의 끔찍한 운명은 이제 결정되었습니다.

8) 마지막으로, 나의 마지막 부탁을 드리고자 합니다.

a)사실 나는 재판을 받지 않고 그냥 목숨을 끊어버릴 기회가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나는 그저 내가 얼마나 나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었을 뿐입니다. 동지께서도 나의 성품을 잘 알 것입니다. 나는 당이나 소연방의 적이 아니며 나의 힘이 닫는 한도 내에서 당의 의도에 충실히 따랐습니다. 그러나 이런 환경에서 나의 힘은 제한적일 수 밖에 없었으며 이로 인해 나는 많은 고뇌를 했습니다. 나는 부끄러움이나 자존심을 모두 버리고 당신 앞에 무릎 꿇고 간청합니다. 제발 나를 재판에 회부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이건 불가능하겠지요. 만약 가능하다면 내가 재판 이전에 죽을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b) 만약 내가 사형선고를 받게 된다면, 동지께서 먼저 이 사실을 알려주셨으면 하고 또 진심으로 총살은 피하도록 부탁 드립니다. 나는 총살 대신 독약으로 목숨을 끊고 싶습니다. (모르핀을 맞고 영원히 잠들고 싶습니다.) 특히 이점은 내게 중요합니다. 동지께서 내게 자비로운 행위를 베풀도록 부탁 드리려면 어떤 표현을 사용해야 할 지 도무지 머리에 떠오르지 않습니다. 어쨌거나, 정치적으로 어떤 표현을 사용할지는 중요한 일이 아닐 것 이고 또 어느 누구도 이 일에 대해 알지 못 할 것 입니다.
하지만 나의 마지막 시간들은 내가 원하는 대로 보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나에게 동정을 베풀어 주십시오. 동지께서도 나를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나와 같은 상황이라면 동지께서도 나와 같이 하시겠지요. 결정을 내리시면 알려주십시오. 나는 충분히 현실을 견딜 수 있는 용기가 있지만 한편으로는 가끔씩 죽음의 공포를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혼란을 느낄 때 마다 내가 정신적으로 고갈된 상태라는 것을 알겠습니다. 그러니 만약 사형이 선고된다면 내게 치사량 만큼의 모르핀을 주십시오. 진심으로 간청합니다.

c) 그리고 나의 아내(Анюта, 부하린의 두 번째 아내)와 아들에게 작별인사를 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단, 내 딸은 만나고 싶지 안습니다. 그 아이에게 너무나 미안함을 느낍니다. 나의 죽음은 내 딸아이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고통스러울 것 입니다. 그리고 나디아(부하린의 첫 번째 아내)와 제 아버지 역시 고통스러워 할 것입니다. 하지만 아뉴타는 아직 젊으니 충분히 충격을 이겨낼 수 있을 것 입니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그녀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될 수 있으면) 재판 이전에 아뉴타를 만났으면 합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만약 나의 가족들이 재판에서 나의 (조작된) 진술을 듣는다면 충격을 받아 자살할 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전에 몇 마디 이야기를 해서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해 주려 합니다.

d) 만약 나의 예상과 반대로 내가 석방된다면 (나의 아내와 먼저 상의하는 것이 순리이겠지만) 다음과 같은 사안을 부탁 드리고자 합니다.
- 미국에 몇 년 정도 망명을 하고 싶습니다. 나의 의도는 이렇습니다. 재판을 받는 대신 정치 활동을 하겠습니다. 즉 트로츠키에 대한 투쟁을 전개하고 혼란에 빠진 지식계층들의 마음을 사로 잡겠습니다. 또 나는 반 트로츠키 주의자가 되어 트로츠키를 타도하는데 진심으로 전력을 다 하겠습니다. 동지께서는 나에게 비밀경찰 한 명을 감시 목적으로 붙이고 그래도 미덥지 않으시다면 나의 아내를 내가 트로츠키와 그 일당에게 큰 타격을 입힐 때 까지, 즉 여섯달 정도 본국에 두고 감시하도록 하십시오.
-만약 그래도 나에 대한 의심을 떨쳐버릴 수 없으시면 뻬초라(Печора)나 콜릐마(Колыма)의 수용소에 25년 정도 유배를 보내십시오. 나는 유배지에서 대학과 지역 문화 박물관, 연구소, 그리고 미술관, 민속박물관, 자연사 박물관, 언론사를 세우겠습니다. 즉 나와 나의 가족은 내가 죽을 때 까지 그곳에서 문화 사업을 전개할 것 입니다. 어떤 경우에든 나는 온 힘을 다하여 일을 할 것 입니다. 그러나 사실 나는 2월 전체회의에서 있었던 사안을 고려하면 내가 석방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에 대한 재판이 언제라도 열릴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게 나의 마지막 부탁입니다.(하나 더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나의 철학 원고들은 내가 죽더라도 없애지 말아 주십시오. 매우 가치있는 저작들이 있습니다.)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당신은 당신에게 충실했던 가장 유능한 측근을 하나 잃게 되었습니다. 나는 마르크스가 알렉산드르 1세는 바클레이 드 톨리(Михаи́л Богда́нович Баркла́й-де-То́лли)를 반역 혐의로 의심해서 결국 가장 유능한 조력자를 잃었다고 평했던 글을 읽었었는데 지금 나의 상황이 마치 바클레이 드 톨리와 같아 가슴이 아픕니다.

그렇지만 나는 눈물을 거두고 이 세상과 이별할 준비를 하겠습니다. 그리고 동지와 당, 그리고 당의 뜻에 대해서는 무한한 사랑 말고는 아무런 감정도 없습니다. 나는 동지에게 모든 것을 다 적었습니다. 내 편지를 꼼꼼하게 읽어 주십시오. 지금 나의 상황이 당장 내일이라고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에 편지는 미리 적었습니다. 신경이 쇠약해 졌기 때문에 지금은 손가락을 움직이기도 어려울 정도로 무감각 합니다.

그렇지만 지금 나는 두통과 눈물에도 불구하고 편지를 씁니다. 코바, 나의 양심은 당신 앞에 떳떳합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당신에게 용서를 구합니다.(오직 마음속으로만 표현해 주십시오) 이런 이유로 나는 나의 마음속에 당신을 품고자 합니다. 영원한 이별이로군요. 이 불쌍한 사람을 좋게 기억해 주기 바랍니다.

부하린 1937년 12월 10일

J.Arch Getty and Oleg v. Naumov(ed), The Road to Terror : Stalin and the Self-Destruction of the Bolsheviks, 1932~1939, (Yale University Press, 1999), pp.556~560

추가 1. 이 편지의 러시아어판은 이 사이트에 있습니다.

추가 2. 이 편지 말고도 한국에 번역된 부하란 : 인간, 학자 그리고 혁명가라는 책에는 부하린이 자신의 두 번째 아내에게 쓴 편지가 부록으로 실려 있습니다. 이 두 번째 편지는 스탈린에게 쓴 편지에 비해 조금 더 차분한 마음에서 쓴 것 같아 보이며 또 상당히 슬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