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초기 이런 총알받이의 역할을 수행한 근간은 바로 소총병 사단(Стрелковая Дивизия) 이었습니다. 유능한 지휘관과 훈련도 부족하고 게다가 기동력 조차 낮은 소총병 사단들은 개전 초반 독일군의 밥이었습니다. 비록 용감히 맞서 싸웠다고는 하나 작전과 전술 단위의 능력이 부족하니 그 결과는 안 봐도 뻔한 것 이었습니다.
하지만 1942년과 1943년을 거치면서 상황은 조금씩 호전되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동안 누적된 인명손실이었습니다. 소련이 독일보다는 가용한 인적자원이 많다고는 해도 1942년에 7,369,278명, 1943년에 7,857,503명이라는 무시무시한 손실을 입었으니 병력 충원에 곤란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3) 그 결과 소련군의 소총병사단은 계속해서 편제병력을 줄여 나갑니다. 1942년 3월 18일의 편제에서 소총병사단의 총병력은 12,725명이었는데 이것이 1942년 7월 28일 편제에서는 10,386명, 1942년 12월 10일 편제에서는 9,435명, 1943년 7월 15일 편제에서는 9,380명으로 줄어듭니다.4) 문제는 편제 병력을 계속 줄여도 병력소모가 커서 편제를 맞추기가 어려웠다는 것 입니다. 1942-43년 동계 공세 기간 중 소련군의 소총병 부대들의 실제 병력은 부대에 따라 편제의 55~95%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나 1943년 7월의 하계 전역에서는 편제의 75~80% 정도였고 편제의 90%를 넘어가는 부대는 극히 드문 실정이었다고 합니다.5)
쿠르스크 전투 당시 소련군은 독일군의 대공세를 맞아 방어준비에 심혈을 기울였고 종심깊고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는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독일군의 공세를 맞아 병력 보충에 상당한 힘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소총병사단들의 병력 수준은 위에서 언급한 정도에 그쳤습니다. 1943년 7월 5일, 독일 제4기갑군의 공격에 맞선 보로네지 전선군 예하 6근위군 소속 소총병사단들의 병력 규모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6근위군 | 1943년 7월 5일 병력 |
51 근위소총병사단 | 8,590 |
52 근위소총병사단 | 8,900 |
67 근위소총병사단 | 8,003 |
71 근위소총병사단 | 8,796 |
89 근위소총병사단 | 8,189 |
90 근위소총병사단 | 8,417 |
375 소총병사단 | 8,647 |
이 정도 병력은 당시 수준에서 매우 양호한 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쿠르스크 방어전은 소련의 승리로 끝났지만 그 피해도 상당한 수준이어서 소련군의 1943년 하계 대공세 중 하리코프에 대한 루미얀체프 작전 당시 소련군 수뇌부가 병력 충원에 심혈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소총병사단들의 평균 병력은 사단 당 7,180명으로 편제의 75%에 불과했습니다.6) 장기간에 걸친 소모전의 여파가 나타난 셈이지요.
소총병사단들은 1943년 부터 시작된 반격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소련군이 1943년에서 1945년 까지 입은 총 병력손실 중 84.23%가, 그리고 사망자는 85.95%가 보병부대에서 발생한 것 이었습니다.7) 1941-42년과 달리 1943년 후반 이후의 소련군은 수십개 사단이 송두리째 전멸당하는 사태는 없었고 그 덕분에 각각의 부대들도 ‘작전 중의 소모’만 감당하면 되는 정도로 상황이 좋아졌지만 문제는 이 ‘작전 중의 소모’도 만만한 수준은 아니었다는데 있습니다.
1943년 9월 20일 보로네지 전선군 예하 38군 소속의 소총사단들의 병력 현황을 예로 들어보면 좋을 듯 싶습니다. 이 당시 보로네지 전선군은 쿠르스크 방어전과 루미얀체프 작전이라는 공세작전을 마치고 추격전을 위해 병력 보충을 어느 정도 받은 상태였습니다.
38군 | 1943년 9월 20일 병력 |
71 소총병사단 | 3,755 |
136 소총병사단 | 5,376 |
163 소총병사단 | 5,045 |
167 소총병사단 | 8,488 |
180 소총병사단 | 8,517 |
232 소총병사단 | 7,138 |
240 소총병사단 | 8,442 |
340 소총병사단 | 5,404 |
이른바 근위 사단이라는 부대라고 해서 별반 나을 것은 없었습니다. 역시 9월 20일 같은 보로네지 전선군 예하 6근위군 소속 근위소총병사단들의 병력 현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위에서 인용한 쿠르스크 전투 당시의 병력 수준과 비교해 보면 전투 손실을 제대로 보충받지 못한 상태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6근위군 | 1943년 9월 20일 병력 |
51 근위소총병사단 | 4,064 |
52 근위소총병사단 | 4,977 |
67 근위소총병사단 | 4,103 |
71 근위소총병사단 | 5,451 |
90 근위소총병사단 | 4,651 |
1944년에 들어가면 상황이 더욱 더 심각해 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그라티온(Багратион) 작전 당시 소련군의 주공축선에 배치된 소총병사단들의 평균병력은 6,000~6,500명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8)
소련군이 점령된 영토를 해방하면서 그만큼 더 병력자원을 동원할 수 있었지만 장기간의 소모전 때문에 전쟁 말기로 갈수록 소총사단의 병력 규모는 별로 나아지지를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베를린 작전에 투입된 제1 벨로루시 전선군 예하 47군의 경우 작전 시작직전 병력 5,000명을 넘는 소총병사단이 하나도 없을 정도입니다.(주력 공격부대인데도 말입니다!)9)
47군 | 1945년 4월 5일 병력 |
185 소총병사단 | 4,203 |
260 소총병사단 | 4,111 |
328 소총병사단 | 4,163 |
80 소총병사단 | 4,210 |
76 소총병사단 | 4,190 |
175 소총병사단 | 4,189 |
82 소총병사단 | 4,055 |
132 소총병사단 | 4,597 |
143 소총병사단 | 4,409 |
[표: Алексей Исаев, Берлин 45-го(Эксмо, 2007), с.708]
상황이 조금 나은 5충격군(Ударной Армий)의 병력 현황도 47군 보다 조금 나은 수준입니다.
5충격군 | 1945년 4월 10일 병력 |
230 소총병사단 | 5,032 |
248 소총병사단 | 5,006 |
301 소총병사단 | 5,638 |
89 근위소총병사단 | 5,470 |
94 근위소총병사단 | 5,823 |
266 소총병사단 | 5,520 |
60 근위소총병사단 | 5,348 |
295 소총병사단 | 5,383 |
416 소총병사단 | 4,649 |
최후의 공세를 앞두고 준비를 갖춘 사단의 병력 수준이 편제의 절반 남짓한 수준인 것을 보면 소련군 또한 인력 소모가 극도에 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
1) G. F. Krivosheev, Soviet Casualties and Combat Losses in the Twentieth Century(Greenhill Books, 1997), p.94
2) David M. Glantz, Colossus Reborn : The Red Army at War, 1941-1943(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5), p.540
3) Kreivosheev, ibid, p.94
4) Steven J. Zaloga and Leland S. Ness, Red Army Handbook 1939-45(Sutton, 1998), p.35
5) Glantz, ibid, p.190
6) David M. Glantz, From the Don to the Dnepr : Soviet Offensive Operations, December 1942-August 1943(Frank Cass, 1991), p.223
7) Kreivosheev, ibid, p.219
8) Walter S. Dunn, Jr., Soviet Blitzkrieg : The Battle for Whiter Russia 1944(Lynne Rienner, 2000), pp.41~42
9) Алексей Исаев, Берлин 45-го(Эксмо, 2007), с.7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