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림번역 하나 나갑니다. 이 글은 러시아의 유명한 군사사가 발레리 자물린이 2012년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25-3호에 기고한 “The Battle of Kursk: New Findings”이라는 글입니다. 쿠르스크 돌출부 남쪽의 방어를 담당한 보로네지 전선군 사령관 바투틴에 대해 높게 평가하는 글 인데 쿠르스크 전투 당시 소련군 전술제대의 문제점에 대해 지적하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번역했던 같은 필자의 “프로호롭카: 신화의 기원과 전개과정”도 함께 읽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쿠르스크 전투: 새로운 발견들
필자: 발레리 자물린영문번역: 개리 딕슨Gary Dickson
쿠르스크 전투의 초기 5일간은 소련에 있어서 가장 힘든 시기였다. 정확히 말해 이 시점 부터 전세가 소련에게 유리하게 바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나 지금이나 러시아 역사학계는 이 시기의 중요성에 상응하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특히 소련군 최고사령부의 실수로 인해 가장 극적이고 격렬한 전투가 전개되었던 보로네지 전선군의 방어선에 전개된 사건에 대해서 그러하다고 할 수 있다. 소련군 최고사령부는 독일군의 주공이 오룔 방면에서 쿠르스크 축선으로 가해 질 것이라고 판단했지만 실제로 독일군의 주공은 보로네지 전선군이 방어하고 있던 벨고로드 방면에서 왔다. 많은 병력이 쿠르스크 돌출부 북쪽을 방어하는데 배치되었기 때문에 보로네지 전선군은 충분한 예비대를 확보할 수 없었다. 예비대의 부족으로 보로네지 전선군은 비극적인 결과를 불러온 전술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수많은 인명 피해와 특히 전차와 같은 장비를 대량으로 상실하여 전투의 결과에 까지 중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연구자들은 비록 일부 타당한 면이 없지는 않으나, 전선군 사령관인 바투틴이 조급하게, 그리고 충분히 검토하지 않고 결정을 내렸다는 비판을 멈추지 않고 있다. 이러한 비판 중 가장 많은 것이 1943년 7월 6에서 8일 사이에 프로호롭카와 오보얀 축선으로 돌파해 온 적을 고립시키기 위해 일련의 반격을 결정한 일이다. 최근 러시아연방 국방부 중앙문서보관소ЦЕНТРАЛЬНЫЙ АРХИВ МИНИСТЕРСТВА ОБОРОНЫ에서는 쿠르스크 전투에 참가한 소련군 부대의 작전통신내용과 전투보고서를 대량으로 공개하였다. 이러한 사료에 힘입어 연구자들은 보로네지 전선군 사령관의 리더쉽을 새로운 방식으로 고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바투틴과 그 예하의 야전군 사령관들이 주고 받은 전문을 읽어본다면 바투틴이 초기의 수일간 작전의 전개 과정과 적군이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를 매우 정확히 예측하고 있었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기간 동안 바투틴과 그의 참모진은 세심하게 계획을 세우고, 정확한 예측을 하고, 상황의 전개에 맞춘 결정을 내렸다. 바투틴 장군은 대규모의 전략 제대를 지휘하는데 필요한 기술에 통달했으며, 적군이 어떻게 움직일지 이해하여 적의 행동을 정확히 예측하였다.
바투틴은 7월 5일이 끝나갈 무렵에는 독일 남부집단군 사령관의 목표를 파악하여 그가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지 예측하였다. 바투틴은 주로 동부전선의 남부지역의 상황을 파악한 것과 그의 직관력, 전선군의 작전을 매일 분석한 것에 기반하여 평가를 내렸다. 독일 남부집단군의 주공 축선에 배치된 제6근위군과 제1전차군의 방어 구역의 전황, 그리고 가용한 전선군 예비대의 규모는 바투틴의 계획과 결단에 특별한 영향을 끼쳤다. 한편, 보로네지 전선군은 적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예측하기는 했으나 불행히도 적의 움직임을 매번 저지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바투틴에게 돌리는 것은 불공정한 처사이다. 왜냐하면 전투의 결과는 바투틴 뿐만 아니라 다른 요소에 의해서도 지대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독일군을 격퇴하기 위한 계획은 수개월에 걸쳐 수립되었지만 쿠르스크 전투 초기의 이틀간은 계획대로 작전이 전개되지 못했다. 에리히 폰 만슈타인 원수가 지휘하는 남부집단군의 기갑부대들은 치스챠코프 중장이 지휘하는 제6근위군이 수많은 장애물과 야전축성을 구축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구축한 두개의 방어선을 돌파해 버렸다. 보로네지 전선군 사령부는 독일군의 신속한 돌파에 비상이 걸렸다. 독일군은 고작 18시간 만에 제1방어선을 돌파했고 제2방어선은 더 빨리 뚫어버린 것이었다. 전투는 바투틴이 예측한 대로 전개되었지만 바투틴은 자신의 판단력을 확신할 수가 없었고 복잡한 상황을 충분히 파악하지 않은 상태에서 단 한차례의 강력한 반격으로 상황을 회복하고자 했다. 독일군은 주도권을 쥐었고 바투틴은 침착할 수가 없었다. 바투틴은 상황을 호전시키고 적의 의지를 꺾기 위해 필사적으로 대책을 강구했다. 7월 6일 부터 8일까지 몇 개의 반격 계획을 세웠다가 취소했다. 바투틴이 이렇게 침착함을 잃어버린 까닭은 전선의 상황이 심각했다는 점 외에도 바투틴 개인의 성격과 일처리 방식에도 있었다. 그리고 바투틴은 몇몇 야전군 사령관을 포함한 예하 지휘관들의 교육 수준이 낮은데다 현대의 전장에서 대규모 부대를 운용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이들을 믿을 수 가 없었다.1)
기밀해제된 문서들을 살펴보면 보로네지 전선군은 방어작전 초기 단계에서 반격을 실시할 때 마다 준비가 부실했으며,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서두르는 경향이 있었고, 예하 부대들의 능력, 특히 전차부대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을 보였다. 반격계획 수립은 각 야전군 사령부가 담당했다. 전선군 사령부는 일반명령과 임무만을 하달한 뒤 나머지 계획 수립 과정은 야전군 사령부에 일임하였다. 하지만 야전군 단위의 지휘관과 참모진의 훈련수준은 다양한 병과를 조율해야 하는 높은 수준의 계획을 수립하는데 충분하지가 못했다.
다양한 병과를 조율하는 것은 전쟁 기간 내내 붉은군대의 심각한 문제점이었다. (제일선의 모든 야전군을 포함한) 야전군 단위에서는 특히 전차를 어떻게 운용해야 하느냐가 중요한 문제였다. 야전군 단위의 장교들은 기갑 전술에 대한 지식이 일천했고, 전차라는 무기의 능력에 대해 잘 몰랐으며, 전차 부대의 훈련 수준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야전군 사령부의 기갑참모진2)은 규모가 작고, 훈련이 부실한데다 책임질 수 있는 권한이 부족했기 때문에 야전군 사령관의 결심에 이렇다 할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야전군 사령부에 배속된 핵심 간부들은 전차부대를 지휘하는데 필요한 경험을 쌓지 못했기 때문에 전차 부대를 운용하는 계획을 마치 보병 부대를 운용하는 것 처럼 수립했다. 야전군 사령부의 참모들은 기갑 작전에 적합한 지형이라던가 항공 지원을 제공하는 것과 같은 중요한 문제를 고려하지 않았으며 독일 전차의 성능적인 우세라던가 아군 전차 부대의 능력 같은 것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 1943년에 소련군의 독립중전차연대(전차 21대)의 화력은 독일군의 전차 중대 정도에 불과했으며, 전차여단의 화력은 독일군의 전차대도 보다 못한 수준이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장교단의 훈련 수준 문제에 더하여 반격에 참여할 야전군간의 조율이 전선군 사령부를 통해 이루어 졌다는 점도 있다. 이같은 방식은 특히 지상군에 항공지원을 제공하거나 공격부대의 전면에 있는 적의 거점을 파괴하는데 시간이 걸리게 했다.
보로네지 전선군의 기갑참모처3)는 이런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다. 전선군 기갑참모처는 반격 명령을 내릴때 기갑 작전에 대해 전문적인 조언을 하달해야 했다. 하지만 보로네지 전선군 기갑참모인 슈테브뇨프Андрей Дмитриевич Штевнёв 중장은 쿠르스크 전투가 일어나기 겨우 일주일 전에 임명되어 그의 업무에 적응할 시간이 없었다. 이유가 어쨌건 간에 슈테브뇨프와 그의 참모진은 반격시 전차군단과 전차군을 어떻게 운용해야 하는가에 대한 전문적인 조언을 해 주지 못했다. 그대신 이들은 기술적인 조언과 명령 이행 사항만을 담당하고 작전적인 문제는 전선군 작전참모처에 일임하고 전차군단과 야전군의 협동작전 문제는 개별 군단장이 알아서하도록 방기하였다. 기갑참모들은 전투 초기 부터 기갑부대의 작전과 적의 전술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분석한 뒤 그 결과를 직속 상관에게 보고해야 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공개된 문헌들을 살펴보면 보로네지 전선군의 기갑참모처는 나태하고 안일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심지어 바투틴 본인 조차도 기갑 작전에 대한 경험이 부족했다. 이러한 사실은 7월 6일로 예정하고 계획되었다가 그 전날 밤 스탈린에 의해 취소된 제1전차군의 반격을 입안하는 과정에서 잘 나타난다. 그리고 문제는 이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바투틴은 자제력을 잃고 당황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7월 6일 오전에 제40군과 제6근위군을 투입하는 새로운 반격 계획을 입안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바투틴은 소련군이 아직 강력한 전력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방어전을 치르며 소모하기 보다는 두개의 강력한 집단을 편성해 독일 남부집단군의 주력부대인 제4기갑군의 양 측익에 공격을 가해 독일군이 공격을 멈추고 방어로 전환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시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7월 6일 시점에서 이렇게 복잡한 작전을 실시한다는 것은 비현실 적이었다.
대규모의 군사작전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데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제40군은 독일군의 공격에 직접 맞서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반격을 계획하는데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제6근위군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제6근위군 사령부와 예하 부대들은 우세한 적에 맞서 전선을 유지하는데 전력을 쏟고 있었다. 많은 수의 참모장교들과 장성들은 예하부대를 이끌고 직접 방어전투를 지휘하고 있었다. 이들에게 방어전을 수행하는 와중에 반격까지 하라는 것은 부담만 지우고 이들의 주된 임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게 만드는 행위였다. 그러므로 이 시점에서 반격을 계획하는데 소중한 시간을 허비한다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행위였다.
7월 6일의 전투 경과를 보면 소총병군단의 사령부들, 특히 제6근위군 예하 군단의 사령부들이 맡은 책임을 이행할 능력이 없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실제로 군단사령부들은 단지 야전군사령부와 사단본부 사이에서 명령문과 보고를 전달하는 역할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연락 업무 마저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군단사령부의 고위 간부들은 이렇다 할 결단력이나 의지를 보여주지 못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여러가지 원인이 있지만 그중에서 핵심은 군단사령부들이 예하 부대들과 보조를 맞출 시간이 부족했다는데 있다. 제69군 예하의 소총병군단 군단장들은 7월 2일에야 전선에 도착해 7월 4일 부터 군단을 지휘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제7근위군과 제40군 예하의 소총병군단 사령부의 편성 명령은 독일군이 공세를 개시한 직후에 내려졌다는 것이었다. 이론적으로는 자신의 임무를 잘 파악하고 있는 장교라 할 지라도 역동적이고 격렬한 실제 전투 상황에서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가 허다했다. 군단 사령부의 장교들은 변화하는 상황에 맞춰 대응하고, 예하 부대에 대한 통제를 신속히 회복하고, 상급 부대 및 인접 부대들과 접촉을 유지하고, 심지어 미리 준비된 방어선에서 조차 충분한 방어 태세를 갖추는 임무 등을 하지 못했다.
1943년 초에 붉은군대가 소총병군단을 대규모로 편성하면서 군단 수준에 걸맞는 참모 업무에 숙달된 고위 장교와 장성이 부족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런 부족 현상은 붉은 군대 전반에 만연해 있었으며 보로네지 전선군도 마찬가지였다. 제40군 참모장 바튜냐Александр Григорьевич батюня 소장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군단사령부의 참모진은 국방인민위원회 예비로 있는 지휘관들로 채워져 있다. 이들 지휘관의 대다수는 실전 경험이 크게 부족하다. 이들은 군사 교육을 받기는 했으나 군단사령부 참모로서의 실제 업무에 대해서는 배우지 못했다. 이들이 실전을 통해 이론적인 지식을 바로 잡는데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전투 초기에 군단사령부는 예하 부대를 너무 졸렬하게 지휘했기 때문에 야전군사령부가 강제로 군단사령부의 임무를 모두 대신해야 했다.”4)
이로인해 방어 작전의 첫 며칠동안은 각 부대들이 필요한 수준의 상호 협력과 효율성을 발휘하기가 힘들었다.
야전군사령부에서는 군단의 임무 상당수를 직접 맡아서 군단사령부의 부담을 완화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렇게 하자 또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이제는 야전군사령부 참모진의 업무가 과도해지고 통신망에는 과부하가 걸렸다. 그래서 야전군사령부가 명령을 내리는데 걸리는 시간이 길어지고 명령을 이행하는데 까지 걸리는 시간도 늘어났으며 그나마 명령이 충분히 이행되지도 못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전문들은 야전군사령부들이 명령과 지시사항이 이행되고 있는지 바르게 파악할 수 없었음을 보여준다.
또 다른 문제점은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는 직위에 있는 고급 장교들의 결단력이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치스챠코프는 물론 바투틴 까지도 제6근위군의 상황에 대해 계속 우려했다. 7월 7일 보로네지전선군 군사위원회는 제23소총병군단장 바흐로메프Павел Прокопьевич Вахрамеев 소장이 맡은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직위해임하였다. 바흐로메프가 해임된 이유 중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군율을 지키지 않았다는 점과 지나치게 음주를 했다는 것 이었다. 제22근위소총병군단 참모장 나카트긴 대령은 군단사령부의 업무를 효과적으로 조율하려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하급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 8월 25일에 제6근위군 사령관 명의로 내려진 명령 제0125호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제22근위소총병군단이 전투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근위 대령 나가트킨은 참모장으로서의 임무를 전혀 수행하지 못했으며, 예하 사단 본부와의 연락도 취하지 못하여 전방 부대의 배치 상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군단 참모진은 전투에서 군단장을 보좌할 수가 없었다.”5)
이것은 제6근위군의 지휘를 복잡하게 만든 여러 요인 중 하나였다. 이 중에서 가장 문제였던 것은 7월 6일 무장친위대 기갑군단이 프로호롭카 방면으로 진격하면서 전선의 상황이 복잡해 진 것이었다. 전 지역이 개별적인 부대 단위로 분열되어 통제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 졌다. 제1전차군과 함께 오보얀 축선을 방어하고 있던 몇개의 소총병사단은 치스챠코프가 코체토브카 마을에 주지휘소를 세우고 직접 지휘했다. 리포븨이 도네츠Липовый Донец 강변에서 방어를 하고 있던 몇개 사단은 부사령관 라구틴П. Ф. Лагутин 소장이 사즈노에Сажное 마을에 보조지휘소를 세우고 지휘했다. 이 두 집단은 제1전차군과 제69군의 예하 부대로 인해 단절되어 사실상 독립적으로 작전을 했다. 이같은 상황에서 두 집단을 조율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으니 통신과 보급을 유지하는 문제는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일부 소총병사단, 예를 들어 제51근위소총병사단은 30km에 이르는 전선에 걸쳐 흩어져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제6근위군과 제1전차군이 긴밀하게 협력하여 작전을 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것은 불가능했다. 제6근위군과 제1전차군은 같은 지구에서 작전을 전개하면서 때로는 같은 참호를 쓰면서도 사단과 군단 사이는 물론 두 군사령부 간에도 효과적으로 작전을 조율하지 못하고 개별적으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제6근위군에 파견된 총참모부 소속의 한 장교는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제1전차군은 제6근위군의 전투 구역에서 작전을 전개하고 있다. 하지만 이 두 야전군은 지속적으로 정보를 공유하는 행동을 하지 않고 있다. 그 결과 보병부대와 전차부대의 협동작전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군사령부 작전참모처에 있는 지도에는 제1전차군 예하부대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지 않으며, 이때문에 인접 부대의 측익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고 있고 심지어는 무의미한 손실마저 발생하는 지경이다.”6)
바투틴은 이러한 문제점을 파악하고 있었지만 이에 대한 평가는 전투가 끝난 뒤에 했다. 바투틴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매우 비판적으로 평가했는데 이것은 제5근위전차군 사령관을 맡았었던 로트미스트로프의 회고록에 실려있다. “우리 사령부, 무엇보다도 나는 반격을 구상하지 말고 적의 우월한 기갑 부대를 격퇴하는 것만을 생각했어야 했습니다…. 러시아 속담에는 이런 말이 있지요. “일곱번 재 본 다음 한번에 잘라라” 하지만 우리의 문제는 판단을 할 만큼 충분한 시간이 없었다는데 있었습니다. 상황이 너무 급박하게 전개되어 정신을 가다듬을 수 조차 없었습니다. 적군은 제2방어선을 위협하고 있었고 멈추지 않고 방어선을 뚫어 버릴 것 처럼 보였습니다.”7)
대규모의 전역이나 전투에 대해 평가할 때는 인적 요소를 고려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런 극한의 상황에서 바투틴의 입장이 어땠는가를 이해해야 한다. 한쪽에서는 적의 강력한 기갑부대가 보로네지 전선군의 방어선을 두들기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최고사령부는 물론 스탈린이 직접 바투틴에게 그가 전선군 사령관으로서 적을 저지할 수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적을 저지하지 못하고 있다며 질책하고 있었다. 사실 바투틴은 이상적인 장군상과는 거리가 있는 인물이었다. 현명하고 탁월한 식견을 갖추었으며 강철과 같은 의지를 가졌다는 인상은 전쟁이 끝난 뒤 소련의 대중매체에 의해 만들어진 것 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바투틴은 매우 산만한 사람이었다. 바투틴은 언제나 그의 행동이 가져올 결과를 예상하고 움직이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실수를 저지르고 미래에 대해 확신을 하지 못하며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불행히도 전선군 사령관이 실수를 저지르는 것은 다른 장군들이 실수를 저지르는 것과 비교할 수가 없었다. 수만명의 목숨과 운명이 달려있었다. 바투틴이 수년간 참모업무를 통해 얻은 경험은 그의 성격과 지휘 방식에 영향을 끼쳤다. 바투틴은 가끔 그의 참모들이 해야 할 업무 중 상당량을 직접 처리하기도 했으며 일선 부대를 직접 지휘하는 것을 무시하는 일도 있었다.
“로코소프스키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나는 간혹 바투틴의 업무 방식에 놀라곤 했다. 바투틴은 지시사항이나 명령문의 문구를 직접 수정했으며 직접 전화를 걸거나 전문을 보내 야전군이나 사령부와 대화했다. 참모장은 어디에 뒀단 말인가? 나는 마을 한 구석에서 보골류고프 장군을 찾아내 그에게 어째서 전선군 사령관이 참모 업무를 직접 담당하고 있는 것이냐고 물었다. 보골류고프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대답했다. 바투틴은 모든 업무를 직접 담당한다는 것이었다.”8)
바투틴은 쿠르스크 전투 당시에도 거의 이렇게 업무를 처리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상황이 달랐고 바투틴을 도와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쿠르스크 전투에서 바투틴은 사실상 그를 보좌할 사람이 없었다. 전선군 군사위원회 위원 흐루쇼프나 부사령관 아파나셴코Иосиф Родионович Афанасенко는 그런 역할을 할 수 없었다. 아파나셴코는 대장 계급을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업무에 숙달되지 않은 상태였다. 참모장 이바노프 중장은 경험이 매우 많았지만 7월 6일에 스탈린의 명령으로 제69군 사령관을 돕기 위해 전출되었다. 물론 총참모부에 있을 당시 바투틴과 가깝게 지냈던 바실레프스키 소련방 원수는 독일군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고 보로네지 전선군에 필요한 예비대를 확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었겠지만 바투틴이 담당하고 있는 방대한 업무까지는 어떻게 해 줄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언급한 모든 문제점들은 중요한 것이긴 했지만 전투 초기의 수일간 보로네지 전선군에 독일군의 공격을 어떻게 막아낼 것인지 결정하는 데에 전선군 사령관의 리더쉽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새로 발굴된 문서들은 7월 6일 바투틴이 남부집단군의 공격부대들을 격퇴하기 위해 반격을 실시하기로 결심한 것은 상황을 합리적으로 판단한 결과가 아니라 감정적으로 과잉반응한 것이었지만 그 다음인 7월 7일과 8일에 계획한 반격 준비는 바투틴에게 강요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바투틴은 보로네지 전선군의 역량이 가진 한계를 절감하고 있었지만 최고사령부의 실수로 인해 다른 선택을 할 여지가 없었다. 한편 중부전선군 사령관 로코소프스키는 바투틴과 같은 행동을 취했다. 로코소프스키는 7월 6일에 제13군과 그 우익에 인접한 제70군의 방어선에 뚫린 돌파구를 최소화 하려고 노력했다. 로코소프스키는 이것이 실패하자 즉시 전술을 바꿨다. 쿠르스크 전투를 다룬 연구에서는 이것을 로코소프스키가 군사적으로 뛰어난 능력을 갖추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인용하고는 한다. 하지만 이런 편향적인 분석은 보로네지전선군과 중부전선군의 전력차를 염두에 두지 않고 있다.
중부전선군의 상황을 개략적으로 살펴보자. 치타텔레 작전의 첫째날 독일 중부집단군의 돌격집단인 제9군 소속의 기갑군단들은 제13군과 제70군의 제1방어선을 돌파하여 8~12km를 진격하였다. 제13군의 제17근위소총병군단과 제2전차군(16, 19전차군단, 제11근위전차여단)은 상황을 호전시키기 위해 반격을 감행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제16전차군단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으며 예하의 제107전차여단만 하더라도 전차 50대 중 46대를 잃었다. 제16전차군단장 그리고레프Василий Ефимович Григорьев 소장은 공격을 중지하고 전선군 사령부에 보고했다. 전차 지원이 없어져서 본다레프Андрей Леонтьевич бондарев 중장의 제17근위소총병군단은 방어를 취할 수 밖에 없었다. 상황을 분석한 뒤 다음과 같은 명령이 하달되었다. “전차를 전차호에 넣고 보병을 지원하기 위해 화력지원을 하라. 전차부대는 적의 보병과 경전차가 상대일 때 이들이 포격에 와해된 이후 반격을 허용한다.”9)
로코소프스키가 이 상황에서 올바른 결정을 내렸던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중부전선군이 보로네지 전선군에 비해 야포와 박격포와 같은 필요한 수단이 더 많았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앞서 언급한 것 처럼 총참모부는 독일군의 주공이 중부전선군에 가해질 것이라고 잘못 판단했기 때문에 로코소프스키는 1,000문의 야포와 방사포를 보유한 3개 포병사단으로 편성된 제4포병군단과 같은 강력한 증원을 받은 반면 바투틴은 250대의 전차를 지원받는데 그쳤다. 이것은 불공평한 것이었다. 그결과 쿠르스크 전투가 시작되기 전 보로네지 전선군은 대공포를 제외하고 4,012문의 야포와 4,539문의 박격포(82mm와 120mm)를 보유한 데 비해10) 중부전선군은 5,213문의 야포와 5,512문의 박격포를 보유하고 있었다.11) 총사령부가 잘못 판단한 것이 확실해 졌을 때 쿠르스크 돌출부 남쪽 전선에는 포병군단 대신 포병전력이 부족한 제2, 10전차군단의 2개 기동 군단이 증원됐다. 이 때문에 바투틴과 로코소프스키는 충분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그들이 가진 수단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제13군 사령관은 전차를 동반한 반격을 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은 제17근위소총병군단에 제1근위포병사단, 제378대전차포연대, 제237전차연대를 지원했다. 본다레프 장군은 이같은 강력한 지원에 힘입어 전차를 반격에 투입하지 않고도 방어선을 지킬 수 있었다.
역사책들을 보면 쿠르스크 전투의 둘째날에 총사령부의 예비대가 보로네지전선군을 지원하기 위해 투입된 반면 중부전선군은 아무런 도움 없이 방어전을 치렀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바투틴은 중부전선군 보다 더 강력한 적의 공격에 맞서 7월 8일 오후까지 3일간에 걸쳐 보로네지전선군의 병력만 가지고 싸웠다. 남서전선군에 있던 제2전차군단이 보로네지전선군에 도착한 것은 7월 8일 오후 2시였으며, 제10전차군단은 7월 9일 오후에야 투입되었다. 제5근위군은 7월 11일 오전에야 전투에 돌입했으며, 제5근위전차군은 하루 늦은 7월 12일 오전에 투입되었다.
적이 새로운 부대로 공격을 개시한 가장 힘든 시점에 니콜라이 페도로비치 바투틴은 그가 보유한 병력만으로 상황을 통제할 수 있었으며 방어선의 이점을 활용하여 예하 부대의 기동을 훌륭히 해냈다. 바투틴은 제한적인 전력만을 가지고 다른 어떤 상대도 아닌 유럽 최강의 군대를 상대로 싸운 것이었다.
주석
1) 원문: низкое уровне профессиональной подготовки и оперативного кругозора...
2) Отдел бронетанковых и механизированных войск (БТ и ТВ)
3) управление БТ и ТВ фронта
4) САМО РФ, ф.203, оп.2843, д.520, л.20
5) САМО РФ, ф.1207, оп.1, д.138, л.150
6) САМО РФ, ф.355, оп.5113, д.235, л.53
7) Ротмистров П.А. Стальная гвардиия. М., Воениздат. 1984. С. 204
8) К. К. Рокоссовский. Солдатский долг. М., Воениздат. 1997. с. 304–306
9) Г. А. Колтунов, В. Г. Соловьёв. Курская битва. М., Воениздат. 1970. с. 118
10) Ibid., p.53.
11) Ibid., p.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