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13일 금요일

2009년 11월 10일 화요일

박정희 시대의 재평가

오늘은 오전에 예정된 일이 일찍 끝나서 오후시간이 비게 됐습니다. 비는 시간을 이용하여 한겨레 신문사가 주최한 '박정희 시대의 재평가'라는 학술 토론회에 다녀왔습니다.

주최측의 이름에서 짐작하셨겠지만 이 토론회는 '진보진영'이 어떻게 하면 박정희를 극복할 수 있겠느냐가 주된 화두였습니다. 김대중, 노무현 두 정부를 통틀어 박정희 신화를 잠재우는 것은 완전히 실패했고 오히려 그 신화 덕분에 이명박 같은 3류 짝퉁에게 정권을 넘겨주는 재앙까지 겪고 있으니 '진보진영'이 박정희의 유산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겠습니다.

그러나 오늘 있었던 토론회는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았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토론회 자체를 급히 준비한 것인지 발표자들, 특히 정치분야 발표자들이 발표 당일까지도 발표문을 완성하지 못해 발표장에서 별도로 출력해 제공했다는 점 입니다. 특히 1부의 마지막 발표를 맡은 박명림 교수의 경우는 발표문이 부족하게 복사되어 발표문을 받지 못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또한 책자로 배부된 발표문도 오탈자가 더러 있었는데 역시나 토론회를 급히 준비하느라 책자를 교정할 시간도 부족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경제분야의 발표는 그런 대로 나쁘지 않았지만 정치분야의 발표는 신통치 않은 글이 있었고 전반적으로 만족스럽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주최측(한국경제정책연구회, 한겨레신문사)이나 후원측(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의 성격상 박정희 정권기의 문제점을 집중적으로 부각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이런 점은 사회자들의 발언에서 잘 드러났는데 특히 함세웅 신부의 발언은 지나치게 종교적이고 흑백논리로 점철되어 박정희를 좋아하지 않는 입장임에도 듣는 내내 불편했습니다. 저는 박정희에 대해 비교적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입장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박정희=절대악'이라는 공식은 절대 동의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반한나라당의 입장에서 박정희와 그 유산은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단순히 선악의 이분법으로 접근하는 것이 박정희를 극복하는데 무슨 도움이 될지 의문입니다. 이런 단순한 논리는 반한나라당 진영을 결속시키는데는 많은 도움이 되겠지만 회색지대에 있는 다수의 대중을 끌어들이는데는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소한 단기적으로는 말이지요. 현재와 같은 방식의 박정희에 대한 공격은 장기적으로 지속되면서 영향력을 넓혀갈 경우 꽤 괜찮은 성과를 거두겠지만 단기적으로는 큰 도움이 안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장 유력한 차기 대통령 후보로 박근혜가 꼽히고 있는 만큼 반한나라당 진영이 위기의식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겠습니다만 그렇다 해도 이런식의 단순한 공격이 단기적으로 효과를 볼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이제는 60~70년대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 지는 만큼 박정희에 대한 평가도 조금씩 바뀔 것이고 그를 둘러싼 신화도 상당부분 불식될 것 입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박정희가 남긴 유산, 특히 박근혜에게 계승된 정치적 자산이 단시일내에 쉽게 허물어질 것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반한나라당 진영은 박정희 때리기를 부차적인 일로 미뤄두고 중간지대를 장악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는것이 더 유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박정희 문제가 4대강 사업과 같이 현실의 시급한 문제들을 덮어버리는 것은 별로 환영할 만한 일이 아닌것 같습니다.

물론, 박정희 문제가 아주 먹음직스러운 떡밥이라는점은 분명합니다.

2009년 11월 8일 일요일

'비문명화된' 사회의 전쟁으로 인한 사망률

漁夫님이 지난 4일에 쓰셨던 '20세기 최악의 기록들; 독재자'와 관련된 내용입니다.

漁 夫이 언급하셨듯 집단의 규모가 크지 않은 부족단위 사회에서는 폭력으로 인한 사망률이 매우 높으며 특히 남성의 경우는 정도가 더 심합니다. 제가 자주 인용하는 Lawrence H. Keeley의 'War before Civilization : The Myth of the Peaceful Savage'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한 단락을 할애해 설명하고 있으니 Keely의 이야기를 한 번 소개해 보지요.

Keely의 설명에 따르면 전쟁으로 인한 사망률을 통계화 할 경우 미국이나 유럽 등의 '문명화된' 사회보다 '비문명화된' 사회의 경우가 압도적으로 높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19세기 프랑스에서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인구 손실은 전체 인구의 2.5%를 약간 웃도는 수준이지만 야노마뫼(Yanomamo)족의 경우 20%를 거뜬히 넘어가며 히바로(Jivaro)족의 경우는 30%를 넘어간다고 합니다. 게다가 직접 전투에 참여하는 성인남성의 경우는 수치가 더 높아지는데 야노마뫼족은 전쟁의 직간접적인 영향으로 전체 남성의 40% 가량이 사망하며 히바로족은 그 비율이 거의 60%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이외에 Keely가 인용한 인류학자들의 조사 결과를 보면 비교대상으로 선정한 '문명화된' 사회와 '비문명화된' 사회의 통계에서 대부분의 '비문명화된' 사회가 '문명화된' 사회를 전쟁으로 인한 사망률에서 압도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Keely는 비록 부족단계의 '비문명화된' 사회의 전쟁은 '문명화된' 사회의 전쟁에 비해 사망자의 숫자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지만 전쟁이 발생하는 빈도가 압도적으로 높으며 이밖에 복수 등의 동기에서 개인 단위의 습격이나 살인도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이 높은 사망률의 원인이라고 지적합니다. 또한 전쟁에 동원되는 남성의 비율도 극단적으로 높으며 교전 상대방에 대한 '(우리의 기준으로는) 잔혹한' 대우 등 사망률을 높이는 요인이 많습니다. 여기에 사망자의 숫자가 적지만 그만큼 사회의 규모도 작아서 한번 피해를 입으면 회복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예를들어 뉴기니아의 한 작은 부족은 결혼한 성인남성이 총22명이었는데 4개월 반의 전투를 겪은 뒤 결혼한 성인남성의 '27%'에 해당하는 여섯명의 남성이 전사하고 여덟명의 남성은 부족에서 이탈해 도망쳐 버렸다고 합니다. 결혼한 성인 남성 22명 중 14명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으니 부족은 엄청난 타격을 받은 셈이지요.

몇몇 사례들을 보면 우리의 사회에서는 말로 해결될 것도 창과 활이 동원되고 있으니 사망률이 높을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록 현대의 문명사회가 살인 기술에 있어 훨씬 효율적이지만 폭력을 사회적 제도로 억제하고 있는 까닭에 전체 사망률에서는 비문명화된 사회보다 낮은 경향이 나타납니다. 물론 문명사회의 경우 한번 폭력을 사용하면 그 피해는 어마어마한 수준이 되긴 합니다만;;;;;

2차대전 중 루마니아의 Volksdeutsche

2차대전 당시 독일계 외국인(Volksdeutsche)은 독일의 전쟁 수행에 있어 제법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예전에 소개했던 베그너(Bernd Wegner)의 연구에 나타난 것 처럼 무장친위대의 몇몇 사단들은 병력의 상당수를 이러한 독일계 외국인으로 충당하고 있었지요. 독일계 외국인은 독일 국방군(Wehrmacht)에도 상당수가 복무했지만 역시 이들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은 무장친위대였습니다. 히믈러는 이미 전쟁 이전부터 이런 독일계 외국인을 친위대로 받아들이기 위해 다양한 방안을 강구하고 있었고 전쟁 이전에 대략 1,500명의 주데텐(Sudeten) 독일인이 일반친위대(Allgemeine SS)에 입대한 상태였습니다.1) 2차대전의 발발로 독일은 동유럽의 점령지와 동맹국에 거주하는 독일계 외국인을 전쟁에 동원하는 것은 더욱 가속화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외국계 독일인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루마니아계 독일인이었으며 무장친위대에 '자원입대'한 인원은 6만3천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한 연구는 2차대전 기간 중 친위대 조직에 소속된 루마니아계 독일인의 숫자는 63,000명에서 65,000명 내외로 추정하고 있습니다.2)

물론 1943년 이전까지는 루마니아계 독일인이 독일군에 입대하는 것이 불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전쟁 이전부터 독일계 루마니아인이 개별적으로 무장친위대에 입대하는 사례는 있었습니다. 1938년 1월에는 안드레아스 프리드리히(Andreas Friedrich)라는 독일계 루마니아인이 SS-VT에 입대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독일이 소련 침공을 준비하면서 보다 조직적인 모병운동이 시작됩니다. 안드레아스 슈미트(Andreas Schmidt)가 이끄는 루마니아의 독일인 나치당 조직(NSDAP der Deutschen Volksgruppe in Rumanien)은 1940년 말 부터 비밀리에 무장친위대 입대자를 모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비밀 모병을 담당한 것은 루마니아 독일인 나치당의 하부 조직인 루마니아 독일 청소년연맹(Deutsche Jugendbund in Rumanien, 이하 DJR로 약칭)이었습니다. 루마니아계 독일인이 무장친위대에 대규모로 입대한 것은 1941년 4월 다스 라이히(Das Reich) 사단에 600명이 입대한 것이 시작이었습니다.3) 이때 모병된 루마니아계 독일인들은 총 4개 중대로 구성된 야전훈련병대대(Feldrekruten-Bataillon)로 편성되어 빈(Wien) 근교의 병영에 배치되었습니다. 이 대대의 지휘관은 당시 막 SS소령(SS-Sturmbannführer)으로 진급한 하인츠 하르멜(Heinz Harmel) 이었습니다.4)

그러나 1941년 초 상당한 규모로 이루어진 무장친위대의 비밀모병은 독소전쟁 발발과 함께 차질을 빚게 됩니다. 루마니아는 독일군의 편으로 전쟁에 참전했고 국가적 동원태세를 취하면서 루마니아 시민인 독일계도 동원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 명의 병력도 아쉬운 총력전 하에서 외국군대에 자국 국민을 빼앗기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 이었으며 루마니아 정부는 그동안 묵인하던 친위대의 비밀모병을 중단시키려 합니다. 독일 정부 또한 동부전선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동맹국의 비위를 상하게 할 필요는 없었으며 이에 따라 1941년 11월 13일 친위대 모병국(SS-Ergänzungsamt)은 독일계 루마니아인의 무장친위대 입대를 금지시킵니다.5)

그러나 공식적인 금지에도 불구하고 1942년 프린츠 오이겐(Prinz Eugen) 사단을 창설하면서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의 독일계 주민의 부족으로 편성에 차질이 발생했기 때문에 친위대 측은 독일계 루마니아인을 모병하려는 시도를 계속합니다. 이때 대상이 된 것은 루마니아와 유고슬라비아 접경지대인 Banat 지방의 독일계 루마니아인이었습니다. 프린츠 오이겐 사단장인 아르투어 플렙스(Artur Phleps)는 상부의 금지명령에도 불구하고 독일계 루마니아인 보충병을 사단내에 받아들였기 때문에 이것은 결국 루마니아와의 외교적 문제로 비화되었습니다.6) 여기에 1942년 초 동부전선의 니콜라예프에서는 무장친위대가 루마니아군 부대에서 탈영한 독일계 루마니아인 150여명을 보충병으로 모집해 루마니아 정부가 송환요구를 하고 있었습니다.7) 결국은 루마니아 정부가 프린츠 오이겐 사단과 무장친위대에 입대한 루마니아군 탈영병들의 송환 요구를 중단하는 것으로 끝나기는 했으나 루마니아 정부는 독일측의 횡포에 큰 불만을 가지게 됩니다.

※ 루마니아 정부의 불만은 결국 1943년 부터 루마니아가 독일군에 입대한 독일계 루마니아인들의 탈영 공작을 하도록 만듭니다.8)

어쨌든 무장친위대의 확장을 꿈꾸던 히믈러에게 남동부 유럽에 거주하던 수많은 독일계 주민의 존재는 탐스러운 꿀단지(???)라 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1943년 5월 루마니아 정부는 독일의 압력에 따라 17세 이상의 '독일계 루마니아인'이 독일 국방군 또는 무장친위대에 입대하더라도 시민권을 유지할 수 있다는 법안을 통과시키게 됩니다.9) 이것은 히믈러가 1941년 말 이래로 구상하고 있던 독일계 외국인의 대규모 모병을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히믈러는 1943년 초 독일계 헝가리인 5만명, 독일계 루마니아인 2~3만명을 모병할 계획을 세웠는데 실제로는 독일계 헝가리인은 2만명이 모집된 데 비해 독일계 루마니아인은 예상을 뛰어넘는 5만명이 모집됩니다.10) 이렇게 대규모로 모병된 독일계 루마니아인들은 당시 새로 편성되거나 재편성되는 무장친위대 부대의 강화에 기여하게 됩니다. 대표적인 것이 친위대 제3기갑군단과 그 예하의 노르트란트(Nordland) 사단과 네더란트(Nederland) 여단이었습니다. 이 군단의 1944년 3월 경의 병력현황을 살펴보면 총 병력의 44.5%가 독일계 외국인이며 특히 사병의 경우는 독일계 외국인의 비중이 53.1%에 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독일계 외국인의 대부분은 1943년에 대규모로 모집된 독일계 루마니아인 이었습니다.11)

※ 친위대 제3기갑군단의 출신지별 병력현황은 이 글을 참고하십시오.

그리고 친위대 제3기갑군단 다음으로 1943년도에 모집된 독일계 루마니아인이 대규모로 배치된 부대는 바로 위에서 언급한 외교적 마찰을 불러일으킨 프린츠 오이겐 사단이었습니다. 이 사단에 배치된 독일계 루마니아인은 가장 많았을 때는 7,609명에 달했다고 하니 사실상 사단의 주력이었던 셈 입니다.12) 이 사단의 독일계 루마니아인 신병에 대한 처우는 신통치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여기에다 사단내의 본토 독일인들은 독일계 루마니아인들을 왈라키아인(Walach, 마치 일본인들이 조선이라는 지명을 비하하는 뜻으로 사용한 것 처럼)이라고 부르면서 깔보는 경우도 꽤 많았다고 합니다. 사단의 신병훈련은 첫 10일간은 오전 6시에 기상해 기상하자 마자 바로 1km 구보를 한 뒤 30분간 세면과 오전식사를 마치고 바로 7시 부터 12시까지 훈련, 그리고 1시간 동안 점심식사와 휴식을 취한뒤 다시 1시 부터 5시까지 훈련을 하는 일정이 이어졌다고 합니다. 1943년에 프린츠 오이겐 사단에 입대한 독일계 루마니아인 병사들은 입대 초기의 훈련 일정을 견디지 못하고 탈영하는 사례가 꽤 많았다고 하는데 대부분은 루마니아까지 돌아가기 보다는 도중에 붙잡히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니 이것도 비극은 비극이지요.

1943년에 모집된 독일계 루마니아인의 대부분은 위에서 언급한 부대에 배치되었지만 그 외에도 상당수는 1943년에 신규편성되거나 개편된 부대들에 배치되었습니다. 약 17,000명 정도의 독일계 루마니아인이 무장친위대의 제9, 10기갑사단과 제16, 17기갑척탄병 사단에 배치되었습니다.13) 이들 독일계 루마니아인들은 전쟁 말기에 무장친위대의 핵심적인 부대들에 배치된 까닭에 수많은 희생을 치렀으며 전쟁 기간 중 무장친위대에 배속된 독일계 루마니아인 중 약 8,000명에서 9,000명 정도가 전사한 것으로 추정됩니다.14)



1) Daugherty III., Leo J, 'The Volksdeutsche and Hitler's War',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Vol.8 No.2(June 1995), p.300
2) Milata., Paul, Zwischen Hitler, Stalin und Antonescu : Rumäniendeutsche in der Waffen-SS, Böhlau Verlag, 2007, s.297
3) Milata., s.112
4) Weidinger., Otto, Division Das Reich Bd.II, Munin Verlag, 1983(3.Auflage), s.350
5) Milata., s.113
6) Milata., ss.116~117
7) Milata., s.128
8) Daugherty III., p.306
9) Daugherty III., p.305
10) Milata., s.176
11) Wegner., Bernd, 'Auf dem Wege zur pangermanischen Armee. Dokumente zur Entstehungsgeschichte des III.(Germanischen) SS-Panzerkorps', Militärgeschichtliche Mitteilungen 49/2(1980), s.111
12) Milata., s.241
12) Milata., s.259
12) Milata., s.2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