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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0월 5일 화요일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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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3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4

이전 글에서 소개한 테렌스 홈즈의 “The Reluctant March on Paris: A Reply to Terence Zuber's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는 테렌스 주버의 충격적인 주장에 대해 전통적인 학설을 보완하면서 지지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글에서 주버의 재반론을 소개하기 전에  홈즈의 주장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슐리펜이 파리를 우회 포위하는 계획을 완성한 것은 그가 퇴임하기 직전이었고 그때문에 그 이전의 훈련에는 이러한 요소가 반영되지 않았다. 그리고 슐리펜이 실시한 각종 훈련을 분석하면 이러한 결정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주버는 슐리펜계획의 핵심이 파리를 우회 포위하는 것에 있다고 잘못 해석했기 때문에 사료를 오독하게 된 것이다.

주버는 자신의 주장에 대한 본격적인 반론을 접하자 곧바로 반격에 나섭니다. 주버는 War In History 8-4호에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반박문을 기고합니다.(이 논문은 좀 짧습니다) 주버는 먼저 “우익으로 파리를 우회 포위하는 기동”은 “슐리펜계획의 핵심적인 요소”라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1905년 비망록”에 따르면 우익의 주공에는 당시 존재하지 않던 24개 사단을 포함해 총 82개 사단이 배치되었으며 소 몰트케가 1914년에 실행한 계획에서도 우익에는 54개 사단이 배치되는데 그쳤다고 강조합니다. 홈즈는 “The Reluctant March on Paris: A Reply to Terence Zuber's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에서 “1905년 비망록”에 존재하지 않던 부대들이 포함되어 있는 이유가 장래에 편성될 부대들을 고려한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주버는 이런 설명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비판합니다.

그리고 슐리펜이 러일전쟁의 결과 러시아군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게 되었다고 지적한 것에 대해서는 기존의 주장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독일 정보기관에서는 러일전쟁 이후에도 러시아가 동프로이센에 25개 사단을 투입할 능력이 있다고 평가하고 있었다는 점 입니다. 그리고 루덴도르프와 그뢰너 등 슐리펜의 계획을 잘 알고 있던 인물들은 슐리펜의 마지막 전쟁계획인 1905-06년 계획에서 동부에 10개 사단을 배치했다고 회고했는데 주버는 이것이 (서부전선에 대한) 부대전개계획 I 에서 일관되게 명시된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다음으로는 1904년의 첫번째 참모부연습에 대한 홈즈의 해석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주버는 홈즈가 1904년의 첫번째 참모부연습에 대한 원사료를 분석하지 않고 1938년에 집필된 쵤너의 연구에 의존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또한 홈즈는 슐리펜이 1904년의 첫번째 참모부연습의 결과 우익을 보다 강화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주장하는데 왜 이런 해석을 하는지 설득력있는 설명을 못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그리고 1904년의 두번째 참모부연습에 대한 홈즈의 해석은 1904년의 두번째 참모부연습과 1905년의 참모부연습에서 상정한 상황을 혼동한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1905년 참모부연습에서는 독일군의 우익이 벨기에로 돌입하기는 했으나 북프랑스까지 진입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슐리펜계획”과 동일한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주버는 1905년 참모부연습과 “슐리펜계획”을 관련시키는 것이 “제법 대단한 상상력(quite remarkable powers of imagination)”이라고 조롱하기까지 합니다.(;;;)

한편, 홈즈는 “The Reluctant March on Paris: A Reply to Terence Zuber's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에서 슐리펜이 1905년 11-12월에 실시한 워게임(Kriegsspiel)이 실제 작전계획, 즉 슐리펜계획과 동떨어진 일탈적인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주버는 여기에 대해서도 좀 신랄하게 조롱합니다. 즉 홈즈의 설명에 따른다면 슐리펜은 퇴임하기 직전에 너무나 무료해서 쓸데없는 워게임을 한게 된다는 겁니다.(;;;;) 주버는 슐리펜의 1905년 11-12월 워게임은 모로코 사태로 촉발된 긴박한 정세, 즉 독일이 영국-프랑스-러시아에 포위된 상태로 방어전쟁을 벌여야 할 수 도 있는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주버는 자신이 주사료로 사용한 디크만의 원고를 홈즈가 무시하는 점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디크만의 원고는 슐리펜의 구상이 어떻게 발전해 나갔는지를 잘 보여주는 자료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슐리펜 퇴임이후에 대한 홈즈의 해석도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주버는 소몰트케가 1906년과 1908년에 실시한 참모부연습은 슐리펜의 1904년 참모부연습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라고 거듭 강조하면서 만약 홈즈의 해석을 따르게 된다면 소몰트케는 진짜 전쟁계획은 놔두고 우발계획만 연습한 것이 된다는 것이죠.
홈즈는 “The Reluctant March on Paris: A Reply to Terence Zuber's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에서 소몰트케가 슐리펜계획에 다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 1911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주버는 이에 대해 홈즈의 설명을 따를 경우 소몰트케는 프랑스군의 주력이 아르덴느로 공격해오는 상황에서 우익이 벨기에를 거쳐 북프랑스로 진격하는 양상이 된다고 지적합니다. 즉 프랑스군의 주력을 우회기동으로 포위하는게 아니라 벨기에에서 정면으로 격돌하는 양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1905년 비망록”에 포함된 지도들은 파리 서쪽으로의 우회기동을 보여주고 있는데 홈즈의 설명에 따르면 독일군의 주공이 파리와 베르덩 사이로 우회하게 되는 등 모순이 있다고 비판합니다. 게다가 1911년의 시점에서도 독일군의 실제 병력은 “슐리펜계획”을 실행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사실도 함께 강조합니다. 또 소몰트케는 우익과 좌익의 병력비를 7:1에서 3:1수준으로 조정했는데 이것은 “슐리펜계획”이 실제 작전계획이라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조치라고 봅니다.

주버는 마지막으로 1차대전 초기 독일 제1군의 기동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을 비판합니다. 독일 제1군은 5개 군단으로 편성되어 있었는데 “슐리펜계획”에 명시된 것과 같은 파리 서부로의 우회기동에는 13개 군단이 필요하다는 것 입니다. 불과 5개 군단으로는 파리 서부로 우회할 경우 넓어지는 전선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이 주버의 설명입니다. 주버는 1차대전 초기 독일 제1군의 기동은 단지 센강 하구 지역을 방어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합니다.

2010년 9월 20일 월요일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3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0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1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2


예고편을 올렸을 때 천천히 연재하겠다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제가 생각하기에도 너무 천천히 올리고 있군요;;;; 타고난 게으름은 어쩔 수가 없어서 말입니다.^^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3
: 테렌스 홈즈의 첫 번째 반론


테렌스 주버의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로 논쟁의 막이 오르자 군사사연구자들은 기존의 학설을 완전히 뒤엎는 파격적인 주장에 다양한 반응을 보입니다. 전통적인 학설, 즉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이 실제 작전계획이라는 주장을 지지하는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주버의 주장에 반대했습니다. 주버에 대한 본격적인 반론은 테렌스 홈즈(Terence M. Holmes)가 시작했습니다. 홈즈는 주버가 논문을 발표했던 War in History 8권 2호(2001)에 The Reluctant March on Paris: A Reply to Terence Zuber’s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란 제목의 반박논문을 기고합니다.

이 반박논문은 핵심인 1905년 비망록에 대해서는 주버의 분석이 부족하다고 주장합니다. 홈즈는 이 논문에서 주버의 주장은 참신하지만 근본적으로 1905년 비망록 자체에 대한 고찰이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참모부연습과 부대전개계획 등에 대한 상세한 분석은 훌륭하지만 정작 주사료가 되어야 할 1905년 비망록에 대한 분석이 크게 부족했다는 것 이지요. 홈즈는 슐리펜이 실시한 여러 연습에서 파리를 우회 포위하는 내용이 없기 때문에 1905년 비망록을 작전계획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주버의 주장에 대해 슐리펜이 가장 우선시 한 것은 적의 주력을 ‘어떤 곳에서 상대하건 간에’ 포위 섬멸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파리를 우회하여 포위’하는 것은 중요한 요소가 아니라고 봅니다. 또한 소(小)몰트케가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았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또한 1905년 비망록에 명시된 병력부족문제에 대해서도 주버와는 반대로 설명합니다. 주버는 1905년 비망록에 나타난 대규모 포위기동을 실시하기에는 병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이것이 실제 작전과는 거리가 먼 것이라고 해석한 반면 홈즈는 슐리펜은 실제 파리를 우회 포위하는 작전을 구상했는데 이 과정에서 병력부족 문제가 심각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병력 증강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 문제를 지적한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다음으로는 조금더 구체적인 부분으로 들어가서 비판을 시작합니다.
홈즈는 러일전쟁 이후 러시아군에 대한 평가도 주버가 잘못 해석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주버는 전통적인 학설에서 러일전쟁의 결과 러시아를 과소평가하게 된 슐리펜이 서부전선에 주력한다는 계획을 세웠다고 주장한 것을 독일군의 정보보고를 인용해 비판했는데 홈즈는 이에 대해 주버가 제한적인 사료를 확대해석하는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실제로 슐리펜이 러일전쟁을 계기로 러시아군의 공세능력을 낮게 평가하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료는  충분하다는 것 입니다.
홈즈는 슐리펜이 러시아군의 공세능력을 낮게 평가했기 때문에 프랑스에 대한 공세계획에 어려움을 느꼈다고 설명합니다. 주버가 첫 번째 논문에서 주장하는 것 처럼 프랑스군의 선제공격을 막아낸 뒤 반격하는 계획은 프랑스가 러시아와 양면공세를 펼칠때나 가능한 것 이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 없이 프랑스가 단독으로 선제공격을 걸어올 가능성은 없으니 슐리펜으로서는 독일측이 먼저 서부전선에서 전략적인 공세로 나서는 방향으로 선회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 입니다. 같은 내용을 가지고 주버와는 다른 해석을 하고 있죠. 홈즈는 근거로서 1905년 비망록이 프랑스의 국경지대 방어선에 대해 심도깊은 분석을 하고 있다는 점을 들고 있습니다. 즉 1905년 비망록은 변화된 전략환경에 대한 슐리펜의 고민이 그대로 반영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슐리펜이 퇴임직전 실시한 마지막 연습에서 러일전쟁의 교훈을 언급하면서 강력한 요새선에 대한 정면공격 대신 ‘적의 측면과 후방을 공격해 포위섬멸을 실시할 것’을 강조했다고 지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규모 우회기동으로 파리를 서쪽에서 포위하는 것은 주버가 설명한 대로 국경지대에서의 포위 섬멸이 불가능할 경우 취해야 할 ‘최악의 상황’이었던 것은 맞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홈즈는 주버가 슐리펜이 국경지대에서 반격을 통한 포위섬멸전에 집착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1905년 비망록에서 파리를 포위하는 결론에 이르게 된 과정을 완전히 생략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홈즈는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이 국경지대에서의 포위섬멸전을 강조하는 내용이라는 주버의 해석은 완전히 틀린 것이며 이 비망록의 핵심은 엔(Aisne)강 서안, 랭스(Rheims)에서 라 페레(La Fere)를 잇는 프랑스군의 방어선을 극복하는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슐리펜은 이 방어선의 좌익으로 우회하면 반드시 프랑스군을 붕괴시킬 수 있다고 보았던 것 입니다. 그리고 프랑스군이 이 방어선을 포기한다면 파리 동쪽의 방대한 지역이 독일군의 손에 떨어지기 때문에 독일군으로서는 매우 유리한 상황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만약 프랑스군이 엔강 서안의 방어선까지 포기하고 마른강과 세느강의 방어선으로 후퇴한다면 독일군으로서는 매우 골치아픈 상황이 발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경우 파리라는 대도시가 이 방어선의 좌익에 강력한 보루로서 자리잡게 됩니다. 이러한 ‘최악의 상황’에 직면할 경우 유일한 대안은 파리의 서쪽으로 대규모 우회기동을 하는 것 밖에 없었다는 것이 홈즈의 설명입니다. 즉 홈즈는 파리 서쪽으로의 대규모 우회기동은 어디까지나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것으로 슐리펜도 이러한 상황은 가능한 피하길 원했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대규모 우회기동을 실시할 수 있도록 우익을 강화해야 한다고 보았다는 것 입니다.
1905년 비망록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분석하면 첫 번째 안에서는 ‘가능하다면’ 프랑스군의 주력을 파리 동쪽, 즉 랭스와 라 페레를 잇는 선에서 포위 섬멸할 것을 구상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홈즈는 슐리펜이 첫 번째 안에서도 ‘가능하다면’이라는 단서를 단 것 처럼 프랑스군 주력이 마른과 센강 서안으로 퇴각할 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떨치지 못했다고 봅니다. 그리고 다섯번째 안과 여섯번째 안에 이르면 파리를 우회포위하는 것을 확실하게 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홈즈는 다시 한번 주버가 제기한 문제 하나에 대해 답을 하려 합니다. 그렇다면 왜 이전까지의 각종 연습에서는 파리까지 진격하는 것이 실시되지 않았는가? 홈즈는 아주 명쾌한 대답을 내놓습니다. 슐리펜은 은퇴할 무렵이 되어서야 파리 서쪽으로 대규모 우회기동을 실시해야 한다는 생각을 굳혔으며 이것이 1905년 비망록에 반영되었다는 것 입니다.
주버는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에서 1905년 비망록에서 프랑스군이 로렌 방면으로 공세를 감행할 경우 독일군의 우익에 대해 매우 혼란스러운 서술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즉 우익의 공격을 계속하되 최대 진출선을 라 페레까지로 제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홈즈는 이에 대해 파리 서쪽으로 크게 우회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프랑스군이 단계적으로 철수할 경우를 가정한 것이기 때문에 프랑스군이 로렌 방면에 선제공격을 감행한다면 독일군 우익의 기동이 제한되는건 지극히 당연하다고 비판합니다. 슐리펜은 어디까지나 프랑스군 주력을 포착해 섬멸하는데 집중했기 때문에 프랑스군 주력이 어디있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파리를 우회하는 것은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오히려 중요한 점은 어디까지나 포위섬멸전의 주역이 독일군 우익이라는 것 입니다. 홈즈는 주버가 슐리펜 계획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다음으로는 주버가 1905년 비망록과 슐리펜이 재임중에 실시한 여러 연습간에 이질성을 강조하는데 대한 비판이 이어집니다.
주버는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에서 슐리펜이 동부전선에 주의를 기울였음을 강조했습니다. 주버는 슐리펜이 프랑스가 방어를 취할 경우에만 서부전선에서 선제공격을 고려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홈즈는 바로 이점을 지적합니다. 즉 러일전쟁의 결과 러시아군이 선제공격을 감행할 가능성은 줄어들었고 프랑스는 방어로 전환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 입니다. 홈즈는 앞서 주버가 러일전쟁 이후 러시아군의 능력에 대한 독일군의 평가에 대해 완전히 잘못 알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주버는 1904년 4월의 첫번째 참모부 연습은 ‘슐리펜 계획’과 유사한 점이 나타나지만 그렇지 않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슐리펜의 서부전선에 대한 작전개념은 어디까지나 그가 1897-98년에 작성한 비망록과 베셀러가 1900년에 작성한 작전연구에 나타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홈즈는 슐리펜의 1897-98년 비망록과 베셀러의 작전연구가 ‘슐리펜 계획’의 개념과 유사한 점은 주공인 우익을 베르덩 북쪽으로 돌파하게 한다는 점 말고는 없다고 비판합니다. 특히 우익의 규모가 작다는 점이 문제라고 봅니다. 1897-98년 비망록은 우익에 8개 군단을, 베셀러의 작전연구는 10~11개 군단을 배정하고 있는데 이것은 1905년 비망록에 명시한 우익의 규모와는 큰 차이를 보인다는 것 입니다. 홈즈는 슐리펜이 우익의 규모를 크게 강화하는 계기가 된 것은 1903년 4월 총참모부 철도국(Eisenbahnabteilung)의 국장이었던 슈탑(Hermann von Staabs)과의 회의에서 슈탑이 모젤 이북에 집결할 병력의 규모를 두배로 늘려야 한다는 건의를 한 이후라고 봅니다. 그리고 슐리펜은 1904년 4월의 첫번째 참모부연습에서 이 점을 명확히 했다고 강조합니다. 홈즈는 1903~1904년이 ‘슐리펜 계획’이 구체화 되는 결정적인 시기라고 보는 것 입니다.
홈즈는 이 시기에 정립된 기본 개념이 1904년과 1905년의 참모부연습과 1905년 비망록에 그대로 이어진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홈즈는 슐리펜이 1905년 참모부연습에서 우익이 최대한 진출해서 프랑스군이 어떠한 대응을 취해도 포위될 수 밖에 없도록 해야한다고 강조했음을 지적합니다. 특히 슐리펜은 1905년 참모부연습에서 독일군이 국경의 프랑스 방어선을 우회하더라도 그 후방에 있는 다른 방어선에 막힐 가능성을 강조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1905년 비망록에서 프랑스군이 파리라는 강력한 거점을 끼고 있는 방어선으로 후퇴할 가능성을 지적한 것과 이어지는 맥락으로  해석합니다.
계속해서 홈즈는 주버가 1904~1905년의 참모부연습과 1905년 비망록의 연관성을 부정하려는 것을 강하게 비판합니다. 주버는 1905년 비망록에서는 우익에 35.5개 군단을 배정하고 있지만 1904년의 첫번째 참모부연습에서는 우익에 17개 군단만을 배정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홈즈는 이에 대해 1904년 4월의 참모부연습에서는 우익이 약했기 때문에 슐리펜이 참모부연습이 끝난 뒤 최종논평에서 우익을 더 강화할 것을 강조했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프랑스군이 로렌 방면으로 공격할 경우 우익에 위치한 주력이 위기에 처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1905년의 참모부연습에서는 우익의 5개군을 베셀(Wesel)-디덴호펜(Diedenhofen) 일대에 집결하도록 했는데 이것은 1905년 비망록, 즉 슐리펜계획에 명시한 것과 거의 비슷하다고 주장합니다. 홈즈는 아헨-트리어 지구의 철도망이 증설되면서 슐리펜이 우익의 주력을 보다 더 북쪽으로 배치하게 됐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슐리펜은 메츠의 요새를 강화해서 우익의 측면을 더 강화하는 조치도 취하도록 했습니다. 홈즈는 이 결과 1905년 참모부연습을 실시할 무렵에는 병력, 부대집결지, 초기 목표 등에서 슐리펜계획의 윤곽이 잡히게 되었다고 봅니다.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에서 주버는 슐리펜이 1905년 참모부연습에서 실시한 세 차례의 워게임을 분석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세 차례의 워게임 모두 우익을 활용한 대규모 우회기동을 실시하지 못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홈즈는 이러한 주버의 해석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합니다. 프라이탁-로링호벤(Freiherr von Freytag-Loringhoven) 중령이 프랑스군을 맡아 실시한 첫 번째 연습에서는 독일군 우익의 포위기동에 의해 프랑스군 주력이 격파되었으며 쿨슈토이벤(von Steuben) 대령이 프랑스군을 맡은 세 번째 연습에서도 주버의 설명과는 달리 우익이 충분히 강력했다는 것 입니다. 홈즈는 단지 슈토이벤 대령이 프랑스군을 맡은 두 번째 연습에서만 슐리펜이 우익의 상당수를 로렌 방면으로 돌렸지만 이경우 조차 주력의 5개 군 중 2개군을 돌린데 불과했으며 우익에 남은 나머지 3개군은 주력이 빠진 프랑스군의 2선급 부대를 상대하는데 부족함이 없었다고 지적합니다. 홈즈는 이 연습에 대한 쵤너(Zoellner)의 논평은 슐리펜의 구상이 옳다는, 즉 프랑스군의 공세를 저지한 뒤 우익으로 공세를 감행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서술합니다. 그리고 같은 자료를 참조한 주버가 사료를 오독했다는 암시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슐리펜이 1905년 참모부연습에서 실시한 두 번째 워게임에서 프랑스군 주력이 로렌을 공격해 올 경우 우익의 일부 병력을 돌린 것이 부적절한 결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1905년 비망록’에서는 프랑스군이 로렌을 공격할 경우 우익은 지체없이 공세에 나서도록 했다고 이야기합니다.
1905년 11~12월에 실시된 워게임에 대한 해석도 주버와는 다릅니다. 이 워게임은 동부와 서부 양쪽에서 전략방어를 취하는 것을 핵심으로 하고 있으며 슐리펜이 1905년 비망록, 즉 슐리펜계획을 작성하기 전에 실시한 마지막 연습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버는 이 워게임이야 말로 1905년 비망록이 작전계획이 아님을 보여주는 근거라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홈즈는 슐리펜이 1904년 이후 가지고 있었던 구상을 살펴본다면 1905년 겨울의 워게임이야 말로 슐리펜의 구상과는 동떨어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전통적인 해석에 따른다면 1905년 비망록에서 독일군의 병력이 파리를 우회 포위하기에 부족하다고 지적한 점도 쉽게 설명이 가능해 집니다. 주버는 슐리펜이 병력이 부족하다는 점을 언급한 것은 단지 독일군의 증강을 강조한 것에 불과하다고 설명하는 반면 홈즈는 이것을 말 그대로 대규모 우회기동을 위해 병력 증강을 강조한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 입니다.

그렇다면 왜 소(小) 몰트케는 총참모장에 취임한 직후 슐리펜으로 부터 넘겨받은 1905년 비망록에 명시된 것들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는가? 주버는 이 점에 주목해 1905년 비망록이 실제 작전계획이 아닐 것이라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이것은 확실히 설명하기 까다로운 문제지요.
홈즈는 소 몰트케는 프랑스군이 전략적 방어를 취할 것이라는 확신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총참모장에 취임한 이후 상당기간 슐리펜의 계획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봅니다. 이점은 1906년 참모부연습에서 프랑스군 주력이 로렌을 침공할 것이라는 가정을 한 것에서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소 몰트케가 이후 우익에 주력을 집중한 공세를 취하는 방향으로 선회한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홈즈는 소 몰트케 취임 이후 국경지대, 특히 메츠의 요새를 강화하면서 프랑스 내에서 로렌을 공격하는 것이 어렵다는 의견이 강해졌다는데 주목합니다. 그리고 독일 내에서도 이런 환경에서는 프랑스가 선제공격을 감행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확산되었고 프랑스가 공격을 감행한다면 베르덩 북쪽으로 주력을 집중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경우 우익에 주력을 집중한 독일군과 직접 격돌하게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홈즈는 결국 이 때문에 1911년에 소 몰트케가 그동안 회의적으로 생각했던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을 재검토하게 되었다고 봅니다.
여기서 홈즈는 소 몰트케가 1911년에 ‘1905년 비망록’을 재검토 했다는 주버의 해석은 옳다고 인정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것 말고는 주버의 해석이 틀렸다고 비판합니다. 홈즈는 주버가 ‘1905년 비망록’에 첨부된 지도 중에서 국경지대에서의 반격을 명시한 지도(1:800,000축적의 지도5와 지도5a)만을 주목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하지만 홈즈에 따르면 비망록에 첨부된 지도는 대부분 벨기에와 프랑스 북부를 통한 대규모 우회기동을 다루고 있습니다. 물론 프랑스군이 취할 것으로 예상되는 방책은 슐리펜이 비망록을 작성할 당시와는 달라졌기 때문에 소 몰트케의 대규모 우회기동은 슐리펜이 구상한 것과는 성격이 조금 달랐습니다. 슐리펜은 대규모 포위섬멸을 위해 우회기동을 구상한 반면 소 몰트케는 방어선을 버리고 퇴각하는 프랑스군을 추격하는 개념에서 우회기동에 주목했다고 보는 것 입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지도 3과 6에 대한 해석도 달라집니다. 주버는 지도3에 파리까지 도달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이 명시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들어 작전계획으로서의 미비함을 강조하는데 홈즈는 소 몰트케가 슐리펜의 계획을 재검토했을 때 파리까지 도달하는 시간은 중요하지 않게 생각했다고 주장합니다. 소 몰트케의 목표도 파리를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신속히 프랑스를 격파하고 서부전선의 병력을 돌려 러시아군을 상대하는 것 이었기 때문이라는 것 입니다.

홈즈가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는 것은 슐리펜계획의 핵심은 파리를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우익의 대규모 우회기동을 통해 프랑스군 주력을 섬멸하는데 있다는 것 입니다.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소 몰트케가 1914년 8월 전역에서 어떤 식으로 야전부대를 지휘했는지 살펴보고 있습니다. 소 몰트케는 1914년 8월 30일 독일 제2군이 생 캉탱 방면에서 반격을 받자 제1군과 2군에게 진격방향을 남서에서 남쪽으로 바꾸도록 했습니다. 프랑스군 주력이 파리로 퇴각하지 않고 반격으로 나왔기 때문에 이를 격파하는데 중점을 두었다는 것 입니다. 즉 홈즈는 실제 전역에서 파리를 점령하는 것은 부차적인 것이었으며 적 주력의 섬멸이 최우선이었음을 보여주려 합니다. 그리고 주버가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에서 슐리펜이 실시한 여러 연습과 ‘1905년 비망록’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슐리펜계획의 핵심이 무엇인지 올바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2010년 2월 5일 금요일

황군의 정신력은 세계 최강?!?!

쇼와(昭和) 15년(1940년), 지나 전선에서 혁혁한 공훈을 세우고 귀국한 김석원 중좌는 어떤 잡지에 이런 글을 기고하셨더랍니다.

나는 전지에 나갓슬때 황군의 아름다운 행동이며 부상병이 엉금엉금 기여가면서 돌격해 나가든그 눈물나는 정경을 생각하면 전쟁이란 반드시 무긔로만 익이는 것이 아니라 용사들의 아름답고, 놉고, 굿센 정신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와 갓흔 정신이 투철한 우리 황군이 세계에서 제일 강한것은 당연한 리치입니다. 명치 37, 8년 일로전쟁때 탄환대신으로 2만명의 황군이 적의 진지에 뛰여드러가 성공한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 황군이 얼마나 굿센 정신을 가젓는지 아실 것 입니다.

김석원, 「軍人의 立場에서 銃後에 附託함」,『家庭之友』(1940. 1) 28호, 4~5쪽

이 시절의 정신력 드립에 대해서는 예전에도 한번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군인 뿐 아니라 식민지 지식인들도 황군의 정신력을 찬양하던 시절이죠.

김중좌께서는 정말 황군의 정신력에 감화받으셔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해방되고 1사단장을 하실 때도 육탄 10용사 같은 황군의 전통을 잇는 공격을 좋아하셨다고 하죠. 김석원 외에도 채병덕 같은 양반들도 정신력 드립을 쳐대고 있었던 걸 보면 정말 이것이야 말로 최악의 식민지 잔재인듯;;;;


잡담 하나. 위에서 인용한 글은 요즘 국립중앙도서관에 전자문서로 열람 가능하게 되어 있더군요.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아주 깨끗하게 스캔을 잘 해 놓아서 제가 예전에 복사했던 상태 나쁜 것은 못 보겠더군요. 전자문서들이 잘 되어 있다보니 옛날에 구닥다리 복사기로 복사한 것들 중 통째로 복사해서 제본 뜬 것이 아니면 모두 이면지로 재활용 하고 있지요. 대한민국이 망하지 않는 이상 국립중앙도서관이 문 닫지는 않을 테니.

잡담 둘. 위의 인용문에서 *표 표시한 것은 아무래도 203고지 전투를 이야기 하는 것 같지요?

2009년 11월 30일 월요일

1차대전 이전 프랑스군의 포병

배군님이 쓰신 마른전투와 1차대전 직전 프랑스군의 공격 위주의 군사사상에 대한 글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마침 배군님의 글에 전쟁직전 프랑스군의 포병 이야기가 잠깐 나온 만큼 편승하는 포스팅을 하나 해보려 합니다.

프랑스 육군이 1차대전 발발당시 105mm급 이상의 대구경 야포에서 독일군에게 압도된 원인에 대해서는 몇 가지 주장이 있습니다만 중요한 원인으로는 프랑스 육군이 전술교리의 문제 때문에 대구경 야포의 필요성을 경시했다는 점이 꼽히고 있습니다.

1차대전 이전 프랑스의 야포 운영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랑글루아(Hippolyte Langlois) 장군이었습니다. 랑글루아는 1892년에 출간한 ‘야전포병과 타 병과에 대하여(L’Artillerie de Campagne en liaison avec les autres armes)’라는 저작에서 미래의 전장에서 속사가 가능한 야포가 어떠한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인가를 고찰하려 했습니다. 랑글루아는 전투가 ‘서전(緖戰)’, ‘포격전’, ‘소모 전투’, ‘결정적 공격’의 네 단계로 이루어 질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이중 전투의 ‘서전’에서 포병은 보병과 기병으로 구성되는 전위부대를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하도록 하며 신속한 화력지원을 위해 전위의 보병 및 기병과 밀접한 접촉을 유지해야 했습니다. 당시로서는 야전부대가 사용할 수 있는 실용적인 무전기술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포병이 보병 및 기병과 긴밀한 협력을 하기 위해서는 관측병의 시야 범위내에서, 적을 직접 보고 사격할 수 있는 거리내에 배치되어야 했습니다. 랑글루아는 이러한 환경하에서는 기동이 편리하고 속사가 가능한 경량급 화포가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무거운 대구경 야포는 이러한 환경하에서는 사실상 쓸모가 없었습니다. 대구경 야포의 장점은 긴 사거리인데 적을 직접 보고 사격해야 하는 조건에서는 별 도움이 안되는 능력이니 말입니다.
두 번째 단계인 ‘포격전’ 단계는 양측의 주력이 전장에 집결하여 포격전을 가하는 단계인데 랑글루아는 이 두번째 단계에서 적의 포병을 격파하고 화력의 우세를 달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으며 이 경우에도 속사가 가능한 경량급 야포가 유리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세 번째 단계인 ‘소모 전투’ 단계에서 포병은 공격하는 보병을 직접 지원하며 보병이 기동을 완료하면 새로운 진지에서 적군의 반격을 분쇄하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랑글루아는 역시 이 단계에서도 속사가 가능한 경량급 야포가 유리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포병이 적 소화기의 유효사거리까지 전진해 화력지원을 해야 하기 때문에 신속한 사격이 가능해야만 적의 보병을 무력화 시킬 수 있다는 논리였습니다.1)
그리고 랑글루아의 저작이 출간된 뒤에 채용된 75mm Mle 1897은 이러한 교리에 적합한 장비였습니다. 우수한 속사능력을 갖춘 이 포는 당시 독일군 사단 포병의 주력장비인 77mm 야포를 단숨에 구식화 시켰습니다.

랑글루아의 견해는 당시의 군사기술을 고려한다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포병이 적 보병의 소화기 사거리내에서 작전을 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은 이미 보불전쟁의 여러 전투에서 입증된 바 있었습니다. 예를들어 1870년 8월 18일의 그라벨로(Gravelotte) 전투에서 만슈타인(Albrecht von Manstein)이 지휘하는 제9군단의 예하 포병대는 프랑스군의 소화기 공격에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물론 이 전투는 북독일연방측의 승리로 끝났으며 프랑스군 사상자의 70%가 독일 측의 포격에 의한 것이었다고 전해질 만큼 포병의 위력을 과시한 전투였지만 동시에 포병 전술의 한계를 보여준 전투이기도 했습니다.2)

러일전쟁의 결과도 프랑스군의 포병교리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습니다. 이 전쟁에서 일본군 포병은 엄폐된 포진지에서 사격을 했기 때문에 꽤 재미를 봤으나 포병 운용의 규모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러시아군에게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러시아군은 속사가 가능한 경량급 야포가 거둔 성과에 더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이 때문에 러일전쟁 이후의 러시아군 교리에서는 여전히 포병이 최대한 전방에 배치되어 적 포병과 보병을 제압해야 한다고 명시했습니다.3)
프랑스군도 러시아군과 동일한 결론을 내렸으며 러일전쟁의 전훈을 통해 랑글루아의 교리가 타당하다는 믿음을 더 강화했습니다. 당시 프랑스군 포병의 훈련을 보면 적으로부터 1800m 떨어진 거리에서 사격하는 경우도 나타나는데 이것은 포병 자체의 안전을 희생하더라도 공격하는 보병에게 최대한의 화력지원을 제공하려는 의도였습니다. 그리고 포병의 방어는 포방패를 야포에 다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러일전쟁 직후까지도 포병이 후방에 위치할 경우 보병과 원활하게 소통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는 점도 프랑스군이 포병의 전진 배치를 선호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유선전화가 도입되고 있었으나 신뢰성 문제와 전화선이 포격에 절단될 수 있다는 점이 문제로 제기되었습니다.4)

그러나 독일군이 105mm급 야포의 생산을 늘려갔기 때문에 프랑스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뒤늦게 대구경 야포의 개발과 배치에 들어가게 됩니다. 독일군은 이미 1900년부터 105mm l.FH 98을 양산하고 있었으며 1910년에는 개량형인 l.FH 98/09가 배치되기 시작했습니다. 1911년에는 독일군의 23개 군단에 3개 포대로 구성된 105mm 유탄포 대대가 배속되었으며 이보다 더 위력적인 150mm s.FH 02는 1913년까지 400문이 배치되었습니다.5)

1910년 총참모장에 취임한 조프르(Joseph Joffre)는 1911년 최고군사평의회(Conseil Superieur de la Guerre)에서 독일의 대구경 야포 도입에 대항하기 위해 프랑스군도 대구경 야포의 배치에 주력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조프르 뿐 아니라 새로 전쟁부 장관에 임명된 메시미(Adolphe-Marie Messimy) 또한 프랑스군이 중포 보유량에서 독일군 보다 열세에 있다는 점을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6)
그러나 중포에 대한 프랑스군의 인식은 여전히 낮은 상태에 있었습니다. 포병장비 도입을 담당하고 있던 총참모부 제3국의 국장 레미(Rémy) 대령은 75mm Mle 1897의 우수성을 확신하는 인물이었습니다. 레미 대령은 독일군 포병의 3/4는 여전히 77mm 야포를 장비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프랑스군은 독일군에 대해 현저한 우위를 가지고 있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105mm 유탄포의 도입에 긍정적이었던 포병위원회의 위원장 라모트(de Lamothe) 장군도 이 이상의 대구경 야포는 야전포병이 아닌 공성포병의 장비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7)

물론 군단포병 이하에서 운용되는 야전포병과 군급에서 운용되는 공성포병을 엄격히 분리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일반적인 것 이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120mm 이상의 구경은 공성포로 보았으며 이것은 150mm 중유탄포를 군단급에 배치한 독일군과 큰 차이가 있는 것 이었습니다. 이미 프랑스는 전쟁 시작 전부터 독일군의 동급 제대에게 한 수 지고 들어가는 모양이었습니다. 또한 독일군은 공성포병으로 분류하는 중포병 부대도 군단의 지휘하에 운용할 수 있도록 훈련을 하고 있었습니다.8)

프랑스는 독일군에 비해 중포의 개발과 배치에서 뒤처져 있었으며 야전 중유탄포의 개발은 1911년 7월 27일에 시작되었습니다. 전쟁부는 신형 야전유탄포의 시제품의 사격시험 날짜를 1911년 12월 31일로 잡았으나 무리라는 것이 판명되었고 국영조병창을 고려해 사격시험 날짜를 4개월 늦추는 방안이 고려되었습니다. 결국은 1912년 2월 6일에 총 여섯 종류의 야포에 대한 사격시험이 실시하도록 결정됩니다. 이 시험에 참여할 것은 국영조병창의 120mm 유탄포, 105mm 유탄포, 120mm 캐논, 그리고 포신을 교체하는 방식의 75mm 야포/ 120mm 유탄포 겸용 모델과 슈나이더(Schneider)사의 105mm 유탄포와 106.7mm 캐논이었습니다. 그러나 개발을 서두른 탓에 사격시험은 계속 차질을 빚었습니다. 먼저 1912년 1월에 제3국 국장 레미 대령은 국영조병창의 120mm 캐논은 1912년 3월, 120mm 유탄포는 1912년 10월이나 되어야 시험사격이 가능할 것이라는 보고를 올렸습니다. 결국 2월과 3월에 두 차례의 사격시험이 실시되었으며 이때는 105mm 유탄포와 106.7mm 캐논이 시험 대상이었습니다. 신형야포의 개발을 담당한 칼레 위원회는 시험결과 105mm 급은 탄의 위력이 약하기 때문에 추가로 120mm 또는 155mm 유탄포가 필요하다는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신형 야포의 개발이 계속 늦어졌기 때문에 전쟁부장관과 개발 책임자인 라모트 장군간에는 꽤 험악한(?) 편지가 오고 갔다고 하는군요.9)

발칸전쟁은 프랑스군에게 자신들의 교리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확신만을 심어줬습니다. 프랑스군 관전무관은 불가리아군이 포병과 보병간의 연락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비효율적이었던 반면 세르비아군은 시야를 잘 확보할 수 있도록 능선에 포병을 배치한 덕분에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또한 엄폐한 포병의 사격은 비효율적이며 전통적인 교리에 따라 보병의 직접지원을 하는 쪽이 더 효과적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10) 이에 따라 대구경 야포의 개발은 어디까지나 소구경 야포의 보조적인 수준에 그치게 되었습니다.

한편, 칼레 위원회는 1913년 1월 106.7mm 캐논의 구경을 105mm로 낮춘 야포를 채용하기로 결정합니다. 라모트 장군은 105mm 야포는 야전군에서 운용할 수 있으며 보병의 공격을 지원할 수 있는 최대한의 구경이라고 생각했으며 120mm 이상은 어디까지나 공성포로 사용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11)

결국 1차대전이 발발할 당시 프랑스군은 105mm 이상의 야포는 독일군 보다 훨씬 열세인 상태에 있었으며 전쟁 초기 막대한 손실을 입는 주요 원인이 되었습니다. 1914년의 전투는 프랑스측에게 자신들의 포병 교리가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의 실패는 잘못된 교리가 가장 큰 원인이었고 기술적인 문제점은 교리의 문제점에 비하면 작은 것 이었습니다. 만약 기술적으로도 문제가 있었다면 대전 전기간 동안 꽤나 난감한 풍경이 연출되었을 것 입니다.


<주>
1) Ripperger, Robert M. ‘The Development of the French Artillery for the Offensive, 1890~1914’, The Journal of Military History 59(Oct, 1995), pp.600~601
2) Wawro, Geofrrey. The Franco-Prussian War : The German Conquest of France in 1870~1871,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pp.172~174
3) Menning, Bruce W. Bayonets before Bullets : The Imperial Russian Army, 1861~1914, Indiana University Press, 1992/2000, P.203, 258
4) Ripperger, ibid, pp.603~604
5) Brose, Eric Dorn. The Kaiser’s Army : The Politics of Military Technology in Germany during the Machine Age, 1870~1918, Oxford University Press, pp.149~151
6) Hermann, David G. The Arming of Europe and the Making of the First World War,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6, p.150
7) Ripperger, ibid, pp.607~608
8) Ripperger, ibid, pp.611~612
9) Hermann, ibid, p.151
10) Ripperger, ibid, p.614
11) Ripperger, ibid, p.615

2009년 6월 12일 금요일

독일군의 대구경 야포 도입과 벨기에 요새에 대한 몇가지 이야기

이 글은 지난 5월 말에 배군님이 쓰신 「노기는 무능했는가?」을 읽고 생각난 것이 조금 있어 쓰는 것 입니다. 원래 배군님의 글을 읽고 바로 쓰려고 했는데 저도 먹고는 살아야 하다 보니 조금 늦어졌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대한 글을 계속 쓰다 보니 예전에 썼던 글들과 겹치는 내용도 꽤 많은데 이 점은 양해를 부탁 드립니다.

이번 글은 1차대전 발발 당시 유럽에서 가장 많은 중포를 보유했던 독일군이 전쟁 초기 벨기에의 요새를 공격하면서 겪은 고생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먼저 대전 이전 독일의 중포병(Fuß-artillerie)에 대한 이야기부터 하겠습니다.

보불전쟁 이후 독일의 전쟁 계획은 거의 대부분 서부와 동부의 양면전쟁을 대비해 작성되었습니다. 그리고 서부의 전쟁계획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요소는 바로 ‘현대화된 요새’의 건설이었습니다. 프랑스는 보불전쟁 이후 기본적으로 독일에 대해 방어적인 전략을 취했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1874년 베르덩(Verdun), 툴(Toul), 에피날(Epinal), 벨포르(Belfort)를 연결하는 요새들을 현대화하는데 필요한 예산을 승인했습니다. 프랑스가 국경지대의 요새들을 현대화 하자 독일 측은 이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였습니다. 독일 육군 총참모장 대(大) 몰트케(Helmuth von Moltke)는 1879년 4월에 작성한 작전 개요에서 프랑스의 국경 요새들의 위협을 높게 평가하고 서부에서는 전략적 방어를 취하는 대신 동부에 주력을 집중하도록 했습니다.[Zuber, 2002, p.74] 아무래도 프랑스군의 방어에 휘말리는 위험을 감수하기 보다는 동부전선에서 과감한 기동전으로 승부를 보는게 현명하다는 판단 이었겠지요.
서부에서 전면 방어를 취한다는 몰트케의 계획은 1882년 부참모장(Generalquartiermeister)*으로 취임한 발더제(Alfred von Waldersee)에 의해 비판받았습니다. 발더제는 몰트케의 기본적인 구상을 바꾸고자 노력했지만 몰트케는 1887년 까지도 양면전쟁 발발시 서부에서 방어를 취하고 여건이 허락하면 반격한다는 개념을 버리지 않았습니다.[Zuber, 2002, pp.95-96]

요새의 근대화로 프랑스군의 방어력은 높아진 반면 독일군의 공격 능력이 발전하는 속도는 이것을 따라 잡지 못했습니다. 210mm 구포(Möser)의 C/83 유탄은 1883년에 있었던 사격시험에서 강력한 위력을 보이며 기존의 요새들을 구식화 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신형 고폭탄의 등장으로 몰트케와 발더제는 공세에 역점을 두어 전쟁계획을 수정합니다. 그러나 1880년대 중반부터 요새를 철근과 콘크리트로 강화하자 C-83 유탄은 순식간에 구식화가 되어 버렸습니다. 프랑스는 1887년부터 1888년에 걸쳐 베르덩과 벨포르 등 국경의 주요 요새들에 콘크리트와 철근을 이용한 근대화 공사를 했습니다.[Brose, 2001, p.39] 무엇보다 당시 포병감으로 있던 보익트-레츠(Julius von Voigts-Rhetz) 포병대장이 120mm 유탄포 이상의 중포는 필요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점은 독일군의 중포 개발에 악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Brose, 2001, p.74]

발더제의 뒤를 이어 총참모장이 된 슐리펜(Alfred von Schlieffen)은 몰트케와 발더제의 계획을 이어받아 전쟁계획에서 공세적인 면을 강화했습니다. 슐리펜의 1893년 전쟁계획은 서부에 16개 군단과 15개 예비사단(총 48개 사단)을, 동부에는 4개 군단과 6개 예비사단(총 15개 사단)을 배치하고 주력으로 베르덩과 툴 사이를 돌파하는 것을 골격으로 했습니다.[Zuber, 2002, pp.143-144] 슐리펜의 1893년 계획안은 프랑스의 국경 요새선이 상대적으로 강력한 에피날-벨포르는 주력이 지향하기에는 부적합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어쨌든 간에 ‘상대적으로 약한’ 베르덩과 툴의 요새선은 돌파해야 한다는 점 이었습니다. 1890년대 초반까지 독일군 포병의 주력이었던 90mm C/73의 경우 고폭탄도 발사할 수는 있었지만 탄도 자체가 직선에 가까워 야전축성을 상대로는 효과가 제한적이었습니다. 새로 개발된 77mm C/96도 근본적으로는 C/73의 문제점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슐리펜은 참호 등 적의 야전축성에 대한 효과적인 공략을 위해 유탄포(Howitzer)에 대한 연구를 지시했고 그 결과 105mm le.FH 98이 채용됩니다.[Brose, 2001, pp.65-67] 그러나 C/96에 비해 야전 기동성이 떨어지는 105mm 곡사포는 기동전을 중시하는 독일군의 특성상 환영 받기 어려운 존재였습니다. 1891년부터 1899년 까지 독일 육군 야전포병감을 지낸 호프바우어(Ernst Hoffbauer)는 처음부터 야전포병에 105mm le.FH 98을 채용하는데 부정적인 인물이었습니다. 호프바우어는 포병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적 포병의 제압이라고 생각했으며 보병과의 유기적인 협동 작전을 위해 기동성을 강조하는 입장이었습니다.[Echevarria II, 2000, pp.50-51] 군부 내의 병과간 알력, 예산 등등의 문제로 le.FH 98가 정식으로 양산에 들어간 것은 1900년에 들어가서 였습니다.[Brose, 2001, p.68]
야전포병의 대구경화와는 별도로 210mm 이상의 중포 개발은 계속해서 난항을 겪었습니다. 당시 황제였던 빌헬름 2세는 프랑스 요새의 지붕에 구멍을 뚫어줄 중포병을 육성하는데 왕성한 의욕을 보였지만 독일도 명색이 의회를 가진 나라이다 보니 모든게 황제의 마음대로 돌아가질 않았습니다. 1893년 독일 제국의회(Reichstag)은 중포병에 배정된 예산을 삭감해 버립니다.[Brose, 2001, p.76] 1890년대 초중반 프랑스와 러시아의 개량된 요새들은 2.5-3m 두께의 콘크리트 지붕을 가지고 있었는데 1894년에서 1896년에 걸친 시험에서 독일군의 305mm 구포는 1.5m 이상의 콘크리트 벽을 파괴하지 못했습니다. 독일군은 305mm 구포의 성능에 실망했지만 어쨌든 중포는 필요한지라 1896년에 9문을 주문합니다.[Brose, 2001, p.78]

슐리펜의 1899년 계획은 주력 부대의 진격로를 변경했습니다. 슐리펜은 프랑스군의 동원 완료가 독일군 보다 빠를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고 슐리펜이 1898년에 작성한 작전 개념안은 프랑스군의 선제 공격을 저지한 뒤 반격할 것을 구상하고 있었습니다. 슐리펜이 예측한 프랑스군의 예상 공격로에는 벨기에와 룩셈부르크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프랑스군이 이 방향으로 공격해 온다면 독일군의 반격도 이 지역에서 실시될 계획이었습니다. 아르덴느를 중심으로 한 베르덩 이북의 지역은 현대화된 요새가 별로 없어 상대적으로 기동전에 유리할 것으로 보였습니다. 벨기에를 통한 우회 기동의 개념은 1899년 계획을 통해 구체화 되었습니다. 1899년 계획은 프랑스와의 전쟁이 발발할 경우 서부에 58개 사단, 동부에 10개 사단을 배치하도록 했습니다.(양면 전쟁이 발발할 경우에는 동부에 23개 사단)[Zuber, 2002, pp.160-162] 이후 슐리펜은 벨기에를 통한 우회 기동을 더 진지하게 고려하기 시작합니다. 슐리펜이 퇴역하기 전 까지 시행한 여러 차례의 기동훈련에서는 벨기에를 통한 반격이 실시되었고 벨기에를 통한 우회기동은 슐리펜의 뒤를 이은 소(小) 몰트케 시기에도 꾸준히 연구되었습니다. 1890년대 까지도 베르덩 북쪽으로 현대화된 요새가 거의 전무했기 때문에 기동훈련에서도 210mm 이상의 중포를 동반하는 상황은 거의 없었습니다.

육군의 기동계획이 요새화가 상대적으로 낮은 지역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중포병은 1906년까지도 찬밥이었습니다. 중포병감 플라니츠(Heinrich Edler von der Planitz) 장군은 중포병 대대를 증강해 줄 것을 지속적으로 요청했지만 육군과 제국의회 양쪽으로부터 무시당합니다. 1903년의 경우 독일 육군의 23개 군단 중 8개 군단은 예하에 중포병이 단 1개 포대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나마 150mm 이상의 중포가 조금씩이라도 도입된 덕에 독일군은 다른 유럽군대들에 비해 우위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신형 150mm 유탄포인 s.FH-02의 도입이 시작되어 1904년에는 최초의 10개 포대가 전력화 되었습니다.[Brose, 2001, p.99]
중포병에 비해 야전포병은 중요시 되었기 때문에 야전포병의 장비인 105mm 포의 도입은 신속히 도입되었습니다. 1910년에는 le.FH 98의 개량형인 le.FH 98/09가 도입되었고 1913년까지 총 664문의 105mm 유탄포가 도입되었습니다. 같은 시기 프랑스군은 독일군 보다 열세에 있었고 러시아군의 경우는 동급 제대에 105mm급의 포가 단 1문도 없었다고 하지요.[Brose, 2001, p.149]
플라니츠가 1902년에 퇴역한 뒤에는 플라니츠가 중포병감으로 있을 때 그의 참모장으로 있었던 다이네스(Gustav Adolf Deines) 대령과 플라니츠의 후임 중포병감인 페어반트(von Perbandt)가 총참모부 내에서 중포병의 증강을 주장합니다.

한편, 벨기에를 통한 우회기동 계획이 완성되어 갈수록 리에쥬(Liege) 요새의 점령 필요성이 커졌습니다. 리에쥬 요새를 측면에 남겨두고 기동할 경우 독일군 측면에 대한 반격의 거점이 될 위험성이 컸습니다. 벨기에를 침공할 경우 영국의 개입은 당연시 되었기 때문에 리에쥬가 반격의 거점으로 사용되지 않도록 공세 초기에 점령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러일전쟁 당시 뤼순 요새 전투의 결과 대구경 공성포의 필요성이 더욱 높아졌습니다. 독일군은 러일전쟁, 특히 뤼순 요새 전투에서 일본군이 야전에 비해 더 높은 비율의 대구경 화포를 사용해 성과를 거둔 것에 주목했습니다.[Echevarria II, 2000, p.143]

1906년 이후 공성포 개발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 것은 중포병 병과의 장교인 막스 바우어(Max Hermann Bauer) 였습니다. 바우어는 뤼순 요새 전투를 심층적으로 연구한 결과 대구경 공성포의 필요성을 확신했고 총참모부에 근무하게 되자 대구경 공성포의 개발을 건의해 개발 승인을 얻어냅니다. 그 결과 1909년 4월 크룹(Krupp)사가 제작한 420mm 감마(Gamma Gerät)가 시험 사격을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바우어의 상관이었던 루덴도르프도 감마의 파괴력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루덴도르프는 420mm 감마와 305mm 베타를 충분히 도입해 벨기에의 요새들은 물론 베르덩-툴-낭시에 이르는 프랑스 국경지대의 요새선도 우회할 것 없이 개전 초반에 격파해 버리자는 제안을 하기까지 합니다.[Brose, 2001, p.169]

그러나 대량의 공성포를 단기간에 도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개전 직전까지 4문의 감마와 경량화된 420mm 공성포, M-Gerät 2문이 도입되는데 그쳤고 305mm 베타의 도입은 루덴도르프가 제안했던 16문 대신 12문만이 승인됩니다.

독일군의 중포 도입은 총참모부의 부정적인 인식 때문에 상당기간 지연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전 당시에는 세계에서 가장 앞서 있었습니다. 전쟁이 발발할 당시 독일육군은 중포병 예하에 총 140개 포대를 두고 있었습니다. 이 중 군단 예하 중포병이 총 27개 대대였고 야전군 사령부 예하의 중포병은 총 15개 대대였습니다.[Cron, 2006, p.142] 독일군의 주적인 프랑스군은 독일 다음으로 중포를 많이 보유하고 있었지만 독일군과의 격차가 매우 컸습니다. 단적인 예로 독일군은 군단 예하에 16문의 150mm 유탄포를 보유한 반면 개전 초기 프랑스군은 군단 급 제대에 155mm 유탄포가 없는 경우가 많았습니다.[Echevarria II, 2000, p.146]

개전 초기 독일군은 리에쥬 요새를 단기간에 점령하기 위해 6개 여단, 4만명의 병력을 동원해 공격했습니다. 하지만 신속한 기동을 위해 150mm와 210mm 구포만을 화력지원에 투입한 것은 큰 실책이었습니다. 독일군은 8월 5일부터 400문의 화포를 동원해 리에쥬를 이틀간 공격했지만 함락하지 못하고 4천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당초 예상으로는 150mm와 210mm로도 충분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리에쥬를 둘러싼 개별 요새들의 방어력은 독일군이 동원한 화포로 격파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리에쥬의 벨기에군이 병력 부족으로 도시 전체를 방어하는 대신 개별 요새의 방어로 전환했기 때문에 시가지는 독일군의 손에 떨어졌으나 요새들은 큰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독일군은 초기 공격이 실패한 뒤에야 요새를 격파하기 위해 대구경 공성포를 동원했는데 M-Gerät는 리에쥬 요새 공격이 시작될 때 까지도 훈련 중이었고 305mm 공성포는 숫자가 불충분해 오스트리아로부터 4문을 빌려와서 겨우 6문을 동원할 수 있었습니다. M-Gerät는 8월 12일 리에쥬에 도착했고 그 강력한 위력으로 13일에는 뮤즈강 우안의 요새가, 16일에는 뮤즈강 좌안의 요새가 각각 함락되었습니다.[Strachan, 2003, pp.211-212] 독일군은 리에쥬를 함락하긴 했으나 비싼 대가를 치렀습니다. 요새 공격에 투입한 6개 여단은 모두 숙련도가 높은 현역 여단이었습니다. 또한 요새를 제압하기 위해 대량의 탄약이 소비되었는데 특히 210mm 포탄의 소모가 막심했습니다.[Brose, 2001, p.189] 그리고 리에쥬는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리에쥬의 모든 요새들이 함락된 뒤에도 독일군은 진격로 상의 벨기에 요새들을 계속해서 격파해야 했습니다.

독일군은 유럽 국가들 중 대구경 화포의 도입이 가장 앞서 있는 나라였고 러일전쟁의 교훈을 가장 잘 이해한 나라였지만 개전 초기 벨기에의 요새선을 돌파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독일군은 전쟁 초반에 대량의 210mm 구포를 투입했으며 이것은 다른 어떤 나라 보다 월등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콘크리트와 철근으로 강화된 요새를 효과적으로 제압 하는데는 불충분 했습니다.


참고문헌
Eric Dorn Brose, The Kaiser’s Army : The Politics of Military Technology in Germany during the Machine Age 1870-1918,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Herman Cron/C.F.Colton(trans), Imperial German Army 1914-18 : Organisation, Structure, Orders of Battle, Helion, 1937/2006
Antulio J. Echevarria II, After Clausewitz : German Military Thinkers before the Great War,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0
David G. Hermann, The Arming of Europe and the Making of the First World War,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6
Hew Strachan, The First World War, Vol I. To Arms, Oxford University Press, 2003
Terence Zuber, Inventing the Schlieffen Plan : German War Planning 1871-1914, Oxford University Press, 2002


*독일 제2제국 시기 독일군 총참모부의 Generalquartiermeister를 제 개인적으로 부참모장(副參謀長)으로 번역해서 쓰고 있는데 사실 아주 잘 맞는 번역어는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실제 담당하는 업무를 고려한다면 아주 틀린 것도 아닌 것 같긴 한데... 좋은 생각 있으신 분 계십니까?

사족 하나. 이번에 참고한 서적 중 Terence Zuber의 Inventing the Schlieffen Plan은 슐리펜 계획에 대해 매우 도발적인 가설을 던지는 재미있는 저작입니다. 이미 읽어 보시고 이 책의 내용을 잘 알고 계신 분들도 꽤 계실 것 입니다. 나중에 Zuber의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과 Inventing the Schlieffen Plan에 대한 책 소개를 쓸 생각입니다.

2009년 5월 18일 월요일

러일전쟁이 슐리펜의 전쟁 구상에 끼친 영향

배군님이 봉천회전에 대한 글을 연재하셔서 매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러시아쪽의 시각에서 러일전쟁을 바라본 서적은 조금 읽었지만 일본의 시각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던 차에 많은 점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완수할 수 없었던 육군의 결전에 의한 결착, 봉천회전 vol.1 (B군)

완수할 수 없었던 육군의 결전에 의한 결착, 봉천회전 vol.2 (B군)

완수할 수 없었던 육군의 결전에 의한 결착, 봉천회전 vol.3(完) (B군)

그리고 봉천회전 마지막 편을 읽다 보니 러일전쟁에 대한 슐리펜(Alfred von Schlieffen)의 견해가 나와 있어 눈길을 끌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다 시피 러일전쟁의 결과는 슐리펜의 군사적 계획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특히 전략적인 면에서 러일전쟁이 슐리펜의 전쟁 계획에 가져온 영향은 결정적이라고도 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1904년과 1905년의 사건들은 슐리펜에게 독일이 처한 딜레마에 대한 전략적 해결방법이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 1904년 러시아와 일본은 조선에서 전쟁에 돌입했다. 대부분의 유럽인들은 러시아군이 동부로 이동하기만 하면 단기간에 러시아가 승리할 것이라고 믿었지만 실제 결과는 러시아군의 완패(Fiasco)가 되었다.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양군은 서로 엎치락 뒤치락 했지만 점차 러시아의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러시아군은 점차 만주 내륙으로 밀려났으며 뤼순이 함락되고 발틱함대가 쓰시마 해전에서 섬멸 당하고 국내에서는 혁명에 직면하면서 러시아는 일본과 평화조약을 체결할 수 밖에 없었다. 러시아군은 봉천회전 에서만 10만의 병력을 상실했다.

전쟁의 진행과정은 슐리펜이 러시아군의 능력과 독일의 전략적 상황을 판단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1905년 6월, 슐리펜은 독일 수상에게 러시아군의 한심한 상황을 묘사하는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오랫동안 러시아군에는 유능한 지휘관이 없으며 러시아 장교단의 대다수는 극도로 부족한 능력만을 가지고 있고 부대는 부족한 훈련을 받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슐리펜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결점은 러시아군의 끈기와 충성심에 의해 어느 정도 상쇄되는 것으로 믿는다고 적었다. 아시아에서의 전쟁은 이러한 믿음이 잘못 되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소식에 따르면 러시아군 병사들은 장교에 예우를 갖추지도 않았으며 명령에 따르지도 않았다. 더욱이 전쟁의 결과 러시아군의 훈련 수준은 기존에 생각하고 있던 것 보다 더 형편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슐리펜은 러시아군의 가치는 극히 미미하며 가까운 미래에 러시아군이 효율적인 전투 부대가 될 전망은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동아시아의 전쟁은 러시아군이 알려진 정보에 따라 기존에 추정되었던 것 보다 우수하지 못하며 전쟁으로 인해 러시아군은 효율적으로 바뀌기는커녕 더 악화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러시아군은 모든 결연함(Freudigkeit), 모든 신뢰감(Vertrauen), 모든 복종심을 잃었습니다.
러시아군이 개선될 것인지 그렇지 않을 것인지는 무척 의문스럽습니다. 러시아군은 개혁을 실행할 정도의 자각(Selbsterkenntnis)이 없습니다. 러시아인들은 자신들의 패배의 원인을 군대 자체의 부족함(Unvollkommenheiten)에서 찾지 않고 적의 숫적인 우세나 특정한 지휘관들의 무능함에서 찾고 있습니다. 러시아군에는 필요한 개혁을 실행하고 사기를 굳건하게 할 만한 능력을 갖춘 인재가 없습니다.”

슐리펜은 러시아군의 허약함에 대한 믿음으로 그때 까지 실행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전략적 대안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기회의 창이 열렸다. 슐리펜은 이제 독일육군의 대부분을 서부전선으로 돌리고 크게 약화되고 문제점 투성이인 러시아군으로부터 동부를 방어하는 데는 소수의 부대만을 남겨도 될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Robert T. Foley, German Strategy and the Path to Verdun : Erich von Falkenhayn and the Development of Attrition, 1870-1916,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7, pp.67~68

이렇게 러일전쟁의 결과는 독일의 양면전쟁 계획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하지만 러일전쟁의 결과는 전술적인 차원에서는 슐리펜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견해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습니다. 슐리펜은 1905년 11월과 12월에 실시한 대규모 워게임(Kriegsspiel) 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슐리펜은 그 다음(훈련이 끝난 뒤)에 훈련에 참가한 장교들에게 미래 전쟁의 성격에 대한 자신의 마지막 생각을 이야기 했다. 그는 미래에는 작전을 전개할 때 진지전의 수렁에 더 쉽게 빠져들 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만주에서 벌어진 전쟁은 그 점을 잘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은 기동 전투를 통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도록 노력해야 하며 전쟁을 ‘1년 혹은 2년’간의 결정적이지 못한 소모전으로 끌고 가서는 안될 것이다. 이런 장기전은 전쟁 당사국 모두의 소모와 경제적 혼란만을 가져오게 될 뿐이다. 그러나 설사 진지전의 상황이 오더라도 긴 방어선의 어느 한 곳에는 공격자가 돌파를 달성할 수 있는 취약점이 존재할 것이다. 독일군은 전체적으로 기동 작전을 통해 적의 측면을 포위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슐리펜은 단순한 우회 기동을 실시해서는 안되며 한편으로는 적의 정면을 공격해 방어선에 고착시키는 동시에 강력한 부대로 적의 측면으로 포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Terence Zuber, Inventing the Schlieffen Plan : German War Planning 1871-1914, Oxford University Press, 2002, p.210

슐리펜으로 대표되는 독일의 전통적 군인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동을 통한 승리를 추구했으며 전장의 상황이 급변하더라도 반드시 기동전으로 끌고 나가야 한다는 점을 굳게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군사사가들이 지적 하듯 기동전은 작전 단위의 문제점까지는 해결 해 줄 수는 있어도 결코 전략적 차원의 문제에 대한 대안은 아니라는 점 입니다. 슐리펜은 러일전쟁 이전 까지 양면전쟁 상황에서 소모전을 피할 방안을 강구했습니다. 슐리펜은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전하자 사실상 서부전선만의 전쟁을 할 수 있게 됐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슐리펜이 기대한 상황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고 독일은 새로운 전쟁에서 그토록 피하고자 했던 소모전으로 말려들게 됩니다. 독일은 특히 동부전선을 중심으로 몇 차례의 기동작전을 통해 많은 승리를 거둘 수 있었지만 이러한 승리들이 독일의 전략적 승리를 가져다 주지는 못 했습니다.

2009년 4월 29일 수요일

German Strategy and the Path to Verdun

군사사에 관심 없는 일반인이라도 ‘전격전’이라는 단어는 들어 봤을 정도로 독일의 군사사상에서 ‘기동전(Bewegungskrieg)’과 ‘섬멸전(Vernichtungskrieg)’ 개념은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짧은 시기에 독일의 일부 군사사상가들은 미래에는 ‘기동전’과 ‘섬멸전’을 통한 전쟁의 승리가 어려워 질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1차대전을 경험한 독일 군인들은 ‘기동전’만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으며 1차대전에서 패배한 것은 ‘위대한’ 슐리펜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수행하지 못한 결과라고 믿었습니다.

폴리(Robert T. Foley)의 German Strategy and the Path to Verdun : Erich von Falkenhayn and the Development of Attrition 1870-1916은 독일의 군사사상에서 이질적 존재였던 소모전략(Ermattungsstrategie)가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과정을 1980년대에 새로 공개된 독일 사료를 바탕으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저자는 새로운 자료를 통해 흥미로운 논의를 끌어내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살펴보고 있는 것은 소모전략이 등장하는 과정입니다.
독일 통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대(大) 몰트케(Helmuth von Moltke der Ältere)나 유명한 군사사가이자 군사평론가였던 델브뤽(Hans Delbrück)은 보불전쟁의 경험을 바탕으로 미래의 전쟁에서는 더 이상 몇 차례의 결정적인 전술적 승리를 통해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특히 러일전쟁의 결과 델브뤽은 자신의 견해를 더욱 확신하게 됐습니다. 수백만의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유럽국가들이 전쟁을 할 경우 한 번의 전투로 수십만의 적을 섬멸하더라도 결정적인 타격을 입힐 수 없다는 점은 너무나도 명백했습니다. 유럽국가들간의 전쟁에 비해 작은 규모였던 러일전쟁에서 조차 러시아와 일본 양 측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 했습니다. 델브뤽은 보불전쟁과 러일전쟁 등을 관찰한 결과 미래의 전쟁은 소모전으로 나갈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 군부에서는 기동전 사상이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군대 외부의 이질적인 사상은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 했습니다. 슐리펜(Alfred von Schlieffen)은 현대전의 변화된 환경을 이해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의 우수한 전술로서 충분히 단기간의 결정적 섬멸전을 통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슐리펜은 델브뤽과 달리 러일전쟁을 통해 신속한 승리의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슐리펜은 러시아군이 전술적으로 무능하고 전쟁의 패배로 타격을 받았기 때문에 양면전쟁이 발발하더라도 프랑스를 신속히 격파한 다음에 상대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스는 쉽게 붕괴하지 않았고 러시아군의 동원속도는 슐리펜이 예상했던 것 보다 훨씬 빨랐습니다. 결국 전쟁 전에 예상했던 신속한 승리는 오지 않았고 독일군은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야 했습니다.

저자는 다음으로 마른 전투의 패배 이후 새로이 총참모장이 된 팔켄하인(Erich von Falkenhayn)이 소모전 전략을 구상하고 실행하는 과정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팔켄하인은 독일군 장교단의 주류와는 달리 ‘기동전’과 ‘섬멸전’에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총참모장에 임명될 당시 빌헬름 2세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지만 팔켄하인은 근본적으로 독일군 고위장교단 내에서 비주류였으며 결국은 기동전 지지자들과 적대적인 관계가 됩니다.
팔켄하인의 전략구상은 서부전선에서의 소모전을 통해 프랑스와 유리한 조건에서 휴전을 맺은 뒤 동부전선의 러시아를 정리한다는 것 이었습니다. 저자는 1915년의 경험을 통해 팔켄하인이 소모전으로 프랑스에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고 주장합니다. 프랑스군이 1915년 9월에 야심차게 실시한 대공세 당시 독일군은 서부전선에 충분한 예비대를 확보하지 못했지만 공세 초기의 혼란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에 큰 타격을 주면서 전투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습니다. 동시에 동부전선에서는 1915년의 대공세를 통해 러시아군에게 포로 1백만을 포함한 막대한 타격을 입혔습니다. 팔켄하인은 이를 통해 1916년에는 서부전선에서 대규모의 소모전을 벌여 프랑스를 전열에서 이탈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저자는 1916년 전역에 대한 설명에서 흥미로운 주장을 몇 가지 더 하고 있습니다. 가장 재미있는 주장은 영국군의 솜 공세는 팔켄하인이 미리 예측하고 자신의 소모전략의 일부로 포함시켰다는 것 입니다. 팔켄하인의 원래 계획은 베르덩 공세를 통해 프랑스군을 소모시키며 동시에 프랑스가 영국에 구원 공격을 요청하도록 하는 것 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영국군이 구원공격에 나서면 1915년 가을과 마찬가지로 방어를 통해 영국군을 소모시킨 뒤 그동안 확보해 둔 전략예비를 통해 반격한다는 것 이었습니다.
그러나 팔켄하인의 구상은 독일군의 전투력은 과대평가하고 영국군과 프랑스군의 전투력을 과소평가한 상태에서 이루어 진 것이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 가 없었습니다. 베르덩 공세는 예상보다 완강한 프랑스군의 저항으로 독일군에 막대한 손실을 입혔으며 영국군의 공세는 팔켄하인의 예측보다 늦게 이루어 진데다 결정적으로 예상 이상으로 강력한 것이었습니다. 원래 팔켄하인이 반격에 투입하기 위해 확보한 예비대들은 영국군의 솜 공세를 저지하기 위해 소모되었습니다. 결국 원래부터 비주류였던 팔켄하인은 1916년의 실패를 계기로 반대파의 맹렬한 공격을 받았고 총참모장에서 물러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자는 전후 독일의 역사서술에서 팔켄하인이 정치적 반대파, 특히 힌덴부르크(Paul von Hindenburg)루덴도르프(Erich Ludendorff) 등 ‘섬멸전’ 지지자들에 의해 폄하되었다고 지적합니다. 비주류였던 팔켄하인은 총참모장 해임과 함께 전후 독일군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지만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탄넨베르크’의 영웅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섬멸전’ 옹호자들은 독일이 1차대전에서 패배한 원인이 ‘위대한’ 슐리펜의 가르침을 살리지 못하고 어리석은 ‘소모전’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섬멸전’에 입각해 미래의 전쟁을 준비한 독일군은 2차대전에서 또 다시 ‘소모전’에 의해 패배했습니다. 많은 군사사가들이 지적하듯 ‘기동전’과 ‘섬멸전’은 작전단위의 방법론으로 적당한 것이지 ‘전략’ 단위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수단은 아니었습니다. 1차대전 이후의 독일 군사사상가들은 현대전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채 ‘작전’의 수단을 ‘전략’에 까지 확대 적용한 결과 철저한 패배에 직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폴리의 연구는 풍부한 자료에 근거해 새롭고 흥미로운 주장들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20세기를 전후한 시기 독일의 군사사상은 매우 흥미로운 주제이지만 많은 연구자들은 ‘기동전’과 ‘섬멸전’에만 주목한 나머지 짧은 기간 동안 존재했던 ‘소모전’에 대해서는 많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저자는 1차대전 당시 팔켄하인의 전략이 단순히 팔켄하인 개인의 돌출적인 산물이 아니라 19세기 말 이후의 군사사상에 뿌리를 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팔켄하인의 군사 사상이 형성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고찰이 부족하지만 충분히 흥미로운 설명입니다.

잡담 하나. 독일 군사사상의 발전을 개괄적으로 살펴보고 싶으신 분은 시티노(Robert M. Citino)의 The German Way of War: From the Thirty Years' War to the Third Reich를 추천합니다.
시티노의 저작들에 대해서는 채승병님이 쓰신 ‘전격전의 실체는 무엇인가’라는 글의 마지막 부분을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2008년 12월 18일 목요일

러시아군의 군수물자 부족문제 : 탄약을 중심으로, 1914~1917

1차대전 발발 직전 러시아는 거의 대부분의 군수물자를 국영공장에서 생산하고 있었습니다. 산업화된 전쟁을 수행할 수 있을 정도로 민간공업이 육성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이 발발한다면 대부분의 생산 부담은 국영공장이 짊어 지어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 입니다. 그러나 이런 체제 아래서는 탄약 수요가 급증할 경우 신속히 대처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전쟁이 발발하자 그대로 현실이 됩니다.

1890년에서 러일전쟁이 발발할 때 까지 러시아의 군수공업은 해외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았습니다.
러시아의 뒤떨어진 공업능력은 소총 조차도 충분히 조달할 수 없었는데 단적인 예로 모신-나강 소총이 처음 채용되었을 때 러시아 정부는 육군의 소요량을 신속히 조달하기 위해서 프랑스와 벨기에에 소총 생산을 발주했습니다. 그 결과 러시아군은 신속히 모신-나강 소총으로 기본화기를 교체했고 러일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예비사단 까지도 신형소총을 지급받을 수 있었습니다. 러시아 정부는 필요한 소총을 획득한 뒤에는 외국으로 부터의 주문을 중단하고 국영조병창을 통해서만 소총을 생산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보충용 소총을 생산하는데 그쳤고 전쟁 발발시 수요량을 충족시킬 능력은 없었습니다. 또 러시아의 TNT 생산은 러시아에 설립된 독일 회사의 톨루엔(toluene)에 크게 의존했는데 독일 기업들은 톨루엔 생산에 필요한 석유제품을 독일에서 들여오고 있었습니다. 독일과 전쟁이 벌어진다면 러시아의 폭약생산에 차질이 빚어질 것은 뻔한 것 이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는 자체적인 톨루엔 생산능력 확충보다는 당장 편한 독일 기업으로 부터의 도입에 계속 의존했습니다.
결국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러시아 정부는 급격히 증대된 군수물자의 수요를 채우기 위해 외국 기업에 대한 발주를 늘리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러시아 육군(전쟁성)의 경우 1903년에 260만 루블을 무기 수입에 사용했는데 이것은 1904년에는 1690만 루블로, 1905년에는 7310만 루블로 늘어납니다. 러시아 해군은 1903년에는 1천만루블을 무기 수입에 사용했고 1905년에는 6800만 루블을 수입에 사용합니다. 해외로 부터의 군수물자 수입은 발주에서 도착까지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전쟁 중에는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러시아 정부는 러일전쟁이 종결된 뒤 군대를 개편하는 과정에서 군수물자 생산능력의 확충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 때문에 1차대전 발발 직전 러시아 정부는 미래의 전쟁에서는 러시아가 자체적으로 충분한 군수물자를 생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전쟁상인 수호믈리노프(Владими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Сухомлинов)는 ‘장차 벌어질 전쟁에서 러시아 포병은 포탄이 부족하다고 불평할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의 포병은 많은 양의 장비를 보급받고 있으며 포탄의 보급(체제)도 잘 조직되어 있다’고 호언장담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의 군수공업은 여전히 생산능력이 부족하며 외국의 기술과 중간 생산재에 대한 의존이 높은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전쟁이 발발하자 바로 드러나 버립니다.

1차대전이 발발하자 모든 참전국의 군지휘부를 경악시킨 것은 전쟁 이전의 예상을 뛰어넘는 엄청난 물자소모였습니다. 전쟁 준비가 가장 충실히 되어 있었다는 평을 받는 독일의 경우 포 1문 당 6개월 소요량으로 1천발의 포탄을 배정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전쟁이 발발한 뒤 6주만에 모조리 소비되어 버리고 일선 부대들은 탄약 부족으로 작전 수행이 어려운 상황에 처합니다.
러시아군 수뇌부 또한 독일과 비슷하게 유럽전선에서는 단기결전으로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고 포 1문당 1천발의 포탄이 있으면 전쟁이 끝날 때 까지 충분할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군 포병은 전쟁 전 기간 동안 1,276문의 포를 투입해 918,000발의 포탄을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포 1문당 평균 700발의 포탄을 소비하는데 불과했기 때문에 일부에서는 1천발도 ‘너무 많은 것이 아니냐’하는 의문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소총탄의 경우 1개월에 5백만발이면 충분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탄약 뿐 아니라 전투장비의 소요량도 낙관적으로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소총의 경우 독일과의 전면전이 발발할 경우 동원병력 450만명분과 연간 보충 70만정 만 생산하면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던 것 입니다.

※ 하지만 전선의 물자 소요량은 엄청났습니다. 당초 520만정이면 충분할 것으로 예상한 소총의 경우 전쟁 기간 중 추가적인 병력 동원으로 550만정이 더 필요했으며, 여기에 전쟁 기간 동안의 손실을 보충하는데 720만정이 더 필요했다고 합니다.

전쟁 발발 이전의 낙관적인 예상은 전쟁이 시작되자 마자 철저히 깨지게 됩니다.

러시아군은 병력동원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전쟁이 발발하자 독일의 예상보다 더 빨리 공세에 나설 수 있었지만 군수보급은 병력동원을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전쟁이 시작된 1914년 8월부터 총참모부는 전쟁상 수호믈리노프에게 예상 보다 탄약 소요가 많을 수 있다고 경고했으나 수호믈리노프의 대답은 이랬다고 합니다.

“아껴 쓰는 방안을 강구할 수 는 없는가?”


사실상 러시아군은 소모전에 대한 대비가 안된 상황에서 전쟁에 돌입하게 된 것입니다.

러시아의 국영조병창은 물론 민간 기업들의 생산량을 합치더라도 전선의 요구량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1914년 9월 9일에 수호믈리노프가 러시아의 주요 기업관계자들을 소집해서 총 665만발의 포탄을 주문하고 한달 평균 150만발을 생산할 수 있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렸지만 러시아 기업들의 생산능력으로는 한달에 최대 50만발을 생산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결국은 러일전쟁 때 처럼 전선의 소요량을 조달하기 위해서는 외국으로부터 군수물자를 도입하는 것 말고는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러일전쟁과는 상황이 달라서 영국이나 프랑스도 자국군의 요구량을 생산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영국은 전쟁 초 러시아로부터 1백만발의 포탄을 주문 받았지만 1915년 9월까지 겨우 5천발을 보내는데 그쳤습니다. 아직 전쟁에 개입하지 않은 미국의 상황은 그나마 조금 나은 편이었습니다. 미국과 캐나다의 회사들은 1916년 6월까지 러시아로부터 주문 받은 910만발의 76.2mm 포탄 중 875,000발을 생산해서 보냅니다 하지만 전쟁으로 발틱해가 봉쇄되었기 때문에 이것들은 아르항겔스크나 블라디보스톡으로 수송되었습니다. 러시아의 열악한 철도망 때문에 미국에서 도착한 포탄들은 항구에 하역된 뒤 전선으로 수송되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문제는 다른 군수물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러시아정부는 러시아의 부족한 소총 및 야포 생산능력을 보충하기 위해서 미국, 영국 등에 소총과 야포를 대량으로 발주했는데 역시 외국 기업들은 러시아 정부의 발주량을 맞추지 못했습니다. 러시아 정부는 1915년에 미국의 윈체스터에 30만정, 레밍턴에 150만정, 웨스팅하우스에 150만정의 모신-나강 소총의 생산을 발주했으며 각 기업들에게 1915년에는 1개월에 10만정, 1916년 까지 1개월에 20만정을 생산할 수 있도록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아직 군수물자 생산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러시아 정부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습니다. 1917년 3월까지 윈체스터는 주문량의 9%를, 레밍턴과 웨스팅하우스는 12%를 납품하는데 그쳤습니다.

러시아의 자체적인 생산은 물론 수입조차 어려워지자 전선의 탄약 상황은 계속 악화되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듯 러시아군은 1914년 9월 까지만 해도 한달 평균 150만발의 포탄을 생산하면 충분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지만 같은 해 10월에는 이것을 다시 250만발로 늘려 잡았고 결국에는 한달에 최소 350만발은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본국의 탄약 생산이 차질을 빚고 있는 동안 전선의 러시아군은 독일군의 ‘물량공세’ 앞에 피박을 쓰게 됩니다. 1915년 독일군의 춘계 공세 당시 막켄젠(August von Mackensen)의 11군은 1백만 발의 포탄을 퍼부었는데 독일군의 주공을 얻어맞은 러시아 3군은 그 10분의 1도 안되는 포탄만 보급받은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태에서 독일군의 강력한 공세에 처한 러시아군은 급속히 붕괴되어 버립니다. 1915년 8~9월에 있었던 북부전선의 독일군 공세에서도 갈비츠(Max von Gallwitz)의 12군은 3백만발 이상의 포탄을 사용했는데 러시아군은 90만발을 보급받는데 그쳤습니다. 갈비츠의 공세로 러시아군은 빌뉴스를 상실하고 밀려납니다. 단순히 야포의 숫자로만 비교하면 독일군이 압도적 우위는 아니었지만 중요한 것은 포탄의 보급 문제였습니다.
게다가 러시아군은 요새의 역할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요새에 충분한 탄약을 비축하는데 신경을 쓰고 있었습니다. 야전군은 포탄 부족으로 고전하고 있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동부전선의 기동전 하에서 큰 역할을 하지 못한 요새들에는 많은 포탄이 비축되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노보게오르기프스크(Новогеоргиевск)와 코브노(Ковно) 요새가 함락되었을 때 독일군은 이 두 요새에서만 200만발에 가까운 포탄을 노획했습니다.
포탄 뿐만 아니라 소화기의 탄약도 부족했습니다. 그 결과 노획무기의 사용이 빈번했습니다. 예를 들어 1916년에 러시아 8군 예하의 2개 군단은 노획한 오스트리아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탄약보급이 잘 되지 않으니 아예 대량으로 노획되는 오스트리아 탄약을 사용하기 위해 부대 단위로 오스트리아 소총을 장비한 것 입니다. 물론 소총 자체의 보급 문제도 있었다고 있긴 했습니다만.
군수물자의 부족이 러시아군 패배의 모든 원인은 아니지만 심각한 문제였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급박한 상황에 직면한 러시아정부는 탄약생산 증대에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정부의 대대적인 투자에 의해 러시아의 자체적인 탄약 생산은 꾸준히 증가했습니다. 그리고 1915년 2월에는 탄약 생산을 감독하기 위해 포병총국(Гравное Артиллерийское Управление) 예하에 폭약류 생산을 위한 위원회를 조직하기도 합니다. 러시아전쟁성은 1914년 9월 러시아 기업들에 1915년 10월까지 포탄의 월간 생산량을 1백만발로 늘리는 조건으로 1천만 루블을 투자합니다. 이 계획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1914년 가을 한 달에 45만발의 포탄을 생산했는데 1915년 7월에는 90만발, 같은 해 9월에는 1백만발을 생산하는데 이릅니다. 폭약생산은 1915년 2월에 96톤이었으나 7월에는 820톤으로, 그리고 10월에는 1,366톤으로 급증했고 생산량 증가의 대부분은 러시아 민간기업에 힘입은 것 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 조차 전선의 수요에는 턱없이 부족했다는 것 입니다.
러시아의 화약류 생산에 지장을 초래한 가장 큰 원인은 황산을 만드는데 필요한 황철석의 조달 문제였습니다. 러시아는 전쟁 이전에 스웨덴과 터키를 통해 황철석을 수입하고 있었고 이것은 전체 수요의 3분의 1 규모였습니다. 전쟁이 터지자 전자는 발틱해의 봉쇄로 수입이 끊기고, 후자는 적국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황철석 수입문제로 발틱해 연안에 건설된 러시아의 황산공장들이 독일군의 진격으로 점령되거나 점령을 피해 이전하는 통에 1915년 초에는 황산 조달이 위험할 정도로 격감했다고 합니다. 물론 나머지 2/3을 차지하는 우랄 지역은 독일군의 위협으로 무사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발트해 연안의 생산시설 상실과 전체 수요량의 30%가 일시에 사라진 것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러시아정부는 우랄 지역의 황철광 생산을 증대시켜 1915년 말에는 황산 생산문제가 해결되고 황산 생산량은 1916년 3월까지 월간 2만톤 이상으로 증가합니다.
한편, 독일군의 화학무기 사용도 심각한 위협이었습니다. 서부전선의 영국군 및 프랑스군과 달리 러시아군은 전쟁 기간 중 방독면 부족에 시달렸습니다. 독일군이 1915년부터 동부전선에서 본격적으로 화학무기를 사용하자 러시아군도 이에 대응해 화학무기 개발과 방독면 생산을 시작합니다. 러시아는 독일군의 화학탄 사용에 맞서 1915년부터 염소가스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는 일반 포탄과 마찬가지로 화학탄 생산능력도 부족했습니다. 러시아군이 1915년 전 기간을 통틀어 사용한 화학무기는 200톤 정도였는데 이것은 독일군이 서부전선에서 단 한차례의 공격작전에 사용하는 규모에 불과했습니다. 예를 들어 1915년 4월의 이프르 전투에서 독일군이 첫날 사용한 염소가스는 150톤 정도였습니다.

※ 동부전선의 초기 화학전에 대해서는 ‘독일군의 화학무기 시험 : 1914~1915’에서 간단히 언급한 바 있습니다.

러시아 정부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러시아의 포탄 생산량은 1916년에는 월간 185만발 까지 증가했습니다. 러시아 측의 주장에 따르면 1차대전 기간 중 러시아군이 사용한 7230만발의 포탄 중 5660만발이 러시아가 자체적으로 생산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러시아군의 포탄 생산은 주로 76.2mm에서 122mm 구경의 포탄에 집중되었고 203mm 이상의 중포에 필요한 포탄의 생산은 전쟁이 끝날 때 까지도 문제였다고 합니다. 기묘하게도 포병을 중시하는 러시아군이 1차대전에서는 독일군에게 화력 면에서 압도당하고 말았습니다.

1차대전 당시의 뼈저린 경험은 이 전쟁을 경험한 미래의 소련 장군들에게 소모전의 중요성을 각인시켰습니다. 러시아군의 기동전은 독일군의 기동전과 달리 소모의 개념도 중요한 요소로 들어가 있는데 이것은 1차대전의 동부전선 경험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투하체프스키 같은 군인들은 1차 5개년 계획기간 동안 스탈린 이상으로 군수물자 생산능력의 확충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비록 전쟁에는 패배했지만 제정러시아가 남긴 유산은 소련에게 거의 대부분 계승됩니다. 대표적인 것이 노동자입니다. 1차대전을 통해 러시아의 화학공업은 양적으로 팽창했습니다. 1913년에 33,000명이던 화학공업 부문의 노동자는 1917년에는 117,000명으로 증가합니다. 이렇게 늘어난 노동자들은 소련의 산업화 초기 화학공업의 중핵이 되었습니다.
소련인들은 1차대전에서 얻은 교훈을 잘 살린 결과 2차대전에서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독일군과 싸우게 되었습니다. 막연히 1차대전의 경험만 가지고 러시아를 과소평가한 독일인들은 그 대가를 혹독히 치루게 되지요.


참고문헌
Nathan M. Brooks, ‘Munitions, The Military, and Chemistry in Russia’, Frontline and Factory : Comparative Perspectives on the Chemical Industry at War 1914~1924, Springer, 2006
Martin van Creveld, ‘World War I and the Revolution in Logistics’, Great War, Total War : Combat and Mobilization on the Western Front, 1914~1918,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0
Jonathan Grant, ‘Tsarist Armament Strategies 1870~1914’, The Journal of Soviet Military Studies, 4-1(1991)
Bruce W. Menning, Bayonets before Bullets : The Imperial Russian Army, 1861~1914, Indiana University Press, 1992/2000
Norman Stone, The Eastern Front 1914~1917, Penguin Boosk, 1975/1998

2008년 7월 13일 일요일

러시아의 병력동원과 철도 문제

국민개병제와 이에 기반한 동원체제에 대해서는 이미 이 블로그에서 여러 차례 이야기 한 바 있습니다. 이번에는 러시아의 동원체제와 철도망의 확충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볼까 합니다.

대규모의 국민동원은 프랑스 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에서 처음 그 위력을 떨친 이후 세 차례에 걸친 독일 통일전쟁에서 그 형태가 거의 완성되었습니다. 특히 독일 통일전쟁에서는 동원체제가 철도라는 현대적 기술과 결합해 그 잠재력을 세계에 보여주었습니다. 이후 미국과 영국을 제외한 세계의 주요 열강들은 모두 독일과 유사한 동원체제를 만들었으며 19세기가 저물 무렵에는 미래 전쟁에서 동원체제가 더욱 더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것이라는 점은 명백해 졌습니다.

러시아 또한 세계 유수의 육군국으로서 동원체제의 정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특히 러시아의 방대한 인적자원이 효율적 동원체제와 결합된다면 그 위력은 그 어떤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을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런데 러시아의 동원체제는 다른 국가들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를 한 가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러시아의 광대한 국토였습니다.

러시아는 막대한 잠재력을 가진 대국이었지만 산업화에는 뒤쳐졌기 때문에 크림 전쟁에서 굴욕적인 패배를 당하고 맙니다. 크림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러시아의 철도 총 연장은 1,000km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크림 전쟁이 발발하자 이것은 러시아의 결정적인 약점 중 하나로 작용합니다. 영국과 프랑스 군대는 증기선을 이용해 신속하게 병력을 이동시킬 수 있었는데 철도가 부실한 러시아는 막대한 인적자원을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크림 반도로 병력을 동원하는데 어려움을 겪은 것 입니다.
1863년 폴란드 봉기를 진압하는데 상트 페테르부르크-바르샤바 철도가 유용하게 활용되었지만 이때 까지도 러시아의 철도 총연장은 3,000km에 불과했습니다. 러시아의 국가 재정은 엉망이었기 때문에 철도 증설은 매우 더딜 수 밖에 없었습니다.

러시아의 철도 연장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은 적극적인 산업화를 추진한 알렉산드르 2세가 로이테른(Михаил Христофорович Рейтерн)을 재무장관에 임명한 이후 였습니다. 로이테른은 1878년 까지 장관직에 있었는데민간 자본 유치를 통한 철도 확대에 힘을 쏟았습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러시아의 철도 연장은 20,000km 이상 증가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 군부는 민간 자본에 의해 전략적 자산인 철도가 만들어지는 것에 반대하고 있었습니다. 1864년에 참모대학의 교관이었던 오브루체프(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Обручев) 대령은 외국의 상업 자본에 의해 만들어지는 철도는 러시아 군의 전략적 이동에는 도움이 안되는 노선이 많다고 비난했습니다. 오브루체프는 병력 동원을 위해 러시아의 깊숙한 내륙지역과 발칸 반도 방향으로의 철도 건설을 주장했습니다. 물론 이 지역들은 상업 자본에 의한 철도 건설이 부진한 지역이었습니다. 오브루체프는 신속한 병력 전개를 위해서 모스크바-쿠르스크-세바스토폴로 이어지는 노선과 바르샤바-키예프-오데사로 이어지는 구간을 대대적으로 확충할 것을 건의했습니다. 그리고 이 노선들은 모두 러시아 정부의 재정으로 건설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북독일연방이 프랑스를 격파하자 러시아의 정부 재원에 의한 전략 철도 부설에 대한 논의는 한층 더 힘을 얻게 됩니다.

러시아는 보불전쟁에서 프로이센-독일이 승리를 거둔 이후 효율적 동원체제 구축을 위해 행정적, 기술적 개편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오브루체프는 독일 통일 전쟁 기간 동안의 철도 활용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었고 꾸준히 국가 차원의 철도 건설을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1873년 소장으로 진급한 오브루체프는 전쟁상 밀류틴(Дмитрий Алексеевич Милютин)에게 미래의 전쟁 계획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합니다. 오브루체프는 이 보고서에서 멀지 않은 장래에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동시에 상대해야 할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지적하고 러시아는 광대한 국토 때문에 신속한 병력 동원이 어려워 전쟁 초기에 병력에서 열세에 처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오브루체프의 보고서는 러시아군은 동원을 완료하는데 최소 54일에서 58일이 소요되는 반면 독일은 그 절반도 안되는 20일 정도에 동원을 완료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특히 철도망이 부실한 오스트리아 방면으로의 동원은 최소 63일에서 70일은 소요될 것으로 전망했는데 이것은 누가 보더라도 심각한 전략적 결함이었습니다. 즉 전쟁 초기에 국경지대가 돌파되는 것은 피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오브루체프의 보고서는 이런 전략적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동원 시간을 벌 수 있도록 국경지대의 요새를 강화하는 한편 7,000km의 전략 철도를 추가로 증설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오브루체프가 철도 증설을 요구했던 1873년 시점에서 오스트리아의 철도는 12,000km, 독일의 철도는 22,000km 였는데 러시아의 철도는 14,000km가 완성된데 지나지 않았습니다. 국토의 크기를 비교하면 러시아가 얼마나 열악한 상황에 처해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러시아에게는 불행하게도 오브루체프의 경고는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1877년 벌어진 러시아-터키 전쟁에서 러시아군은 열악한 철도로 인해 작전에 많은 지장을 받았습니다. 주 전장이었던 발칸 반도 방향은 위에서 언급한대로 러시아의 철도망이 가장 취약한 지역 중 하나였던 것 입니다. 게다가 루마니아를 통한 병력 이동은 러시아 이상으로 열악한 루마니아의 철도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또 봄철의 폭우로 인해 도로들이 진창으로 변한 덕분에 도로를 통한 병력 이동은 많은 지장이 있었습니다. 결국 병력 이동과 보급은 불과 1,000km에 불과한 루마니아의 철도망에 의존해야 했는데 루마니아의 철도는 짧은 거리 만큼이나 안전에 있어서도 문제가 많아 한 러시아 장군은 루마니아의 철도가 터키군 보다 더 위협적이라는 반농담 반진담의 논평을 할 정도였습니다.

밀류틴은 전략 철도 부설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밀류틴은 자신의재임 기간 중 철도 문제를 해결 하지 못 했습니다. 특히 전략적으로 중요한 러시아 서부의 철도망은 러일전쟁이 발발하기 직전까지도 동원계획을 작성하는 참모장교들의 걱정거리였습니다.
러시아의 총참모부는 러시아 서부를 북서, 서부, 남서, 남부 등 네 개의 구역으로 구분하고 있었는데 이 중 북서는 세 개의 복선노선이, 서부는 세 개의 복선노선과 일곱 개의 단선노선이, 남서는 한 개의 복선노선과 두 개의 단선노선이, 남부는 두 개의 복선노선과 세 개의 단선노선이 있었습니다. 1898년에 전쟁상이 된 쿠로파트킨(Алексей Николаевич Куропаткин )은 서부러시아의 철도망으로는 하루에 167대의 열차 밖에 이동하지 못하는데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812대의 열차를 동원에 활용할 수 있다고 지적하면서 철도 증설을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궁핍한데다 프랑스 등 서방의 자본에 의존하는 러시아는 대규모 철도 증설에 나서기가 어려웠습니다. 결국 궁여지책으로 나온 것이 서부러시아에 주둔하는 병력을 증강해서 동원에 걸리는 시간을 단축하자는 방안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빌뉴스 군관구와 키예프 군관구, 바르샤바 군관구 등 세 개의 군관구에 병력이 대대적으로 증강되기 시작했습니다. 1883년 당시 이 세 군관구에 배치된 육군 병력은 227,000명이었는데 이것이 1893년에는 610,000명으로 증가했습니다. 이것은 당시 러시아 육군 총 병력의 45퍼센트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서부의 문제는 그럭 저럭 해결이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동쪽의 문제는 전혀 해결 할 수 없었습니다! 만주 방면으로의 병력 이동은 여전히 단선에 불과한 시베리아 철도 하나에 의존해야 했고 다음 전쟁은 바로 일본과 만주에서 벌이게 된 것 입니다!
시베리아 철도는 단선이었다는 점 외에도 러일전쟁이 발발할 때 까지도 완공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러시아군 총참모부는 일본과의 전쟁이 발발할 경우 낮은 철도 수송능력 때문에 병력 이동을 3단계에 걸쳐 나눠서 실행하기로 계획을 세우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계획에 따르면 최우선 동원 순위는 프리아무르 군관구와 시베리아 군관구였고 다음 순위는 키예프 군관구와 모스크바 군관구에서 각각 1개 군단을, 마지막으로는 카잔 군관구의 예비사단이었습니다. 결국 만주 지역도 서부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사전에 충분한 병력과 물자가 집결돼야 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고 러일전쟁에서는 열강치고는 상대적으로 부실한 일본을 상대로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병력과 물자의 부족으로 고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러일전쟁에서 패배한 뒤 러시아의 동원계획은 서쪽의 독일-오스트리아와 동쪽의 일본을 동시에 상대한다는 아주 골치 아픈 조건을 염두에 둬야 했습니다. 1910년에 승인된 19호 동원계획은 이런 환경을 반영해 두 개의 전선에서 동시에 전쟁을 수행한다는 가정하에 수립됐습니다. 하지만 일본과의 전쟁 가능성이 줄어들자 19호 동원계획은 1912년에 개정됩니다. 개정된 동원계획은 서부 전선에 집중하고 특히 전쟁 초기에 동프로이센을 공격해 달라는 프랑스의 요구를 반영했습니다. 1912년의 19호 동원계획 개정판은 А와 Г안으로 나뉘었는데 전자는 독일이 서부전선에 주력을 동원할 경우를 상정한 것이었고 후자는 독일이 동부전선에서 주력을 동원할 경우를 상정한 것이었습니다. Г안은 전쟁 초기에 독일의 주공을 맞아 싸워야 한다는 점 때문에 대규모 병력동원이 필요했습니다.
А안의 경우는 러시아가 선제공격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동원이 느리게 진행되는 것이 특징이었습니다. 이 안에 따르면 동원 완료까지 1군과 2군은 각각 36일과 40일, 3군과 4군, 5군은 각각 40일, 41일, 38일이 걸리는 것으로 상정하고 있습니다. 만약 독일이 선제 공격에 나선다면 20일 정도의 병력 동원 기간만으로도 공격에 나설 수 있겠지만 독일이 서부전선에 전력을 집중할 경우에는 독일에 비해 느린 동원속도가 심각한 문제는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미 러시아는 철도망의 부족을 고려해서 러일전쟁 이후에도 서부지역 군관구에 병력을 집중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1차대전 초기의 전역에서 철도 문제는 이전의 전쟁들 만큼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만약 서부와 동부에서 동시에 전쟁이 발발했다면 7만km 수준의 철도망으로는 병력 동원에 어려움을 겪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을 것 입니다.


참고서적
로스뚜노프 외, 『러일전쟁사』, 건국대학교 출판부, 2004
Stephen J. Cimbala, "Steering Through Rapids : Russian Mobilization and World War I",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Vol.9, No.2(June 1996)
Jacob W. Kipp, "Strategic Railroads and the Dilemmas of Modernization", Reforming the Tsar’s Army,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4)
Bruce W. Menning, Bayonets before Bullets : The Imperial Russian Army, 1861-1914, (Indiana University Press, 1992/2000)
Brian D. Taylor, Politics and the Russian Army : Civil-Military Relations, 1689-2000,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2008년 5월 19일 월요일

보병사단 편제의 변화 : 1909~1916

군사사에 있어서 사단 편제는 ‘근대적’ 군사제도의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단계입니다. 사실상 18세기 말에 등장한 사단편제는 21세기인 오늘날 까지도 전 세계 육군의 기본적인 부대편제로 유지되고 있지요.
Division은 단어에서도 대략 느낄 수 있듯 프랑스인들이 만들어 낸 조직이었습니다. 수많은 전쟁을 치르며 유럽의 패권을 노리던 프랑스는 당연히 군사 문제에 있어서 많은 업적을 이뤘으며 사단 편제의 등장은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 입니다. 프랑스의 군사사상가들은 18세기 중반부터 당시까지의 전쟁에서 각 국의 군대가 처한 구조적인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많은 고민을 했으며 그 결과 4개 연대로 편성된 독립된 작전단위를 구상하게 됩니다. 1788년에는 2개 연대를 여단의 지휘하에 두고 이 여단은 사단의 지휘를 받는 편제가 만들어지고 마침내 1794년에는 혁명정부에 의해 정식으로 2개 여단으로 구성되며 포병과 기병등의 지원부대를 갖춘 사단 편제가 확립됩니다. 사단편제는 전투에서 지휘관에게 보다 많은 융통성을 부여해 줬으며 연대 이상의 전술 단위가 없던 다른 국가의 군대들에 비해 압도적 우위를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가 결정적으로 나타난 것이 1805년의 아우스테를리츠 전역과 1806년의 예나 전역이었습니다. 특히 1806년의 프로이센군은 철저히 박살이 나서 뼈를 깎는 개혁에 들어가게 되지요.

이러한 4개연대-2개여단의 사단편제는 1차대전 까지 계속 유지됩니다만 19세기 후반부터 발전한 군사기술과 이에 따른 전장의 변화는 4각 편제를 개편해야 할 필요성을 이끌어냅니다. 가장 큰 원인은 화력의 급속한 증대로 방어가 공격에 비해 조금씩 유리해 지고 있었다는 점 입니다. 이미 미국의 남북전쟁과 유럽의 보불전쟁에서 이런 조짐이 나타났으며 1877년의 러시아-터키 전쟁에서는 이것이 더욱 명백히 나타납니다. 플레브나 전투에서 러시아군은 참호로 강화된 터키군의 방어선에 여러 차례 대규모 공세를 퍼부었지만 매번 수만의 희생자를 내고 좌절을 겪었습니다. 이 전쟁의 결과는 유럽의 각국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독일군은 중포의 개발에 더 박차를 가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대부분 국가의 보병사단들이 채택하고 있는 3각편제는 어느 국가가 처음 도입했을까요?

정답 : 오스만 투르크


네. 그렇습니다. 오늘날의 3각편제를 처음 도입한 국가는 터키였습니다. 터키는 1877년 전쟁 이후 방어적인 군사전략을 채택하고 있었는데 독일 군사고문단은 방어에서는 4각 편제가 병력 운용면에서 비효율 적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보통 3개 연대를 방어선에 배치하고 1개 연대를 사단 예비로 두는 방어구조는 1개 여단이 아주 애매하게 병력을 운용해야 하는 데다가 예비대의 운용 문제도 불편했습니다. 만약 예비대가 A여단의 예하 연대인데 정작 투입해야 할 지역이 B여단의 방어선이라면?
1883년 오스만 투르크의 독일 군사고문단장에 임명된 골츠(Colmar von der Goltz)는 1887년 전쟁에서 방어의 효율이 높았던 결과에 크게 주목했습니다. 그는 1904년의 러일전쟁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거듭된 점에서 현대전에서 방어의 우위가 높아진 것을 거듭 확신했습니다. 중장으로 진급한 골츠는 계속해서 터키군의 훈련과 개혁을 지도하며 이러한 현대전 양상에 맞는 편제와 전술을 연구했습니다. 골츠는 1909년의 터키군 기동훈련에서 1개보병여단과 1개기병여단으로 편성된 보병사단 편제를 시험합니다. 골츠는 1909년 겨울에 실험적인 보병사단 편제를 거듭 실험했고 그 결과 1910년 터키군 총참모부는 보병사단의 편제를 4개연대-2개여단-보병사단에서 3개연대-보병사단으로 개편하는 결정을 내립니다. 터키군의 새로운 보병사단 편제는 사단에 포병연대가 배속되어 기존에 포병 없이 보병연대만 네개가 있던 보병사단에 비해 화력이 증강되고 방어에 더 적합한 구조가 되었습니다. 터키군은 1910년 10월 3각 편제로 새로이 개편된 1, 2 보병사단을 기동훈련에 투입해 새 편제를 시험했습니다. 이 기동훈련은 2개 군단(6개 보병사단, 2개 기병여단)이 동원된 야전군급 기동훈련으로 대규모 훈련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3각편제는 혁신적인 것 이었음에도 당시에는 별로 주목받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왜냐? 1912년 발발한 발칸 전쟁에서 신편제를 도입한 터키군은 세르비아-그리스-불가리아 연합군에게 참패했기 때문입니다. 마치 프랑스 혁명전쟁 당시 사단편제를 도입한 프랑스군이 신통찮은 성과를 거둔 까닭에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사단편제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라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1차대전에 발발할 당시 주요 열강들은 여전히 4각편제의 보병사단들을 가지고 전쟁에 나갔습니다. 그렇지만 얼마안가서 보병사단 편제는 급격히 3각편제로 바뀌게 됩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 처럼 전쟁이 참호전 위주로 나가자 보병사단들은 공격보다 방어에 적합한 형태로 개편되게 되었던 것 입니다. 먼저 독일과 프랑스가 1916년 까지 모든 보병사단들을 3각 편제로 개편합니다. 독일의 경우는 조금 특이하게 보병여단 사령부가 3개 보병연대를 거느리는 식으로 3각 편제가 만들어집니다. 3각편제는 여러 모로 4각편제에 비해 우월했습니다. 먼저 여단사령부가 폐지되거나 1개로 줄어들었고 보병연대도 1개가 줄어들었기 때문에 사단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인력이 감소했습니다. 다음으로 2개여단-2개포병연대 체제(특히 러시아육군)에서 3개연대-1개포병연대 체제로 전환되면서 1개사단에 필요한 포병도 그만큼 줄어들었습니다.

이렇게 3각편제는 방어위주의 전쟁이 가져온 변화라고 할 수 있는데 기동이 강조된 2차대전 이후의 세계에서도 여전히 그 기본골격이 유지되고 있다는 점은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참고서적
Hermann Cron, 『Imperial German Army 1914-18 : Organisation, Structure, Orders of Battle』, Helion, 1937/2002
Eric D. Brose, 『The Kaiser's Army: The Politics of Military Technology in Germany during the Machine Age, 1870-1918』,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Edward J. Erickson, 『Defeat in Detail : The Ottoman Army in Balkans, 1912-13』, Praeger, 2003
Jonathan M. House, 『Combined Arms Warfare in the Twentieth Century』,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1
Steven T. Ross, 「The Development of the Combat Division in eighteenth-century French Armies」, 『French Historical Studies』, Vol. 4, No. 1, (Spring, 1965)
David Stevenson, 『Armaments and the coming of War : Europe 1900-1914』, Oxford University Press, 1996

2008년 3월 23일 일요일

엑셀의 재미있는 한자변환...

밖에는 비가 오는데 맡은 일은 진도도 잘 안나가고 이래 저래 답답한 주말입니다. 물론, 일의 진도는 느려도 돈은 꼬박 꼬박 받아먹고 있습니다.;;;;;;

그런데 작업을 하다 보니 조금 재미있는 걸 발견했습니다. 엑셀에서 러일전쟁과 청일전쟁을 일본식으로 일러전쟁, 일청전쟁으로 입력해도 한자 변환이 자동으로 日露戰爭, 日淸戰爭으로 되더군요.;;;;; 저는 이렇게 된다는걸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의외로 엑셀에서 한글을 한자로 자동변환하는 기능이 좋네요.

다른 재미있는 자동변환은 또 뭐가 없을까 찾아보는 중입니다.

2007년 5월 11일 금요일

독일 육군의 기관총 도입과 운용 : 1894~1914

많은 분들이 잘 아시는 이야기 같긴 합니다만 농담거리가 생각이 안 나다 보니 이런 글이라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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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년에 맥심이 개발한 기관총이 처음 선을 보이자 많은 국가들이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당연히 유럽의 일류 육군국인 독일 또한 이 새로운 물건에 큰 흥미를 나타냈습니다. 1894년에 맥심 기관총의 실험을 참관한 빌헬름 2세는 기관총의 성능에 크게 감명을 받아 전쟁성에 기관총의 추가 시험을 하도록 지시했습니다. 황제의 취향 탓은 아니겠지만 어쨌거나 독일 육군은 1895년에 기관총을 정식 채용합니다.

일선 부대가 기동훈련에서 기관총을 처음 사용한 것은 1898년이라고 합니다. 이 해에 동프로이센 제 1 군단의 엽병(Jäger) 대대는 기동 훈련에서 기관총을 운용했습니다. 그러나 이 기동훈련에서는 기관총에 대한 평이 별로 좋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많은 고위 장교들은 기관총이 사격 시 총열의 과열 문제가 있고 기동 시 불편하다는 점을 들어 비판했습니다. 이 기동훈련의 결과 엽병대대는 물론 정규 보병 연대 조차 기관총의 도입을 꺼리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정규 직업군인들 보다는 아마추어인 독일 황제가 기관총의 잠재력을 더 잘 파악 하고 있었고 그는 계속해서 군부에 기관총의 운용을 확대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1900년 9월의 기동훈련에서는 기병부대가 기관총을 운용했으나 기병 장교들 역시 기관총은 기동전에 적합한 물건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황제가 기관총의 위력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보수적인 독일 보병 장교들은 기관총의 잠재력을 제대로 파악 하지 못 했으며 그 결과 1904년 까지도 독일 육군은 기관총을 독립 부대로 운용했습니다. 그렇지만 기관총이 쓸만한 물건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했습니다.
러일전쟁 이전까지 독일육군의 기관총 옹호자들은 기관총이 가진 범용성을 강조했습니다. 크레취마르(Kretzschmar), 플렉(A. Fleck), 메르카츠(Friedrich von Merkatz) 대위 같은 위관급 장교들이 대표적인 기관총 옹호자였는데 이들은 기관총은 공격시 특정 지점에 강력한 화력을 집중할 수 있다는 점을 높게 평가했습니다. 플렉은 4정으로 이뤄진 기관총대(Maschinengewehr-abteilung : 대대가 아님)와 소총으로 무장한 100명의 보병(정면 80m로 산개)의 사격실험 결과를 통해 기관총 팀은 한 목표에 대해 5분간 3,600발을 사격할 수 있는데 반해 보병 100명은 500발 내외에 그쳤다는 점을 들어 기관총의 유용성을 주장했습니다.
그렇지만 여러 차례의 운용 시험 결과 몇 가지의 문제점이 지적 됐는데 가장 큰 문제는 보병부대가 돌격을 시작하면 후방에서 지원하는 기관총이 아군의 등 뒤에 사격을 할 수 있다는 점 이었습니다. 실제로 이런 문제점은 기관총 도입 초기에 빈번히 나타났으며 기관총을 공격적으로 활용한 일본군의 경우 러일전쟁 때 이런 실수를 저질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기동을 중시하는 독일의 군인들은 기관총 화력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기동성을 살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1904년 이전 까지 기관총의 화력은 포병의 보조적인 역할 정도로 규정되고 있었습니다. 독일군의 포병운용은 여전히 직접 사격을 통한 화력지원을 중요시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포병은 직접 화력지원을 강조하는 교리 때문에 이동 및 사격 준비 사이가 매우 취약했는데 기관총은 바로 이 시점에서 포병을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독일 육군의 보수적인 장교들 마저 기관총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된 계기는 1904년 러일 전쟁에서 기관총이 괴력을 발휘한 이후 였습니다. 독일은 러일전쟁에서 러시아와 일본 양측이 대량의 기관총을 운용해 효과를 거두자 기관총 활용에 보다 적극적이 됐습니다.
독일은 1907년에 기관총 부대의 단위를 중대급으로 확대하고 기관총의 숫자를 4정에서 6정으로 늘렸습니다. 이 해에 총 12개의 기관총 부대가 중대급으로 확대되었고 1914년 발발 이전까지 현역 보병연대는 모두 기관총 중대를 가지게 됐으며 엽병 대대도 바이에른 1엽병대대와 바이에른 2엽병대대를 제외하면 모두 기관총 중대를 배속 받았습니다. 그리고 기관총의 유용성이 입증되자 기관총을 불신하던 보병과 기병 장교들 조차 기관총을 보병 및 기병연대의 편제에 넣어 줄 것을 전쟁성에 요청하기 시작했습니다. 각 사단마다 기관총대대(3개 중대 편성)을 넣는 안이 제시되기도 했으나 사각편제 체제에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결국은 각 연대별로 기관총 중대가 배치되는 방향으로 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역시 1907년에는 기관총 팀의 기동성을 높이기 위해서 기관총 1정 당 견인용 마필을 네 마리에서 여섯 마리로 늘렸습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방식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기관총 1정 당 말 여섯 마리를 사용하는 것은 기동성은 높였지만 전장에서는 적의 목표가 될 확률을 높이는 위험이 있었습니다. 결국 그 대안으로 기관총의 소형화가 필요했고 그 결과 비록 일선 부대의 요구에는 미치지는 못하지만 MG 08이 도입됩니다. MG 08의 도입 이후 기관총 1정당 견인용 마필은 여섯 마리에서 두 마리로 줄어 듭니다.(기병 사단 소속의 기관총대는 1정당 네 마리)

1914년 전쟁 발발 당시 독일군의 기관총 부대는 정규 보병연대에 배치된 것이 219개 중대, 엽병 대대에 배치된 것이 16개 중대, 예비보병연대에 배치된 것이 88개 중대, 기병 사단에 배치된 것이 11개 대(Abteilung), 보충사단에 배치된 것이 43개 대였습니다.
전쟁 발발 당시 향토연대(Landwehr-regiment)는 기관총 중대가 없었는데 사실 향토연대 급의 예비부대는 전쟁 와중에 소총부족으로 1916년까지 Gew 88을 지급 받을 정도였으니 기관총은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 입니다.
예비 사단 중에서는 제 1근위예비사단(Garde-reserve-division)이 좀 별종인데 이놈의 사단은 이름만 예비사단이었고 전쟁 발발 당시 정규 보병사단 편제를 갖춰 4개 기관총 중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냥 예비사단은 아니고 “근위(Garde)” 예비사단 이로군요. 그리고 제 1예비사단(Reserve-division)은 훨씬 더 해괴한 녀석인데 이 사단은 전쟁 발발 당시 예비 사단 주제에 예하 4개 보병연대 중 3개 연대가 기관총 중대를 2개씩 가지고 있어 기관총 중대가 7개나 됐다고 합니다.

전쟁 발발 당시 보병연대와 엽병대대에 배속된 일반적인 기관총 중대는 다음과 같이 편성되어 있었습니다.

장교 2명
부사관 및 사병 95명
말 45마리
기관총 7정(1정은 예비용)
탄약 수송용 마차 3대
야전 취사차 1대
장비 수송용 마차 1대
건초 수송용 마차 1대
화물 수송용 마차 1대

참고서적

Brose, Eric D., The Kaiser’s Army, The Politics of Military Technology in Germany during the Machine Age, 1870~1918,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Cron, Hermann, Imperial German Army 1914~19 : Organisation, Structure, Orders-of-Battle, (Helion, 2001)
Echevarria Jr, Antulio J, After Clausewitz : German Military Thinkers before the Great War,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0)
Stevenson , David, Armaments and The Coming of War, Europe 1904~1914, (Oxford University Press,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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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8월 9일 수요일

독일 육군의 포병 1871-1914

1.1870-71년 전쟁

보불전쟁에서 크룹(Krupp)의 6파운드 포를 장비한 독일 포병은 여러 전투에서 승리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독일 포병은 불과 4년 전 보오전쟁의 쾨니히스그레츠(Königgrätz)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의 포병에 압도돼 보병의 조롱거리로 전락했던 것과는 달리 주요 전투에서 맹활약을 펼치며 전술적인 승리를 이끌었다.
마-라 투르(Mars-la-Tour) 전투에서 프랑스군 사상자의 60%가 독일 포병에 의한 것 이었고 그 직후의 그라벨로(Gravelotte) 전투에서는 무려 70%였다고 한다.
특히 독일 포병은 그라벨로 전투에서 프랑스 포병보다 세배 많은 포탄을 발사하면서 화력면에서 프랑스군을 압도했으며 프랑스군의 국지적인 역습을 격퇴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프랑스 포병은 청동제 포신에 강선도 없는 포구 장전식 4파운드 포와 위력은 좋지만 기동전에는 부적합한 12파운드 포를 장비하고 있어 독일군 보다 화력면에서 뒤떨어 졌다. 그리고 수 년 전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프랑스는 화력의 집중운용을 써먹어 크게 재미를 봤지만 이번 전쟁에서는 독일군이 이 방식을 써먹는 바람에 피박을 보게 됐다.

이 전쟁을 참관한 각국의 군사 관계자들은 독일군의 후미장전식 철제 강선포가 승리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점에 크게 주목했다.
이미 벨기에는 1866년에 크룹의 철제 강선포를 도입했고 보불전쟁 이후 유럽 각국은 철제 강선포 확보를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독일 포병은 전술 운용 면에서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기도 했다.
대표적인 문제는 보병에 대한 직접 화력지원을 위해 적의 소총 사거리 안 까지 무리하게 전진해서 사격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보오전쟁과 보불전쟁 당시 독일군 포병은 공격하는 보병중대의 600m 후방까지 따라붙어 직접화력지원을 했는데 보오전쟁 당시 오스트리아군의 소총은 이 거리에서 위협이 되지 못했던 반면 보불전쟁 당시 프랑스군의 개틀링과 샤스포 소총은 900m 에서도 타격을 줄 수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그라벨로 전투에서 18 보병사단을 지원하던 포병들은 프랑스군의 샤스포 소총 사격을 많은 피해를 입었다.
보불전쟁에서 독일군 포병은 총 병력의 6.5%의 인명피해를 입었는데 이것은 기병의 6.3% 보다도 조금 높은 수치였다.

그러나 어쨌든 독일은 승리했다.
독일은 포병 전력의 우위를 계속해서 유지하기 위해 신형 장비의 도입을 서둘렀다.

2.러시아-터키 전쟁과 대구경 야포 도입 문제 : 1872-1882

보불전쟁 이후 세계 각국의 군사 관계자들은 현대 전쟁에서 포병의 중요성과 한계를 명확히 인식하게 됐다.
독일군이 보오전쟁과 보불전쟁에서 보여줬듯이 효과적인 공격준비 사격은 중요한 요소였지만 이를 위해서는 소총의 유효사거리 밖에서 효과적으로 포격을 할 수 있는 야포가 필요했다.

독일은 보불전쟁이 끝난 뒤 전쟁에서 크게 활약한 6파운드 포를 대체할 신형 야포의 개발에 착수했다.
그 결과 1874년 채용된 것이 88mm C-73 이었다.
C-73의 최대 사거리는 7,000m로 6파운드 포에 비해 거의 2배 이상 늘어났으며 함께 도입된 신형 포탄의 파편효과도 크게 향상돼 보병에 대해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파편효과가 두 배 향상된 C-76 유탄이 도입됐다.

그러나 아직 1870년대의 포병 장교들은 C-73의 향상된 사거리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보다는 기존의 전술에 맞춰 사용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 무렵의 일반적인 포병 전술은 2,000-2,500m 에서 적 포병을 무력화 시킨 뒤 600-700m 까지 전진해 직접 화력지원을 하는 것 이었다.
1876년 당시 포병 소령이었던 호프바우어(Ernst Hoffbauer)가, 그리고 1878년에는 포병 연대장이었던 쉘(Adolf von Schell)이 이런 내용의 교범을 저술했다. 특히 쉘의 경우 보병에 대한 직접화력 지원을 극단적으로 강조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1880년에 이르러 C-73이 기존의 야포들을 대체하면서 이 우수한 물건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방법이 강구됐고 점차 군사 이론가들은 보병을 뒤따르며 직접화력을 지원하는 것 보다는 보다 늘어난 최대사거리와 유효사거리를 활용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인정하게 됐다.
먼저 1880년 몰트케가 직접 화력지원에는 포병 전력의 극히 일부만을 투입하고 대부분의 포병은 적 방어전면으로부터 최소 2,000m 이상 떨어진 위치에서 사격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1881년 7월에는 이것이 문서로 공식화 됐다.
그리고 보병에 대한 직접화력 지원에 대한 중요성이 줄어 들면서 신속히 이동시킬 수 있는 소구경, 경량의 화포 보다는 장거리에서 더 강한 위력을 발휘하는 대구경 화포에 대한 필요성이 증대되기 시작했다.
쉘 같이 기존의 포병 운용방식을 고집하는 이론가들은 이에 대해 반박하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으나 러시아-터키 전쟁은 보수적인 이론가들에게도 충격을 안겨 줬다.

1877년의 플레브나(Plevna) 전투는 대구경 야포의 도입을 주장하던 이론가들에게는 복음과도 같았고 경량의 소구경 야포와 보병에 대한 직접지원을 강조하던 이론가들에게는 그들의 이론이 미래의 전쟁에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일깨워 줬다.
러시아군은 플레브나의 터키군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매번 막대한 손실만 내고 실패했다. 러시아 포병은 주요 공세 때 마다 300-400문의 야포를 동원해 3-6시간의 공격 준비사격을 퍼부었으나 러시아군의 소구경 야포들은 참호로 강화된 터키군의 방어진을 분쇄하는데는 거의 효과가 없었다.

독일 군사이론가들은 “현대전”에서 야전 축성의 중요성과 이를 분쇄하기 위한 대구경 화포의 필요성을 이미 남북전쟁 시기부터 제기하고 있었다.
남북전쟁 당시 중령의 계급으로 북군의 여러 요새 공격을 참관한 프로이센군의 쉘리아(von Scheliha)는 소구경 화포의 포격이 남군의 야전 축성에 거의 효과가 없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리고 이어 보불전쟁에서도 4파운드 포와 6파운드 포는 참호에 들어앉은 프랑스군을 때려잡는데 효과가 적다는 것이 입증됐다.

보불전쟁 직후인 1872년, 젊은 포병 장교들은 보다 대구경인 120mm 유탄포의 도입을 요구했으나 군 상층부는 당시 개발 중이던 C-73으로 야전포병의 장비를 통일하려고 하고 있었기 때문에 120mm 유탄포는 결국 도입되지 않았다.

그러나 플레브나 전투의 결과 독일의 보수적인 이론가들 조차 적의 야전 축성을 분쇄하기 위한 대구경 화포의 도입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C-73은 기존의 포병 교리에 맞춰 개발됐고 특히 탄도가 직사인데다가 사용하는 포탄도 파편효과를 노리고 개발된 것 들이어서 야전 축성에 대한 공격에는 거의 효과가 없었다.
플레브나 전투 이후 몰트케는 총참모부에 현대 야전 축성과 이를 공략하기 위한 대구경 야포 문제를 적극적으로 연구하도록 명령했다.
독일군은 1882년 새로 도입한 150mm 구포(Mörser)와 1872년 도입된 210mm 구포로 적 참호에 대한 공격을 시험해 봤으나 두 종류 모두 매우 형편없는 결과를 보였다.
게다가 프랑스가 1885년과 1886년에 걸쳐 베르덩(Verdun), 벨포르(Belfort) 요새를 콘크리트와 철근으로 강화한 것은 독일군에게 또 다른 문제를 안겨줬다.
당시 독일 포병은 철근과 콘크리트로 구성된 야전 축성을 분쇄할 효과적인 수단이 사실상 전무했던 것이다.

3.프랑스의 도전과 러일전쟁의 영향 : 1883-1904

독일의 군사 이론가들이 새로운 전쟁 환경에 대해 전전긍긍하는 동안 프랑스는 복수의 칼을 열심히 갈고 있었다.
혁신적인 포병 장교단은 1886년부터 대구경 유탄포의 도입을 강력히 주장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1887년이 돼서야 뒤늦게 120mm 유탄포가 독일군에 도입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120mm 유탄포의 초기 야전 실험은 포병들이 직사탄도를 가진 C-73에 익숙했기 때문에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결정적으로 여전히 보수적인 군 상층부에서는 C-73과 기존의 포병 운용방식을 고집하고 있었다.
1897년에 도입된 77mm C-96은 포신에 니켈 합금강을 사용해 C-73의 단점이었던 짧은 포신 수명을 극복했지만 기본적으로 20년이나 뒤떨어진 교리를 바탕으로 만들어 졌으며 프랑스가 1898년에 도입한 75mm 포에 비해 여러 면에서 뒤떨어지는 물건이었다.
프랑스군의 75mm 포는 유압식 제퇴기 등 최신 기술을 적용해 분당 발사속도가 최대 20발(!)에 달했는데 이것은 보병에 대한 직접지원사격을 중시하는 교리에서 보면 엄청난 장점이었다. 반면 C-96은 분당 발사속도가 5발 정도에 불과했다.

결국 이런 어수선한 상황을 해결한 것은 발더제의 뒤를 이어 육군 총참모장이 된 슐리펜(Alfred von Schlieffen)이었다.
슐리펜은 1896년 참모본부에 대구경 유탄포의 잠재성을 연구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이 결과 105mm l.FH 98의 개발이 시작됐다. C-96을 선호한 보수적인 포병 장교들은 l.FH 98이 일곱 종류의 탄약을 사용해 신속한 이동과 운용이 어렵다는 점을 들어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다. 특히 1891년에 포병감에 임명된 호프바우어는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l.FH 98은 1900년부터 양산돼 대량으로 장비되기 시작했다. 결국 호프바우어를 중심으로 한 보수적인 포병장교단과 슐리펜을 중심으로 한 총참모부 및 개혁적인 포병장교단의 대결은 후자에게 유리하게 기울기 시작했다.

한편, 1900대 초 까지 88mm C-73과 77mm C-96이 주력 야포였던 독일군은 프랑스군의 유압식 제퇴기를 갖춘 75mm포의 등장으로 크게 한방 먹게 됐다.
무엇보다 프랑스군의 75mm포의 압도적인 발사 속도는 독일 총참모부에 큰 충격이었다.
1901년에 전쟁상 이었던 고슬러(Heinrich von Gossler)는 육군에 프랑스군의 75mm포에 대응할 야포의 개발을 명령했다.
특히 보어전쟁에서 영국군은 압도적인 포병 전력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보어군이 사용한 막심 75mm 포의 속사에 큰 피해를 입었고 이것은 독일군에게도 속사가 가능한 야포의 개발을 서두르게 했다.
그 결과 1907년에 C-96을 개량한 C-96 n/A(neue Art)이 채용됐는데 이것은 한참 뒤의 이야기다.

한편, 러일전쟁은 독일군에게 현대적인 요새를 효과적으로 때려잡을 수 있는 대구경 화포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해 줬다.
일본군은 려순 요새 공격에 총 443문의 야포를 투입했지만 18문의 280mm 포와 72문이 투입된 150mm 구포를 제외하면 러시아군의 방어망을 분쇄하는데 효과적인 물건은 별로 없었다. 특히 120문이 투입된 75mm 포는 잘 구축된 야전축성에 대해 거의 효과를 발휘하지 못 했다.

4.중포의 도입과 대구경 공성포의 개발 : 1905-1914

독일은 1903년 까지 총 23개 군단 중 105mm 이상의 중포를 장비한 군단이 단 하나도 없었으나 1904년 150mm s.FH 02가 채용되면서 조금씩 프랑스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1904년 10개 포대가 150mm s.FH 02를 장비한 이후 배치가 확대됐다.

그리고 위에서도 언급 했듯 프랑스군의 75mm 포에 대한 소극적인 대응으로 C-96의 개량형인 C-96 n/A가 1907년부터 육군에 보급되기 시작했다.
C-96 n/A는 유압식 제퇴기를 갖춰 프랑스군의 75mm와 거의 비슷한 발사 속도를 가지게 됐고 포 방패를 장비해 포병에 대한 보호도 강구 됐으나 신형 포신을 장비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정거리는 프랑스의 75mm 보다 1,000m가 짧았다.
이와 함께 105mm l.FH 98를 개량한 l.FH 98/09가 1910년부터 생산에 들어갔다.
독일군은 신형 105mm 포의 생산과 함께 23개 군단에 각 3개 포대로 구성되는 105mm 포병 대대를 배속시키는 한편 1913년 까지 105mm 포의 배치를 664문으로 늘려 프랑스를 완전히 압도했다.
그리고 사단 포병의 1개 대대는 105mm l.FH 98/09를 장비해 프랑스군 사단을 화력면에서 완전히 압도할 수 있게 됐다.
또 150mm 유탄포는 1913년 까지 400문이 배치돼 각 군단은 4개 포대의 150mm를 보유할 수 있게 됐다.

신형 장비의 도입과 함께 포병 교리도 완전히 바뀌게 됐다.
1907년의 포병 교범은 이미 사실상 폐지된 것이나 다름 없던 보병에 대한 직접화력 지원을 폐기했다.
러일전쟁에서 드러 났듯 참호에 들어 앉은 보병을 1,000m 이내의 근거리에서 직접 사격으로 제압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 이었다.
그리고 1907년 포병감으로 임명된 슈베르트(Schubert) 장군은 프랑스 군과 마찬가지로 포 진지를 위장하고 관측장교의 통제에 따른 사격을 강조했다.
유선 전화의 도입은 전방의 관측 장교와 후방의 포대를 유기적으로 연결해 효율적인 운용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1910년 독일군의 야전 기동을 참관한 프랑스 장교단은 자신들이 먼저 사용한 방식을 독일군이 능숙하게 사용하는 점에 주목했다.
물론 대개 보병 병과인 군단장급 장성들은 5,000m 이상의 거리에서 관측장교의 통제에 따라 사격하는 것을 포탄 낭비라고 생각했지만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그리고 갈수록 강화되는 벨기에와 프랑스의 요새들은 대구경 공성포의 개발을 가속시켰고 1903년에는 신형 210mm 구포가 배치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독일 총참모부는 여러 실험을 거친 결과 콘크리트와 철근으로 구축된 요새에 효과적인 물건은 1906년 당시 겨우 6문이 생산된 305mm 베타(Beta Gerät)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보다 더 강력한 공성포를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마침내 1909년에는 420mm 유탄포인 감마(Gamma Gerät)가 개발됐다. 감마는 2년에 걸친 테스트를 받은 뒤 1911년 육군에 인도 됐다.
그러나 감마는 무려 175톤에 달하는 괴물이었기 때문에 육군에서는 크룹에 좀더 이동과 운용이 용이한 420mm 포를 개발할 것을 요청했고 이 결과 44톤에 불과한 420mm M Gerät가 개발됐다.
감마의 최대 사거리가 17km에 달한 반면 M Gerät는 그 절반에 불과한 9km에 불과했고 포탄의 위력도 약했다.
독일군은 전쟁 초기 벨기에와 프랑스의 요새들을 격파하기 서는 8문의 420mm와 16문의 305mm, 그리고 이를 지원할 100문 이상의 210mm급 구포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는데 305mm의 경우 배치된 수량이 부족해 1차 대전이 발발했을 때는 오스트리아로부터 스코다제 305mm포를 빌려와야 했다.
독일군은 1911년 까지 예산 문제로 305mm 포를 10 문 확보하는데 그쳤는데 이것은 1년 평균 1 문도 생산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1914년 까지 추가로 2문이 더 생산되는 데 그쳤다.

독일군의 중포 및 공성포 배치는 원래 계획에는 조금 못 미치는 것 이었으나 다른 경쟁국들에 비하면 압도적인 것 이었다.
특히 개전초기의 전투에서 독일군의 강력한 화력은 벨기에의 요새들을 분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이 글을 쓰면서 베낀 책 들
Eric D. Brose, The Kaiser’s Army – The Politics of Military Technology in Germany during the Machine Age 1870-1918
Antulio J. Echevarraia Jr, After Clausewitz – German Military Thinkers before the Great War
David G. Herrmann, The Arming of Europe and the Making of the First World War
Jonathan M. House, Combined Arms Warfare in the Twentieth Century
Jay Luvaas, The Military Legacy of the Civil War – The European Inheritance
Bruce W. Menning, Bayonets before Bullets – The Imperial Russian Army, 1861-1914
Geoffrey Wawro, The Franco-Prusian War – The German Conquest of France in 1870-1871

2006년 5월 21일 일요일

러시아 육군의 개혁 1880-1914 (재탕!)

내가 생각해도 징허다.. 재탕 삼탕 사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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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이후 러시아 육군은 신무기 도입과 체제 개편에 박차를 가했다.

먼저 보병화기의 교체가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1880년대로 들어오자 끄렝끄식 소총은 물론 단발 노리쇠 장전식인 베르던 소총역시 구식화 되었고 유럽 각국이 채용하기 시작한 무연 화약을 사용한 탄창식 노리쇠 장전 소총은 러시아가 보유한 어떠한 보병 화기 보다도 우수했다. 러시아 육군은 1884년 까지 구식인 끄렝끄식 소총을 모두 베르던 노리쇠 장전식 소총으로 교체했지만 이때는 이미 이 소총 조차 구식화 된 상태였다.

이 때문에 러시아 육군은 1889년부터 무연 화약을 사용하는 탄창식 노리쇠 장전 소총의 도입을 추진했으며 여기에 벨기에의 레옹 나강이 설계한 소총과 러시아 육군 장교인 모신이 설계한 소총이 경합을 벌인 끝에 모신의 소총에 나강 소총의 탄창 구조를 결합한 소총이 제식 명칭 M1891으로 채택되었다. 러시아 육군은 1897년까지 200만 정을 생산해서 일선 보병 사단의 장비를 완전히 교체했으며 1903년까지 추가로 170만 정을 생산해서 예비 여단까지 장비 시켰다. 이렇게 해서 러-일 전쟁이 발발했을 때 러시아 육군은 1877년의 전쟁과는 달리 소화기 면에서 상대방을 압도할 수 있었다.

또한 기병의 부무장도 1895년에 나강의 리볼버로 교채했다. 나강 리볼버는 1898년부터 뚤라 육군 조병창에서 생산에 들어갔다.

포병은 강철제 강선식 야포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1880년대까지도 러시아 육군은 시대에 뒤떨어진 청동제 활강포를 장비하고 있었다. 포병의 낙후성은 러시아 육군의 가장 큰 고민 거리였다. 터키와의 전쟁에서 터키군의 야포에 호되게 당하고 나서야 철제 대포의 도입이 급히 추진 되었는데 러시아 내에는 생산 설비가 없어서 1877년에서 1878년 사이에 1,500문을 독일의 크룹 사로부터 수입했다. 자체 생산은 외국에서 도입한 설비로 오부호프 조병창에서1878년부터 시작되었다. 오부 호프 외에 뻬름 조병창도 생산 설비를 교체해서 500문의 철제 대포를 생산했다. 1881년 까지 러시아 육군은 4,884문의 철제 화포를 도입했는데 이중 러시아에서 생산한 것은 2,652문 이었고 독일에서 수입한 것이 2,232문 이었다. 독일에서 수입한 것 중 1,500문은 전시에 긴급히 도입한 것이므로 실제 수입량은 732문이며 이것은 전체 생산량의 4분의 1 정도에 해당하는 것 이었다. 러시아는 야포의 국산화에 그런대로 성공을 거둔 셈 이었다.

1897년에 독일 육군이 신형 77 mm포를 채택하자 러시아는 이에 큰 자극을 받아 76mm급 야포의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신형 76mm 포는 1900년에 정식 채용되어 생산에 들어갔고 1902년에 개량형이 채택되었다. 76.2mm M1902는 1차 대전 기간 동안 러시아 육군 보병 사단과 기병 사단의 표준 화포였으며 1930년대까지 개량을 거쳐 계속 사용되었다.

한편, 19세기 말 보병 전투를 뒤바꿀 혁신적인 무기가 등장했는데 그것이 바로 기관총 이었다. 러시아 육군은 일찍이 1870년에 수동식 개틀링을 도입해서 사용해 보았으나 수동식 개틀링은 이를 조작하는 사수가 피로해 지면 발사 속도가 급격히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어서 크게 호평 받지 못했다.

하지만 미국인 맥심이 1885년에 개발한 기관총은 이런 수동식 개틀링의 단점을 완전히 극복한 것 이었으며 1889년에 영국 육군에 정식 채용된 것을 필두로 유럽 각국의 군대에 급속히 보급 되었다. 당시 맥심 기관총은 “일반 소총병 1개 중대에 필적하는 화력”을 가졌다고 평가 되었으며 러시아 육군 역시 이 새로운 무기를 시험해 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러시아 육군은 1896년에 2정의 맥심 기관총을 도입하여 시험 평가를 했으며 그 결과 맥심 기관총을 도입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1899년에 58정의 맥심 기관총이 영국으로부터 170,051 루블에 도입 되었으며 1902년부터는 뚤라 조병창에서 면허 생산이 시작되었다.

병력의 증강도 계속 되었다. 1871년에 프로이센의 징병제 군대가 프랑스의 직업군인으로 구성된 군대를 완파 하자 유럽대륙의 여러 나라들은 앞 다투어 징병제를 도입했다. 징병제로 인해 벨기에 같은 소국도 수십 개 사단을 운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독일식의 예비군 체제는 유사시에 현역의 수배가 넘는 대군을 동원 할 수 있게 만들었기 때문에 프랑스 등 주변국들도 예비군을 증강 시킴과 동시에 현역 사단도 증강 시켰다.

러시아 육군은 1881년 근위 사단 3개, 척탄병 사단 4개, 보병 사단 41개를 포함해 총 48개 사단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이 1903년까지 보병 4개 사단이 추가되어 52개 사단으로 증강 되었으며 육군 병력은 1881년에 장교 30,768명, 부사관과 사병 844,396명에서 1904년에는 장교 41,079명, 부사관과 사병 1.066,894명으로 증가했다. 포병은 1881년에 107,601명에서 1903년 154,925명으로 증가했으며 현역 사단들은 청동제 포를 신형 M1902로 교체했다. 기병은 1881년에 근위 기병 2개 사단과 일반 기병 18개 사단이던 것이 1903년에는 근위기병 2개 사단, 일반 기병 17개 사단, 까자끄 기병 6개 사단으로 증가했다. 한편, 예비군은 1899년에 1,969,000명에 달했는데 총 21개 예비 여단이 전시 동원에 들어가면 35개 보병 사단으로 개편 되도록 계획 되었다.

그러나 세계 어느 나라 보다도 많은 병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전시에 이들을 동원하여 이동 시키는 것은 심각한 문제였다. 러시아의 철도망은 아직 부실했으며 독일이나 오스트리아가 가설한 철도의 총 연장 보다도 못할 정도였다. 넓은 영토에 비해 교통망이 발달하지 못 했기 때문에 전시 동원에서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보다 느릴 것은 뻔히 예상되는 일 이었다. 그나마 철도의 도입으로 1867년에는 동원 완료에 25일 이나 걸리던 끼예프 군관구가 1872년에는 9일로 줄어 들었으며 역시 1867년에 동원 완료 까지 111일이 걸리던 까프까즈 군관구가 39일로 줄어 들었다. 1877년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에서도 1876년 11월과 1877년 4월에 부분 동원을 미리 시행 했기 때문에 전쟁 발발시 비교적 신속한 병력 동원이 가능 했던 것 이었다. 전시 동원 속도가 매우 느렸기 때문에 위기 상황이 닥칠 때의 대응 능력은 매우 떨어 졌으며 이것은 군 수뇌부의 큰 고민거리였다. 이 고민 거리는 곧 현실화 되었는데 바로 일본과의 전쟁이었다.

1904년에 벌어진 러-일 전쟁은 일본이 신속히 황해의 재해권을 장악 함으로서 초반부터 일본이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일본군은 여순항을 손쉽게 고립 시켰으며 비록 러시아가 1902년부터 만주 일대의 군사력을 증강 시키고 있었다고는 하나 일본군에게 순식간에 압도 당했다. 러시아는 매우 멀리 떨어진 만주까지 병력을 동원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으며 이 때문에 여순이 고립될 동안 방어만을 취하고 있었다. 러시아군 포병은 일본군이 투입한 대구경 공성포에 대항할 수단이 없어 속수 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다.

러시아 만주 야전군은 제 1 시베리아 군단과 제 3 시베리아 군단으로 편성 되었는데 이 전력으로 일본군의 3개 야전군(1, 2, 4군)을 상대해야 했다. 시베리아 군관구에서 제 2,4,6 시베리아 군단과 10, 17 군단이 증원 된 후에야 일본군과의 병력 격차가 줄어들었다. 양군은 꾸준히 병력을 증강 시켜서 1905년 1월이 되면 일본군은 만주에 5개 야전군을 투입했으며 러시아도 비슷한 규모의 병력을 투입했다. 하지만 병력 규모는 비슷했으나 러시아군은 상당수가 예비군에서 동원한 시베리아 군단이 주축이었으며 화력은 일본의 정규 사단에 비해 열세했다. 1905년 2월에 벌어진 목단 전투에서 양군의 병력 차는 나지 않았으나 일본군이 254정의 기관총을 보유한 반면 러시아군은 54 정에 불과했다. 또한 러시아 군이 1,200문의 화포를 보유해서 일본군의 1,000문에 비해 우세했지만 역시 러시아군은 중포를 거의 보유하지 않았다. 이 전투에서 러시아군은 총 병력 276,000명중 90,000명을 잃었으며 일본군은 270,000명중 70,000명을 잃었다. 목단 전투는 러-일 전쟁의 지상전에서 여순 전투와 함께 가장 결정적인 전투가 되었다.

러-일 전쟁은 또 다른 개혁의 시작이 되었다. 러-일 전쟁의 참패는 터키와의 전쟁 처럼 새로운 문제를 던져 주었다. 방대한 러시아의 영토는 유사시 신속한 병력의 전개에 큰 장애 요인이 되었으며 일본군은 러시아 육군 보다도 우세한 화력을 가지고 있었다. 훈련상태가 부실한 예비군이 주축이 된 러시아 육군은 불필요하게 많은 희생을 냈으며(비록 일본군 역시 나을 것은 별로 없었으나) 지휘관들의 자질 부족도 심각했다.

1909년에 새로 전쟁상이 된 수호믈리노프는 러시아 육군의 취약점을 개선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06년부터 러시아의 경제가 높은 성장을 이루었기 때문에 군 개혁을 위한 재정 확보는 큰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개혁을 실행할 군인들의 사상이었다.

러-일 전쟁의 경험으로 전투시 양 측방을 보호하고 정찰 및 원거리 타격을 수행할 대규모 기병 집단의 필요성이 강조 되었으나 기병은 보병과 달리 유지 비용이 비싼 것은 물론 훈련에도 시간이 걸려서 예비군으로 만들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러시아는 세계 최고의 기병 보유국 임에도 불구하고 기병 부족에 시달렸다. 러-일 전쟁 직후인 1905년에 74,300명이던 기병은 1908년 까지 83,517명으로 증가했지만 군 수뇌부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불충분 했다. 동원 문제 때문에 기병 사단과 연대들은 최대한 국경 근처에 배치되었다.

포병도 마찬가지로 별로 좋지 않은 상황에 처해 있었다. 러시아 육군의 고위 장성들은 중포의 도입을 추진하기는 했지만 야전 부대가 아닌 요새에 배치하기를 원했으며 운용상의 편의를 위해 1개 포대를 야포 6문으로 줄이자는 안은 1개 포대 8문을 고집하는 고참 포병 장교들로 인해 난항을 겪고 있었다. 요새포를 확보하려는 고위 장교들의 고집은 1911년부터 1914년 까지 유럽의 군비 경쟁이 절정에 달한 시기에 엉뚱한 곳에 수백만 루블의 예산을 낭비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전쟁상 수호믈리노프는 요새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장성들과 타협을 해서 낡은 요새 몇 개를 해체하고 요새 주둔 부대를 예비 연대로 개편할 수 있었지만 이 절충안은 실질적인 전력 증강에는 도움이 되지 못 했다. 각 군단 포병에 122mm 유탄포와 152mm 유탄포를 배치해서 독일의 군단 포병과 비슷한 전력을 확보 하려는 시도는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전쟁이 발발 했을 때 러시아 육군의 1개 군단은 평균 122mm 유탄포 12문을 보유한 것에 그쳤다.

러-일 전쟁에서 큰 위력을 보인 기관총은 더 대량으로 장비 되었다. 각 보병 1개 연대마다 기관총 8정이 배속 되었다. 1914년 까지 러시아 육군은 4,157정의 기관총을 보유 하게 되었다.

기병은 여전히 중요시 되었다. 다른 국가와 마찬가지로 기병 병과는 전통적인 귀족의 아성이었으며 군사 귀족들의 자부심의 상징이기도 했다. 기병의 역할은 보병 사단의 측면을 방어하고 정찰을 실시하며 유사시 적 기병을 격파하는 것 이었다. 또한 정규 기병의 경우 말에서 내러 보병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훈련 받았다. 까자끄 기병의 경우는 근접전을 위해 기병도를 사용했다. 한편 1912년부터 모든 기병 부대는 기병창을 필수 장비로 가지게 되었는데 이것은 전투에서 “충격 효과”를 내기 위해서 였다.

내연 기관을 사용하는 자동차의 도입은 군의 큰 관심을 끌었다. 1898년 12월에 끼예프 군관구 사령관이던 드라고미로프대장이 차량을 군사 수송에 사용하는 방안에 대해 전쟁성에 건의를 했다. 당시 전쟁상 이었던 꾸로빠낀은 이 제안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해서 공병에 시험 부대를 편성해서 차량 운용을 시험해 보도록 지시했다. 이를 위해서 영국에서 자동차가수입 되었으며 1902년에 끼예프와 꾸르스끄 지구의 기동훈련에 처음으로 자동차가 사용 되었다. 자동차 기술의 급속한 발전으로 자동차의 도입은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1906~8년 까지 트럭과 프랑스에서 수입한 장갑차의 시험이 진행 되었다. 그러나 시험은 소규모로 이루어져 군 상층부에 큰 인상을 주지는 못 했다. 최초의 자동차 부대는 공병에 편성되었는데 1910년에 5개 중대가 편성되어 철도 공병에 배속 되었다. 1914년 까지 러시아 육군은 트럭 418대, 승용차 259대, 구급차 2대, 기타 챠랑 32대, 오토바이 101대를 보유했다. 전쟁이 발발했을 때 러시아 전역에는 약 9,000대의 차량이 있었는데 이중 트럭 475대와 승용차 3,562대가 육군에 징발 되었다.

대부분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러시아의 군 항공역시 육군 항공대의 일부로 출발했다. 러시아의 육군 항공대는 1909년에 정식으로 창설 되었는데 1909년부터 1911년 까지 육군 공병국 예하에 있었다. 1911년 까지 러시아 육군 항공대는 항공기 30대로 성장했는데 항공기는 모두 프랑스에서 수입한 기종이었다. 이 무렵 러시아는 러일전쟁의 참패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서 다시 군사력을 증강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1911년에는 항공기가 육군의 기동 훈련에 참가하여 군사적인 잠재력을 인정 받았다. 이 성공에 힘입어1912년에는 육군 항공대가 총 참모부 중앙 관리국(GUGSh) 예하로 배속 변경 되었으며 각 군단에 직할대로 비행기 6대로 편성된 1개 비행대를 배속시킨다는 계획이 세워졌다.

러시아 육군 항공대는 급속히 성장해서 1913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연합 제국을 추월하여 동유럽에서는 독일에 맞설 수 있는 항공력을 갖추게 되었다. 1913년 4월 1일에 러시아 육군 항공대는 13대의 비행선과 150대의 항공기로 증강되었으며 전쟁 직전인 1914년 8월 초에는 비행선 22대와 항공기 250대, 그리고 항공대 39개로 증강되었다. 또한 1913년에는 러시아 해군도 항공대를 편성했다. 1912년부터 1913년까지 벌어진 발칸 전쟁에서 항공기가 정찰과 연락에 매우 효과적이라는 것이 입증되자 러시아 육군과 해군은 항공기의 추가 획득에 박차를 가했다.

개전 직전에 러시아 육군 항공대는 양적으로 큰 성장을 이루었다. 그런데 실제로는 매우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다. 러시아 전쟁성은 육군 항공대를 수입한 항공기로 성장시키고 있었으며 명확한 항공 산업 육성 정책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러시아 육군 항공대는 24 종류의 항공기와 12 종류의 항공기 엔진을 사용했으며 1차 대전이 발발하자 주로 독일제 엔진을 사용하던 항공기 16종류는 예비 부품 이 바닥나서 운용 불능이 되었다. 러시아의 항공 산업은 항공기 조립 생산에 불과한 수준이었으며 항공기 공장은 그저 단순한 “작업장”수준 이었다.

지휘 통신 체계는 병력의 증가를 따라 가지 못 했다. 1914년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삼소노프의 제 2 군은 군 전체에 겨우 25대의 유선 전화를 보유했을 뿐 이었으며 대부분의 통신을 모르스 전신기에 의존했다. 그리고 실전에서 제한된 전화선으로는 예하 군단들 조차 제대로 통제하기가 어려워 전령을 사용하는 실정이었다.

한편, 1912년에 들어오면서 안보 환경에 큰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먼저 러-일 전쟁 이래 숙적이던 일본과의 전쟁 가능성이 희박해 진 대신 동맹국 프랑스와의 밀착으로 독일에 대한 선제 공격의 필요성이 증대했다. 프랑스는 동원 개시후 12일 안에 독일에 대한 공세에 나설 것 이기 때문에 러시아 역시 여기에 맞춰 공격을 개시해야 한다고 압력을 넣었다. 이 때문에 기존에 있던 제 19호 동원 계획을 수정할 필요성이 제기 되었다. 수정 안은 두개가 만들어 졌는데 첫번째 수정안은 А 로서 독일이 프랑스 전역에 주력을 집중할 경우를 상정한 것 이었다. 수정안 А에서는 북서 전선군 예하에 레넨깜프 대장이 지휘하는 제 1 군과 삼소노프 대장이 지휘하는 제 2 군이 동 프로이센에 대한 공격을 맡았으며 이 두개 야전군에 17개 보병 사단, 1개 보병여단과 8개 기병사단, 1개 기병여단 그리고 야포 1,104문과 병력 250,000명으로 편성 되었다. 이 계획에서 주공은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두어 졌으며 이 때문에 남서 전선군 예하에 3, 4, 5, 8 야전군이 배속 되었고 이 경우 남서 전선군은 34개 보병사단, 1개 보병여단 12개 기병사단, 1개 기병여단에 총 병력 600,000을 가지게 되었다. 이 계획안에 따를 경우 공세를 위해서 동원을 완료하는 시점은 20일에서 41일 사이였다.

독일이 주력을 러시아 전선에 집중해서 선제 공격에 나올 경우를 대비한 것이 Г 계획 이었다. 이 경우 1, 2, 4 군이 독일에 대항해 투입 되고 3군과 5군은 오스트리아의 공격을 막도록 했다. 이 경우 러시아는 시베리아 등지에서 충분한 예비 병력이 동원 될 때 까지 완전히 방어로만 전환할 계획 이었다. 그러나 이 경우 시베리아 철도가 아직 충분히 정비 되지 못 해서 실제 동원 시 병력 동원 속도가 계획한 대로 나올 수가 없었다. 실제로 실제 동원 속도는 계획한 수준의 75%에 불과 했다. 여기에 동원한 병력을 지원할 보급 수송체계도 문제가 많았는데 독일 군의 경우 전시에 250,000대의 철도 차량을 동원 할 수 있었는데 러시아는 불과 214,000대에 불과했다.

한편 1912, 1913년의 독일 육군 법 제정과 발칸 전쟁으로 인한 오스트리아와의 전쟁 가능성 증대로 러시아 황제는 육군 예산을 더 증가 시켰다. 우선 1917년 까지 현역을 400,000명 더 늘리는 한편 군단 당 108문인 야포를 132문으로 늘리기로 결정했다. 또한 위에서도 언급 했듯이 프랑스 식으로 1개 포대를 야포 4문으로 개편하는 안도 추진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 두마는 1914년 7월 까지도 이에 필요한 예산안을 통과 시키지 않고 있는 상황이었다. 전쟁이 벌어졌을 때 러시아 육군은 몇 년 전과 비슷한 상태에서 전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글을 쓰면서 베낀 자료들...

Bruce W. Menning, Bayonets Before Bullets: The Imperial Russian Army, 1861-1914(Indiana University Press, 1999)
Daivd G. Herrmann, The Arming of Europe and the Making of the First World War(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7)
Jonathan Grant, "Tsarist Armament Strategies 1870~1914",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Volume 4, Issue 1(1991. 3)
Nikolai K. Struk, "Motor Vehicle Transport in the Russian Army, 1906~14",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Volume 12, Issue 3(1999. 9)
Stephen J. Cimbala, "Steering through Rapid : Russian mobilization and World War I",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Volume 9, Issue 2(1996.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