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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1월 12일 토요일

스탈린그라드 3부작에 대한 데이빗 글랜츠의 인터뷰

『독소전쟁사』를 함께 작업했던 분들과 진행하던 데이빗 글랜츠의 스탈린그라드 3부작이 잠시 보류되었습니다. 1권 일부는 번역된 상태였지만 3부작이 아직 완결된 상태도 아닌데다 분량 자체가 많아서 접촉해본 출판사들이 약간 부담을 느낀게 큰 원인이었습니다. 완전히 취소된 것은 아니고 마지막 3부가 나온 뒤에 다시 협상해볼 여지는 있습니다만 아쉬운 것은 사실입니다.

다행인 것은 스탈린그라드 3부작 대신 2차대전에 관한 다른 재미있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었다는 것 입니다. 새 프로젝트는 2013년 쯤 출간될 수 있을 것 입니다. 저는 지금 준비중인 책이 예정대로 2012년에 마무리되면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당분간 스탈린그라드 프로젝트가 진행되지 못하는 것이 아쉽긴 합니다. 제 블로그에 들러주시는 분 들 중에서는 이미 원서를 읽으신 분들도 많으시겠지만 번역본을 기다리시던 분도 많으실 것 같아 더 아쉽습니다. 그래서 아직 원서를 읽어보지 못한 분들을 위해 World War 2, 2010년 5/6월호에 실린 “스탈린그라드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고투하는 데이빗 M 글랜츠(David M. Glantz Fights for the Truth About Stalingrad)”라는 글을 소개해 볼까 합니다. 이 짧은 인터뷰는 글랜츠가 3부작 중 앞의 두권의 핵심을 밝히고 있기 때문에 스탈린그라드 3부작이 어떤 성격의 저술인지 파악하는데 유용한 길잡이 입니다. 인터뷰 자체도 꽤 재미있습니다.


“스탈린그라드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고투하는 데이빗 M 글랜츠”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퇴역 육군 대령 데이빗 글랜츠는 최근 공개된 소련 문헌들을 집대성하여 연구한, 자료들로 가득찬 책을 출간했다. 글랜츠의 목표는 그의 표현을 따르자면 “진실에 근거하여” 오랫동안 이어진 신화의 실체를 폭로하는 것이다. 글랜츠가 최근 출간한 서사적인 대작, To the Gates of Stalingrad와  Armageddon in Stalingrad는 역사상 가장 장대했던 전투를 새로운 시각으로 다시 쓴 것이다. 예를 들면, 글랜츠와 공저자 조나단 하우스는 붉은군대의 규율을 유지하는 책임을 맡았던, 소련의 잔혹한 비밀경찰 NKVD의 문헌들을 처음으로 활용한 연구자들이다. “비밀경찰의 자료들은 사기의 저하라던가, 검열이 얼마나 이루어졌는지, 탈영병의 숫자라던가 하는 것들을 놀랄만큼 솔직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글랜츠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과거 이 전투의 인간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추론에 의거해 쓰여졌습니다. 하지만 사료에 근거해 쓰여진 적은 없었지요.”

산토로(Gene Santoro) : 진실에 근거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요?

글랜츠 : 제 뜻은, 신화를 걷어내고 실제 사실의 복원을 시작하기 위해서 양측의 기록을 검토한다는 것 입니다. 전쟁이 어떻게 수행되었는지, 어느 정도까지 수행되었는지 등에 대해 충분한 결론을 얻지 못한다면 전쟁의 전체적인 맥락하에서 정치적, 경제적, 또는 사회적인 요소들에 대해 판단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의 역사가들은 작전이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들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모두 군사적인 현실이라는 구조에 속한 것 입니다.

산토로 : 왜 스탈린그라드를 선택하셨습니까?

글랜츠 :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대한 책은 1950년대 초반 이래 수백권에 달합니다. 초기의 많은 저작들은 독일측의 회고록이나 특정한 독일측 인물에 관한 것 이었습니다. 198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대한 저작들은 근본적으로 앞서 언급한 독일측 자료에다 주로 소련 제62군을 지휘했던 바실리 추이코프의 회고록과 같은 제한된 소련측 자료에 의존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저작들은 상당히 정확하고 훌륭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저작들은 스탈린그라드 전역의 전체적인 측면과 스탈린그라드의 시가전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동일한 결론으로 귀결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결론들은 많은 부분이 잘못된 것 입니다.

산토로 : 예를 들자면?

글랜츠 : 한가지 일반적인 관점을 들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당시 소련군이 독일군에 맞서면서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은 것과 달리 1942년 블라우 작전 당시 스탈린은 땅을 내주고 시간을 벌기 위해서 소련군을 매우 빨리 퇴각하게 했으며 보다 방어에 용이한 선 까지 물러선 뒤에는 반격에 나섰다는 것 입니다. 이것은 완전히 틀린 것 입니다. 스탈린은 블라우 작전이 시작되는 순간 부터 물러서지 말고 싸울 것을 명령했습니다. 전쟁 전 기간 동안 스탈린의 전략은 어디에선가 누군가는 무너질 것이라는 생각으로  언제나 어디서건 공격하는 것 이었습니다.

산토로 : 붉은군대는 스탈린그라드로 밀려가는 와중에도 공격을 했다는 것 인가요?

글랜츠 : 널리 퍼진 믿음과는 달리 블라우 작전의 초기에는 소련군의 역습, 반격, 심지어는 대규모의 반격에 의해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반격은 7월에 독일군의 북익에 가해졌습니다. 스탈린은 1941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전차군과 그 밖의 새롭게 편제된 부대를 투입했습니다. 이러한 반격에는 소련군이 500에서 1,000여대 정도의 전차를 투입해 대규모의 전차전이 전개되었습니다.

산토로 : 소련군의 반격은 어떠한 성과를 거두었습니까?

글랜츠 : 최초의 반격은 매우 형편없이 지휘되었고 그랬기 때문에 많은 것을 달성하지는 못했습니다. 독일군에게 소모를 강요한 것을 제외한다면. 7월 말에도 반격이 감행되었습니다. 두개의 새로 편성된 소련 전차군이 돈강 만곡부에 투입되었고 새로 편성된 62군의 지원을 받아 반격을 감행했습니다. 대규모의 전차전이 거의 3주간에 걸쳐 전개되었으며 독일군의 계획을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산토로 : 왜 그랬습니까?

글랜츠 : 공세에 나선 독일군의 보병 전력이 1941년 보다 약화되어 있었으며 기갑 부대의 진격을 뒤따르는 많은 보병 부대가 루마니아군이나 이탈리아군이었는데 이들은 히틀러를 위해 죽고 싶은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1942년에는 소련군이 포위되어 전투력을 상실하더라도 병력은 포위망을 벗어나 잠적하거나 나중에 붉은군대에 재합류 할 수 있었습니다.

산토로 : 독일의 계획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글랜츠 : 독일 제6군이 진격하면서 양 측방, 특히 돈 강을 따라 이어진 선을 보호해야 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제6군의 병력 중 진격에 투입할 수 있는 규모는 계속 줄어들었습니다. 독일 제6군이 돈강 만곡부를 정리한 뒤 스탈린그라드 시가지를 점령하기 위해 공세를 개시했습니다. 이 때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시점일 것 입니다. 독일군의 계획은 돈 강을 도하한 뒤 기갑군단을 선봉에 세운 양익으로 볼가강까지 진격하여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하는 것 이었습니다. 스탈린그라드를 각각 북쪽과 남쪽방향에서 진입하여 전투를 치르지 않고 점령한다는 것 이었습니다.

산토로 : 무엇이 독일군을 저지했습니까?

글랜츠 : 독일군이 공격을 시작하자마자 소련군은 반격을 시작했습니다. 소련군의 반격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고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북익의 독일 기갑군단을 완전히 붙잡아 둘 수 있었고 이 기갑군단이 스탈린그라드 방향으로 병력을 투입할 수 없도록 했습니다. 소련군의 반격은 독일군 3개 사단이 40km에 걸쳐 방어에 묶여있도록 한 것 입니다. 이들은 최후의 시가전이 전개된 스탈린그라드 북쪽 외곽의 공업지대로 진입할 수 없었습니다. 독일군 공세의 남익은 계획대로 진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스탈린그라드 북쪽에서 소련군이 취한 대응이 독일 제6군 사령관 파울루스의 계획을 방해했습니다.

산토로 : 파울루스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글랜츠 : 파울루스가 스탈린그라드 시가지를 제압하기 위해 투입할 수 있었던 전력은 보병군단 1개에 불과했습니다. 이 군단은 3개 보병사단과 약간의 지원부대로 구성되었고 제6군 전력의 3분의1 정도였습니다. 파울루스는 스탈린그라드에 기갑부대를 투입할 수 없었기 때문에 보병부대를 서쪽에서 부터 돌입시켜 블럭 단위, 도로 단위로 진격해야 했습니다. 파울루스는 기갑사단들이 소모될 때 까지 공격에 기갑부대를 선봉에 세우려고 했습니다. 독일 제6군이 시가지 중앙을 장악하고 북쪽으로 공격하려 했을 무렵 독일 기갑전력은 소모되었고 소모전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1942년 10월 쯤되면 독일군의 연대는 대대규모가, 사단은 연대규모가 되었고 제6군은 기껏해야 군단 규모의 전력이었을 겁니다.

산토로 : 소련군의 전략은 무엇이었습니까?

글랜츠 : 스탈린그라드가 함락되지 않도록 병력을 시가지로 밀어넣는 것 이었습니다. 이들은 희생양이었습니다. 1만명의 사단이 다음날이면 500명만 남곤 했습니다. 소련군의 많은 사단이 소모되고 남은 수준의 규모에 불과했습니다. 대부분의 저작에서 정예부대로 묘사되는 제13근위소총병사단은 시가전이 일어나기 두 달 전에 괴멸되었습니다. 이 부대는 절반정도의 훈련만 마치고 장비는 편제의 3분의1 만 갖춘채로 투입되었습니다.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로 유명해진 제284소총병사단은 3개 연대 중 1개 연대만 소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치 무하마드 알리의 로프-어-도프(rope-a-dope : 로프에 기대서 상대방의 공격을 흡수하며 지치기를 기다리는 전법) 전술과 같았습니다. 소련군 총사령부, 스타브카(СТАВКА)가 스탈린그라드 전선군 사령관 예료멘코와 정치위원 흐루쇼프가 볼가강을 건너 스탈린그라드로 가지 못하게 한 것은 잔인한 일 이었습니다. 총사령부는 예료멘코와 흐루쇼프가 스탈린그라드에서 죽어가는 병사들에게 동정심을 느끼게 되어 스탈린그라드를 포기할 것을 우려하고 있었습니다.

산토로 : 독일군은 어떻게 대응했습니까?

글랜츠 : 스탈린그라드는 독일군에겐 고기 분쇄기였습니다. 투입하는 사단 마다 소모되었고 이때문에 측면에서 새로운 사단을 차출해야 했습니다. 독일 제6군의 손실규모를 살펴 보면 대부분의 사단이 전투 초기에는 전투가능이라고 평가받았습니다. 그런데 일주일만 지나도 이 사단들은 약체화 되었거나 소모되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소모율이 기록적인 수준이었습니다. 독일 공군이 시가지를 황폐화시킨 것은 이 문제를 더 심각하게 하는 요인이었을 뿐 입니다. 11월 초가 되면 독일군은 사단들이 소모된 상황이었습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진정한 소모전이었던 겁니다.

산토로 : 독일군은 어떻게 공세를 계속해 나갔습니까?

글랜츠 : 독일군은 B집단군에 소속된 공병대대를 모두 긁어모았습니다. 이들은 11월 11일의 마지막 공세에 투입되었습니다. 그랬기 대문에 이탈리아군과 루마니아군을 제외하면 돈 강을 따라 이어지는 선을 방어할 병력이 없었습니다. 헝가리군도 이미 최전선에 투입되어 있었습니다. B집단군의 좌익은 동맹군으로 구성된 집단군이었던 셈입니다. 소련군은 정보를 통해 이러한 약점을 잘 알고 있었고 이 지점에 반격을 가했습니다.

산토로 : 스탈린은 어떠한 유형의 지도자였습니까?

글랜츠 : 스탈린이 전쟁 첫 해에는 사소한 부분 까지 간섭하다가 스탈린그라드 전역이 전개될 무렵에는 군지휘관들에게 결정을 맡기고 이에 따라 소련군 지휘관들은 큰 범주에서만 스탈린의 지휘를 받으면서 전쟁을 치렀다는 신화가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 입니다. 스탈린은 전쟁 기간 내내 통제권을 쥐고 있었습니다. 1941년에 스탈린의 완고함과 반격에 대한 고집은 막대한 대가를 치르게 했지만 붉은군대가 한번 패배를 겪으면 와해될 것이라는 히틀러의 중요한 가정이 실현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1942년 레닌그라드 전투와 모스크바 전투를 겪고 난 뒤 스탈린과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는 똑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무자비하게 인력을 소모하더라도 계속 싸우면  숫적으로 열세인 적이 소모될 것이라는 점을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작전은 대략 1400만명의 군 사망자(military dead)를 냈습니다. 이러한 댓가를 치르면서 훨씬 더 많은 경험을 쌓고 전투로 단련된 우수한 독일 국방군을 무찌를 수 있었던 것 입니다.

2011년 6월 21일 화요일

아데나워, 그리고 동맹에 대한 잡담

요즘 읽고 있는 책 중에 Steven J. Brady의 Eisenhower and Adenauer : Alliance maintenance under pressure, 1953-1960이 있습니다. 이제 막 읽기 시작해서 진도가 별로 나가지 않았는데 앞 부분 부터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부분은 1953년 미국을 방문한 아데나워가 아이젠하워에게 한국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독일 의료인력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한 부분입니다. 명목상으로는 의료인력 지원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간접적으로나마 미국의 동맹국으로서 군사적 기여를 하겠다는 의사 표명인 셈이지요. 사실 이때는 독일의 재무장 논의가 급물살을 타던 시점이라 이건 상당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무렵  기민당은 10만명 수준의 군대 창설을 논의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미국의 지원이 절실했고 쓸모있는 동맹이라는 점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데나워는 이후 소련의 엉성한(???) 평화공세에도 불구하고 친미-친서방노선을 고수해 나갔습니다. 이것은 독일이 통일 된 뒤 돌아보니 결과적으로 매우 현명한 선택이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결과를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겠지만. 2차대전 이후의 소련은 독일을 위험한 잠재 적국으로 보았기 때문에 독일을 중립화 해 실질적으로 무력화하려고 기도했습니다. 물론 아데나워같은 보수진영의 선수들은 이런 엉성한 속임수를 간단히 꿰뚫어 보았기 때문에 친미노선을 고수했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요즘 중국이 한미동맹을 약화시키고 한국을 중립적으로 만들려고 기도하고 있다는 점 입니다. 역시나 흐루쇼프 이래의 엉성한 속임수인게 한눈에 보이는데 문제는 이런 조잡한 수작이 의외로 민족주의적인 진영에서 잘 먹히는 것 처럼 보이는 겁니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긴 합니다만 한미동맹이 존속하려면 한국 쪽에서 동맹으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다는 신호를 보내줘야 합니다. 그런데 민족주의적인 진영은 이런 것 자체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지요. 한국전쟁 직후와 같이 대립구도가 명확한 상황에서는 동맹이 비교적 잘 기능했습니다만 냉전이 끝나고 표면적으로 평화가 정착된 지금 시점에서는 안보적 동맹이 제대로 돌아가기가 어렵습니다.

한 가지 더 재미있는 점은 흐루쇼프가 엉성한(?!?!) 평화공세를 시작했을 때 한국 내의 일부 민족주의적 지식인들은 이것을 새로운 변화의 전조로 받아들였다는 점 입니다. 그리고 1960년대에는 제3세계의 부상을 바라보면서 미국에 종속(?!?!)된 상태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조금씩 높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현재의 한미동맹 구도에 비판적인 집단 중 일부는 바로 1960년대에 뿌리를 둔 지식인들이지요. 물론 저도 미래를 내다보는 재주가 없으니 예언은 할 수 없습니다만 과거 이러한 민족주의적 지식인들의 전망이 계속해서 빗나간 것을 생각한다면 이들의 주장이 별로 매력적이지 않은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2009년 7월 8일 수요일

중국∙북한 동맹관계 - 최명해

우리에게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모르겠으나 중국의 대북영향력은 매우 제한적입니다. 북한 핵문제가 장기화 되면서 중국이 북한에 대해 제한적인 영향력만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명백해 졌는데 이것은 꽤 흥미로운 문제입니다.

최명해의 저작인 『중국∙북한 동맹관계』는 이 문제를 재미있게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저자는 북한과 중국의 관계를 규정하는 중요한 요인을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하는 것 같습니다.

첫 번째는 북한과 중국이 서로 상이한 전략적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점 입니다. 이것은 대외관계에서 흔히 나타나는 일이지요. 두 번째는 중국이 북한을 관리할 수 있을 만큼 강하지 않다는 점 입니다. 이 두번째 문제는 중국에게 꽤 불리하게 작용합니다. 특히 북한과 중국이 서로 상이한 전략적 목표를 가지고 대립할 때 중국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문제점이 처음으로 드러난 것은 흐루쇼프의 집권 이후 중국과 소련의 관계가 악화되었을 때 입니다. 중국은 소련을 중대한 위협으로 간주해 북한과 제휴해 소련에 맞서려 시도합니다. 그러나 북한은 자국에게 핵우산을 포함한 안전보장을 해 줄 수 있는 소련과 공개적으로 대립하는 것은 회피하려 합니다. 중국은 북한에게 그런 것들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실력이 되지 않았지요. 중국은 북한을 회유하기 위해 다양한 당근을 제시하지만 북한은 호락호락하게 걸려들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중국과 미국이 관계개선을 하면서 이런 구조는 더 요상하게 꼬여갑니다. 북한은 중국과 미국이 국교를 수립한 이후 한반도 문제를 공동관리하는 방향으로 나가자 중국의 하위체제에 포섭되지 않기 위해서 80년대에는 소련쪽에 밀착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듯 소련이 갑자기 망해버리죠;;;; 결국 북한에게 충분한 안전보장을 해 줄수 있는 소련이 망해버리니 북한에게 남은 선택은 두 가지가 됩니다. 중국의 하위 체제로 포섭되느냐 아니면 북한의 자율성을 인정해 줄 수 있는 쓸만한 물주를 찾느냐.

네. 결국 답은 우리 모두가 잘 알 듯 ‘미국밖에 없다’가 됩니다. 누가 보더라도 미국은 안전보장 측면에서 중국보다 우월하지 않겠습니까. 일단 국력 차이부터가 엄청나지요. 이후의 이야기야 우리 모두 잘 알 듯 미국은 중국에게 최대한 많은 역할을 부여하고 싶어하지만 북한이 말을 듣질 않고 있습니다. 어쩌겠습니까. 북한 입장에서는 미국이 중국보다 매력적인 상대인 것을. 문제라면 미국이 북한에게 신경쓰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겠습니다만.

저자는 중국이 북한과 동맹을 형식적이나마 유지할 수 밖에 없는 이유도 근본적으로는 북한을 자신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주 내에 묶어 둘 수 있는 수단이 동맹외에는 없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마치 1950년대에 소련이 그랬던 것 처럼 현재의 미국은 북한에게 제공해 줄 수 있는 것이 중국 보다 더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식적인 동맹마저 폐기된다면 그렇지 않아도 미국에게 들러붙고 싶어 안달 난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동북아시아에서 중국의 위상은 추락할 수 밖에 없으며 그것은 중국 지도부가 결코 원하지 않는 시나리오 일 것입니다.

Ps 1. 저자는 북한과 중국의 관계에서는 기괴하게도 북한보다 더 강대국인 중국이 ‘방기(abandonment)’의 위협을 느끼는 경우가 가끔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꽤 재미있는 해석이지요. 수십년 동안 소련과 미국에게 치어 2인자에 머무르는 것이 중국의 현실인 만큼 그럴듯한 이야기 입니다.

PS 2. 이종석도 북한과 중국의 관계에 대해서 책을 한 권 썼습니다. 이종석의 책과 비교하며 읽으시면 훨씬 재미있습니다. 최명해가 미국과 중국의 협력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이종석은 미국과 중국의 갈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요. 아마도 동북아균형자론이라는 발상이 나온 것도 이종석이 미국과 중국의 갈등을 심각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일 것 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종석 보다는 최명해의 저작이 더 재미있고 읽을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2008년 7월 29일 화요일

전후 복구시기 북한에 대한 약간의 잡설

sonnet님이 쓰신 「잉여농산물원조와 삼백산업의 발달」을 읽다 보니 재미있는 구절이 하나 눈에 들어왔습니다.


인용해 온 글에 나타난 문제점은 당연히(?) 북조선에서도 나타났습니다.

많은 분들이 잘 아시겠지만 전후 복구과정에서 김일성은 중공업 우선발전을 주장합니다.

김일성은 1953년 8월 당 중앙위원회 제6차 전원회의 보고에서 우선적으로 발전시켜야 할 공업으로 제철, 기계, 조선, 광업, 전기, 화학, 건설자재 공업을 꼽았고 경공업에 대해서는 간략히 언급하는데 그쳤습니다. 중공업을 최우선시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 입니다. 서동만에 따르면 이 발표에서 김일성은 농업에 대해서도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넵. 수령님은 북조선이 처한 사정은 고려하지 않고 중공업화를 추진하기로 이미 결심한 것 입니다. 소련의 경우 내전 이후 신경제정책에 따라 어느 정도의 전후복구가 이뤄진 상태에서 중공업화가 이뤄졌는데 김일성은 아예 전후복구 자체를 중공업화로 밀어 붙이려 한 것 입니다. 소련의 경우 이 문제를 두고 흐루쇼프와 말렌코프간의 논쟁이 있었는데 소련이야 중공업 기반이 이미 있는 나라이니 북한과는 이야기가 다르죠. 물론 전후 복구의 물주는 소련이었기 때문에 김일성은 1953년 9월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돌아온 뒤 중공업 우선 노선을 잠시 보류합니다. 소련의 반대에 따라 1954년 3월의 개각에서는 경제 분야 간부의 임명이 경공업을 우선시하는 방향으로 이뤄졌습니다.

하지만 남의 말은 절대 안들어 처먹는 수령님이니 만큼 물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코 중공업 우선노선의 뜻은 꺾지 않았습니다. 중공업 우선 노선의 반격은 예상보다 일찍 시작되었는데 1954년 11월 소련의 압력에 따라 임명된 재정상 최창익의 해임, 1955년 1월 경공업상 박의완의 해임에 따라 경제 간부들의 개편이 시작됐습니다. 그 결과 중공업화를 지지하는 이주연과 이종옥이 각각 재정상과 경공업상으로 임명됩니다. 중공업 노선을 추구하는 세력이 승리한 것입니다. 중공업 우선론자들은 승리의 여세를 몰아 같은 해 12월 ‘1955년도 인민경제복구발전계획에 관한 내각결정’으로 중공업기업소의 확장과 경공업, 농촌경제를 동시에 복구 발전시킨다는 노선을 천명합니다. 이것은 표면상으로는 병행발전인데 실제로는 중공업우선 노선을 관철시키는 것 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게 어디 마음먹은 대로 되겠습니까. 이미 1955년부터 공업생산목표를 달성하기 어렵게 되자 당장 1956년도 공업생산목표에 대한 수정에 들어갑니다. 물론 완전무결한 수령님은 이 문제의 원인을 국가계획위원회의 탁상 행정으로 돌리는 파렴치함을 보입니다. 이에 따라 경공업 발전을 지지하던 국가계획위원장 박창옥은 집중적인 공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1955년 12월 20일에 열린 최고인민회의 제10차 회의에서는 1956년도의 공업총생산액을 오히려 더 늘려 잡습니다. 전후 복구기간 인 1954~56년 사이에 북한은 인민경제에 대한 총 투자 중 49.6%를 공업에 투자했는데 이 중 81.1%가 중공업에 들어갔습니다. 전후 복구 기간 중 국가의 투자가 중공업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경공업은 지방공업의 몫이 되었는데 사실상 지방공업은 별다른 투자를 받지 못했습니다. 성과가 신통치 못했으리라는 점은 짐작하실 수 있겠지요. 물론 중공업에 가용 가능한 자원을 싹~ 쓸어넣었기 때문에 ‘공업생산’에서 엄청난 성과를 올린 것은 '사실'입니다.

'통계상'으로.

그렇다면 농업은?

전후 복구기간 중 중공업화와 동시에 농업집단화도 적극적으로 추진됩니다. 북한은 1945년 이후 농업집단화에 성공한 매우 드문 사례에 속합니다.(여기에 대해서는 김성보의 단행본이 설명을 잘 해 놓고 있습니다.) 이미 북한의 농업집단화 비율은 1955년 봄에 전체 농가호수의 44%에 달하고 있었던 것 입니다. 이 과정에서 개인농으로 남아있던 농민, 특히 중농층은 엄청난 동요를 보입니다. 집단화에 반발한 농민들은 이미 소련의 농민들이 했던 것 처럼 가축을 도살하거나 곡물수매에 비협조 하는 방식으로 저항합니다. 농민들의 가축 도살로 인해 한우와 돼지의 두수는 1954~55년 사이에 감소했다가 집단화가 진전되어가면서 점차 증가세로 들어섭니다. 또한 집단농장의 농민들은 소극적 저항의 표시로 태업을 일삼았는데 그 결과 벼의 생산은 1954에 감소했다가 1956년에야 1953년의 생산량을 겨우 넘어섭니다. 그리고 일부 농민들은 적극적인 저항의 표시로 협동조합의 탈퇴를 시도하기도 합니다. 특히 중농이 발달했던 황해도에서의 저항은 상당한 규모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농업이 엉망으로 돌아가니 당연히 식량사정은 엉망이 됩니다. 1955년 1월 북한에서는 식량 부족에 대처하기 위해서 공업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달에 하루 치 식량을 아끼자는 운동을 벌입니다. 김일성은 그의 선배(?)들 처럼 농촌을 쥐어짜(?) 중공업 육성의 기반으로 삼으려 했는데 당장 공장 노동자들이 먹을 식량이 줄어드는 것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당시 쌀 1kg의 공정가격은 5원이었는데 이미 1955년 2월 암시장에서는 400원에 거래되고 있었습니다. 일반 노동자들의 한달 임금은 1,000~1,500원 수준이었으니 고깃국은 고사하고 이밥도 못 먹을 지경이었습니다. 식량난은 매우 심각해서 함경남도의 경우 식량을 구하기 위해 주민들의 대규모 이동이 보고될 정도 였습니다. 그나마 식량 사정이 좋았던 황해도에서도 아사자가 발생할 정도였는데 헝가리 의료진이 파견된 사리원의 한 병원에는 1955년 4월~5월 사이에 20명 정도의 아사자 또는 아사직전의 환자가 실려올 정도였습니다. 수도인 평양의 사정도 좋지 않아서 소련 외교관들의 보고에 따르면 평양 일대의 야산에서는 새싹을 뜯는 여성과 어린이들이 가득했다고 합니다. 이 해 5월 춘궁기가 닥치자 식량 상황은 위기에 도달했고 북한은 소련과 중국으로 부터의 긴급 식량원조로 간신히 급한 불을 끄게 됩니다.

물론 이런 난감한 상황들은 결코 중공업화에 대한 수령님의 의지를 꺾지 못합니다. 비록 1957년 이후 소련과 동유럽의 경제원조도 줄어들었지만 북한은 천리마운동 같은 대중동원운동 등으로 60년대까지 통계상으로는 엄청난 성장을 이룩합니다.

'통계상'으로만.

대략 수박 겉핧기로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해 드렸는데 전후 복구기간 중 북한이 이룩한 인상적인 공업생산의 증가는 뒤로는 이렇게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공업생산 자체도 성장률이라는 통계수치 이면에는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었습니다. 북한은 60년대에 베트남, 쿠바 등에 공산품을 수출하려고 노력했지만 성과는 신통치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1963년 북한이 북베트남에 수출한 강철 4,000톤 중 3,300톤이 저질이라서 반송된 것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쿠바도 유사한 사례가 있는데 1962년 북한이 10만톤의 설탕을 기계류와 교환하는 조건으로 수출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쿠바는 35,000톤의 설탕만을 보냅니다. 왜냐. 북한이 생산한 기계는 도저히 받아 쓸 만한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90년대 이후 전후복구 과정에서 북한의 문제점을 예리하게 지적한 많은 연구들이 나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80년대 운동권에서 돌던 ‘북한바로알기’류의 괴담(?)들이 여전히 인터넷을 떠돌아다니는 것은 참으로 난감한 일 입니다.

2007년 11월 29일 목요일

The Red Army 1918~1941 : From Vanguard of World Revolution to US Ally - Earl F. Ziemke

현재는 비참할 정도로 쪼그라들어 과거의 위용이라곤 찾아 보기 힘든 러시아군이지만 불과 20년 전만 하더라도 이 군대는 소련군이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를 공포에 떨게 했었습니다. 요즘도 가끔씩 텔레비전 뉴스에서 방송되던 소련군의 붉은광장 퍼레이드를 지켜보며 전율을 느끼던 때가 생각나는군요.
특히 소련군대는 역사상 최대의 전쟁인 독소전쟁을 통해 세계 최고의 군대였던 독일군을 실력으로 격파한 사실상 유일한 군대였기 때문에 그 명칭이 가지는 압도감이란 단순한 통계 이상의 것 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냉전시기 소련군대는 중요한 연구의 대상이었고 특히 그 군대의 기원은 매우 흥미로운 주제였습니다. 러일전쟁과 1차대전에 연달아 패배했던 군대가 불과 20년 만에 세계 최강의 군대로 일어섰다는 점은 대단한 매력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냉전시기 창군 초기의 소련군에 대한 서방측의 최고의 연구는 에릭슨(John Erickson)의 The Soviet High Command : A Military-Political History, 1918-1941이었습니다. 이 책은 분량이나 서술의 치밀함에서 그야말로 압도적인 물건이었고 걸작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는 저작이었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도 이 책은 현재로서도 비교할 만한 대상을 찾기 힘든 걸작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출간된 시기가 있기 때문에 세부적인 측면에서 부족한 점은 분명히 있습니다. 특히 고르바초프의 집권 이후 공개된 수많은 1차 사료들은 몇몇 사건들에 대해서는 근본적인 재평가를 불러오기도 했으니 이런 점들을 수용한 새로운 연구가 필요해 진 것은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2004년에 출간된 짐케(Earl F. Ziemke)의 The Red Army 1918~1941 : From Vanguard of World Revolution to US Ally는 그간의 새로운 연구성과를 대폭 반영해 쓰여진 창군부터 독소전 초기까지의 소련군의 역사를 다룬 저작입니다. 이 책은 짐케가 구상한 독소전 3부작의 가장 앞 부분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는 저작입니다.
특이하게도 짐케의 3부작은 그 마지막인 Stalingrad to Berlin이 먼저 나왔으며 그 다음으로 2부인 Moscow to Stalingrad가 나왔습니다. 짐케는 원래 1부에 해당하는 독소전 계획부터 모스크바 전투까지를 다룬 저작 또한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주로 독일측의 시각에서 서술할 계획이었는데 소련의 붕괴로 대량의 소련측 1차 사료를 사용할 수 있게 된 결과 계획을 변경했다고 합니다. 즉 기존의 저작들과 달리 소련의 시각에서 독소전 초기까지를 다루는 책이 나오게 된 것 입니다.

결국 원래 의도했던 바와는 달리 짐케의 이 책은 소련군의 초기 역사를 다루는 저작이 되어 버렸는데 그 덕분에 에릭슨의 연구와 직접적으로 비교될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에릭슨의 저작 또한 창군부터 모스크바 전투까지를 다루고 있어서 두 저작이 다루는 시기 또한 겹치게 됐습니다.
개인적으로 평가하면 짐케의 저작도 매우 훌륭하지만 에릭슨의 저작과 비교하면 다소 부족하다는 생각입니다. 짐케의 입장에서 수십년 먼저 나온 에릭슨의 저작을 당연히 의식하고 썼을 텐데 결과는 약간 기대에 못 미치는 게 아니었을까 하는 느낌입니다. 일단 짐케의 저작은 분량이 에릭슨의 저작보다 적은데다가 내용의 배분에 있어 균형이 다소 안 맞는 느낌입니다. 특히 붉은군대의 창군과 적백내전에 대한 서술이 풍부한데 비해 20~30년대의 발전과정은 다소 부족한 느낌입니다. 이 책은 총 21개 장으로 되어 있는데 1장부터 8장까지가 1917~1921년 시기를 다루고 있는 반면 1922~1939년까지의 시기는 9장부터 14장까지에 불과합니다. 물론 1917~21년은 붉은군대의 기본 골격이 형성되었고 또한 붉은군대의 군사교리의 골간을 이루는 중요한 경험이 축적된 시기이니 만큼 상세한 설명이 필요하겠지만 서술에 있어 균형이 다소 안맞는 다는 점은 아쉽습니다.

하지만 2004년에 출간된 만큼 이 저작은 시기적인 이점을 잘 활용하고 있습니다. 출간된 시기가 늦은 만큼 최신의 연구성과들이 많이 반영되어 있지요. 특히 독소전 발발 직전 소련의 준비태세와 동원에 대한 설명은 에릭슨의 저작보다 뛰어납니다. 책의 후반부에서 다뤄지는 독소전 초기의 전황에 대한 기술도 간결하면서도 재미있습니다. 이 책에서 묘사하는 공황상태에 빠진 스탈린의 반응은 다른 저작에서도 많이 접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다소 아쉬운 점이라면 에릭슨의 저작에 있는 풍부한 통계가 이 책에는 없다는 점 입니다. 물론 이 시기의 통계자료야 글랜츠나 다른 연구자들의 저작들에 많이 들어있긴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간 아쉽긴 하더군요. 통계와 도표가 없다보니 꽤 복잡한 소련군의 편제개편을 글로만 이해해야 하는 불편이 있습니다.
책의 뒷 부분에는 전쟁 이후 소련의 독소전쟁에 대한 시각 변화에 대해 정리를 해 놓았는데 이게 참 재미있습니다. 특히 흐루쇼프 시기 스탈린의 격하운동과 맞물린 새로운 역사해석에 대한 부분이 좋습니다. 전반적으로 부록이 매우 부실한데 이 점은 매우 아쉽습니다.

전체적으로 2004년까지의 새로운 연구성과가 대폭 반영되어 있다는 점에서 좋습니다. 그리고 분량도 에릭슨의 저작 보다 적은 편이니 읽는데도 부담이 적은 편 입니다. 에릭슨의 저작은 너무 방대하다 보니 베게로 쓰기에도 불편하지요.

2007년 6월 18일 월요일

흐루쇼프 대왕

주호 흐루쇼프 - sonnet

소련의 야담 속에 등장하는 흐루쇼프 동지의 술버릇 - 채승병

흐루쇼프에 관한 농담 하나 - 슈타인호프


여러 대인들의 흐루쇼프 전하의 덕을 찬미하는 글을 보니 이 어린양도 새삼 전하에 대한 그리움이 솟아나옵니다. 전하에 대한 고사는 끝이 없으니 이 어린양은 그림으로 전하의 덕을 기릴까 합니다.


2007년 2월 8일 목요일

진정한 대인배 니키타 흐루쇼프

(전 략)

(핵병기의 등장) 이전에는 전략적으로 적에게 직접적인 압력을 가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전략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여러 병종을 동원해 여러 차례의 연속적인 작전을 펼쳐야 했다. 이제는 적국의 전략적 목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이 있다. 그것들은 바로 장거리 항공기와 원자탄, 또는 열핵병기를 장착할 수 있는 장거리 로켓, 그리고 같은 무기를 장비한 잠수함이다.
N. S. 흐루쇼프 동지께서는 미국의 언론 및 출판기업인 허스트(W. R. Hearst)와 가진 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셨다.

“만약 미국의 호전적인 집단이 전쟁을 도발한다면 전장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로 한정되지 않을 것 입니다. 전쟁은 바로 직접 미국 본토에서 치러 질 것 입니다. 왜냐하면 이제 대륙간탄도미사일이 지구의 어떤 곳이든 타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미국 인민들은 막대한 희생을 치르게 될 것 입니다. 우리는 대륙간탄도미사일, 잠수함발사미사일을 비롯해 다양한 수단을 가지고 있으며 전쟁이 벌어지면 이 모든 수단을 총 동원할 것 입니다.”

(후 략)

П. Ротмистров, О современом советском войеном искусстве и его характерных чертах(현대 소련의 전쟁술과 그것의 특징), 1958(영어번역본), Harold S. Orenstein 번역

가끔 생각하는 것이 노서아 국왕 흐루쇼프야 말로 진정한 공갈협박의 본좌가 아닌가 합니다. 북한같은 변방의 오랑캐들이야 백날 불바다 타령을 해 봐야 아무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이 양반은 정말로 서방 세계를 공포에 떨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2006년 10월 26일 목요일

독일군 포로송환 완료 뒤 프라브다에 실린 어떤 기사

독일 연방공화국에서는 모든 선전기관들이 석방된 전쟁범죄자들을 영웅이나 순교자로 포장하는데 동원되고 있다. 귀향자들을 수용하는 프리들란트(Friedland) 수용소는 뻔뻔하게도 과거 히틀러의 앞잡이로 전쟁범죄를 저지른 전범들을 찬양하는 무대가 되고 있다. 이와 함께 소비에트 연방에 대해 비난까지 하고 있다는 소문도 들리고 있다.

프라브다 1955년 10월 21일, G. Knopp, Die Gefangenen s.380 재인용


아데나워의 최대 업적 중 하나로 꼽히는 것이 1955년 미송환된 독일인 포로들, 특히 주로 전범으로 분류된 무장 친위대나 고위 간부들의 송환을 성공 시킨 것이다. 무장친위대 소속의 포로들은 소련측에서 씨를 말려버릴 심산이었기 때문에 송환을 계속 거부하고 있었는데 이걸 성공 시킨 것이다.

이때의 일로 흐루쇼프는 "독일인들이 벌써 부터 거드름을 피우기 시작했다"며 내심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포로를 송환한 뒤에도 이런 식으로 심통을 부리기도 했던 모양이다.

어쨌건 별로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다.

2006년 10월 21일 토요일

露西亞 國王 흐루쇼프의 兵車 無用論

케네디 4년에 노서아 국왕 흐루쇼프가 여러 신료들에게 군사를 줄여 백성의 삶을 편하게 하라 하교했다. 그리고 특히 병거가 너무 많다 하니 그 말이 다음과 같았다.

지난 전쟁에서 전차는 공격의 중핵으로, 그리고 방어의 지주로서 활약했습니다. 전차는 소화기에 대해서 무적이었고 단지 명중율이 낮은 대포만이 전차를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쟁말기에 모든 상황이 돌변했습니다. 적은 판쩌 파우스트로 아군의 전차들을 손쉽게 격파할 수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우리의 숫적 우세가 너무나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이 문제점을 인식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오늘날 대전차 로켓은 전차의 최대 사정거리인 수 킬로미터 밖에서도 전차를 격파할 수 있습니다. 전차와 자주포, 병력수송장갑차는 이제 병사들에게 덫이 될 뿐입니다. 왜 이런 상황에서 쓸데없이 전차와 장갑차를 더 많이 만들어야 합니까? 수십억 루블이 낭비되고 있습니다.

Roger R. Reese, Red Commanders : A social history of the soviet army officer corps, 1919~1991, p190~191


결론.

병거의 왕국 노서아에 병거 무용론을 일으킨 판쩌 파우스트는 역시 위대한 병기다???

2006년 10월 5일 목요일

밑빠진 독에 물 붓기 - 케네디 행정부의 중남미 군사원조

S. Rabe의 The Most Dangerous Area in the World를 읽는 중이다. 1998년에 읽은 뒤 8년간 방치해 두고 있던 녀석인데 이번 연휴를 맞아 책장 정리를 하다가 한 번 더 읽는 중이다. 이 책에서는 케네디 행정부의 남미 군사원조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인상적이다. 중남미 군사원조에 대한 부분은 대충 아래와 같은 내용이다.

미국의 중남미에 대한 군사원조는 40년대 중-후반부터 아이젠하워 행정부까지 다른 제 3세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중장비를 갖추고 정규전에 적합한 구조를 갖추도록 하는데 중점이 두어졌다. 물론 40년대 이전까지 주로 유럽식으로 되어 있던 무기체계를 미국식으로 고치는 것 역시 이 시기 군사원조의 핵심이기도 했다.

그런데 중남미는 특별한 외부의 위협이 없는 지역이다! 설마 흐루쇼프가 잠수함 타고 쳐들어 오기야 하겠는가.

당시 상원의원이던 케네디는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군사원조를 “삽질”에 불과하다고 생각했고 여기에 바티스타 정권이 카스트로의 아마추어(?) 군대에 박살나자 이런 생각을 더욱더 굳히게 됐다.

케네디가 집권 초부터 비정규전에 큰 관심을 보인 것도 중남미를 염두에 뒀던 것이고 이에 따라 군은 물론 국내 치안유지를 위해 경찰에 대해서도 대규모 원조가 주어졌다. 이렇게 해서 케네디 행정부 시기 중남미 국가에 대한 군사원조는 아이젠하워 행정부에 비해 연평균 50% 이상이 증가됐다.

그런데 미국방부는 막대한 원조에도 불구하고 남미 국가들의 군대의 실력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크게 실망했다고 한다. 저자는 케네디 행정부의 막대한 군사원조를 받은 남미국가들의 군대에 대해 출처를 표기하지 않은 미국방부 보고서의 한 구절을 인용해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대부분의 중남미 국가의 군대는 전문성이 결여된 장교단과 부사관집단이 지휘하는 형편없이 장비되고 훈련된 징집병으로 구성돼 있다.”

저자의 결론은 케네디 행정부의 중남미 군사원조는 삽질에 가까웠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이렇게 전세계에 걸쳐 밑빠진 독에 물 붓기를 했던 50-60년대의 미국을 보면 정말 대국(???)이라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