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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 6일 일요일

Bernd Hartmann의 5기갑연대사/5기갑대대사에 있는 문제 하나

아래의 글에서 하르트만(Bernd Hartmann)의 『Geschichte des Panzerregiments 5 und der Panzerabeilung 5』가 1945년 1월 사단의 개편 이후 기갑대대의 장비 문제에서 다른 저작들과 상충된 기술을 하고 있다고 언급했습니다. 원래 아래의 글에서 좀 더 자세히 다뤘어야 하는게 아닌가 싶었는데 그러면 또 글이 중구난방으로 나가지 않을까 싶어 간략히 언급만 했습니다. 그런데 저렇게 대충 언급하고 넘어가자니 뭔가 좀 그래서 별도로 짧은 글을 하나 씁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하르트만의 저작은 2002년에 출간된 구판입니다. 이미 독일에서는 대폭 보강된 개정판이 나온지 한참 됐습니다만 아직까지 저는 개정판을 입수하지 못해서 2002년에 나온 구판을 기준으로 이야기 하겠습니다. 아마 개정판에서는 제가 이 글에서 지적하고자 하는 문제가 수정되었을 지도 모르겠군요.

※ 개정판이 있으신 분이 이 문제를 추가로 다뤄주셨으면 합니다.

일단 하르트만의 저작은 25기갑척탄병사단과 여기에 배속된 5기갑대대가 민스크 근교에서 포위 섬멸된 뒤 제 107기갑여단을 근간으로 다시 편성된 이후까지는 다른 저작들과 동일한 서술을 하고 있습니다. 즉 107기갑여단의 장비를 그대로 이어받아 판터와 구축전차를 장비했다고 나오는 것이죠.
그런데 이것이 1945년 1월에 갑자기 바뀝니다. 하르트만의 책 337쪽에는 1945년 1월 1일 25기갑척탄병사단전투단이 기갑척탄병사단으로 개편되면서 5기갑대대의 기갑장비가 “돌격포”로 교체되었다고 서술하고 있는 것 입니다. 하지만 아래의 글에서 지적했듯 다른 수많은 저작들은 전쟁이 종결될 때 까지 5기갑대대의 주력 기갑장비는 판터였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르트만의 저작에는 돌격포로 되어 있는 것인가?
제가 처음에 이 구절을 읽었을 때는 4호구축전차를 그냥 돌격포로 표기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독일군 참전자들의 회고에는 종종 4호구축전차를 그냥 돌격포로 언급하는 경우가 자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역시 하르트만의 책 342쪽에 있는 도표를 보니 4호구축전차와 3호돌격포를 혼동해서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1945년 1월에 장비가 3호돌격포로 교체되었다고 명시하고 있는 것 입니다.

하지만 다시 한번 말하자면 아래에서 언급한 다른 저작들은 모두 전쟁이 끝날 때 까지 5기갑대대는 판터와 4호구축전차, 극소수의 4호전차만을 장비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저작들은 당시의 독일군 문헌을 참고로 이런 서술을 하고 있으며 하르트만의 저작을 제외하면 모두 동일한 서술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하르트만의 저작(구판)이 오류라는 것은 거의 명백해 보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오류가 발생했을까요?

일단 하르트만의 저작은 참전자들의 회고담과 2차저작을 주로 해서 서술된 것으로 보입니다. 참고문헌 목록에 특별한 1차사료는 보이지 않더군요. 그렇다면 원래 5기갑대대 출신의 참전자가 자신이 탑승한 4호구축전차를 평소의 관행대로 그냥 돌격포로 서술한 것을 하르트만이 3호돌격포로 오해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아 보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실제로 장비를 3호돌격포로 교체하라는 명령은 내려왔으나 중간에 취소되었을 수도 있겠지요.

사실 제 수중에 1차사료라곤 없으니 이 문제를 검증할 방법은 거의 없습니다. 어쨌든 아래의 글을 쓰면서 최대한의 교차검증이 필요하다는 점을 다시 한번 느꼈다는 점에서 만족해야 겠지요.

2008년 6월 30일 월요일

독일육군 제 5기갑대대에 대한 짧은 이야기

2차대전사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라면 독일 기갑부대의 장비문제가 전쟁 말기로 갈수록 복잡해 진다는 것은 잘 알고 계실 것 입니다. 사실 이런 문제는 상태가 좋지 않는 군대라면 어느 군대건 겪는 일 입니다. 비슷한 예로 1941년 여름-겨울의 붉은군대를 보면 전쟁 발발 이전에 이미 복잡한 부대의 편성과 재편을 거친데다 전쟁 발발 이후 전멸과 재편성을 수 차례씩 반복하면서 그야말로 정신 없는 편제를 보여주지요. 하지만 1941년의 소련군의 장비는 T-26이나 BT 계열 같은 여러 모로 모자란(?) 인상을 주기 때문인지 아니면 끝내 승리를 쟁취했기 때문인진 몰라도 같은 문제를 겪은 전쟁말기의 독일군에 비하면 ‘국내에서는’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전쟁 말기 많은 기갑부대가 중구난방으로 장비를 보충받다 보니 전차에서 돌격포로다운그레이드 되는 반면 또 어떤 부대는 난리통에 장비가 업그레이드(!) 되기도 합니다. 이 글에서는 1944년~1945년의 재편성 과정에서 장비가 오히려 좋아진 부대 중 하나인 독일육군 제 25기갑척탄병 사단 소속 제 5기갑대대의 기갑장비 이야기를 해 보려 합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다 시피 제 25기갑척탄병사단은 1943년 6월 23일 제 25차량화보병사단을 개칭해서 만들어 졌습니다. 이 사단은 1942년 하계전역 당시 남부전선에 투입된 차량화보병사단들과 달리 기갑대대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기갑척탄병사단으로 개편된 뒤에도 한동안은 이렇다 할 기갑장비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이 사단에 배속될 기갑대대가 편성되었으니 그것은 바로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전멸한 제 5기갑연대에 소속되어 있던 잔존 병력을 근간으로 한 제 5기갑대대였습니다.
이 제 5기갑대대의 편성 명령은 1943년 8월 25일에 내려졌으며 부대 주둔지는 노이루핀(Neuruppin) 이었습니다. 새로 편성된 대대의 대대장은 북아프리카 전선의 베테랑으로 엘 알라메인 전투 당시 2중대장을 지냈던 레테마이어(Josef Rettemeier) 대위가 임명되었습니다. 대대의 기갑장비는 1943년 6월 20일자 K. St. N 1157(본부중대 통신소대), 1159(전차중대)에 따라 3대의 3호 지휘전차와 42대의 돌격포였습니다. 5기갑대대가 소속될 25기갑척탄병 사단은 동부전선의 중부 지역에서 격전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10월 초 까지 장비배치와 훈련을 마친 대대는 10월 10일부터 15일에 걸쳐 열차에 분승, 10월 20일에 대대의 선발대가 오르샤에 도착합니다.

25기갑척탄병 사단은 제 78돌격사단과 함께 스몰렌스크-민스크 고속도로가 지나가는 구간을 방어하게 되었는데 이 지역은 소련군이 공격을 집중하는 지역이었습니다. 이미 10월 하순까지 독일측이 ‘고속도로 전투(Autobahnschlacht)’라고 부르는 두 차례의 격전이 있었으며 5기갑대대가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1월 14일 제 3차 고속도로 전투가 개시됩니다. 사단 예비대로 있던 제 5기갑대대는 119 차량화척탄병연대의 방어선을 돌파한 소련군 전차부대를 격퇴하는데 성공했고 이 전투의 전공으로 대대장인 레테마이어 대위는 1943년 12월 5일에 기사십자훈장을 수여 받았습니다. 그리고 11월 30일에 소련군은 다시 한번 공격을 개시해 제 4차 고속도로 전투가 시작됐습니다. 12월 4일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25기갑척탄병사단은 18기갑척탄병사단과 함께 소련군의 공세를 막는데 성공합니다. 1943-1944년 겨울의 동부전선 중부지구는 우크라이나의 해방에 가려 상대적으로 적은 관심을 받는 편이지만 이 중부지구 또한 겨울 내내 치열한 격전이 계속됐습니다. 치열한 전투 덕분에(?) 레테마이어 대위에게 기사십자훈장을 수여 받은 지 석 달 뒤인 1944년 3월 6일에 백엽기사십자훈장 수여가 결정됩니다. 그리고 봄부터 여름까지 장비 보충이 이뤄져 이미 5월 말 전차대대는 돌격포 45대를 갖춰 완편 상태가 됩니다.
이렇게 해서 겨울은 무사히 지나갔는데 문제는 아주 큰 재앙이 다가오고 있었다는 점 입니다. 다들 잘 아시다 시피 붉은군대의 1944년 하계대공세, ‘바그라티온’작전이 바로 중부지구에 가해질 예정이었고 제 25기갑척탄병사단은 소련군의 주공 지점에 위치해 있었던 것이죠. 제 78돌격사단과 제 25기갑척탄병 사단이 방어하는 스몰렌스크-민스크 고속도로 구간에는 소련 제 11근위군과 31군이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소련측의 기록에 따르면 제 25기갑척탄병 사단의 저항은 완강해서 6월 25일까지도 31군의 진격은 신통 찮았다고 합니다만… 다른 사단의 방어구역이 줄줄이 돌파 당했기 때문에 25기갑척탄병 사단은 후퇴 중 민스크 근교의 포위망에서 전멸당합니다. 물론 이때 5전차대대도 모든 장비를 잃고 전멸했고 대대장 레테마이어 대위는 포로가 됐습니다. 5전차대대에서 포위망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대대 정비중대와 약간의 부상병 정도였습니다.

※포로가 된 레테마이어 대위는 운 좋게도 살아남아 귀국할 수 있었고 1997년 12월에 사망했다고 하는 군요

어쨌든 이렇게 1943년에 돌격포를 장비했던 제 5기갑대대는 전멸했지만 바그라티온 작전 당시 전멸한 많은 부대들이 그렇듯 재편성됩니다. 재편성된 제 5기갑대대의 모체는 1944년 여름에 어수선하게 편성된 독립기갑여단 중 하나인 107 기갑여단의 2107 기갑대대였습니다. 편성 직후 네덜란드로 투입돼 영국군을 상대로 격전을 벌인 이 여단은 11월 8일/9일에 걸쳐 전선에서 물러나 바움홀더(Baumholder) 훈련장으로 이동 이곳에서 25기갑척탄병사단전투단(Kampfgruppe 25. Panzergrenadierdivision)으로 개편됩니다. 이렇게 원래 판터를 장비하고 있던 기갑대대의 잔존 장비와 병력으로 편성된 덕분에(?) 새로운 5기갑대대는 비록 몇 대 안 되지만 판터를 장비하게 됩니다.(얼쑤 조쿠나! 득템이다!) 하지만 말만 좋아 재편성이고 실제로는 잠시 휴식을 취한 수준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11월 18일에 재편된(이름만 바뀐) 25기갑척탄병사단전투단은 알자스 지역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이때 보유한 기갑차량은 7대의 판터와 4대의 구축전차였다고 합니다. 전선으로 나간 이후 약간의 기갑차량 보충이 있어서 12월 중순에는 11대의 판터와 6대의 구축전차를 보유하게 됩니다. 재편성 당시 근간이 됐던 2107기갑대대가 판터를 장비한 부대였기 때문에 신편성 5기갑대대는 계속해서 판터를 보충 받게 됩니다. 25기갑척탄병사단전투단은 11월 말부터 12월 까지 자르 일대에서 미군을 상대로 작전했습니다.
그리고 1945년 1월 1일자로 25기갑척탄병사단전투단은 다시 25기갑척탄병사단으로 개편됩니다. 개편될 당시 5기갑대대는 25대의 판터와 10대의 구축전차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이와 별도로 사단 전차엽병대대가 돌격포를 장비하고 있었습니다. (Bernd Hartmann의 부대사에는 1월 1일 사단이 개편되면서 5전차대대도 돌격포로 장비를 교체했다고 되어 있는데 다른 저작들과 상충되는 것으로 봐서 오류 같습니다) 개편 직후 알자스에서 북풍(Nordwind) 작전에 투입됩니다. 북풍 작전에서 5기갑대대는 대대장 아른트(Kurt Arndt) 대위가 전사하는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북풍작전이 흐지부지(?) 마무리 되면서 사단은 동부전선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25기갑척탄병사단은 21기갑사단과 함께 동부전선으로 이동해 퀴스트린 교두보 전투에 투입됩니다. 퀴스트린 교두보 전투 초반에 25기갑척탄병사단은 붉은군대의 제5충격군 예하 소총병 사단을 상대로 반격작전을 수행했습니다.
3월 말부터 4월 중순까지 25기갑척탄병사단이 예비대로 돌려지면서 5기갑대대도 다시 병력과 장비 보충을 받습니다. 이렇게 해서 베를린 작전 직전 5기갑대대의 기갑장비 현황은 비교적 양호한 수준이 이른 것으로 보입니다. 티케에 따르면 1945년 4월 7일 당시 5기갑대대는 가동 가능한 4호 전차 1대, 판터 28대, 4호 구축전차 6대, 대공전차 2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여기에 수리 중인 판터 6대와 4호 구축전차 3대가 더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역시 Bernd Hartmann의 부대사는 티케와 상충된 진술을 하고 있는데 다른 서적들과 교차 검증해 보면 티케의 주장이 맞는 것으로 보입니다. 왜 이런 상충된 주장이 나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베를린 전투가 시작된 뒤 25기갑척탄병사단은 브리첸(Wriezen) 방면의 반격에 투입되어 전투 초반에 전투력의 상당수를 잃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25기갑척탄병사단은 서쪽으로의 탈출에 성공해 5월 3일 미군에게 항복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5기갑대대는 전쟁 중 두번째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됩니다.

참고서적
Tony Le Tissier, Durchbruch an der Oder : Der Vormarsch der Roten Armee 1945, (Bechtermünz Verlag, 1997)
Bernd Hartmann, Geschiche des Panzerregiment 5: 1935-1943 und der Panzerabteilung 5 : 1943-1945, (Selbstverlag, 2002)
Rolf Hinze, Der Zusammenbruch der Heeresgruppe Mitte im Osten 1944, (Motorbuch Verlag, 1980)
Thomas Jentz, Panzer Truppen Vol. 2, (Schiffer, 1996)
Soviet General Staff, Belorussia 1944, (Frank Cass, 2001)
Wilhelm Tieke, Das Ende zwischen Oder und Elbe – Der Kampf um Berlin 1945, (Motorbuch Verlag,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