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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0월 6일 수요일

4차 중동전쟁 당시 이라크군에 대한 어떤 평가

4차 중동전쟁 기간에 이라크는 시리아 전선으로 병력을 파병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이라크는 이라크군 때문에 이스라엘이 다마스커스로 진격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서방의 한 군사전문가는 이런 평가를 내렸습니다.

(전략)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라크군은 1973년의 전쟁에서 아랍측의 목표를 달성하는데 기여를 하기는 했다. 이라크군이 자체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를 들자면 10월 13일 이라크군 8기갑여단이 괴멸되었을 때 이스라엘군은 이라크군을 격파하는데 주의를 돌리느라 시간을 지체해서 시리아군이 전열을 재정비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말았다. 이라크군은 이 전투에서 이스라엘군의 전차를 단 한대도 격파하지 못하는 초라한 성과를 거뒀지만 완전히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던 셈이다.

만약 이스라엘측이 휴전 체결 이전에 이집트군에게 확실한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 시나이반도로 병력을 차출하려 하지 않았다면 이라크군의 지연전은 무의미한 것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스라엘군은 이 때문에 다마스커스를 포병을 대규모로 투입해 위협할 수가 없었다. 이스라엘군은 다마스커스를 봉쇄하거나 점령할 의사는 없었지만 포병의 사정권에 넣고 위협할 의도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W. Andrew Terrill, ‘Iraq's role in the 1973 Arab-Israeli War’, Small Wars & Insurgencies 11-3(2000), p.17

이건 조롱인지 칭찬인지 모르겠군요.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2008년 6월 30일 월요일

독일육군 제 5기갑대대에 대한 짧은 이야기

2차대전사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라면 독일 기갑부대의 장비문제가 전쟁 말기로 갈수록 복잡해 진다는 것은 잘 알고 계실 것 입니다. 사실 이런 문제는 상태가 좋지 않는 군대라면 어느 군대건 겪는 일 입니다. 비슷한 예로 1941년 여름-겨울의 붉은군대를 보면 전쟁 발발 이전에 이미 복잡한 부대의 편성과 재편을 거친데다 전쟁 발발 이후 전멸과 재편성을 수 차례씩 반복하면서 그야말로 정신 없는 편제를 보여주지요. 하지만 1941년의 소련군의 장비는 T-26이나 BT 계열 같은 여러 모로 모자란(?) 인상을 주기 때문인지 아니면 끝내 승리를 쟁취했기 때문인진 몰라도 같은 문제를 겪은 전쟁말기의 독일군에 비하면 ‘국내에서는’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전쟁 말기 많은 기갑부대가 중구난방으로 장비를 보충받다 보니 전차에서 돌격포로다운그레이드 되는 반면 또 어떤 부대는 난리통에 장비가 업그레이드(!) 되기도 합니다. 이 글에서는 1944년~1945년의 재편성 과정에서 장비가 오히려 좋아진 부대 중 하나인 독일육군 제 25기갑척탄병 사단 소속 제 5기갑대대의 기갑장비 이야기를 해 보려 합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다 시피 제 25기갑척탄병사단은 1943년 6월 23일 제 25차량화보병사단을 개칭해서 만들어 졌습니다. 이 사단은 1942년 하계전역 당시 남부전선에 투입된 차량화보병사단들과 달리 기갑대대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기갑척탄병사단으로 개편된 뒤에도 한동안은 이렇다 할 기갑장비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이 사단에 배속될 기갑대대가 편성되었으니 그것은 바로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전멸한 제 5기갑연대에 소속되어 있던 잔존 병력을 근간으로 한 제 5기갑대대였습니다.
이 제 5기갑대대의 편성 명령은 1943년 8월 25일에 내려졌으며 부대 주둔지는 노이루핀(Neuruppin) 이었습니다. 새로 편성된 대대의 대대장은 북아프리카 전선의 베테랑으로 엘 알라메인 전투 당시 2중대장을 지냈던 레테마이어(Josef Rettemeier) 대위가 임명되었습니다. 대대의 기갑장비는 1943년 6월 20일자 K. St. N 1157(본부중대 통신소대), 1159(전차중대)에 따라 3대의 3호 지휘전차와 42대의 돌격포였습니다. 5기갑대대가 소속될 25기갑척탄병 사단은 동부전선의 중부 지역에서 격전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10월 초 까지 장비배치와 훈련을 마친 대대는 10월 10일부터 15일에 걸쳐 열차에 분승, 10월 20일에 대대의 선발대가 오르샤에 도착합니다.

25기갑척탄병 사단은 제 78돌격사단과 함께 스몰렌스크-민스크 고속도로가 지나가는 구간을 방어하게 되었는데 이 지역은 소련군이 공격을 집중하는 지역이었습니다. 이미 10월 하순까지 독일측이 ‘고속도로 전투(Autobahnschlacht)’라고 부르는 두 차례의 격전이 있었으며 5기갑대대가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1월 14일 제 3차 고속도로 전투가 개시됩니다. 사단 예비대로 있던 제 5기갑대대는 119 차량화척탄병연대의 방어선을 돌파한 소련군 전차부대를 격퇴하는데 성공했고 이 전투의 전공으로 대대장인 레테마이어 대위는 1943년 12월 5일에 기사십자훈장을 수여 받았습니다. 그리고 11월 30일에 소련군은 다시 한번 공격을 개시해 제 4차 고속도로 전투가 시작됐습니다. 12월 4일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25기갑척탄병사단은 18기갑척탄병사단과 함께 소련군의 공세를 막는데 성공합니다. 1943-1944년 겨울의 동부전선 중부지구는 우크라이나의 해방에 가려 상대적으로 적은 관심을 받는 편이지만 이 중부지구 또한 겨울 내내 치열한 격전이 계속됐습니다. 치열한 전투 덕분에(?) 레테마이어 대위에게 기사십자훈장을 수여 받은 지 석 달 뒤인 1944년 3월 6일에 백엽기사십자훈장 수여가 결정됩니다. 그리고 봄부터 여름까지 장비 보충이 이뤄져 이미 5월 말 전차대대는 돌격포 45대를 갖춰 완편 상태가 됩니다.
이렇게 해서 겨울은 무사히 지나갔는데 문제는 아주 큰 재앙이 다가오고 있었다는 점 입니다. 다들 잘 아시다 시피 붉은군대의 1944년 하계대공세, ‘바그라티온’작전이 바로 중부지구에 가해질 예정이었고 제 25기갑척탄병사단은 소련군의 주공 지점에 위치해 있었던 것이죠. 제 78돌격사단과 제 25기갑척탄병 사단이 방어하는 스몰렌스크-민스크 고속도로 구간에는 소련 제 11근위군과 31군이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소련측의 기록에 따르면 제 25기갑척탄병 사단의 저항은 완강해서 6월 25일까지도 31군의 진격은 신통 찮았다고 합니다만… 다른 사단의 방어구역이 줄줄이 돌파 당했기 때문에 25기갑척탄병 사단은 후퇴 중 민스크 근교의 포위망에서 전멸당합니다. 물론 이때 5전차대대도 모든 장비를 잃고 전멸했고 대대장 레테마이어 대위는 포로가 됐습니다. 5전차대대에서 포위망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대대 정비중대와 약간의 부상병 정도였습니다.

※포로가 된 레테마이어 대위는 운 좋게도 살아남아 귀국할 수 있었고 1997년 12월에 사망했다고 하는 군요

어쨌든 이렇게 1943년에 돌격포를 장비했던 제 5기갑대대는 전멸했지만 바그라티온 작전 당시 전멸한 많은 부대들이 그렇듯 재편성됩니다. 재편성된 제 5기갑대대의 모체는 1944년 여름에 어수선하게 편성된 독립기갑여단 중 하나인 107 기갑여단의 2107 기갑대대였습니다. 편성 직후 네덜란드로 투입돼 영국군을 상대로 격전을 벌인 이 여단은 11월 8일/9일에 걸쳐 전선에서 물러나 바움홀더(Baumholder) 훈련장으로 이동 이곳에서 25기갑척탄병사단전투단(Kampfgruppe 25. Panzergrenadierdivision)으로 개편됩니다. 이렇게 원래 판터를 장비하고 있던 기갑대대의 잔존 장비와 병력으로 편성된 덕분에(?) 새로운 5기갑대대는 비록 몇 대 안 되지만 판터를 장비하게 됩니다.(얼쑤 조쿠나! 득템이다!) 하지만 말만 좋아 재편성이고 실제로는 잠시 휴식을 취한 수준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11월 18일에 재편된(이름만 바뀐) 25기갑척탄병사단전투단은 알자스 지역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이때 보유한 기갑차량은 7대의 판터와 4대의 구축전차였다고 합니다. 전선으로 나간 이후 약간의 기갑차량 보충이 있어서 12월 중순에는 11대의 판터와 6대의 구축전차를 보유하게 됩니다. 재편성 당시 근간이 됐던 2107기갑대대가 판터를 장비한 부대였기 때문에 신편성 5기갑대대는 계속해서 판터를 보충 받게 됩니다. 25기갑척탄병사단전투단은 11월 말부터 12월 까지 자르 일대에서 미군을 상대로 작전했습니다.
그리고 1945년 1월 1일자로 25기갑척탄병사단전투단은 다시 25기갑척탄병사단으로 개편됩니다. 개편될 당시 5기갑대대는 25대의 판터와 10대의 구축전차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이와 별도로 사단 전차엽병대대가 돌격포를 장비하고 있었습니다. (Bernd Hartmann의 부대사에는 1월 1일 사단이 개편되면서 5전차대대도 돌격포로 장비를 교체했다고 되어 있는데 다른 저작들과 상충되는 것으로 봐서 오류 같습니다) 개편 직후 알자스에서 북풍(Nordwind) 작전에 투입됩니다. 북풍 작전에서 5기갑대대는 대대장 아른트(Kurt Arndt) 대위가 전사하는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북풍작전이 흐지부지(?) 마무리 되면서 사단은 동부전선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25기갑척탄병사단은 21기갑사단과 함께 동부전선으로 이동해 퀴스트린 교두보 전투에 투입됩니다. 퀴스트린 교두보 전투 초반에 25기갑척탄병사단은 붉은군대의 제5충격군 예하 소총병 사단을 상대로 반격작전을 수행했습니다.
3월 말부터 4월 중순까지 25기갑척탄병사단이 예비대로 돌려지면서 5기갑대대도 다시 병력과 장비 보충을 받습니다. 이렇게 해서 베를린 작전 직전 5기갑대대의 기갑장비 현황은 비교적 양호한 수준이 이른 것으로 보입니다. 티케에 따르면 1945년 4월 7일 당시 5기갑대대는 가동 가능한 4호 전차 1대, 판터 28대, 4호 구축전차 6대, 대공전차 2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여기에 수리 중인 판터 6대와 4호 구축전차 3대가 더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역시 Bernd Hartmann의 부대사는 티케와 상충된 진술을 하고 있는데 다른 서적들과 교차 검증해 보면 티케의 주장이 맞는 것으로 보입니다. 왜 이런 상충된 주장이 나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베를린 전투가 시작된 뒤 25기갑척탄병사단은 브리첸(Wriezen) 방면의 반격에 투입되어 전투 초반에 전투력의 상당수를 잃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25기갑척탄병사단은 서쪽으로의 탈출에 성공해 5월 3일 미군에게 항복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5기갑대대는 전쟁 중 두번째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됩니다.

참고서적
Tony Le Tissier, Durchbruch an der Oder : Der Vormarsch der Roten Armee 1945, (Bechtermünz Verlag, 1997)
Bernd Hartmann, Geschiche des Panzerregiment 5: 1935-1943 und der Panzerabteilung 5 : 1943-1945, (Selbstverlag, 2002)
Rolf Hinze, Der Zusammenbruch der Heeresgruppe Mitte im Osten 1944, (Motorbuch Verlag, 1980)
Thomas Jentz, Panzer Truppen Vol. 2, (Schiffer, 1996)
Soviet General Staff, Belorussia 1944, (Frank Cass, 2001)
Wilhelm Tieke, Das Ende zwischen Oder und Elbe – Der Kampf um Berlin 1945, (Motorbuch Verlag, 1992)

2007년 12월 23일 일요일

지나치게 심각한 영국인들 - 1941년 듀잉(Dewing) 위원회가 예상한 독일군의 영국상륙계획

좀 황당하더라도 웃진 마세요.

1940년 가을의 시점에서 영국군 수뇌부는 여전히 히틀러가 영국을 침공할 것 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 판단은 당시 기준으로는 물론 오늘날의 우리가 생각하기에도 매우 합리적인 추론에 의해 세워진 것 입니다. 즉 독일은 장기전과 두 개의 전선에서 동시에 싸우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1941년 중으로 영국에 대한 전면적인 침공을 단행할 것 이라는 논리였습니다.

이 때문에 영국은 1940년 11월에 독일군의 예상되는 침공에 대비하기 위한 일환으로 독일측의 의도를 분석하기 위한 FOES (Future Operations Enemy Section)를 설치했습니다. 이 조직은 1941년 3월에 해체됩니다만 독일의 침공에 대한 대비는 계속하게 됩니다. 흥미롭게도 영국은 독소전이 개시된 이후에도 독일군의 영국 본토 침공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1941년 7월, 영국 전쟁성은 혹시라도 있을 지 모를 독일의 본토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서 작전국장(Director of Military Operations)인 듀잉(R. II. Dewing) 소장을 책임자로 하는 소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위원회는 1941년 12월 독일군이 1942년 봄에 영국 본토를 침공할 경우를 상정하고 예상되는 침공 작전에 대한 보고서 -"Invasion 1942: Form and Scale of Attack”– 를 제출합니다. 이 보고서의 내용은 현재의 시각에서 봤을 때 독일군의 공격 능력을 지나치게 과대 평가한 물건입니다만 제법 장대한 스케일 때문에 흥미롭습니다. 이 보고서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고 합니다.

이 보고서는 1942년에 독일이 소련을 KO 시킨 뒤 서부전선을 제외한 전 전선에서 전략 방어를 실시하고 그 대신 모든 역량을 영국본토 침공에 쏟는다는 상황을 가정하고 만들어졌습니다. 이 보고서가 가정하고 있는 독일군의 공격계획은 그야말로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즉 모든 전력을 단기간에 집중해 영국 본토에 상륙한다는 것 이었습니다.
이 보고서는 독일군이 기상상태가 호전되기 시작하는 1942년 4월 1일에 침공할 것을 가정하고 구체적인 독일군의 작전과 투입 병력 규모에 대해 추정했습니다. 여기에 따르면 독일군은 1940년 여름과 같은 축차적인 소모전을 피하고 해군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서 훈련부대를 제외한 모든 공군력을 침공 당일에 출동시키고 상륙부대도 동시에 발진시킬 것으로 상정했습니다. 침공 첫 48시간 동안 독일군의 예상 출격회수는 중형폭격기 2,800소티, 급강하폭격기 600소티, 그리고 전투기 4,000소티였습니다. 이렇게 압도적인 전력을 단기간에 투사해 영국 동남부의 제공권을 장악하고 동시에 침공함대도 발진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너무 엄청난 것이라 내부적으로도 좀 뻥이 센거 아니냐는 논의가 있었다고 합니다.
다음으로 침공부대의 규모도 실제 독일은 꿈도 못 꿀 수준이었습니다. 먼저 공격 첫날 새벽에 16,000명의 공수부대와 100대의 경전차가 상륙해안에 강하, 또는 글라이더로 투입되어 후속 부대가 착륙할 비행장을 확보하고 인근의 전투기 기지를 쑥대밭으로 만들 것 으로 예상했습니다. 다음 단계로는 양동작전을 위해 티르피츠가 주축이 된 호위함대의 호위를 받는 1개 기갑사단과 2~3개 보병사단 규모의 상륙부대가 첫날 요크셔(Yorkshire) 일대에 상륙을 감행할 것 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력 상륙부대의 규모도 독일로서는 꿈도 못 꿀 황당한 것 이었는데 방어군을 압도하기 위해서 320척의 전차양륙정, 1,250척의 중형 바지선, 970척의 소형 바지선을 동원해 병력 22만, 전차 750대, 박격포 및 야포 9,000문에 달하는 전력을 침공 첫 날에 램스게이트(Ramsgate)-세인트 마가렛(St. Margaret), 포크스톤(Folkestone)-뉴 롬니(New Romney), 벡스힐(Bexhill)-이스트본(Eastbourne), 워팅(Worthing)-보그너(Bognor) 지구에 투입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영국인들은 독일측이 해군력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보급로 주변에 엄청난 규모의 기뢰와 해안포를 설치하는 한편 영국 해군을 분산시키기 위해서 160척의 U-보트를 출동시킬 것으로 보았습니다.
첫날 상륙이 성공하면 당연히 후속 부대가 쏟아져 들어올 것 인데 상륙부대의 규모 만큼이나 후속부대의 규모도 황당한 수준이었습니다. 이 계획은 최소한 상륙 8일차 까지 12개 보병사단(이중 8개 사단은 축소편제)과 6개 기갑사단, 그리고 15개 독립기갑여단이 교두보를 통해 투입될 것으로 상정하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이 계획은 당시의 영국인들도 좀 황당한 규모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히틀러가 진짜로 침공해온다면 예상 이외의 미친짓을 할 지도 모른다는 견해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계획이 만들어질 10~12월 무렵에는 당장이라도 소련이 붕괴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으니 히틀러가 다음 단계로 전력을 다해 영국을 칠 것이라고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영국인들에게 이렇게 심각한 구석도 있었다니 나름대로 재미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