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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23일 금요일

어떤 문화충격(?)

1946년 크라이슬러에서 간행한 社史를 읽다보니 재미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독일의 공업 수준에 대한 평가인데 꽤 인상적이군요. 미국(크라이슬러)의 업적을 드높이기 위해 독일의 역량을 과장해서 평가하는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만.

독일인은 우수한 기술자들이다. 독일 산업계는 전쟁 말기까지도 기술자를 양성하는데 4년간의 교육기간을 적용했으며, 결국 군부의 압력 때문에 마지못해 교육 기간을 3년으로 단축했다. 숙련된 기술자와 공구를 생산하는 장인, 기술자는 병역을 면제받았다. 우리 미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정밀 측정장비도 독일의 어지간한 공장에는 보급되어 있었다. 전쟁이 끝난 뒤 독일에 파견된 미국측 전쟁보상위원회 위원들은 독일 산업계의 공업생산량 및 인구 대비 첨단 공작 기계 보유량이 미국 보다 월등히 많은 것에 충격을 받았다. 독일 산업계는 최신 공작기계를 대량으로 보유하고 있어서 패전 직전 까지도 1교대 근무를 시행할 정도였다. 독일 정부는 낡은 기계를 계속 사용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공작기계의 감가상각내용연수를 1년으로 제한할 정도였다. 우리 미국의 세법에서는 공작기계에 대해 일반적으로 20년의 감가상각내용연수를 적용하고 있다. 
Wesley W. Stout, "Tanks are mighty fine things!": How Chrysler's Detroit tank arsenal built the tanks that helped win WW II, (Chrysler Corporation, 1946), pp.76~77.

2016년 8월 9일 화요일

[번역글] 리마 기관차 공장과 최초의 셔먼 전차

번역글 하나 나갑니다.


오늘은 The Armor Journal 3호(2015년 여름호)에 실린 마이크 헤인스Mike Haines의 “The Lima Locomotive Works: First Sherman Tanks”를 번역해 봤습니다. 리마 기관차 공장의 셔먼 생산 역사와 이곳에서 생산한 차량의 특징을 간략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글 때문에 이 잡지를 샀는데 생각보다 내용이 짤막하고 특별한 내용이 없어서 실망했습니다. 돈이 아까우니 번역이라도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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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마 기관차 공장과 최초의 셔먼 전차


마이크 헤인스


1940년 프랑스 전역에서 전차를 대량으로 상실한 영국은 상실한 차량을 보충하는 것은 물론 독일의 본토 침공 위협에 맞서기 위한 준비를 해야 했다. 최대한 빨리 3,650대의 전차를 조달해야 했지만 영국은 충분한 생산 능력이 없었다. 결국 영국 정부는 미국에 원조를 요청하기 위해 ‘전차 조달 사절단’을 보냈다. 미국 또한 유럽의 위기 때문에 전차를 필요로 했다. 또한 영국의 전차 원조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기존의 전차 보다 더 무거운 전차를 생산할 수 있는 설비를 증설할 필요가 있었다. 미국은 기관차와 철도 화차 생산 공장들이 전차와 같은 중장비 생산으로 쉽게 전환할 수 있는 생산경험이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이 때문에 영국의 전차 조달 사절단은 오하이오 리마Lima의 리마 기관차 공장과 접촉해 전차 생산 가능 여부를 타진했다.


리마 기관차 공장Lima Locomotive Works, 이하 LLW는 1859년 소규모 농기구 수리공장으로 시작했으며 이때의 사명은 리마 농업사Lima Agricultural Works였다. 1869년 제재업자 에프라임 셰이Ephraim Shay가 리마 농업사에 자신이 설계한 목재 수송용 기관차를 생산하자는 제안을 했다. 그의 설계안은 기어식 구동장치를 가지고 있어 기존의 피스톤식 구동계를 가진 기관차 보다 견인력이 강했다. 리마 농업사는 셰이가 설계한 기관차를 생산하기로 하고 면허생산을 시작했다. 2년 뒤 리마 농업사의 주력 상품은 기관차가 되었다. 리마 농업사는 1870년 조직 개편을 거친 뒤 사명을 변경했다. 새 사명은 리마 기계 회사Lima Machine Company가 되었고 1892년 새로 설립된 리마 기관차 공장에 매각됐다. 합병 이후에도 이 회사는 한동안 판매량이 떨어진 셰이 기관차를 생산했다. 1920년대에 리마 기관차 공장은 훨씬 강력한 증기기관차를 개발했으며 이 기관차는 수퍼파워라는 별명이 붙었다. 신형 기관차는 증기기관 업계에 혁명을 일으켰고 리마 기관차 공장은 다시 한번 중요한 기업으로 발돋움 했다.


영국 전차 조달 사절단은 LLW 경영진과의 협상에서 LLW측이 100대의 M3 전차를 생산해 영국에 공급한다면 전차 생산을 위해 20만 평방피트 규모의 공장을 건설하도록 비용을 대겠다고 제안했다. LLW는 영국 정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전차 생산 공장 건설이 거의 마무리 되어 M3 생산 준비가 갖춰질 무렵 신형 T6 중형전차의 설계와 시험이 거의 완료됐다. 1941년 12월 T6 전차는 정식 채용됐으며 용접식 차체는 M4, 주조식 차체는 M4A1으로 명명됐다. 이 때문에 공장이 완공도 되기 전에 100대의 M3을 생산하기로 한 계약이 M4A1을 생산하는 것으로 변경됐다.


T6 중형전차의 설계는 M3 전차의 개발과 시험이 완료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됐다. M3 전차는 영국군이 프랑스 전선에서 상대한 75mm 단포신 4호전차와 대등한 화력을 지닌 전차를 급히 조달하기 위해 임시 변통으로 채용한 차량이었다. 미국의 중형전차 개발계획 초기에는 75mm포를 탑재할 수 있는 포탑을 생산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M3은 주포를 차체 오른쪽에 장착하고 포탑에는 37mm포를 탑재했다. 하지만 M3이 생산에 들어가기 직전에 75mm M2 주포를 장착할 수 있는 포탑이 개발되어 T6의 개발이 시작됐다. 전차 개발을 앞당기기 위해 M3와 M4는 모두 기존의 M2 중형전차의 차체 하부를 개량해서 사용했다. T6의 시제품은 주조로 만든 일체형 차체 상부에 차체 양 측으로 승무원 해치가 달려 있었다. 그러나 T6의 시험이 완료될 무렵 차체 측면의 승무원 해치가 차체 측면 방어력을 떨어트리고 탄약 탑재량을 제한한다는 점 때문에 이를 제거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LLW는 아직 M3 생산을 시작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회사들 처럼 M4 생산을 위해 라인을 전환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LLW는 M4 셔먼 탱크를 최초로 생산하는 공장이 되었다. 영국 정부는 생산 대수를 400대로 늘리도록 계약을 변경했으며 1942년 2월 LLW에서 첫 번째 셔먼이 생산됐다. 첫 번째 생산차량은 1942년 3월 메릴랜드의 에버딘 시험장으로 보내졌다. 두 번째 생산차량은 영국 전차 조달 사절단장 마이클 디워Michael Dewar를 기리기 위해 ‘마이클’로 명명됐다. ‘마이클’은 오늘날 까지 남아있으며 현재 영국 보빙턴 전차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LLW는 1942년에 820대의 M4A1을 생산했으며 1943년에는 835대를 생산했다. LLW에서 초기에 생산한 셔먼은 M3에 장착된 것과 비슷한 여닫이식 커버가 달린 포수 조준경이 장착되어 있었다. 이것은 얼마뒤에 일반적인 페리스코프식 포수 조준경으로 대체되었다. 커버가 달린 포수 조준경이 장착된 셔먼의 생산 대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20대 남짓으로 추정된다. 초기 생산분 셔먼의 또다른 특징은 차체에 장착되어 조종수가 발사하는 2정의 고정식 0.30 구경 기관총이었다. 이것 또한 조기에 폐지되었다. 또한 초기 생산분 중에는 조종수와 무전수용 직안식 관측창이 달린 차량도 있었는데 이 또한 정확한 생산대수를 파악할 수 없다. 직안식 관측창 또한 조기에 폐지됐다.


LLW에서 생산한 셔먼들은 다른 공장에서 생산한 차량들과 동일한 개량이 이루어졌다. 그 중 하나는 변속기 커버가 3단에서 주조식 일체형으로 변경된 것이다. 또한 초기에는 폭이 좁은 M34 포방패를 달고 있었으나 개량형들은 폭이 넓은 M34A1 포방패를 장착했다. 초기에 생산된 커버 달린 조준경이 장착된 D50878형 포탑은 나중에 우측면 장갑이 강화되고 피스톨 포트가 제거된 D50878형으로 개량됐다.


LLW에서 생산한 후기의 셔먼들은 LLW공장 생산형 만의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는 차체를 들어올릴때 케이블을 연결하는 돌기이다. 이 돌기는 일반적으로 차체 양 측면에 대칭으로 장착된다. 하지만 1943년 늦여름 LLW에서 생산한 차량들은 차체를 주조할때 돌기까지 일체형으로 만들었으며 측면으로 45도 기울어져있다. 두 번째 특징은 ‘그리즐리형 홈Grizzly groove’이다. 이 홈은 폭 5~6인치로 차체 후부 윗 부분에 파여있다. 이 홈은 캐나다에서 생산한 그리즐리와 램 전차에도 있는데 엔진 점검창 주변에 고인 물을 빼내기 위한 용도로 추정된다. 또한 프레스드 스틸 카Pressed Steel Car에서 생산한 M4A1 중 일부도 이런 홈이 파여있지만 여기서 생산한 셔먼들은 앞서 말한 차체 돌기가 일체형이 아니다.


1943년 9월 LLW의 셔먼 생산 계약이 만료됐다. 이때까지 생산된 셔먼은 1,655대였다. LLW는 1943년에 전차 외에도 110대의 M12 훈련용 포탑을 만들었다. 이것은 셔먼 포탑에서 장갑을 제거한 장비였다. 또한 LLW는 M32 전차구난차량의 개발에도 큰 비중을 차지했다. LLW는 M4를 기반으로 시험용 차량 T5를 제작했다. T5E1은 M4A1 차체 기반이었고 T5E2는 M4A2 차체 반이었다. LLW는 1943년과 1944년에 26대의 M32B2(T5E2)를 생산했으며, 1945년에는 20대의 M32B3(T5E3)을 생산했다. 또한 LLW가 생산한 기관차와 크레인도 전쟁 수행에 큰 기여를 했다.


전쟁이 끝난 뒤 LLW는 전차 생산 공장을 크레인과 굴착기 생산으로 전환했다. 기관차 공장에서는 계속 기관차를 생산했다. 하지만 디젤 기관차가 주류가 되면서 LLW는 시류를 따라잡지 못했고 결국 1947년에는 디젤엔진을 생산하는 오하이오 해밀턴Hamilton에 위치한 General Machinery Corporation과 합병했다. 합병한 회사의 명칭은 리마 해밀턴이었다. 하지만 이 조치는 너무 늦었다. 합병 이후 회사는 147대의 디젤 기관차를 생산했지만 이 제품들은 경쟁력이 없었다. 리마 해밀턴은 기관차 부분을 살리기 위한 마지막 조치로 1950년 볼드윈 기관차 공장Baldwin Locomotive Works과 합병했다. 새로운 법인의 명칭은 볼드윈 리마 해밀턴이었다. 하지만 1951년에는 기관차 생산을 전면 중단했다. 다만 중장비 생산은 계속했다. 1971년 볼드윈 리마 해밀턴은 클라크 이큅먼트Clark Equipment에 매각됐으며 1981년 마침내 문을 닫았다.


볼드윈 리마 해밀턴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도 군수물자 생산을 계속했다. 그 중 하나는 M48 차체를 생산해 포드에 공급하는 것 이었고 다른 하나는 2½톤 트럭과 5톤 트럭을 레커차로 개조하는 것 이었다.


오하이오 리마의 LLW는 1943년 부터 1944년 까지 불과 1,655대의 셔먼을 생산하는데 그쳤지만 이 도시는 오늘날에도 전차 생산으로 유명하다. LLW가 있던 곳에서 남서쪽으로 2마일 떨어진 곳에는 M1, M1A1, M1A2 에이브럼스 전차의 생산과 창정비를 담당하는 통합체계생산센터Joint Systems Manufacturing Center가 있다. 이곳은 스트라이커 계열 장갑차의 부품도 생산하고 있다. 이 때문에 몇몇 사람들은 리마를 자유 세계의 전차 수도라고 부르기도 한다.

2009년 3월 16일 월요일

북한의 군사 공업화 - 기무라 미쓰히코, 아베 게이지

식민지시기의 공업화는 식민지근대화론과 맞물리는 매우 민감한 문제입니다. 식민지 시기의 경제적 유산이 해방 이후 경제 발전의 원천이 되었다는 논리는 사실 여부를 떠나 약간 불쾌하게 다가올 수 밖에 없습니다. 1970년대 이후 식민지시기의 경제발전과 해방 이후의 경제발전의 상관관계에 대한 수많은 연구와 논쟁이 있었고 그것은 현재까지도 진행중에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논쟁은 한국의 경제발전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기묘하게도 식민지시기 공업화가 대규모로 이루어 진 오늘날의 북한 지역에 대한 연구나 논쟁은 상대적으로 적었습니다.

이 책의 저자인 기무라 미쓰히코(木村光彦) 와 아베 게이지(安部桂司)는 식민지시기의 공업화로 인한 유산이 그대로 북한에 남겨져 1953년 이후까지도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저자들은 먼저 식민지시기, 특히 만주사변 이후 북한 지역의 중화학공업화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북한지역의 공업화에 대한 일본 연구자들의 연구는 국내에 많이 소개되었고 호리 가즈오(堀和生)의 『한국 근대의 공업화 : 일본 자본주의와의 관계』 같이 재미있게 잘 씌여진 책도 있습니다. 그런데 기무라와 아베는 북한지역의 공업화를 설명하면서 거시적인 공업화 경향에 대해 이야기 하는 대신 각 기업체와 공장의 구체적인 활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기업이 언제 어느 지역에 어떤 투자를 해서 무엇을 생산했는가. 저자들은 본문에서 거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분량을 1945년 이전 북한 지역의 일본 기업활동에 할애하고 있습니다. 보론으로 남한 지역의 군수공업에 대해서도 간략히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 또한 좋은 참고가 됩니다. 개별 기업의 활동을 대략적으로 서술해 놓았기 때문에 참고 자료로서 활용도가 높습니다.

1945~50년 시기에 대한 서술은 상대적으로 간략합니다. 저자들은 해방 직후 혼란기에 소련 점령군과 북한인들이 일본 기업을 인수해 산업을 복구하는 과정과 1950~51년 사이에 기초적인 군수공업이 형성되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한데 저자들은 북한이 주장하는 식민지 유산과의 단절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주장과는 달리 상당수의 기업들이 혼란기에 파괴를 면하고 그대로 북한의 공업 기반이 되었음을 개별 공장들의 사례를 들어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자들은 이렇게 북한에 승계된 공업기반이 북한의 전쟁 준비에 동원되는 과정으로 넘어갑니다.

저자들은 일본이 남긴 공업화의 유산이 북한에 승계되는 과정을 증명함으로서 북한이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있는 식민지 유산의 단절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 발 더 나가 식민지의 유산이 1953년 이후의 공업화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합니다. 그렇지만 식민지 유산이 한국전쟁 이후에도 영향을 끼쳤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실질적인 근거를 충분히 제시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설득력이 약합니다. 부록에서 해방이전 일본이 건설한 공장들이 오늘날 북한의 어떤 공장으로 승계되었는가를 정리한 표를 실어 놓았지만 이것 이외에는 주장을 입증할 만한 서술이 부족합니다. 그렇지만 식민지 공업이 해방 이후의 북한에 승계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복원해 낸 점은 주목할 만 합니다.

2009년 3월 8일 일요일

100만대의 비행기

1차대전에서 유례가 없던 대규모 소모전을 경험한 뒤 각국의 군인들은 앞으로 다가올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산업동원능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서유럽 국가들에 비해 뒤떨어지는 공업력으로 고생을 한 러시아의 후계자, 소련은 그런 경향이 매우 강했습니다.

군사사가 새뮤얼슨(Lennart Samuelson)에 따르면 투하체프스키(Михаил Н. Тухачевский)는 1930년 1월 혁명군사평의회 의장이었던 보로실로프(Климент Е. Ворошилов)에게 보낸 전시동원계획에 대한 보고서에서 제1차 5개년 계획이 목표치를 달성할 경우 소련의 전시 항공기 생산능력은 연간 122,500대에 달할 것이라는 주장을 했다고 합니다. 투하체프스키의 주장은 항공기 생산능력을 자동차 생산능력의 30%로 잡은 단순한 추정에 근거한 것 이었습니다.1) 이러한 투하체프스키의 주장에 대해 스탈린은 현실성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런데 양키들 중에는 투하체프스키 보다 더 거창한 생각을 하는 자가 하나 있었습니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뒤 육해군탄약위원회(Army and Navy Munitions Board) 위원장이 된 에버스타트(Ferdinand Eberstadt)였습니다.

에버스타트는 비상 조직에서의 보좌역이라는 제한적인 목적을 가지고 워싱턴으로 온 것이었지만 전시동원의 진행은 곧 그의 코포라티즘적인 성향을 자극했다. 그는 코포라티즘에 대해 포레스탈(James Forrestal)과 토론하곤 했다. 포레스탈은 에버스타트의 견해를 받아들였지만 그 자신은 명확한 코포라티즘적 철학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초기부터 부분적인 전시동원을 통해 미국의 생산력을 재조직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에버스타트는 전시동원체제를 통해 노동력과 자본, 정부조직과 산업계, 납세자와 관료기구들을 국가적 노력에 통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에버스타트는 정부의 단호한 결단과 잘 조직된 계획만 있다면 미국은 1년에 50만대에서 100만대의 군용항공기를 생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포레스탈에게 이러한 생산을 통해 ‘적들에게 극도의 경각심을 주고’ 대공황으로 산산조각난 미국의 자신감을 회복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Jeffery M. Dorwart, Eberstadt and Forrestal : A National Security Partnership 1909~1949, Texas A&M University Press, 1991, pp.39~40

아마 스탈린이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미친놈이라고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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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Lennart Samuelson, Mikhail Tukhachevsky and War-Economic Planning : Reconsiderations on the Pre-war Soviet Military Build-Up,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Vol.9 No.4(Dec 1996), pp.824~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