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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26일 금요일

작은 국가의 한계

땜빵 포스팅 한 개 더 추가입니다;;;;

배군님이 칼 12세(Karl XII)와 북방전쟁에 대한 글을 써 주셔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마침 예전에 읽었던 Robert I. Frost의 The Northern Wars의 내용이 생각난 김에 이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간단한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개인적으로 칼 12세는 군사적으로 유능하지만 운은 따라주지 않은 인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필 그가 즉위했을 무렵은 스웨덴이 사회 경제적으로 한계에 부딪힌 데다 발트해의 정세도 급변하고 있었지요. 덴마크-작센-러시아 연합군은 전쟁이 그리 길게 끌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큰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스웨덴은 30년 전쟁에서 군사력을 과시하며 발트해의 강국으로 떠올랐지만 강국으로 남기에는 근본적으로 제약이 많았습니다. 무엇보다 인구 자체가 적었습니다. 1620년대에 스웨덴의 인구는 핀란드를 합쳐도 125만 명 정도였으니 폴란드, 러시아, 그리고 독일의 여러 국가들과 비교하면 절대적인 열세였습니다. 병사는 돈을 벌어 용병으로 채우면 된다지만 장교는 문제가 달랐지요. 스웨덴 왕실은 장교의 경우는 가능한 스웨덴 귀족으로 채우고자 했지만 인구가 적으니 한계는 명확했습니다. 17세기 초 스웨덴의 귀족인구는 아무리 높게 잡아도 3,000명 이내였고 이 중 장교가 될 수 있는 성인 남성은 500-600명 정도였습니다.

스웨덴의 남성들은 15세에서 60세 까지 군역의 의무를 져야 했습니다. 왕실 소유지의 농민(Kronobönder)과 자유농(Skattebönder)의 경우 남성 10명 당 1명이 군역을 지고 나머지가 세금으로 비용을 대는 형식이었는데 기본적으로 인구 자체가 적다 보니 경제에 큰 부담을 주는 구조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인구의 부족 때문에 30년 전쟁 당시 스웨덴군은 현찰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 외국인 용병에 크게 의존해야 했습니다.

스웨덴이 경제적으로 튼튼하다면 별 문제가 없었겠지만 30년 전쟁 이후 북방의 강자 노릇을 하느라 무리를 한 덕에 17세기 중반에는 재정적자가 심각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1681년에는 정부 부채가 5천만 릭스달러(Riksdaler)에 달했습니다. 왕실의 연간 수입이 4백만 릭스달러도 채 되지 않았다고 하지요. 재정적자는 30년 전쟁 이후 스웨덴 왕실을 꾸준히 괴롭혀 온 문제였습니다. 스웨덴은 빈약한 국내 경제 때문에 사실상 ‘약탈’로 전쟁 비용을 충당하는 경향이 강했는데 30년 전쟁이 종결된 뒤에는 전쟁으로 인한 수입도 짭잘하지가 못 했습니다. 재정난에 시달린 칼 10세(Karl X)는 1660년에 정규군을 9만3천명에서 4만6천명으로 감축하는 조치를 취하기 까지 합니다. 재정 지출을 억제한 덕에 1690년에는 정부 부채가 1천만 릭스달러까지 떨어지긴 했습니다만 스웨덴의 근본적인 경제적 취약성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듯 칼 10세는 재정난으로 군대를 절반 가까이 감축했습니다. 하지만 전쟁으로 팽창한 스웨덴의 영역을 방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칼 10세는 스웨덴의 해외 영토인 폼메른(Pommern)에 평시 수비대로 배치해야 할 병력이 8,000명은 필요하다고 말했다고 하는데 스웨덴군의 총병력과 비교해 보면 얼마나 큰 병력인지 알 수 있습니다.

얼마 되지 않는 인구로 군 병력과 경제 생산을 담당해야 했기 때문에 군역의 의무를 부과하는 비율은 일정하게 유지되지 못 했습니다. 30년 전쟁 중인 1635년에는 귀족 소유지의 농민(Frälsebönder)은 30명 당 1명, 왕실 소유지 농민과 자유농은 15명 당 1명이 징집되는 것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이때는 용병으로 병력을 충당하는 것이 비교적 원활했던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30년 전쟁이 끝나고 점차 재정 적자가 악화되면서 다시 국내의 인적자원에 대한 의존이 높아졌습니다. 1653년에는 귀족 소유지 농민은 8명 당 1명, 왕실 소유지 농민과 자유농은 16명 당 1명이 징집되는 것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왕실 소유지 농민과 자유농의 징집 비중이 낮아진 것으로 보이지만 내막을 들여다 보면 암담했습니다. 스웨덴 왕실이 재정 수입을 늘리기위해 왕실 소유지를 귀족에게 대량으로 매각한 때문에 귀족 소유지의 비중이 전체 토지의 66%까지 높아진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왕실 소유지의 농민과 자유농이 줄어들었으니 어쩔 수 없는 귀결이었습니다.

칼 11세(Karl XI)가 1697년 사망했을 때 스웨덴군은 스웨덴 기병 1만1천명, 스웨덴 보병 3만명, 그리고 용병 2만5천명으로 이루어 졌습니다. 그리고 칼 12세는 이 군대로 장기전을 치르며 여러 차례의 승리를 이끌어 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스웨덴의 적들은 더 많은 인적자원을 가지고 장기전을 감당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패권 경쟁에서 소국이 가지는 한계는 명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리 훈련이 잘 된 군대와 지휘관이 있더라도 숫적인 열세를 감당하는데는 한계 있을 수 밖에 없지요. 한국사에 비교해 보자면 고구려가 장기전 끝에 당에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었던 것과 비슷할 것 입니다.

2006년 5월 8일 월요일

독일 육군의 장교집단과 사회계층 1900-1925 (재탕!)

19세기 유럽 사회의 가장 큰 사회적 변화를 몇 개 꼽는다면 시민 계층의 성장을 그 중 하나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하다 못해 가장 후진적이라는 러시아도 농노제를 폐지하는 개혁(?)을 단행했으니. 시민계층의 성장은 서유럽에서는 좀 보수적인 축에 끼는 독일에서도 활발했고 보수의 아성인 군대까지도 급속히 잠식해 들어갔다. 이미 독일 통일 전인 1860년의 통계를 보더라도 프로이센 군 장교단의 35%는 귀족이 아닌 시민 계층에 속하고 있었다.

시민 계급의 장교 진출은 1890년대부터 상비군이 증강되면서 더 활발해 졌다. 귀족층의 숫자는 제한 되어 있었고 귀족들만 가지고 장교단을 메우는 것은 불가능한 일 이었다. 특히 시민 계급은 포병, 공병 등 전문 병과에서는 이미 귀족 계층을 숫자상으로 압도하고 있었다. 비록 총 참모부 같은 핵심 보직의 경우 귀족 출신이 전체의 70%를 차지했지만 변화의 조짐은 눈에 띄게 나타나고 있었다. 병과의 핵심인 보병 병과에서도 고위 장교단을 제외하면 시민 계급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게 높았다. 특히 새로 임관되는 장교에서 귀족이 차지하는 비중은 갈수록 떨어졌다.

1909년 독일군 보병 병과 장교단에서 귀족이 차지하는 비중은 대략 아래와 같았다.(귀족 / 시민)

원수 1 / 0
상급대장 1 / 0
대장 30 / 2
중장 44 / 2
소장 75 / 31
대령 139 / 65
중령 109 / 105
소령 501 / 512
대위 945 / 1522
중위 631 / 1467
소위 1252 / 2929

다른 병과의 경우 귀족이 차지하는 비중은 더 적었다. 예를 들어 1909년에 임관한 소위들의 기록을 보면 공병의 경우 257명 중 귀족은 8명, 포병의 경우 343명 중 귀족은 17명에 불과했다.
귀족이 시민계급 보다 다수를 차지한 병과는 기병이 유일했는데 1913년의 통계를 보면 기병장교의 80%가 귀족인 것으로 나타나 있다. 반면 같은 년도의 통계를 보면 포병의 경우 귀족 출신 장교는 전체의 41%였고 보병병과의 경우 귀족 출신 장교가 차지하는 비율은 전체의 48%에 불과했다. 1913년에 장교단에서 귀족 출신이 차지하는 비중은 30%대로 떨어졌다고 한다.

이렇게 시민 계층이 급속히 장교단을 잠식해 들어 갈 수 있었던 데는 독일의 뛰어난 교육 수준이 한 몫을 했다. 이미 바이에른의 경우 장교 임관 자격 중 하나로 아비투어(Abitur) 통과를 넣고 있었을 정도니까. 1912년의 통계를 보면 프로이센, 작센, 뷔르템베르크의 장교단에서 아비투어 소지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무려 65.1%에 달했다고 한다. 시민 계층 출신의 장교들의 자질은 충분히 뛰어났기 때문에 귀족 출신들과 경쟁하는데 있어서도 큰 어려움이 없었다.

※ 소시민 계층 출신 장교단의 증가는 역시나 보수적인 러시아도 마찬가지여서 러시아는 1870년대부터 부르주아 계층을 장교단에 확충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나 독일에 비해 국민 교육 수준이 크게 낮아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러시아의 하급 장교단으로 편입된 평민 계층의 상당수는 초등 교육도 받지 못했지만 군대 규모가 크게 증가했기 때문에 별 수 없이 장교로 쓸 수 밖에 없었다.

1차 대전이 발발한 뒤 군대의 사회 계급 구성에서 귀족이 차지하는 비중은 더 떨어졌다. 국가 총동원으로 병력 규모가 급팽창 한데다가 극도의 소모전으로 장교의 손실이 커졌기 때문에 이제는 중산층은 물론 사회의 하위 계층까지 장교 집단으로 편입되었다. 1918년 7월의 기록을 보면 소위대행 부사관(Feldwebelleutnant)이 21,607명에 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전쟁을 거치면서 이제는 장성 집단에서도 시민 계급이 차지하는 비중이 더 커졌다.

1925년의 기록을 보면 장군의 45.3%가 시민 계급이었으며 전체 장교 집단에서 귀족 출신 장교의 비중은 20%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독일 군대의 정치적 성향은 여전히 보수적 이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군대의 장교 1,100의 사회 계층을 조사한 한 연구에 따르면 이들 중 30%는 군인 집안 출신이고 30%는 공무원 계층, 16%는 자영업자, 그리고 나머지는 지주, 또는 공장주 등 중산층 이상 계층이 대부분을 차지했다고 한다.
젝트가 가장 우려했던 것 중 하나가 시민 계급이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커져서 군대가 정치적으로 불온한 색채를 띄게 되는 것 이었다고 하는데 최소한 장교단의 출신 계층만 가지고 본다면 그런 걱정은 기우였고 실제로도 독일 장교단은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집단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