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odruff D. Smith의 The Ideological Origins of Nazi Imperialism을 다시 한번 읽었습니다. 읽은지 꽤 돼서 내용이 가물가물해서 한 번 더 읽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그런데 일 때문에 어수선해서 그런지 한 번 더 읽었지만 읽은 것 같지가 않습니다. 그래도 최근의 ‘간도떡밥’ 때문인지 재미있게 읽히긴 하더군요.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역시 파국으로 치닫기 직전인 9장의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입니다. 저자인 Smith 또한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는 매스미디어의 발달로 ‘제국주의적 정서’가 대중에게 광범위하게 파고들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그 대표적인 예로 1920년대에 제국주의적 팽창을 주제로 한 소설들이 대중의 인기를 끌었다는 점을 들고 있습니다. 특히 그 중에서는 1926년에 출간된 그림(Hans Grimm)의 소설 “Volk ohne Raum”이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이 소설은 유사한 종류의 소설 중 성공한 작품으로 1926년부터 1935년까지 315,000부가 팔렸다고 하는군요.
이 소설의 저자인 그림은 유럽 외부의 식민지 획득을 옹호하고 Lebensraum을 동유럽에서 찾는 나치에 비판적인 경향을 보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의 소설은 기본적으로 독일의 팽창을 옹호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중에게 Lebensraum 사상이 광범위하게 확산될 수 있는 매개가 되었으며 정치적 보수주의를 확신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 부분이 가장 재미있게 읽힌 이유는 위에서도 언급했듯 얼마 전 튀어나온 간도 반환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간도 반환 문제는 상식적으로 봤을 때 말도 안되는 이야기 이지만 대중매체를 통해 주기적으로 재생산 되고 있습니다. 경향신문 같은 언론사가 간도 회복 캠페인 같은 짓을 앞장서서 하기도 했지요. 2009년이 지나간다고 하더라도 간도 떡밥은 미래에 다른 형태로 변주되어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문제는 이런 대책 없는 망상을 무책임하게 유포하고 있는 대중매체들입니다. 한국이야 독일 같은 강대국이 아니니 극우 정당이 집권해 중국을 상대로 전쟁을 하지는 않겠습니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개념 없는 민족주의 프로파간다가 판을 치는 것은 단순히 웃어 넘길 일은 아닙니다.
독도와 같이 민감한 문제가 튀어 나올 때 마다 반복되는 정치인들의 호들갑에서 볼 수 있듯 민족주의적인 정서는 정치에 큰 영향을 끼치는 요인입니다. 그리도 한반도 균형자론 같은 외교적 망신사례에서 볼 수 있듯 외교 정책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상업적으로 가치가 있다는 점에서 싸구려 민족주의를 팔어먹으려는 움직임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고 이것은 어떻게든 대중의 정서에 영향을 끼칠 것 입니다. 물론 한국의 현실을 볼 때 나치 독일처럼 파국적으로 폭주하지는 않겠지만 말입니다.
2009년 8월 13일 목요일
2008년 12월 2일 화요일
전쟁이 변화시킨 독일의 작은 마을 - Kirchmöser
Frontline and Factory : Comparative Perspectives on the Chemical Industry at War : 1914~1924를 읽는 중인데 1차대전 중 화학공업(주로 화약)에 대한 재미있는 글들이 많습니다. 뒤에 간단한 소개글을 써 볼 생각입니다. 이 책은 개별주제에 대한 소논문을 모아놓은 책인데 그 중 독일의 한 작은 마을의 공업화에 대한 글이 상당히 좋습니다. Sebastian Kinder의 Transforming a village into an industrial town : The royal Prussian powder plant in Kirchmöser라는 글인데 이 글의 내용을 요약해 볼 까 합니다.
1차대전이 발발할 당시 독일에는 민간 화학기업들이 운영하는 화약공장외에 국영 화약 공장이 다섯 곳 있었다고 합니다. 슈판다우(Spandau), 하나우(Hanau)의 프로이센 왕립화약공장, 그나슈비츠(Gnaschwitz)의 작센왕립화약공장, 다하우(;;;;)와 잉골슈타트(Ingolstadt)의 바이에른왕립화약공장 이었습니다. 그러나 국영화약공장들은 군대의 평화시 화약소요량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에 불과했고 민간이업들의 생산능력도 막대한 화약소모량 때문에 충분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이 격화되면서 새로운 화약공장의 설립이 필요해졌습니다. 전쟁 발발전 독일 군부는 한달에 200톤의 화약을 생산하면 전시 소요를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산업동원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전쟁이 터져서 1914년 가을에는 화약 생산량을 월 1천톤까지 끌어올렸지만 전선의 요구량은 충족시키지 못 했습니다.
독일정부는 1914년 9월에 새로운 국영화약공장을 설립하고 다하우, 잉골슈타트, 그나슈비츠의 설비를 증설한다는 결정을 내립니다. 이 새로운 공장은 결국 키르히뫼저(Kirchmöser)에 건설되는데 이 공장은 1차대전 중 새로 건설된 유일한 국영화약공장이었다고 하는군요. 나머지는 민간기업의 설비 증설로 충당했다고 합니다.
화약공장을 증설할 때 요구된 조건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 최소 350급 선박이 항행할 수 있는 수로에 위치할 것
- 4분의 1은 숲으로 되어 있는 350헥타르 면적의 야산, 혹은 그 근처에 위치할 것. 폭발사고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야산지역에 건설되어야 하며 숲은 적의 첩보활동으로 부터의 은닉에 필요함
- 주요 철도노선에서 4km이내에 위치할 것
이러한 필수조건 외에 요구된 부가 사항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 일일 8000~10000입방미터의 식수를 공급할 수 있을 것
- 폭발사고시 민간인 피해를 최소화 하기 위해서 건물로부터 250미터 이내에 주거지가 없어야 할 것
- 공장 주변에 600에서 800명의 노동자와 그 부양가족을 수용하고 공장 내 기숙사에 50에서 60명의 노동자를 수용할 수 있을 것
- 건설회사와 기타 공업기반을 갖추고 있을 것
- 석탄광산
- 가능하면 지가를 낮추기 위해 국유지일 것
이렇게 해서 1914년 11월 10일에 뫼저(Möser)라는 마을이 적합한 건설지로 추천됩니다. 전쟁 당시 약 300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던 이 마을은 하벨(Havel) 강을 끼고 있어 실레지엔과 루르 공업지대로의 접근성이 용이했고 동시에 함부르크(Hamburg)와 슈테틴(Stettin) 등으로의 접근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또 베를린-하노버 철도가 지나가는 지역에 위치해 철도 교통도 좋은 위치였습니다. 기본적인 요구조건은 대부분 충족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일한 문제는 건설 예정지역이 대부분 사유지였다는 것인데 이것은 총 1,154,480 마르크의 비용을 들여 국가가 매입했습니다.
빌헬름 2세의 최종승인은 1914년 11월 29일에 내려졌지만 실제 건설은 뫼저 마을이 선정된지 이틀 뒤인 11월 12일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너무 작은 마을이다 보니 충분한 건설 노동력을 확보할 수가 없었고 1915년 1월부터 3월까지는 겨울이다 보니 건설이 지연되고 있었습니다.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노동력이었는데 주변 지역에서 3,000여명의 건설도동자가 모집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들 중 상당수가 농부여서 농번기에는 노동력이 다시 유출되는 문제가 있었다고 하는군요. 결국 1915년 3월에는 전쟁포로를 동원하자는제안도 나왔으나 최종적으로는 점령한 폴란드에서 모집한 노동자를 투입하는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1915년 1월 말까지 건설작업을 위해 베를린-하노버 철도선과 뫼저 마을을 연결하는 철도가 완성되었고 2월부터 건설작업이 시작되어 1915년 5월 7일 부터는 내부 설비 공사 단계에 들어갑니다. 1915년 7월 1일에는 건물 공사가 완료되어 생산라인 구축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화약의 시험생산은 아직 공장단지가 완공되지 않은 1915년 5월 12일부터 시작되었으며 1918년 중순에는 공단 전체가 완성되었습니다.
그 결과 전쟁 발발 당시 300명의 주민이 거주하던 뫼저 마을은 1918년까지 6,000~7,000명의 공장노동자와 3,000명의 건설노동자가 거주하는 중소규모 도시로 발전합니다. 노동자들의 편의를 위해 대규모의 주택단지도 건설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전시에 급히 건설한 공단이다 보니 숙련노동자는 확보할 수 없었고 TNT 같이 상대적으로 복잡한 제품은 생산할 수 없었다고 하는군요.
그런데.
공단이 완공되고 몇 달 지나지 않아 전쟁이 끝나버렸습니다.
키르히뫼저의 인구는 1918년 말에는 1,000명 수준으로 감소했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 공장의 생산설비들은 프랑스, 벨기에, 세르비아에게 넘겨집니다. 그러나 바이마르 공화국정부는 전쟁 중 새로 만들어진 공업도시가 그냥 사라지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키르히뫼저의 공단은 1920년에 철도청(Reichsbahn)에 넘겨져 기관차 공장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이 공장은 독일에서 처음으로 포드-테일러식의 대량생산 공정을 적용해 기관차 정비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바이마르 공화국과 제3제국 시기에 키르히뫼저는 중요한 철도공업지구로 탈바꿈합니다. 1939년에 키르히뫼저의 인구는 5,000명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최종적으로 이 도시가 몰락한 것은 2차대전 이후 동독으로 편입된 이후 였습니다. 동독 시기에도 키르히뫼저는 철도청의 정비공장이 있었지만 2차대전 이전의 수준은 회복하지 못했다고 하는군요.
1차대전이 발발할 당시 독일에는 민간 화학기업들이 운영하는 화약공장외에 국영 화약 공장이 다섯 곳 있었다고 합니다. 슈판다우(Spandau), 하나우(Hanau)의 프로이센 왕립화약공장, 그나슈비츠(Gnaschwitz)의 작센왕립화약공장, 다하우(;;;;)와 잉골슈타트(Ingolstadt)의 바이에른왕립화약공장 이었습니다. 그러나 국영화약공장들은 군대의 평화시 화약소요량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에 불과했고 민간이업들의 생산능력도 막대한 화약소모량 때문에 충분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이 격화되면서 새로운 화약공장의 설립이 필요해졌습니다. 전쟁 발발전 독일 군부는 한달에 200톤의 화약을 생산하면 전시 소요를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산업동원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전쟁이 터져서 1914년 가을에는 화약 생산량을 월 1천톤까지 끌어올렸지만 전선의 요구량은 충족시키지 못 했습니다.
독일정부는 1914년 9월에 새로운 국영화약공장을 설립하고 다하우, 잉골슈타트, 그나슈비츠의 설비를 증설한다는 결정을 내립니다. 이 새로운 공장은 결국 키르히뫼저(Kirchmöser)에 건설되는데 이 공장은 1차대전 중 새로 건설된 유일한 국영화약공장이었다고 하는군요. 나머지는 민간기업의 설비 증설로 충당했다고 합니다.
화약공장을 증설할 때 요구된 조건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 최소 350급 선박이 항행할 수 있는 수로에 위치할 것
- 4분의 1은 숲으로 되어 있는 350헥타르 면적의 야산, 혹은 그 근처에 위치할 것. 폭발사고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야산지역에 건설되어야 하며 숲은 적의 첩보활동으로 부터의 은닉에 필요함
- 주요 철도노선에서 4km이내에 위치할 것
이러한 필수조건 외에 요구된 부가 사항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 일일 8000~10000입방미터의 식수를 공급할 수 있을 것
- 폭발사고시 민간인 피해를 최소화 하기 위해서 건물로부터 250미터 이내에 주거지가 없어야 할 것
- 공장 주변에 600에서 800명의 노동자와 그 부양가족을 수용하고 공장 내 기숙사에 50에서 60명의 노동자를 수용할 수 있을 것
- 건설회사와 기타 공업기반을 갖추고 있을 것
- 석탄광산
- 가능하면 지가를 낮추기 위해 국유지일 것
이렇게 해서 1914년 11월 10일에 뫼저(Möser)라는 마을이 적합한 건설지로 추천됩니다. 전쟁 당시 약 300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던 이 마을은 하벨(Havel) 강을 끼고 있어 실레지엔과 루르 공업지대로의 접근성이 용이했고 동시에 함부르크(Hamburg)와 슈테틴(Stettin) 등으로의 접근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또 베를린-하노버 철도가 지나가는 지역에 위치해 철도 교통도 좋은 위치였습니다. 기본적인 요구조건은 대부분 충족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일한 문제는 건설 예정지역이 대부분 사유지였다는 것인데 이것은 총 1,154,480 마르크의 비용을 들여 국가가 매입했습니다.
빌헬름 2세의 최종승인은 1914년 11월 29일에 내려졌지만 실제 건설은 뫼저 마을이 선정된지 이틀 뒤인 11월 12일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너무 작은 마을이다 보니 충분한 건설 노동력을 확보할 수가 없었고 1915년 1월부터 3월까지는 겨울이다 보니 건설이 지연되고 있었습니다.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노동력이었는데 주변 지역에서 3,000여명의 건설도동자가 모집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들 중 상당수가 농부여서 농번기에는 노동력이 다시 유출되는 문제가 있었다고 하는군요. 결국 1915년 3월에는 전쟁포로를 동원하자는제안도 나왔으나 최종적으로는 점령한 폴란드에서 모집한 노동자를 투입하는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1915년 1월 말까지 건설작업을 위해 베를린-하노버 철도선과 뫼저 마을을 연결하는 철도가 완성되었고 2월부터 건설작업이 시작되어 1915년 5월 7일 부터는 내부 설비 공사 단계에 들어갑니다. 1915년 7월 1일에는 건물 공사가 완료되어 생산라인 구축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화약의 시험생산은 아직 공장단지가 완공되지 않은 1915년 5월 12일부터 시작되었으며 1918년 중순에는 공단 전체가 완성되었습니다.
그 결과 전쟁 발발 당시 300명의 주민이 거주하던 뫼저 마을은 1918년까지 6,000~7,000명의 공장노동자와 3,000명의 건설노동자가 거주하는 중소규모 도시로 발전합니다. 노동자들의 편의를 위해 대규모의 주택단지도 건설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전시에 급히 건설한 공단이다 보니 숙련노동자는 확보할 수 없었고 TNT 같이 상대적으로 복잡한 제품은 생산할 수 없었다고 하는군요.
그런데.
공단이 완공되고 몇 달 지나지 않아 전쟁이 끝나버렸습니다.
키르히뫼저의 인구는 1918년 말에는 1,000명 수준으로 감소했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 공장의 생산설비들은 프랑스, 벨기에, 세르비아에게 넘겨집니다. 그러나 바이마르 공화국정부는 전쟁 중 새로 만들어진 공업도시가 그냥 사라지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키르히뫼저의 공단은 1920년에 철도청(Reichsbahn)에 넘겨져 기관차 공장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이 공장은 독일에서 처음으로 포드-테일러식의 대량생산 공정을 적용해 기관차 정비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바이마르 공화국과 제3제국 시기에 키르히뫼저는 중요한 철도공업지구로 탈바꿈합니다. 1939년에 키르히뫼저의 인구는 5,000명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최종적으로 이 도시가 몰락한 것은 2차대전 이후 동독으로 편입된 이후 였습니다. 동독 시기에도 키르히뫼저는 철도청의 정비공장이 있었지만 2차대전 이전의 수준은 회복하지 못했다고 하는군요.
2007년 2월 27일 화요일
[번역글][재탕] 독일공군의 육군 지원 교리 1918-1941
예전에 페리스코프의 게시판에 올렸던 글 입니다. 이 글의 저자인 코럼은 제가 개인적으로 꽤 좋아하는 군사사이기도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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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The Journal of Military History 59호에 실린 James S. Corum의 The Luftwaffe’s Army Support Doctrine, 1918~1941을 우리말로 옮긴 것 입니다. James S. Corum은 독일의 재 무장과 독일 공군의 창설 과정에 대한 두 권의 매우 훌륭한 저서를 낸 사람입니다. 아마 여기 오시는 분들께서도 James S. Corum의 저서를 접해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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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The Journal of Military History 59호에 실린 James S. Corum의 The Luftwaffe’s Army Support Doctrine, 1918~1941을 우리말로 옮긴 것 입니다. James S. Corum은 독일의 재 무장과 독일 공군의 창설 과정에 대한 두 권의 매우 훌륭한 저서를 낸 사람입니다. 아마 여기 오시는 분들께서도 James S. Corum의 저서를 접해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독일 공군의 육군 지원 교리, 1918~1941
독일공군은 2차 대전이 발발했을 당시 고도로 효과적인 근접 항공 지원 전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곧 전 세계는 독일 공군이 지상 작전을 지원하는 능력에 큰 충격을 받았다. 폴란드와 프랑스, 러시아 전역에서 독일 공군은 급속도로 발전한 지상군 지원 교리와 전술을 선보였다. 1941년 소련 침공은 독일의 근접 항공 지원 능력이 최고조에 달한 시기였으며 또한 지속적인 소모전으로 이 능력을 상실해 가는 과정의 시작이었다.
독일공군의 근접 항공 지원 능력은 전쟁 초기에 영국, 프랑스, 미국 공군과 육군 항공대를 압도하고 있었다. 독일 공군의 성공은 물량이나 기술력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우수한 교리와 훈련에 의한 것 이었다. 이 논문에서는 간략하게 어떤 방식으로 독일 공군이 지상 지원 교리를 발전 시켜 왔으며 근접 항공 지원의 어떠한 면이 이것을 지상전에서 결정적인 요소로 만들었는가를 살펴 보고자 한다.
오늘날 급강하 폭격기를 조종했던 독일 공군 조종사들의 회고록이나 독일 공군의 항공기와 장비를 다룬 책은 매우 많지만 상대적으로 독일 공군의 교리와 이것이 어떻게 발전해 갔는가에 초점을 맞춘 연구는 드물었다. 독일어로 된 저작 중에서 교리 문제를 다룬 훌륭한 서적이 소수 존재하는 실정이다. 독일 공군의 교리와 편제 발전에 대한 좋은 글로는 Das Deutsche Reich und der Zweiten Weltkrieg 제 2 권에 실린 클라우스 마이어(Klaus Meier)의 글이 있으나 유감스럽게도 지상군 지원 작전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다. 호르스트 보크(Horst Boog)가 담당한 같은 책 제 4권에 실린 독소전 초기의 항공 작전에서는 지상 작전에 대해서 잘 서술하고 있다. 영어로 된 자료로는 The Conduct of the Air War에 실린 미첼 포겟(Michel Forget)의 “Co-operation between Air Force and Army in the French and German Air Forces during the Second World War”이 1940년 전역 당시 독일 공군의 전력과 구성에 대해서 잘 다루고 있다. 리처드 멀러(Richard Muller)의 “The German Air War in Russia”는 독일 공군의 항공 작전에 대해 훌륭한 분석을 하고 있으나 근접 항공지원 보다는 일반 폭격기 부대를 주로 다루고 있다. 윌리엄슨 머레이(Williamson Murray)는 Case Studies in the Development of Close Air Support에 실린 “The Luftwaffe Experience 1939~1941”에서 전쟁 초기 독일 공군의 근접 항공 지원 교리에 대해서 다루고 있으나 그 분량은 적으며 또 어떤 방식으로 교리를 발전시켜 나갔는가에 대해서는 다루고 있지 않다. 사실 머레이는 독일 공군의 근접 항공 지원 교리가 대부분 1930년대 말에 발전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1930년대 초기에는 특별한 사항이 없었다고 보고있다.
본 필자는 머레이의 가설과는 반대로 독일 공군의 지상군 지원 교리는 1차 대전 말기부터 독소전 발발시 까지 지속적으로 발전해 왔다고 보고 있다. 비록 독일공군의 교리에서 근접 항공 지원은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니었으나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으며 근접 항공 지원의 필요성은 독일 공군의 장비와 조직, 항공기등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 논문에서 본 필자는 지상군 지원(Army Support), 근접 항공 지원(CAS, Close Air Support), 근접 저지(Close Interdiction)등의 용어를 모두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독일 공군의 개념 정의는 비교적 모호한 편 이었으며 이러한 융통적인 면은 근접 항공 지원을 전력 폭격 만큼이나 결정적인 수단으로 만들었다.
초기 독일의 근접 항공 지원 교리
1차 대전 기간 동안 독일 육군 항공대(Luftstreitkäfte)는 매우 수준 높은 근접 항공 지원 교리와 전술을 발전 시켰다. 플랑드르의 제 4 야전군 항공대 지휘관 이었던 헬무트 뷜버그(Helmut Wilberg)대위는 중무장한 하노버와 할버슈타트 2인승 전투-정찰기를 이용하여 세계 최초의 전문적인 지상 공격기 부대를 편성했다. 지상공격기 부대는 흔히 보병(지원) 항공대(Infanterie-Flieger)로 불렸는데 이들은 조종사, 연료탱크, 엔진을 보호하기 위해서 방어력을 강화한 항공기를 이용했다. 1918년에 이르자 독일 육군 항공대는 융커스 J-1 이나 C1.I 같은 완전 금속제 항공기를 개발하여 전선에 투입했다. 두 기종 모두 5정의 기관총과 크롬-니켈 합금제인 5mm 두께의 방어 장갑을 가지고 있었으며 J-1의 경우는 폭탄 탑재량이 150kg에 달했다. 1917년 말에 이르러서는 독일 육군 항공대의 항공기중 10.5%가 지상지원 전용 항공기로서 그 당시로서는 가공할 전력이었다.
1917년 말 독일 육군 항공대는 매우 효과적인 근접 항공 지원 교리를 만들었으며 이 새로운 항공 전력의 운용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지상 공격기 부대는 중요한 지점을 선정하여 최대한 집중 운용하는 것을 강조 받았다. 1917년 11월의 깡브레 반격 작전을 예로 들면 이전투에서 지상 공격기 부대는 반격에 투입된 돌격대를 지원하여 영국군의 방어진지를 폭격하고 기총소사했다. 1918년에 독일군 최고 사령부는 이른바 공격기(Schlachtflugzeug)가 돌파 작전에서 매우 유용한 화력 지원과 충격 수단이라는 점을 인식했다. 지상 공격기 부대의 최우선 목표는 적의 요새화된 방어진지와 포병대, 지휘소, 예비대였다. 1918년 2월 육군항공대 사령관 폰 회프너(von Hoeppner)장군은 지상 공격기 부대는 미리 준비된 계획에 따라 운용하지 말고 최 전방의 지상군 지휘관들의 요청에 따라 융통성있게 운용하도록 지침을 하달했다. 1918년 1월의 공군 교범은 지상군 작전을 지원하고 지상군의 공격 훈련시 합동 훈련을 할 계획을 세우도록 했다.
1918년 봄의 대공세에서 지상 공격기 부대는 육군 부대에 매우 중요한 존재임을 입증했다. 공세 초기 단계에서 주공을 맡은 3개 야전군은 총 27개 항공 중대로 편성된 지상공격기 부대의 지원을 받았다. 지상공격기 부대의 임무는 적의 방어 거점과 포병, 예비대를 타격하는 것 이었다. 그리고 상댕수의 항공 중대가 예비대로 대기하면서 육군의 지원요청이 떨어지고 30분 이내로 출동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근접 항공 지원 교리의 발달
전쟁 직후인 1919~20년 사이에 독일 육군 항공대는 130명의 노련한 항공 지휘관과 참모진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들은 항공 교리를 수립할 자료 분석과 평가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이 계획은 헬무트 뷜버그가 주도했다. 헬무트 뷜버그는 1920년부터 1927년 까지 독일군 내에서 항공부대에 관한 고위 간부였으며 또한 그 자신이 1차 대전 당시 명성을 떨친 유능한 지상공격기 부대 지휘관 이었다. 전술 및 기술 위원회에 속했던 간부들 중에는 뒤에 독일 공군의 고위 지휘관이 된 장교들이 속해 있었는데 밀히(Erhard Milch), 슈투덴트(Kurt Student), 예쇼넥(Hans Jeschonneck), 슈페를레(Hugo Sperrle), 우데트(Ernst Udet)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전쟁 직후 중점이 주어진 것은 항공력을 지상작전 지원에 사용하는 문제였다. 네 명 에서 여섯 명으로 구성된 많은 소 위원회가 정찰 항공, 근접 항공 지원, 전방 지역에 대한 차단 작전 등의 임무를 연구했다. 독일 공군의 전술 공군으로서의 성격은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났으며 이러한 경향은 1차 대전 당시 전술 항공 부대의 성과에 대한 분석과 당시 독일군 내의 항공 병과 간부인 뷜버그, 펠미, 슈투덴트, 밀히 등이 전투기 조종사나 정찰기 조종사로서 전쟁 기간 동안 지휘관 혹은 조종사로 참전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의 독일군이나 1930년대의 독일 공군 간부 중에서 폭격기 부대 출신은 소수에 불과했다.
독일군 내의 항공 교리는 육군 항공 참모부에 의해서 발전 되었으며 곧 간부 및 참모 본부 간부 훈련에 항공 교리 학습이 추가 되었으며 육군의 기본 작전 교리에도 포함 되었다. 육군 규정 487호 제병 합동 지휘와 전투(Führung und Gefecht der Verbundenen Waffen)에서는 항공력의 사용을 크게 강조했다. 여기서는 1차 대전 당시의 근접 항공 지원 경험을 공격 비행단(Schlachtgeschwader)이라는 장에 설명해 놓았다. 지휘관들은 항공력을 분산 운용하지 말고 집중 운용할 것을 강조 받았다. 여기에서는 지상 공격 항공 부대는 “적은 물론 아군에게도 심적 물리적 영향을 크게 미친다”고 설명했다.
독일군의 근본적인 항공 교리는 1920년부터 26년 까지 육군 사령관을 맡았던 젝트(Hans von Seeckt)상급 대장에 의해 기초가 닦였다. 젝트는 양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의 항공 교리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폰 젝트는 항공 부대를 독립된 병종으로 인식했다. 그러나 그는 항공력이 전장의 상황을 근본적으로 변화 시키지는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적을 패배시키는 것은 적의 주력을 격멸하는 것에 의해 이루어 진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항공대의 주요 임무는 두 가지의 공세 작전이었다. 첫째는 적의 항공력을 격멸하여 제공권을 장악하는 것 이었으며 두 번째는 적 지상군에 대한 차단 임무로서 적의 철도 교통망, 창고, 군기지를 타격하는 것 이었다. 근접 항공 지원과 전장에 대한 차단 임무는 부차적 임무로 취급 되었으며 이것은 제공권을 획득한 이후에야 가능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1920년대의 전술 교범은 젝트의 전쟁 사상을 반영하고 있었으며 항공력은 지상군 지원에 있어서 차단과 지상군 타격을 주 임무로 삼고 있었다. 폰 젝트는 항공력의 임무를 지상군과의 합동 작전의 차원에서 파악했다. 항공전의 승리는 신속히 기동하는 지상군이 적 지상군을 격파하는데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이었다. 근접 항공 지원의 중점은 적 방어선의 돌파 지원에 맞춰졌다. 그러나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근접항공지원은 순전히 이론적인 연구에 머물렀다. 1925년부터 1933년까지 독일군은 러시아의 레뻬츠끄에 시험 및 전투 조종사 훈련소를 가지고 있었다. 리뻬츠끄에서 폭탄과 기관총을 사용한 지상공격 훈련은 전투기 조종사의 필수 교육 과정에 포함되었다.
전술과 기술의 발전 : 1934~1939
독일 공군은 대규모 징병과 재무장, 육군으로 부터의 간부 전입 등에 힘입어 1934년에 실질적으로 창설되었다. 지상군에 대한 항공지원의 기초적인 바탕은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 독일 공군의 기본적인 작전 교리는 헬무트 뷜버그가 이끄는 위원회에 의해 1934년에 작성되고 1935년에 배포된 공군 규정 제 16호, 항공전 지휘(Luftkriegführung)에 잘 나타나 있다. 규정 제 16호 에서는 항공전력을 기본적으로 제병 합동 작전의 틀 안에서 파악하고 있었다. 적의 인구 및 산업 밀집지구에 대한 전략 폭격은 중요한 임무였지만 공군의 최 우선 임무는 아니었다. 공군의 전시 주요 임무는 적 군사력의 격멸이었다. 규정 제 16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전쟁에서 군의 임무는 적의 저항 의지를 분쇄하는 것 이다. 국가의 의지는 그 군대의 의지와 연관 되어 있다. 그러므로 적의 군사력을 분쇄하는 것은 전쟁 수행의 근본적 목적이다.”
공군 규정 16호 에서는 지상군 지원 임무를 중요한 임무의 하나라고 정의했다.
“지상군과 해군에 대한 직접 지원은 전체적인 전쟁 전략의 틀 내에서 중요한 작전인가의 여부에 따라 수행 되어야 한다.”
독일 공군 사령부는 독일 육군과 합동으로 공군은 “결정적 지상 작전에 강력한 전력을 투입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해야 했다. 독일 국방군 최고 사령부는 육군의 요청과 공군의 다른 작전, 지상 작전에 투입될 전력의 비율에 대해서 연구했다. 1930년대에 공군내의 주요 논점은 공군이 근접 항공 지원 임무를 수행하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근접 항공 작전에 필요한 전술과 기술을 개발하는 것 과 지휘 통제에 대한 것 이었다. 근접 항공 지원에 있어서 지휘와 통제는 매우 어려운 문제였다.
1차 대전 당시 지상군을 지원한 항공대는 각 야전군에 소속되어 있었다. 또한 항공부대 지휘관은 야전군 사령관의 직할로 있었다. 그러나 독일 공군은 독립된 병종이었으며 지상군의 지휘하에 움직일 수 있는 항공 부대를 지휘할 지휘 통제 체계를 갖추고 있지 못 했다.그 대신 공군은 장군 한 명을 육군 총 사령부에 배속 시켜서 연락 장교의 역할을 하게 하고 육군에 소속된 정찰 부대를 지휘하도록 했다. 공군에서 육군에 배속시킨 장교들은 공군 지휘관(Kommandeure der Luftwaffe, 약자로 Kolufts)으로 불렸다. 이들은 각 야전군과 군단에 배속된 정찰 항공대를 통제하고 육군에 배속된 항공 부대의 군수 지원 문제를 담당했다. 각 군단과 야전군에 배속된 상급 공군 장교는 해당 부대 지휘관에게 항공 작전에 관련된 참모 역할을 수행하는 임무도 가지고 있었다. 또한 Kolufts는 자신의 지휘선을 통해 지상군에 대한 지원임무를 요청하는 임무도 가지고 있었으며 이 요청에 따라 육군 지휘관은 공군에 지원 요청을 했다. 그러나 Kolufts는 독자적으로 공군 지휘부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근접 항공 지원 임무 수행에는 효과적이지 못 했다.
이 때문에 독일 공군 본부는 육군의 상급 제대와 공군 부대간의 직접 연락 체계를 구축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공군의 관점에서 볼 때 Kolufts는 육군 지휘관에게 직접 배속 되어 있어서 이런 임무를 수행하는 데는 부적합 하다는 판단이 내려졌다. 공군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Kolufts에 더해서 독자적으로 각 지상군 부대 지원에 배속된 항공대 소속 장교에서 차출되고 공군과 연락 체계를 갖춘 연락 장교(Fliegerverbindungs Offiziere)를 배치했다. 1936년에 독일 공군 참모총장 베버(Walther Wever)대장은 연락 장교가 원거리에서도 배속된 군단과 지원 공군 부대를 연결 할 수 있는 통신팀을 배속 받도록 했다. 베버 대장은 공군 연락장교의 훈련에 매우 높은 우선 순위를 두고 실행했다.
1930년대 중반의 공군 연락 장교 체계는 근접 항공 지원에 있어서 중요한 단계였다. 연락 장교 양성에 있어서 공군은 물론 육군의 작전 체계를 이해시키는 것은 가장 중요한 교육 이었다. 공군 참모 대학은 1930년대 중반에 육군 교리와 육군 지원을 강조하는 교육 과정을 개설했다. 1937년에 공군 참모 대학 학생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공군 지휘관, 공군 연락장교, 전선 후방 차단 임무, 방어와 공격시 지상군에 대한 근접 항공 지원 등 이었다. 1935년의 훈련 보고에서 베버 대장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육군의 훈련 방식을 가능한 한 비슷하게 도입해서 공군 장교들이 육군과의 합동 작전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중략) 공군은 훈련 시작부터 대규모 독립 작전이 육군의 작전을 지원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또한 경우에 따라서 육군에 대한 직접 지원을 수행 하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중략) 육군과의 직접적인 협력은 불필요한 행정 수요를 감소 시킬 것 이며 훈련에 참가하는 부대들에도 매우 유용할 것이다.”
육군과 공군과의 협력은 독일 공군내에 지상군 지원에 대한 강한 의지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공군의 장교 훈련 규정은 공군 장교가 타 병종의 훈련과 워 게임에 참가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공군 장교는 육군과 해군의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서 이들의 작전 수행 방식을 익힐 것이 강조 되었다. 육군과 공군의 합동 작전은 전쟁 발발 이전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였다. 육군과 공군은 근접 항공 지원의 기초를 익히는데 중점을 두었다. 1937년 가을의 기동훈련에는 차단 작전과 근접 항공 지원이 연습 되었다. 새로이 창설된 기갑 부대는 육군의 다른 병과 보다 공군과의 합동 작전을 더 강조했다. 1936년에 기갑 부대 사령관(Kommandeur der Panzertruppen)이었던 루츠(Oswald Lutz)대장은 기갑 사단 지휘관 들에게 공군과의 합동 작전, 특히 무전기 사용과 정찰 훈련을 강조했다. 루츠는 정찰기 조종사들이 효과적인 전술적 보고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보았다. 루츠는 성능이 충분한 항공기만 갖춰 진다면 정찰 임무를 훈련 받은 조종사가 훌륭한 지상 공격기 조종사도 될 수 있을 것 이라고 생각했다. 루츠는 또한 항공관구(Luftgau)사령부에 육군 참모를 둘 것을 요구 하기도 했다.
장비의 도입
공군은 항공 지원 교리와 전술, 훈련 등을 발전 시키는 동안 교리에 적합한 항공기를 개발하고 있었다. 흔히 독일 공군에 대해서 범하고 있는 오류 중에는 슈투카가 에른스트 우데트의 개인적인 선호에 의해서 채택되었다고 믿는 것이 있다. 이 주장에 따르면 우데트는 1936년에 독일 공군 기술감이 되었는데 그는 이전에 두 대의 미제 커티스 호크 급강하 폭격기(XF-11 C-2)를 조종해 본 적이 있었다. 그는 커티스 호크에 매우 매료되어 급강하 폭격기의 도입을 강력히 주장했다는 것이다. 우데트는 이 때문에 그의 전임자인 리히토펜(Wolfram von Richthofen)이 급강하 폭격기의 도입을 중단 시킨 것에 대해 의견 충돌을 보였다는 것이 이 주장의 골자이다.
실제로 리히토펜과 우데트는 급강하 폭격기에 대해서 의견 대립을 보였으나 육군과 공군 참모본부는 그 이전부터 급강하 폭격기가 목표물에 대한 정밀 타격에 크게 효과적이라는 점 때문에 이의 도입에 적극적이었다. 1928년 초에 융커스 J u-47 단엽 전투기는 지상 공격기와 급강하 폭격에 효과적인 것으로 평가 받았다. 1930년에 항공 참모부는 경 급강하 폭격기와 중 급강하 폭격기의 성능에 대한 기본 안을 내놓았다. 경 급강하 폭격기는 중 전투기의 역할도 겸하며 200kg의 폭탄 탑재량을 가질 수 있어야 했다. 중 급강하 폭격기는 완전히 급강하 폭격전용 으로서 500kg의 폭탄 탑재량을 가질 수 있어야 했다. 두 종류의 급강하 폭격기 모두 전방 기지의 임시 활주로 에서도 운용 가능해야 했다. 1932년에 육군의 급강하 폭격기 개발 계획은 He-50 복엽기의 시제품을 생산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He-50은 500kg의 폭탄 탑재량을 가지고 있었으며 1933년부터 양산이 시작되었다. He-50은 본격적인 급강하 폭격기가 등장하기 전 까지 임시로 사용될 예정이었으며 동시에 급강하 폭격기 조종사 양성에도 사용되었다. 1934년에 국방군 재무장 위원회는 중 급강하 폭격기 개발에 최 우선 순위를 두었으며 경 급강하 폭격기 개발은 우선 순위에서 밀려났다. 그 결과 중 급강하 폭격기로 채택된 것이 Ju-87 이었으며 경 급강하 폭격기로 채택된 것은 Hs-123 이었다.
밀히가 작정한 독일 공군의 제 1차 항공기 생산 계획에서는 항공기 3,820대 중 473대를 급강하 폭격기로 생산하기로 되어 있었다. 1934년에 항공 참모부는 1938년 까지 각 90대의 슈튜카로 편성된 3개 급강하 폭격 비행단을 창설할 계획을 세웠다. 급강하 폭격 비행단은 예비대로서 공군 사령관의 직할로 중점 지구에 집중 투입될 것 이었다. 벡(Ludwig Beck)대장이 편집한 육군복무규정 300(Heeresdienstvorschrift 300), 부대 지휘에서는 급강하 폭격기에 대한 장이 따로 있었으며 급강하 폭격기는 “특정 목표 타격이 가능한 무기”로 설명 되었다.
1936년 이전에 육군과 항공 참모부는 급강하 폭격기를 파괴력이 강력한 폭탄을 목표에 정확히 투하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으로 생각했다. 독일이 근접 항공 지원과 차단 임무에서 슈투카에 지나치게 의존했다는 점은 오늘날 많은 이들에게 비판을 받고 있는데 그 주된 근거는 슈투카가 대공포와 적 전투기에 매우 취약하다는 것 이었다.
그러나 급강하 폭격기의 개념은 그 시대의 요구에 따른 것 이었다. 독일 공군의 제 2 세대 급강하 폭격기인 Ju-87과 Hs-123은 매우 튼튼하고 일정한 타격도 견딜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슈투카의 설계상 장점으로는 전방 전진 기지의 비포장 비행장에서도 운용이 가능했다는 점이고 활주 거리가 불과 400m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1934년에 재무장 위원회는 급강하 폭격기 개발에 최 우선 순위를 주었고 급강하 폭격기를 다양한 임무에 투입할 수 있는 긴 항속거리를 가진 기체로 파악했다. 계획상으로는 급강하 폭격기를 전략 폭격에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Ju-87의 초기 양산형은 매우 짧은 항속 거리를 가지고 있었다. Ju-87 B 형의 행동 반경은 최대 폭탄 탑재량일 경우 111~124 마일에 불과했다. 항속거리 문제와 전방 기지에서도 작전 가능한 능력은 슈투카를 근접 항공 지원 병기로 쓰게 만들었다. 2차 대전 이전 독일 육군의 전투 교리는 적의 요새화된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었다. 이것은 1차 대전의 경험을 반영한 것 이었으며 주적으로 설정된 프랑스는 국경지대에 강력한 요새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육군의 기본 교범이던 육군 규범 487은 항공 전력의 주 임무가 지상군 지원을 위해 적의 요새 방어선을 파괴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대형 폭탄을 이용한 요새선 격파는 Ju-87이 스페인 내전과 폴란드, 프랑스, 러시아 전역에서 잘 수행한 임무였다.
그러나 Ju-87은 불과 2정의 7,92mm 기관총 만을 장비하고 있어서 지상 공격기로서 이동 목표를 타격하는데는 큰 효과가 없었으며 실질적 타격 보다는 심리적 위력이 더 컸다. 독일 공군은 상대적으로 느린 급강하 폭격기의 속도와 약한 방어력에 우려를 하고 있었다. 1937년에 독일 공군은 지상 공격 전용의 항공기의 요구 성능을 발표하고 입찰을 시작했다. 이에 필요한 항공기는 20mm 기관포를 장비하고 충분한 고속에 방어력을 갖추고 있어야 했다. 이 결과 Hs-129가 등장했다. 그러나 이 기종은 약한 엔진 출력과 기술적 복잡함, 그리고 좋지 못한 조종성 때문에 독일 공군의 실패작 중 하나가 되었다. 반면 소련은 충분히 무장을 갖추고 방어력도 강력하고 기술적으로도 단순하고 양산에 적합한 IL-2를 채택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Hs-129는 독일 공군의 교리의 실패로 인한 것은 아니었으며 설계와 생산에 큰 문제가 있었다. 독일 공군은 1937년에 지상 공격기를 발주하면서 육군과의 합동 작전을 발전 시켜 나갔다.
스페인 내전 1936~1939
스페인 내전에서 독일 공군이 얻은 작전 경험은 그 동안 잘못 이해 되어 왔다. 일부 역사가들은 독일 공군이 스페인 내전에 참전 해서 근접 항공 지원의 중요성을 제대로 파악했으며 “콘도르 군단이 독일의 근접 항공 지원 교리의 시초”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근접 항공 지원은 리히토펜 같은 선구자들이 열성적으로 발전 시켰으며 공군 사령부는 이에 무관심 했다는 주장까지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앞에서 살펴 봤듯이 독일의 육군 지원 교리는 1차 대전을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발전해 갔으며 공군 파견 장교 체제는 1935~36년을 거치면서 확고히 자리 잡았다. 스페인 내전에서 He-51 복엽 전투기를 근접 항공 지원에 사용한 것은 새로 생긴 독자적인 교리가 아니었으며 근접 항공 지원은 1920년대 이래 전투기 조종사들에게는 제 2차 적인 임무였다. 독일 공군이 스페인에서 달성한 것은 기존에 발전시켜온 교리를 성공적으로 실전에 적용했다는 것이다. 독일 공군의 교리는 근접 항공 지원은 제공권을 달성한 뒤에 행해져야 하는 것 이었다. 근접 항공 지원은 대량으로 운용될 때 적의 사기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다는 것이 내전 기간 동안 여러 차례의 작전을 통해 입증 되었다. 독일의 근접 항공 지원은 1937년과 38년의 작전에서 돌파 작전에 매우 유용하다는 것이 입증 되었다.
리히토펜은 스페인내전에 처음에는 콘돌 군단의 참모장으로 나중에는 그 부대의 지휘관으로 참전했다. 그는 근접 항공지원에 열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스페인에서의 경험으로 그는 독일 공군에서 근접 항공 지원에 관한 최고의 전문가가 되었다. 내전 기간 동안 리히토펜이 예상했던 근접 항공 지원에서의 항공기 손실은 실제로는 매우 적게 나타났다. 1938년 5월부터 공화국 군이 20mm와 45mm 대공포를 투입한 이후에도 지상 공격기의 손실은 상대적으로 낮았으며 충분히 보충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리히토펜의 감독하에 독일 공군은 최신예 항공기들의 실전 시험을 했다. 이 중에는 8대의 Ju-87 과 6대의 Hs-123이 포함 되었다. 리히토펜은 내전 후반기에 콘도르 군단에 제공권을 장악하자 새로운 근접 항공 지원 전술을 시험해 볼 기회도 가지게 되었다. 기갑 부대와 차량화 부대에 대한 근접 항공지원 기술은 스페인 내전의 경험으로 얻은 것이 많았다. 1938년 3월 콘도르 군단은 에브로 강 전선에 서 프랑코 군의 기갑 부대를 지원하는 작전에 투입 되었다. 공세 첫 단계에서 콘도르 군단은 공화국군의 비행장을 공격하여 제공권을 장악한 뒤 전선 후방의 도로와 철도를 타격함 으로서 적 예비대의 증원을 차단했다. 그리고 콘도르 군단은 근접 항공 지원에 집중하여 공화국군의 거점과 야전 축성을 무력화 시켰다. 항공기와 전차는 돌파에 매우 유용한 전력 이었으며 1938년 3월 12일에 콘도르 군단은 프랑코 군이 36km의 전진을 이루는데 큰 기여를 했다.
그외에도 독일 공군은 다른 여러 교리를 시험했으며 대부분 성공적 이었다. 콘도르 군단은 집중 공격뿐 아니라 제파 공격도 함께 행했다. 중점 지역에는 6대로 구성된 1개 편대가 목표물에 폭탄을 투하하고 바로 뒤에 다른 편대가 공격을 반복했다. 적을 계속적인 항공 공격으로 타격함 으로서 적의 사기에 대한 영향은 더 증대 되었다. 이러한 계속적인 공격은 폴란드와 프랑스 전역에서 독일 공군의 “전매 특허” 처럼 되었다.
한편 공군과 육군과의 통신 문제는 내전 기간 중 큰 문제로 남았다. 당시까지 지상과 항공기간의 교신을 확실하게 해줄 무전기가 없는 상태였다. 이 때문에 지상 공격 임무는 사전에 세밀하게 준비 되었으며 아군에 대한 오폭을 방지하기 위해서 지상으로 부터의 표지판, 연막, 신호탄, 불빛 등에 의해 조정되었다. 콘도르 군단의 첫 지휘관 이었던 슈페를레와 그의 후임자 였던 리히토펜은 중요한 지상 공격 임무는 전방 작전 지휘소 에서 직접 지휘했으며 비행장과의 직접 연락 체계를 갖추었다. 중요한 지상 지원 임무에서 직접 작전을 지휘하는 것은 독일 공군 고위 장교들의 관행이 되었다.
스페인 내전에서 얻은 경험들은 베를린에서 집중적으로 분석 되었다. 예쇼넥 대령은 1939년 6월에 “근접 지원 임무는 공군의 임무 중 가장 어려운 임무”라고 지적하고 이런 임무는 “공군과 공군이 지원하는 육군 부대 간에 밀접한 연락이 뒷 받침 되어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스페인 내전의 경험은 폴란드 침공을 계획하는데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독일 공군은 1939년 여름에 슈투카 전력의 절반을 리히토펜이 지휘하는 특수 항공단에 집중 시켰다. 스페인 내전은 독일에게 대규모의 전문화된 근접 지원 전력을 만들도록 했을뿐 아니라 근접 지원을 체득한 우수한 조종사와 근접 항공 지원 작전을 수립하고 지휘할 수 있는 지휘관을 얻게 해 주었다. 스페인 내전 말기에 많은 독일 공군의 고위 장교 – 슈페를레, 드룸, 폴크만, 플로쳐, 자이데만, 폰 리히토펜 등 – 들이 지상군 지원등의 실전 지휘 경험을 쌓았으며 기갑 부대 작전에 대한 항공 지원 등의 현대적 전술을 체득하게 되었다.
폴란드 전역
폴란드 전역에서 독일 공군의 급강하 폭격기와 지상공격기 부대는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으며 승리에 큰 기여를 했다. 폴란드 침공 당시 독일 공군은 366대의 Ju-87과 40대의 Hs-123이 가동 가능했으며 대부분이 투입되었다. 지상 공격을 위해서 Hs-123과 Ju-87은 각 야전군을 지원하는 항공사단들에 분산 배치되었다. 1개 항공대(Gruppe)의 Ju-87 30대가 동프로이센에 배치되어 있던 항공 사단에 배속 되었으며 3개 항공대와 1개 항공 중대(Staffel)의 Ju-87 112대가 제 1 항공사단(1. Flieger-Division)에 배속 되었다. 나머지 지상 공격기와 슈투카는 폰 리히토펜의 특수 항공단에 집중 되었다. 리히토펜의 지휘하에 4개 슈투카 항공대(160대)와 1개 Hs-123 항공대(40대)가 배속되어 있었으며 1개 정찰 항공 중대와 2개 전투기 항공대가 호위를 위해 배속되어 있었다. 폰 리히토펜의 임무는 주공을 맡은 제 10 군을 지원하는 것 이었다. 독일 공군의 근접 항공 지원은 폴란드군의 부대 집결지를 타격하는데 가공할 위력을 발휘했다. 슈투카의 500kg 폭탄은 대형 공성포의 역할을 대체했으며 모들린의 요새를 포함한 폴란드군의 요새들을 무력화 시켰다. 슈투카 부대는 교리에 따라 대량으로 집중 운용 되었다. 보통 1개 항공대가 기본 단위로 투입 되었다. 9월 26일과 27일에 폰 리히토펜은 모들린 공격에 약 1천 소티의 출격을 해서 지원했다. 모들린은 항공 공격만으로 항복했다.
스페인에서 입증된 교리와 전술은 폴란드에서 그 위력을 입증했다. 근접 항공 비행대는 기동성을 최대한 활용해서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신속히 이동했다. 이것은 1939년 에는 다른 어떤 나라의 공군도 할 수 없었던 지휘력 이었다. 리히토펜의 특수항공단은 제 4 항공함대로 이동했으며 별다른 문제 없이 작전했다. 슈투카와 지상공격기들은 폴란드 전역의 지상 작전에서 중요한 요소였다. 작전 초기에 슈투카 부대는 폴란드 공군의 무력화에 집중했다. 9월 7일부터 12일 사이에 폰 리히토펜의 부대는 라돔-데블린 지구의 폴란드군을 섬멸하는데 투입되었다. 13일부터 17일 까지 리히토펜은 Byzura 강의 폴란드군 방어선을 공격하여 제 10군의 작전을 지원했다. 라이헤나우 상급 대장은 특수 항공단이 전장의 전황을 결정 지었다고 높이 평가했다. 스페인 내전에서 사용한 제파 공격은 폴란드 전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슈파이델은 “슈투카 공격은 적의 사기를 꺾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했다.
독일 공군이 폴란드에서 거둔 성공은 상당 부분 기동성 있는 지상 지원 부대와 보급 조직의 효율성에 기인했다. 근접 항공 지원 부대와 전투기 부대는 그 임무를 위해서 최대한 전방에 가까운 비행장에서 작전해야 했다. 특히 Hs-123의 경우 최대 무장 탑재시 행동 반경이 70 마일 이었으며 Ju-87의 경우는 110마일에 불과했다. 전방 지역의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서 독일 공군은 1939년에 117개 차량화 보급 수송대를 편성했다. 폴란드 전에서 제 2 항공 함대와 리히토펜의 부대에는 총 11개 비행장 지원 중대가 배속되었다. 이러한 지원 부대들은 수시간 안에 임시 활주로를 만들 능력이 있었다. 전방 기지로부터 작전하는 슈투카들은 하루에 보통 4~5회의 전투 출격을 했는데 이것은 독일군의 전력을 배가 시켰다.
폴란드는 기갑-항공 합동 작전을 최초로 대규모로 실시한 전역이 되었다. 공군 연락 장교는 각 기갑 사단과 차량화 사단 참모진과 함께 이동했으며 때때로 전방까지 가서 정확한 상황 정보를 전달했다. 그러나 기갑 사단과 차량화 사단의 급속한 진격은 종종 전방 지역에서 식별의 문제를 일으켰다. 이러한 문제는 부족한 통신 문제와 결합하여 종종 슈투카가 독일군을 공격하는 문제를 일으켰다.
폴란드전에서 얻은 경험은 신속히 공군 본부에 의해 부석 되었으며 프랑스 전역을 준비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특히 후방에 대한 종심 타격은 슈투카 부대가 대공포에 심한 피해를 입어서 중단 되었다. 폴란드전 직후 대부분의 슈투카 비행대와 Hs-123 비행대는 폰 리히토펜의 지휘하에 집중 되었으며 이 부대는 제 8 항공군단이 되었다.
1940년 프랑스 전역
폰 리히토펜은 프랑스 전역에서 근접 항공 지원을 맡으면서 근접 항공 지원의 지휘 통제 체계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각 기갑사단과 군단에 배속된 공군 연락 장교는 제 8 항공 군단 사령부로 직접 연락을 취했으며 더 이상 육군측에 항공 작전 참모 역할을 하거나 항공 지원 요청을 부탁하지 않았다. 제 8 항공 군단 사령부 에서는 항상 클라이스트의 기갑집단 사령부와 연락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기갑 사단 사령부의 상황 보고가 접수되면 바로 수분내에 일선 항공대에 공격 명령이 하달 되었다. 제 8 항공 군단은 항시 1개 슈투카 비행대와 1개 전투 비행대를 출격 시킬 수 있는 태세를 갖추고 있었으며 출격 명령이 하달된지 45분에서 75분 내에 목표 지점에 도달할 수 있었다. 또한 슈투카 부대는 네덜란드에 대한 세계 최초의 공수 작전을 지원하는데 투입 되었다. 폰 리히토펜의 부대는 네덜란드 공군 기지와 대공포 진지, 그리고 기타 목표를 파괴하여 제 7 항공사단 병력이 네덜란드의 주요 목표를 점령하는 것을 지원했다.
폰 리히토펜이 1940년 전역에서 일으킨 최고의 혁신은 항공 전력을 지상 작전에 있어서 결정적인 수단으로 만든 것 이었다. 대규모로 집중된 슈투카 공격은 1940년 5월 14일 스당(Sedan)의 프랑스군 방어를 붕괴 시키는데 큰 역할을 수행했다. 비록 슈투카는 방어선에 배치된 병력에는 타격을 별로 입히지 못 했으나 후방의 포병을 타격함 으로서 프랑스 포병이 도하하는 독일군을 공격할 수 없게 만들었다. 또한 프랑스 군의 사기에 미친 영향 역시 캐우 컸다. 이날 밤에 프랑스 제 55 사단은 무너졌으며 이들의 퇴각에는 특히 항공 공격이 큰 도움을 주었다.
1940년 프랑스 전역 초기에 제 8 항공 군단은 네덜란드와 벨기에 및 스당 방면 돌파등을 지원했다. 작전 초기에 리히토펜은 주공이 집중되는 지역에 제 8 항공 군단을 집중 투입해야 한다고 상급 부대에 건의했다. 5월 16일에 리히토펜은 괴링을 만나 바다로 진격하는 클라이스트 기갑 집단을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아 냈다.
독일군 최고 사령부는 너무나 신속한 진격에 당황했으며 5월 14일 이후 맹진격 하는 기갑사단과 보병사단간에 큰 간격이 생겼다. 5월 16일에 룬트슈테트는 클라이스트에게 진격 속도를 늦춰서 보병 사단이 따라 붙도록 명령했다. 리히토펜은 예하 부대에 보병사단이 따라 붙을 동안 완전히 무방비 상태인 기갑집단의 측면을 보호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며 이 때문에 기갑사단에 대한 지원은 2차적인 임무로 돌려졌다. 육군측은 리히토펜이 측면에 대한 방어를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48시간 뒤에는 프랑스군이 제 2의 마른의 기적을 일으키지 못 했다는 것이 명백해 졌다. 최고 사령부는 다시 진격을 명령했다.
그동안 리히토펜은 육군의 측면을 잘 방어해 냈다. 8 항공군단의 정찰기들은 반격을 위해 이동하는 프랑스군 사단을 발견했으며 끊임 없이 프랑스 지상군을 공격하고 도로망을 타격했으며 프랑스 기갑부대의 집결지를 공격했다. 프랑스 제 9 군은 항공공격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또한 제 8 항공군단은 5월 17일 드골의 제 4 기갑사단이 몽꼬르네(Montcornet)에 가한 반격을 격파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5월 20일에 제 8 항공군단의 주력은 뒤아-라-샤토(Douai-la-Cateau)에 집결한 연합군 기갑 부대를 공격했으며 롬멜의 제 7 기갑사단이 아라(Arras)에서 영국군 전차 부대의 반격을 받았을때도 지원했다.
그러나 Ju-87은 전차에 명중탄을 잘 맞추지 못 했으며 Hs-123은 중 기관포가 없어서 공군의 공격으로 직접 격파한 전차는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항공 공격은 전차 부대를 후속하는 지원-보급 부대로부터 분리 시키고 전차를 지원하는 보병과 포병에 큰 피해를 입혔다. 많은 자료에 기초해서 결론을 내리자면 제 8 항공군단의 지상군 측면 보호와 근접 항공 지원 임무는 매우 성공적 이었다. 실제로 프랑스 전역 전체를 놓고 볼 때 공군의 근접 항공 지원 부대는 독일의 대 승리를 가져온 가장 결정적인 요인 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1941년 러시아 전역
독일 공군은 프랑스에서 처럼 소련 침공에서도 주공이 집중되는 지역의 기갑사단에 항공 지원을 수행했다. 근접 항공 지원 부대는 러시아 전선에서 매우 파괴적인 효과를 발휘했다. 1941년 전역에서 독일공군은 지휘 통제에 있어 많은 변화를 겪었다. 특히 러시아의 광대한 전장으로 인해 근접 항공 지원 부대는 넓게 분산되어 운용되었으며 전장의 확대로 인해 각 기갑 군단과 항공 군단, 항공 함대간의 원활한 협력을 위해서 많은 근접 항공 지원 부대가 6월부터 10월 사이에 편성 되었다. 1942년 초에 그동안 유지되었던 Koluft는 완전히 폐지 되었으며 이것은 공군 장군에게 배속된 1개 항공 정찰 사령부로 변경 되었다. 가장 중요한 전술적 혁신은 리히토펜이 가져왔다. 그는 소련 침공 당시도 제 8 항공 군단장으로 있었으며 그는 경험많은 슈투카 조종사를 항공기와 교신할 수 있는 무전기를 장비한 3호 전차에 탑승시켜서 이동 지상 관제관으로 활용했다. 이 때부터 독일 공군의 근접 항공 지원 부대는 최 전선의 지상 부대와 직접적으로 합동 작전을 수행 할 수 있었다.
폴란드와 프랑스 전역의 교훈으로부터 근접 항공 지원과 차단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항공기 무장을 강화 시켜야 한다는 결론이 얻어졌다. 1940년 전역에서 슈투카의 위력은 물리적 이라기 보다는 정신적인 측면이 더 컸다. 슈투카가 장비한 무기 중 전차에 손상을 입힐 수 있는 것은 폭탄 뿐 이었다. 그리고 전차에 폭탄이 직접 명중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독소전 개전 당시 독일 공군은 여전히 Ju-87 B-2형을 주력으로 장비하고 있었으나 그 무렵부터 Ju-87 D 형이 양상 배치되고 있었으며 D 형은 늘어난 탑재량과 행동 반경을 가지고 있었다. 독소전을 치루면서 J u-87은 37mm Flak 18을 탑재하여 대전차 공격기로 활용 되었으며 근접 항공 지원을 수행하던 Hs-123은 1942년에 가서 대전차 공격 임무도 수행하기 위해 20mm 기관포로 무장을 교체했다.
1941년에 독일 공군은 SD-2 폭탄을 사용했는데 이 폭탄은 특히 보병 집단과 경장갑 목표에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SD-2는 원시적인 집속 폭탄으로 각 폭탄 본체는 각 3파운드 무개의 자탄 96개를 넣고 있었다. 폭탄 본체는 공격시 열리면서 자탄을 살포했다. SD-2 하나는 차량 대열 전차나 보병 집결지 전체를 초토화 시킬 수 있었다. SD-2는 매우 효과적 이어서 미국 공군도 이를 복제해서 수년간 사용했다. 또한 러시아 전역에서 일어난 또 다른 혁신은 우수한 다목적 폭격기인 Ju-88의 대량 사용이었다. 폴란드 전역과 프랑스 전역의 경험으로 개발된 신무기 중 특이한 것은 보조 로켓 추진에 장갑 목표를 관통할 수 있는 탄두를 가진 1,000kg 폭탄(PC 1000)이었다. 이 폭탄의 사용으로 대부분의 요새 시설은 항공 공격에 무력해 졌다.
그러나 이러한 혁신과 발전에도 불구하고 1941년의 러시아 전역을 정점으로 해서 독일 공군의 근접 항공 지원 세력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1940년 전역을 치룬 이후 독일 공군은 전해 보다 더 적은 숫자의 항공기를 가지고 소련 침공에 들어갔다. 독일 공군의 근접 항공 지원 세력은 꾸준히 장비와 전술을 개선 시켜 나갔지만 더 이상 확실하게 제공권이 장악되지 못 했다. 제공권이 없는 상황에서 근접 항공 지원 부대는 일부 경우를 제외하고 더 이상 적에게 결정적인 피해를 입히지 못 했다. 비록 독일 공군은 근접 항공 지원을 매우 중요시 했지만 러시아 전선의 인적, 물적 소모는 매우 심각했으며 결국은 독일 공군의 지상 공격 부대를 무력화 시켰다. 독일 공군의 우수한 교리와 전술은 물량의 열세를 만회할 수 없었다.
스페인과 폴란드, 프랑스에서 얻은 교훈은 근접 항공 지원은 최대한 집중해서 운용해야 효과가 있다는 점 이었다. 독일 공군이 1940~41년 사이에 조종사 양성과 항공기 증산에 실패했다는 점은 러시아의 광대한 전장과 함께 독일 공군이 더 이상 1940년 5월 스당에서 했던 것과 같이 대규모의 집중을 달성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결 론
독일이 항공력을 지상군 작전 지원에 간접, 직접적으로 사용한 사실은 군사 교리의 발전을 잘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1939년에 근접 항공 지원과 근접 차단 임무는 독일 공군의 임무 우선 순위에서 제공권 달성과 원거리 차단에 이어 세번째에 해당했다. 1940년 프랑스 전역에서 근접 지원은 좀더 우선 순위가 높아 졌으며 제 8 항공군단이 창설 되었다. 폰 리히토펜이 클라이스트 기갑 집단의 돌파와 측면 보호에 큰 역할을 수행하자 이제 작전 수행에 있어서 큰 변화가 일어났다. 1941년 전역에서 근접 항공 지원과 근접 차단 임무는 원거리 차단과 동등한 중요도를 가지게 되었다.
독일이 연합군에 비해서 훨씬 더 우수한 지상군 지원 세력과 교리를 가지게 된 것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가장 먼저 독일 공군과 육군은 교리면에서 특정 사상이나 개념에 구속 받지 않았다. 독일 공군의 교리를 보면 전략 항공 공격이나 항공력의 작전 단위 사용에 명확한 구분을 두고 있지 않았다. 그 때문에 독일 공군은 Ju-87을 전략적 임무에 투입하는 것이나 Bf-110이나 Ju-88 같은 중형 항공기를 근접 항공 지원 임무에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 별다른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이러한 접근법은 전략 임무와 전술 임무를 명확하게 구분한 영국공군이나 미국 육군 항공대와는 매우 다른 것 이었다.
독일 공군의 참모 조직은 다른 어느 나라의 공군 보다도 1차 대전과 스페인 내전의 경험을 철저히 분석했으며 훈련에 중점을 두었다. 각 전역이 끝날 때 마다 독일 공군은 그 교리를 각 전역의 교훈에 맞춰서 수정해 나갔다. 이것은 영국 공군과 미 육군 항공대가 1차 대전 당시 근접 항공 지원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근접 항공 지원에 대해서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프랑스나 영국, 미국은 독일 육군이나 공군과는 달리 경험 으로부터 별다른 교훈을 얻어 내지 못했다. 심지어 폴란드 전역의 교훈 조차도 이들 국가들에서는 무시 되었다. 그로부터 불과 8개월 뒤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별다른 근접 항공 지원 세력이 없는 상태에 처해 있었다.
독일 공군의 최대 강점 중 하나는 육군과의 합동 작전을 강조한 것 이었다. 1930년대부터 독일 공군과 육군은 제병 협동에 기초한 양 병종간의 합동 작전을 시작했으며 정기적으로 합동 기동 훈련과 연습이 행해졌다. 미 육군 항공대와 영국 공군은 2차 대전 이전에 육군과의 합동 작전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또한 독일 공군은 매우 효과적인 참모 조직을 발전 시켰으며 이를 통해 독일 공군은 각 전역 마다 대규모 항공 부대를 특정 구역에 집중 투입 할 수 있었다. 또한 참모 조직은 독일 공군의 이동시 보급과 지원 문제에도 큰 효율성을 발휘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근접 항공 지원 부대는 전선에 인접한 기지에서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효율적인 보급 조직은 부대의 전투력을 배가 시켰으며 공군 비행대가 하루에도 4회 혹은 그 이상의 전투 출격을 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마지막으로 우수한 지휘관들이 독일의 성공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뷜버그, 밀히, 슈페를레, 예소넥, 폰 리히토펜 같은 지휘관들은 근접 항공 지원 부대와 그 교리를 형성하는데 많은 아이디어를 내고 지도력을 발휘했다. 이것이야 말로 독일 공군이 육군 지원 교리를 발전시키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2006년 5월 8일 월요일
독일 육군의 장교집단과 사회계층 1900-1925 (재탕!)
19세기 유럽 사회의 가장 큰 사회적 변화를 몇 개 꼽는다면 시민 계층의 성장을 그 중 하나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하다 못해 가장 후진적이라는 러시아도 농노제를 폐지하는 개혁(?)을 단행했으니. 시민계층의 성장은 서유럽에서는 좀 보수적인 축에 끼는 독일에서도 활발했고 보수의 아성인 군대까지도 급속히 잠식해 들어갔다. 이미 독일 통일 전인 1860년의 통계를 보더라도 프로이센 군 장교단의 35%는 귀족이 아닌 시민 계층에 속하고 있었다.
시민 계급의 장교 진출은 1890년대부터 상비군이 증강되면서 더 활발해 졌다. 귀족층의 숫자는 제한 되어 있었고 귀족들만 가지고 장교단을 메우는 것은 불가능한 일 이었다. 특히 시민 계급은 포병, 공병 등 전문 병과에서는 이미 귀족 계층을 숫자상으로 압도하고 있었다. 비록 총 참모부 같은 핵심 보직의 경우 귀족 출신이 전체의 70%를 차지했지만 변화의 조짐은 눈에 띄게 나타나고 있었다. 병과의 핵심인 보병 병과에서도 고위 장교단을 제외하면 시민 계급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게 높았다. 특히 새로 임관되는 장교에서 귀족이 차지하는 비중은 갈수록 떨어졌다.
1909년 독일군 보병 병과 장교단에서 귀족이 차지하는 비중은 대략 아래와 같았다.(귀족 / 시민)
원수 1 / 0
상급대장 1 / 0
대장 30 / 2
중장 44 / 2
소장 75 / 31
대령 139 / 65
중령 109 / 105
소령 501 / 512
대위 945 / 1522
중위 631 / 1467
소위 1252 / 2929
다른 병과의 경우 귀족이 차지하는 비중은 더 적었다. 예를 들어 1909년에 임관한 소위들의 기록을 보면 공병의 경우 257명 중 귀족은 8명, 포병의 경우 343명 중 귀족은 17명에 불과했다.
귀족이 시민계급 보다 다수를 차지한 병과는 기병이 유일했는데 1913년의 통계를 보면 기병장교의 80%가 귀족인 것으로 나타나 있다. 반면 같은 년도의 통계를 보면 포병의 경우 귀족 출신 장교는 전체의 41%였고 보병병과의 경우 귀족 출신 장교가 차지하는 비율은 전체의 48%에 불과했다. 1913년에 장교단에서 귀족 출신이 차지하는 비중은 30%대로 떨어졌다고 한다.
이렇게 시민 계층이 급속히 장교단을 잠식해 들어 갈 수 있었던 데는 독일의 뛰어난 교육 수준이 한 몫을 했다. 이미 바이에른의 경우 장교 임관 자격 중 하나로 아비투어(Abitur) 통과를 넣고 있었을 정도니까. 1912년의 통계를 보면 프로이센, 작센, 뷔르템베르크의 장교단에서 아비투어 소지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무려 65.1%에 달했다고 한다. 시민 계층 출신의 장교들의 자질은 충분히 뛰어났기 때문에 귀족 출신들과 경쟁하는데 있어서도 큰 어려움이 없었다.
※ 소시민 계층 출신 장교단의 증가는 역시나 보수적인 러시아도 마찬가지여서 러시아는 1870년대부터 부르주아 계층을 장교단에 확충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나 독일에 비해 국민 교육 수준이 크게 낮아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러시아의 하급 장교단으로 편입된 평민 계층의 상당수는 초등 교육도 받지 못했지만 군대 규모가 크게 증가했기 때문에 별 수 없이 장교로 쓸 수 밖에 없었다.
1차 대전이 발발한 뒤 군대의 사회 계급 구성에서 귀족이 차지하는 비중은 더 떨어졌다. 국가 총동원으로 병력 규모가 급팽창 한데다가 극도의 소모전으로 장교의 손실이 커졌기 때문에 이제는 중산층은 물론 사회의 하위 계층까지 장교 집단으로 편입되었다. 1918년 7월의 기록을 보면 소위대행 부사관(Feldwebelleutnant)이 21,607명에 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전쟁을 거치면서 이제는 장성 집단에서도 시민 계급이 차지하는 비중이 더 커졌다.
1925년의 기록을 보면 장군의 45.3%가 시민 계급이었으며 전체 장교 집단에서 귀족 출신 장교의 비중은 20%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독일 군대의 정치적 성향은 여전히 보수적 이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군대의 장교 1,100의 사회 계층을 조사한 한 연구에 따르면 이들 중 30%는 군인 집안 출신이고 30%는 공무원 계층, 16%는 자영업자, 그리고 나머지는 지주, 또는 공장주 등 중산층 이상 계층이 대부분을 차지했다고 한다.
젝트가 가장 우려했던 것 중 하나가 시민 계급이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커져서 군대가 정치적으로 불온한 색채를 띄게 되는 것 이었다고 하는데 최소한 장교단의 출신 계층만 가지고 본다면 그런 걱정은 기우였고 실제로도 독일 장교단은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집단으로 남았다.
시민 계급의 장교 진출은 1890년대부터 상비군이 증강되면서 더 활발해 졌다. 귀족층의 숫자는 제한 되어 있었고 귀족들만 가지고 장교단을 메우는 것은 불가능한 일 이었다. 특히 시민 계급은 포병, 공병 등 전문 병과에서는 이미 귀족 계층을 숫자상으로 압도하고 있었다. 비록 총 참모부 같은 핵심 보직의 경우 귀족 출신이 전체의 70%를 차지했지만 변화의 조짐은 눈에 띄게 나타나고 있었다. 병과의 핵심인 보병 병과에서도 고위 장교단을 제외하면 시민 계급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게 높았다. 특히 새로 임관되는 장교에서 귀족이 차지하는 비중은 갈수록 떨어졌다.
1909년 독일군 보병 병과 장교단에서 귀족이 차지하는 비중은 대략 아래와 같았다.(귀족 / 시민)
원수 1 / 0
상급대장 1 / 0
대장 30 / 2
중장 44 / 2
소장 75 / 31
대령 139 / 65
중령 109 / 105
소령 501 / 512
대위 945 / 1522
중위 631 / 1467
소위 1252 / 2929
다른 병과의 경우 귀족이 차지하는 비중은 더 적었다. 예를 들어 1909년에 임관한 소위들의 기록을 보면 공병의 경우 257명 중 귀족은 8명, 포병의 경우 343명 중 귀족은 17명에 불과했다.
귀족이 시민계급 보다 다수를 차지한 병과는 기병이 유일했는데 1913년의 통계를 보면 기병장교의 80%가 귀족인 것으로 나타나 있다. 반면 같은 년도의 통계를 보면 포병의 경우 귀족 출신 장교는 전체의 41%였고 보병병과의 경우 귀족 출신 장교가 차지하는 비율은 전체의 48%에 불과했다. 1913년에 장교단에서 귀족 출신이 차지하는 비중은 30%대로 떨어졌다고 한다.
이렇게 시민 계층이 급속히 장교단을 잠식해 들어 갈 수 있었던 데는 독일의 뛰어난 교육 수준이 한 몫을 했다. 이미 바이에른의 경우 장교 임관 자격 중 하나로 아비투어(Abitur) 통과를 넣고 있었을 정도니까. 1912년의 통계를 보면 프로이센, 작센, 뷔르템베르크의 장교단에서 아비투어 소지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무려 65.1%에 달했다고 한다. 시민 계층 출신의 장교들의 자질은 충분히 뛰어났기 때문에 귀족 출신들과 경쟁하는데 있어서도 큰 어려움이 없었다.
※ 소시민 계층 출신 장교단의 증가는 역시나 보수적인 러시아도 마찬가지여서 러시아는 1870년대부터 부르주아 계층을 장교단에 확충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나 독일에 비해 국민 교육 수준이 크게 낮아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러시아의 하급 장교단으로 편입된 평민 계층의 상당수는 초등 교육도 받지 못했지만 군대 규모가 크게 증가했기 때문에 별 수 없이 장교로 쓸 수 밖에 없었다.
1차 대전이 발발한 뒤 군대의 사회 계급 구성에서 귀족이 차지하는 비중은 더 떨어졌다. 국가 총동원으로 병력 규모가 급팽창 한데다가 극도의 소모전으로 장교의 손실이 커졌기 때문에 이제는 중산층은 물론 사회의 하위 계층까지 장교 집단으로 편입되었다. 1918년 7월의 기록을 보면 소위대행 부사관(Feldwebelleutnant)이 21,607명에 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전쟁을 거치면서 이제는 장성 집단에서도 시민 계급이 차지하는 비중이 더 커졌다.
1925년의 기록을 보면 장군의 45.3%가 시민 계급이었으며 전체 장교 집단에서 귀족 출신 장교의 비중은 20%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독일 군대의 정치적 성향은 여전히 보수적 이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군대의 장교 1,100의 사회 계층을 조사한 한 연구에 따르면 이들 중 30%는 군인 집안 출신이고 30%는 공무원 계층, 16%는 자영업자, 그리고 나머지는 지주, 또는 공장주 등 중산층 이상 계층이 대부분을 차지했다고 한다.
젝트가 가장 우려했던 것 중 하나가 시민 계급이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커져서 군대가 정치적으로 불온한 색채를 띄게 되는 것 이었다고 하는데 최소한 장교단의 출신 계층만 가지고 본다면 그런 걱정은 기우였고 실제로도 독일 장교단은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집단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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