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기 사예르의 회고록은 많은 오류 때문에 1990년대에 들어와 진위여부에 대한 논쟁이 한차례 진행된 바 있습니다. 내쉬는 구술작업도 상당한 수준으로 진행했기 때문에 인간의 기억이 가지는 문제점, 구술자료의 장단점을 잘 파악하고 있는데 이 글에서 그 점을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중 흥미로운 부분을 조금 인용해 보지요.
케네디Edwin L. Kennedy. Jr가 지적한 것 처럼 사예르의 회고록에는 많은 자잘한 오류들이 있다. 즉 화기의 구경, 차량의 명칭, 부대 그리고 용어 같은 것이다. 이런 오류 중 많은 것들은 영문판의 군사용어 번역이 부실하기 때문이다. 또한 애당초 사예르는 프랑스와 벨기에의 독자들을 대상으로 이 책을 썼으며 번역을 하면서 독일 군사용어에 대응되는 프랑스어 어휘를 무리해서 끼워맞춘 것이 원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프랑스어로 번역된 용어들을 영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사소한 오류들을 더욱 심화시켰을 수도 있을 것이다. 사예르는 초고를 연필로 썼는데 알아보기 힘든 부분 때문에 처음 출판하는 과정에서 오류가 생겼을 수도 있다. 게다가 사예르는 전쟁이 끝난 뒤 잠시 프랑스군에 복무하기도 했는데 이 과정에서 그가 사용하는 어휘에 프랑스 군사용어가 들어가기도 했을 것이다.
한가지 더 명심해야 할 것은 사예르는 열 여섯살에 입대했다는 점이다. 사예르는 3년 뒤 전쟁 포로가 되어 독일군에서 제대했는데 이 때는 열 아홉살의 청년이었다. 사예르는 겨우 어린애를 벗어났을 뿐 아니라 독일어를 제대로 말할 줄도 몰랐으며 세부적인 군사지식에 대한 안목도 없었다. 전혀 다른 문화를 갑자기 접하게 된데다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보내졌는데 사예르가 자신이 경험한 것 들을 뚜렷하게 기억해 낼 수 있다면 그거야 말로 더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확실한 사실은 사예르가 사소한 사실들을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긴 해도 전체적인 틀에서는 정확하다는 것이고 이점은 저자의 신뢰성을 충분히 뒷받침 해주고 있다. 전쟁이 끝나고 22년이 지난 뒤에 이런 사소한 사실들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지 못하거나 잘못 기억하고 있다는 점이야 말로 인간답고 훨씬 믿을만 하지 않은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미국인 중 수개월의 전투를 경험한 뒤 대략 25년쯤 흐른 뒤에 모든 자잘한 사실들을 기억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내가 생각하기에 그런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 군사적인 지식을 갖춘 사람이라 할 지라도 그러지는 못 할 것이다. 대학교육을 받은 군사사 전공자나 직업군인, 혹은 취미로 2차대전을 연구하는 사람이나 군복, 무기, 군장, 그리고 차량 등을 수집하는 애호가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세부적인 사실들은 사예르에게 있어서는 사소한 것 들이었으며 이 때문에 군사적인 세부사항에 대해서는 아무렇게나, 심지어 대충 서술한 것이다.
케네디가 가장 강하게 확신하고 있는 부분은 사예르가 군복에 부착하는 표식의 위치를 잘못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사예르는 부대의 소매띠 위치를 잘못 서술하고 있다. 이 점 때문에 필자는 현재 그로스 도이칠란트 사단 전우회장을 맡고 있는 퇴역 소령, 헬무트 슈페터씨와 서신을 교환하기도 했다. 케네디가 생각하기에는 이 점을 비난하는 것 만으로도 사예르의 회고록 전체가 조작이라는 딱지를 붙이기에 충분할 것이다.(케네디의 글을 인용하자면 “[소매띠의] 위치를 잘못 기억한다는 것은 납득할 수 가 없다”) 그로스 도이칠란트 사단이 독일육군의 정예 부대로서 부대원들의 오른쪽 소매에 소매띠를 달도록 허가받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로스 도이칠란트 사단의 소매띠는 쥐텔린Süttelin 서체로 Großdeutschland라는 글자를 수놓은 것으로 당시에는 오늘날의 레인저 부대 마크나 다른 특수부대의 상징만큼 명예로운 상징이었다. 무장친위대 사단들 또한 소매띠를 달도록 허가받았는데 이들은 왼팔에 달았다. 사예르는 그의 회고록에서 자신과 전우들이 소매띠를 받았을 때 왼팔에 달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썼는데 이것은 명백한 오류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오른팔에 달라고 명령을 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예르는 소매띠에 대해서 틀린 것이 맞다. 하지만 이 점이 뭘 입증해 준다는 것인가? 사예르의 회고록이 가지고 있는 장점은 세부적인 군사지식이 아니라 느낌과 분위기, 그리고 경험이다. 소매띠의 위치 같은 내용은 사예르가 너무나 뚜렷히 기억하고 있는 공포나 무용담과 비교하면 하잘데 없는 것에 불과하다. 사예르는 그저 소매띠를 어디에다 달았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 수 있다. 2차대전 시기 독일군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이런 오류가 그렇게 까지 터무니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이 사예르는 이런 세부적인 사실에 대해 부주의한 면을 자주 보였다. 그리고 실제로 이런 세부적인 사실들을 잊어버리는 것은 참전용사들에겐 흔한 일이다. 나는 해외근무기장Overseas service stripes을 어느 쪽에 다는지 모르는 2차대전 참전용사와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있다. 필자의 조부는 1944년 6월 6일 82공수사단 소속으로 생-메르-에글리제Sainte-Mère-Église에 강하한 분인데 자신이 82공수사단 마크를 달았는지 비공인 508강하연대 마크를 달았는지 기억하지 못하셨다. 그가 노인이어서가 아니다. 단지 많은 사람들이 세부적인 지식들을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부대 휘장과 같은 것들을 잘못 기억하고 있다고 해서 사예르의 이야기가 진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사소한 것에 얽매여 큰 것을 바로 보지 못하는 짓이다.
“The Forgotten Soldier : Unmasked”, Army History No.42(Summer, 1997), pp.15~16
더글라스 내쉬는 그의 대표작 Hell's Gate: The Battle of the Cherkassy Pocket January - February 1944에서 잘 보여주었듯 전쟁을 이야기 하면서 그 속에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이 점은 제가 내쉬의 책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위에서 인용한 것 처럼 내쉬는 사예르의 회고록을 둘러싼 논쟁에서 군사적인 지식들의 오류를 근거로 비판하는 측에 대해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내쉬가 구술 경험이 풍부하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한데 그는 인간의 경험과 기억이 전쟁을 어떻게 재구성하는지 잘 파악하고 있습니다. 아래에 인용한 조선족들의 경험담에서도 잘 나타나지만 군사사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과 전쟁을 경험한 사람들은 관심사가 같을 수가 없고 전쟁을 대하는 태도도 근본적으로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전쟁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행위이지만 전쟁사를 공부하다 보면 그 속의 인간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쉬와 같은 관점을 가진 역사가들은 반가운 존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