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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5월 20일 일요일

후퇴전에서 기갑부대의 전차 손실에 대한 잡상 - 바그라티온 작전의 독일 제4, 5기갑사단의 경우

1944년 벨로루시에서 소련이 감행한 하계대공세, ‘바그라티온’ 작전 당시 독일군의 기갑부대 운용에 대한 글을 조금씩 쓰는 중입니다. 작전 위주로 간략하게 써보려 하는데 자료를 보면서 조금씩 쓰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독일군이 전략적인 기습을 당한 상황에서 혼란에 빠져 대응하는 양상이다 보니 기갑사단들의 투입도 축차적으로 이루어져 어수선하게 운용되는 양상이라서 정리하는 것이 꽤 재미있더군요.

그런데 글을 쓰다보니 눈에 띄는게 독일 기갑사단들의 장비 가동율입니다. 소련군의 맹렬한 반격에 독일군이 정신없이 난타당하는 와중에 그나마 전력이 양호한 기갑사단들이 지연전과 역습의 핵심이 될수 밖에 없는데 그 중에서도 전차 전력이 중요한 요소이니 말입니다. 사실 전반적인 양상은 2차대전사에 관심있는 분들이라면 쉽게 예측하실 수 있습니다. 전투에 돌입하면 가동율이 급속히 저하된다는 점입니다. 쉽게 예측할 수 있는 사실들이지만 구체적인 통계를 살펴보는것도 나름 재미있으니 짤막하게 이야기를 해 보죠. 이 글에서는 제4기갑사단과 제5기갑사단을 예로 들어 이야기하겠습니다. 이 두 기갑사단은 바그라티온 작전이 개시될 당시 중부집단군 지구에 투입된 완전편성된 기갑사단이었기 때문에 완편되지 못한 기갑사단들에 비해 소모의 양상을 보여주는데 더 적합한 것 같습니다.

제4기갑사단과 제5기갑사단은 1944년 초의 격전에서 중부집단군의 최우익인 제2군 소속의 제56기갑군단 소속으로 싸웠습니다. 그런데 독일군이 1944년 하계공세가 북우크라이나 집단군에 가해질 것이라고 예측하면서 5월 30일 제56기갑군단에 소속된 2개 기갑사단은 북우크라이나 집단군의 지휘하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로 인해서 중부집단군은 전차전력의 82%를 잃어버렸습니다.1) 5월부터 6월 사이에 제4기갑사단과 제5기갑사단은 다가올 소련군의 하계공세를 앞두고 병력과 장비를 대대적으로 보충받았기 때문에 바그라티온 작전이 개시되기 직전에는 동부전선에서 가장 강력한 기갑사단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바그라티온 작전이 개시되기 직전 이 두 기갑사단의 기갑전력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표1. 독일 제4기갑사단의 기갑전력(1944. 5.~1944. 6)
4호전차 총계
4호전차 가동
판터 총계
판터 가동
1944.5.31
70
68
0
0
1944.6.20
74(79)
51
76(81)
70
[표 : 1944년 5월 31일 통계는 Thomas L. Jentz, Panzer Truppen Vol.2 : The Complete Guide to the Creation & Combat employment of Germany’s Tank Force 1943~1945(Schiffer Publishing, 1996), p.205; 1944년 6월 20일 통계는 Joachim Neumann&Dietrich von Saucken, Die 4.Panzerdivision 1943-1945 : Bericht und Betrachtung zu den zwei letzten Kriegsjahren im Osten, (Selbstverlag, 1985), p.362 이 책에서는 이외에 4호와 판터 지휘전차 7대가 별도로 있었다고 기술; Kamen Nevenkin, Fire Brigades : The Panzer Divisions 1943-1945, (J.J.Fedorowicz, 2008), p.148에서는 바그라티온 작전 직전 제4기갑사단이 4호전차 81대와 판터 79대를 보유한 것으로 서술]

표2. 독일 제5기갑사단의 기갑전력(1944.5.~1944.6)
4호전차 총계
4호전차 가동
판터 총계
판터 가동
1944.5.31
59
57
0
0
1944.6.20
78
?
79
?
[표 : 1944년 5월 31일 통계는 Thomas L. Jentz, Panzer Truppen Vol.2 : The Complete Guide to the Creation & Combat employment of Germany’s Tank Force 1943~1945(Schiffer Publishing, 1996), p.205; 6월 22일 통계는 Kamen Nevenkin, Fire Brigades : The Panzer Divisions 1943-1945, (J.J.Fedorowicz, 2008), p.171]

또한 제4기갑사단과 제5기갑사단은 예하 대전차대대가 4호구축전차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제4기갑사단의 제49대전차대대와 제5기갑사단의 제53대전차대대는 1944년 6월까지 21대의 4호구축전차를 지급받은 상태였습니다.2)

소련군의 대공세가 개시되자 북우크라이나 집단군의 제4기갑군 소속 예비대로 있던 이 두 기갑사단은 중부집단군 지구로 출동하라는 명령을 받게 됩니다. 먼저 제5기갑사단이 6월 25일 이동명령을 받아서 6월 28일 부터 중부집단군 지구에 도착해 소련군을 상대로 한 지연전에 투입됩니다. 제5기갑사단은 완전편성된 상태였으며 여기에 제505중전차대대를 배속받아 사단급 전력으로는 매우 강한 편이었습니다.3) 제5기갑사단과 제505중전차대대를 핵심으로 한 자우켄 전투단은 민스크로 진격하는 소련 제5근위전차군을 상대로 보리소프에서 지연전을 전개했습니다.
제4기갑사단은 제5기갑사단 보다 조금 늦게 출동명령을 받았습니다. 제4기갑사단은 6월 26일 출동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받고 6월 27일 부터 철도로 바라노비치를 향해 이동을 시작했습니다. 제4기갑사단은 7월 1일 부터 슬루츠크 일대에 전개해 지연전을 시작합니다. 제4기갑사단도 육군 직할부대들을 배속받아 전투력이 강화되었는데 먼저 7월 1일에는 제904돌격포여단을 배속받았고 7월 9일에는 제507중전차대대를 배속받습니다.4)

전반적인 작전 전개에 대해서는 따로 준비하는 글이 있으니 생략하고 일단 기갑전력이 소모되는 양상을 살펴보지요. 먼저 제5기갑사단의 1944년 7월 5일과 9일의 기갑차량 가동현황입니다.

표3. 제5기갑사단의 기갑차량 가동현황(1944년 7월5일)
4호전차
판터
4호구축전차
1944.7.5
25
25
?
1944.7.9
6
12
6?
[표 : Gerd Niepold, Mittlere Ostfront Juni ‘44, (Mittler&Sohn, 1985), p.207, 241]

다음은 제4기갑사단입니다. 제4기갑사단 역시 전선에 투입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가동가능한 기갑차량이 심각한 수준으로 줄었습니다. 1944년 7월 6일과 7월 7일의 통계를 보면 제4기갑사단의 가동가능한 기갑차량의 대수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표4. 제4기갑사단의 기갑차량 가동현황(1944년 7월6일~8일)
4호전차
판터
4호구축전차
1944.7.6
19
31
5
1944.7.7
17
35
5
1944.7.8
13
25
3
[표 : 1944년 7월 6일 통계는 Gerd Niepold, Mittlere Ostfront Juni ‘44, (Mittler&Sohn, 1985), p.218; 7월 7~8일 통계는 Joachim Neumann&Dietrich von Saucken, Die 4.Panzerdivision 1943-1945 : Bericht und Betrachtung zu den zwei letzten Kriegsjahren im Osten, (Selbstverlag, 1985), p.387, 390]

불과 일주일 남짓한 전투로 가동가능한 기갑차량이 격감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용한 통계에서는 제4기갑사단과 제5기갑사단의 수리중인 전차 숫자가 누락되어 정확한 손실을 알 수는 없지만 4기갑사단의 경우 7월 21일의 통계를 가지고 대략적인 양상을 유추해 볼 수 있을 듯 싶습니다.

표5. 제4기갑사단의 기갑차량 현황(1944년 7월 21일)
가동가능
단기 수리
장기 수리
4호전차
21
40
23
판터
13
27
27
[표 : Joachim Neumann&Dietrich von Saucken, Die 4.Panzerdivision 1943-1945 : Bericht und Betrachtung zu den zwei letzten Kriegsjahren im Osten, (Selbstverlag, 1985), p.415]

1944년 7월 21일의 통계를 보면 4호전차의 총 보유대수는 84대이고 판터는 67대입니다. 그런데 제4기갑사단의 제35기갑연대는 지연전이 한창이던 1944년 7월 15일에 17대의 4호전차를 보충받았습니다.5) 그러니 4호전차의 완전손실은 총 98대의 4호 전차중 14대이고, 판터는 총79대 중 12대 입니다. 판터의 손실이 아주 살짝 적지만 전체적으로는 비슷한 수준이라는 게 흥미롭습니다. 비슷한 시기의 5기갑사단은 비교할 만한 자료가 아직 없어서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꽤 흥미로운 경향이긴 합니다.

완벽한 통계는 아니지만 제4기갑사단과 제5기갑사단이 지연전을 마치고 도펠코프Doppelkopf 라는 이름의 새로운 공세작전을 시작한 8월 12일에서 16일의 통계를 한번 살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이 두 기갑사단은 8월 10일 공세를 위해서 전선에서 이탈하여 15일까지 공세준비를 했으므로 이시기의 전차 보유대수는 큰 변동이 없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표6. 제4기갑사단과 제5기갑사단의 기갑차량 현황(1944년 8월 12~16일)
4호(가동가능)
4호(수리중)
판터(가동가능)
판터(수리중)
제4기갑(8.15)
32
31/5
15
23/9
제4기갑(8.16)
32
31 / ?
15
23 / ?
제5기갑(8.12)
22
13
19
15
제5기갑(8.16)
24
10 / ?
14
14 / ?
[표 : 제4기갑과 제5기갑의 8월 12일, 8월 15일 통계는 Kamen Nevenkin, Fire Brigades : The Panzer Divisions 1943-1945, (J.J.Fedorowicz, 2008), p.149, 172 그리고 Joachim Neumann&Dietrich von Saucken, Die 4.Panzerdivision 1943-1945 : Bericht und Betrachtung zu den zwei letzten Kriegsjahren im Osten, (Selbstverlag, 1985), p.455; 8월 16일 통계는 Gerd Niepold, Panzeroperationen : >Doppelkppf< und >Cäsar< Sommer’ 44, (Mittler&Sohn, 1987), p.35

이 통계를 보면 4기갑사단은 총68대의 4호전차와 47대의 판터를, 제5기갑사단은 35대의 4호전차와 34대의 판터를 보유한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제4기갑사단은 7월 15일에 17대의 4호전차를, 8월 1일부터 6일까지 16대의 판터를 보충받았고 제5기갑사단은 7월 18일에 17대의 4호전차를, 8월 1일부터 6일까지 24대의 판터를 보충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바탕으로 바그라티온 작전과 이어지는 지연전 도중 제4기갑사단과 제5기갑사단이 완전히 상실한 전차는 다음과 같이 추산해 볼 수 있습니다.

표7. 바그라티온 작전 기간 중 제4기갑사단과 제5기갑사단의 전차 손실
4호전차
판터
제4기갑(1944.7.1~8.10)
28
50
제5기갑(1944.6.28~8.10)
60
69

성능이 더 우수한 판터의 손실이 4호전차 보다 더 높게 나타나는 것이 의외입니다. 여기에는 몇가지 고려해 볼만한 요인이 있습니다. 판터가 연료소모가 크고 좀 더 회수하기 어렵다는 점이 있습니다. 실제로 제4기갑사단의 판터대대는 바그라티온 작전 기간 중 유류부족으로 운용에 어려움이 많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1) Gerd Niepold, Mittlere Ostfront Juni ‘44, (Mittler&Sohn, 1985), p.21
2) Kamen Nevenkin, Fire Brigades : The Panzer Divisions 1943-1945, (J.J.Fedorowicz, 2008), p.148, 171
3) Rolf Hinze, Der Zusammenbruch der Heeresgruppe Mitte im Osten 1944, (Motorbuch Verlag, 1980), p.184
4) Joachim Neumann&Dietrich von Saucken, Die 4.Panzerdivision 1943-1945 : Bericht und Betrachtung zu den zwei letzten Kriegsjahren im Osten, (Selbstverlag, 1985), p.363~370, 391; Tiger in Combat 1권에는 7월 8일 제507중전차 대대가 4기갑사단에 배속되었다고 나오는데 이것은 배속명령을 받은 날자이고 실제 배속은 7월 9일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5) Kamen Nevenkin, ibid, p.149

2011년 3월 13일 일요일

2차대전 후반기 소련군 소총병사단의 규모

2차대전 당시 소련은 가공할 동원능력을 발휘해 전쟁 초반의 수많은 참패에도 불구하고 패전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소련이 전쟁 발발 첫 6개월 동안 입은 인명손실은 끔찍한 수준이었습니다. 1941년 12월 31일까지 입은 인명손실(전사, 포로, 행방불명, 부상)이 무려 4,473,820명이었다고 하니 전쟁 첫 해에 붕괴되지 않았다는게 놀라울 지경이죠.1) 하지만 소련은 전쟁 첫해에 무려 600여만명을 동원하는 괴력을 보여줍니다.2) 글자 그대로 전멸당한 부대만큼 새로운 부대를 다시 만들어 내보내는 방식으로 위기에 대응한 것이지요.

전쟁 초기 이런 총알받이의 역할을 수행한 근간은 바로 소총병 사단(Стрелковая Дивизия) 이었습니다. 유능한 지휘관과 훈련도 부족하고 게다가 기동력 조차 낮은 소총병 사단들은 개전 초반 독일군의 밥이었습니다. 비록 용감히 맞서 싸웠다고는 하나 작전과 전술 단위의 능력이 부족하니 그 결과는 안 봐도 뻔한 것 이었습니다.

하지만 1942년과 1943년을 거치면서 상황은 조금씩 호전되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동안 누적된 인명손실이었습니다. 소련이 독일보다는 가용한 인적자원이 많다고는 해도 1942년에 7,369,278명, 1943년에 7,857,503명이라는 무시무시한 손실을 입었으니 병력 충원에 곤란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3) 그 결과 소련군의 소총병사단은 계속해서 편제병력을 줄여 나갑니다. 1942년 3월 18일의 편제에서 소총병사단의 총병력은 12,725명이었는데 이것이 1942년 7월 28일 편제에서는 10,386명, 1942년 12월 10일 편제에서는 9,435명, 1943년 7월 15일 편제에서는 9,380명으로 줄어듭니다.4) 문제는 편제 병력을 계속 줄여도 병력소모가 커서 편제를 맞추기가 어려웠다는 것 입니다. 1942-43년 동계 공세 기간 중 소련군의 소총병 부대들의 실제 병력은 부대에 따라 편제의 55~95%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나 1943년 7월의 하계 전역에서는 편제의 75~80% 정도였고 편제의 90%를 넘어가는 부대는 극히 드문 실정이었다고 합니다.5)

쿠르스크 전투 당시 소련군은 독일군의 대공세를 맞아 방어준비에 심혈을 기울였고 종심깊고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는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독일군의 공세를 맞아 병력 보충에 상당한 힘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소총병사단들의 병력 수준은 위에서 언급한 정도에 그쳤습니다. 1943년 7월 5일, 독일 제4기갑군의 공격에 맞선 보로네지 전선군 예하 6근위군 소속 소총병사단들의 병력 규모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6근위군1943년 7월 5일 병력
51 근위소총병사단8,590
52 근위소총병사단8,900
67 근위소총병사단8,003
71 근위소총병사단8,796
89 근위소총병사단8,189
90 근위소총병사단8,417
375 소총병사단 8,647
[표: Валерий Замулин, Курский Излом(Эксмо, 2007), с.904]

이 정도 병력은 당시 수준에서 매우 양호한 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쿠르스크 방어전은 소련의 승리로 끝났지만 그 피해도 상당한 수준이어서 소련군의 1943년 하계 대공세 중 하리코프에 대한 루미얀체프 작전 당시 소련군 수뇌부가 병력 충원에 심혈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소총병사단들의 평균 병력은 사단 당 7,180명으로 편제의 75%에 불과했습니다.6) 장기간에 걸친 소모전의 여파가 나타난 셈이지요.  

소총병사단들은 1943년 부터 시작된 반격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소련군이 1943년에서 1945년 까지 입은 총 병력손실 중 84.23%가, 그리고 사망자는 85.95%가 보병부대에서 발생한 것 이었습니다.7) 1941-42년과 달리 1943년 후반 이후의 소련군은 수십개 사단이 송두리째 전멸당하는 사태는 없었고 그 덕분에 각각의 부대들도 ‘작전 중의 소모’만 감당하면 되는 정도로 상황이 좋아졌지만 문제는 이 ‘작전 중의 소모’도 만만한 수준은 아니었다는데 있습니다.

1943년 9월 20일 보로네지 전선군 예하 38군 소속의 소총사단들의 병력 현황을 예로 들어보면 좋을 듯 싶습니다. 이 당시 보로네지 전선군은 쿠르스크 방어전과 루미얀체프 작전이라는 공세작전을 마치고 추격전을 위해 병력 보충을 어느 정도 받은 상태였습니다.


38군1943년 9월 20일 병력
71 소총병사단3,755
136 소총병사단5,376
163 소총병사단5,045
167 소총병사단8,488
180 소총병사단8,517
232 소총병사단7,138
240 소총병사단8,442
340 소총병사단5,404
[표 : В. Гончаров, Битва за Днепр 1943 г.(Хранитель, 2007), с.549]

이른바 근위 사단이라는 부대라고 해서 별반 나을 것은 없었습니다. 역시 9월 20일 같은 보로네지 전선군 예하 6근위군 소속 근위소총병사단들의 병력 현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위에서 인용한 쿠르스크 전투 당시의 병력 수준과 비교해 보면 전투 손실을 제대로 보충받지 못한 상태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6근위군1943년 9월 20일 병력
51 근위소총병사단4,064
52 근위소총병사단4,977
67 근위소총병사단4,103
71 근위소총병사단5,451
90 근위소총병사단4,651
[표 : В. Гончаров, Битва за Днепр 1943 г.(Хранитель, 2007), с.553]

1944년에 들어가면 상황이 더욱 더 심각해 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그라티온(Багратион) 작전 당시 소련군의 주공축선에 배치된 소총병사단들의 평균병력은 6,000~6,500명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8)

소련군이 점령된 영토를 해방하면서 그만큼 더 병력자원을 동원할 수 있었지만 장기간의 소모전 때문에 전쟁 말기로 갈수록 소총사단의 병력 규모는 별로 나아지지를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베를린 작전에 투입된 제1 벨로루시 전선군 예하 47군의 경우 작전 시작직전 병력 5,000명을 넘는 소총병사단이 하나도 없을 정도입니다.(주력 공격부대인데도 말입니다!)9)


47군1945년 4월 5일 병력
185 소총병사단4,203
260 소총병사단4,111
328 소총병사단4,163
80 소총병사단4,210
76 소총병사단4,190
175 소총병사단4,189
82 소총병사단4,055
132 소총병사단 4,597
143 소총병사단4,409

[표: Алексей Исаев, Берлин 45-го(Эксмо, 2007), с.708]

상황이 조금 나은 5충격군(Ударной Армий)의 병력 현황도 47군 보다 조금 나은 수준입니다.


5충격군1945년 4월 10일 병력
230 소총병사단5,032
248 소총병사단5,006
301 소총병사단5,638
89 근위소총병사단5,470
94 근위소총병사단5,823
266 소총병사단5,520
60 근위소총병사단5,348
295 소총병사단5,383
416 소총병사단4,649
[표: Алексей Исаев, Берлин 45-го(Эксмо, 2007), с.710]

최후의 공세를 앞두고 준비를 갖춘 사단의 병력 수준이 편제의 절반 남짓한 수준인 것을 보면 소련군 또한 인력 소모가 극도에 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 G. F. Krivosheev, Soviet Casualties and Combat Losses in the Twentieth Century(Greenhill Books, 1997), p.94
2) David M. Glantz, Colossus Reborn : The Red Army at War, 1941-1943(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5), p.540
3) Kreivosheev, ibid, p.94
4) Steven J. Zaloga and Leland S. Ness, Red Army Handbook 1939-45(Sutton, 1998), p.35
5) Glantz, ibid, p.190
6) David M. Glantz, From the Don to the Dnepr : Soviet Offensive Operations, December 1942-August 1943(Frank Cass, 1991), p.223
7) Kreivosheev, ibid, p.219
8) Walter S. Dunn, Jr., Soviet Blitzkrieg : The Battle for Whiter Russia 1944(Lynne Rienner, 2000), pp.41~42
9) Алексей Исаев, Берлин 45-го(Эксмо, 2007), с.7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