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08년 8월 15일 금요일

빈 - 첫째날

간만에 여행 이야길 올립니다. 이번엔 좀 짧습니다.

잘츠부르크와 린츠 구경을 마친 뒤 마지막 목적지인 빈에 도착했습니다. 이제 유레일도 만료되었고 귀국하기 전 까지 빈에서 삐대기로 결심했습니다. 원래는 빈에 이틀만 머무른 뒤 뮌헨으로 돌아가 뮌헨의 박물관 구경을 하려 했는데 막상 오랫만에 빈에 도착하니 이 매력적인 도시를 그냥 떠날 수 가 없더군요. 참고로 5년전 빈에 갔을 때는 이 근사한 도시에 일주일간 머물렀습니다.

간만에 도착한 빈의 인상은 좀 썰렁하다... 였습니다. 역시 막차를 타고 도착해서 그런지 서부역은 썰렁하더군요.



대충 역 근처에서 제일 싼 호텔을 찾아 하루를 보냈습니다.

이제 빈에서의 첫째날이 시작이군요.

대략 8시 정도에 일어나 다시 서부역으로 돌아가 3일뒤 탑승할 뮌헨행 야간 열차표를 예약한 뒤 다시 Wien Karte를 한 장 샀습니다. 고맙게도 이 카드의 유효기간은 3일 이더군요.

8시 부터 10시까지는 어슬렁 거리며 시내 구경을 했습니다. 사실 5년 전에 일주일간 머무르긴 했지만 구경 못한 박물관이 산더미 같이 쌓여 있어서 3일 동안 어딜 구경하고 어딜 말아야 할 지 고민이 되더군요. 슈테판 성당(Stephansdom)은 5년전에 구경했었는데 한 번 더 구경할 까 하다가 보수공사를 하고 있어서 그냥 지나갔습니다.


두어시간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어딜 갈 것인지 정했습니다. Albertina 미술관을 구경하는 것이 좋겠더군요. 마침 아래와 같은 전시도 하고 있겠다 구미가 당겼습니다.


점심 먹는 것은 포기하고 부지런히 Albertina 미술관으로 갔습니다.


Albertina 미술관 공식 홈페이지



왜 빈 첫째날에 찍은 사진이 별로 없냐면 바로 이 Albertina 미술관 때문이었습니다. 대략 10시 30분에 들어갔는데 관람을 마치고 나오니 오후 5시가 되어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더군요. 전시물이 방대해서 하루를 다 털어넣어야 했습니다. 특히 특별전시인 바틀리너 컬렉션의 규모가 정말 어마어마 했습니다. 바틀리너 컬렉션을 구경하고 나니 사실상 다른 전시물을 구경할 시간이 거의 없었습니다. 아~ 멋진 그림이 많았는데 당연히 사진 촬영은 허가가 되지 않아 찍지를 못했으니 너무 아쉬웠습니다. 도록을 구매하고 싶었는데 이제 예산이 달랑달랑 한지라 엄두도 못 내겠더군요.

결국 하루 일정은 이렇게 간단히 마치고 마지막으로 서점 한 곳을 들렀습니다. 바로 5년 전에 들렀던 발터 클뤼겔 선생의 헌책방입니다.


오랫만에 다시 이곳에 들르니 너무 반가웠습니다. 이 서점은 군사서적을 비교적 많이 갖춰놓고 있는데다 가격도 저렴하게 책정해 놓고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래의 Das Reich 사단사의 경우 전부 다 해서 100유로 밖에 안하더군요. 가격표를 본 뒤 제가 저것들을 낱권으로 구하는데 쏟아넣은 돈을 생각하고 속이 쓰렸습니다.


아래 사진은 5년전 여름에 처음 갔을 때 찍은 사진입니다. 성능이 구린 스캐너로 스캔해서 그런지 그림이 좀 그렇군요.


물론 주인장이신 클뤼겔 선생도 정정하셔서 매우 반가웠습니다. 실례를 무릅쓰고 사진 한장 찍기를 청하니 마지 못해 허락을 해 주셨습니다. 솔직히 너무 반갑긴 했지만 노인분을 괴롭힌 것 같아 양심에 찔리더군요.


음. 그러고 보니 이번은 내용이 좀 부족한 것 같군요. 약간 썰렁한 감이 없잖으니 저녁 식사 사진으로 부족분을 보충하겠습니다.


2007년 10월 30일 화요일

독일육군의 흑역사 - 1938년 오스트리아 병합시의 사례

1938~1939년 시기에 실시된 육군의 대규모 기동은 어느 나라나 엉망이었던 것 같습니다. 소련이 폴란드 침공을 앞두고 실시한 동원에서 벌인 삽질은 특히 전설의 경지에 다다른 것 이지요. 그런데 그럭저럭 정예로 간주되는 독일군도 평시의 기동에서 삽질을 한 사례가 있으니 그것은 그 유명한 오스트리아 합병 당시의 기동입니다.

뭐, 사실 3월 10일 이전까지 독일육군은 제대로 된 오스트리아 진주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 일이 제대로 풀리는게 더 이상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건 총통의 명령을 받은 당시 육군참모총장 베크(Ludwig Beck)는 다시 자신의 똘마니(?)인 작전의 천재 만슈타인에게 총통의 명령을 하달합니다. 그러나 역시 천재는 천재인지 이 황당한 명령을 받은 만슈타인은 3월 10일 오후에 동원 및 기동계획을 거의 완성하는 재주를 부립니다. 그리고 베크는 만슈타인의 계획에 따라 이날 늦게 보크(Fedor von Bock)를 오스트리아로 진격할 제8군 사령관에 임명합니다.

이렇게 해서 보크가 지휘할 제 8군은 예하에 다음과 같은 병력을 배속 받았습니다.

제7군단 : 제7보병사단, 제27보병사단, 제25기갑연대 1대대, 제1산악사단
제13군단 : 제10보병사단, 제17보병사단
제16차량화군단 : 제2기갑사단, SS-VT
군직할 : 헤르만괴링연대, 제97향토사단(Landwehr-division)

그리고 제8군은 이틀 뒤인 12일에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게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이 시기의 독일군은 팽창기에 있는지라 인력, 특히 장교와 부사관이 부족했습니다. 이 때문에 오스트리아로 진격할 부대들을 편성하는 것이 상당한 문제였습니다.
먼제 제8군의 예하 부대들을 통제할 통신부대인 제507통신연대는 히틀러가 동원령을 내린 지 6일 뒤에야 편성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또 제16차량화군단의 직할 의무부대는 동원 5일차에야 집결지에 도착할 수 있었으며 소집명령을 받고 집결지에 도착한 예비역들은 소속부대를 찾지 못해 우왕좌왕하고 있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제97향토사단의 한 연대의 경우 동원 1일차에 부대에 제대로 도착한 장교는 단 한명 뿐이었다고 합니다. 동원계획 이라는게 만슈타인이 반나절 만에 뚝딱 완성한 것이었으니 혼란이 없었다면 거짓말 이었겠지요. 오스트리아로 진주할 부대들을 편성하고 있던 제13군관구(Wehrkreis)의 경우 60먹은 노인들에게 소집영장을 발부하는 황당한 착오도 범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제빵병들이 포병부대로 배치되거나 보병사단의 수색대에 배치된 병사가 말을 탈 줄 모르는 등 동원소집은 시작부터 엉망이었습니다. 제1산악사단의 경우 4개 대대는 전혀 투입할 수 없는 상태였으며 이 사단의 사단장은 최소한 14일은 걸려야 동원된 예비역들을 쓸만하게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인력 뿐 아니라 장비 상태도 엉망이었습니다. 제2기갑사단이 동원명령을 받고 사단 소속의 전차들을 점검했을 때 무려 30% 이상이 가동불능 이거나 수리를 요하는 상태였습니다. 여기에 제8군 전체를 통틀어 2,800대의 차량이 부족했습니다. 주력인 육군의 상태가 개판이었기 때문에 당시만 해도 2선급으로 취급받던 SS-VT나 헤르만괴링연대는 구할 수 있는 운송수단을 닥치는대로 긁어 모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문제는 여기서 그치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엉망진창으로 동원이 계속되고 있던 3월 12일 오전 08시, 그런대로 동원이 완료된 부대들이 국경을 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행군은 개판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로 진입하는 몇 안되는 도로에 여러 사단 소속의 부대들이 뒤죽박죽으로 굴러들어가니 행군은 시작부터 엉망이었습니다. 제10보병사단과 제2기갑사단은 사단 예하 지원부대 없이 전투부대만 먼저 출발했고 제7보병사단은 행군 도중 사단 전체가 대대 단위로 분해되어 버렸습니다. 심한 경우 같은 사단 소속의 부대들이 10km 이상 씩 떨어져 버려 행군 도중 사단들이 뒤섞이는 사례가 다반사였습니다.

그렇지만 독일군의 고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제2기갑사단은 국경의 집결지까지 이동할 연료는 있었는데 그 이후의 연료는 준비하지 않은 상태로 국경을 넘었습니다. 제8군 사령부는 4일 뒤에야 제2기갑사단에 충분한 연료를 보급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사단이 보유한 전차 중 39대가 빈으로 진격하는 도중 고장나서 길바닥에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보병사단들은 황급히 징발한 늙은 말들이 보급품 수레나 야포를 견인하지 못해 골탕을 먹었습니다. 많은 군사사가들이 지적하듯 만약 오스트리아군이 조금이라도 저항을 했다면 독일군은 심각한 곤란에 직면했을 것 입니다.

행군이 엉망으로 꼬여버렸기 때문에 헌병도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이 됐습니다. 독일군 내에서는 이 난감한 상황을 교통의 무질서(Verkehrsanarchie)라고 불렀다지요. 3월 14일이 되면 이 혼란은 극에 달합니다. 제10보병사단의 경우 각 보병연대간의 간격이 60km(!!!!)에 달했고 포병이나 기타 직할대는 마지막 보병연대의 훨씬 후방에서 따라오는 지경이었습니다. 제10보병사단은 하루 평균 43km를 행군했지만 이 속도는 사단이 전투부대로서 대형을 유지했을 때나 의미가 있는 것 이었습니다. 이 사단의 직할대들은 160km 후방에서 도로 정체에 시달리며 어떻게든 전진하려 했지만 이미 혼란한 상황을 통제할 능력을 잃은 사단사령부는 뒤에 처진 사단직할대는 거의 신경을 쓰지 못했습니다. 이 참상을 목도한 제13군단 사령부가 제10사단의 직할대들을 철도로 수송해 볼까 했지만 철도는 제27보병사단을 수송하는 것 때문에 만원이었습니다. 결국 제10보병사단의 직할대들은 오스트리아 병합이 끝날 때 까지 본대와 합류하지 못 했다고 합니다.(;;;;;)
제7보병사단은 하루당 최저 15km의 속도로 전진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단 전체가 분해되어 선두의 대대는 제10보병사단의 사이에 끼어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참다 못한 사단장은 군사령부에게 하루 동안 행군을 정지하고 부대를 수습하겠다고 요청했습니다.
예비역들을 대규모로 보충받은 제1산악사단은 나이먹은 예비역들이 행군도중 줄줄이 뻗어나가는 통에 행군이 엉망으로 변했습니다. 제100산악연대의 경우 오스트리아로 진입한 첫날에만 40%에 달하는 예비역들이 행군으로 나가떨어지는 참극(?!?!)을 연출했습니다.

오스트리아 진주는 엉망진창으로 진행됐고 군사적으로는 재앙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이 독일군을 환영했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독일군은 더 난처한 상황에 처했을지도 모릅니다. 빈 주재 이탈리아 무관이 독일군의 행군을 관찰한 뒤 “행군군기가 결여돼 있다”라고 평가한 것은 독일군에게는 망신살이 뻗치는 일 이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