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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26일 금요일

굿우드 작전 당시 제503중전차대대 122호 티거2 격파에 관한 잡설

얼마전 Panzersaurs Kez님이 굿우드 작전 당시 격파된 독일 제503중전차대대 122호 티거2에 관한 글을 써 주셨습니다. 유명한 독일 기갑부대 연구자 볼프강 슈나이더의 Tiger in Combat에 소개된 독일과 영국 양측의 주장을 균형있게 소개하면서 분석하는 글 입니다. 자세하게 분석을 해 주셔서 저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저는 영국쪽 주장에 손을 들어주는 입장이지만 꽤 복잡한 문제라서 확신은 못 하겠습니다. Panzersaurs Kez님이 좋은 글을 써 주셨으니 저도 몇가지 이야기를 더 하는게 좋겠습니다.(타이젠과 고어맨의 증언은 Panzersaurs Kez님의 블로그에 있으니 이 글에서는 별도로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기본적으로 영국에서 나온 문헌들은 여전히 존 고어맨(John Gorman)의 주장을 강력히 지지하는 입장입니다. 비교적 최신 저작으로 2015년에 나온 Stephen NapierThe Armored Campaign in Normandy, June~August 1944도 존 고어맨의 증언을 신뢰하고 있습니다.1) 다만 고어맨의 증언만 인용할 뿐 참고문헌에 있는 슈나이더의 주장을 구체적으로 반박하지는 않는다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네이피어가 어째서 볼프강 슈나이더의 주장을 기각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굿우드 작전에 관해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저작 중 하나로 꼽을 수 있을 이안 대글리시(Ian Daglish)Operation Goodwood에서는 기본적으로 고어맨의 주장에 힘을 실어 서술하면서 동시에 타이젠의 증언을 함께 소개하고 있습니다. 대글리시는 전투 현장에 독일군 대전차포도 있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타이젠의 증언도 어느정도는 근거가 있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2) 
 
제가 잠정적으로 고어맨의 주장을 지지하는 이유는 고어맨의 증언이 시기적으로 더 빠르다는 점 외에도 그가 원래 탑승한 셔먼을 잃고 갈아탄 파이어플라이 승무원들이 고어맨이 이날 전투로 전공십자훈장(Military Cross)을 수여받았을때 반박을 하지 않았다는 점 입니다. 고어맨의 전공십자훈장은 아일랜드 근위연대 제2전차대대가 노르망디 전역에서 처음 수여받은 것 입니다. 고어맨의 주장이 허위라면 수훈 심사과정에서 파이어플라이 승무원들이 충분히 이의제기를 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또한 영국군 측에서 해당 전차의 잔해를 조사할 기회가 있었으니 영국군은 고어맨의 주장을 검증할 기회가 충분히 있었습니다.(저는 개인적으로 영국군의 전과 검증 체계는 독일군과 비슷한 신뢰도를 지닌다고 평가합니다. 미군의 경우는 이들보다 신뢰도가 조금 떨어진다고 보고, 소련군의 검증 체계는 가장 믿을 수 없다고 봅니다.) 
 
503중전차대대사가 영어로 출간되고 볼프강 슈나이더의 연구가 나온 이래 영어권에서도 고어맨의 주장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고 비판하는 의견이 있습니다. 고어맨에 대한 비판 중 주목해야 할 하나는 그가 말년에 한 주장이 약간 달라졌다는 점 입니다. 고어맨은 말년에 회고록을 냈는데 회고록에 실린 해당 전투의 정황은 다음과 같습니다.3) 
 
원문에서 사용하고 있는 타이거 로얄(티거2)’ 같은 단어는 그대로 옮깁니다. 
 
이제 우리 중대는 상당한 거리를 진격했으며 무전기에서 흘러나오는 단편적인 정보들을 취합해 보니 독일군은 이미 혼란상태를 극복한 듯 했다. 이윽고 우리 앞에 제11기갑사단의 전차 여러대가 나타났다. 대부분의 전차가 피격되어 화염에 휩싸여 있었다. 승무원들은 불타는 탱크에서 전우들을 구출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참담한 광경이었다. 그들을 도울 방법이 없었다. 이날 아침만 해도 쓸모없는 물건이라고 생각했던 궤도식 구급차가 많은 장병의 목숨을 구했다.

제임스 바론(James Baron)에게 최대 속도로 가속하라고 명령했다. 하빈슨(Harbinson) 하사의 전차는 200야드 정도 뒤에 따라오고 있었다. 송전탑을 표지판 삼아 따라가다가 우리 중대의 본대를 발견했다. 우리 중대는 카니(Cagny) 서쪽에서 돈좌되어 있었다. 토니 도먼(Tony Dorman: 중대장)은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계속 전진하라고 격하게 손짓을 했다. 이번 작전의 전략은 샐리스버리 평원과 요크셔 고원에서 했던 기동훈련 처럼 신속하게 돌격해 카니의 동쪽으로 우회하는데 성패가 달려있었다. 도먼이 나에게 신호를 보낸 것이라고 생각해서 밀밭으로 전진했다. 밀밭 끝의 생울타리까지 간 뒤 방향을 전환해 생울타리를 따라 나 있는 좁은 길을 따라 이동했다. 우리의 오른쪽에 또 다른 생울타리가 직각 방향으로 나 있었다. 
이 방향으로 들어서자 무시무시한 광경이 펼쳐졌다. 300야드 전방에 한 대의 타이거 로얄이 있었고 그 뒤에는 타이거 세대가 이를 지원하고 있었다. 타이거 로얄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존재인지 잠깐 설명하자. 독일은 전차 생산에서 양보다 질을 우선했다. 그들은 미국의 전차 생산량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두꺼운 장갑과 포신이 20피트에 달하는 88mm 대공포를 단 전차를 설계했다. 그야말로 전쟁 중에 생산된 것 중에서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전차라 하겠다. 이런 괴물이 있다는 정보는 우리도 알고 있었다. 바론 상병과 나는 이럴때 어떻게 할 지 의논한 일이 있었다. 우리는 만약 타이거 로얄을 마주친다면 해군의 충각 전술을 따라서 그냥 들이받아 버리자고 결정했다. 그는 타이거 로얄의 88mm 포탑이 선회속도가 느리니 셔먼의 속력을 이용해 대응하는게 좋다고 동의했다. 좀 미친것 같지만 75mm 포를 단 셔먼으로 대응하려면 이 방법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타이거 로얄의 포탑은 우리 쪽에서 90도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방향은 제2대대 토니 도먼의 전차가 있던 쪽이었다. 우리 전차는 고폭탄을 장전하고 있었다. 내 사수 앨버트 숄리스(Alber Scholes)와 나는 철갑탄은 아무 효과가 없으니 차라리 고폭탄 쪽이 낫다는데 동의했다. 이건 꽤 괜찮은 판단이었다. 바론 상병이 타이거 로얄을 향해 돌진하는 동안 숄스는 50야드 거리에서 적 전차의 포탑에 고폭탄을 명중시켰다. 이 폭발은 좁은 포탑안의 승무원들에게 충격을 줬고 우리가 돌진하는 순간 적 전차장이 포탑 밖으로 머리를 드러냈다.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을 못하고 어리벙벙한 것 같았다. 다른 타이거 세대의 지원을 받고 있던 타이거 로얄의 전차장은 강력한 장갑의 보호를 받으며 우수한 88mm포로 아군 전차들을 공격하려 하던 중 근거리에 나타난 우리 전차를 쏘기 위해 포탑을 느리게 선회하기 시작했다. 우리 전차는 적 전차의 좌측 후방을 들이받았다. 독일 전차병들은 전차에서 탈출하기 시작했다. 다른 타이거 3대가 우리 전차를 조준하고 있었다나는 탈출하라고 명령했다. 독일군과 우리는 두대의 전차 사이의 좁은 공간에 갇혔다. 
이때 하빈슨 하사의 전차가 생울타리 귀퉁이에서 나타나 용감하게도 타이거 3대를 상대로 전투를 개시했다. 바론 상병이 외쳤다. “어서 피하십시오!” 나는 승무원들을 데리고 생울타리 쪽으로 도망쳤다. 우리는 무성하게 자란 밀밭으로 모망쳐 일단 숨었다. 하빈슨 하사의 전차는 근거리에서 타이거 전차의 명중탄을 맞았다. 우리는 승무원 다섯명이 모두 전사했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어떻게 할 지 의논하고 있는데 불쑥 한 사람이 은신처로 뛰어들었다. 전방 기관총 사수 애그뉴 일병이었다. 내가 탈출 명령을 내렸을때 애그뉴 일병은 해치를 열고 나오다가 적 전차의 사격을 받아 다시 전차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는 포탑쪽의 해치를 열고 나오다가 몇 사람이 오른쪽 방향의 생울타리로 도망치는걸 언뜻 보았다. 그래서 그리로 따라가 그들이 숨어있던 도랑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타이거 전차의 승무원들이 아니던가. 애그뉴 일병은 독일군들에게 경례를 한 뒤 다시 반대 방향으로 줄행랑 쳤다. 운이 좋아 우리와 합류할 수 있었다.

서부전선에서 마주친 단 한대의 타이거 로얄을 전투 불능으로 만들었지만 승리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뭔가를 하다가 만 느낌이었다. 나는 승무원들에게 숨어서 기다리라고 명령한 뒤 밀밭을 가로질러 400야드 쯤 떨어진 아래쪽의 숲으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한대의 파이어플라이를 발견했는데 승무원들이 버린 것 처럼 보였다. 포탑 위로 올라가 안을 들여다 보니 머리가 날아간 워크맨(Workman) 하사의 시체가 포미 위로 쓰러져 있었다. 사수와 장전수는 충격을 받아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 내가 전차를 발견하기 전에 타이거 로얄에 명중탄을 맞아 워크맨의 머리가 날아간게 분명했다.

나는 승무원들의 도움을 받아 워크맨 하사의 시체를 치운 뒤 조준경과 페리스코프를 닦았다. 조종수에게 타이거 로얄을 발견했던 밀밭 끄트머리의 생울타리 쪽의 좁은 길로 전진하라고 명령을 내리자 그는 지체없이 전진했다. 그때는 다행히도 타이거의 포탑이 우리를 겨냥하고 있지 않았다. 생울타리에 가까이 다가가면서 속도를 줄였다. 세대의 타이거가 아까 봤던 위치에 있었다. 타이거 로얄과 내가 원래 탔던 발리라게(Ballyraggett)’는 충돌한 채로 멈춰 있었다. 첫번째 목표는 타이거 로얄이었다. 초탄은 너무 높이 날아갔다. 포수가 떨고 있었다. 두 번째 탄이 타이거 로얄을 맞췄다. 그 다음에는 발리라게를 쏴서 적이 회수하거나 조종하지 못하게 했다. 다른 세대의 타이거가 내가 탄 파이어플라이쪽으로 포탑을 돌리고 있어서 생울타리를 따라 100피트 정도 이동한 뒤 다시 적 전차가 보이는 위치로 이동했다. 이때 적 전차의 포탑은 정면을 향하고 있었다. 우리는 네 발의 포탄을 발사했고 이 중 두발이 명중했다. 타이거 한대가 다시 우리쪽으로 포탑을 돌렸다. 사격 위치를 바꾸기 위해 길 쪽으로 후퇴했다.

불타는 셔먼 전차쪽으로 다가가자 구덩이에서 불 붙은 허수아비 처럼 보이는 세개의 형상이 튀어나왔다. 하빈슨 하사와 그의 사수, 장전수였다. 우리는 이들을 셔먼의 엔진 데크 위에 태우고 전속력으로 밀밭을 가로질러 후퇴했다. 연대 구호소를 발견했는데 거기에는 군의관 립만(Ripman) 박사의 의료진이 있었다. 하빈슨과 다른 두명의 승무원은 치료를 받았다. 이날 밤 하빈슨 하사는 성형외과 전문의 매킨도(McIndoe)씨가 있는 링필드의 화상전문병원으로 후송되었다. 하빈슨 하사는 그후 2주 정도 더 생존했으며 그의 어머니와 누나에게 말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신의 50%에 심한 화상을 입어서 결국 목숨을 잃고 말았다. 셔먼 전차는 워낙 불에 잘 타다 보니 그런 경험을 한 사람이 많았다. 우리는 토미 쿠커라는 스토브로 요리를 하곤 했는데 독일군은 이걸 가지고 섬뜩한 농담을 했다. 셔먼 전차에 토미 쿠커라는 별명을 붙인 것이다.”  
 
고어맨의 증언을 신뢰하지 않는 쪽에서는 고어맨이 말년에 한 증언이 초기의 증언과 조금 차이가 있다는 점을 미심쩍게 생각합니다. 고어맨의 회고록이 좀 부정확한 점도 비판을 받습니다. 그는 노년에 노르망디 전역 당시 제503중전차대대 3중대에서 소대장으로 있었던 로젠(Richard Freiherr von Rosen)을 만나 이때의 전투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고어맨의 회고록에는 부대명 부터 틀려있습니다. 503중전차대대를 제204중전차대대라고 쓰고 있는 것이죠.4) 노년에 기억력이 감퇴해서 이런 착오가 있었던 것인지는 모르나 고어맨의 증언에 의문을 표하는 측에서는 이런 오류를 지적하기도 합니다. 물론 타이젠도 자신이 탔던 전차의 차량번호를 잘못 기억하는 등의 오류가 있습니다.5) 두 사람의 증언을 검증할 수 있는 자료가 좀 더 있으면 결론을 보다 확실히 내릴 수 있겠죠. 
 
대립하는 두가지의 주장이 있는데 고어맨 쪽은 최소 두대의 전차에 탄 승무원들이 증언을 해 주었고 훈장 수여 심사에서도 이것을 받아들였다는 점이 유리합니다. 반면 타이젠의 증언도 논리적이고 무엇보다 독일군의 대전차포 배치현황 등 그의 증언을 뒷받침할 정황 증거도 있습니다. 일단 저는 약간 유보적인 입장에서 고어맨의 주장을 지지하는 쪽인데 122호 전차의 피격 상태를 자세히 분석한 보고서만 하나 있어도 이렇게 헷갈리지는 않을 듯 싶습니다.

 
 
1) Stephen Napier, The Armored Campaign in Normandy, June~August 1944, (Casemate, 2015), p.221.
2) Ian Daglish, Operation Goodwood(Pen and Sword, 2004), pp.163~166.
3) John Gorman, The Times of My Life(Pen and Sword, 2003), pp.38~40.
4) John Gorman, Ibid., p.51.
5) Franz-Wilhelm Lochmann(Hrsg.), Erinnerung an die Tiger-Abteilung 503 - Die schwere Panzerabteilung 503 an den Brennpunkten der Front in Ost und West(Verlaghaus Würzburg - Flechsig). p.426.
 
 

2017년 6월 13일 화요일

만헤이 전투에 대한 뻘글


근자에 먹고사는 문제로 업데이트가 전혀안되고 있어 민망하군요. 블로그에 밀덕썰 푸는게 소소한 삶의 재미 중 하나인데 말입니다.

예전에 어디에 투고하려고 썼던 뻘글 한 편 투척합니다. 만헤이 전투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원래 연재하려 했던 곳의 특성상 자료출처나 주석은 없습니다. 뭐, 전부 다 제 블로그에서 오래전에 했던 이야기이니 이곳을 꾸준히 들르신 분들이라면 지겨우시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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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크만의 기묘한 모험


독일군의 야심찬 아르덴느 공세가 미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좌절되어 가고 있던 1944 12 24, N15도로가 지나가는 교통 요충지인 만헤이(Manhay)가 독일 무장친위대 제2기갑사단 다스 라이히(Das Reich)’에 점령됐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편찬된 미육군의 공간사에서는 이날 밤 독일군이 노획한 셔먼 전차를 앞세우고 미군으로 위장해 만헤이를 점령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독일측 참전자들의 증언이 공개되면서 만헤이 전투는 미육군의 설명과는 다르게 전개됐음이 밝혀졌다. 이날 만헤이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아르덴느 전투가 시작될 무렵 다스 라이히사단은 제6기갑군의 예비대로 대기하고 있었다. 1944 12 19, B집단군 사령관 발터 모델 원수는 예비대로 대기하고 있던 다스 라이히사단을 투입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 무렵 독일군을 괴롭히던 고질적인 연료부족 때문에 다스 라이히사단은 투입 명령을 받고도 이동을 할 수 없었다. ‘다스 라이히사단에 대한 연료보급은 12 22일 오전이 지나서야 마무리 되었다. 보급을 마친 다스 라이히사단은 N15 도로를 따라 북상하다가 바하끄 쁘헤듀흐(Baraque Fraiture)에서 미 82공수사단 325글라이더 보병연대 2대대와 여기에 배속된 미 3기갑사단 32전차연대 3대대 소속의 1개 전차소대의 저항에 부딛혔다. ‘다스 라이히전차연대 7중대의 4호전차와 미 32전차연대 3대대의 셔먼 전차간에 전차전이 벌어졌다. 독일측은 4대의 4호전차를 잃었고 미군은 11대의 셔먼전차와 다수의 차량을 상실하고 바하끄 쁘헤듀흐에서 퇴각했다. 그러나 23일부터 24일까지 미육군항공대의 대대적인 공습으로 만헤이를 목표로 한 독일군의 진격은 저지되었다. 일부 독일 전차병들은 끊임없는 공습으로 공황상태에 빠져 전차를 버리고 도망치기까지 했다. 여기에 바하끄 쁘헤듀흐를 탈환하기 위해 미 3기갑사단과 82공수사단이 병력을 증원하면서 독일군은 더욱 곤경에 빠졌다.

결국 독일군은 미군의 공습을 피해 야습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다스 라이히전차연대장 루돌프엔셀링(Rudolf Enseling) SS중령은 만헤이 방면에 대한 야습에 예비대로 대기하고 있던 1대대 4중대를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4중대는 경험이 풍부한 장교였던 오르트빈 폴(Ortwin Pohl) SS대위가 지휘하고 있었다. 폴 대위는 우수한 지휘관이자 전차 에이스였다. 그는 노르망디 전선에서 12대의 미군 전차를 격파한 바 있었다. 그리고 그의 부관이 바로 유명한 전차에이스 에른스트 바르크만(Ernst Barkmann) SS상사였다. 바르크만 상사는 노르망디 전투에서 큰 활약을 했으며 특히 쿠탕스 가도의 전투로 명성을 떨쳤다. 1소대는 아르덴느 공세 직전 임관한 크노케(Heinrich Knocke) SS소위가, 2소대는 비스만(Alfred Wissmann) SS소위가, 3소대는 경험이 풍부한 부사관인 프란츠 프라우셔(Franz Frauscher) SS원사가 지휘하고 있었다. 각 소대는 모두 5대의 판터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중대본부는 폴 대위의 402호차와 바르크만 상사의 401호차 2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또한 4중대를 지원하기 위해 만프레트 하게샤이머(Manfred Hargesheimer) SS중위가 지휘하는 2중대 소속의 판터 6대가 4중대에 배속됐다. 그리고 전차를 지원하기 위해 제3SS기갑척탄병연대 16중대(공병중대)가 배속됐다.

1638분에 4중대의 전차들은 오데뉴(Odeigne)에 집결해 해가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공격의 선봉에 서는 것은 베테랑인 프라우셔 원사가 지휘하는 3소대였다. 3소대의 뒤에는 중대본부가 따랐고 그 뒤에는 2소대, 그리고 최후위에는 경험이 부족한 1소대가 배치됐다.
한편 4중대의 정면에는 미 3기갑사단의 올린 브루스터(Olin F. Brewster) 중령이 지휘하는 TF브루스터가 배치되어 있었다. TF브루스터는 3기갑사단 32전차연대 소속의 3개 전차소대, 36기계화보병연대 I중대 병력 일부, 82공수사단 509강하연대 병력 일부, 그리고 75보병사단 290보병연대 C중대 등 잡다한 부대로 급조된 전투단이었다.

오후 10, 예정대로 공격이 개시됐다. 만헤이 방면으로 북상하던 4중대는 곧 TF브루스터 소속의 전차들과 격돌했다. 짧지만 격렬한 전투가 전개됐고 프라우셔 원사의 판터가 피격됐다. 미군은 셔먼 전차 두대를 잃고 북쪽으로 후퇴했다. 4중대는 잠시 진격을 멈추고 재정비에 들어갔으며 프라우셔 원사는 지휘를 위해 전차를 바꿔탔다.

그런데 혼란의 와중에 상황 전달을 받지 못한 바르크만 상사는 중대가 잠시 진격을 멈췄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단독으로 북상했다. 바르크만 상사는 자신이 낙오됐다고 생각한 나머지 아군을 만날 때 까지 계속 북쪽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군이 아니라 만헤이를 방어하고 있던 미 7기갑사단 A전투단 40전차대대 소속의 셔먼 전차였다. 셔먼 전차장 마티어스(Mathias) 하사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바르크만의 판터를 아군의 셔먼 전차로 착각했다. 남쪽에는 아군이 배치되어 있었으니 당연한 것 이었다. 바르크만 상사는 마티어스 하사의 셔먼 전차를 프라우셔의 판터라고 착각해 그 옆에 정지하고 말을 걸었다. 마티어스 하사는 갑자기 독일어가 들리자 당황해서 포탑 안으로 들어가 해치를 잠궈버렸다. 바르크만도 상대의 반응에 당황했다. 옆에 있는 전차를 다시 살펴보니 후미등이 미군의 붉은 색이 아닌가! 판터의 후미등은 녹색이었다. 당황한 바르크만은 인터폰에 소리를 질렀다.

포수! 옆에 있는 전차는 적 전차다! 쏴라!(Richtschütze! Panzer neben uns ist ein Feindpanzer! Abchießen!)“

사수인 호르스트 포겐도르프(Horst Poggendorf) SS병장도 당황해서 소리를 질렀다.

쏠 수가 없습니다! 포탑을 돌릴 수 없어요!(Abschießen geht nicht! Turmschwenkwerk klemmt!)“

두 대의 전차가 너무 가까이 붙어있다 보니 판터의 포신이 걸려서 포탑을 회전 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이때 판터 조종수인 그룬드마이어(Grundmeyer) SS상병이 순발력을 발휘했다. 포탑을 돌릴 수 있도록 판터를 재빨리 후진 시킨 것 이었다. 포겐도르프 병장도 때를 놓치지 않고 셔먼을 격파했다. 놀랍게도 마티어스 하사를 비롯한 셔먼의 승무원들은 살아남았는데 근거리에서 발사된 판터의 포탄이 셔먼의 후부까지 관통해 버리는 바람에 내부에는 피해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티어스 하사는 부상을을 입은 포수를 구출해 탈출했다.

이제 바르크만은 자신이 적진 한가운데에 고립됐음을 깨달았다. 그런데 그는 이 상황에서 그대로 전진하는 것을 택했다. 마티어스 하사의 셔먼을 격파하고 이동하던 바르크만의 앞에 제814대전차대대 B중대 소속의 M10 구축전차 두 대가 나타났다. 이들도 바르크만의 판터를 아군의 셔먼으로 오인해 사격을 가하지 않았다. 포겐도르프는 신속하게 사격을 가해 두 대의 M10을 격파했다. 바르크만은 미군 전차가 계속해서 나타나자 속도를 줄이고 천천히 이동하기로 했다. 다시 전진하던 바르크만의 앞에 제40전차대대 C중대 소속의 셔먼 아홉대가 나타났다. 바르크만은 천연덕스럽게 계속 이동했고 미군들은 바르크만의 전차를 아군 전차로 생각해 한 발의 사격도 가하지 않았다. 바르크만은 그곳을 벗어나 만헤이 교차로에 도착했다. 바르크만은 원래 그랑므닐 방면으로 가려고 했으나 셔먼 전차 세대가 그랑므닐 방향에서 오는 것을 보고는 충돌을 피하기 위해 그대로 만헤이로 돌입하기로 했다. 만헤이는 철수를 준비하는 미군 차량으로 북적이고 있었다. 미군은 철수 준비로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바르크만의 판터가 만헤이에 돌입했을 때도 한동안은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정체를 들키지 않을 수는 없었다. 미군들은 갑자기 만헤이 한 복판에 독일 전차가 나타난 것을 깨닫고 혼란에 빠졌다. 바르크만은 앞에서 다가오던 지프를 그대로 깔아뭉갠 뒤 전속력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미군 운전병들도 질주하는 판터를 피해 차량을 모느라 우왕좌왕했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미군 전차들이 바르크만의 셔먼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한대의 M5 스튜어트가 판터의 앞을 막았으나 바르크만의 판터는 그대로 스튜어트를 들이받고 전진했다. 그리고 포탑을 6시 방향으로 회전시켜 추격해 오는 미군 전차들을 차례대로 격파하기 시작했다. 바르크만의 판터는 만헤이를 벗어나 마을 외곽의 숲으로 달아났다. 바르크만은 혼란에 빠진 미군이 추격을 멈춘 것을 확인한 뒤 숲 속에 숨기로 했다. 판터의 엔진이 이상을 일으켜 더 이상 이동하는 것이 위험했다.

바르크만이 만헤이에서 좌충우돌 하는 동안 전열을 가다듬은 4중대는 다시 전진하기 시작했다. 이때 미 40전차대대 C중대 소속의 셔먼 한 대가 4중대의 판터들을 향해 사격을 퍼부었다. 프라우셔는 즉시 조명탄을 발사한 뒤 이 셔먼을 격파했다. C중대의 나머지 셔먼 전차들도 순식간에 격파됐다. 미군 전차병들은 대부분 전차 밖에 나와 휴식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완전한 기습이었다. C중대를 전멸시킨 4중대는 만헤이로 돌입했다. 그러나 바르크만이 이미 한바탕 난리를 피운 뒤라 미군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또 다시 프라우셔의 판터가 셔먼의 근거리 사격에 피격됐다. 프라우셔의 뒤를 따르던 판터가 즉시 반격을 가해 셔먼을 격파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프라우셔와 승무원들은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프라우셔는 다시 전차를 갈아타고 지휘를 해야 했다.

4중대는 만헤이를 점령한 뒤 다시 방향을 돌려 그랑므닐 쪽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628대전차대대 소속의 M10 구축전차들이 포격을 가해 3소대의 베테랑 전차장인 오스카 피셔의 판터가 격파되고 피셔도 전사했다. 피셔의 판터는 도로를 막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군은 공격 기동을 하기가 어려웠다. 그랑므닐을 둘러싸고 포격전이 전개되는 와중에 4중대장 폴 대위가 부상을 입고 후송됐다. 폴 대위의 중대장 차량은 크노케 소위의 포수가 인계했다. 중대장 차량은 만헤이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피셔의 판터를 우회하는 와중에 판터 네 대가 미군의 대전차 지뢰를 밟고 기동불능이 됐다. 4중대의 공격이 난관에 부딛혔다. 4중대는 미군의 방어를 물리치고 그랑므닐 서쪽의 에흐제(Erezze)에 도착해 다시 재정비에 들어갔다. 폴 대위가 후송됐기 때문에 4중대에 배속되어 있던 하게샤이머 중위가 지휘권을 인계받았다. 그런데 하게샤이머 중위도 낙오된 미군의 총격에 어깨에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다. 결국 4중대의 간부들은 다시 그랑므닐로 후퇴해 방어태세를 갖추기로 결정했다.

12 24일 밤의 전투로 7기갑사단 A전투단은 21대의 전차를 잃었고, 40전차대대 A중대장 앨런(Malcolm O. Allen) 대위가 포로가 되고 D중대장 휴즈(Walter J. Hughes) 대위가 전사하는 등 420여명의 인명 손실을 입었다.

한편, 숲속에 숨어있던 바르크만은 상황이 정리된 것으로 보이자 다시 만헤이로 돌아왔다. 만헤이에는 중대장의 판터가 대기하고 있었다. 바르크만은 중대장차의 임시 전차장과 상의를 한 뒤 건물 사이에 전차를 숨기고 방어 태세를 취하기로 했다. 12 25일 오전, 미군은 만헤이를 탈환하기 위해 7기갑사단 31전차대대 B중대를 투입했다. B중대 소속의 셔먼 다섯대는 만헤이를 향해 전진하다가 바르크만을 비롯한 4중대 본부 판터 두대의 포격으로 전멸했다. 잠시 뒤 올프(Emerson Wolfe) 대위가 지휘하는 본대의 셔먼 10대가 도착했으나 앞서 투입된 선발대가 전멸한 것을 보고는 공격을 머뭇거렸다. 만헤이 탈환을 지휘하기 위해 도착한 7기갑사단 B전투단장 브루스 클라크(Bruce Clark) 준장은 올프 대위에게 즉시 공격하라고 명령했으나 올프 대위는 판터가 매복하고 있는 상황에서 엄폐물 없는 개활지로 돌격하는 것은 불리하다고 설명했다. 클라크 준장은 올프 대위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해 공격 명령을 취소했다. 한편 그랑므닐 방면을 방어하고 있던 4중대의 주력은 TF맥조지(McGeorge) 소속의 셔먼 전차 17대와 교전해 15대를 격파하는 피해를 입혔다.


미군은 만헤이와 그랑므닐을 직접 공격하는 대신 12 25일부터 27일까지 8개 포병대대를 동원해 포격을 퍼부었다. 여기에 미육군항공대가 가세해 만헤이-그랑므닐의 독일군은 옴싹달싹 할 수 없었다. 크노케 소위의 411호차가 미군의 포격으로 격파됐다. 4중대는 포격이 뜸해진 25일 밤에 만헤이를 버리고 남쪽으로 철수했다. 바르크만의 대담한 모험으로 독일군은 만헤이를 비교적 쉽게 점령할 수 있었으나 전쟁을 운으로만 치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바르크만의 모험은 제2차 세계대전의 특이한 일화로만 남았다.

2017년 4월 12일 수요일

How the War was won (Phillips Payson O'Brien 저)

2015년에 나온 필립 페이슨 오브라이언의 How the War was won은 꽤 논쟁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오브라이언의 핵심 주장은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는 해전과 항공전에서 결정된 것이며, 동부전선은 인명손실이란 측면을 제외하면 연합군의 승리에 부차적인 존재였다는 겁니다.

오브라이언이 중요시 하는 것은 '인명손실' 보다 경제력(자본 및 자원 소비, 공업생산) 입니다. 동부전선의 지상전은 투입되는 인명이 많기 때문에 거대해 보이지만, 경제력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미미한 수준에 불과하다고 주장합니다. 예를들어 쿠르스크 전투와 그 이후 소련군의 반격에서 독일군이 입은 손실을 독일의 공업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으로 환산하면 소수점 단위의 보잘것 없는 것이었다고 단언합니다.

이 책은 본질적으로 소련의 역할이 과대평가됐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전쟁 중 소련에 대해 잔인할 정도로 비판적입니다. 특히 소련이 해전과 항공전에 기여한것은 정말 보잘 것 없기 때문에 저자의 냉소적인 서술에 소름이 끼칠 정도입니다. 오브라이언은 일본 육군항공대와 해군항공대가 소련 공군보다 기술적으로 훨씬 우수했으며 전쟁 수행에서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주장합니다. 소련 공군에 대해서는 전체 항공기 손실의 40%를 비전투 손실로 잃어버리는 수준낮은 군대라고 가차없이 비난합니다. 독일 공군이 압도적인 숫적 열세에서도 소련 공군과 대등하게 싸운 것은 틀림없는 역사적 사실인지라 오브라이언의 소련공군 비판을 반박하기는 어렵습니다. 오브라이언은 He 111이나 Ju 87 같은 구식 기체가 전쟁말기까지도 동부전선에서 쌩쌩하게 활약한 사실을 예로 들며 소련공군의 열등함을 조롱합니다. 실질적으로 한 일이 없는 소련 해군에 대한 서술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책 자체가 공해전을 중시하다 보니 일본에 대한 평가는 엄청나게 우호적입니다. 저자는 일본이 동맹국의 실질적 도움이 없는 상태에서도 1944년까지 공업생산을 크게 증대시킨 점을 높게 평가합니다. 소련은 렌드 리스를 통해 방대한 기술, 자원 지원을 받았지만 일본은 거의 자체적인 자원만으로 미국과 공해전을 수행할 수 있는 공업생산을 했다는 겁니다. 소련이 일본보다 수십배 많은 전차를 생산했지만 지상장비 생산은 일본이 건조한 전함과 항공모함에 비하면 보잘것 없는 것이라고 평가하기까지 합니다.

오브라이언은 미국과 '영국'의 공해전이 전쟁 승리의 핵심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기존의 연구들이 비효율적이고 잔인하기만 했다고 비난하는 영국공군의 야간 전략폭격도 독일의 전시 산업생산을 붕괴시키는데 일조한 성공이라고 높게 평가합니다. 1944년 미육군항공대의 성공적인 전략폭격에 대한 평가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고 대독전에서도 대서양 해전이 독소전쟁 보다 더 결정적이었다고 주장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찝찝하게 보는 책입니다. 어찌보면 러시아를 폄하하기 위한 정치적 의도로 가득찬 반동적인 시각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하지만 산업화된 전쟁을 바라보는 독특한 시각을 가졌다는 점에서 세계대전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한번 읽어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됩니다.

2017년 3월 29일 수요일

레마겐 교두보 전투당시 미3군단장 밀리킨 소장 해임에 관한 잡설

포스팅 “패튼의 전과 과장에 대한 하지스의 비난”에 문기야님이 달아주신 댓글을 읽으니 레마겐 교두보 전투 당시 미3군단장 밀리킨 소장이 해임된 사건에 관해 이야기를 하고 싶어지는군요.


먼저 사건의 개요를 살펴보는게 좋겠습니다. 미육군 공간사 The Last Offensive는 레마겐 교두보를 둘러싼 전투와 밀리킨 소장John Millikin의 해임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1군사령관 하지스 장군은 작전 초기 부터 레마겐 철교와 교두보를 담당한 제3군단장 밀리킨 장군의 지휘를 불신하고 있었다. 하지스와 제1군 사령부의 참모장교들은 라인강 양안에 배치된 미군부대에 대한 통제가 형편없으며 라인강 동안의 미군부대 배치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부족하다고 격렬하게 비판했다. 3월 9일 아이젠하워 장군이 라인강 동안의 교두보를 점진적으로 확대하라는 명령을 내렸음에도 하지스 장군은 제3군단의 진격이 느리고 독일군이 육안관측으로 레마겐 철교에 포격을 유도할 수 없도록 공세를 펼치지도 못하고 있다며 짜증을 냈다. 

밀리킨 장군은 3월 9일 제9기갑사단장 레오나드 장군에게 레마겐 철교 일대의 모든 군사활동을 통제하도록 하고 라인강 동안에 배치된 미군부대는 모두 제9보병사단장 크레이그 장군이 관할하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하지스 장군의 불평은 끊이질 않았다. 제3군단은 얼마전 까지 패튼의 제3군 휘하에 있었기 때문에 제1군 사령부는 밀리킨과 원활한 관계가 아니었다. 하지스와 그의 참모진은 공공연하게 “레마겐 교두보 일대의 지휘를 7군단장 콜린스 장군에게 넘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밀리킨 장군이 직면한 문제는 심각했다. 그는 직접 레마겐 다리까지 나가 지휘했지만 라인강 동안에 배치된 미군부대는 시간에 맞춰 정확한 보고를 하지 못했다. 이렇게 우발적으로 실시된 작전의 경우 초기에는 작전에 필요한 물자와 지원 부대를 충분히 확보할 수 없었다. 특히 통신부대가 부족했다. 차량통행이나 포격으로 레마겐 철교에 부설한 전화선은 자주 끊어졌고, 파편이나 라인강의 빠른 물살 때문에 강을 따라 가설한 전화선도 제 기능을 못했다. 레마겐 철교가 혼잡했기 때문에 연락장교들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고 무전통신도 큰 도움이 되질 못했다. 

레마겐 교두보로 재배치된 보병부대들은 도착하는 대로 시급히 필요한 지구에 축차적으로 투입됐다. 심지어 연대단위 편성 조차 유지하지 않은채 투입하기도 했고 여러 사단의 부대들이 뒤죽박죽으로 섞이는게 다반사였다. 작전 자체가 짧은 시간동안 우발적으로 일어난데다 지형 문제까지 있는 상태에서 이런식으로 부대를 운용하니 문제는 더 커졌다.
밀리킨 장군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교두보를 신속하게 확장하는 것 보다는 체계적이로 점진적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3월 8일에 3단계에 걸쳐 교두보를 확장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제1단계는 레마겐 철교의 북쪽과 남쪽으로 2.5마일을 진격해 독일군이 더이상 철교를 소화기로 공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2단계에 확장의 목표는 독일군의 포병관측을 중단시키는 것 이었다. 마지막 3단계는 북쪽으로는 본Bonn, 남쪽으로는 안더나흐Andernach, 그리고 동쪽으로는 고속도로까지 진출해 독일군이 교두보를 더이상 포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목표였다.

(중략) 

밀리킨 장군은 교두보가 확대되는 경과를 바르게 파악하고 있지는 못했지만 교두보의 부대를 가장 효과적으로 운용하려면 란Lahn 강 유역과 프랑크푸르트Frankfurt-카셀Kassel 회랑으로 진격해야 한다고 판단해 군단 주공을 동쪽과 동남쪽에 두기로 했다. 이것은 앞서 브래들리와 아이젠하워 장군도 동의한 것 이었다. 밀리킨은 이렇게 해야 독일군이 레마겐 철교에 포격을 유도하는 것을 가장 빨리 중단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스 장군은 제3군단이 제일 먼저 북쪽으로 진격해 콜린스 장군의 제7군단의 도하점을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작전 4일차인 3월 11일까지도 이 점을 밀리킨에게 명확히 설명하지 못했다. 이날 밀리킨은 처음으로 철교를 건너 라인강 동안의 교두보로 갔다. 하지스는 3군단이 북쪽으로 진격해야 하며 주공을 이 방향에 두어야 한다고 몇 번 언급하기는 했지만 구체적인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물론 밀리킨은 이정도의 언급만으로 하지스의 의도를 이해했다. 그는 제78보병사단의 정면을 축소하고 제9보병사단의 대부분을 북동방향으로 진격하도록 했다. 다음날인 3월 12일 교두보 남쪽과 동남쪽을 인계받기 위해  제99보병사단의 주력이 도착했다. 밀리킨은 제99보병사단의 부대들을 원 소속사단으로 복귀시키도록 했다. 하지만 이미 북쪽으로 신속히 진출할 수 있는 기회는 사라졌다.

(독일군의 반격에 대한 서술은 생략)

바이어라인Fritz Bayerlein 장군은 제130보병사단을 공격에 사용할 수 없다면 미군에 대한 효과적인 역습을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라인강을 건넌 미군이 레마겐 교두보에 증원군을 더 투입한다면 미군을 격퇴할 만한 병력을 동원하는게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모델 원수의 판단 덕분에 밀리킨 장군이 주공을 투입한 지구에서 미군의 진격은 둔화됐다. 이때문에 하지스 장군은 계속해서 밀리킨의 지휘방식에 대한 불만을 표출했다.

(독일군의 반격에 대한 서술은 생략) 

그동안 레마겐 교두보는 꾸준히 확장됐지만 그 속도는 느렸다. 하지스 장군은 밀리킨 장군의 지휘방식을 여전히 불신했다. 그는 3월 15일에 제12집단군사령관 브래들리 장군을 만나 밀리킨을 해임하는 방안을 의논했다. 

“레마겐 교두보에서 싸우고 있는 우리 장병들은 매우 존중합니다. 하지만 지휘관이 문제입니다.” 

브래들리는 하지스의 주장에 동의하고 밀리킨의 후임을 알아보라고 한 뒤 제1군 사령부를 떠났다. 이틀 뒤 제90보병사단을 지휘했던 밴 플리트 소장이 제1군 사령부에 도착해 제3군단장에 임명됐다. 하지스는 오후 3시가 되기 조금 전 밀리킨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쁜 소식이 있소.” 

그리고 하지스는 밀리킨이 제3군단장에서 해임됐다고 통보했다. 밀리킨은 하지스가 말을 마칠때 까지 기다렸다. 

“사령관님. 저도 나쁜 소식이 있습니다. 레마겐 철교가 무너졌습니다.” 

Charles B. MacDonald, The Last Offensive, (Center of Military History, US ARmy 1993) , pp.223~229.



이 일화를 보면 하지스라는 인물은 꽤 주관이 강한 인물이었던 듯 합니다. 밀리킨 장군이 애초에 제3군단 주공을 동쪽과 동남쪽으로 한 것은 제12집단군사령관 브래들리 장군의 의도였기 때문입니다. 하지스가 상급 사령부의 의도에 반하여 자신의 의견을 관철한 것이죠. 미육군 공간사의 서술을 보면 확실히 밀리킨 소장이 억울한 측면이 있습니다.

밀리킨 소장의 해임이 결정된 3월 15일에 있었던 브래들리와 하지스의 회의에 대해서 조금 더 설명을 하는게 좋겠습니다. 1945년 3월 15일자 제1군 사령관 일지는 이 사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오경 브래들리 장군은 참모장 앨런 장군을 대동하고 제1군사령부를 방문했다. 브래들리 장군은 어제 대장으로 진급했지만 아직 별 세개만을 달고 있었다. 브래들리 장군과 하지스 장군, 그리고 참모진은 사령관 집무실에서 한시간 반 가량 비공개로 회의를 한 뒤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외출했다. 브래들리 장군은 라인강 서안에서 독일군의 저항이 모두 끝나기 전에는 교두보를 동쪽으로 확대하는데 힘을 쏟아서는 안된다는 연합군최고사령부SHAEF의 공식 방침에 동의한다고 말했다. 하지스 장군은 이 방침에 반대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몽고메리의 제21집단군이 연합군최고사령부에 전화를 걸어 북쪽에서 대규모 도하를 하기 전에 ‘양동작전’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건을 두고 이야기를 나눴다. 몽고메리가 전화를 걸고 5분 뒤에 미 제1군이 라인강을 도하해 교두보를 확보했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그는 더이상 양동작전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참모장 앨런 장군은 패치 장군이 패튼 장군에게 보낸 전문 이야기를 꺼냈다. 패치와 패튼은 서로 즐겁게 장난을 쳤다. 패치 장군은 “제3군이 라인강에 꼴지로 도착한 것을 축하함. 그럴 줄 알았음.”라는 전문을 보냈다. 패튼 장군은 답신으로 “라인강을 첫 번째로 도하할 부대가 전문을 보내줘 정말 감사함.” 그리고 브래들리 장군은 독일 장군 세명이 항복하기 위해 미군 부대를 찾아 돌아다녔다는 농담을 꺼냈다. 독일 장군들은 대공포병들을 발견하고는 그들에게 적의가 없으며 항복하겠다는 뜻을 보이려고 루거 권총을 땅바닥에 던졌다. 그러자 미군들은 루거 권총을 얻으려고 득달같이 달려들었지만 장군들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고. 

우리는 연합군최고사령부가 레마겐 교두보 확대를 원하지 않았으며 기존에 세워둔 계획이 어그러졌다는 이유로 제1군이 라인강을 도하했다는 소식을 기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좋았던 분위기가 나빠졌다. 연합군최고사령부는 북쪽에서 라인강을 도하하는 쪽을 선호했고 우리 제1군이 확보한 교두보에 중점을 둘 의도가 없음이 확실했다.  

그리고 하지스 장군은 브래들리 장군과 밀리킨 장군을 해임하고 새로 제3군단장을 임명하는 문제를 상의했다. 두 사람은 밀리킨 장군이 유능하긴 하지만 돌발상황에 대응하는 능력이 떨어지고 하지스 장군이 직접 개입하기 전 까지는 레마겐 교두보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는 점에 동의했다. 밀리킨 장군은 패튼 장군 휘하에 있을때도 의견 충돌이 있었음이 확실하다. 그래서 패튼은 제3군단을 제1군에 떠넘긴 것이다. 새로운 제3군단장 후보로는 하몬Ernest N. Harmon, 밴 플리트, 개피Hugh Joseph Gaffey 등이 거론됐다. 하지스 장군은 하몬 소장을 선호했지만 브래들리 대장은 제15군 사령부가 하몬 장군의 인사이동에 찬성할지 의문이라고 답했다. 제3군단은 아직 하지스 장군의 의도대로 고속도로까지 진출하지 못했지만 0.5마일만 더 진격하면 되는 상황이다. 오늘 제99보병사단이 돌출부 남쪽에서 큰 성과를 거뒀다. (제9보병사단) 60보병연대는 로르샤이트Lorscheid를 점령했으며 (제9보병사단) 47보병연대는 적이 강력하게 방어하는 채석장을 점령하고 장교 2명과 사병 100명을 포로로 잡았다. 교두보 전체에 걸쳐 약 2,000야드를 진격했다. 하지스 장군은 제9보병사단의 성과가 평소 사단의 실력에 미치지 못한다고 약간 불만을 표했다. 하지스 장군은 저녁에 이렇게 말했다. 

“레마겐 교두보에서 싸우고 있는 우리 장병들은 매우 존중합니다. 하지만 지휘관이 문제입니다.” 

William C. Sylvan and Francis G. Smith Jr.. Normandy to Victory: The War Diary of General Courtney H. Hodges and the First U.S. Army (The University Press of Kentucky, 2008) Kindle Locations 4619-4639.


이 일지에서도 하지스 장군이 상급 사령부에 상당한 불만이 있었음이 잘 나타납니다. 제1군이 라인강돌파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해야 하는데 영국군인 몽고메리를 정치적으로 배려하는 듯한 움직임에 불만을 나타내고 있지요. 그리고 최대한 점잖은 표현을 쓰고 있지만 제3군단장 밀리킨 소장에 대해서도 격렬한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국내에도 소개된 밴 플리트 평전 『승리의 신념: 밴 플리트 장군 일대기』에서는 밀리킨의 보직해임에 대해 미육군 공간사 보다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살짝 다른 서술이 하나 보입니다. 이 부분도 직접 인용을 하겠습니다.



바로 이날 제3군단장 밀리킨 장군은 보직해임되었다. 밴 플리트 장군은 영국에서 근무하는 동안에도 하지스 장군과 존 밀리킨 장군간의 불협화음을 잘 알고 있었다. 밴은 과거에 패튼 장군이 자신 앞에서 ‘벌지’ 전투에 임하는 밀리킨의 소극적인 태도를 비난한 사실을 기억하였다. 이제 밴 플리트 장군은 밀리킨이 물러나고 자신이 그 공백을 메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밴은 또한 이러한 상황 속에서 지휘권인수가 좋지 않은 경우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다음날 아침 일찍 제1군사령부로 가기 위해 자신의 전용비행기를 준비시켰다. 브래들리의 전화를 받은 바로 그 다음날 아침, 밴 플리트 장군은 가볍게 짐을 꾸리고 전속부관과 운전병을 대동한 채 지휘관 전용항공기에 탑재 가능한 지프 1대만을 싣고 제1군사령부로 향했다. 

밴 플리트가 도착하여 신고를 마치자 하지스 중장은 그에게 밀리킨 장군을 대신하여 제3군단장의 임무를 수행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밀리킨은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어.”라고 하지스가 말했다. 이에 밴은 “밀리킨도 제가 제3군단의 지휘권을 인수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하지스는 “아니, 자네가 가서 직접 말하게. 밀리킨에게 제1군사령부로 출두하라고 전해주게.”라고 대답하며 급한 업무를 핑계로 돌아섰다. 밴은 자신이 직접 밀리킨 장군에게 좋지 않은 소식을 전해야만 한다는 사실에 몹시 언짢았다. 또한 이러한 방식의 보직해임은 군 전통에 어긋나는 것 이었다. 브래들리나 하지스 둘 중 한 사람이 밀리킨에게 전화를 걸어 그의 보직해임을 통보하거나, 보다 나은 것은 직접 밀리킨을 찾아가 보직해임시키는 용기를 보여줬어야 했다. 밴은 또한 그 자신이 밀리킨보다 후임이고, 몇 개월 전 제3군단의 벌지공격 때만 해도 제90사단장으로서 그의 휘하에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난처해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밴은 지휘권을 인수하기 위해 즉시 이동하였다. 

밴 플리트는 지휘소에 있던 밀리킨을 찾아가 보직해임의 소식을 전했다. 밴은 당시 밀리킨의 표정에 나타났던 충격받은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직업군인으로서 보직해임을 당한다는 것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비극적인 상황이 아닐 수 없다. 특히 고급장교의 경우 그 충격은 말할 것도 없다. 그것은 보통 군 생활이 끝장났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보직해임의 경우는 씻을 수 없는 오명을 남긴다. 설사 정황에 비추어 볼 때, 보직해임이 부당했다고 판단되더라도 그 오명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밴은 솔직히 밀리킨의 보직해임이 정당하다고 확신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보직해임으로 자신이 득을 보게 되는 상황에서 밀리킨에게 그 소식을 직접 전해야하는 일에 몹시 당혹해 하였다. 

밴은 불편한 심정으로 밀리킨과 함께 군단 지휘소에 있으면서 이러한 소식을 밀리킨이 매우 기분 나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서 있던 밀리킨은 이유가 무엇이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밴은 문제가 무엇인지 그리고 보직해임의 이유가 무엇인지 아무 것도 모른다는 뜻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밀리킨은 하지스에게 전화를 걸었고, 하지스는 그의 보직해임을 확인해 주었다. 끝내 밀리킨은 전화에다 대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런데 여기도 반갑지 않은 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레마겐의 철교가 붕괴되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제1군사령부의 부대일지에는 3월 17일 하지스 장군이 밀리킨에게 전화를 걸어, 그가 보직해임되었고 후임으로 밴 플리트가 결정되었다는 사실을 통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밴이 밀리킨의 지휘소에 도착하기 전에 이 전화가 걸려온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밀리킨이 하지스 장군에게 확인전화한 것을 그렇게 기록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폴 F. 브레임/육군교육사령부 번역실 옮김, 『승리의 신념 : 밴 플리트 장군 일대기』(봉명, 2002), 193~194쪽.


다시 미1군사령관 일지를 인용하겠습니다. 여기에는 위의 사실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후 두시에 하지스 장군은 지휘소에서 밴 플리트 장군을 만나 환영인사를 하고 약 한시간 동안 대화를 나눴다. 하지스 장군은 브래들리 장군이 밀리킨 소장의 후임을 보내준 것을 아주 기뻐했다. 오후 2시 50분에 하지스 장군은 밀리킨 장군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쁜 소식이 있소.” 그는 밀리킨에게 해임 사실을 알리고 원한다면 내일 군단사령부를 떠나도 상관없다고 말했다. 하지스 장군의 말이 끝나자 밀리킨 소장이 말했다. “사령관님. 저도 나쁜 소식이 있습니다. 레마겐 철교가 무너졌습니다.” 

William C. Sylvan and Francis G. Smith Jr.. Normandy to Victory: The War Diary of General Courtney H. Hodges and the First U.S. Army (The University Press of Kentucky, 2008) Kindle Locations 4661-4665.


하지스의 성격을 고려하더라도 밀리킨의 해임과 그 방식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비록 벌지전투 시기 부터 군단지휘능력에 비판을 받아왔다고는 하나 레마겐 교두보 전투 자체는 무난하게 전개되고 있었고 굳이 군단장을 교체할 필요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벌지전투 당시 미국 군단장들의 지휘방식에 대해 책을 쓴 해롤드 윈튼Harold R. Winton은 밀리킨에 대해 우호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의 평가는 이렇습니다.


밀리킨이 해임된데는 그의 책임도 없지 않다. 3월 11일에 제9보병사단 참모장은 하지스 장군의 부관에게 라인강 동안의 교두보가 혼란하기 때문에 군단장이 직접 전방을 시찰하면서 상황을 통제해야 하지만, 밀리킨은 교두보에 거의 오질 않는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밀리킨이 해임된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제1군의 “일가족”이 아닌 아웃사이더였던데 있었다. 그는 좋지 못한 시기에 좋지 못한 장소에 있었던 것이다. 

Harold R. Winton, Corps Commanders of the Bulge: Six American Generals and Victory in the Ardennes,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7), pp.354~3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