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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 17일 월요일

북한 주재 소련대사 슈티코프의 1950년 6월 26일 전문

출국준비로 어수선해서 블로그질이 좀 뜸하군요;;;; 가끔씩 들러주시는 분들께 민망하니 한국전쟁과 관련된 날림번역글 하나 올려 봅니다.

이 전문은 1950년 6월 26일 평양주재 소련대사 슈티코프가 소련군 총참모부 정보부국장 자하로프Матве́й Васи́льевич Заха́ров에게 보낸 것으로 1994년 BBC가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입수한 문서입니다. 한국에서 번역출간된 라주바예프 보고서와 중복되는 내용이 많긴하지만 개전 초기 북한군의 문제를 잘 요약해서 보여주는 글 같습니다. 라주바예프 보고서는 한참 뒤에 작성되어 정리가 잘 되어있긴 합니다만 슈티코프가 작성한 이 문서는 개전 직후에 작성되어 당시의 분위기를 좀 더 잘 반영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개전 초반의 유리한 상황에서도 북한군 수뇌부의 지휘능력 부족을 질타하는 부분이 주목할 만 합니다.





1급기밀 
자하로프 동지 앞. 
직접 전달할 것.


조선인민군의 군사작전 준비와 실행 과정에 대해 보고합니다. 
조선인민군은 총참모부의 계획에 따라 6월 12일 부터 38도 접경지대에 병력집결을 시작해 6월 23일에 집결을 완료했습니다. 부대 재배치는 질서정연하게 이루어졌으며 사고는 없었습니다. 
적의 정보부서가 군부대의 재배치를 감지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계획을 그대로 실행했으며 작전 실행 시기는 비밀로 했습니다. 
사단급 작전계획과 지형정찰은 소련 고문관의 참여하에 이루어졌습니다. 
작전에 필요한 모든 준비과정은 6월 24일까지 완료되었습니다. 6월 24일 각 사단장은 작전 일시와 시간에 대한 명령을 받았습니다. 
각 부대에서는 남조선 군대가 38선을 침공하여 군사적 공격을 도발하였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조선인민군에 반격을 명령했다는 민족보위성의 명령서가 낭독되었습니다. 
조선인민군의 장교와 사병들은 반격명령을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각 부대는 6월 24일 24시 공격개시선으로 이동했습니다. 군사작전은 조선 시간으로 오전 4시 40분 개시되었습니다. 포병의 공격 준비사격은 20~40분의 직접 포격과 10분간의 탄막포격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보병은 왕성한 사기를 가지고 공격에 나섰습니다. 공격 시작 후 첫 세시간 동안 공격부대는 3~5km를 진격했습니다. 
조선인민군의 공격은 적에게 완전한 기습이었습니다. 
적은 옹진, 개성과 서울 축선에서만 강력한 저항을 했습니다. 적은 공격 첫날 12시가 지나서야 보다 조직적인 저항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첫날 전투에서 점령한 도시는 다음과 같습니다. 옹진, 개성, 신읍리(新邑里, Sinyuri, しん ゆうり) .(1943년 총참모부가 간행한 1:1,000,000 지도) 
인민군은 춘천방면에서 12km를 진격했습니다. 
동해안에서는 8km를 진격했습니다. 
공격 첫날 조선인민군 해군은 동해안에서 두 개의 상륙작전을 실시했습니다. 첫번째 상륙집단은 강릉(Korio, こうりょう) 지구에 상륙했으며 해군육전대 2개대대와 1천여명의 빨치산으로 편성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상륙집단은 울진에 상륙했으며 600여명의 빨치산으로 편성되어 있습니다. 
상륙작전은 5시 25분에 시작되었으며 성공적으로 수행되었습니다. 
빨치산 부대가 울진과 그 주변 지역을 점령했습니다. 
상륙과정에서 인민군의 함선과 남조선군의 함선 간에 교전이 있었습니다. 교전 결과 남조선군의 트롤함 한척이 격침되었고 다른 한척이 파손되었습니다. 북조선 함대는 피해가 없었습니다. 
6월 26일 인민군은 공격을 계속하여 전투를 치르면서 남조선 영내 깊숙히 전진해 들어갔습니다. 
6월 26일에는 옹진반도와 개성반도가 완전히 소탕되었으며 (인민군) 6사단은 (강화)만을 강행 도하하여 김포 비행장 방면의 인구밀집지대를 점령했습니다.  
서울 방면에서는 (인민군) 제1사단과 제4사단이 문산과 동두천을 점령했으며 제2사단은 (강원도의) 중심인 춘천(Siunsen, しゅんせん)을 점령했습니다. 
동해안에서도 진격이 계속됐습니다. 주문리(注文里, Tubuiri, ちゅうぶんり, 주문진)를 점령했습니다. 
6월 26일에는 고성 방면으로 진격하는 제12사단, 신읍리를 지나 의정부(Geisif, ぎせいふ) 방면으로 진격하는 제3사단 및 기계화여단과 하루종일 연락이 두절되었읍니다. 
북(조선군)에 대한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인민군의 작전 수행에 있어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문제를 지적할 필요가 있습니다. 
1. 군사작전이 시작되면서 각 부대가 전방으로 진격하는 동시에 상급부대에서 하급부대에 이르기까지 지휘부 간의 교신이 두절됐습니다. 인민군 총참모부는 개전 첫날 부터 전투를 지휘하지 못 했으며 단 하나의 사단과도 제대로 된 통신을 유지하지 못 했습니다.
각 부대의 지휘관들은 상급 제대의 참모부와 교신을 하려 하지 않았으며, 야전 부대와 그 상급 부대의 지휘에서는 참모진을 허가를 받지도 않고 교체했으며, 총참모부는 동해안에서 작전하고 있는 여단 및 제12사단과 교신을 하지 못했습니다. 
2. 조선인민군의 참모진은 전투 경험이 없었습니다. 소련 군사고문단이 동반하지 않은 경우에는 전투 지휘가 졸렬했으며 포병 및 전차의 운용도 형편없었고 통신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3. 그러나 우리의 군사고문관들은 조선인민군 부대 내에서 매우 헌신적으로 활동했으며 이들이 부여받은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북돋아 주었습니다. 
4. 군사작전이 개시될 무렵 북조선 인민들의 정치적인 분위기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에 대한 신뢰와 조선인민군이 승리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전반적으로 열성적이었습니다. 
6월 26일 김일성은 조선민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의 이름으로 조선 인민들에게 연설을 했으며 이 연설에서 조국의 정세에 대하여 설명했으며, 적을 섬멸하고 조선을 통일하는 과업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5. 조선인민군 지휘부는 부대간의 통신을 정상화하고 전투 지휘를 체계적으로 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 조치가 마무리되고 인민군 사령부는 철원(Tepuges, てつげん) 지구로 이동했습니다. 민족보위상(최용건), 인민군 총참모장(강건), 그리고 군사고문단장과 여러명의 장교들이 사령부로 갈 것 입니다. 
남(조선군)에 대한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 이틀간의 군사작전으로 다음과 같은 점이 드러났습니다. 
1. 적군은 저항 의지를 보여주었으며 싸우면서 남조선 내륙 깊숙히 퇴각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남조선군의 포로를 많이 잡지 못했습니다. 
2. 남조선 괴뢰정부는 후방에 있던 부대를 투입하고 있으며 인민군의 진격을 저지하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3. 첫날 조선인민군의 공세로 남조선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남조선 당국과 주한미국대사는 라디오 방송에서 담화를 발표하여 남조선 인민들이 침착하게 있을 것을 당부했습니다. 남조선군의 사령부는 남조선 군대가 승리하고 있다는 거짓 방송을 하고 있습니다.

슈티코프 
No. 358/sh 
1950년 6월 26일

2007년 11월 18일 일요일

제 3세계 인민들을 바라보는 스탈린의 시각

전세계 근로인민의 보호자이며 스승이신 강철의 대원수께서 극동 소국의 정치인 두 명을 친히 접견하고 가르침을 주셨을 때의 일화라는군요…

(전략)

더구나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이후 좌익진영 내부의 분파투쟁은 격화되었다. 반대파는 사람들에게 좌익진영의 지도층, 그 중에서도 먼저 박헌영의 명성을 실추시키기 위한 성명서와 격문, 팜플렛을 뿌렸다. 공산당과 인민당 그리고 신민당을 통합시킨다는 노선은 반대파 집단의 각별한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이 문제는 조선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독립된 나라들에서의 스탈린주의의 전후정책과 관련이 있었다. 반대파의 문건을 분석해 볼 때 통합에 대한 반대파의 저항은 원칙적인 동기가 아니라 대단히 개인적인 야심적인 동기들에 의해 일어난 것이라는 사실이 증명된다 할지라도 그 동기들의 한 가지 논거 즉 그러한 통합지시가 외부에서, 스탈린에게서 나왔다는 점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한 자료가 없으므로 나는 남편(필자인 샤브시나 꿀리꼬바의)의 얘기를 인용해 보고자 한다. 1946년 7월 남편은 미소공동위원회의 소련측 대표위원장이었던 Т. Ф. 스찌꼬프로부터 얼마 동안 서울에서 평양으로 와 있으라는 부름을 받았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김일성, 박헌영과 함께 스탈린을 만나기 위해 모스끄바로 날아갔다. 남편이 배석한 회담석상에서 여러가지 것이 논의되었다. 스탈린은 말수가 많지 않았지만 그가 말한 한 마디 한 마디는 고압적인 것 같았고 하늘에서 계시를 내리는 듯 하였다. 당시에는 이것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스탈린에게서 비공개적으로 이 회담에 대해 전해들은 남편과 우리가 놀란 것은, 좌익정당들의 통합에 관한 부분이었다. 스탈린은 공산당이 사회민주당 혹은 노동당을 표방하면서 가까운 장래의 과제만을 제기하는 것은 불가능한가라는 문제를 제기했다. 아마도 그런 문제에 준비를 못한 듯한 조선의 동지들은 그것이 가능하기는 하지만 인민들과 상의를 해봐야 한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스탈린은 그자리에서 자기 스타일대로 이해하기 어렵지 않게 무심코 말했다.

"인민이라니? 인민이야 땅 가는 사람들이잖소. 결정은 우리가 해야지."

우리가 이 문구에 대해 돌이켜 생각해 본 것은 한두번이 아니었다. 어쩌면 기록이 정확하게 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사람들은 남편에게 캐물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모든 것이 바로 그대로였다. 인민이 무엇을 생각하는지에 대한 무시도, 비록 우리와 가까운 나라라 할 지라도 엄연히 다른 나라의 내부문제를 해결할 권리가 자신에게 있다는 확신도 모두 그대로였다. 그것은 하찮은 것이 아니냐고 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얼마나 특징적인 것인가!

(후략)

샤브시나 꿀리꼬바, 「역사인물 회고 : 소련의 여류 역사학자가 만난 박헌영」, 역사비평 1994년 여름호, 185~186쪽

강철의 대원수에게 조선의 인민들은 장기의 졸에 붙은 먼지 한 조각쯤 되었던 모양입니다.

2007년 10월 18일 목요일

뭔가 꼬여가고 있다!

수령님은 서울을 '해방'할 때 까진 좋았는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슈티코프의 아래 전문은 슬금슬금 불길한 기운이 나타날 무렵의 요상한 분위기를 잘 잡아낸 것 같습니다.
암호전문 405809호
평양발, 전송 1950년 7월 2일 04시 00분; 수신 1950년 7월 2일 05시 47분
1950년 7월 2일 05시 55분 소련군 총참모부로 재전송(무선)
긴급

핀시(스탈린) 동무께
362호

미국의 전쟁개입이후 북조선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보고를 올립니다.

인민군의 성공적인 군사작전, 특히 서울의 해방이후 인민들의 분위기는 엄청난 정치적 열정에 휩싸여 있습니다.

해방지구의 인민들은 인민군을 따뜻하게 환영하고 있으며 인민군을 돕기 위해 가능한 수단을 모두 동원하고 있습니다. 인민위원회, 사회-정치 조직 등 권력기관들이 해방지구에서 속속 설립되고 있으며 이들에 의해 생산과 상업활동이 재개되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와 인민군에 대한 반동적 움직임은 눈에 띄지 않습니다.

인민군의 성공적인 공격으로 빨치산 봉기가 시작됐으며 현재 남한군의 후방 지역에서 빨치산 운동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반대하는 미국의 선전방송의 확산과 미국 비행기들의 남북한 인구밀집지대, 공업지대, 군사시설에 대한 잦은 공격으로 인민들의 정치적 경향은 다소 악화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최후의 승리에 대한 개인들의 믿음이 사라져가고 있으며 해방지구의 인민들(중 소수)은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는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인민군의 지도부(김일성, 박헌영, 박일우, 김백, 최용건, 강건)는 현재의 복잡한 군사-정치 정세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으며 완전한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 남한의 전역으로 공세를 확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미국의 참전으로 인해 조선이 처한 어려운 상황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으며 이점과 관련해 전쟁수행을 위한 인적, 물적자원을 확보하는데 필요한 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

김일성은 제게 보병, 전차, 해군 부대들을 추가로 편성하는데 대해 의견을 구했습니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조선 전체에 징병제를 실시하려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도부의 일부, 김두봉과 홍명희는 조선의 자체적인 역량으로 미국과의 전쟁을 수행하는데 있어서의 어려움을 언급하고 있으며 김일성에게 소련은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지 물어보도록 요청했습니다.(김일성이 제가 김두봉과 홍명희와의 대화 내용을 보고했습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에 참여한 우익과 중도파 인사들은 정부의 조치를 전적으로 지지하고 있지만 해방지구에서의 동원에 대해서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김일성에게 소련정부는 그의 무기 및 탄약 원조 요청에 대해 동의한다고 답했습니다.

현재 북조선의 전반적인 상황은 양호한 편이며 인민군의 적극적인 공세작전을 가능하게 하고 있습니다.

423호 / 슈티코프
1950년 7월 1일
수신인 : 스탈린(2부), 몰로토프, 베리야, 말렌코프, 미코얀, 카가노비치, 불가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