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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7월 3일 일요일

제국의 유지비용

  20세기 영국의 몰락은 국제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명색은 제국이라 2차대전 이후에도 식민지들에 대한 영향력을 최대한 보존하려고 발버둥을 쳤습니다. 이런 발버둥의 일환으로 영국은 경제가 엉망으로 망가져가던 1960년대 까지도 세계 각지의 해외주둔군을 유지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했다지요.

  영국 군부는 2차대전이 끝나고 냉전을 맞이한 뒤에도 해외에 대한 영향력 확보를 매우 중요시 했습니다. 특히 중동지역은 유전이 존재했을 뿐 아니라 폭격기의 작전 기지로서도 중요하게 평가를 받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 지역은 영국이 ‘전통적’으로 이해관계를 가진 지역이었던 만큼 전략적인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은 당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영국은 2차대전으로 사실상 패권국의 기능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현실을 반영해 1952년 영국 군부는 국제전략보고서Global Strategy Paper에서 중동지역에 고정적으로 배치할 영국군을 육군 1개 사단에 항공기 160대 정도로 감축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습니다.1)
  이미 2차대전 이전에도 식민지 유지에 땀을 빼던 대영제국이었지만 2차대전 이후에는 그게 더 어려워졌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지요. 영국은 2차대전을 미국의 원조에 의해 겨우 치러냈고 2차대전 이후에는 더욱 더 미국의 원조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 연구자가 시니컬하게 지적하고 있듯 2차대전 이후의 영국은 자체적인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강대국의 기능을 미국의 원조로 해나가는 형편이었던 것 입니다.2) 이런 상황에서 영국의 국제활동은 미국의 지원에 좌지우지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영국이 그리스 내전에서 손을 뗀 것도 유명하지만 수에즈 사태당시 미국의 압력에 굴복한 것은 이런 현실을 전세계에 명백히 보여준 사례이지요.

  그리고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 경제가 슬슬 엉망이 되어가자 얼마 되지않는 영국의 해외주둔군 마저 풍전등화의 상태가 됩니다. 영국은 2차대전 직후의 어려운 상황에서도 ‘제국’의 역할을 하기 위해 국방력에 상당한 투자를 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4/55 회계연도만 하더라도 영국 GDP의 9.0%에 달하는 비용이 국방비로 사용되고 있을 정도였다지요. 하지만 이것은 영국경제에 상당한 부담을 주고 있었고 이미 1959/60 회계연도에 6.9%로 6%대로 떨어진 뒤 1969/70 회계연도에는 5.3%로 추락합니다.3)  영국의 경제가 계속해서 악화되면서 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군사력은 점차 부담스러운 짐으로 여겨지게 됩니다. 영국 수상 맥밀런이 1959년 7월 26일 일기에 썼던 것 처럼 영국내에서는 “왜 영국이 큰 무대에 남아있으려 발버둥 쳐야 하는가?(Why should the UK try to stay in the big game)”하는 회의감이 오래전 부터 일고 있었던 것입니다.4)
  영국 재무성의 경우 이미 1960년 부터 중동과 아시아에 배치된 영국군의 철수를 강하게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재무성의 관료였던 리처드 클라크Sir Richard Clarke는 국방비를 GNP 성장률의 테두리 내에서 억제하는데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특히 극동지역에서 병력을 감축하는 것이 상황을 호전시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클라크는 1960년 7월 극동지역에 주둔한 영국군을 감축하자는 의견을 공개적으로 제시했습니다. 그는 싱가폴에 영국군을 주둔시킨다고 해서 영국의 경제와 무역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 미군이 있으니) 또한 인도를 포함한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서 영국이 얻는 경제적 이익이 연간 6천만에서 6천5백만 파운드 사이인데 비해 아시아 지역에 주둔한 영국군에 소요되는 비용이 연간 6천만 파운드에 달해 전혀 ‘남는 장사’가 아니라는 점도 지적되었습니다. 그리고 1963년에는 중동지역에 주둔한 영국군도 마찬가지라는 논리를 폈습니다. 중동지역의 영국 석유기업들이 연간 1억 파운드를 벌어들이는데 이 지역에 주둔한 영국군은 1억2천만에서 1억2500만 파운드를 까먹고 있다는 것이 그의 논리였습니다.5)

  물론 영국 정부는 단순히 재무성의 주장에만 휘둘리지 않았고 냉전이라는 국제정치적 상황과 군사적인 요인을 함께 고려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영국이 정말 돈이 없다는데 있었습니다. 결국 해외주둔군을 줄일 수 밖에 없었는데 서독주둔군의 경우 미국 및 NATO회원국들과 협의가 필요했기 때문에 결국은 만만한 중동과 아시아 주둔군이 목표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6) 결국 노동당 정부가 들어선 뒤 1965년에는 아덴Aden을 포함한 페르시아만 지역에서 철군한다는 결정을 내렸고 이어서 아시아 지역의 영국군 감축이 잇따르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영국이 몰락할 무렵에는 미국이라는 훨씬 쓸만한 대체재가 존재하고 있었기에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영국군이 철군한 뒤에도 미국의 존재는 중동과 아시아지역에서 공산권의 세력확대를 저지하는 역할을 했지요. 다행히 미국은 여전히 강력한 패권국이고 우리는 그 패권국이 제공해주는 안보에 기대어 좋은 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이 여전히 패권국으로서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점도 나쁘지 않습니다. 중요한 문제는 한국이 미국에 있어서 어떠한 존재인가 하는 점 입니다. 냉전이후 한미관계를 다시 돌아보자는 목소리가 자주 나오고있고 그럴때 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문제를 생각합니다. 한국은 미국이라는 제국에게 있어 수지타산이 맞는 곳인가?



1) John Baylis·Alan Macmillan, “The British global strategy paper of 1952”, Journal of Strategic Studies, 16: 2, p.218
2) Dan Keohane, Labour Party Defence Policy since 1945(Leicester University Press, 1993), p.20
3) G. C. Peden, Arms, Economics and British Strategy : From Dreadnoughts to Hydrogen Bomb(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7), p.308
4) Curtis Keeble, Briatin, the Soviet Union and Russia(MacMillan Press, 2000), p.259
5) G. C. Peden, ibid., p.332
6) G. C. Peden, ibid., p.333

2007년 11월 18일 일요일

제 3세계 인민들을 바라보는 스탈린의 시각

전세계 근로인민의 보호자이며 스승이신 강철의 대원수께서 극동 소국의 정치인 두 명을 친히 접견하고 가르침을 주셨을 때의 일화라는군요…

(전략)

더구나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이후 좌익진영 내부의 분파투쟁은 격화되었다. 반대파는 사람들에게 좌익진영의 지도층, 그 중에서도 먼저 박헌영의 명성을 실추시키기 위한 성명서와 격문, 팜플렛을 뿌렸다. 공산당과 인민당 그리고 신민당을 통합시킨다는 노선은 반대파 집단의 각별한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이 문제는 조선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독립된 나라들에서의 스탈린주의의 전후정책과 관련이 있었다. 반대파의 문건을 분석해 볼 때 통합에 대한 반대파의 저항은 원칙적인 동기가 아니라 대단히 개인적인 야심적인 동기들에 의해 일어난 것이라는 사실이 증명된다 할지라도 그 동기들의 한 가지 논거 즉 그러한 통합지시가 외부에서, 스탈린에게서 나왔다는 점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한 자료가 없으므로 나는 남편(필자인 샤브시나 꿀리꼬바의)의 얘기를 인용해 보고자 한다. 1946년 7월 남편은 미소공동위원회의 소련측 대표위원장이었던 Т. Ф. 스찌꼬프로부터 얼마 동안 서울에서 평양으로 와 있으라는 부름을 받았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김일성, 박헌영과 함께 스탈린을 만나기 위해 모스끄바로 날아갔다. 남편이 배석한 회담석상에서 여러가지 것이 논의되었다. 스탈린은 말수가 많지 않았지만 그가 말한 한 마디 한 마디는 고압적인 것 같았고 하늘에서 계시를 내리는 듯 하였다. 당시에는 이것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스탈린에게서 비공개적으로 이 회담에 대해 전해들은 남편과 우리가 놀란 것은, 좌익정당들의 통합에 관한 부분이었다. 스탈린은 공산당이 사회민주당 혹은 노동당을 표방하면서 가까운 장래의 과제만을 제기하는 것은 불가능한가라는 문제를 제기했다. 아마도 그런 문제에 준비를 못한 듯한 조선의 동지들은 그것이 가능하기는 하지만 인민들과 상의를 해봐야 한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스탈린은 그자리에서 자기 스타일대로 이해하기 어렵지 않게 무심코 말했다.

"인민이라니? 인민이야 땅 가는 사람들이잖소. 결정은 우리가 해야지."

우리가 이 문구에 대해 돌이켜 생각해 본 것은 한두번이 아니었다. 어쩌면 기록이 정확하게 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사람들은 남편에게 캐물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모든 것이 바로 그대로였다. 인민이 무엇을 생각하는지에 대한 무시도, 비록 우리와 가까운 나라라 할 지라도 엄연히 다른 나라의 내부문제를 해결할 권리가 자신에게 있다는 확신도 모두 그대로였다. 그것은 하찮은 것이 아니냐고 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얼마나 특징적인 것인가!

(후략)

샤브시나 꿀리꼬바, 「역사인물 회고 : 소련의 여류 역사학자가 만난 박헌영」, 역사비평 1994년 여름호, 185~186쪽

강철의 대원수에게 조선의 인민들은 장기의 졸에 붙은 먼지 한 조각쯤 되었던 모양입니다.

2007년 1월 4일 목요일

4일자 중앙일보 기사

오늘자 중앙일보에 아주 흥미로운 기사가 하나 났습니다.

북한 파워 그룹 대해부 <상> 권력 지도가 바뀌었다


권력서열에서 인민군의 약진이 두드러 지고 있다는 내용이군요. 인민군 고위 간부들은 노동당원을 겸하고 있으니 당내 서열도 당연히 높아졌겠지요. 아주 흥미로운 현상입니다.
50-60년대에 군대에 대한 당의 장악력을 철저히 하기 위해서 군 간부들을 두들겼던 것과 비교하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선군정치 타령을 줄기차게 해 대더니만 결국 이런 결과가 나오는군요.

스탈린 동무의 경우 군대의 목소리가 커질 것 같으면 적절한 선에서 손을 봐 주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쓸데없이 목소리를 높였던 투하체프스키가 골로 간 것이나 허파에 바람이 들어가 건방을 떨던 주코프가 좌천된 것이 대표적이죠.

그러나 북한은 90년대 중반 지방당 조직이 붕괴된 이후 군대에 대한 의존이 커지고 있어 군대의 목소리가 계속 커지더라도 이들을 손본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앞으로도 이런 추세가 더 강화될 것 같은 찝찝한 느낌이 드는군요.

두 번째로 재미있는 것은 유학파가 줄어들고 김일성 대학 출신이 우세를 보이는 가운데 만경대 학원 출신이 조금 늘었다는 점입니다. 단순히 보면 국내파로 권력 핵심부를 채우고 있는 것 같은데 이들은 별로 개혁 개방에 관심이 없을 것 같아 보이는군요.

2007년에는 대선도 있는데 과연 저 양반들이 어떤 대남정책을 펼칠지 별로 즐겁지 않은 호기심이 당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