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신천학살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신천학살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10년 3월 13일 토요일

나름 공정한 서술....

한국전쟁 당시 황해도 신천과 안악지방에서 일어난 학살은 당시 38선 이북지역에서 일어난 학살 중에서도 유명합니다.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이 학살은 단일 지역에서 일어난 학살로는 한국전쟁 당시 가장 규모가 큰 것입니다. 물론 정확한 피학살자가 몇 명인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지요. 어쨌든 북한 정부는 한국전쟁 당시 부터 이 지역에서 일어난 학살을 '미국의 전쟁범죄'로 요란하게 선전했습니다. 이때문에 한국 측에서도 북한의 선전에 대응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신천 봉기에 참여한 월남민들은 1957년에 『抗共의 불꽃 : 黃海 10.13.反公學牲義擧鬪爭史』라는 책을 발간합니다. 이 책은 당시 우익측 시각을 반영한 저작이라는 점에서 큰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신천 지방에 서술의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안악 등 학살이 벌어진 인접 지역의 정보는 소략하지만 주된 서술대상인 신천 지방의 사건에 대해서는 우익의 입장에서 매우 충실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물론 인민군과의 교전에서 신뢰하기 어려울 정도로 과도한 전과를 자랑하는 등 의심스러운 면이 많긴 합니다만 봉기에 가담한 우익 인사들에 대한 풍부한 정보를 담고 있어 유용합니다.

이 저작이 재미있는 점은 우익측의 보복 학살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 입니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는 한국전쟁 직후인 1957년에 나온 저작에서 우익의 보복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 꽤 흥미로웠는데 시간이 지난 뒤에 생각해 보니 오히려 전쟁 직후라서 사람을 죽인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을 수도 있을것 같더군요. 물론 북한 측의 학살에 대한 서술은 자세한 반면 우익의 보복학살에 대한 서술은 매우 소략합니다. 황해도 인민위원장을 조리돌림한 뒤 총살한 내용과 교전 중 인민군이나 당원을 사살한 이야기를 제외하면 좌익에 대한 보복학살을 다룬 부분은 세 쪽 정도에 불과합니다. 내용도 얼마 되지 않으니 해당 부분을 인용해 보겠습니다.(원문 그대로 인용해서 맞춤법은 엉망입니다)

끝없이 맑게 개인 가을하늘에 높이 계양된 태극기 밑에서 남녀노소 할것없이 총동원되여 구국대업에 나섰다. 의거대가 확보해 놓은 지구마다 유능한 지방유지를 선출하고 또 선출된 그들은 남한의 기관조직기구를 따라 미약하나마 손색없는 자치위원회와 치안대를 조직하였다.

봉기군과 아군 -국군들과 유엔군-의 진격으로 퇴각의 혈로를 차단당하게 된 괴뢰들은 수많은 애국지사를 학살하며 구월산으로 대거 입산하였다. 신천에서 八百여명에 달하는 애국자의 시체를 내무서 방공호와 유치장 참호 정치보위부의 지하실 -양민을 학살하기 위하여 가설한 곳- 및 유치장 군당의 방공호 및 토굴-양민을 학살하기 위하여 가설한 곳- 각처 방공호 창고 하수도 등에서 발굴해 내였고 해주형무소에서 一千여명 안악중학교 강당 및 지하실에서 五ㆍ六백명의 시체를 발굴하였다. 또한 재령과 안악 서하면 장련면 붕암리에서 의거하였으나 실패한 관계로 무참하게도 수많은 애국청년들이 학살당하였다.

이러한 참변을 목격한 이 지구 주민들은 놈들 소행에 대하여 무조건 복수할것을 맹서하고 이를 갈며 때를 기달렸다. 한편 치안대들은 부역자 숙청과 공비 소탕이 그 중요한 임무였다. 이와같이 이 지구에서는 매일같이 피의 복수가 계속되였다. 이러한 피의 복수는 공산정치가 지난 五년동안에 저질러 놓은 죄악 -가혹한 착취와 억압 그리고 학살- 에 대한 어디까지나 당연한 것이었으며 또한 치안대원들이 놈들을 잔인하게 처단하는 것은 놈들이 가르치고 간 그대로 이른바 복습(?) 이라는 것 뿐이었다. 심지어는 예수교인들도 놈들이 베풀어준 은혜(?)에 대하여 곱게 보답해 주었다. 사실상 인과응보라는 결과밖에 아무것도 아닌 아주 단순한 일이었다.
한편 어떻한 부역자의 아네는 남편이 도망한 뒤라 정의의 심판을 받게됨이 두려워 치안대를 찾아와서는 "저는 친정의 가정 성분으로 보아 절대로 공산당이 될수 없읍니다. 그저 남편하나 잘못맞난 탓이라 생각하고 남편의 대를 받은 자식을 내손으로 처단했으니 저만은 살려주시요" 하고 손이 발이 되도록 애원하였다.

이토록 전율할 피의 복수는 전 북한을 휩쓸었으나 특히 반공의 전위인 구월산지구 일대가 제일 심하였다. 그러나 시일이 경과함에 따라 이러한 피의 복수는 무고하고 졸렬한 방법이었음을 각 책임자들이 선무 만류하고 패잔 공산괴뢰들의 역습을 방어하며 동족상쟁의 해를 피하였다.

趙東煥,『抗共의 불꽃 : 黃海 10.13.反公學牲義擧鬪爭史』(서울, 1957), 474~476쪽

학살을 저지른 것은 모두 미국의 소행이라는 북한의 주장에 비하면 아주 솔직한 기록인 셈인데 그래도 뭐랄까, 사람 죽인 것을 아주 당연하게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꽤나 으스스합니다. 보복학살 외에 위에서 언급한 봉기 과정에서의 살인에 대한 묘사도 좀 깹니다. 자신들도 눈 뜨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죽였다고 쓰고 있으니 말입니다.


잡담하나.
『抗共의 불꽃 : 黃海 10.13.反公學牲義擧鬪爭史』은 국회도서관에서 전자문서로 전문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관심있으신 분들은 한번 읽어보십시오. 이박사 치세하의 반공정서를 듬뿍(???) 느끼실 수 있습니다.

잡담둘. 2008년에 북한이 신천학살의 주범이라고 주장하는 어떤 미군 장교에 대해 잡담을 한 일이 있습니다. 물론 결론이 바뀔일은 없겠지만 미국 자료를 추가로 확보하면 보강해서 한번 더 써볼까 합니다. 

2008년에 썼던 글은☞  신천학살에 대한 약간의 이야기

2008년 6월 11일 수요일

신천학살에 대한 약간의 이야기

신천학살은 한국전쟁 당시 있었던 수 많은 학살 중 한 단위 지역에서 일어난 것으로는 ‘최대규모’인 학살입니다. 그다지 믿음직스럽지 않은 북한의 공식 주장에 따를 경우 신천에서 학살된 민간인은 35,383명으로 북한 전역에서 가장 많은 것 입니다. 북한은 공식적으로 신천 외에도 황해도의 안악, 은율은 각각 1만명을 넘는 민간인이 학살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전체적으로 황해도지역의 민간인 희생은 북한이 주장하는 1950년 10월부터 1951년 1월까지 38선 이북지역의 민간인 희생자의 65% 이상에 달합니다. 현재로서는 민간인 희생자의 규모에 대한 북한 주장의 진위를 확인하기가 극히 어렵지만 어쨌든 불과 3개월 사이에 황해도 지역, 특히 신천에서 대규모 학살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할 것 입니다.

하여튼 신천학살은 그 규모 덕분에 한국전쟁이 진행되던 와중에 정치적 이슈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북한 외무상이던 박헌영은 1951년 4월 15일에 유엔에 보낸 서한에서 유엔군의 점령기간 중 38선 이북지역에서 미군과 ‘리승만 군대’에 의한 대량의 학살이 일어났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이 당시 박헌영의 주장에 따르면 신천에서 25,000명, 황해도 전역에서 10만명 이상이 학살되었다고 합니다.
한국에서의 ‘학살’이 국제적 문제가 되자 진보적 국제단체들은 미국의 학살을 조사하기 위한 조사단을 북한으로 파견합니다. 첫 번째 조사단은 국제민주여성연맹(Women's International Democratic Federation)이 파견한 조사단 이었고 두 번째 조사단은 국제민주법률가협회(International Association of Democratic Lawyers)의 조사단이었습니다. 이 두 단체는 현지 주민들의 증언에 기초해서 ‘미군’이 학살을 저질렀다는 주장을 했고 당연히 미국과 남한정부는 그 사실을 부인했습니다.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첫 번째 국제조사단인 국제민주여성연맹의 조사에서는 학살의 주체로 ‘미군’을 비롯해 ‘영국군’과 ‘한국군’이 거론되고 있는데 두 번째 조사단인 국제민주법률가협회 조사단의 발표에서는 ‘미군’의 학살만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초기의 발표에서 뒤의 발표로 가면서 학살의 책임이 ‘미군’으로 집중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연히 남한에서는 월남인들을 중심으로 ‘북괴의 선전’에 대항하기 위한 의도로 황해도 일대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반공항쟁’의 관점에서 서술한 저작들이 나왔습니다. 대표적인 저작이 1955년에 출간된 박계주의 『한국전쟁 이면 비사 – 자유공화국 최후의 날』과 1957년에 출간된 조동환의 『항공(抗共)의 불꽃』이 있습니다. 특히 후자는 500쪽을 넘는 분량에 봉기 참여자들의 증언을 대량으로 수록해 ‘북괴의 모략’을 분쇄하는데 역점을 두었습니다. 정부에서도 북한의 선전전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기 때문에 조동환의 책에는 앞머리에 당시 부통령이던 장면(張勉)의 義氣衝天 이라는 휘호가 실렸으며 이 밖에도 국방부장관 김용우(金用雨), 검찰총장 정순석(鄭順錫)이 발간사를 적었습니다. 이런 월남민들의 저작들은 학살의 책임을 북한에 전가하고 있지만 우익에 의해서도 약간의 보복학살이 있었다는 점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70년대 이후의 반공서적들 보다 다소 객관적인 면이 엿보이는게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조동환에 따르면 좌익에 의한 학살은 천여명 정도 수준으로 신천군 정치보위부에서 90명, 신천 군당방공호에서 100여명, 또 내무서 방공호 근처에서 230여명, 내무서 내에서 20명, 시내에서 300명이 넘는 민간인이 학살되었다고 합니다. 이후의 보복학살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규모를 명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80년대 이후부터 남한의 대학가에는 북한의 주장을 반영하는 사회과학 서적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합니다. 일단 북한의 주장은 국제민주여성연맹과 국제민주법률가협회라는 국제단체의 지원사격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조사 방식의 비과학적인 측면을 보지 못한다면 상당히 그럴싸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어쨌든 신천학살은 꽤 민감한 떡밥이어서 아직까지도 남측의 많은 ‘민족주의자’들은 미군이 대량학살을 저질렀다는 것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2001년에 출간된 황석영의 ‘손님’이나 2002년에 방영된 MBC의 이제는 말 할 수 있다가 ‘신천학살’을 정면으로 다루면서 미군의 학살 개입은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믿음이 강한 사람들은 여전히 미군이 학살을 저질렀다고 확신하고 있지요.

북한은 미국이 학살을 저질렀으며 학살을 지휘한 자는 미군 중위 해리슨이라고 주장합니다. 미군의 학살을 입증하려면 먼저 이 ‘해리슨’의 실체에 대해 밝혀야 겠지요. 실은 이 ‘해리슨’은 북한의 주장 뿐 아니라 남한의 반공성향 서적에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북한연구소에서 1990년에 펴낸 북한민주통일운동사 황해도 편에는 신천에 진주한 미군 지휘관이 ‘해리슨’이라고 되어 있지요. 그렇다고 이것이 북한의 주장을 입증해 주는 증거이냐고 물으신다면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북한이 주장하는 해리슨이나 남한의 서적에 등장하는 해리슨은 모두 문서로 확인이 안된, 증언에 기초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MBC의 취재가 밝혀냈듯 재령-신천일대에 진주한 미육군 24보병사단 19보병연대 3대대에는 해리슨이라는 이름의 중위가 없었습니다. 혹시나 하시는 분들을 위해서 1950년 9월 29일부터 10월 31일까지의 미 육군 24보병사단 장교명부에 실려있는 19연대 소속의 H로 시작하는 장교들의 이름을 발췌해봅니다.

19보병연대의 H로 시작하는 이름의 장교

휴즈(Irving C. Hughes) 대위
할(Charles E. Hall) 대위
홀더(J. M. Holder) 대위
히슬롭(Kenneth C. Hyslop) 대위
핸들리(Norman C. Handley Jr) 중위
할스태드(Ray H. Halestead) 중위
하우겐(Richard D. Haugen) 중위
허버트(Robert L. Herbert) 중위
힐(James F. Hill) 중위
호넷(John H. Hodnett) 중위
호로니(John A. Horony) 소위
허드슨(George W. Hudson) 소위
헤일(Lindsey W. Hale) 소위
햄릭(Clifford D. Hamric) 소위

물론 미군의 학살을 굳건히 믿는 쪽에서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민족21이라는 잡지는 2002년 5월 호에서 학살을 저지른 미군 ‘해리슨’이 방첩대(CIC)나 헌병대 소속일 수 있다는 주장을 합니다. 물론 아무런 근거도 없는 심증일 뿐이지요.
그렇다면 1950년 10월 미 24보병사단 방첩대와 헌병대에는 ‘해리슨’이란 이름의 장교가 있었느냐? 그럴리가 없죠…

미육군 24보병사단 24방첩대 장교명부(준위 이상)

마운트조이(Pearl B. Mountjoy) 소령
쿡(Harvey J. Cook) 대위
매커비(John F. McCabe) 대위
킴(Calvin Kim) 중위
매키(Francis L. Mackey) 상급준위
요네무라(Minoru Yonemura) 상급준위
존슨(Joshep H. Johnson) 준위
이시하라(James H. Ishihara) 준위
스미스(Elmer L. Smith) 준위

미육군 24보병사단 24헌병중대 장교명부(준위 이상)

햄릿(Lamar Hamlett) 대위
매닝(James D. Manning) 대위
애버릴(Edward R. Averill) 중위
보이드(Raymond S. Boyd) 중위
리건(Wandle Legan) 중위
풋냄(Harry A. Putnam) 중위
솔라-오티즈(Antonia M. Sola-ortiz) 중위

생각해 보면 오직 증언에 기초해 ‘해리슨’이란 인물의 존재를 주장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신천학살에 대한 최초의 국제조사에서는 ‘해리슨’이란 인물이 등장하지 않다가 갑자기 그 이후의 조사에서부터 튀어나오고 있다는 것을 보더라도 조작의 냄새가 풀풀 풍긴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 입니다. MBC의 이제는 말 할 수 있다를 보신 분이라면 아시겠지만 북한측이 ‘해리슨’의 학살을 목격한 증인으로 내세우는 김종문과 민선홍은 1950년 당시 각각 11세와 6세였는데 이들이 영어를 다 알아들을 정도로 영어실력이 좋았을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뭐, 공화국이 당시부터 조기영어교육에 성공을 거두고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만?

해리슨이라는 인물이 없다고 해서 미군이 학살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증거가 될 수 있느냐고 하는 분도 계실 것 입니다. 그렇다면 재령-신천에 있었던 19연대나 방첩대, 헌병대가 무슨 일을 했는지를 살펴보면 될 것 입니다.
먼저 재령-신천에서 작전한 19보병연대 3대대의 경우 대대장인 에이어스(Harold B. Ayres) 중령이 10월 7일 야전병원에 후송되어 로건(Edwad O. Logan) 소령이 대대장 대리를 맡고 있었다. 3대대는 북진을 개시할 당시 재령의 도로교차점을 장악한 뒤 사리원 방향으로 진출, 북상하는 영국군과 접촉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습니다. 10월 16일에 이 대대가 북진을 시작할 무렵 북한군의 저항은 와해단계에서 오히려 북한의 빈약한 도로망에 의한 교통정체가 더 큰 장애물일 정도였다고 연대 작전일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음날인 17일 오후 19연대는 재령에 돌입했고 다음날 까지 재령일대를 장악하는데 성공합니다. 19연대의 일지에는 신천에 대한 특별한 언급이 없어서 언제 신천이 점령되었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습니다. 재령은 사리원에서 신천으로 이어지는 도로의 중앙에 위치한 교차점이었고 또 월남한 신천사람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아마도 18일 오후 늦게야 미군은 신천에 돌입한 것으로 보입니다. 재령-사리원 일대를 장악한 미 19보병연대는 다시 방향을 서쪽으로 돌려 진남포를 장악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이 과정에서 3대대에는 후방 경비의 임무가 내려졌고 이 중 L중대와 여기에 배속된 6전차대대의 전차 몇 대가 재령-신천 일대의 경비를 맡았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10월 20일에 재령 방향으로 북상한 제 5보병연대전투단에 방어구역을 인계했기 때문에 재령일대에는 불과 이틀 정도만 머물렀습니다. 설사 해리슨이 실존인물이라도 학살을 저지르기에는 터무니 없이 짧은 기간이지요. 물론 후속부대인 제 5보병연대도 바로 사단 주력을 따라 북상해서 별다른 건덕지가 없습니다.;;;;;
방첩대의 경우는 좀 더 건덕지가 있긴 합니다. 북진과정에서 24방첩대의 임무는 미군 포로의 수색, 특히 대전에서 포로가 된 딘 소장의 행적을 찾는 것과 좌익 간부의 색출이었습니다. 하지만 방첩대의 일지를 보면 좌익 간부 색출은 상당수의 간부들이 줄행랑을 친 덕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한가지 특기할 만한 사실은 방첩대가 좌익 색출과정에서 우익 치안대의 협조를 받았다는 점 정도입니다. 헌병대의 경우는 더 심심해서 교통정리와 피난민 통제 말고는 없습니다.

간단히 결론을 내리자면 소규모 민간인 살해를 제외하면 미군이 북한의 주장 처럼 수만명을 학살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황석영의 손님이 출간 된 뒤 황석영이 신천학살을 내부의 문제로 돌리고 미군의 학살을 은폐했다고 비난한 유태영 목사도 정작 자신은 미군이 학살을 저지른 것을 본 적이 없다고 밝혔지요.

황석영이 한 인터뷰에서 밝힌 것 처럼 신천 학살이 전적으로 미국의 책임이라는 것은 휴전 이후 사회 내부의 통합을 위해서 택한 고육지책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황석영의 설명은 타당한 것 같습니다. 북한의 공식 역사인 조선전사에서는 신천학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신천에서의 대중적 학살 만행은 신천 땅을 강점한 미제침략군의 우두머리인 해리슨 놈의 직접적인 지휘 밑에 계획적으로 감행되었다. 이 살인마는 1950년 10월 17일 미제침략군이 신천을 강점한 첫날에 ‘나의 명령은 곧 법이다. 이를 위반하는 자는 무조건 총살한다.’고 떠벌이면서 전복된 지주, 악질종교인, 고리대금업자, 건달군 등 인간쓰레기들을 제 놈의 졸개로 긁어모아 인민학살에 내몰았다. 이리하여 신천 땅에서는 일찍이 역사가 알지 못하는 야수적인 대중적학살만행이 감행되었다.

『조선전사 26권』,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81, 130~132쪽

이 서술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전복된 지주, 악질종교인, 고리대금업자, 건달군 등 인간쓰레기들을 제 놈의 졸개로 긁어모아 인민학살에 내몰았다'는 구절입니다. 사실왜곡을 하는 와중에서도 진실을 알 수 있는 약간의 실마리를 넣어놓았다는 것 이지요. 즉 북한의 논리는 ‘전쟁의 원천 제공자가 미제니까 미제가 다 한 것이 아니냐’인 것 입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진실을 회피하는 것이 그 사회의 발전에 얼마나 많은 도움을 될까요? 여기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볼 수 밖에 없습니다. 북한이 고립을 유지하는 동안은 이런식으로 진실을 은폐하고 넘어갈 수 있겠지만 언젠가는 정면으로 바라봐야 할 때가 올 것 입니다. 그게 언제가 될진 아무도 모르지만.

추가(6월 12일 18시 36분)

그러고 보니 해리슨이라는 인물이 구체화 되는 과정에 대해서 몇 가지 더 덧붙일 필요가 있겠군요. 제가 아직 신천학살에 대한 북한측 문헌을 모두 찾아 본 것은 아니지만 『조선전사 26권』(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81), 『신천학살박물관에서 펴낸 신천의 원한을 잊지 말자』(금성청년출판사, 1987), 고상진의 『조선전쟁시기에 감행한 미제의 만행』(사회과학출판사, 1989) 등 1980년대의 문헌에는 학살을 감행한 ‘살인마’의 이름이 ‘해리슨’으로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시기 부터인지 ‘해리슨’은 이름이 되었고 그의 성은 '메이든'(Madden)이 되었지요.

그렇다면 ‘해리슨’이란 성을 가진 중위는 없어도 ‘메이든’이란 성을 가진 중위는 있었느냐? 당연히 있을리가 없지요.

역시 19연대 소속의 장교 중 성의 앞 글자가 M으로 시작하는 장교는 다음과 같습니다.

Nedd D. Moore 대령
Thomas M. McGrail 중령
Robert M. Miller 소령
Melecio J. Montesclaros 소령
Sidney M. Mark 대위
Nathan Masin 대위
Robert S. Mason 대위
Samuel T. Minnich 대위
Oliver L. Mcdougell 중위
James M. Mattson 소위
Cosby Mcbeath Jr. 소위
Raymond R. McEachin 소위
William R. Megibren 소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