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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5월 12일 일요일

밴 플리트의 현리 전투 회고담

현리 전투는 한국전쟁에서 한국군이 당한 패배 중 손꼽히는 참패입니다. 워낙 유명한 전투이니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입니다. 이 전투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당시 제3군단을 지휘하고 있던 유재흥 장군에 관한 것 입니다. 특히 제3군단이 붕괴된 뒤 밴플리트 장군과 나눈 대화는 너무나 유명해서 곳곳에서 인용되고 있지요.


이 포스팅에서는 이에 대한 밴 플리트 대장의 회고를 소개해 보려 합니다.



(전략)


윌리엄스 중령 : 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진 이후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밴 플리트 : 아니, 아니. 5월에 중국군이 또 한번 공세를 감행했었소. 이 이야기를 하는게 좋겠네.


윌리엄스 중령 : 계속 말씀해 주십시오.


밴 플리트 : 적군은 전열을 가다듬은 다음 동부와 중부에 병력을 증강하고 5월에 공세를 감행했소. (중국군은) 이 공세에서 꽤 많이 진격해서 돌출부가 형성되었지. 중국군은 공세가 중단될 때 까지 50마일 정도를 진격했소. 나는 4월의 공세를 통해 적은 모든 것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소. 적은 필요한 물자를 확보할 수 없었고 탄약이 크게 부족했소. 적의 선두 제대는 농사 짓는 사람들이 쓰는 말로 “결실을 거두지 못하고 죽을(die on the vine)” 것이었고 공세를 멈출 수 밖에 없었소.


적군은 한국군 제2군단과 그 예하의 2개 사단을 쓸어버렸소. 한국군 총참모장 정일권 장군과 나는 동해안으로 비행기를 타고 간 뒤 차량편을 구해서 군단장을 찾아가 만났소. 군단장은 유(재흥) 장군이었소. 나는 유재흥에게 물었소.


“유장군, 당신의 군단은 어디 있소?(General Yu, where is your corps?)”


유재흥은 이렇게 대답했소.


“모르겠습니다.(I don’t know)”


“수송수단과 야포를 모두 잃었소?(Have they lost all of their transportation and artillery?)”


그는 이렇게 대답했소.


“그런 것 같습니다.(I think so.)”


나는 이렇게 말했소.


“유 장군. 당신의 군단은 지금 부로 해체할 것이오. 그 예하의 2개 사단도 마찬가지요. 귀관은 나와 함께 온 정일권 장군에게 전출 신고를 하도록 하시오. 그리고 정일권 장군은 최대한 패잔병과 장비를 수습하도록 하시오.(General Yu, your corps is deactivatied as of now, and so are your two divisions. You will report back to General Chung, here with me, for reassignment. In the meantime, General Chung, you collect all the stagglers and equipment you can.)”


유재흥 장군은 나중에 2개국에서 대사를 역임했소. 우리 두 사람은 몇 번 만났고 지금 그는 한국 국방부 장관이오. 유재흥 장군은 좋은 친구요. 우리는 만날 때 마다 현리 전투의 일을 생각하며 웃곤 한다오.(He is very warm friend of mine, and every time we meet, we have a smile remembering that action.) 한국에서 나는 완전한 지휘권을 행사했소. 불행히도 베트남에서는 우리가 완전한 지휘권을 행사하지 못했지.


다시 적군에 대해서 말하면, 나는 적의 진격이 한계에 달했으며 적이 진격을 재개하려면 더 많은 준비와 재보급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소. 나는 중국군의 공세 3일차에 제2보병사단과 웨스트모어랜드 대령이 지휘하는 제187공수여단... 전투단으로 적의 측후방을 공격했소. 이 두 부대는 돌파하여 동해안 지역을 방어하고 있던 아군 부대와 접촉하는데 성공했소. 대승을 거둔 것이오. 그리고 적군이 완전히 패배했기 때문에 나는 한국군으로 상륙부대를 편성해서 원산을 탈환하고 적군의 후방을 점령하도록 하려고 했소. 그러나 리지웨이 장군은 이 작전을 위해 일본으로 부터 상륙함정과 보급물자를 지원할 수 없으므로 승인을 거부했소. 나는 이렇게 말했소.


“맷. 이 작전은 추격전입니다. 그리고 추격전에는 병력의 일부만 투입하기 때문에 탄약이 많이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추격전의 사례를 연구해보면 내 말이 사실이란 걸 알 것이오. 패튼 장군이 프랑스에서 추격전을 펼친 것이나 다른 추격전 사례를 보면 상대적으로 적은 병력이 투입되었고 탄약 소모량도 많지 않았음을 알 수 있소. 추격전을 펼치는 부대는 식량과 연료가 필요하지. 하지만 아군이 추격을 시작한 직후 휴전회담이 시작되어 나는 진격을 중단하라는 명령을 내렸소.


윌리엄스 중령 : 제가 알기로는 현리에서 패배한 것은 한국군 제3군단 이고 유재흥 장군 예하의 사단은 한국군 제5사단과 제7사단 이었습니다.


밴 플리트 : 내가 기억하기론 한국군 제2군단인데.


윌리엄스 중령 : 제2군단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틀렸을 수도 있지요.


밴 플리트 : 중령. 좋은 질문을 여러가지 해 주었는데 내가 따로 적어 놓은 것이나 다른 기록을 보고 답변하는 게 아니라 20여년 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대답한다는 것을 유의해 주시오.


(후략)


“Interview with General James A. Van Fleet by Lieutenant Colonel Bruce Williams, Tape 4”(1973. 3. 3), Senior Officers Debriefing Program, US Army Military History Institute, pp.26~28.


다른 내용은 익히 알던 것이었는데 밴 플리트가 이런 참패를 당한 유재흥과 꽤 친해졌다는게 다소 의외였습니다. 게다가 현리 전투 패배를 가지고 서로 낄낄거릴 정도가 되었다니 말입니다(;;;;)

2006년 10월 1일 일요일

베트남 - 병력부족의 강대국 vs 인명손실에 관심없는 약소국

아프가니스탄에서 생고생하는 십자군 용사들에 대한 Sonnet님의 동정어린(?) 글들을 읽고 보니 지난 세기 머나먼 안남국의 평화를 위해 헌신한 美利堅의 반공십자군들이 떠올랐다. 사실 미국이 죽을 쑨 이유 역시 마찬가지 아니던가?

1960년대의 미군 역시 비정규전에는 토벌군과 게릴라의 전력비가 10:1에서 15:1은 되야 한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미군은 이미 1950년대부터 고질적인 병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 때문에 스틸웰 준장은 비정규전에 대비하기 위해 모든 지상군 사단이 비정규전을 수행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춰야 한다고 역설한 바 있고 1962년 1월 하우즈 위원회는 총 6개 사단(1, 2, 4, 25보병사단, 82, 101 공수사단)을 비정규전에 투입할 수 있도록 개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시기가 미국의 베트남 개입이 슬금 슬금 꼬여가던 시점이라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어쨌건 겨우 6개 사단은 효과적인 비정규전 수행에는 턱없이 모자란 전력이었다.

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지상군 개입이 시작되기 전부터 미국내에는 베트남전 승리가 어렵다는 견해가 제법 많았다. 대표적인 사례중 하나로 1963년 가을에 있었던 워게임 SIGMA 1에서는 북폭과 함께 미군 병력을 60만까지 증강시켰음에도 불구하고 VC들을 저지하지 못한다는 결과가 나와 많은 미국 고위 장성들을 열받게 했다.(이 워게임 결과에 분통을 터트린 대표적인 인물이 반공의 글라디에이터 커티스 르메이다)

어쨌건 초기 미군의 파병은 VC 사냥에 필요한 기동대대를 확보하는게 가장 큰 목적이었다. 1966년 6월, 미군사고문단은 남베트남의 VC 병력을 117개 대대(각 대대는 450명)으로 추산하고 있었는데 당시 가용한 남베트남군과 미군, 연합군 병력은 172개 대대로 화력과 기동력의 차이(미 군사고문단은 미 해병대 1개 대대를 VC 대대의 300% 전력, 미 육군 1개 대대를 VC 대대의 200% 전력으로 평가했다)를 감안해도 전력비가 3:1에도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66년 6월 초에 웨스트모어랜드는 워싱턴에 44개 대대의 증원을 요청했는데 이 44개 대대가 증원되더라도 양측 전력비는 겨우 3:1을 상회하는 수준에 불과했다. 맥나마라는 이 정도로는 불충분하기 때문에 7월 말 존슨에게 예비군 235,000명을 소집하고 육군 병력을 증강할 것을 건의했는데 설사 이것을 합하더라도 별 다른 뾰족한 답이 없었다. 1966년에 44개 대대를 요청했던 웨스트모어랜드는 1967년에 추가 증원을 요청했고 미군병력은 계속해서 증강됐다. 미군은 1969년까지 112개 대대로 증강됐지만 결국은 막대한 인명피해만 낸 채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잘 아는 사실이 아니던가.

강인한(또는 광신적인) 의지를 가지고 막대한 인명손실을 감당할 수 있는 상대와 싸운다는 것은 매우 피곤한 일이다. 미국의 9보병사단은 1969년 1월부터 2월까지 무려 168대 1의 사상자 교환비를 기록했다고 하지만 사단 작전구역에서 VC를 박멸하는데는 실패했다. 상대는 민족통일을 위해 시체로 태산을 쌓을 각오가 돼 있는 위인들이었으니 미군이 아무리 베트남인들을 죽여봐야 답이 없는게 당연했다.

하여간 베트남전과 마찬가지로 테러와의 전쟁역시 뾰족한 답이 없는 전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