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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7월 29일 일요일

이승만 우상화에 대한 잡상

1990년대 초반 까지만 하더라도 각급 학교에서는 반공교육이 계속 이루어졌습니다. 저도 초등학교를 졸업한 것이 1990년대 초반이라서 학교에서 500원씩 내고 재미없는 반공영화를 봐야했던 기억이 남아있습니다. 그래도 모든 반공교육이 재미없는 것은 아니어서 북한의 김일성 우상화에 대한 내용은 매우 재미있었습니다. 어린아이의 생각에도 워낙 멍청한 이야기들이었으니 말입니다. 나이를 먹은 뒤 실제로 북한 문헌을 보면서 이런 멍청한 짓을 확인하면서 비웃다 보니 초등학교 시절이 생각나기도 하더군요.

그런데 나이를 먹으면서 이것 저것 주워듣다 보니 지도자 숭배라는 역겨운 문화가 북한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찝찝한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대통령이 당선될 때 마다 반복되는 당선자 찬양은 표현 수위의 차이만 있을 뿐 아첨을 위한 글이라는 점에서 밥맛떨어지는건 마찬가지였으니 말입니다. 그 중에서도 소위 ‘國父’라는 이승만 우상화는 가장 정도가 심한 것이어서 혐오감을 느끼다 못해 즐기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1950년대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하다 보니 이승만 우상화에 대한 글을 심심치 않게 읽게 되더군요.

특히 이런 우상화는 195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심해집니다. 특히 1960년 선거를 앞두고는 이기붕에 대한 선전과 엮여서 더욱 눈뜨고는 못 볼 수준이 되지요. 최근에 읽은 것 중에서 해군의 정훈잡지였던 월간 『해군』 1959년 8월호에 실린 글들이 인상적입니다. 1959년 8월호에는 이승만에 대한 특집과 함께 이기붕에 대한 특집이 함께 실렸는데 적당히 참고 읽어줄 만한 글도 있지만 「豫言者로서의 李承晩 大統領」처럼 민망한 글도 있습니다. 8월호에 실린 글을 한편 인용해 보겠습니다.(문장이 비문 투성이인 것은 넘어가죠)

배달민족의 영원한 태양이시며 정의의 천사이신 우리 국부 리승만박사님 께서 조국의 자주 독립과 국제정의의 실현을 위하여 싸워오신 형극의 길은 그대로 대한민국 중흥의 혈사이고 세계인류 평화의 건설자이시며 님께서 앞으로 실현하시려는 그 원대한 포부는 바로 겨레와 인류가 자유와 평화를 누리기 위하여서는 반듯이 따라야 할 거룩한 정경대도이다.
겨레와 민국의 자유번영을 위하여 90평생을 아낌없이 헌신하여 오신 국부 리승만 박사께서는 유엔한국위원단 감시아래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를 실시케하고 초대 국회의장이 되시였고 헌법을 제정공포한 제헌국회에서 절대다수의 득표로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시였다.
초대 대통령의 중책을 맡으시고 내각조직과 정권이양을 완료한 ‘리’대통령께서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의 자주독립을 세계만방에 선포하시였다. 표지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수립기념식에서 선포문을 낭독하시는 국부 리승만 대통령의 감격어린 모습이다.

「표지설명」,『해군』(1959. 8)

글자만 몇개 바꾸면 북쪽에서도 쓸만한 글이라 하겠습니다. 1950년대 후반으로 가면서 정권재창출의 필요가 높아진 자유당, 특히 자유당의 강경파들은 이승만 우상화를 강화하고 여기에 이기붕 끼워팔기를 시도하는데 이것은 마치 김일성-김정일을 세트로 끼워파는 방식을 연상시킵니다. 다행히도 전자는 실패했지요. 사실 지도자에 초월적인 인격을 부여함으로써 권위를 얻고 이것을 집권의 정당성으로 삼는 방식은 요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정치가로서의 자질이 검증되지 않은 인물들이 단지 막연한 이미지를 팔아먹으면서 집권을 꿈꾸는 오늘날 과거의 망령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이겠지요.

2010년 6월 27일 일요일

1950년 6월 27일 이승만의 서울탈출

6월 27일은 이승만이 서울에서 탈출한 날 입니다. 수도가 함락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함께 죽을 필요는 없겠지만 이승만은 정부와 의회, 그리고 군대를 내팽겨치고 혼자 도망쳤기 때문에 비난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이승만에게는 정치적인 약점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승만이 비밀리에 수도 서울을 탈출한 데 대한 변호는 1983년에 중앙일보를 통해 공개된, 그의 아내였던 프란체스카 도너 리가 기록한 비망록에 나타납니다. 프란체스카의 비망록에서는 이승만은 수도를 사수하려 했으나 신성모 등의 간청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서울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이 글에서는 얼마전 단행본으로 나온 판본을 인용하겠습니다.)

숨 막힐 듯한 긴장과 긴박감 속에 하루가 지났다. 대통령이나 나나 자정을 넘겨 막 잠자리에 눈을 붙였을 때 비서의 다급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머리 맡의 시계는 27일 새벽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신성모 국방장관이었다.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이어 서울시장 이기붕씨와 조병옥씨가 들어왔다.

"각하 서울을 떠나셔야 겠습니다."

신 장관이 간곡히 남하를 권유했다.

"안돼! 서울을 사수해! 나는 떠날 수 없어!"

대통령은 그 이상 아무 말도 않고 문을 쾅 닫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신 장관은 침통한 표정으로 한참을 멍하니 안장 있었다. 나는 대통령을 뒤따라 들어가 침착하게, 그리고 간절하게 부탁했다.

"지금 같은 형편에서는 국가원수에게 불행한 일이 생기면 더 큰 혼란이 일어날 거라고 염려들 합니다. 그렇게 되면 대한민국의 존속이 어렵게 된답니다. 일단 수원까지만 내려갔다가 곧 올라오는 게 좋겠습니다."

내 말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대통령은 "뭐야! 누가 마미한테 그런 소릴 하던가? 캡틴 신이야, 아니면 치프 조야, 장이야. 아니면 만송(晩松, 이기붕씨의 아호)이야. 나는 안 떠나." 하고 고함을 질렀다.

대통령은 나에게는 신 장관을 캡틴 신(그는 한 때 선장을 했다), 조병옥 박사나 장택상 씨는 경찰국장을 지냈다고 해서 치프(chief) 조라고 불렀다. 나는 재차 "모두 같은 의견입니다. 저는 대통령 뜻을 따르겠습니다." 라고 했다.

이때 경찰간부(이름은 기억이 없다) 한 사람이 들어와 적의 탱크가 청량리까지 들이닥쳤다고 메모를 전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당시 적의 탱크는 그보다 훨씬 먼 곳에 있었고, 그것은 대통령의 남하를 독촉하려는 꾀였었다.

나도 "수원은 서울에서 별로 멀지 않아요" 라고 넌지시 거들었다. 신 장관은 때를 놓치지 않고 "각하가 수원까지만 내려가 주시면 작전하기가 훨씬 쉽겠습니다"라며 머리를 숙였다.

새벽 3시 30분. 남행 열차를 타기로 결정됐다.

프란체스카 도너 리/조혜자 옮김, 『6ㆍ25와 이승만 : 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기파랑, 2010), 24~26쪽

프란체스카의 주장에 따르면 이승만은 27일 까지도 서울을 사수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신성모를 비롯한 주요 인사들의 간곡한 설득 끝에 서울에서 탈출하기로 결정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중앙일보에 프란체스카의 비망록이 공개되기 이전에 미국에서 기밀해제된 주한미국대사 무초의 전문에 따르면 이야기는 크게 달라집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25일 밤 10시에 제게 전화를 걸어 자신과 면담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대사관에 있던 신성모 국무총리서리가 저와 동행했습니다. 제가 대통령관저에 도착했을 때 이범석 전국무총리는 이미 도착해 있었습니다. 다음의 내용은 우리가 나눈 대화에 대한 기록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큰 압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는 실룩거리면서 중간에 끊어져 뜻이 통하지 않는 말을 반복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의정부의 상황에 대해 언급했는데 그에 따르면 수많은 전차가 서울을 향해 쇄도하고 있으며 한국군의 능력으로는 저항할 수 가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승만은 국무총리서리에게 한국어나 영어로 말을 걸었으며 가끔씩 이범석에게도 한국어로 말을 걸었습니다. 이 대통령은 내각에서 오늘 밤 정부를 대전으로 옮길것을 결정했다고 말했습니다. 이대통령은 이러한 결정을 내린 것은 자신의 안전을 고려해서가 아니라 정부를 반드시 보전해야 하며 만약 대통령 자신이 공산당에게 잡힐 경우 대한민국의 체제에 심각한 타격이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거듭 강조했습니다. 이대통령은 뜬금없이 국무총리서리에게 군사지식을 가진 "유능한 사람을 여러명" 모아서 현재의 상황에 대해 논의하고 필요한 조치를 결정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이대통령은 만약 신성모가 만족할수 있을 정도로 군사적인 상황에 더 잘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주저없이 그 사람을 위해 국방부장관직을 사임해도 좋다고 말했습니다. 이대통령은 한국측은 미국이 큰 원조를 해 줄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우리는 1천만 달러 정도의 원조를 기대하고 있다... 우리는 갑부인 박흥식(화신 그룹의 소유주인)이 무기 구매를 위해 백만달러를 제공하겠다고 한 것을 알고 있지만 내 생각에는 이미 너무 늦은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국무총리서리는 거듭해서 이대통령이 지시하면 상선단에서 얻은 경험에 따라 최대한 공손한 자세로 "네 각하", "그렇게 하겠습니다 각하"를 연발했습니다. 하지만 신성모도 이대통령의 결정과 명령에 대해 매우 불쾌해하고 있는 것은 분명했습니다. 신성모는 결국에는 실례하겠다고 한 뒤 의정부 지구의 전투에 대한 최신 소식을 전화로 알아보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대통령에게 무기와 병력이 있다는 점과 전차를 저지하기 위해 바주카포와 대전차포, 그리고 대전차지뢰를 사용해 싸워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정부가 서울을 지키도록 설득하려 노력했습니다. 신성모는 57mm 대전차포가 북한군 전차의 장갑을 관통하지 못했다고 말했고 저는 대전차지뢰의 사용을 강조했습니다.(신성모의 주장은 다소 의심스럽습니다. 한국의 도로와 교량은 중전차(extremely heavy tanks)가 다닐 수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만약 정부가 서울을 포기한다면 전투에 지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만약 한국의 상황이 계속 악화된다면 이것을 다시 호전시키는 것은 불가능해 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대통령은 이런 주장에 대해서는 별다른 느낌을 받지 않은 것처럼 보였고 그는 거듭해서 자신은 개인적인 안위에는 관심이 없으며 정부가 사로잡히는 위험을 감수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확신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대통령의 생각을 바꿀수 없다는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되자 자리를 뜨기로 했고 이대통령에게는 대전으로 피신하라고 한 뒤 저는 서울에 남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미국인 여성과 어린이들은 다음날 밝는대로 일찍 철수시킬 것이며 철수가 진행되는 동안 서울 상공에 공중 엄호가 있을 것 이라고 했습니다. 이대통령은 여성과 어린이들은 피신해야 한다는데 동의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미국 사절단의 남성들은 잔류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회의를 끝내고 나오려 하자 이범석은 어설픈 영어로 그가 생각하기에 북한의 원래 전략은 서울 방면으로 기만 공격을 건 뒤 동해안에 게릴라 부대를 상륙시키는 것이었으나 서울 방면으로의 공격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이 지구에 전력을 더 투입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범석은 한국군이 서울 방면으로의 공격에 대항해 완강하게 싸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제가 회의실을 떠나자 이범석은 대통령과 나눌 말이 더 있다고 하면서 남았습니다.

대통령관저를 나서자 신성모는 저에게 다가와 이대통령은 그와 아무런 상의도 하지 않고 정부를 옮기겠다는 결정을 내렸다고 했습니다.

The Ambassador in Korea(Muccio) to the Secretary of State(1950. 6. 26),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50 Vol.VII Korea(U.S.GPO, 1976), pp.141~143

바로 한국전쟁 당시의 기록인 무초의 주장에 따르면 이승만은 이미 전쟁 당일 서울을 포기하고 피신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다른 측근들의 권유가 아니라 스스로 결정한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특히 프란체스카의 회고에서 이승만에게 피신을 권유했다고 하는 신성모는 오히려 이승만으로 부터 어떠한 통고도 받지 못한 상태입니다. 가장 재미있는 점은 이승만이 자신의 안위를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을 "거듭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것 입니다. 한 번 이야기 해도 될 것을 왜 계속해서 이야기 하고 있을까요?^^;;;; 이것은 읽는 분들이 판단하실 문제지요.

무초는 1971년의 인터뷰에서도 이승만이 이미 25일 저녁에 피난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증언을 한 바 있습니다. 세부적인 사항은 이 문서와 약간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은 골격은 대동소이합니다.

하나의 사건에 대해 두개의 다른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는 바로 사건 당시의 기록인 반면 다른 하나는 사건으로 부터 시간이 지난뒤에 씌여진 기록입니다. 게다가 이승만을 변호하는 입장에서 씌여진 기록이지요. 어떤 것이 더 믿을만 한지는 읽은 분들이 판단하시면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