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7년전쟁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7년전쟁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11년 5월 5일 목요일

7년전쟁기 프로이센군 포병의 화력과 기동력 문제에 대한 잡담

오전에 민방위 교육 보충을 다녀온 뒤 책을 읽었습니다. 전에 읽다가 못 읽은 것들을 중심으로 읽었는데 중간에 읽다가 말아 흐름이 끊어지니 잘 안읽히더군요.

오늘 읽은 글 중에서는 쇼왈터(Dennis Showalter)의 “Weapons and Ideas in the Prussian Army from Frederick the Great to Moltke the Elder”가 가장 재미있었습니다. 특히 모든 군대의 문제인 화력과 기동력의 균형에 대한 이야기가 괜찮았습니다. 쇼왈터는 7년 전쟁 시기 프로이센군의 포병의 문제를 재미있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7년 전쟁 초기 프로이센 육군 야전포병의 화포 중 가장 강력한 것은 12파운드포(12-pfünder Geschütz)였습니다. 이것은 야전 기동력을 위해 화력을 다소 희생한 것 이었는데 그 결과 화력은 물론 기동력도 어정쩡한 물건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각 보병연대에 소속된 대대포병의 3파운드 포 또한 기동력을 강조한 물건이었는데 그 결과 화력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 사정거리도 형편없고 탄도도 불량한 졸작이 되었다고 합니다. 당연히 3파운드 포는 일선 보병들의 외면을 받아서 실전에서 보병들이 3파운드 포의 지원을 거부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고 합니다.

결국 12파운드 포의 경우는 요새에 설치된 12파운드포를 야전용 포가에 얹은 것으로 대체되었고 보병대대의 3파운드 포는 조금 더 나은 6파운드포로 교체되었습니다. 그리고 7년 전쟁 후기로 가면서 화력에 대한 의존, 특히 중포병에 대한 의존이 높아졌기 때문에 포병의 규모가 늘어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되면서 프리드리히 2세가 중요시한 야전 기동력이 감소했다는 것 입니다. 18세기의 비포장 도로는 기상 상태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고약한 날씨라도 만나게 된다면 많은 포병을 동반한 프로이센군의 기동력은 떨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포병화력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질 수록 이에 대한 보급도 늘어났는데 많은 화약과 포탄이 함께 이동하면서 포병의 대열은 더 길어졌습니다. 그렇다고 기동성을 위해 포병을 축소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요.

프리드리히 2세는 7년전쟁의 경험으로 새로운 야포를 개발하는 등 포병의 발전에 신경을 쏟았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말이라는 견인수단에 의존하는 한 기동력과 화력의 딜레마에서 벗어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1차대전 이전 까지도 독일군에게 있어 기동력과 화력의 절충점을 찾는 것은 어려운 문제였으니 말입니다.


잡담 하나. 오늘 쇼왈터의 글을 읽으면서 생각을 해 봤는데 보불전쟁 이후 독일군 포병의 발전에 대한 글을 다시 한번 고쳐서 써보는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전에 썼던 글은 좀 두서가 없어서^^;;;;

2008년 5월 23일 금요일

프랑스군의 사단편제 : 1763~1804

며칠 전에 썼던 보병사단 편제의 변화 : 1909~1916라는 글에 대해 배군님이 혁명군에서 대육군으로라는 아주 근사한 답 글을 써 주셨습니다. 아주 재미있는 내용이더군요. 그러고 보니 삼각편제와 사각편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18세기 후반 사단편제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해서 이야기를 먼저 하는게 나았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18세기 후반 프랑스 육군의 보병사단 편제에 대한 이야기를 마저 해보려 합니다.

많은 분들이 잘 아시다 시피 18세기 중반까지 유럽의 전쟁은 기껏해야 5~6만 수준의 야전군들에 의해 수행됐습니다. 연대 이상으로는 상설 편제된 부대 단위가 없다 보니 전쟁이 터지면 급히 만들어지는 군사령부에 의해 지휘가 이뤄졌고 이런 비효율적인 지휘에 의한 전투는 ‘결정적인’ 성과를 거둘 수 없었습니다. 좀 심하게 말하면 양측 모두 사상자만 줄줄이 내는 비효율적인 전쟁이었던 셈입니다.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수 없으니 전쟁은 장기전이었습니다. 에스파냐 계승전쟁은 1701년부터 1713년까지 계속되었고 오스트리아 계승전쟁은 1740년부터 1748년 까지, 7년전쟁은 1756년부터 1763년까지 계속됐지요.
당연히 당대의 군사 사상가들에게 이것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전쟁이 장기전으로 나가니국가재정은 거덜이 나고 승리를 거둬도 손익분기점을 넘기는 것은 간당간당하니 해결책을 모색하는건 당연한 순서였습니다. 공통적인 관심사는 이것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좀 더 효율적인 지휘통제를 가능하게 해서 ‘대박’을 터뜨릴 수 있을까?

처음으로 연대 이상의 부대단위를 생각한 인물은 삭스(Maurice de Saxe) 원수였다고 합니다. 삭스 원수가 구상한 부대 단위는 4개 연대로 편성되며 각 연대는 기병과 포병부대를 배속받는 legion이었습니다. 기본적인 구성은 뒤에 만들어지는 사각편제 사단과 얼추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단을 뜻하는 Division이라는 용어는 오스트리아 계승전쟁 당시에 처음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이때는 야전군 주력과 별도로 움직이는 부대를 일컬을 때 Division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는 군요.

그렇다면 본격적인 사단은 언제 만들어졌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크게 루이 16세 시기에 만들어진 Division과 혁명 이후 확립된 Division을 어떻게 보는가의 문제가 있습니다. 슬프게도 이 어린양은 프랑스어를 모르는지라 영미권의 군사학계에서 이뤄진 논의를 중심으로 이야기 해볼까 합니다.

먼저 이미 구체제하에서 사단편제가 자리를 잡았다는 주장은 윌킨슨(Spencer Wilkinson, 1915)과 큄비(Robert. S. Quimby, 1957)가 대표적입니다. 윌킨슨의 저작은 읽어보질 못 했으니 넘어가고요.;;;;; 큄비는 1957년에 출간한 The Background of Napoleonic Wafare라는 저작에서 1763년 Broglie 원수가 편성한 보병사단과 기병사단 편제가 최초의 근대적 사단편제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큄비의 설명에 따르면 이때 편성된 사단은 2개 연대가 1개 여단을 구성하며 2개 여단이 사단을 구성하는 편제로서 각 여단 예하로 포병이 편제된 구조였습니다.

반면 프랑스혁명 이후에야 사단편제가 본격적으로 자리잡았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로스(Steven T. Ross)는 1965년에 발표한 The Development of the Combat Division in eighteenth-century French Armies라는 논문에서 프랑스혁명 이후에야 사단편제가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로스는 큄비 등이 주장하는 것 과는 달리 7년 전쟁 당시의 사단도 상설 편제가 아니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즉 작전에 돌입해서 각 야전군의 지휘관이 임시로 편성하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보고있는 것 입니다.
로스에 따르면 프랑스가 7년 전쟁 이후 군제개편을 하면서 1776년에 전국을 16개의 구역으로 나누고 각 구역에 Division이라는 명칭을 붙였는데 이것이 처음으로 Division이 상설편제가 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때 만들어진 Division은 전투 부대가 아니라 행정을 담당하는 군관구에 가까운 편제였습니다. 로스에 따르면 각 Division의 기능은 병력의 모집, 보급, 훈련 및 주둔지의 치안 담당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1788년에는 Division이 18개로 늘어납니다. 이때 처음으로 연대들이 여단본부 예하로 편성되었으며 이들 여단은 전투사단으로 개편되었습니다. 즉 루이 16세 말기에는 행정적 단위의 ‘사단’과 전투 부대로서의 ‘사단’이 병존했다는 주장입니다. 루이 16세 당시의 사단은 포병과 기병 등 지원 병과는 결여한 편성이었습니다.
로스에 따르면 구체제하에서는 사단편제가 확립되지 못했습니다. 로스의 주장에 따르면 사단편제가 확립되는 것은 혁명이후인데 그 과정은 대략 이렇습니다.
먼저 1792년에 2개여단으로 구성되는 보병사단 편제가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이때 만들어진 사단은 보병만 가지고 있었으며 포병과 공병 등의 지원부대가 없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혁명으로 장교들이 대량으로 망명한 이유로 사단 단위에서는 보병과 포병을 조율할 수 있는 장교가 부족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숙련된 장교와 부사관의 부족은 연대 이하의 편제도 변화시켰습니다. 이미 1793년 무렵부터 숙련된 병력의 부족으로 여단의 편성을 2개연대-4개 대대에서 2개연대-6개대대로 바꾸는 경우가 늘어났습니다. 즉 1개연대에 전투경험을 가진 1개대대와 전투경험이 없는 2개대대를 혼성 편성하는 편제였습니다. 결국 이것이 1794년에는 공식적인 편제가 됩니다. 즉 4개대대의 여단 대신 3개대대로 편성된 연대를 반여단(demi-brigade)로 하고 2개의 반여단이 다시 여단을 이루며 2개의 여단은 상급제대로 ‘사단’을 두는 것 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공식편제’이고 실제로는 전쟁이 진행중인 와중이라 일선부대의 편성은 중구난방이었습니다. 공식편제가 만들어지긴 했지만 일선의 상황은 엉망이라 대개는 사단의 바로 아래로 여단본부 없이 3개의 반여단을 두는 경우가 가장 흔했습니다. 1개 사단에 배속되는 반여단의 숫자가 들쑥날쑥 이다 보니 사단의 병력은 7,000명에서 13,000명 수준까지 다양했다고 합니다. 결국 공식편제가 있긴 했으나 이때 까지도 기본적으로는 구체제하의 임시적 성격이 남아 있었던 것 입니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사단이 포병을 배속받은 점은 특기할 만 했으며 1796년 이후로는 사단에 배속된 지원 부대의 규모도 체계화되고 충실화되어 갑니다.

이후의 발전과정은 연구자들의 견해가 거의 일치합니다.
1796년 이후 프랑스군의 사단은 일시적으로 여단 본부 없이 사단 예하로 3개 반여단이 배속되는 편제를 취하게 됩니다. 하지만 1799년에 다시 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1794년 처럼 사단 편제가 야전군 별로 들쑥날쑥한 형태를 취했다고 합니다. 결국 통령정부 하에서 비로서 사각편제의 사단이 자리를 잡게 됩니다. 참고로 실험적으로 운용되던 군단(corps d’armee) 편제도 1800년에 확립되고 1802~1804년을 거치면서 야전군-군단-사단(사각편제)가 완성됩니다. 또한 1790년대에 광범위하게 시도했던 모든 병종을 단일 사단으로 통합하려는 시도를 버리고 기병도 사단 단위로 편제하게 됩니다. 이렇게 효율적 지휘통제 체제를 확립한 프랑스군은 1805~1806년에 걸쳐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러시아를 차례대로 풍비박산 내면서 전 유럽을 벌벌떨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