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B17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B17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10년 6월 5일 토요일

1930년대 미 육군 항공대의 폭격기 우월론에 대한 궁금증

다들 잘 아시는 이야기 겠지만 1930년대 미국 육군항공대의 주류는 폭격기의 발전이 전투기를 앞지르고 있어서 미래전에서 폭격기가 전투기를 압도할 것이라는 예측을 하고 있습니다. 에. 이런 견해를 뭐라고 부르는게 좋을지 몰라서 그냥 "폭격기 우월론"**이라고 부르겠습니다.

1차대전 직후만 하더라도 미육군 항공대는 폭격기에 전투기의 호위를 강조했습니다. 1922년에 소령으로 제1추격항공단(1st Pursuit Group) 단장이었던 스파츠(Carl Spaatz)는 폭격기 호위를 위해 중무장에 폭격기와 같은 항속거리를 가지는 전투기 개발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으며 역시 육군항공대 장교였던 셔먼(William Sherman)도 1926년에 출간한 저서에서 폭격기에 대한 호위기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이 시기 미육군항공대가 직면한 문제는 폭격기의 항속거리는 길어지는데 호위 전투기는 그것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1925년에서 1926년에 걸쳐 증가연료탱크를 사용하는 방식이 시험되어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증가연료탱크를 장착할 경우 공기저항을 높여 전투기의 성능을 저하시킬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당장 채택되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 전투기가 증가연료탱크를 장착한 상태에서 폭격기의 순항속도를 따라갈 수 있겠느냐는 문제가 대두되었습니다.1) 항속거리가 같더라도 폭격기와 속도를 맞춰 날 수 없다면 호위기는 무용 지물이지요.

이런 상황에서 육군항공대에 "전략폭격" 이론이 도입되기 시작하고 폭격기가 기술적으로 진보하자 점차 전투기의 역할에 대한 회의감이 높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1930년대 초반에 들어오면서 미육군항공대에 전략폭격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해지기 시작했습니다. 1931년에 발행된 육군항공대 전술학교(Air Corps Tactical School)의 교재는 "적 부대를 상대로 한 작전은 제외하고" 육군항공대의 임무 대부분을 전략적 목표에 맞춰야 하며 동시에 "정치적 목표" 즉 적국의 민간인에 대한 폭격도 명시하고 있었습니다.2)

게다가 폭격기의 급속한 발전은 이런 경향을 더 가속화 했습니다. 전투기가 폭격기에 대해 열세를 보이는 경향은 신형폭격기의 등장 이전 부터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1931년에 실시한 워게임에서 제1추격항공단은 가상적의 폭격기를 단 한대도 요격하지 못하는 패배를 당합니다.3) 그리고 기술적으로 발전한 신형 폭격기가 등장하면서 폭격기 우월론은 더 힘을 받게 됩니다. 1931년 육군항공대가 개량형 중폭격기(advanced type heavy bomber) 사업을 발주했을 때 응모한 마틴(Martin)사의 폭격기는 시속 330km/h를 돌파해 당시 육군항공대의 주력 폭격기였던 B-3A의 속도(160km/h)를 두 배나 능가했습니다. 폭탄탑재 능력도 거의 2톤에 육박해(4380파운드) 1톤 남짓에 불과한 B-3A를 압도하고 있었습니다.4) 그야말로 엄청난 기술적 진보였습니다. 마틴사의 폭격기는 B-10으로 정식채택되었습니다. B-10의 성능은 전투기가 폭격기를 효과적으로 요격할 수 없다는 견해를 더 강화했습니다. 1934년에 캘리포니아에서 실시된 모의교전에는 B-10의 개량형인 B-12와 당시 육군항공대의 주력 전투기였던 P-26이 대결했는데 결과는 B-12의 승리였습니다. 이 모의교전 결과 육군항공대 내에서는 "최전선의 비행장에서 작전하는 추격기나 전투기는 우발적인 경우가 아니면 현대적인 폭격기를 요격할 기회가 별로 없을 것"이라는 평가까지 나왔습니다. 1930년대 후반에 등장한 P-35나 P-36도 B-17에 대해 열세라는 평가를 받았다고 하지요.5) 폭격기 옹호론자들은 빠른 속도에 중무장을 갖춘 폭격기는 전투기가 요격하기 어려운 상대라고 생각했습니다. 대표적인 전략폭격 지지자이고 1930년대 초 육군항공대 전술학교의 폭격기 교관이었던 조지(Harold L. George) 중위는 1932-33년 사이에 한 강의에서 폭격기 한 대당 6정의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편대 대형으로 상호 엄호가 가능하기 때문에 폭격기는 "공격해 오는 적 전투기에게 까다로운 상대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6)

사실 이러한 주장은 당시 미육군 항공대가 보유한 전투기들이 고속폭격기를 요격하기에는 성능이 부족했기 때문에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931년과 1934년의 훈련에 사용된 P-26은 기관총 2정이라는 빈약한 무장에 느린속도를 가진 기종이었기 때문에 중무장한 폭격기를 상대하기는 버거웠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가상 적국이 개발하는 전투기도 미국의 전투기들 처럼 별 볼일이 없지는 않을 것이라는 겁니다. 다들 잘 아시다시피 플라잉 타이거즈의 두목이 되어 이름을 떨친 셴놀트는 초창기의 폭격기 우월론에 강한 회의감을 드러냈습니다. 셴놀트는 여러 차례의 훈련에서 전투기가 폭격기를 요격하는데 실패했지만 이것은 전투기를 집중운용해 화력을 극대화 하고 전투기간의 유기적인 협동전술로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7) 그리고 폭격기를 조기에 포착해서 요격하는 데 대해서는 전자기술의 발전을 이용한 조기경보체계가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당시의 기술 수준으로는 무전기나 유선전화를 가진 대공감시원을 활용하는 방안을 꼽았습니다.8)

구식화된 전투기로도 충분히 신형 폭격기들을 상대할 수 있다는 주장이 있었던 만큼 적이 신형전투기를 가지게 된다면 폭격기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생각도 있을법 한데 이상하게도 1930년대의 폭격기 우월론자들은 이런 가능성을 과소평가했습니다. 그 이유가 참 궁금하지요. 당시 미육군 내부의 의사결정과정이 어떠했는지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결과적으로는 셴놀트가 옳았고 폭격기 만능론은 허상이라는 것이 드러났지만 분명히 1930년대 미육군항공대 내에서는 폭격기를 과대평가할 이유가 충분했을 테니 말입니다. 만약 기회가 된다면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초반 사이 미육군 항공대 내의 관련 문건을 직접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쨌거나 당시의 사회경제적 상황은 미육군항공대가 폭격기와 전투기 중 어느 한 쪽에 집중할 수 밖에 없는 조건을 만들었습니다. 대공황의 여파로 예산 부족에 시달린 미육군은 폭격기와 전투기 개발을 동시에 추진하기 보다는 폭격기 개발에 더 많은 예산을 투자하는 방향을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의 논리는 꽤 단순했습니다. 첫 번째로는 B-10이나 B-17과 같이 전투기의 호위가 필요없는 장거리 폭격기가 존재하고 있으니 전투기는 필요 없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런 장거리 폭격기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적이 미국 본토를 직접 타격하기 이전에 타격해서 제압할 수 있으므로 요격기의 필요성도 감소한다는 것 이었습니다;;;;9) 강력한 공격력을 가지게 되었으나 방어는 부차적인 것이라는 논리이죠;;;;

1930년대의 미육군항공대가 모든 면에서 폭격기 중심으로 돌아갔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마도 전투기 부대 지휘관으로 1920년대 초반에 전투기의 필요성을 강조하던 스파츠가 1920년대 후반 이후로는 계속해서 폭격기 부대를 지휘하게 된 것 일겁니다.


**일단 "전투기 무용론"으로 부르지 않는 이유는 폭격기 지지자들 중에서도 전투기의 역할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인물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 Tami D. Biddle, Rhetoric and Reality in Air Warfare : The Evolution of British and American Ideas about Strategic Bombing, 1914~1945(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2), p.166
2) Conrad C. Crane, Bombs, Cities, and Civilians : American Airpower Strategy in World War II(University Press of Kansas, 1993), p.21
3) Daniel Ford, Flying Tigers : Claire Chennault and the American Volunteer Group(Smithsonian Institution Press, 1991), p.15
4) David E. Johnson, Fast Tanks and Heavy Bombers : Innovation in the U.S.Army 1917-1945(Cornell University Press, 1998), p.154
5) Biddle, ibid., p.168
6) Johnson, ibid., p.155
7) Ford, ibid., p.16
8) Biddle, ibid., p.169
9) Richard G. Davis, Carl A. Spaatz and the Air War in Europe(Washington, Center for Air Force History, 1993), p.28

2008년 8월 5일 화요일

미육군항공대의 공세에 대한 독일공군의 대응 : 1945년 2월 부터 5월 까지

보덴플라테Bodenplatte 작전으로 독일공군의 전투기 부대는 사실상 붕괴되고 맙니다. 그러나 사정이 어찌되었건 근성(???)의 독일공군은 끝까지 싸움을 계속합니다. 이 글에서는 보덴플라테 작전 이후 대충 정비를 마친 독일공군 주간전투기 부대가 항복까지 서부전선에서 미육군항공대의 주간 전략폭격에 맞선 마지막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1945년 2월 1일, 독일본토방공을 담당한 제국항공군Luftflotte Reich의 주간전투기 부대는 제1전투기사단1. Jagddivision 예하에 다음과 같이 편성되어 있었습니다.


부대명
기 종
Stab./JG 7
Me 262
I./JG 7
Me 262
III./JG 7
Me 262
JGr 10
Fw 190
II./ZG 76
Me 410
Stab./JG 300
Fw 190
I./JG 300
Bf 109
II.(Sturm)/JG 300
Fw 190
III./JG 300
Bf 109
IV./JG 300
Bf 109
IV./JG 54
Fw 190
Stab./JG 301
Fw 190
I./JG 301
Fw 190
II./JG 301
Fw 190
III./JG 301
Ta 152
II./JG 3
Bf 109
Stab./JG 400
Me 163
I./JG 400
Me 163
II./JG 400
Me 163


편제를 보면 아시겠지만 상당수의 주간전투기 부대들이 보덴플라테 작전 수행을 위해서 제2전투기군단II . Jagdkorps으 로 이동한 뒤 심각한 장비와 인력의 손실을 입어 2월 초의 시점에서는 재편성 중이었기 때문에 제1전투기사단에는 저 정도의 전력밖에 없었습니다. 독일의 야심찬 아르덴느 공세는 주저앉았고 이를 지원하기 위한 보덴플라테 작전도 심각한 손실을 내고 종결되었는데 승리의(!) 미국은 빌빌거리는 독일공군이 숨돌릴 새도 없이 몰아치기 시작했습니다. 결정적으로 소련군의 동계 대공세로 그나마 가용 가능한 전투기 부대들이 동부전선(이라고 해 봐야 독일 동부)로 몰려가는 통에 미군 전략폭격기 부대를 저지할 전력은 태부족이었습니다. 게다가 방공의 중핵인 대공포 부대도 동부전선의 붕괴를 막기 위해 지상전에 돌려지는 상황이었습니다. 1945년 1월 말 독일공군은 지상부대 지원을 위해 110개 중대공포 포대와 58개 중형/경대공포 포대를 동부전선으로 이동시켰습니다.

그나마 긍정적인 진전이 있었다면 JG 7과 KG(J) 54 두 비행단이 Me 262를 편제에 가깝게 보충 받았다는 정도였지만 전체적으로 우울한 상황을 놓고 보면 그야말로 조족지혈에 불과한 개선이었습니다. 2월 9일 미 제8공군은 1,296대의 중폭격기를 출격시켜 합성석유공장과 주요 철도시설을 타격했는데 독일공군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서 67대의 프로펠러전투기와 숫자 미상의 Me 262를 발진시켰습니다. 70대도 안되는 프로펠러전투기들은 미군 호위전투기의 벽을 뚫지 못했고 Me 262의 전과도 매우 신통 찮았습니다. 독일측은 제트기들이 8대의 B-17과 1대의 P-51을 격추했다고 주장했는데 그 반대로 미군의 호위 전투기에 의해서 6대의 262를 잃었습니다. 이 손실은 모두 폭격기 부대를 개편한 KG(J) 54에서 나왔는데 이 비행단의 조종사들은 전투기 전술에는 전혀 익숙하지 못해 이런 참담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에 있었던 드레스덴 주간 공습에서도 독일공군은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 했습니다. 2월 14일 제 8공군은 1, 2, 3 항공사단 소속의 중폭격기 1,377대를 출격시켜 드레스덴과 켐니츠Chemnitz를 공격했습니다. 독일공군은 이에 대항해 JG 300과 301소속의 프로펠러전투기 146대와 수 미상의 Me 262를 출격시켰지만 B-17 한대를 격추하는데 그쳤고 손실은 20대의 프로펠러전투기와 1대의 Me 262였습니다. 2월 9일의 경우도 그랬지만 보덴플라테 작전의 여파에서 회복되지 못한 독일공군의 주간전투기 부대는 두터운 호위전투기의 벽을 뚫을 수 없었습니다.

2월 22일, 미 육군항공대는 클라리온CLARION 작전을 발동, 23일까지 독일 본토의 철도시설에 대한 집중공격을 감행합니다. 이 공격은 미 육군항공대가 1944년 10월 이래로 야심차게 준비한 작전으로 일거에 독일의 교통체계를 붕괴시켜 독일의 전쟁수행능력에 타격을 입히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이날 독일공군은 이륙해봐야 일방적으로 학살당할것이 뻔한 프로펠러 전투기들은 아예 출격시키지 않고 JG 7의 Me 262 32대를 출격시켰습니다. 32대의 제트기는 2대의 B-17과 4대의 P-51을 격추시켰지만 피해도 커서 32대 중 6대가 격추됐습니다. 독일공군의 무력함에도 불구하고 독일철도청Reichsbahn은 폭격당한 철도망을 기적적으로 복구시키는데 성공합니다. 물론 전쟁의 결과에는 하등 영향을 끼치지 못 했지만 말입니다. 25일의 공격에는 독일공군이 가용한 전투기부대를 모두 동원했지만 역시 성과는 신통치 못했습니다. 미 육군항공대는 2월 19일부터 3월 4일까지 매일 1,000대 이상의 중폭격기를 출격시켰고 독일공군의 저항은 매우 미약했습니다. 3월 2일에는 합성석유 공장에 대한 폭격을 저지하기 위해서 I./KG(J)의 Me 262 14대와 JG 301, JG 302의 Fw 190, Bf 109, Ta 152 198대가 출격했는데 전과는 폭격기 3대와 전투기 5대 격추에 불과했고 오히려 Me 262 2대와 프로펠러 전투기 43대를 잃는 끔찍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결국 2월~3월의 절망적인 전투 이후 미군의 호위전투기들을 상대할 수 없는 프로펠러 전투기 부대의 출격은 극도로 제한되었고 유일하게 이를 돌파할 수 있는 ME 262를 장비한 부대와 대공포대만이 꾸준히 미군을 상대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독일공군의 전력 증강은 공군중장이 지휘하는 특이한 제트기 부대 하나가 새로 창설된 것 과 R4M 공대공 로켓탄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 정도였습니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독일 공군의 제트기 운용 전술은 3월에 접어들면서 상당히 개선되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3월 18일, 미 제8공군은 약 1,300대의 중폭격기를 출격시켜 베를린에 대한 대규모 폭격을 감행했습니다. 이날 전투에서 바이센베르거Weisenberger 소령이 지휘한 JG 7의 ME 262들은 R4M 공대공로켓을 대량으로 사용해 미군측에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이날 출격한 제트기들은 1대만 격추되었고 그 대신 6대의 B-17을 격추시켰으며 이 외에도 수십대의 폭격기에 치명적인 파손을 입혔습니다. 이날 전투는 미군측의 주목을 끌었고 3월 21일 둘리틀은 주요 지휘관 회의에서 독일 공군의 제트기 부대가 위협적인 신전술을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지적했습니다.
미 군은 다음날부터 21일 까지 제트기 비행장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는데 이 전투로 2~3월간 꾸준히 싸워온 JG 300과 301은 더 이상 대규모 작전이 불가능할 정도의 타격을 입었습니다. 특히 JG 301은 이 전투의 결과 2개 비행대대를 해체하게 됩니다. 또 3월 22일과 23일에 걸친 비행장 공습작전으로 재편성 중이던 III./JG 54도 사실상 괴멸되어 더 이상 전투에 나서지 못하게 됩니다. 24일에는 JG 300의 돌격비행대대인 II.(Sturm)/JG 300과 III./KG(J) 54가 미군의 비행장 공습으로 괴멸됩니다. 특히 후자는 단 한차례의 공습으로 50대의 ME 262를 잃었습니다. 이날 하루 동안 서부전선의 독일 전투기 부대는 막대한 수의 항공기 뿐만 아니라 31명의 조종사가 전사 또는 실종되는 타격을 받았습니다. 물론 미군도 비행장 공격에서 전투기부대를 중심으로 큰 피해를 입었지만 붕괴직전의 독일공군과 비교한다면 미약한 손실이었습니다. 3월 25일부터 29일까지 독일의 기상상태가 악화되어 미 육군항공대의 주간출격은 제한되었지만 이미 붕괴된 독일공군에게는 숨돌릴 시간도 되지 못 했습니다. 미군은 30일과 31일 다시 주간폭격을 재개했고 31일에는 영국공군 폭격기사령부의 중폭격기 469대가 가세했습니다. 이날은 JG 7이 최대의 전과를 올린 날이었는데 Me 262들은 호위전투기 없이 비행하던 캐나다 공군의 폭격기들을 요격해 한대의 손실도 없이 11대를 격추시켰습니다.

4월로 접어들면서 독일공군의 상황은 전형적인 붕괴직전의 혼란 상태였습니다. 4월 9일 제국항공군 소속 전투기 부대는 다음과 같이 편성되어 있었습니다.


부대
기종
보유/가동
부대
기종
보유/가동
I./JG 2
Fw 190
5 / 3
III./JG 26
Fw 190
35 / 15
II./JG 2
Fw 190
8 / 4
I./JG 27
Bf 109
29 / 13
III./JG 2
Fw 190
12 / 9
II./JG 27
Bf 109
48 / 27
Stab./JG 4
Fw 190
6 / 4
III./JG 27
Bf 109
19 / 15
II./JG 4
Fw 190
50 / 34
I./KG(J) 54
Me 262
37 / 21
III./JG 4
Bf 109
61 / 56
Stab./JG 301
Ta 152
3 / 2
Stab./JG 7
Me 262
5 / 4
I./JG 301
Fw 190
35 / 24
I./JG 7
Me 262
41 / 26
II./JG 301
Fw 190
32 / 15
II./JG 7
Me 262
30 / 23
II./JG 400
Me 163
38 / 22
Stab./JG 26
Fw 190
4 / 3
JGr.10
Fw 190
15 / 9
I./JG 26
Fw 190
44 / 16
JV 44
Me 262
30 / 15
II./JG 26
Fw 190
57 / 29
[표 출처 : Alfred Price, The Last Year of the Luftwaffe : May 1944 to May 1945, (Greenhill Books, 2001), pp.152~153]

4월의 전투에서 독일 공군의 전투기 부대는 거의 조직적인 저항을 보이지 못 했습니다. 오직 제트기를 장비한 부대만이 최후까지 조직적인 저항을 했을 뿐 이것 조차도 미육군항공대의 호위 전투기 부대에 압도되는 형편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4월 10일 미 제8공군이 1,315대의 중폭격기를 출격시켰을 때 독일측은 63대의 ME 262를 출격시켜 10대의 폭격기를 격추시켰지만 905대에 달하는 호위 전투기들은 착륙을 시도하는 제트기들을 공격해 27대를 격추시켰습니다. 4월 중순으로 접어들면서 독일 공군은 남은 전력을 남부독일과 체코로 이동시켜 저항을 계속했지만 이미 이 시점에서는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이 무렵 JG 1이 He 162로 장비를 교체하는 등 필사적인 노력이 있었지만 전황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었습니다.
4월 19일의 전투는 ME 262 부대가 미 제8공군의 중폭격기를 마지막으로 격추한 전투가 되었습니다. 이날 제490폭격비행단은 6대의 B-17을 잃었는데 이들은 독일 공군의 제트기에 의해 마지막으로 격추된 미군의 중폭격기였습니다. 4월 25일 미 제8공군은 589대의 B-17과 B-24를 출격시켰는데 독일공군 전투기 부대의 저항은 없었으며 6대의 폭격기가 대공포에 격추되었습니다. 이것은 제8공군의 마지막 전략폭격 임무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독일공군의 저항은 끝났습니다. 1945년 2월부터 5월까지 서부전선의 주간공중전은 미군이 독일 공군을 일방적으로 두들기는 양상으로 전개되었지만 미군의 손실도 결코 적다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 기간 중 미 제8공군을 중심으로 북서유럽에서 작전한 미 육군항공대의 항공기 손실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1. 중폭격기 손실
손실원인
2월
3월
4월
5월
항공기
14
63
72
1
대공포
157
164
77
4
기 타
25
39
41
2
총 계
196
266
190
7


2. 중형폭격기/경폭격기 손실
손실원인
2월
3월
4월
5월
항공기
4
5
11
0
대공포
68
52
18
0
기 타
13
32
17
0
총 계
85
89
46
0


3. 전투기 손실
손실원인
2월
3월
4월
5월
항공기
38
76
36
5
대공포
208
244
207
16
기 타
53
99
100
15
총 계
299
419
343
36


4. 손실 총계
손실원인
2월
3월
4월
5월
항공기
56
144
119
6
대공포
433
460
302
20
기 타
91
170
158
17
총 계
580
774
579
43
[표 출처 : Richard G. Davis, Carl A. Spaatz and the Air War in Europe, (Center for Air Force History, 1993), Appendix 23]

여기에 지중해전역으로 구분되는 15공군등의 손실을 더하면 상당한 규모가 됩니다. 1945년 2월 시점에서 독일의 방공망은 붕괴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군측에 상당한 손실을 입혔던 것 입니다.



참고서적
Donald Caldwell and Richard Muller, The Luftwaffe over Germany : Defense of the Reich, (Greenhill Books, 2007)
Richard G. Davis, Carl A. Spaatz and the Air War in Europe, (Center for Air Force History, 1993)
Roger Freeman, The Mighty Eight : A History of the Units, Men and Machines of the US 8th Air Force, (Cassell, 2000)
Werner Girbig, Start im Morgengrauen : Eine Chronik vom Untergang der deutschen Jagdwaffe im Westen 1944/1945, (Motorbuch Verlag, 1975)
Alfred Price, The Last Year of the Luftwaffe : May 1944 to May 1945, (Greenhill Books, 2000)
Edward B. Westermann, FLAK : German Anti-Aircraft Defenses, 1914~1945,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