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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월 8일 수요일

회색지대?

잘 아시다 시피 독소전쟁 초기 소련은 막대한 인명손실을 입었습니다. 수많은 전사자와 부상자 외에도 수백만명이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독일측의 주장에 따르면 1941년 전역에서 생포된 포로는 다음과 같습니다.

표1. 1941년 전역에서 생포된 소련군 포로
기간
사병
장교
사병(누계)
장교(누계)
6.22-6.30
112,784
645
112,784
645
7.1-7.10
253,588
1,324
366,372
1,969
7.11-7.20
234,566
405
600,738
2,374
7.21-7.31
213,092
648
813,830
3,022
8.1-8.10
271,714
1,625
1,085,544
4,647
8.11-8.20
211,225
647
1,296,769
5,294
8.21-8.31
215,641
522
1,512,410
5,846
9.1-9.10
203,668
749
1,716,078
6,595
9.11-9.20
234,574
605
1,950,652
7,200
9.21-9.30
550,961
1,553
2,501,613
8,753
10.1-10.10
288,485
861
2,790,098
9,614
10.11-10.20
499,476
3,392
3,289,574
13,006
10.21-10.31
249,817
931
3,539,391
13,937
11.1-11.10
152,296
742
3,691,687
14,679
11.11-11.20
85,786
312
3,777,473
14,991
11.21-11.30
53,852
64
3,831,325
15,055
12.1-12.10
39,596
74
3,870,921
15,129
12.11-12.20
19,277
3,890,198
15,129
12.21-12.31
16,567
67
3,906,765
15,196
[표출처 : Hartmut Schustereit, Vabanque : Hitlers Angriff auf die Sowjetunion 1941 als Versuch, durch den Sieg im Osten den Westen zu bezwingen, (Mittler&Sohn, 1988), p.73]

러시아에서는 독일측 주장이 과장되었다고 보고 있으며 1941년의 인명손실 중 포로 및 행방불명을 합치면 2,335,482명 이라고 주장합니다.1) 독일과 러시아의 통계간에 편차가 매우 커서 150만명이 넘을 정도입니다. 어쨌든 1941년 전역에서는 민스크, 스몰렌스크, 우마니, 키예프 전투와 같은 대규모 포위 섬멸전이 이어졌고 전투마다 수십만명의 포로가 발생했습니다. 민스크 포위망에서 30만명, 우마니에서10만3천명, 비텝스크에서 45만명, 스몰렌스크에서 18만명, 키예프에서 66만5천명, 체르니고프에서 10만명, 마리우폴에서 10만명, 브야즈마에서 66만3천명의 포로가 발생했다고 하지요.2)

그러나 1941년의 대규모 포위전은 큰 성과를 거두기는 했지만 완벽하게 수행되지는 않았습니다. 수십만명이 포위망을 빠져나갈 수 있었고 그중 일부는 소련군 전선으로 돌아가 다시 한번 싸울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러지 못하고 후방에 남게된 인원들은 나름대로 빨치산을 조직하여 독일군을 후방에서 괴롭히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여기까지는 꽤 잘 알려진 ‘미담’이지요.

소련이 붕괴된 이후의 연구들은 이러한 한계를 벗어나서 다양한 분야로 관심을 돌리고 있습니다. 냉전기 소련에서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었던 존재들이 위에서 언급한 포위망을 벗어나 전열에 합류한 용사나 빨치산들이었다면 냉전 이후에는 이전까지 관심을 두지 않았던 회색분자들에게도 연구자들의 관심이 주어진 것 입니다.
얼마 전 읽은 한 연구에서는 전쟁 초기 독일군의 포위망을 벗어났지만 다시 전열에 복귀하거나 빨치산에 합류하지 않은 군인들에 대한 언급이 있었습니다. 적극적으로 싸운 것은 아니지만 독일의 부역자가 된 것도 아닌 일종의 회색지대 같은 존재들인 것 입니다. 이런 존재들이 얼마나 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1943년에 NKVD가 해방된 지역에서 582,515명에 달하는 전직 군인들을 적발한 것을 보면 그 규모가 엄청났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1944년 1월 1일에서 10월 1일까지 해방된 지역에서 354,592명(이중 장교는 50,441명)의 전직 군인들을 적발해 냈다고 합니다. 대략 전쟁 기간 중 이런 식으로 적발해서 다시 군대에 편입시킨 인원이 939,700명에 달한다는 기록이 있다고 하지요.3) 이들은 독일군의 포위망을 벗어난 뒤 그냥 민간인으로서 후방에 숨어서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고 합니다. 1941년에서 1942년 사이에 이렇게 숨어든 사람들은 전세가 역전되어 NKVD와 SMERSh가 자신들을 잡으러 올 것이라는 사실은 결코 생각하지 못했겠지요. 이런 식으로 다시 징집된 이들은 당연하게도 매우 사기가 낮아서 전투가 치열해 지면 뒤로 돌격하는 경우가 꽤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렇게 해방된 지역에서 탈영병으로 의심받아 체포된 이들은 더 심한 처벌을 피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후방에 남게 되었음을 증명할 필요가 있었다고 합니다. 보통 군인 출신으로 드러난 경우 의도적으로 탈영했거나 독일군에게 협력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세명의 증인을 출두시켜야 했다고 합니다. 물론 결백함을 입증해봐야 다시 군대에 징집되는 것 이었지만 그러지 못한다면 죄수부대나 정치범수용소 특급을 탔다고 하지요.4)

‘애국자’ 들이나 블라소프와 같은 ‘반역자’들의 이야기는 오래전 부터 잘 알려져 있었지만 이렇게 어중한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냉전이 종결되고 나서야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뭐랄까요. 정치적 환경의 변화로 기존에는 조명을 받지 못했던 이야기들에 관심이 주어졌다고 해야 할까요. 냉전이 종식된 뒤 러시아와 서방 모두 소련 시기의 역사에 대해 이전 보다는 조금 더 냉철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이렇게 회색지대라 할 수 있는 부분에도 주목하게 된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1) G. F. Krivosheev, Soviet Casualties and Combat Losses in the Twentieth Century, (Greenhill Books, 1997), p.96
2) G. F. Krivosheev, ibid., p.235
3) Roger R. Reese, Why Stalin’s Soldiers Fought : The Red Army’s Military Effectiveness in World War II,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11), p.235
4) Catherine Merridale, Ivan’s War : Life and Death in the Red Army, 1939~1945, (Metropolitan Books, 2006), pp.251~252


잡담하나. 왠지 도표를 넣으면 알맹이 없는 글에 뭔가가 생긴다는 착각을 하게 됩니다. 요즘 들어 쓸데없이 도표를 집어넣는 원인이 된 듯 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