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월 11일 목요일

투하체프스키 - 가끔 지나치게 높게 평가되는 장군

이상하게도 역사에 관심을 가진 분 들 중에서는 특정 인물을 지나치게 과대 평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2차 대전과 관련된 인물 중 한국에서 괴이할 정도로 과대평가 되는 인물을 몇 명 꼽아 보면 롬멜, 주코프 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 좀 더 추가하면 투하체프스키 정도가 되겠군요.

투하체프스키는 그의 비극적 최후 때문인지 몰라도 실제 능력 이상으로 과대 평가됐다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 특히 독소전 초기의 패배는 투하체프스키가 있었다면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은 난감하기 그지없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독소전 초기의 대 패배는 소련의 구조적인 문제가 가장 큰 원인이었지 지휘관들이 특출나게 무능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투하체프스키가 필요 이상으로 높게 평가되는 것은 그가 독소전 이전에 죽어서 2차 대전에서 능력을 검증받을 일이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제가 인터넷에서 읽었던 국내의 투하체프스키에 대한 글 중에는 투하체프스키가 살아 있었다면 독소전쟁 초반에 독전대 같은 무자비한 방법을 쓰지 않고 군대를 지휘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습니다. 글쎄요?

제가 자주 우려먹는 책에서 한 구절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전략)

소련 정부는 진압작전을 위해서 투하체프스키를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사기저하로 와해 상태에 빠진 제 7군을 대신해 간부후보생에서 선발된 인원이 공격을 지휘하게 됐다. 참모대학을 졸업한 디벤코, 페드코, 우리츠키가 페트로그라드에 배치됐다. 제 10차 전당대회에서 선출된 대표단은 정치 공작을 준비하기 위해 동원했다.

투하체프스키의 공격은 3월 7일 새벽에 시작됐다. 공격 부대는 간단한 위장을 한 채 해안포대의 지원을 받으며 반란군의 진지를 향해 돌격했다. 크론슈타트에 배치된 야포와 기관총은 빙판을 따라 공격해오는 진압군을 분쇄해 버렸다. 공격부대의 제 2파도 반란군의 야포에 큰 피해를 입자 병사들은 돌격 명령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간부들은 권총으로 병사들을 위협해서 겨우 앞으로 내몰 수 있었다. 바르민의 증언에 따르면 보르쉐프스키는 병사들이 빙판위에 있는 작은 보트의 뒤에 엄폐하고 움직이지 않자 병사 중 두 명을 끌어내 그 자리에서 총살해 버리고 공격을 명령했다. 이렇게 되자 진압군에 소속된 병사들 중 일부는 반란군에 합류해 버렸다.

투하체프스키는 자신의 첫번째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3월 17일, 방법을 바꿔 공격을 재개했다.

John Erickson, The Soviet High Command : A Military-Political History, 1918-1941, p.122


이 글은 비록 짧고 단편적인 글 이지만 투하체프스키 역시 내전과 그 이후의 혼란기에는 다른 소련 지휘관들과 마찬가지로 저런 과격한 방식에 의존했음을 잘 보여줍니다. 사실 저런 전술단위의 문제는 그야말로 하급 지휘관들과 병사들의 자질 문제에 달려 있는 것이지 고급지휘관의 역량이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마 투하체프스키가 독소전 발발 당시 까지 살아 있었더라도 붉은 군대 자체가 구조적인 결함 상태를 못 벗어났다면 그 역시 신통한 활약을 펼치긴 어려웠을 겁니다. 갑작스레 두 세 단계씩 진급한 중간 간부들에 기본적인 교육도 받지 못하고 임관된 초급 장교들, 그리고 훈련 부족의 사병들로 만들어진 군대를 가지고 실전경험이 풍부하고 잘 훈련된 독일군을 맞아 참패를 모면했다면 그건 정말 놀라운 일이었겠지요. 하지만 과연 1941년에 어떤 고급 지휘관이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투하체프스키는 분명히 매우 유능한 군인이긴 하지만 국가와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까지 뒤바꿀 정도로 뛰어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아니, 그런 사람이 있다면 인간이 아니라 신이라고 불러도 되겠지요.

역사 문제를 인식하는데 특정 인물에 절대적인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 아닌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