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6월 5일 목요일

2차대전 중 미-영 공군 지휘관들의 갈등 문제

서로 잘났다는 사람들을 모아 놓으면 이런 일이 발생한다는군요.

비록 영국 공군과 미국 육군항공대의 경우 육군, 해군에서 있었던 것 만큼 지휘관들간의 갈등이 심각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육군이나 해군보다 더 나았다고 보기도 어렵다. 영국과 미국의 많은 고위 장교들은 그들의 뛰어난 능력과 전쟁 이후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서로간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고위 지휘관들 중에서 연합원정공군(AEAF, Allied Expeditionary Air Force) 사령관 리-맬러리(Trafford Leigh-Mallory) 대장(Air Chief Marshal)은 같은 영국인인 테더(Arthur Tedder)를 싫어했으며 또 자신의 하급자이며 제 2전술항공군(Second British Tactical Air Force) 사령관인 커닝햄(Arthur Coningham)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커닝햄 역시 자신의 상급자인 리-맬러리를 혐오했기 때문에 테더의 역할 중 하나는 커닝햄과 리-맬러리 사이를 중재하는 것 이었다.
1943년 12월 미 전략공군(U. S. Strategic Air Force) 사령관에 임명된 스파츠(Carl Spaatz) 중장역시 리-맬러리와 사이가 나빴으며 그는 전술공군 출신이 자신의 전략 공군부대를 건드리는 것을 용납하려 하지 않았다. 이점은 당시 영국공군 폭격기사령부(Bomber Command) 사령관이었던 해리스(Arthur Harris) 대장도 마찬가지였는데 해리스는 폭격기부대를 마치 자신의 “영지”와 같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인관계가 원활했던 제 8공군 사령관 둘리틀(James Doolittle) 중장도 제 8공군 예하의 전투기부대를 폭격기 호위 대신 전술작전에 투입하는 것에 대해서는 극도로 반대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 강인하고 굳은 의지를 가진 장군들이 의견 일치를 보인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이들은 협력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인물들이었다.

또한 공군과 육군 지휘관들간의 관계도 원만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정치력이 뛰어난 아이젠하워 조차도 리-맬러리의 성질은 견뎌내질 못 했으며 두 사람이 만나면 아이젠하워는 감정을 자제하지 못 했다. 아이젠하워의 참모장이었던 비델 스미스(Walter Bedell Smith) 중장에 따르면 연합군 지휘관 중에서 몽고메리를 제외하면 아이젠하워의 인내심을 바닥낼 정도로 성격이 더러운 인물은 리-맬러리가 유일했다고 한다.
미국 제 1군사령관 브래들리(Omar Bradley) 장군은 제 9공군 사령관 브레러튼(Lewis Brereton) 소장이나 제 9전술항공군 사령관 퀘사다(Elwood Quesada) 소장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괴팍한 제 21집단군 사령관 몽고메리 원수는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에서 임무를 잘 수행했던 커닝햄이 (자신에게) 비판적이었기 때문에 그를 싫어했다. 실제로, 몽고메리는 프랑스에 상륙한 이후 자신의 사령부 건물을 커닝햄과 같은 곳이 두지 않으려 했다. 이 때문에 브룩(Alan Brook) 원수가 몽고메리를 설득하는 것을 돕기 위해 노르망디로 갈 것을 자청할 정도였다. 결국 몽고메리와 커닝햄이 서로 이웃한 건물에 사령부를 설치한 것은 1944년 9월이 되어서 였지만 전쟁이 끝날 때 까지도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혐오감을 해소하지 못 했다.

그렇기 때문에 각 지휘관들간의 관계는 연합군 공군의 조직력이 평균 이상의 우수한 성과를 보인 원인으로 볼 수 없을 것이다. D-데이가 있기 수 개월 전에 영국측은 미군이 자신들의 전략 폭격기 부대를 영국군의 통제하에 넣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을 알게 됐으며 영국군 내부에서도 해리스는 폭격기 사령부를 전술 공군적 사고방식을 가진 리-맬러리의 휘하에 넣는 것에 반대하고 있었다. 결국 공식적인 명령계통에 반하는 이상한 절충이 이뤄졌다. 리-맬러리는 명목상 원정공군 사령관이었지만 전략 폭격기 부대와 예하 전투기 부대는 (실제로는 해리스와 스파츠가 지휘했지만) 형식상 공군참모총장(Chief of the Air Staff)인 포탈(Charles Portal) 대장의 지휘를 받았다. 1944년 4월 14일(비공식적으로는 이보다 빨랐다)에 오버로드 작전에 투입되는 모든 공군부대는 전구사령관인 아이젠하워의 지휘를 받게 됐다. 그러나 전략공군 부대의 운용은 아이젠하워의 공군 대리인 테더가 담당했으며 실질적인 작전 지휘는 스파츠와 해리스의 담당이었다.; 그리고 전술공군만이 사령관인 리-맬러리의 통제를 받았다. 이런 절충안은 지휘관들간의 분란을 막는데는 어느 정도 기여했지만 명령 계통이 명확하지 않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물론 긍정적인 요소도 존재했다. 고위 지휘관들의 아래 단계에서, 즉 영국과 미국의 전술 지휘관들의 관계는 대개 좋았다. 83 Group 사령관인 브로더스트(Harry Broadhurst) 소장(Air Vice Marshall)은 미국측의 퀘사다와 사이가 좋았으며 퀘사다는 커닝햄과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리고 고위 지휘관들 – 테더, 커닝햄, 브레러튼, 스파츠, 해리스 – 은 항공 작전을 조율하기 위해 거의 매일 회의를 가졌다. 이 회의는 보통 오전 11시에 열렸으며 참석자들은 그 전날 있었던 상황에 대해 토의하고 다음날 작전의 지침을 만들었다. 참석자들은 오버로드 작전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으며 작전의 성공을 위해서는 서로간의 협조가 필요하다는 점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휘관들간의 관계와 항공 전역의 지휘 체계는 연합군이 성공한 원인이라고 보기 어렵다.

Alan Wilt, "The Air Campaign", D-Day 1944, (University Press of Kansas, 1994), pp.135~139

아이젠하워가 주최하는 작전회의에 몽고메리와 리-맬러리의 더블 콤보가 들어가면 볼만했을 듯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