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9월 14일 일요일

장군님의 협상술

지난 7월에 sonnet님과 漁夫님이 공산주의 국가의 협상술에 대한 글을 써 주셨습니다.

How Communists Negotiate - sonnet

지도국 발표 담화 - sonnet

북한식 협상술의 한 예 - 漁夫

이쪽 동네의 상식으로는 황당한 이야기가 많아서 재미있게 읽었는데 최근 남베트남 붕괴 당시 북베트남에 포로가 되어 고생했던 이대용 공사의 회고록에 이와 관련된 흥미로운 이야기가 하나 있더군요.

먼 훗날에 알게 된 일이지만, 1978년 7월 24일부터 인도 뉴델리에 있는 주 인도 베트남 대사관이 소유하고 있는 부속건물인 허름한 독립가옥에서, 한국∙북한∙베트남의 3개국 외교 대표단들이 모여 호치민 시 치화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 한국 외교관들의 석방 문제에 대해 비밀 회담을 하고 있었다.

(중략)

북한측 대표단은 조명일이 수석대표였다. 조명일은 당시 대남비서 김중린 밑에서 사실상 남북대화를 총괄해 온 통일전선부 부부장이었다. 대표로는 노동당 3호 청사 통일전선부의 박영수, 김완수 등이었다.
그들은 나를 압박하여 북한으로 가겠다는 자의 망명서를 받아내는 것과 그대로 석방하여 서울로 보내는 양면시나리오까지 가지고 있었으나, 석방할 때 남한에서 복역중인 남파간첩과 한국 외교관은 교환비율은 뉴델리 3자 회담의 진전을 봐 가며 조절하기로 정하고 있었다. 평양을 출발하기 전에 대남비서 김중린은 이들 대표단을 데리고 당 중앙이며 조직비서인 김정일의 지시를 받기 위해 찾아갔다.

황일호 씨의 증언에 의하면, 이때 김정일은, “남조선에 갇혀 있는 남조선 혁명가(남파간첩)가 현재 얼마나 되느냐?”고 김중린에게 물었다. “400명 될 겁니다만…” 김중린이 대답하자, 김정일은 대뜸, “으음…. 그러면 1명당 150명으로 바꾸자고 그래…”라고 명령했다.
나를 평양으로 데리고 가더라도 나머지 한국 외교관 두 명에 대한 교환비율이 될 수 있고, 또 나를 서울로 보낼 때에는 한국 외교관 세 명에 대한 교환비율이 될 수 있는 수치는 이렇게 김정일의 한 마디에 따라 결정된 셈이다. 너무도 엄청난 편차가 있는 교환비율에 김중린이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자, 김정일은 한마디 덧붙였다.

“왜 그러는가? 많아서 그런가? 회담에 임할 사람들이 그렇게 졸장부 여서야 되겠느냐. 회담이든 뭐든 처음부터 판을 크게 치고 내밀어야지… 그러면 얼마로 하려 했는가?”

김정일의 말은 절대로 오류가 없는 신(神)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김중린 이하 모두가 묵묵부답이었다.

이대용, 『최후의 월남공사 李大鎔은 말한다 – 김정일과의 악연 1809일』, 경학사, 2000, 130~131쪽

물론 이것은 이대용 공사가 직접 목격한 것이 아니라 제 3자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해 들은 이야기 이지만 요즘 북한의 해괴한 협상 행태를 보면 충분히 있음직한 이야기 입니다. 북한이 외교협상에서 황당무계한 발언을 일삼은 것은 하루 이틀이 아닌데 정책의 최고결정권자들이 저렇게 해괴한 발상을 탑재하고 있다면 그 원인은 쉽게 설명이 가능할 수도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