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9월 22일 화요일

높은 분들은 잘 몰라요

1944년 여름의 어느 날,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병기과는 가동불능이 된 독일 전차 두 대를 몬티(몽고메리)가 살펴볼 수 있도록 그의 지휘소로 가져왔다. 한 대는 튀니지의 제벨스(Djebels)에서 아군의 셔먼들을 압도한 것과 같은 형식으로 납작한 형태를 한 63톤의 6호전차 E형 티거였다. 그 옆에는 아군의 대전차포를 효과적으로 막아낼 수 있는 경사진 전면장갑을 가진 50톤급의 5호전차 판터가 있었다. 티거는 무겁고 둥근 포탑에 장포신 88을 탑재하고 있었다. 이 전차의 (포탑 전면은) 장갑의 두께가 7인치에 달했다. 티거는 아프리카에서와 마찬가지로 유럽에서도 연합군이 전장에 투입한 모든 전차를 압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다행스럽게도 티거의 엔진은 겨우 650마력에 불과했으며 이때문에 고장이 잦았다. 사실 티거의 기계적 고장에 따른 손실이 전투에서 연합군이 격파한 것 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그보다는 가벼운 판터, 또는 5호전차는 그 중량에 비해 엔진 출력이 더 좋은 편이었다. 티거는 공포스러운 88을 탑재했는데 판터는 그 대신 장포신에 높은 포구초속을 가진 75mm포를 탑재하고 있었다. 판터는 이러한 무장과 경사진 차체 때문에 아군의 셔먼에 비해 훨씬 우세했다.

셔먼은 원래 75mm포를 탑재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독일전차들의 두터운 전면장갑에는 완전히 무용지물인 무기였다. 셔먼은 독일 전차를 둘러싸고 측면에서 명중탄을 날려야만 격파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군 전차병들은 종종 독일전차를 격파하기 위해서 한대나 두대의 전차와 그 승무원들을 잃게 된다고 불평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독일 전차들을 격파할 수는 있었지만 그 대신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한도 이상으로 더 많은 전차를 잃어야 했다. 병기국은 그 뒤 75mm포를 높은 포구초속을 가진 신형 76mm포로 교체하는 것을 앞당겼다. 그러나 이 신형 전차포 조차 적 전차의 장갑을 관통하지 못하고 튕겨나가는 경우가 더 많았다.

아이젠하워는 신형 76mm포의 성능 부족에 대해 전해듣자 분통을 터뜨렸다.

"자네 말은 우리의 76이 이 판터들을 격파하지 못한다는 뜻인가? 이런, 나는 이 포가 이번 전쟁에서 죽여주는 포가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Why, I thought it was going to be the wonder gun of the war"

나(브래들리)는 이렇게 말했다.

"어. 이게 75보다 낫긴 합니다만 신형 탄두는 훨씬 작습니다. 이 탄두는 독일 전차의 (전면)장갑을 뚫지 못하지요."

아이크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투덜거렸다.

"왜 나는 항상 이런 문제에 대해서 뒤늦게 알게 되는건가? 병기국에서는 나한테 76은 독일놈들이 가진 것은 모조리 잡을 수 있다고 했단 말이야.(Ordnance told me this 76 would take care of anything the German had.) 지금은 자네로 부터 76은 저 빌어먹을 것들을 박살낼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구만."1)

이 일화에서 알 수 있듯 아이젠하워는 일선의 병사들은 이미 잘 알고 있던 사실을 1944년 7월이 넘어서야 알게 됐습니다. 사실 북아프리카에서 티거를 비롯한 독일 전차들에게 호된 신고식을 치른 뒤에도 미군 고위층은 셔먼의 성능 부족이 문제가 아니라 병사들의 실전경험 부족이 문제라고 생각했으며 일부는 1944년이 될 때 까지도 75mm를 탑재한 셔먼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2) 1943년 여름, 몇대의 판터를 노획한 소련이 이 중 한대를 영국에 제공했고 판터에 대한 기술적 분석도 이루어졌지만 미군 정보당국은 판터도 티거와 마찬가지로 독립 부대에서 소규모로 운용될 것으로 예측했다고 합니다. 1943년 말 까지만 하더라도 미군 정보당국은 판터가 기갑사단의 주력 장비가 될 것이라는 예측은 전혀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944년 2월이 되어서야 독일군의 기갑사단 편제가 개편되었으며 판터를 장비한 전차대대가 기갑사단 당 1개 대대는 편제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이젠하워 등 고위 지휘관들은 이 정보에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3) 연합군 고위 지휘관들은 노르망디 상륙 이후에야 판터의 위력을 실감하게 됐습니다만 단시일 내에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이미 늦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1944년 겨울, 아르덴느에서 독일군이 대규모 기갑부대를 동원해 반격을 감행하자 그때 까지 셔먼에 기대를 걸고 있던 지휘관들도 생각을 고쳐먹게 됐다고 합니다. 게다가 전선의 병사들이 미국으로 보내는 편지에 전장에서 경험한 독일 전차의 괴력을 언급했기 때문에 미국 국내에서도 전차의 성능문제는 심각한 문제로 떠오릅니다. 1945년 초 부터 미국 언론들은 군 당국에 전차의 성능문제에 대한 답변을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4) 뉴욕타임즈의 특파원 핸슨 볼드윈(Hanson Baldwin)은 군 고위층이 전차의 성능격차를 왜곡하고 있다며 의회가 나서서 조사할 것을 촉구하기까지 합니다.5)

좀 놀라운 것은 아이젠하워는 일선 전차병들의 경험을 소개한 언론 기사가 쏟아진 이후에도 여전히 독일군과 미군의 전차 성능격차를 심각하게 인식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아이젠하워는 1945년 3월 18일 2기갑사단장 화이트(I. D. White) 준장과 3기갑사단장 로즈(Maurice Rose) 소장에게 이 문제를 조사하도록 지시했습니다. 두 사단장이 병사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보고서로 정리해서 올린 뒤에야 아이젠하워는 전차의 성능격차를 인정하고 육군부에 이 보고서의 내용을 전달하게 됩니다.6) 뭔가 손을 쓰기에는 늦어도 한참 늦은 시점이었습니다.


1) Omar N. Bradley, A Soldier's Story, Henry Holt and Company, 1951, pp.322-323
2) David E. Johnson, Fast Tanks and Heavy Bombers : Innovation in the U.S.Army 1917-1945, Cornell University Press, 1998, p.191
3) Steve Zaloga, Armored Thunderbolt : The U.S. Army Sherman in World War II, Stackpole, 2008, p.97
4) David E. Johnson, ibid., p.194
5) Steve Zaloga, ibid., p.268
6) David E. Johnson, ibid., pp.196-199

※ 이와 관련해서, 채승병님의 'M26 퍼싱 전차의 배치 지연은 누구의 책임인가?'도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아주 재미있습니다.

김명철의 책이 여전히 돌아다니는군요

얼마전 자주 가는 서점에 갔다가 재미있는 책을 발견했습니다. 아시는 분은 다 아시는 희대의 괴서, 조총련계 군사평론가(???)라는 김명철의 『김정일의 통일전략』이었습니다. 어디선가 듣기로는 출간 이후 내용이 문제가 되어 판매 금지를 당했다고 하는데 그 작은 서점에는 한 권도 아니고 무려 세권이나 있더군요. 아실만한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이 책의 내용은 미국이 북한에 굴복하고 한국은 김정일에 의해 통일'당한다'는 것 입니다. 종북저능아들의 단골 메뉴인데 근자에 이글루스에서 비슷한 바보들을 목격했는지라 기묘한 느낌이더군요.

참고로 이 서점에는 역시 괴서인 도서출판615의 쓰레기들도 있습니다. 여전히 팔리는 모양입니다.

2009년 9월 18일 금요일

손님 접대?

10월항쟁의 여파로 경상북도가 어수선하던 1946년 10월 14일, 경찰 고문관으로 있던 태프트(John L. Taft) 중위는 고령군으로 파견된 서울 경찰대의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서 고령면 경찰서를 방문했습니다. 태프트 중위는 서울 경찰대가 '폭도'들을 소탕하기 위해 부근의 해인사로 출동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해인사로 향하게 됩니다. 그런데 해인사에 도착한 태프트 중위는 기묘한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1. 1946년 10월 14일 1500경에 서명자(본인)는 고령면에 도착해 고령면 경찰서에서 서울에서 파견되어 1946년 10월 6일부터 고령에 주둔해 있던 45명의 경찰관들이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점검을 했다. 경찰서장은 본인에게 서울에서 파견된 경찰들은 모두 50명의 폭도를 체포하기 위해서 폭도들이 숨어있다는 제보가 온 해인사(1129-1403)로 출발했다고 말했다. 서명자(본인)가 1630경 해인사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서는 경찰들과 대한독립촉성전국노동총동맹(大韓獨立促成全國勞動總同盟) 지도자라는 지역 유지들이 기생(customary female entertainer)들을 불러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이들은 주변에 폭도가 있다는 이야기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Report on Koryong Gun(1946. 10. 18)', RG 338, Records of United States Army Force in Korea, Lt.Gen John R. Hodge official file, 1944-48, Entry No. 11070, Box 68, 000.1 Binder 1. etc.

이 어처구니 없는 광경을 목격한 태프트 중위는 즉시 다음날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이 사태의 전말을 조사했습니다. 태프트 중위가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a. 1946년 10월 9일을 즈음하여 고령면 경찰서장이 해당 지역 관리들과 만나 서울에서 파견된 경찰들을 대접하고 ‘위문(comfort)’해야 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이때 보리 세 가마가 경찰에 넘겨졌다.

b. 다음날인 10월 10일, 서울에서 파견된 경찰 지휘관은 지역 관리들에게 또 다른 요구를 했다. 면의 유지 60명이 소집되었으며 이 회의에서 서울 경찰들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50,000원이 필요하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회의에서 즉시 30,000원이 모금 되었으며 추가로 17,000원이 금융조합을 통해 대출되었다. 고령면에 10,000원 (모금)이 할당되었으며 (고령)군의 다른 면들에는 각각 5,000원이 할당되었다.

c. 1946년 10월 12일, 서울에서 파견된 경찰 지휘관은 면장을 만나 고령면이나 고령군 차원에서 자신의 부하들을 위해 기생 40명 정도를 불러 잔치를 열어줄 것을 요구했다. 이 잔치는 1946년 10월 14일에 열리기로 되었으며 소요 비용은 15,000원 이었다.

'Report on Koryong Gun(1946. 10. 18)', RG 338, Records of United States Army Force in Korea, Lt.Gen John R. Hodge official file, 1944-48, Entry No. 11070, Box 68, 000.1 Binder 1. etc.

가뜩이나 국립경찰에 대한 평판이 나쁘던 차에 이런 황당한 일이 벌어졌으니 미군정으로써는 그냥 넘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 직후 경상북도 경찰청은 고령 경찰서장을 해임합니다. 그리고 미군정에서는 다시 진상 조사를 위해 대구의 99군정단(Military Government Group)에 특별조사를 명령합니다. 99군정단은 1946년 12월 10일, 리치먼드 소령(Fred C. Richmond)을 고령군에 파견했습니다.

조사단은 특별 조사를 통해 고령 경찰서장에게 전반적인 책임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조사단이 면담한 증인들은 경찰이 '어떠한 압력도 가하지 않았으며' 단지 고령 경찰서장이 나서서 서울 경찰들을 대접하기 위해 모금할 것을 요청했다고 증언했습니다.

그런데 조사단이 면담한 경상북도 경찰청장은 다음과 같은 묘한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고령 경찰서장이 직위에서 해임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서울 파견대를 위한 기부를 받기 위해 행동한 것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는 무능하고 비협조적이기 때문에 해임되었습니다.

'Report of Special Investigation(1946. 12. 26)', RG 338, Records of United States Army Force in Korea, Lt.Gen John R. Hodge official file, 1944-48, Entry No. 11070, Box 68, 000.1 Binder 1. etc.

공식적인 조사는 서울에서 파견된 경찰 지휘관들에게 책임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반값

중앙도서관에 가는 길에 지하철 고속터미널역의 '터미널 21문고'에서 책 두권을 샀습니다.


두 권 모두 50% 할인된 가격에 판매하고 있었습니다. 정가는 각각 2만원, 2만5천원이었는데 할인이 되어 두권을 2만2천원에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횡재했다는 느낌이더군요.

이 외에 '터미널 21문고'에서는 꽤 많은 학술서적들을 50% 할인된 가격에 판매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서울대 출판부에서 나온 책들이 많더군요. 중앙도서관 가시는 분들은 한 번 들러 보십시오. 필요하신 책을 반 값에 구할수 있을지 모릅니다.